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맹 - 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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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화란 목적으로 행해졌던 사건들은 자국민들을 문맹으로 만들어 놓았다. 낯선 곳에 도착한 사람들은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이질적인 존재로서 톱니바퀴 사이에 끼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작가는 그 속에서 모든 것을 경험해왔고 모든 것을 느껴왔다. 그녀는 외부적으로 이질적인 문맹이었지만 그녀가 간직하고 있던 삶은 이미 하나의 역사였다. 비단 이 소설의 작가만이 다가 아니다. 그 공간 안에서 문맹이었던 그들은 저마다 역사의 기록점에서 서사를 써내려 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쓸 줄도 모르고 읽을 줄도 몰랐지만 그 자체로서 문명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부정당하는 정체성을 부여잡고 사막 속에서 감성에 젖은 단비를 내리는 것 마냥 꿋꿋이 견뎌 인간의 욕심을 고발하는 증인으로서 남아있다.

p 69
우리는 아이들을 포함해 열 명 남짓의 사람들로 구성된 무리다. 나의 어린 딸은 아이 아빠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고 나는 두 개의 가방을 들고 있다. 둘 중 한 가방에는 젖병과 기저귀, 아기에게 갈아입힐 옷이 있고 다른 가방에는 사전들이 들어 있다.

p 111
‘나는 쓸 줄도 모르고 읽을 줄도 몰라요. 전 문맹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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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관하여 - 비로소 가능한 그 모든 시작들
정여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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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이라는 나이는 청년 기간 동안 응축시켜 놓았던 우리의 지혜가 비로소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삶의 풍요가 시작될 때 우리는 그 순간을 아름답게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을까?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며 그 변화에 쉽사리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서투르고 어리숙한 젊음을 즐기며 다가올 불혹을 찬란하게 맞이하자.

p 24
그래, 중년은 노년의 앞 페이지에 살짝 끼워진 부록이 아니다. 어쩌면 가장 지혜롭게 삶을 바꿀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중년이다. 청년처럼 다급하지 않게, 노년처럼 마음과 몸의 거리가 너무 많이 멀어지지 않게. 결코 내려가는 일만 남은 것이 아니다.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젊은 시절과는 달리, 이제 어떤 조직에 속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나 자신이 되기 위해 새롭게 자신을 단련할 수 있는 첫 번째 기회가 열리는 시기다.

p 50
불행하다는 감정의 원인을 제공할 만한 자극도 도처에 널려있지만, 행복하다는 감정의 원인을 제공할 만한 자극도 도처에 널려있다. 문제는 행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나 자신, 행복 앞에서 오히려 뒷걸음질 치는 우리 자신의 망설임이었다. 비에 젖은 나뭇잎들의 조용한 합창을 듣는 것만으로도 천상의 행복을 느낄 줄 아는 나 자신, 그것이야말로 내가 더 늦기 전에 반드시 붙들어야 할 ‘최고의 나‘였다.

p 68
마흔을 넘어서며 내게 쏟아진 축복 중 하나는 바로 이것이었다. 내 생각을 말하기 위해 그 어떤 권위의 힘도 빌리지 않기. 칭찬받지 않아도 좋으니, 그냥 내 의견을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로 만족하기. 더 멋지고 대단한 문장을 만들기 위해 타인의 말을 인용하지 않기. 그렇게 할 수 있는 용기를 준 것이 내 나이 마흔의 힘이었다. 그 용기가 아직 부족한 것이 많이 부끄럽긴 하지만, 이제부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려 한다.

p 160
1. 당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2. 당신이 다른 사람들처럼 선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3. 당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4. 당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다고 확신하지 마라.
5. 당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 마라.
6. 당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7. 당신이 뭔가를 잘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8. 다른 사람들을 비웃지 마라.
9. 누구든 당신한테 관심을 갖는다고 생각하지 마라.
10.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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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삼킨 예술 - 이성과 감성을 동시에 깨우는 예술 강의실
한상연 지음 / 동녘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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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시선을 갖추게 하기 위해 따스한 마음으로 철학과 예술의 세계의 포문을 열어 젖힌다. 그러나 저자의 쉽게 쓰지 않으려는 섬세함은 자칫 배려 없는 개론이라는 모순된 형태에 둘러싸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의도는 좋아도 표현의 방식이 전체를 갉아먹은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개인 수준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지루한 학술적 문체 덕분에 책은 다시 책장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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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 시공아트 18
수지 개블릭 지음, 천수원 옮김 / 시공아트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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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의 화가. 미술하는 철학자. 르네 마그리트.

