사람이 있었네 - 김경수의 새로운 도전
김경수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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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재출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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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나도...

언젠가는. 그 시기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나도 책이란 걸 한 권 낼 거라는 기시감은 항상 있었다. 시기를 모호하게 '언젠가'로 했기 때문에 다급해 할 필요는 없었다. 시간은 늘 충분히 남은 듯했고 또 내고 싶다는 마음이 강렬히 인 적도 없었다. 언젠가 그런 마음이 생기겠지 언젠가는, 그럼 그때 모든 과정이 순조롭게 되지 않을까.

그런데 일이 되려고 그런지 무언가 복선처럼 하나둘 책과 관련하여 나를 환기시켜주는 말들을 지난해부터 들었다. 10여 년 만에 만나게 된 옛 지인은 '그동안 책 한권 나왔어야 되는 거 아니야?' 하며 돌연 질문을 던져 사레가 들 뻔했다. 2~3년에 한 번씩 만나는 수녀님도 무슨 말 끝엔가 딴소리 하지 말고 글이나 써라 해서 일기를 안 쓴 지도 3년이 넘었는데 글이 웬 말이냐며 웃어 넘겼다.

어디 책을 낸다는 것이 보통 일인가. 그때까지만 해도 책을 낸다는 것은 내게 있어 '어마어마한' 태산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큰 애 친구의 아버지인 전직 목사님도 책을 한 권 주며 '00어머님도 책을' 내보라는 게 아닌가.

결정적인 것은 올해 초 이탈리아 여행에서였다. 우연히 스친 다른 팀의 여행자가 나에게 "뭐하는 사람이냐?"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백수'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는데 그 말을 뱉고 나니 왠지 실망시킨 거 같아 미안했다. 그런가 하면 내가 속한 팀의 인솔자 또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말하였다.

"이거, 직업윤리 상 고객님의 사적인 것을 물으면 안 되는데 궁금해서요. 혹시 교사에요?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는데 아닌가요?"

이에 그치지 않고 다음날 폼페이로 가는 기차 안에서 인솔자는 한 번 더 의문을 표했다.

"아니, 그러면 작가예요?"
"점입가경이라더니, 웬 작가?"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서요.~"
"말이 나온 김에 제가 돌아가면 무슨 도술을 부려서라도 작가가 되든 뭐가 되든 되어 보겠습니다."


그렇게 '작가'란 말을 농담인 듯 말했으나 스스로에게 한 나름의 복선이었다. 세세한 과정은 모르겠으나 돌아가면 책을 내리라. 왠지 '언젠가가' 바로 지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심을 하니 실행은 일사천리였다. 먼저 책을 낸 분에게 몇 가지 알토란같은 조언을 얻고 나대로 좀 찾아보다 한 지인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랬더니 지인은 마침 잘됐다며 나에게 딱 맞는 출판사를 소개해주겠다고 하였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다더니 나의 출판이 그랬다. 지난 50년 인생이 오로지 책으로 열매 맺으려고 달려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번갯불에 구워먹을 콩은 <오마이뉴스>에 쓴 내 기사였다.
  

 교정중인 원고
 교정중인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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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내며 배우다
 

나는 결심만 하면 되고 출판은 그저 원고만 가져다주면 출판사에서 다 알아서 해주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책에 대한 전체적 구성과 목차 소제목 등 모든 것을 내가 해야 된다는 것이 아닌가.

전체적 구성과 목차라니. 뭔가 틀을 잡고 계획하고 완벽해야 되는 일들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려지는 나였다. 아마 5년 전이었다면 그게 하기 싫어 출판의 꿈을 도로 집어넣었을 것이다. 그런데 역시 일이 되려고 그런지 못할 것도 없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 한번 해보지 뭐.'

며칠 이리저리 생각하다 문득 떠오르는 직관대로 각 장의 이름을 정하고 그 각 장에 들어갈 글들을 두 배 수로 뽑았다. 그것을 주제별로 며칠 읽고 또 읽으며 넣고 빼기를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추구하고 선택하고자 하는 글들이 결국 내 인생관과 닮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정관념 비틀어 보기', '영화처럼', '일상의 소소함', '책이 주는 행복1', '책이 주는 행복2'라는 다섯 개의 장을 만들었다.

