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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어록 - 명상에세이
신비 지음 / 생각하는사람들 / 2004년 12월
평점 :
품절
계절은 어느새 봄을 향해 달리고 있다. 바야흐로 나의 봄에 대한 상사병이 발병할 시점이 된 것이다. 네 계절 중 봄을 좋아하면 늙어가고 있는 증거라고 하던데 나는 예전부터 봄이 좋았다.
버스를 타고 오가며 신록을 감상하는 재미, 버스 안에서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재미에 일부러 학교와 멀리 떨어진데 방을 얻어놓고 살았다.
그리고, 해마다 봄이 되면 늘 움트는 새싹들과 그 새싹들이 부풀어 가는 과정을 보면서, 달콤하기 그지없는 봄바람의 물결 속에서 물(物)과 나(我)의 일체一體)를 느꼈다. 그러면서 가슴속에서는 늘 ‘이 뭣고?’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청경채 김치를 들어보셨나요?’라는 기사의 제목에서 청경채, 청경채가 뭐지 하는 호기심에 끌려 박미란 기자의 글을 처음 접했다. 글을 읽고 보니 청경채는 쌈 밥집에 가면 흔히 있는 쌈 배추라고 마음대로 이름 지어 부르던 작은 배추 같은 채소를 말함이었다.
엄마와 함께 청경채로 김치 담근 이야기와 이전기사 몇 개를 읽으면서 박미란 기자는 푸른 자연을 참 좋아하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청경채는 물론이고 청경채가 자라던 텃밭의 다른 채소, 상추 쑥갓 등 그 풋풋한 자연의 빛깔, 향기에 취한 기자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나 또한 초록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기에 늘 그의 기사를 고대했는데 어쩐 일인지 그는 ‘청경채.....’를 끝으로 ‘잠수’하였다. 그러한 것을 우연한 기회에 그가 책을 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비어록? 기사가 참 ‘명상스럽다’ 생각하였는데 그는 알고 보니 명상가였다.
(‘청경채...’와 일련의 기사를 읽을 당시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오늘 다시 보니 그가 기사 끝 자기 소개란에 명상에세이를 쓴다고 한 것이 보였다.)
‘바람이 서늘하게 부는 날, 바닷가 모래사장에 앉아 두 눈을 감아 본 적이 있는가. 슬며시 귓가로 다가와 머리칼 사이를 돌아다니며 휘파람을 부는, 그 바람을 느껴 본 적이 있는가. 그때 나를 향해 미소 짓고 장난을 쳐오는, 그 바람과 함께 뒹굴어 본 적이 있는가.’
‘그게 아니라면 땀 흘리며 올라간 산의 정상에서 오묘한 흰 구름을 내려다 본 일이 있는가. 아니면 잠 못 이루던 밤에, 아득히 멀리서 밝아오는 짙푸른 여명의 빛을 본 일이 있는가. 또한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의 별들을 하릴없이 바라본 일이 있는가.’
‘그것은 다른 세계이다! 그 신비로움과 아스라한 향취는 이 세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저 너머>의 황홀경이다. 무아경이고 신비경이다. 가득 찬 자아를 가지고서는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저 너머의 세계>인 것이다.’그러면 내가 해마다 봄이 되면 느끼는 봄풀과 바람, 나무의 새싹에서 느끼는 벅찬 황홀경은 명상까지는 못가도 준명상 준준명상은 된다는 말인가.
내가 그에게서 또 하나의 일치를 느낀 것은 햇살에 대한 감읍이다.
‘햇살이 눈부신 날에는 가슴이 울렁거려 나도 어쩔 수가 없다 그 눈부신 햇살이 마치 크리스털 가구인양 나뭇잎사이로 쏟아지기라도 하면 나도 내 자신을 제어하기가 힘이 든다. 즐거워서 절로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머리카락이며 어깨에 쏟아지는 햇살은 향기롭다 못해 달콤하기까지 하다. 그럴 때는 코끝이 시큰하도록 살아있음을 느낀다. 이렇듯 숨쉬고 있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절감한다.’햇살이 그냥 눈부신 게 아니고 미치도록 눈부실 때는 한점 바람도 ‘감히’ 살랑이지 못하는데 나는 그런 바람 한 점 없이 퍼붓는 햇살의 순간에 가장 살아있음과, 그리고 생명의 숨결을 느낀다. 그런데 그것이 나만이 아니었고 나처럼 미치는 또 한사람을 확인 할 수 있었다니.
<신비어록>은 박미란 기자가 그의 블로그 ‘신비어록’에 남긴 명상의 글들은 책으로 묶은 것이다.
몇 년 전 21세기가 첫 포문을 열었을 때 사람들은 21세기는 ‘명상의 시대’라는 말들을 많이 하였다. 정말이지 이 시대는 명상이 필요한 시대이다. 필요하지만 하고 싶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명상을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명상은 하고 싶으나 그것이 너무 막연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은 우선 박미란 기자의 <신비어록>을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매일 밤 자기 전에 혹은 삶의 어느 순간 순간에 고요히 눈을 감고 우주 속 먼지가 되어보자. 바다 속 심해로 ‘꺼져’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