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상실은 드라마처럼 드라마틱하게 진행되진 않는 것 같다.  


 가벼운 치매증상이라는 진단을 수년 전에 듣긴 했지만 별탈없이 지내오셨던 엄마는 수술을 받으신 후로 우리를 종종 당황스럽게 한다. '아차! 깜빡 잊었다'라고 말하던 시절의 엄마가 그리울 지경이다. 우리가 놀라서 바로 잡아주거나 상기시키면 엄마는 '아이구..내가 정신 차려야지!'하며 화들짝 놀란다. '엄마, 원래 전신마취하면 아이큐가 10씩 팍팍 떨어진대~내가 애 둘 제왕절개수술해서 낳느라 그 좋던 머리 다 나빠진거잖아~헤헤헤'하며 엄마를 위로한답시고 나는 싱거운 소리를 해쌌는다. 

 

 남편 차를 손 좀 봐야해서 정비공장에 따라 갔다.
정비공장 사장 부인이 나를 보더니 한달음에 달려오며 반가워하는거다.
이 공장과 거래 튼지 7~8년 동안 우리가 얼굴 본 건 고작 한 두 번인데(그래서 솔직히 나는 그녀의 얼굴도 제대로 기억 못 하는데)분에 겨운 환대를 받는 것 같아 살짝 머쓱했다.

-기억력 좋으신가봐요. 저를 기억해주시다니.. 

-어머, 제가 사모님을 어떻게 잊겠어요!

돌아온 대답이 사뭇 사연있게 들리는 거다. 말귀 못 알아듣는 내 표정을 알아채곤 얼른 부연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 우리 첫 애 낳았을 때, 장미꽃 보내주셨잖아요!
  저 그때 완전 감동 받았잖아요~ 

 

내 차에 남편을 태우고 정비공장을 빠져 나오자마자 득달같이 남편에게 물었다. 

-있지..저기 사장 마누라가 그러는데...
  그 집 애 낳을 때 '내'가 꽃다발을 보내줬었대. 빨간 장미꽃으로.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랑 착각하는 것 같아 민망할까봐 어물쩡 넘어가긴 했는데...
  혹시, 그 말..맞아? 내가 그 집에 꽃 보내준 거 맞아?  

-웅, 그때 그랬잖아. 

-내가? 

-응. 

-꽃을? 내가 왜? 그 사람과 친하지도 않는 내가 뭣 때문에?
  우..우리가 그렇게 친했나! 

-아, 이 사람 왜 이래? 기억 안 나? 
  꽃집에 같이 간 것도 또렷이 기억나는구만....
  꽃다발 포장할 때 마지막에 반짝반짝 뿌리는 약, 그거 뿌리지 말라고 그랬었잖아? 

   

이쯤이면, '아하!' 하며 기억도 날 법한데 나는 남의 이야기같이 들렸다.
내가 할 수있는 거라면 오로지 '내가 그랬단 말이지? 허을' '헐!'만 연발할 따름이었다.  

근래 이런 류의 내 기억력 때문에 실수를 두 번이나 했다. 이래갖고서야 내가 나를 믿을 수 있겠나?그 두 번의 실수-나는 여태까지 내 잘못이 아니라고 벅벅 우기고 있던 중이었다. 상대방은 분명히 나한테 말 했다고 하고 나는 전혀 들은 적 없다고, 내가 듣기라도 들었다면 뒤늦게라도 생각나야 하는데 전혀 금시초문이라고,그러니까 나한테 말하지 않은게 분명하다고 우기고 있었는데-이게 한번도 아니고 두번씩이나.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밝혀진 것만 두 번이지, 내 기억력에서 완전히 사라저 없어진 것이 더 많을런지도 모른다. 

 

나 치매 검사 같은 거 해봐야 하는 거 아냐?
어째 남의 이야기같이 전혀 기억도 안 날 수가 있냐? 에휴..... 

하며 친구한테 털어놓으니까, 친구는  

"네가 요즈음 너무 힘들어서 그런가봐. 요 근래에 얼마나 큰일들을 겪었니?
  수용할 용량을 넘겨버려서 뇌가 버리는 것도 있나봐...쯧쯧..."
 