'고정관념 비틀어 보기'에는 말 그대로 고정관념을 비틀어 다르게 생각해 보자는 취지의 글들을 골랐다. 명품? 이태리 장인이 한 뜸 한 뜸? 그런데 꼭 이태리 장인이어야만 하나? 동대문 장인은 어떤가. 동대문 장인 것이라도 소중이 오래 쓰면 그게 명품 아닌가 하는 주장부터 제사 지내지 말고 추모 후원하고, 남자는 넥타이에서 해방시키고 여자는 킬 힐에서 해방되자(?).

뿐인가. 친정엄마와 시모에게는 김장해방을 주고 당사자인 딸과 며느리는 스스로 김장을 하여 이른바 김장독립을 하자고. 이러한 주장들을 선별하며 지금 세상에 던져도 말이 될지 독자들에게 물어보고 싶다는 궁금증이 일었다.

'책이 주는 행복 1'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후회 없는 삶이 될까에 대한 해답이 담긴 책들의 독서 감상을 실었다. 젊은 나이에 연거푸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아버지를 차례로 잃은 명진 스님의 '죽음 보다 더한 스승은 없다'는 삶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다.

'책이 주는 행복2'는 세상이 좀 더 밝아지는데 공감을 줄 수 있는 책들과 개인적으로 매력 있다 생각한 책들을 골랐다. '영화처럼'은 영화를 보게 된 계기가 된 영화와 몇 번 반복해서 보며 이상하게 주인공들에게 정이 갔던 영화들을 뽑았다.

'일상의 소소함'에서는 말 그대로 소소한 행복과 추억들을 실었다. 입국신고서에 쓴 주소 때문에 하마터면 입국을 거부당할 뻔 해 하늘이 노랬던 이야기, 나에게도 나름의 출생의 비밀이 있었는가 하면 결혼을 향한 집념의 스토리도 있었다.

무엇보다 책을 내면서 얻은 과외의 소득은 다름 아닌 교정을 하면서 문장을 보는 안목이 조금은 생겼다는 것이다. 출판사 대표는 일방적으로 고쳐주는 게 아니라 붉은 표시를 해주면서 표시된 부문을 나보고 다 손보라고 했다.

세상에나, 나는 내 문장에 그리 문제가 많은 줄 꿈에도 몰랐다. 문장에 비문은 물론이고 듣기 거북한 입말들과 과한 단어를 왜 그리 많이 사용했는지 '놀랠 노' 자였다. 이러면서도 모국어를 흠모한다 했는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교정을 할 때 마다 문장은 미묘하게 달라졌다. 화장을 한 듯 안한 듯 자연스러운 문장이 되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의 책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교정자의 입장이 되어 오자를 발견하면 이것을 어쩐다? 잠시 고민하며 웃곤 한다.

삶의 절반 마무리를 책으로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막상 세우고 나니 아무것도 아닌데 삶의 절반을 도는 시점에서야 겨우 용기를 내었다. 책을 내기 전에는 막연하게 그저 연못의 물이 넘쳐 흐를 때까지 기다리자 때가 되면 저절로 써지고 까짓 거 한 권이야 내겠지 했다. 그런데 책을 내고 보니 모든 것에는 연습의 과정이 필요하고 어설프고 불완전하더라도 연습을 해야 는다는 것을 알았다.

책을 내지 않았으면 교정이란 걸 배울 수 없었을 것이다. 막연한 자가 검열엔 한계가 있었다. 건축가가 단층짜리 집을 여러 채 지어보고 빌라나 빌딩에 도전할 수 있듯 책 또한 일단 한 권 내봐야 다음을 내다 볼 수 있는 자신감과 안목을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우물이 안 넘쳐도 뭔가 조금은 무겁게 찰랑거린다면 일단 한번 저질러 보시라!

무엇보다 과정이 순조로웠기에 힘든 줄 몰랐다. 교정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오가던 그 길이 무척 즐거웠다. 출판을 결정하고 책이 만들어지던 올 봄의 내 마음은 음악으로 말하자면 쇼팽의 '에올리언 하프(연습곡 25-1번)'와 똑 같았다.

