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 중심의 양반사회의 하층 문화를 이루고 있던 음란물 유통 시장에 새로운 흐름이 등장한다. 
베스트셀러 1위 자리를 놓고 치열한 다툼이 있었는데 외설적 표현이 점점 강화되더니 이제 화려하게 채색된 삽화가 등장하게 된다. 문자의 한계를 넘어 비주얼로 표현된 이 작품의 경우 문장은 당대 최고의 궁중 관료가 그림 또한 지위 높은 관료가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었다. 새로운 시도는 곧바로 영상세대의 뜨거운 호응을 받게 되어 당당히 1위를 고수하며 경쟁작을 압도하게 된다.

특히 이 작품의 강점은 현실에서 벌어진 사랑을 잘 묘사했다는 리얼리즘 문학의 효시라는 점이다. 처음 출발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배경으로 시작했는데 결국은 꿈은 이루어진다는 구호처럼 사랑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덕분에 초반 상상에 의존하던 묘사가 후반에 가니 아주 구체성을 띄게 된다. 특히 그림의 적나라함과 신선함은 당대 한양의 지가를 올리도록 만든다.

하지만 좋은 일에도 마가 끼듯이 이 그림의 제작을 놓고 대상이 되는 모델들에게 사전에 허가를 받지 않았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초상권을 주장하는 모델을 충분히 설득하지 못하다 보니 제작자와 서로 오해가 생겨버렸다. 나는 예술을 하려고 한겁니다라고 우겨보았지만 이건 그냥 몰래카메라를 통한 사생활 누설이라고 주장해서 서로 갈등이 생겼다. 그런데 문제가 심각해진 것은 이 모델 중 하나가 바로 지고지순한 왕비마마라는 사실 때문이다. 어찌 이렇게 난해한 문제가 생겼는지 고민이 이어졌고 덕분에 바빠진 곳은 바로 의금부의 감옥과 궁정경찰이었다.
아래로는 음란물 유통업자, 위로는 왕비와 임금까지 결부된 이 사태의 귀결은 어디로 갈 것인가?

이 과정에서 작품의 현실성에 반론을 제기하는 분들도 많았다.
어찌 지엄한 양반 사대부가 포르노 문학을 만들어 스스로 화를 자초했을까 하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조선 최고의 한글문학인 허균의 홍길동전이나 박지원이 심혈을 기울인 호질 또한 심히 위험한 내용을 담은 작품이었다. 사대부의 문장으로 만들어지는 내용들이 서민 대중들과의 교감이 적었고 문화적 측면에서 보아도 한편에 치우친 내용이 많았다. 여기에 대해 새로운 가능성을 보고 과감히 모든 백성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문학을 만들어 유통시킨 것이다.
즉 자신의 감정을 관찰해서 이를 세세하게 묘사한 것이 작품의 강점인데 이러한 흐름은 서양에서는 프랑스 혁명 전후에나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조선 리얼리즘의 선구자였던 당시의 시도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못한 것은 당시 왕의 피해의식에 의해 많은 작품이 불태워지고 금서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정조의 경우 자기 주변의 문인들의 문체까지 엄격히 규제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적나라한 작품이라면 더욱 통제할 수 밖에 없었다. 어쨌든 오랜기간 묵혀서 비전으로 전해오던 이 작품이 다시 발굴되어 여기 영화로 까지 재생된 것은 기쁜일이다.

단 화려한 비주얼을 강조하는 것은 좋았지만 작품속 인물들의 행동 논리가 제대로 설정되지 못하였다. 최고의 사대부가 왜 대중에게 가까이가려고 했는지에 대해 아직 쉽게 납득가지 못하다. 그리고 그의 작품이 화려하고 사랑이 치열하고 위험한데 비해서 저작활동에 매진하려는 그의 의욕 또한 설명이 부족하다. 반면 느릿느릿 진행되는 작품 제작과정의 세세함은 결국 전체적인 흐름의 균형을 잡지 못하고 있다.
굳이 작품끼리 비교하자면 왕의 남자는 물론이고 이전의 스캔들보다 못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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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8-24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조가 주변 문인들 문체까지 규제하려고 했군요..
사마천님, 잘 읽고 갑니다. 새로 알게된 사실들..^^ 종종 님의 영화비평 읽고가야겠어요^^