뇌가 버리는 것.
친구 말처럼 다 넣어 둘 공간이 없어서 기억 몇 가지 지울 수도 있을까. 그렇다면, 버려진 그 기억의 예쁜 편린일랑은 오늘처럼 조우하게 된다면 좋겠다. 기억에 없는 어느 순간의 나 때문에 누군가가 행복해했다는 말을 들을 때 나 스스로 얼마나 기특하였던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마흔 다섯번째 생일을 맞이한, 아직은 한참 쌩쌩한 마흔 다섯이지 절대 일흔에 접어든 할머니의 일기가 아니란 걸 밝히며 쓰는 바이다ㅋㅋ20110614ㅎㅂㅊㅁ 

덧)  생일이었어요. 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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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1-06-14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 진주님 어제 생일을 이제야 ㅎㅎㅎ
아무튼 마흔다섯번재 생일 축하축하 드려요^^
저도 그럼 아이큐 20 + 20 떨어졌겠어요. 아흑 그런 지금 제 아이큐는 완전 ㅠ
홀로 되신 어머니 곁에 진주님이 늘 있어드려야 겠어요.

진주 2011-06-18 09:47   좋아요 0 | URL
ㅋㅋ 알고보면 아줌마들도 예전에 머리가 무지 좋았다는~ㅋㅋ
엄마요...다른 도시에 산다고 '늘' 곁에 있어드리진 못하고요, 전화만 자주 해요.

마노아 2011-06-14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핫, 하루 지난 생일을 이제사 축하해요.^^
저는 올해 들어서는 뇌가 이렇게 늙는구나 실감이 날만큼 잊어버리고 생각 안 나는 게 무척 많았어요. 애를 낳은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쩌나 겁이 날 정도였어요. 이것도 익숙해지니 지금은 그냥 그러려니 해요. 다들 그렇겠지 뭐... 이러고요. 어제는 수년 만에 통화한 사람이 그때 누구누구였다고 설명을 하는데 기억이 안 나는 거예요. 행사에서 밥 한끼 같이 먹고 얘기 좀 나눈 게 다였지만 그래도 생각이 안 나니 답답하긴 했어요. 다들 그런 거겠죠? 우리만 그런 것 아닐 거예요.^^;;;

진주 2011-06-18 09:49   좋아요 0 | URL
우리라니요~아직 미혼이신 마노아님은 우리에서 뺄거예욧!! ㅋㅋ
후제 마노아님이 결혼해서 애 낳아 본 후에야 마노아님이 제명된 이유를 알게 될거예요.

chika 2011-06-15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쌩쌩한 마흔다섯 진주님! 생일축하해요. 일주일정도는 생일주간으로 축하받는거잖아요, 그죠? ^^


진주 2011-06-18 09:51   좋아요 0 | URL
오~어떻게 아셨죠?
안그래도 우리집에선 깜박증 남자들을 위해 '어머니 생신주간'을 가동하고 있답니다. 1주일 내내 저는 생일을 축하 받을 권리가 있는거죠 ㅋㅋㅋ

조선인 2011-06-15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일 축하드려요. 난 진주님 페이퍼 절대 공감이에요. 사실 많은 아줌마들이 그럴 거에요. ㅋㅋ

진주 2011-06-18 09:53   좋아요 0 | URL
30대 중반까지만 해도, 제가 건방져서 이렇게 소리쳤답니다.
" 난 나이들어도 절대로 아줌마가 되진 않을거야!"
흥, 그래놓고선 되려 지름길로 달려가고 있네요 ㅋㅋ
세월을 누가 이긴다고 그런 철없는 소릴 했을까요...

혜덕화 2011-06-16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가 그러더군요.
두 가지를 동시에 기억하기 힘들다는 내 말에
"그래, 맞다. 껌 씹으면서 횡단보도 건너기 힘들다."는 말에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습니다.
그래도 좋으네요.
내가 기억하지 못 하더라도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준 사람으로 기억에 남아있다는 것은.