봄날의 햇살도 쇼팽의 피아노도 오로지 나를 위해 존재하는 듯한 자기 도취에 빠졌다. 착각도 유분수이거늘 분수를 몰랐다. 분수를 모르고 음악을 들었고 햇살을 받으며 출판의 과정을 즐겼다.

어쨌든 삶의 절반을 나는 살아냈고 책으로 일단락을 마무리했다는 것에 안도를 느낀다. 이후의 삶은 이전과는 다른 빛깔로 한번 살아보고 싶은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적은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이' 넘어야 할 가장 큰 나의 적임을 상기하며 날마다 용기를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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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파란하늘 하늘이 청명하고 깔끔했다. 천왕봉 가까이서 저런 하늘을 볼수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 지리산 파란하늘 하늘이 청명하고 깔끔했다. 천왕봉 가까이서 저런 하늘을 볼수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세어 보니 이번 지리산 산행은 2009년 친정언니와 간 이후 어언 9년만이었다. 그때는 무박 2일의 여정이었다. 아이들도 어리고 해서 최단 시간 지리산의 절반을 걸어보고 서둘러 돌아오는 것이 가족에게 덜 미안하고 효율적이었다. 또 다소 무리이기는 해도 새벽부터 하루 종일 걷는다는 게 매력 있었다.

새벽 3시에 중산리에서 등산을 시작해 종일 걸어 오후 5시 무렵 거림골로 하산하면 다리는 후들거렸지만 무사히 내려왔다는 안도와 충만감에 기분은 더없이 상쾌했다. 그럴 때면 해마다 봄, 여름, 가을 계절이 바뀔 때 마다 한 번씩 지리산을 올라야지 다짐하지만 도시로 돌아오면 이내 잊어버리고 말았다.

주말마다 산이 몸살을 앓는다는 뉴스라도 보게 되면 안 가는 게 돕는 거라는 변명도 통하니 잊고 살기 딱 좋았다. 그래, 내 집이 제일 좋아, 하면서도 이러다간 앞으로 지리산 열 번도 못 오르고 내 인생 끝나면 어쩌나 생각하면 또 그건 아니지 싶었다. 그런데 이번에 지인에게 추석 안부를 묻다가 지리산 종주라는 말을 듣자 갑자기 내 동공이 팽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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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요? 지리산 종주?"
"네~ 지리산 종주!"


박테리아가 물과 온기를 만나면 바로 활성화되듯이 지리산 종주란 말에 뭔가 내마음속에서 불꽃이 일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1박 2일정도 따라붙으면 많이 방해 될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같이 갈래요?"


그렇게 시작된 지리산행이었다. 이번엔 아이들도 크고 해서 그렇게 급하게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진주에는 몇 해 전 상하이여행에서 알게 된, 산을 나보다 세제곱은 더 좋아하는 한 언니가 살고 있었다. 나는 지리산 갈 때 언제든지 연락하라는 그녀의 말을 잊지 않았고 적금해둔 돈 찾듯 당당하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지리산 함께 갈래요? 아니면 하루 밤 문간방에서 재워줄 수 있나요?"
"둘 다 가능합니데이~"


덕분에 새벽에 갈 것 없이 전날 진주 언니 네서 자고 아침 첫차로 중산리를 가면 되었다. 코스는 자연스레 중산리-법계사-천왕봉-장터목-세석산장으로 정해졌다. 세석산장에서 일박한 다음 날 진주 언니와 나는 거림골로 하산하고 종주 지인은 노고단 쪽으로 산행을 이어가기로 했다.
 
 갈색 이파리와 너머의 흰구름
 갈색 이파리와 너머의 흰구름

           


주중의 지리산은 평화롭기 그지없어
 

지난날 무박 2일의 주말 산행에서는 지리산은 항상 산이 아니라 저자거리처럼 복잡했었다. 사람이 많아서 무섭지 않은 것은 좋았으나 저마다 양손의 등산지팡이로 땅을 치니 그 소음이 고역이었다. 그런데 이번 주중산행은 산을 전세낸 듯 한가로웠다. 적당히 오고 가는 사람들은 오히려 반가웠다.

전날 진주 날씨가 구름이 끼고 저녁 무렵엔 비도 잠깐 비췄기에 필시 천왕봉엔 비바람이 몰아칠 거라 생각했는데 세상에 날도, 날도 그런 날이 없이 좋았다. 법계사에서 천왕봉을 오르는 구간에서는 위아래 모두 탁 트인 풍경은 물론 특히 더할 수 없이 파란 하늘이 인상적이었다.