사마천 2007-08-24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멀리까지 오셨네요. 잘 지내시죠. 문체 규제는 이덕일님의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읽고 이해했던 내용입니다. 재미 있는 책이여서.. ^^
 

테러와 암살이라는 어두운 내용이 화면을 꽉채우며 관객들을 무겁게 만들어간다. 무려 2시간 40분 가량 이렇게 어두운 장면들을 그려가면서 주인공이나 보는 관객 모두에게 서서히 도대체 진정 가치있는 삶이란 무엇인가하는 물음을 키워나가게 한다. 마침내 말미에 이르러서는 피에 대해 피로 보복하는 것이 꼭 좋은 방법은 아닐 것이다라는 회의적 태도로 주인공을 변화하게 만든다.

시작은 올림픽선수촌에서 발생한 이스라엘 선수단에 대한 인질극이다. 그리스 사람들이 시작한 올림픽이란 모든 다툼을 중지하고 하나가 되어 신에 대한 제사와 함께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 축제였다. 그 평화의 자리에 바로 초대받지 못한 손님들이 들이닥친것이다. 왜 국가를 이루지 못한 우리들은 이 자리에 올 수 없습니까 하는 물음을 던지며 나타났다. 이 인질극이 피로 종결되자 암살의 배후였던 팔레스타인 검은 9월단을 대상으로 이스라엘은 특수요원을 투입해서 보복 암살작전을 벌인다.
요원 에브너에게 있어 처음 출발은 국가와 민족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이었다. 유럽으로 건너간 그가 끄나풀을 이용해 타깃을 하나씩 성공적으로 제거해갈 수 있었다. 한번의 암살이 성공할 때 마다 그들은 축배를 들었고 격려의 목소리에 감격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대상이 되는 상대방과 주변 사람들을 보다 가깝게 보게 된다. 옆방에 투숙한 이웃에게 친절히 말을 걸고 걱정해주는 자상한 모습의 행동가, 아름다운 부인과 딸을 가진 가장, 아라비안 나이트를 이탈리아어로 번역하는 지식인 등 적으로서의 면모에 겹쳐진 인간으로서의 또 다른 면모가 나타난다.

이렇게 나뉘어진 두 집단이 대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 가능성을 첫번째로 연 것은 음악이다. 암살 대상의 아파트에서 딸이 치는 피아노 소리에는 유럽의 고전음악이 담겨 있다. 즐겁게 치는 모습과 음악을 듣는 자신과 사이에 어느새 가벼운 공감이 만들어진다. 갑자기 이대목에서 큐브릭의 전쟁영화인 영광의 길 마지막 부분이 생각난다. 독일 소녀의 목소리에서 나오는 노래를 듣고 적인 프랑스의 장병들이 슬픈 감동을 느끼는 장면이다. 음악은 그렇게 문화와 민족을 넘어 여러 사람들에게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이 기능은 본의아니게 PLO 단원과 한방에 투숙하는 장면에서도 발휘된다. 두 집단은 라디오 하나를 놓고 좋아하는 음악 채널로 서로 바꾸려고 한다. 어정쩡하지만 그래도 둘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채널을 발견하고 서로 웃는다. 이어진 정치적 대화는 언어를 통해 양자간의 차이를 드러내지만 음악은 둘 사이의 소통 가능성을 내다보고 있다.