진주 2011-06-18 09:55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빨간 장미꽃으로,
어여쁜 꽃다발을 선물했다던 여자의 모습을 그려보니
예뻐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네요^^
 

 

'봄비, 내린다' 

이렇게 이쁜 말을 놔두고 황사비도 모자라 방사능비라고 불러야 한다. 

 

비에 젖은 꽃잎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초등학교 4학년 무렵에 알았다.
꼭 이맘 때였을 거다. 봄볕에 깜스럼하게 얼굴 그을린 조고만 가시내였던 나,
냉이는 이미 꽃이 폈을 테고 뽀얗고 통통한 쑥을 캐러 다니고 있었을 거다.
지금은 어딘지 가늠할 수도 없는 어느 들녘에서 이슬처럼 나리는 
봄비를 만났다.  이슬비에 젖은 복사꽃의 분홍빛!  
영롱하고 맑은 곱디 고운 빗방울에 굴절된 꽃잎.
꽃잎의 보드레한 솜털과 수술과 암술, 코끝에 아리는 향긋함....
나는 이 세상에서 보호해줘야할 가장 여린 것이 꽃잎이란 것을
비로소 알았을 것이다.  

 

해마다 봄이 오듯
봄비가 내리고
꽃이 핀다. 
올해는 비에 무서운 것이 섞여도 여전히 들녘마다 가득 메우고 있겠지. 
복사꽃, 매화꽃, 살구꽃, 사과꽃,자두꽃들아!  

20110408ㅌㅂㅊ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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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0 2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11 2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혜덕화 2011-04-12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사비도 방사능비도 봄 꽃의 향연을 멈추게 할 수는 없지요.
꽃이 너무 아름다워서
삶의 구차스러움도 애틋해지는 봄입니다.
우리가 뿌린 것을 우리가 거두는 것에도 호들갑떠는 것을 보면서
봄 꽃이 빙그레 웃고 있는 것 같네요.
야들아, 정신 차리래이 하구요.^^


진주 2011-04-16 11:59   좋아요 0 | URL
정신...차려야 할 텐데
인간의 오만함과 무지함이 어디까지 뻗칠지....
잘 지내시는거죠? 혜덕화님^^
신학기 지나고 애들이 학교에 좀 적응되면 여기 들리시려나 생각하고 있었어요.
여름방학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요?
언제나 강건하시고 행복하시길.

2011-04-28 0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02 1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02 19: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04 1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01 2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말 의  힘 
 

...황인숙...

 

     기분 좋은 말을 생각해보자

     파랗다. 하얗다. 깨끗하다. 싱그럽다.

     신선하다. 찌릿하다. 후련하다.

     기분좋은 말을 소리내어보자

     시원하다. 달콤하다. 아늑하다. 아이스크림

     얼음, 바람, 아아아, 사랑하는, 소중한, 달린다.

     비!

     머릿속에 가득 기분좋은

     느낌표를 밟아보자. 만져보자. 햝아보자.

     깨물어보자. 맞아보자. 터뜨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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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11-04-12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툭 내뱉는 말의 과보를 받으면서도
과보 받는 줄 모르고 사는 모습을 보면서
말의 힘을 느낍니다.
말이 곧 기도이고 진언임을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는데......

진주 2011-04-16 11:57   좋아요 0 | URL
말은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이죠.
우리가 상대방의 내면세계까지 읽어낼 재주는 없어도
흘러나오는 말을 보면 그 속에 어떤 샘이 있는지 짐작은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가하면 말은 내면을 가꾸는 힘도 갖고 있나봐요.
입에 부정적이고 거친말을 담으면 마음도 황폐해지는데 비해
예쁜 말 좋은 말을 소리내어 발음하다보면 어느덧 마음도 정화되기도 하니까요...
 

