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책을 펴내자 그의 제자였던 알렉산더 대왕이 자신이 비싸게 돈을 주고 배운 것을 아무에게나 공개한다고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간의 지식은 결코 글귀만으로 얻을 수는 없으므로 대왕이 지불한 비싼 수업료는 헛된 것이 아니라고 대답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책을 통한 진리에의 접근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한 측면은 고대에는 왕이나 초빙할 수 있던 아주 값비싼 선생을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측면은 선생은 모셨는데 배우는 것은 오로지 자기 힘으로만 이룰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독서의 한계에 대한 이야기도 짚어야 하는데 태백산맥 열 권을 읽고 다시 해설서 열 권을 읽었다고 가정하자. 이제 나도 이 책에 대해 할말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신문에 나온 짤막한 한 페이지의 해설을 읽으며 새로운 사실과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파우스트>에 보면 아무리 열등한 친구라 해도 사귀다 보면, 당신이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란 걸 알게 될 것이라는 경구가 있다.지나가면서 들은 평범한 사람의 견해에서도 늘 적어도 하나 대부분 그 이상의 새로운 느낌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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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문자를 발명한 이래로 세대를 넘어서는 기록의 방법은 어떤 식으로든 대상에 문자를 남기는 것이었다. 책이라는 것은 따라서 가장 전통적인 전달의 수단이었다. 전달의 목적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대화다.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문제는 대화를 청하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아서 평생을 걸려 만나더라도 만나기 어려울 정도라 것이다.그럼 세상에 쏟아져 나오는 무수한 책들을 어떻게 것인가 라는 물음에서 시작해보자.

 

세르반테스가 어떤 나쁜 책에도 가지 좋은 점은 있다고 했는데 말은 일견 타당하다.

 

명제 하나 

독서란 독자와 저자간에 이루어지는 하나의 대화다.

 

명제 .

대화를 통하여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만한 한가지 정도는 가지고 있다.

역으로 나도 대화를 통하여 다른 누구에게나 가지 정도는 배울 만한 것이 있다.

 

직관적으로 받아들여보면 대학생활을 하면서 교양강좌 괜찮은 강의가 어떤 것이냐고 선배에게 묻는 것은 다들 가지고 있는 경험이다. 택시 운전사에게 길을 묻는 것이나 자동차의 정비요령에 대하여 묻는 것도 자연스럽게 납득할 있다.

 

결론 - 두가지를 결합하면 모든 책에는 배울 만한 것이 적어도 하나는 있다는 명제가 된다.

 

일견 타당한 같은 명제에는 미처 고려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목표를 정하고 계획을 세워본 사람은 누구나 시간이 부족함을 느꼈을 것이다. 자신이 지금 한가하다면 역으로 눈앞의 목표가 없다는 이야기가 수도 있다. 제한된 시간으로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투자대비 효과의 극대화란 경제 법칙에 충실해야 한다.

교양강좌에 대해서 물으려면 성적이 좋고 후배를 가깝게 하는 선배에게 가는 것이 나을 것이고 자동차의 정비요령도 초면의 운전기사에게 묻는 보다는 가까운 숙련 운전자에게 물을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책에는 가치가 있지만 제한된 자원 - 시간과 비용 - 소비하여 많은 효용을 얻을 있는 책을 고르기 위해 독자는 항상 자신의 안목과 기술을 높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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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있는 법을 설명 하기 전에 그렇지 했다고 후회하는 사람의 고백을 들어 보자. 아래 내용은 이문렬씨의 <젊은 날의 초상>,민음사  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내용 중에서 개의 단락이다.

 

책에 대한 턱없는 갈망 - 모든 것에 대해서 그러하지만,갈망은 항상 갈망을 낳기 마련이었다. 나는 무모하리만큼 열심히 읽었지만,읽으면 읽을 수록 도서관의 서가에는 그만큼 많이 읽어야 책들이 늘어났다.  발단은 나와 맞아떨어질 같으면서도 전혀 맞아떨어지지 않는 전공 때문이었다.