그리고 그들과 암살단원의 공통점은 있다. 양쪽 다 부모 혹은 자식으로 이루어진 가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돈을 받고 정보를 파는 루이라는 세력의 두목 또한 아이들을 먹여살리는 자상한 아버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 아이들에 둘러싸일 때는 냉혈한 암살자도 어색할 수 밖에 없었다.
주인공 에브너가 가진 사적인 시간의 상당부분은 아내의 임신, 출산 그리고 아이의 성장에 대한 내용이다.  어머니가 이스라엘에서 했던 첫번째 기도 또한 아이를 갖게 해달라는 것이고 그게 자신이라는 말을 듣는다.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사람의 생명이란 이렇게 귀한 것이다. 반면 본인은 적이라고 규정지워진 사람들을 찾아 악착같이 없애려고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는 게 현실이라면 무언가 물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감정이 그와 함께 행동한 단원들 전반에 퍼져나간다. 동료 단원을 죽인 여자를 찾아가 악착같이 해치웠지만 돌아오면서 그녀의 나신에 옷가지 정도는 덮어주는게 좋지 않았을까 회의를 가진다.
양쪽 다 가족이 있고 싸움을 그칠 수 없다면 그들 모두 이제 막 태어난 아이들에게까지 짐을 넘겨주는 것이다. 영원히 싸워야하는 업보를.

돼지 등 잡아 먹을 가축이라면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고 한다. 가까워져서 정을 주면 죽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낯섬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전쟁은 계속되기 어렵다. 상대방의 인간적 면모를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 회의적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면서 서서히 조직에서 이탈하게 된다.

영화가 길어지다 보니 스필버그가 괜스리 옛날 이야기를 가지고 길게 사람만 붙들어놓는다고 투덜대는 목소리도 많다. 하지만 굳이 이 시점에서 그가 민감한 문제를 늘어 놓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주기 바란다. 브루클린에서 바라본 강너의 맨하탄에는 9.11 때 무너진 쌍둥이 빌딩이 고스란히 서 있다. 관객의 시점을 굳이 그곳으로 붙들어 놓는 이유는 이 이야기가 현재에도 고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보복이 보복을 피가 피를 부르는 장면은 바로 어디일까? 그곳은 70년대의 파리도 베이루트도 아니고 바로 이라크를 비롯한 전세계 곳곳이 되고 있다. 골다메이어의 분노에 찬 목소리와 최고지도자의 결연한 결의의 모습을 그대로 부시로 바꾸어 보라. 모든 국제적 규칙을 깨고 있는 미국의 전쟁행위와 이 영화가 보여준 암살의 현장이 고스란히 중첩되지 않는가?
그럼 여기서 감독이 주장하는 바는 무엇일까? 주인공의 짙은 회의와 조직으로부터의 이탈을 불러온 감정의 변화와 깨달음이 바로 그 답일 것이다. 보복은 더 큰 보복을 가져올 따름이고 서로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갈등은 종결되지 않는다. 오늘 이라크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란을 어떨때는 북한을 위협하는 부시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메시지일 것이다.

굳이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과거로부터 배우기 위함이다.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다면 인간은 어리석은 행동을 계속 반복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사족을 좀 더 달자면 스필버그는 유태인이다. 그 말고도 유태인은 많다. 가깝게 보면 스타벅스 사장 슐츠도 유태인이다. 회사에서 벌어진 돈으로 이스라엘을 지원하기 때문에 우리가 스타벅스 한잔을 마시면 그 돈이 멀리 돌아 팔레스타인 소녀의 가슴에 박히는 총탄이 될 수도 있다는 고민을 하게 만든다. 하지만 유태인이라고 해서 꼭 이렇게 한 종류의 인간만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이스라엘로 돌아가자는 시오니즘 주창자도 있지만 이를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후원만 하는 사람도 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지원금이 없다면 현재의 이스라엘로는 간신히 생존할 수 있는 수준밖에 되지 않으니까 말이다. 마르크스, 프로이드, 트로츠키 등 셀 수도 없이 많은 사상가를 보유한게 유태인이라 결코 하나의 생각으로 모여있지는 않다. 날을 세운 말솜씨로 유태인과 부시를 비판하는 촘스키도 유태인이다. 조국 헝가리 공산주의 체제에 자유의 바람을 불어넣었던 소로스도 유태인이다.
이스라엘 내에서도 한 때 평화를 만들어가자는 세력이 다수를 차지한 적도 있다. 특히 암살로 끝나버린 페레스 총리의 평화정책이 계속 되었다면 양쪽의 관계는 한결 나았을 것이다. 아마 스필버그의 생각도 또한 어디 중간에 놓여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유태인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는 점을 몇차례 강조했었다. 쉰들러 리스트는 대표작이고 다른 작품에서도 그러한 코드는 여러차례 보여졌다.
이 영화에 대한 그의 입장은 이스라엘을 주인공으로 내세웠고 그 시각으로 그려졌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모두에게 던져질 수 있는 물음으로 만드는데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영화의 물음의 방향을 돌려보면 한반도에도 시사점이 적지 않을까 생각된다. 남과 북 모두 끝없이 서로의 자녀들에게 싸움의 업을 남겨주어야 할 것인가? 북한 사람들이 굶어죽어갈 때는 한사코 식량지원을 거부하는 자유주의자들이 한사코 북한 사람들의 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모습을 보면서 씁쓸함을 감추기 어려웠다. 최근에도 보면 강정구 해임건 관련해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열심히 시위를 한다. 동국대까지 찾아가서. 거기 가서는 반대하는 학생들이 시위할 자유는 주먹을 써가면서 까지 빼앗으려고 한다. 그들이 지키고 싶은 진정한 자유는 또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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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2-17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그래서 스타벅스 안가요...