양잠설



어느 촌 농가에서 하루 저녁 잔 적이 있었다. 달은 환히 밝은데, 어디서 비오는소리가 들린다. 주인더러 물었더니 옆방에서 누에가 뽕 먹는 소리였었다. 여러 누에가 어석어석 다투어서 뽕잎 먹는 소리가 마치 비오는 소리 같았다. 식욕이 왕성한 까닭이다. 이 때 뽕을 충분히 공급해 주어야 한다.

며칠을 먹고 나면 누에 체내에 지방질이 충만해서 피부가 긴장되고 윤택하여 엿빛을 띠게 된다. 그 때 부터 식욕이 감퇴된다. 이것을 최면기라고 한다. 그러다가 아주 단념을 해 버린다. 그러고는 실을 토해서 제 몸을 고정시키고 고개만 들고 잔다. 이것을 누에가 한 잠 잔다고 한다. 얼마 후에 탈피를 하고 고개를 든다. 이것을 기잠(起蠶)이라고 한다. 이때에 누에의 체질은 극도로 쇠약해서 보호에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다시 뽕을 먹기 시작한다. 초잠 때와 같다.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해서 최면, 탈피, 기잠이 된다. 이것을 일령(一齡), 이령 혹은 한 잠, 두 잠 잤다고 한다. 오령이 되면 집을 짓고 집 속에 들어앉는다. 성가(成家)된 것을 고치라고 한다. 이것이 공판장에 가서 특상, 1등, 2등, 3등, 등외품으로 평가된다.


나는 이 말을 듣고서 사람이 글을 쓰는 것과 꼭 같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대개 한때는 문학 소년 시절을 거친다.
이 때가 가장 독서열이 왕성하다. 모든 것이 청신하게 머리에 들어온다. 이 때 독서를 많이 해야한다. 그의 포부는 부풀 대로 부풀고 재주는 빛날대로 빛난다. 이 때 우수한 작문들을 쓴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그는 사색에 잠기고 회의에 잠긴다. 문학 서적에서조차 그렇게 청신한 맛을 느끼지 못한다. 여기서 혹은 현실에 눈떠서 제각각 제 길을 찾아가기도 하고 철학이나 종교서적을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오직 침울한 사색에 잠긴다. 최면기에 들어선 것이다.

한 잠 자고 나서 고개를 들 때, 구각(舊殼)을 벗는다.탈피다. 한 단계 높아진 것이다. 인생을 탐구하는 경지에 이른다. 그러나 정신적으론 극도의 쇠약기다. 그의 작품은 오직 반항과 고민과 기벽에 몸부림친다. 혹은 그를 요사한 천재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시 글을 탐독하기 시작한다. 전에 읽었던 글에서 새로움을 발견한다. 이제 이령에 들어선 것이다.

몇 번이고 이 고비를 거듭하는 속에 탈피에 탈피를 거듭하며 자기를 완성해 간다. 그 도중에는 무수한 탈락자들이 생긴다. 최후에 자기의 모든 역량을 뭉치고, 글 때를 벗고, 자기대로의 세계에 안주한다. 누에가 고치를 짓고 들어앉듯 성가한 작가다. 비로소 그의 작품이 그 대소에 따라 1등품, 3등품으로 후세의 평가의 대상이 된다.


대개 사람의 일생을 60을 1기로 한다면 20대가 1령기요, 30대가 2령기, 40대가 3령기요, 50대가 4령기요, 60대가 되면 이미 5령기다. 이제는 크든 작든 고치를 짓고 자기 세계에 안주할 때다.

이 때에 비로소 고치에서 명주실이 풀리기 시작한다. 자기가 뽕을 먹고 삭이니만치 자기가 부단히 고무되고 고초하고 탈피해 가며 지어 논 고치[境地]만큼 실을 뽑는 것이다. 칠십이든 구십이든 가는 날까지 확고한 자기의 경지에서 자기의 글을 쓰고 자기의 말을 하다가 가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20대~60대로 예를 들어 말한 것은 육체적인 연령을 말한 것은 물론 아니다. 육체적인 연령에 대비해 보는 것이 알기 쉽기 때문이다. 우수한 문학가는 생활의 농도와 정력의 신비가 일반을 초월한다. 그런 까닭에 이 연령은 천차만별로 단축된다. 우리가 남의 글을 다음과 같이 논평하는 수가 가끔있다.