한 눈에 보면 알 수 없을 만큼 알쏭달쏭한 이미지들의 조합으로 인해 감상자들의 적극적인 개입을 유도하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어떠한 생각으로 이런 그림들이 탄생하게 되었는지 마그리트의 일대기를 돌아보며 연출 방식에 맞춰서 분류되어있다. 독특한 그림을 그렸지만 그림과는 대조적으로 평범한 삶을 추구했던 그. 그의 생각들을 엿보면서 예술 철학의 세계에 조금은 가까워 질 수 있을 것이다.

p 13
회화 ‘자체‘가 의미이다. 그의 이미지의 의미를 밝힐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사고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떠한 상징적 의미가 전제되지 않았을 때 묘사된 것을 단지 ‘자세히‘ 관찰함으로써 이미지의 의미를 밝혀 낼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

p 69
현실주의의 주된 기능 중 하나가 일부 사람들이 지닌 ‘신기함에 대한 적대감‘을 과감하게 다루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초현실주의가 실제로 발견한 것은 미술가가 오로지 외부 세계에서만 모델을 발견한다는 가설을 뒤엎어 버리는 태도였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자연을 솜씨 좋게 묘사하는 것은 ‘쓸데없는 수고‘이자 ‘주제넘는 오락‘이며 진정한 예술의 기능이 전혀 아니라는 헤겔의 개념을 충분히 받아들였다. 헤겔은 인간에게 있어서 현실이란 인식과 관념의 매개체를 통과해야만 한다는 관점을 내세웠는데 이 관점만이 미술 작품을 ‘세상을 바라보는 가장 보편적인 직관‘과 관련시키면서 미술 작품에 영속성을 부여한다.

p 73
미술은 인과 관계보다 자연에 더 진실한 존재인 부조리와 예측 불가능성을 찬양하였고 이성보다 정신의 진정한 실체인 비합리성을 찬양하였다. 팝 아티스트들과 달리 초현실주의자들은 내적인 세계와 외적인 세계 간의 경계,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탐구하는 것을 선호하였고 평범하고 관습적인 것을 근본적으로 믿지 않았다.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 하나의 사물과 다른 사물 간에 발생하는 임의적이고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연관 관계‘를 체계적으로 추구하였고 이것은 상식상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p 104
즉 그는 ‘철학적인 방법에 의존하지 않고 사물들의 대응 관계나 유사성, 친밀하고 비밀스러운 연관 관계를 한눈에 인식하는 것은 거의 신적인 능력‘이라고 말한 바 있다. ... 그의 방법은 익숙한 오브제에 대하여 정답이 발견될 때까지 일련의 사색적인 드로잉을 통하여 철저히 가설을 세워 보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거의 모든 작품의 근본 원칙은, 반대되는 것들의 결합이 현실의 주요 동기로 작용하는 헤겔의 변증법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p 113
역설에 근거를 둔 변증법적인 과정을 설명해 주는 그의 이미지들은 고정되어 잇지 않고 정의도 불가능한 우주의 본질에 해당한다. 정과 반은 모순을 포함하고 모든 경험의 기반이 역설을 활발하게 제시하는 합을 산출하는 쪽으로 선택된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근본적인 역동성은 모든 가능성과 잠재성을 지닌 자유로운 분야를 탐구하는 데 근거하며, 이러한 분야는 통상 ‘정상적‘인 상황으로 여겨지는 영역의 밖에 놓여 있는 것이다. 가능성이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려진 순간에 주변 환경이 가능성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가능성이 현실로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p 141
문장의 의미는 무엇을 언급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용되는 방식에 달려 있다. ... 사실 모든 것은 다른 어떤 것을 대신할 수 있기 때문에 재현은 유사성과는 완전히 무관하다. 모든 오브제는 어떠한 이름으로도 불려질 수 있다.