사마천 2006-02-17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려운 문제죠. 촘스키처럼 좋은 유태인도 많은데.
슐츠도 개인으로 보면 대단히 배울점이 많죠. 참 뉴욕 시장 블룸버그도 유태인입니다.

마늘빵 2006-02-17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봤던 <그림자 정부>란 책이 생각나네요. 나중에 2권이 또 나온걸로 알고 있는데 그건 안봤어요. 이 책 혹시 보셨나요? 유태인의 세계지배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사마천 2006-02-17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름은 들었지만 보지는 못했습니다. 미국의 후원을 엎는다는게 가장 크겠죠.
 

게이샤의 추억을 놓고 전문비평가들이 오리엔탈리즘을 알려면 이 영화를 보라고 매도하는 견해를 보았다.
오리엔탈리즘이 서구의 시각으로 자신들이 바라보고 싶은 동양에 대한 이미지를 가져가는 의미라고 한다면 이 영화도 어느 정도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중국배우가 게이샤로 나온다거나 영어를 써서 만든다는 등도 그렇고 원작의 소재가 미국인의 눈으로 씌여진 소설이라는 점도 원인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하나 묻고 싶은 것이 같은 동양문화권에 속하는 우리는 일본을 잘 알고 있는지 하는 점이다. 그 척도로 일본에 대해 한국에서 나온 책이 일본어 혹은 타언어로 번역되는 경우가 있는가를 제시하고 싶다. 내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어령씨를 제외하고 몇이나 될까? 답은 꽤 회의적이다.
차라리 남북문제가 이슈가 될 때마다 늘 등장하는 시카고 대학의 브루스 커밍스나 게이오 대학의 오코노미 마사오 교수 정도 되는 전문가도 보유하고 있다 장담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은 무엇일까? 가깝기에 자기 이해에 따라 더 왜곡되어 보는 면이 많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다.

영화의 주제가 된 게이샤에 대해서도 이 주제에 대해 한국에서 나온 연구서가 있나? 아니면 한국의 유사한 존재였던 기생에 대해 재미는 차지하고 게이샤 만큼 깊이를 가지고 연구하거나 서로 비교해본 작품이 있을까? 그러한 책들이 일본에 팔리고 서구에 소개될만큼 깊이와 흥행성을 가지고 있나? 아마 답은 시원치 않을 것 같다.