어쨌든 입학한 석달도 안돼 독서는 완전히 전공을 벗어나고 말았다. 나는 무슨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과목 과목의 책들 사이를, 강의실과 강의실 사이를 배회했다. 학구와는 거리가 글자 그대로의 배회였다. 왜냐하면 언제나 내가 읽고 있던 것은 개론서였고, 내가 마치 분야를 알았다는 듯이나 다른 분야를 기웃거릴 대조차도 실은 입문의 단계를 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렇게 읽은 피상적인 지식의 단편들은 약간 고급한 교양이나 찻집 같은 데서 동년배의 감탄을 사기에는 훌륭해도 대신 독서범위를 더욱더 무한정하게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나는 항상 책에 대한 갈망으로 허겁지겁하였지만 느는 것은 새로운 갈망뿐 결국 내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모든 것을 아는 바보였다. 

 

나는 떠벌이기 시작했다. 신과 인간에 대해 도덕과 가치에 대해 그리고 세계와 존재에 대해.실제로 처음에는 녀석의 얼굴에서도 전날 내가 만났던 여러 길동무들의 얼굴에서와 마찬가지로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그걸 확인하고 나는 열심히 계속했다.

그런데 - 시간이 갈수록 녀석의 표정은 담담해져 갔다.

<중략>

참고 참았던 녀석의 웃음소리와 거기에 자극된 기침소리가 함께 어울려 나에게 그렇게 들려왔을 뿐이었다

<중략>

하이데거는 콜록,콜록, 잘못 이해되고,콜록, 일상언어학파는 전혀 읽지 않은 것이 ... 분명하지만, 콜록,콜록,콜록 ..... 186

 

그래, 나는 권의 책을 읽었다. 그렇지만 또한 탐구였다고 말할 있는가. 가슴에 불타고 있던 것이 진정한 이데아의 광휘였을까. 아니었다. 아니었다. 소년의 허영심으로, 목로주점의 탁자를 위하여, 어쭙잖은 숙녀와 마주 앉은 다방의 찻잔을 위하여 읽었을 뿐이다.

 

번째 단락은 대학을 들어서자 지식에 대한 갈망으로 책이라는 바다에 빠져 버린 부분이고 다음 단락은 길가다 만난 사람에게 철학 이야기를 늘어놓다 아주 혹독한 비웃음을 사는 이야기다. 마지막은 자신의 헛된 독서에 보낸 시간들을 절망 어린 탄식을 늘어놓으며 반성하는 장면이다.

소설을 읽어 보면  이문열 씨가 가지고 있는 장점과 한계가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 그의 책을 권이라도 읽은 사람들은 넓은 지적영역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해박함과 남과 다르게 있는 색다른 시각 등에서 놀라움을 참지 못한다. 권의 책이라고 감히 말하는 것에도 나타나는데 그의 독서는 엄청나게 광범위하였을 것이다. 문학에 관한 도서 목록이 시경과 일리아드부터 시작하는 것을 보아도 결코 다이제스트 독서물이나 비평적 지식의 짜집기에 만족하지는 않았을 같다.모든 분야에서 개설서를 넘어서지 못했다고 자조하는 그이지만 자신의 독서의 범위를 나름대로 넓게 잡았고 특히 문학에 있어서는 남다른 노력을 같다.