주변 지리산 산줄기가 굽이굽이 끝없이 뻗어 마을에 닿았고 위로 올려다보면 지리산 풍경의 절반은 파란 하늘이 차지하고 있었다. 맑고 청명한 하늘과 그 하늘에서 뿜어져 나오던 축복 같은 햇살은 시골들판이나 도시공원에서의 그것과는 또 다른, 가히 명작이었다. 그 하늘에 흰 구름이 스칠 때면 그 어우러짐은 그것대로 고왔다.

뿐인가. 바람이 단풍을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우우우, 스삭스삭, 쏴아쏴아 처절한 몸부림은 그 자체로 한편의 웅장한 음악이었다. 정말 이 산의 주연은 자연이고 인간은 조연도 못 되는 지나가는 1,2,3에 불과했다. 지리산 온 천지에 넘치는 것은 쏟아지는 햇살, 끝없는 하늘과 흰 구름, 온갖 나무와 풀과 이끼, 어딘가에 있을 짐승과 새들이었다.

우리 인간 등산객의 수는 극히 미미했다. 그래도 행복했다. 지나가는 1,2,3으로 그날 그 시간에 출연할 수 있어서 좋았다. 당일치기가 아니고 산장에서 하루를 묵기로 예약을 하고 가서 그런지 몸도 마음도 시간도 여유가 있었다.

천왕봉 오를 때는 늘 힘들었는데 이번엔 쉬엄쉬엄 충분히 쉬어가며 걸었더니 별로 힘들지 않았다. 비바람 몰아치는 천왕봉에서 혹시 얼음이라도 되면 어쩌나 걱정한 나머지 배낭 빵빵하게 여벌의 옷을 가져간 것도 무색했다(물론 한시가 다른 게 산정의 날씨이니 막상 쓸모없더라도 준비는 꼼꼼히 해둬야).

지리 '산장종주' 어떨까
 

지리산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 좋다. 그 넓고 깊고 푸르고 때로는 세찬 비바람도, 한없는 침묵 같은 육중함도 좋다. 평소 초면의 사람들과 얘기할 때 지리산을 오르고 지리산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반은 통한 듯 느껴졌다.
  
올해, 1주에 한권 1년 52권의 책을 읽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여전히 잘 실행하고 있다는 친구와 지리산 다녀온 후 통화하였다. 친구는 나의 지리산행을 무척 부러워하며 지리산 오름이야말로 '해보고 죽자' 목록에 꼭 올리고 싶은 주제인데 엄두가 안 난다고 하였다.

그러나 엄두를 내어도 되는 것이 400미터 정도 고지의 동네 뒷산 오를 정도만 되면 지리산도 문제없다고 본다. 산 잘 타는 사람은 하루 만에 종주하면 되고 관절 자신 없는 사람은 형편에 맞게 4~6일 천천히 걸으면 못할 것도 없다.

오히려 등산에 단련되지 않은 덕에 천천히 산장마다 확인 도장을 찍으며 머물러 보는 것도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유유자적 산장을 휩쓸다보면 이 산장은 이런 느낌, 저 산장은 저런 느낌 각 산장이 주는 매력을 골고루 체험해보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속세의 일은 일주일 해외여행 갈 때처럼 마무리 해놓고 지리산으로 일주일 떠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문득 산장투어를 말하고 나니 나야말로 언젠가는 치밭목에서 노고단까지 갔다가 다시 치밭목으로 돌아오는 지리산도 지리산장도 왕복종주를 한번 해보고 싶다.
      
 사람도 지는 순간이 저렇게 아름다울수 있다면

 사람도 지는 순간이 저렇게 아름다울수 있다면

 

   

 세석으로 가는길, 눈부신 햇살과 평화로운 능선
 세석으로 가는길, 눈부신 햇살과 평화로운 능선

           

       
 천왕봉 정상에서 치밭목 쪽을 바라보며

 천왕봉 정상에서 치밭목 쪽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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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들다 - 불교와 정신분석으로 읽은 신화와 동화
김권태 지음 / 서쪽나무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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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가면서 좋은 점은 어느 정도 감정통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나의 20대는 펼쳐질 앞날에 대한 불안과 희망 혹은 욕심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늘 해매고 방황하며 우울한 표정을 달고 살았다.

