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nter Moonlight - grimshaw

그림쇼의 그림들은 축축한 안개가 파도처럼 일렁였던 흔적이 역력하다.

차고, 습하고, 적막하고, 고독하다.

예술가의 작품에는 공통된 주제가 있기 마련인데 그림쇼의 그림들도 뚜렷한 개성, 뚜렷한 주제를 보인다.

내가 그림쇼에 대해 아는 것은 그림 밖에는 없다.

그의 작품 세계나 성장 환경 같은 것은 모른체 내가 보이는 대로, 그림에 대한 단상을 적을 뿐이다.

11월, 내가 그림쇼의 그림을 처음 만난 달이다.

벌써 1년전 11월이니, 이 그림도 자주 나를 심연에 빠뜨리게 하였다.

그림쇼의 그림들에는 홀로 걸어가는, 성냥개비 만한 작은 사람의 뒷모습이 종종 눈에 띈다.

안개가 쓸고 간 해질녘에 저물기 위해 나타난 말간 하늘을 보노라면

다시 새날이 온 것처럼 들뜨기도 하여 지는 해와 뜨는 달을 혼동하기도 한다.

저 그림속에 뜬 달을 나는, 첫눈에 해 라고 생각했다.

앙상한 나무 가지 사이에 선명하게 빛나는 불빛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직도 달을 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중절모에 검은 양복을 입은 신사는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불켜진 창과 조금 불안하게 걸려 있는 달 그림자의 정확한 정체와 달리  

신사는 어디에서 부터 온 것인지 어디로 가는 것인지 짐작할 수 없다.

그는 멈춰있다.

그의 불분명한 행선지 처럼 그를 바라보며 추측할 수 있는 건,

지금 그가 멈춰 있다는 것이다.

그림속에 난 지상의 길은 넓게 퍼져 있는 하늘에 비해 작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그림쇼의 다른 그림들에서도 하늘은 당연한 등장인물처럼 그림의 절반을 차지한다.

신사가 바라보는 저 무한한, 끝없는 하늘의 막연함은 11월의 우울과 닮았다.

휴일이 없는, 공짜가 없는 야박함은 그림쇼가 바라보는 세상과 흡사할지도 모른다.

저 무한한 자연 앞에서 작은 물체에 불과한 신사가 초라해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그저 거기에 막연한 하늘을 바라보며 멈춰 있을 뿐이다.

가끔, 이 지긋지긋한 세상을 탈출하고 싶을 때 하늘을 본다.

출구는 전혀 있을리 없는데도 그 넓은 하늘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한결 가볍다.

오늘,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소리를 지를 뻔 했다.

혜화동 성당 담벼락에 붉은 줄기만 드러낸 담쟁이들이

짙은 회색의 공기와 너무 잘 어울려 내가 타고 가는 버스가 우리집이 아닌

다른 곳에 내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나 스스로는 일탈하지 못하고, 버스 기사 아저씨의 손에 기대를 걸었던 막연함...

 

그림쇼 그림의 진짜 매력은

막연하고 막막한 우울의 포진 속에서

조금씩 밝게 빛나고 있는 빛이다.

신사가 멈춰 서 있는 바닥에도, 건너편 담벼락에도, 슬그머니 퍼져 있는 밝은 빛이 있다.

나는 그걸 희망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모든 밝은 빛이 희망이라고 한다면 그게 더 막연하니까.

조금씩 우울에서 벗어나고 있는거라고...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다.

winter moonlight. 그게 바로 그거라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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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1-26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쇼의 그림도 플레져님의 글도 기가 막히게 좋습니다.^^

icaru 2005-01-26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핏 구름 속의 해인줄 알았어요~ 달이네요..

로드무비님 말씀을 제가 반복하네요~

글과 그림...모두 아름다워요....!