"그 사람은 재주는 비상한데, 밑천이 없어서."
뽕을 덜 먹었다는 말이다. 독서의 부족을 말함이다.

"그 사람 아는 것은 많은데. 재주가 모자라."
잠을 덜 잤다는 말이다. 사색의 부족과 비판 정리가 안 된 것을 말한다.

"그 사람 읽기는 많이 읽었는데, 어딘가 부족해."
뽕을 한 번만 먹었다는 말이다. 독서기가 일회에 그쳤다는 것이다.

"그 사람 아직 글 때를 못 벗은 것 같애."
5령기를 못 채웠다는 말이다. 자기를 세우지 못한 것이다.

"그 사람 참 꾸준한 노력이야. 대원로지. 그런데 별 수 없을 것 같다."
병든 누에다. 집 못 짓는 쭈그렁밤송이다.

"그 사람이야 대가지. 훌륭한 문장가인데. 경지가 높지 못해."
고치를 못 지었다는 말이다. 일가를 완성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양잠가에게서 문장론을 배웠다.


/作 : 윤오영



...윤오영...
수필가, 호는 치옹 또는 동매실 주인.서울 출생(1907-1967)
보성고등학교 교사를 지냄. 한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문장에 있어서는 매우 엄격하여 격과 아취를 소중히 여김. 수필집에는 <고독의 반추>과 있고 저서에는 <수필 문학 입문>이 있다. 특히 <수필 문학 입문>은 종전의 서구식 문학의 관점과 다른 전통적인 시각에서 설명한 귀중한 노작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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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11-04-04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심비에 새기듯이 또박또박 타자쳤던 것이 벌써 십 년 전의 일이다.
"나는 양잠가에게서 문장론을 배웠다."
끄트머리 윤오영님의 말을 인용하여
"나는 윤오영의 양잠설에서 문장론을 배웠다."
라고 나중에 써먹으려고 했던 야심찬 작정도 기억도 난다.

십 년이 지난 오늘 아침, 오자 하나 없게 정성들여 타자한 이 글을 다시 마주한다. 십 년 세월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나의 문장은 어떠한가를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 즈음 내가 상상했던 십 년 후의 나의 글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때 옆에서 '쫠깃쫠깃한 손칼국수! 어머니의 손맛 손칼국수!' 라고 호객하는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쫄깃쫄깃도 아닌 쫠깃쫠깃이라니, 칼국수집 아저씨의 찰진 발음에 솔깃해져서 우리는 두말없이 끌려 들어갔다. 길바닥 나무의자에 앉아 먹는 것이 태반이 넘는데 그래도 지붕과 벽이 있는 가게였다. 어수룩해도 지저분하지는 않았다. 반들거리는 탁자하며 자외선 물컵 소독기까지 내부는 나름대로 정갈했다. 꽃병 대신 미나리 뿌리를 넙적한 도자기 그릇에 심은 데서 미나리싹이 파릇하게 돋아나 있었다.
 


남편은 잔치국수와 손칼국수를 두고 고르다가 손칼국수를 시켰다. 나는 고르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먹을 줄 아는 밀수제비를 시켰다. 밀가루 음식 좋아하는 남편은 후루룩~후루룩 몇 번 하더니 그릇이 비워지는데 내 건 화수분인지 어떻게 먹을 수록 더 불어나는지..... 아저씨는 호객만 하는 것이 아니라 틈틈이 손님들의 그릇을 살피며 '더 드릴까요?'를 나긋하게 속삭였다. 이 무서운 물가에 리필을 하고도 삼천원이면 주인장은 그러고도 뭐가 남을까 싶은 오지랖 넓은 걱정을 하고 있는데 남편이 더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 그러고보니 이 남자 국수라면 사족을 못 썼지. 특히 집에서 만들어 먹는 손칼국수. 시어머님 살아계실 적 쉬는 날에 홍두깨로 밀가루 반죽 민다고 온통 밀가루 분칠을 하고도 그렇게나 좋아하더니 국수 싫어하는 아내를 만나 국수 굶고 살고 있었구나. 손목 약해서 반죽도 못하고 밀지 못하는 건 그렇다고 쳐, 시장 가면 할머니들이 밀국수 썰어놓고 파는 데 왜 그것조차 야박하게 안 해줬는지, 내가 생각해도 난 너무 했다. 