그런 20대를 보내다 30대가 되니 20대보다는 살 만했고 사십이 되니 삼십대보다 훨씬 홀가분하고 마음이 안정되었다. 이대로만 간다면 50, 60대가 되더라도 내 마음은 점점 더 가벼워지고 여유로워져 어느 순간 부처님 미소 비슷한 것이라도 흉내 낼 줄 알았다.

지금, 그 고대하던 50대를 살고 있다. 더 이상 두려울 것이 뭐 있나. 뻔히 보이는 지는 해 같은 삶의 후반부를 향해 낭창하게 걸어가면 되는 것이 아닌가했다. 그런데 50대에도 여전히 뭔가 어려운 숙제들이 대기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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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대는 지는 해의 여정이 너무 길다. 쉰의 초입에 들어선 내 생각 심지어 외관마저 도무지 내가 예전에 엄마에게서 보았던 혹은 10년 전 쉰의 여성들에서 보았던 그런 모습이 아니다.

생로병사 네 개의 순서가 저마다 적당한 길이로 끝나는 게 아니라 생로(...)병(...)사로 끝나기 쉬운 시대이다. 일찍이 졸업한 줄 알았던 막막함과 고통, 고독, 우울, 지루함 같은 감정들을 다시 마주하기 싫어도 맞을 수밖에 없는 앞날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시금 마음공부를 해야 하는 것인가. 욕심을 비운다고만 되는 게 아니라 건강한 몸을 위한 노력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내 타고난 마음의 심연도 들여다봐야 하는 것일까.

인간 감정의 다섯 빛깔이란?
 
 마음에 들다 - 불교와 정신분석으로 읽은 신화와 동화
 마음에 들다 - 불교와 정신분석으로 읽은 신화와 동화
ⓒ 서쪽나무

           

<마음에 들다>(김권태, 서쪽나무)를 읽었다. 우리가 느끼는 이 행복도 불행도 결국 다 감정 때문이 아닌가. 감정이 담긴 마음 때문이 아닌가. 저자는 감정을 크게 '분노, 기쁨, 근심, 슬픔, 공포(怒노 喜희 憂우 悲비 恐공)'의 다섯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러한 감정이 일어날 때의 그 미묘한 상태의 설명이 마음에(감정에) 와 닿았다.
 
즉 '분노'는 자신이 소화하지 못하는 것을 욕처럼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고, 혹은 밀어낼 때 느껴지는 것이다. '기쁨'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원하는 방향으로 잡아당기는 것이고, 혹은 원하는 것을 이루었을 때 느껴지는 것이다. '근심'은 소화하지 못한 것을 소화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되새기며 음미하는 것이고, 혹은 반복적으로 되새길 때 느껴지는 것이다. '슬픔'은 소화하기 어려운 것을 수용하기 위해 고통을 견디며 그것을 말랑말랑하게 삭혀내는 것이고, 혹은 삭혀낼 때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공포'는 압도적 자극에 대한 자동반응으로 그 대상으로부터 도망가고자 하는 것이고, 혹은 그 압도적 자극에 대해 느껴지는 것이다. - 본문 20쪽
 
 
감정이야말로 유리보다 더 깨지기 쉬운 것인데 우리는 자신은 물론 타인의 감정에 또 얼마나 무심한가. 한 마음에 다 가지고 있기 너무도 불편한 이 다양한 빛깔의 감정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많은 신화도 동화도 필요 없고 그 많은 종교도 철학도 심리분석도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어쩌자고 이런 섬세한 영물이 되어 무심한 자연과 달리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일까.

이 책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신화(나르키소스, 오이티푸스, 에로스와 프시케)와 동화(신데렐라, 잭과 콩 나무, 백설 공주)에서 인간심리의 근원을 읽어낸다. 불교철학과 서양 정신분석의 접목을 통해 신화와 동화가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과 한계와 희비에 대한 상징과 은유임을 밝혀준다. 오늘날에 비추면 신화는 황당하고 동화는 후지거나 한가하고 빤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자라나는 과정 속에서 한번은 그 얘기들에서 재미와 위로를 얻는다.