게이샤=기생=창녀라고 등식을 만드는 사람조차 보았는데 이는 우리 스스로 눈에 편견을 씌우는 또 다른 오리엔탈리즘에 불과한 현상이다. 한국에서는 도자기 분야에서 조상들이 만들어낸 성과를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일본의 작품들은 단지 조선의 도공들이 끌려가 만든 것으로 가볍게 치부한다. 하지만 해외 박물관을 보면 일본 도자기에 대한 대접이 높으면 높지 절대로 낮지는 못하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는 장인에 대한 대우를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사회 시스템의 차이가 원인이었다.
공병호가 자기 책에서 표현한바를 빌리자면 조선에서는 관리들의 수탈 때문에 가장 좋은 도자기는 일부러
파괴하는 현상까지 나타났다고 한다.
재주를 가진 사람을 대접한다면 더 많은 재주꾼들이 나타날 것이고 그렇지 않는다면 반대의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조선의 기생 중에도 시대를 넘어 작품을 남긴 존재들이 있다고 한다. 허준이 푹빠졌고 자신과 대등하게 교류했던 이매창 등 역사적 인물들은 분명 있지만 이들이 계승되지는 못했다.
반면 일본은 재주에 대해 합당하게 값을 쳐주는 노력을 한다. 이건 인정하고 배워야 할 점이지 그냥 가볍게 보고 넘길 주제는 아니다. 그런 점에서 게이샤라는 문제 하나를 놓고도 처녀성을 팔아야 하고 첩으로 살아야 한다는 페미니즘 차원의 비극도 고려해야 하지만 돈 없는 집안의 여자가 사회적으로 자신의 성장을 보여줄 수 있는 그 나름의 생존방식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인들의 차가운 시각도 이해가지 않는 점은 아니지만 정 오리엔탈리즘이 문제라면 한국에서 그런 주제를 담아 훨씬 보편적으로 퍼져나갈 수 있는 작품을 만들면 될 것 아닌가? 이 작품에 이런 문제가 있다고 투덜대기 보다는 어떻게 이를 극복할 것인가를 논하는게 훨씬 생산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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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09 16: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마천 2006-02-09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작이 되었떤 책을 한번 읽어보려고 합니다. 나온지가 몇년 되었던데 인기가 좋더군요.

비로그인 2006-02-13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깝기에 자기 이해에 따라 더 왜곡되어 보는 면이 많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다. ' 동감에 추천입니다..^^
마무리는 헐리웃영화답게 너무 촌스러웠지만 그만하면 게이샤의 삶과 심리를 잘 표현한 괜찮은 영화란 생각인데 전 사람들의 딴지가 너무 놀랍더군요.
바로 후 조선통신사에 대한 책을 두 권 읽어서인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게 되더군요
미리 생각을 정해놓고 타자를 바라보는 그런 시선말입니다.
저도 오늘부터 미루고 있던 원작소설 읽기에 들어갑니다..^^

사마천 2006-02-13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토리 자체만 보면 약한 편입니다. 소녀가 성장해서 성인이되고 어려움을 겪다가 원하던 사랑을 얻는다. 단순하죠. 하지만 이 영화가 긴 시간 동안 보여주려던 것은 게이샤 문화 자체입니다. 그걸 감안하면 아주 혹평할 수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최근에 게이샤와 비교하면서 한국의 기생을 다룬 책도 들추어볼까 하는데 저자는 일본 사람입니다.