 

있잖아, 이제부터 내가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손칼국수 해 줄게.
나(누가 들을세라 귓속말로) 이거보담 더 맛있게도 할 수 있다.
감자를 쑹덩쑹덩 썰어넣고 호박도 있음 좋지, 칼칼한 고추에 파 마늘 듬뿍..... 



남편은 서비스로 더 주는 것도 모자라 내가 남긴 수제비까지 욕심내더니, 내 말에 숟갈질을 멈추고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니가 웬일?' 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눈을 뚱그렇게 떠보이는 것이 속으로 분명 그렇게 말하는 뽄새(본새)다. 
 

대신 약속해.
앞으로 최소한 20년은 나랑 같이 먹어줄거라고.  

 

이런 말을 요즘 애들이 옆에서 듣는다면 필시 손발이 다 오그라드네 어쩌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목젖이 우리하게 아파 오는 걸 침 한 번 삼키고 제법 결연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과부가 되더라도 65세면 남은 여생 어떻게든 보낼 수 있을거란 얄팍한 계산에서 20년을 잡았지만, 어쨌거나 사람이 내일의 일도 미리 걱정하지 말라는데 20년 후의 일이랴. 남편은 아무 대답도 안 하고 대접을 들고 국물을 마셨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등따시고 배부르니' 기분이 홀가분해졌다. 그렇게 그. 날.  슬퍼서 정신없던 날도 암씨랑토 않게 저물어 갔다. 20110330ㅅㅂㅊ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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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03-31 0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밀수제비'란 말이 낯설어서 찾아보니 수제비와 같은 말이네요. 밀가루로 만들어 밀수제비라고 하나봐요?
저런 손칼국수집을 어디 가면 볼수 있나 생각해보았더니 저 사는 곳에 아직도 오일장이 열리고 있으니 거기 가면 혹시 있을까 싶어요. 집에서 칼국수 가끔 해먹긴 해도 직접 밀가루 반죽해서 해먹은 건 아주 예전에 한번 해보고, 힘들인 것에 비해 먹을 땐 후루룩~ 너무나 허무하게 끝나는 것 보고 다시 할 맘이 없어져 버렸지요.
그날 남편 분, 진주 님 말씀에 대답은 안하셨어도 마음도 무척 부르셨을 것 같아요.

진주 2011-03-31 10:29   좋아요 0 | URL
찹쌀수제비란 게 또 있으니까 구별되라고 그렇게 부르나봐요.
우리도 저 날은 큰 장에 가서 별미로 먹었지만 운 좋게 집근처 시장에도 손칼국수 따위 잘 한대요. 멀리서도 먹으러 오더군요. 저는 오로지 밥순이랍니다.

조선인 2011-03-31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아이들에게 앞으로 15년은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겠다고 약조했어요. 작은애가 스물이 넘으면 어떻게든 살겠다 싶어서요. 그러고보니 옆지기 생각은 손톱만큼도 안했네요. 아직은 실감이 안 나서일까요.

진주 2011-03-31 10:40   좋아요 0 | URL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실감을 못하고 사는 게 행복한 겁니다.
공기 없이는 살 수 없으면서 공기의 소중함을 깨닫기란 힘들잖아요.
조선인님, 아프지 말고 오래오래 행복하셔야죠. 배 따숩게...^^

2011-04-01 15: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04 0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혜덕화 2011-04-12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무치게 그립다는 말을 생각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읽다가 문득 목이 메었습니다.
_()_

진주 2011-04-16 11:54   좋아요 0 | URL
저 날이요...
아주 힘들고,
슬픈 날이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