동화의 주인공들은 어려움에 처한 현실을 인내하고 극복해가는 과정 속에서 성숙한 인간으로 발전한다. 신화의 주인공들은 이미 성숙해진 우리의 이성으로는 인정하기 싫은 인간의 심층 내지 욕망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며 우리 존재의 불안한 출발점을 짚어준다.

무의식 그 아름다운 신비 혹은 잉태?
 
무의식은 정신의 내용물이자 그 내용물을 담고 있는 정신자체다. 무의식은 의식되지 않는 자동적 사고이며, 또 기억되지 않는 경험흔적이다. 생존을 위해 생득적으로 프로그래밍 된 본능이며, 이유를 알 수 없는 충동과 감정을 불러오는 파편적 에너지다. 또 무의식은 위와 같은 분열되고 억압된 무의식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온갖 생명들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의 흔적들이 각인돼 내려오는 유전 정보이자 선험적인 경험기록이다. 불교에서는 생의 모든 경험흔적들을 '종자식'이라고 하는데, 이때 '언어-사고-자아'에 포착되지 않은 종자식은 무의식으로 바꿔 부를 만하다.

......'본능'은 타고난 유전정보를 포함한 선험적인 경험으로서 강렬한 현재 속에서 의지를 주관한다고 할 수 있다. '감정'은 씨앗 같은 본능이 대상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발현된 것으로 발달하는 신체능력과 이에 따른 신체이미지와 함께 감각, 느낌, 정서적 경험이 정신의 육체를 형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언어이전, 사고이전, 자아이전은 의식의 경계 밖에서 나를 구성하는 거대한 무의식의 세계이자 무의식과 접속할 수 있는 방법이며, 이 무의식 세계는 개인과 인류 전체를 포함한 영원의 기억 , 영원의 신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본문 112~ 113쪽

 
 
가끔 내 무의식의 저편에는 무엇이 있을까 궁금하다. 그 시원의 덩어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만 있다면 다 들어주고 싶다. 그 무의식이 원하는 것을 건드려주고 실현시켜주어야 현실의 내가 보다 안정되고 성숙해지는 것일까.

한편으로는 궁금하지만 모르고 싶기도 하다. 그냥 모르쇠 덮어두고 싶다. 그러나 덮어둔다고 문제가 안 생기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화들짝 놀라거나 고통스러워하지 않기 위해서 알 수는 없더라도 무의식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살아야할까.

평소 주(註)가 달린 책은 멀리하고 싶고 주가 많으면 건너뛰기 십상이었는데 이 책의 주는 본문과는 또 다른 빛깔로 명쾌한 여운을 주었다. 12연기법과 유식불교에 대한 적절한 비유를 곁들인 찬찬한 설명은 서너 번 곱씹어 읽게 만들었고 어떤 향기마저 느껴졌다.
 
불교는 "이 모든 것이 마음의 일(一切有心造일체유심조)"이라고 말한다. 기억할 수 없는 경험조차 우리마음에 '씨앗(種子종자,業力업력)'으로 고스란히 저장되고, 또 이 씨앗은 인연 따라 그만한 크기의 싹을 틔우며 자란다고 말한다. 씨앗에서 한 현상이 펼쳐지고(種子生現行종자생현행), 현상의 결과물은 다시 씨앗으로 저장된다(現行熏種子현행훈종자). 또 씨앗은 다시 다른 씨앗을 낳고(種子生種子종자생종자),그렇게 마음이 마음을 머금고 또 마음이 마음을 낳는다. - 본문 89쪽 주(註)
 

결국 모든 것은 마음인가. 이 가을 내 마음의 행로를 조용히 지켜보는 습관을 들여 봐야겠다. 수시로 일어나고 꺼지는 편린들속에서 내가 무엇을 심고 또 갈구하는지 놓치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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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들다 - 불교와 정신분석으로 읽은 신화와 동화
김권태 지음 / 서쪽나무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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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불교에서는 우리가 경험한 모든것들이 표상화되어
식물의 씨앗처럼 잠재력으로 남는다고 말한다. 특히 언어와 관련된 잠재력을 ' 명언종자'라고 말하며, 이것이 마음의 모든작용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내 명언종자는 무엇에 의미를 둘까. 내말은 곧 내삶의 빛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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