열린사회의적 2006-02-15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게이샤=기생=창녀'라는 공식을 만든 분이 저라면... 조금 쑥스럽네요. 음, 제가 적은 짧은 글에 게이샤를 보며 우리나라의 기생이 겹쳐진다고 했으니... 문화가 다른데, 한 줄 세워서 게이샤=기생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게이샤라는 인물이 스스로 감정을 억누르는데 반해 우리나라의 기생은 감정을 드러낸다는 것이 겹쳐진다는 뜻이였습니다. 이렇게 다를 수가 있구나. 그리고 오리엔탈리즘에 관해서는... 수잔 손탁은 중립적 객관성(?)을 대단히 강조하는 듯 한데...[해석학에 반대한다, 사진에 관하여...?] 게이샤라는 영화를 보니, 게이샤의 일생을 추적하는 것이 아닌 부분 부분에 멈춰섰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한 인물의 성장이 성찰이 되고, 이러한 성찰이 게이샤라는 문화를 드러낼 수 있는 장치가 되어야 하는데, 필요한 부분 부분을 끍어왔다는 점입니다. 물론 짧은 시간에 선택과 집중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런면에서 어떻게 균등하게 나누는가하는 점은 작가의 역량이며, 눈높이가 될 것입니다. 아울러 토를 하나더 달자면, 한국에서 나온 게이샤의 이론서가 없다고 현재 나온 책이 절대기준점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이런 부분은 좋다 이런이런 부분은 틀리다는 생각을 가져야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까요? 제 짧은 생각은 이러합니다. 하하.... 그리고, 소나무에 대해서 한마디 더 하자면, 소나무 책 한권을 다 읽고 참 좋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소나무를 보고, 내가 읽은 소나무 책과 비교하여 몸으로 거슬러 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ktf에 관련된 책에 대해 상당한 호평을 하신 듯 하여... 얼마전에 아쉽게도 이벤트의 상품이 자사 직원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기사와 cp(컨텐츠 제공업자)의 자리를 알기에 일방적인 찬사는 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마천 2006-02-15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린사회의적님께/ 원래 이글과 앞의 글을 네이버에 올렸습니다. 반론 중에 게이샤=창녀라고 하신 분들이 있어서 거기에 대해 반박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게이샤에 대한 책만 없는 것은 아니고 전반적으로 일본에 대해 나온 책이 너무 적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사실 한국인은 일본을 제대로 알고 있나라고 물으면 답이 회의적이기 때문이죠. 그러다보니 오리엔탈리즘 논쟁 이전에 가깝지만 그렇기에 더욱 모르는게 아니냐고 따져보고 싶더군요 ^^
참 KTF 건은 굳이 칭찬하려던 건 아닙니다. 당시 사장하시던 분의 변화와 적응력이 돋보였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했습니다. 참고로 KTF는 CP들 착취를 지독하게 합니다. SKT보다 더 하다고 하더군요. 양쪽 다 CP 하는 제친구녀석 왈. 그런걸 보면서 공기업 개혁은 반드시 (ex-공기업까지도) 필요하구나 느끼게 하더군요.
여러모로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게이샤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던지고 답을 한다면 무슨 내용을 채워주면 좋을까?

시간 순으로 볼 때 탄생, 성장, 갈등과 고민, 행복 등등을 하나씩 잡아서 서술해보면 어떨까 답해본다.
이 영화는 그런 내용들을 우선 꽉 채워나갔다. 게이샤를 아는 사람이라면 약간 지겹게 느껴질 정도로 까지 상세하게 과정 하나 하나와 관련된 사람 하나 하나를 그려낸다.

그럼 정말 게이샤는 무엇일까? 답 하나는 남자들에게 감성을 깨워주는 존재다.
정략결혼으로 맺어져 현재의 부인은 가정을 유지하기 위한 요소로만 생각하는 남자들에게 가슴 깊은 곳의 감성을 일깨워준다. 오랜 기간 연마한 훌륭한 전통 무용 솜씨를 보여주고 샤미센이라는 악기를 뜯으며 부드러운 말솜씨로 술자리의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그들을 현대적 개념으로 보자면 엔터테이너라 할 수 있다.

선비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자를 위해 화장을 한다고 한다. 특정한 기술을 연마하는 것 또한 그 솜씨를 알아주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단지 여자로서의 매력만을 본다면 그만한 대가를 합리화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본의 문화가 한분야의 최고의 장인이라면 그만한 값을 쳐주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인데 게이샤에 대한 대접 또한 마찬가지로 보인다. 자신에게 솜씨를 닦아 남과 다른 유니크한 존재가 되고 스스로를 계속 높여나가는 것이 바로 그들 나름의 살아가는 법칙이었을 것이다. 속되게 말해서 술집도 여자가 나오면 비싸지는데 어떤 곳은 연예인이 나와서 천정부지의 가격을 청구한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게이샤라는 존재를 여자 자체로 보는게 아니라 훌륭한 솜씨를 가진 최고의 연예인라고 본다면 그 가격은 보통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높은 가격이 될 것이다.