플레져 2005-01-26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쇼의 그림들을 더 올려놔야겠어요.
제 서재 어딘가에 있을텐데...쩝...^^ 로드무비님, 복순이언니님, 감사합니다~
 



   '당신은 먼저 세이렌들이 사는 곳에 이를 거예요. 세이렌들은 꽃밭에 앉아 가까이 다가오는 남자들을 홀리지요. 남자들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저 목소리만 듣고 세이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데, 그랬다가는 두 번 다시 아내나 자식을 볼 수도, 고향에 돌아갈 수도 없어요. 세이렌들이 앉아 있는 곳 주위에는 죽은 남자들의 뼈가 잔뜩 쌓여 있지요. 하지만 오디세우스여, 그대가 그곳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드리도록 하지요.'  

  (중략)

   나는 부하들에게 꽃밭의 세이렌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러고는 커다란 밀랍 덩어리를 가져다가 부순 다음 부드러워질 때까지 손으로 주물렀습니다. 그 밀랍 조각으로 부하들의 귀를 막았고, 부하들은 나를 배의 돛대에 묶었습니다. 바람이 가라앉으면서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 마치 어떤 신이 바다를 잠잠하게 한 것 같았습니다. 부하들은 노를 저어 배를 움직였습니다. 소리를 지르면 들릴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자, 세이렌들은 우리를 발견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리로 오세요, 이리로 오세요, 아, 오디세우스여.' 세이렌들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배를 멈추고 우리 노래를 들으세요. 여기에 오는 이들은 모두 우리의 입술에서 나오는 꽃처럼 달콤한 목소리를 듣고 기뻐했어요. 모두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이곳을 떠나갔죠. 우리는 모든 일을 알고 있어요. 그리스군이 트로이전쟁에서 겪었던 고통도 다 알고 있어요. 앞으로 이 땅에 무슨 일이 생길지도 다 알고 있어요. 오디세우스여, 오디세우스여, 우리 꽃밭으로 오세요. 우리가 그대에게 불러드리는 노래를 들으세요.'

   나는 세이렌들의 노래를 듣고 싶어 미칠 것 같았습니다. 나는 부하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나를 풀어달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부하들은 오히려 더 꽉 묶고, 허리를 굽혀 노를 계속 힘차게 저었습니다. 마침내 세이렌들의 땅에서 벗어나자, 부하들은 귀에서 밀랍을 빼고 나를 돛대에서 풀어 주었습니다.

<비룡소 클래식, 트로이 전쟁 236쪽 ~ >

***

여염집 남자가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무수히 널린 세이렌의 꽃밭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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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1-21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집 남편이 무수한 세이렌의 유혹의 꽃밭을 지나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길
기원합니다.ㅎㅎ

비로그인 2005-01-21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워터하우스의 그림... 좋지요 ^^
 



waterhouse의 이 그림은 내 서재 어딘가에 또 올려져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그림을 볼 때 마다 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두 여자의 손길을 느낀다.

 

맨발의 그녀들은 꽃을 꺾기에 바쁘다.

이미 꺾은 꽃의 양으로 봐선 분홍색 드레스의 여자는 그만 꺾어도 될 것 같다.

여자의 품속에 안겨있는 꽃은 위태로워 보인다.

그러나 아직 파란색 드레스의 여자가 꽃을 꺾고 있으므로 분홍색 여자는 멈추지 않는다.

분홍색 여자가 꽃을 품고 있어 만들어진 드레스의 주름은

마치 그녀의 속마음처럼 조바심과 긴장감이 서려있다.  

그러나 파란색 여자는 꽃을 꺾어 분홍색 여자처럼 품지는 않을 것이다.

파란색 여자는 손에  쥘 수 있을 만큼만 꺾을 것이다.  

어쩌면 분홍색 여자를 자극하기 위해 일부러 여유있게 꽃을 꺾고 있는 건지도...

파란색 드레스 속에 희미하게 비치는 단단한 가슴은 그녀 자신의 작은 흉상같다.

가슴이 얼핏 보인다 해도 감추고 있는 단단한 마음의 모양을 분홍색 여자에게 들킬 수 없는 것처럼.