p 151
비트겐슈타인은 ‘한 단어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예측할 수 없다. 그 단어에서 배우기 위해서는 용도를 바라보아야만 한다. 그러나 어려운 것은 바라보는 방식에 존재하는 편견을 제거하는 것이다.‘라고 기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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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2 (20주년 기념판) - 마그리트와 함께 탐험하는 아름다움의 세계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2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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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이 제창한 '언어게임' 이론과 모든 텍스트는 사회집단 속에서 그 의미를 달리한다는 구조주의의 형식. 그리고 예술 작품으로부터 보여지는 객관적 텍스트가 수용자 내부의 세계에서 자신에 맞게 해석된다는 이야기. 어떻게 보면 언어와 그림, 그외 모든 예술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들은 다 같은 맥락에 이어지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전부 우리의 외부로부터 형성된 우리의 내면 속 세계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내면으로부터 또 다른 예술이 형성되고, 그 굴레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어지는지도 모르는채 무한히 반복한다. 에셔와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이토록 정과 반의 내용들이 지속적으로 대립되다가 마지막 챕터에서 해겔의 휴일을 이용하여 마무리짓는 작가의 센스에 책 자체가 무척 완성도가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것이 텍스트를 수정하고 싶다해도 내용의 짜임새가 상당히 밀도있어 하나를 수정하면 전체를 수정해야 된다고 하더라.. 대중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미학의 세계로 발을 진전시키기 위한 입문도서로 아주 만족스러웠다. 

p 69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지각의 주체는 ‘사유‘가 아니라 혼탁한 ‘신체‘다. 따라서 지각이 데카르트의 ‘사유‘처럼 맑고 투명할 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투명한 지각이야말로 모든 지식의 근원이다. 유리처럼 투명한 논리적 사유, 의기양양한 과학의 세계도 사실은 이 근원적인 지각 위에 세워진 가건물일 뿐이다. 근원적인 것은 데카르트식의 명석판명한 ‘사유‘가 아니다. 근원적인 것은 오히려 불투명한 인식 주체인 ‘지각하는 신체‘다.

p 79
예술은 상상력을 이용한 ‘직관적‘ 인식이다. 그건 지성을 이용한 ‘논리적‘ 인식과 구별된다. 어떻게? 논리적 인식(학문)은 보편자를 인식하지만, 직관적 인식(예술)은 개별자를 인식한다. 논리적 인식이 ‘개념‘을 생산한다면, 직관적 인식은 개개 사물의 ‘이미지‘를 산출한다.
하지만 ‘직관‘이 도대체 뭔가? ‘지각‘? 아니다. 지각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을 파악하는 걸 말한다. 가령 책을 지각했다는 건, 곧 눈 앞에 책이 있다는 걸 안 거다. 그러므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는 지각될 수 없다. 하지만 직관에선 실제와 허구가 구별되지 않는다.

p 82
표현은 머리속에서 완성되며, 머리속에 그려지는 이 그림(표현)이야말로 어떤 외적인 찌꺼기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예술 작품이다. 그리고 이게 바로 아름다움이다. 미가 다로 있는 게 아니다. 직관은 표현이며, 표현은 예술이며, 예술은 아름다움이다.

p 111
예술 작품은 한갓 사물이다. 고흐의 그림은 한 조각의 아마포에 화학 물질(물감)을 발라놓은 거다. 그럼에도 이 물질 덩어리는 다른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작품은 알레고리, 즉 비유다. 작품은 사물적인 것을 넘어서 다른 어떤 것을 표현하고, 다른 세계를 열어준다. 고흐의 <구두>는 농부의 삶의 세계를 열어주지 않았던가. 이처럼 예술 작품이 표현하는 의미 내용 혹은 작품이 열어주는 세계, 이게 바로 ‘세계‘다. 그리고 ‘대지‘란 대강 작품의 밑바탕이 되는 소재와 질료를 말한다. 결국 세계와 대지의 투쟁이란 작품이 열어주는 세계와 작품의 질료 사이에 팽팽한 대립이 벌어진다는 얘기다.

p 164
작품은 더 잘 이해되어야 할 ‘객관적‘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의미의 이해란 곧 독자가 작품을 자신에게, 말하자면 그의 현재와 미래에 관련시키는 거다. 따라서 그건 매번 ‘다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작품의 의미는 시대마다 독자와의 대화를 통해 새롭게 탄생한다. 예술 작품은 완제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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