그럼 누가 게이샤를 만들어갈까? 바로 게이샤다. 잡초같은 시골 아이를 데려다가 꾸준히 키워서 어느날 시장에 데뷔시키는데 잘되면 대박이 나게 된다. 그동안 투자했던 몸값에 교육비를 모두 뽑꼬도 남아서 이제 주변을 모두 부양하는 존재가 된다. 이렇게 보면 게이샤 사업은 연예기획사 같지 않은가?

영화에서 감탄한 점은 주인공의 대사가 하나 같이 시적인 표현이었다는 점이다. 상대의 감정을 잘 배려하며 선택된 단어로 만들어진 문장은 하나 하나가 인생철학이 깊게 담긴 시다. 매력은 결코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있다고 한다. 게이샤들은 보통 사람과 다르게 어린 나이부터 인생의 시련을 겪고 이를 극복해가며 성장해온 존재라 성숙의 정도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 같다. 주인공이 남긴 말과 장면 하나 하나를 연결해보면 더욱 그런 느낌이 든다. 

또 영화를 보다보면 기모노를 매우 대단한 존재로 나오게 된다. 여러차례 핵심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소재로 쓰인다. 스모에 대한 표현과 원리 설명도 재미있다. 이렇게 하나 하나를 통해 일본문화의 여러 요소에 대한 이해를 높여준다.

와호장룡에서 활약한 두 중국 여배우를 게이샤를 삼고 남주인공은 라스트 사무라이에서 탐 크루즈와 열연한 와타나베 켄으로 내새운 점은 모두 미국 등의 관객을 의식한 것 같다. 덕분에 가깝게 본 한국사람이나 중국에서의 시각은 곱지않을 수 있다. 참고로 중국에서는 상영금지라 DVD 해적판이 깔려서 돈다고 한다. 어쨌든 일본 문화의 한단면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영화 감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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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사회의적 2006-02-05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본 소감을 짧게 얘기하자면, [게이샤에 대한 동경으로 인해 스스로의 감정과잉을 드러낸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한 게이샤의 인간적 성숙으로 통한 성찰적 언어가 아닌, 게이샤이기에 내놓는 듯한 단어를 통해 사람이 없음을 느꼈고, 게이샤는 사랑도 할 수 없으며 그냥 장식으로 머무르는 모습에 우리나라의 기생과 여러모로 겹쳐지더군요. 암튼 제가 본 영상은 서구인의 게이샤에 대한 동경으로 보였습니다. 또다른 오리엔탈리즘이라 하면 일반화가 될까요^^;

사마천 2006-02-06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치요의 이미지가 허균이 사랑한 기생, 이매창처럼 시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역량을 보여줘서 돗보이던데요.
물론 자신의 첫남자가 돈으로 결정된다던가 아내는 될 수 없고 지극히 나이차 많은 비정상적인 연애에 머물를수 밖에 없다는 점 등은 이 직업이 가진 한계이겠죠.
하지만 게이샤 집단이 스스로 재생산하면서 가족처럼 공동운명체가 된다는 점은 가진 것 없던 여자로서 그 나름의 생존방식 아니었을까요? 그런면들이 잔잔히 전달되기에 저로서는 나쁘지 않았던 관람이었습니다. ^^

비로그인 2006-02-13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 배우문제에선 전 좀 다른 각도입니다. 게이샤영화지만 어차피 미국자본으로 만들어진 영화니까 그들이야 어떻게든지 많이 팔아먹어야할테고 어차피 아시아배우를 써야할텐데 저 세 배우말고 지명도가 높은 배우들이 없으니까요.

영화에 대한 감상은 비슷한 곳이 많아 반갑습니다..^^
 

조선초기 연산조 시대 바야흐로 문화혁명이 일어났다.
출신이 아니라 재능있는 사람들에 대해 그들의 재능을 마음껏 선보일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시장바닥에서 푼돈 벌어들이려고 아까운 재주의 단면만 보이던 각지의 예능인들이
일제히 모여서 최고의 솜씨를 뽐내게 된다.
당시 조선의 연산왕은 가까운 일본의 경우 각 분야에서 최고의 솜씨를 닦은 사람은
귀천을 불문하고 명인 호칭을 붙여서 높이쳐주었기에 사회가 고루 발전된다는 사실을
벤치마킹하였다고 한다.

