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의 사랑, 한강의 소설을 읽었다.
내내 나는 가본 적 없는 도시를 동경했다. 자흔. 기쁠 흔 자를 갖고 있는 그녀는 기쁨에 반 대 되는 감성이라면 무엇이든 껴안고 있는 여자다.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어디로 어디로 떠도는 여자, 자흔. 아픔으로 따지자면 그녀의 이야기를 낱낱이 고하는 정선 역시 만만치 않은 이력을 갖고 있으니, 외려 정선의 과거가 더 단단한 비극을 갖고 있으니, 자흔의 정서는 기쁠 흔 처럼, 기쁠 수 있는 일말의 기쁨은 갖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는 곳 마다 낯설게 느꼈던 자흔은 여수에 와서 더운 피를 흘려 개펄에 섞고 싶었노라고 고백한다. 내게도 그런 곳이 있었다. 그곳은 제주. 제주는 어느 곳에 서 있든 바다를 느낄 수 있다. 여행자로서 느끼는 낭만 이상의 것을 나는 두번째로 제주를 방문하던 날 더운 피를 흘려 개펄에 섞고 싶었다는 마음에 사로잡혔다. 그때 난 바다를 좋아할 수 없을거라는 걸 알았다. 빈 말로라도 바다에 가고 싶다, 는 말을 줄였다. 물이 무서워 수영을 포기했다는 이유는 바다와는 별 상관이 없다. 나는 너무나 많은 물을 출렁이고 흘려보내고 보여주는 바다가 무서웠을 뿐. 쉽게 낭만으로 연결되고 있는 바다의 겉모습이 두려웠을 뿐.
여수, 그 앞바다는 아직도 검푸른 파도를 세우며 선착장의 철선들을 향해 밀물져오르고 있을 것인가. 나 살던 여인숙 골목의 밤은, 부두 끝 선술집의 노랫소리는 아직도 통곡처럼 자지러지고 있을 것인가.
소설을 읽다가 책 날개를 펼쳤다. 그녀의 첫 소설집, 10년전에 나온 소설집, 스물 여섯에 펴 낸 소설집 속에 소설들은 그녀가 스물 여섯 이전에 쓴 글이다. 못지않게 나의 이십대 초입이 상처와 방황의 여정이었으나 감히 내밀기가 두려워진다. 내가 겉으로 드러낸 아픔을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면 그녀는 기쁠 흔에 반대되는 감성을 내포하고 있었을지도. 검푸른, 통곡이란 어휘들을 꺼내는 게 내가 바다를 좋아할 수 없다는 말을 줄이는 것처럼 쉬워보이지 않았다. 무엇이 그녀를 아프게 했던 것일까.
잘 된 소설이라는 울타리는 뚝 떼고 여수의 사랑에 흐르는 그 감성에 흠뻑 취해 저녁을 보냈다. 요사이 내 일상을 거머쥐고 있는 실체를 향해 한번쯤 반항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너 없이 잘 살 수 있어, 가 아닌 너 여야만 잘 살 수 있어 같은 반항...
요즘, 자정이 넘으면 우리 마을엔 아주 커다란 고동에 허리케인급의 숨을 토해야 나올 법한 미혹의 소리가 들려온다. 정체를 알 수 없어서 그 소리는 불안과 긴장이다. 소리가 멈춰도 별반 편하지는 않다. 차라리 경찰차의 무분별한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 게 더 낫겠다. 그 소리의 끝은 안심을 주기도 하니까.
선배의 집에서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후배는 출장중이라고 했다. 모두가 통화중이었고, 모두가 자리를 비웠고, 모두가 바빴다.
룸메이트 였던 자흔이 여수로 떠난 후, 정선은 그녀의 뒤를 쫓는다. 둘에게 여수는 고향이다. 자흔이 여수를 동경했다면 정선에게 여수는 고통이었다. 여수로 가는 열차표를 끊은 뒤 정선은 지인들에게 전화를 건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그녀의 방으로 향하듯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다. 밑줄을 그으며 나는 피식 웃었다. 이건 문장이 조금 다를 뿐 언젠가 끄적였던 나의 낙서와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마 이렇게 썼던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전화는 통화중. 애써 위로의 말이랍시고, 안 외로운 척 하며 바로 이은 문장은 이런 거였다. 그럴 수 있다.
아무렇게나 내 기분에 취해 써버린, 밤에 쓴 페이퍼를 용서한다. 충분히 그런 날도 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