분홍색 여자의 가슴은 보이지 않지만 바싹 오그라들었을 것만 같고, 초라해 보일 것만 같다.

파란색 여자의 무엇이 분홍색 여자를 옥죄고 있는 걸까...

 

분홍색과 파란색은 한 곳에서 꽃을 꺾고 있다.

저 뒤에서 꽃을 꺾고 있는 여자들 처럼 흩어져 꺾어도 꽃밭에 꽃은 많은데,

왜 하필이면 이 곳에서 함께 묘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것일까.

검은색 머리의 분홍색 드레스 여자는

갈색 머리의 파란색 드레스 여자에게 왜 담담해질 수 없는 걸까.

 

추신 : 이 그림의 제목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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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05-01-21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몰라요. 단지 참 이쁩니다.
그림리뷰까지 멋지게 하시는군요.

야클 2005-01-21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설명듣고 보니까 예전에 매직아이에서 갑자기 입체영상 떠오르듯,그림이 새롭게 보이네요. 나른한 오후 그림 감상 잘 했습니다. ^^

반딧불,, 2005-01-21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분 꽤 유명하군요.
오필리아 그리신 분이군요.
전번에 보슬비님 서재에서 본 듯 한데..^^;;

플레져 2005-01-21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디님, 워터하우스의 그림들에는 수많은 서사가 서려 있어요. 실제로 서사가 있는, 역사적인 삽화를 그리기도 하구요.
야클님, 반갑습니다 ^^
 



lala at the cirque fernando - edgar degas, paris 1879

페르난도 서커스단과 관계없고 페르난도 서커스단의 라라 양과는 더욱 관계없는 이 이야기는 사실 한 장의 그림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를테면 그 한 장의 그림은 교훈도 없고 판타지도 없는 이 가난한 이야기의 모티프인 셈이다. 그것은 내 책상 바로 앞 창문에 붙어 있는 그림이다. 오렌지빛의 색채감이 강렬한 그 그림은 구도가 특이하다. 화면의 오른쪽 상단에는 줄을 입에 물고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젊은 여자가 그려져 있다. 여자는 두 팔을 앞뒤로 벌려 가까스로 몸의 평형을 유지하고 있다. 인상파 화가인 드가는 여자들을 즐겨 그렸는데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대부분 무용수이거나 매춘부였다. 그러나 그 그림들의 주인공은 무용수나 매춘부가 아니라 그들의 방심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시선'이었다. 화가의 시선은 냉혹했고 그림들의 모델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줄을 입에 물고 허공에 매달려 있는 페르난도 서커스단의 라라 양의 모습은 그것을 올려다 보는 시선의 존재로 인해 더욱 위태롭게 느껴졌다. 그 그림을 표구집에서 우연히 접했을 때 나는 타인들의 고압적인 시선에 갇힌 한 여자의 운명을 보았다. 그 여자는 타인들의 시선속에서 올라가지도 내려오지도 못하고 허공에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추락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문 채.

<페르난도 서커스단의 라라 양, 김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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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도서관에서 복사하여 여러번 거듭 읽었던 그 책이 출간됐다.

남유자, 그녀에 대한 묘사가 압권이다.

단편 하나가 들어있는 건가?

그렇다면 분량에 비해서 책값이 좀 비싼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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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2005-01-13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남문학선에 있는 유자약전은 40쪽 분량밖에 안되는데

이 책은 중편분량으로 개작하신 건가요. 플레져님

플레져 2005-01-14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건 잘 모르겠어요, 니르바나님.

저두 학교 도서관에서 복사하여 읽었어요. 나남문학선이었나봐요 ^^

로드무비 2005-01-15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자는 목욕탕에서 물통을 엎어놓고 잔다죠?^^
무척 매력적인 주인공이었는데......
(제 기억이 맞나요?)

플레져 2005-01-16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음... 저는 유자의 외모를 묘사하던 스피드한 문체만 어렴풋 기억나요.
읽을 때 무척 반했는뎅...^^

2005-01-19 14:1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