결국 좌절을 느꼈다는 것은 모든 분야에 걸쳐 다르게 구축된 두터운 지식도 전문가와 대화하기에는 보통사람의 넓은 지적 관심 밖에 되지 않았다는 데서 느낀 실망감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문열씨도 자신의 문학을 세계화하는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해 적이 있는 같다. 그럴 지금 시대의 넓은 독자를 가진 밀란 쿤데라 같은 작가와 은연중에 비교해 보지는 않았을까? 밀란 쿤데라의 글에서 느껴지는 해박함은 니체의 개념에서 출발하여 톨스토이,성경 등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아예 영역을 넘어 베토벤의 음악까지 인용하는 자유로움에서 비롯된다. 서구의 명저라는 책을 보면 백년 동안 읽힐 같지는 않은 그냥 수십 동안 분야에서 좋은 읽을 거리로 남을 같은 책들에서도 헤겔,마르크스,칸트,톨스토이 등과 같은 대사상가의 저서와 이론이 자유롭게 인용되며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을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저술되어진 책들에서는 이와 같이 고전을 넓게 구사 경우가 매우 드물다. 한국의 문화 내지 학문이 세계적인 보편성을 취득하는데 한계를 가지게 되는 이유는 역으로 세계적으로 가치를 인정하는 고전의 수용에서 그만큼 취약했다 점이  원인으로 작용할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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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5-03-12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울고 싶습니다 사마천님이 인용하신 이문열이 쓴 그 부분, 저도 읽으면서 무력감에 싸였던 적이 있습니다 실은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습니다 전 비교적 책을 많이 읽는 편인데 아빠가 늘 제 독서열에 대해 경고하곤 합니다 저 많은 책을 그저 글자만 읽는 게 아니냐, 대체 몇 %나 소화시켰다고 생각하느냐... 저도 그저 관심의 폭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넓혀 가지만, 정작 제대로 읽은 건 하나도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이야 그저 교양인의 독서 정도로 한계를 짓고 있지만, 과연 어떻게 책을 읽는 것이 제대로 읽는 것인지, 한숨이 나올 때가 많습니다

marine 2005-03-12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제가 이 글 좀 퍼갑니다 ^^

사마천 2005-03-12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대목읽으면서 한참 고민을 했습니다.
올바른 독서법이라는 문제는 늘 어렵죠. 모티머의 독서법이라는 책을 한번 보시기를. 평생 도움이 많이 됩니다.

marine 2005-03-12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 ^^
 

새롭게 바로 받아들여지는 머리에 구성되어 있는 기존의 지적체계와 자동적으로 결합하여 반응을 일으킨다. 강의 중에 언뜻언뜻 다른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내가 지금 순간 의식적으로 찾으려고 노력하지는 않았지만 평소에 가지고 있던 문제들 중에서 나름대로의 해결에 대한 실마리가 같다는 계기가 있다.

순간적으로 떠올랐다는 것은 의식 저변에서 연관 작용을 통해 하나의 화두가 주어지는 것이다. 화두를 가지고 연관된 사실이나 명제를 의식의 상층부로 떠올리고 정렬시켜 문제의 제기에서 해답까지 일관된 논리의 연관체를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내용들은 주목할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 나가는 진도에 방해되지 않기위해 일단 쪽에 메모를 하여 부담을 더는 것이 필요하다.

 

참고로 강의와 관련되어 이와 같이 다양한 문제를 수용하기 위해 노트는 되도록 펀치 것을 활용하도록 한다. 작성된 내용을 주제나 내용별로 나누어 보관 있기 때문에 재활용을 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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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15 분씩만 책을 읽어서는 어떤 책읽기 법도 익힐 없다.  하버드 대학 고전부

 

15 이라는 시간은 수학 공부를 한다면 문제 개를 풀다 넘길 밖에 없는 정도의 시간이다. 문제 개만 풀고 다시 책을 덮는 어리석은 학생은 별로 없다. 그럴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수학책을 펴지도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독서행위가 하나의 완결성을 가지려면 대상의 수준에 따라 일정한 기본 단위시간을 가져야 한다. 15 정도의 시간이 주어졌을 소설을 읽는 것은 어느 정도 의미가 있지만 철학책의 구절 하나를 들고 고민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20분에서 시간 정도의 여유라면 두터운 전공 책을 차분하게 읽을 있는 시간도 아니다.

정도의 시간적인 공간에는 짤막한 신문이나 잡지의 기사 두개를 택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 주간지는 짤막한 글들의 집합이라 하나 하나의 문장으로 읽기를 완결 지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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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5-03-12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사실 저도 잠깐 짬이 날 때 이상하게 책을 펴기가 싫어져요 남들은 짜투리 시간에 읽는다는데, 전 가운데 끊기는 게 싫더라구요 이런 이유에서 제 무의식 중에 읽기 싫어졌나 봐요 바로 완결성의 문제였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