덕분에 조선의 문화계에서도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
장안의 기생 중 최고 솜씨를 발휘한 녹수가 왕의 후궁으로 발탁되는데
이어서 광대 중 최고 솜씨를 발휘한 궁길이도 벼슬을 받는다. 무려 종4품이라는
당상관의 지위에 올라서게 된다.
조선 왕 중에 이렇게 문화인을 우대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연산왕의 후원책은 관객의 수준을 단시간에 높여버린다. 시정의 평민들에서 왕과 후궁
더불어 고위 신료들을 대상으로 한 공연이 이어지게 된다.
여기에 발맞추어 광대들 또한 조직화가 일어난다.
궁중의 후원을 받아 풍부해진 자금을 바탕으로 엔터테인먼트 기획사가 생겨났다.
그  우두머리 장생이는 최고의 예능인들을 뽑아 훈련시켰고
높아진 관객의 지위와 수준에 따라 극의 성격 또한 풍자극에서 정치시사극으로 올려버린다.

당대의 관료들은 세조의 찬탈 이후로 권력남용이 매우 심했다.
전두환이 깡패짓하고 나서 군인이나 권력자들이 각종 인사청탁과 뇌물수수를 마음대로
자행했던 것을 돌아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이렇게 비대해진 조정의 권력자들은 툭 하면 유교를 명분으로 삼아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때 장생이는 각종 정치시사극들을 제작하여 이들 관료들의 행위를 노골적으로 비판한다.
덕분에 멀리 보면 민중문학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작품들이 연이어 나왔고 사회적 파장도 컸다.
평안감사 뇌물수수 실태 고발은 죄가 많았던 형조판서의 자진고백과 퇴출을 가져오게 된다.
그동안 왕에 대한 언로가 조정신료들에 의해 차단되었지만 이제 새로운 정치시사 프로그램과
이를 방영하는 채널이 형성됨에 따라 언론의 백가제방 시대가 열린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시장바닥의 민초들이 가졌던 여론이 고스란히 왕에게 전달되는 정치 혁명이
발생된 것이다.

광대 극단의 소재와 기교는 점점 확장된다.
중국 경극을 벤치마킹해서 후궁들의 왕의 사랑 쟁투기를 만들었는데
이게 불똥이 잘 못 튀어 연산왕이 선대왕 후궁들을 죽이게 하는 비극을 만들고 만다.
연극과 현실이 너무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버린 결과다.
그리스 비극처럼 카타르시스를 통한 정신의 고양이 아니라 직접적인 반응을 유도하는
선동극이 되어버린 꼴이다.
당시 관객 중에 연산왕의 할매가 있었는데 급작스러운 혈투에 놀라 사망하고 만다.

이렇게 현실에서 점차 비중을 확대하는 문화예술계의 발전에 대해 조정의 신료들이
무리를 지어 반발하게 된다. 궁길이에 대한 암살 기도는 그러한 반발의 일환이었는데
일단 몸을 던진 동료 문화인들의 희생에 의해 보호될 수 있었다.

연산왕은 창작의 자유를 통해 만들어진 백가제방을 발전시켜 가까운 일본과 중국에 대한
수출을 할 수 있는 경쟁력 있는 문화상품을 만들려고 한 자신의 의도가 너무 곡해되었다고 생각한다.
후일 조선이 도자기 산업에서 일본에 뒤쳐지게 된 것 또한 제작을 담당한 도예인들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은 것이 근본 이유다.
문화 상품 또한 제작자들의 수준이 올라가야 걸작이 나오는데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신료들에
대해 불만이 쌓인다. 가까운 선왕인 세종대왕이 노비 출신인 장영실에 대해 고위직을 주려고
했을 때 그렇게 반대하던 것이 조정 신료들 아닌가. 궁길이에 대한 높은 대접 또한
문화인의 사기를 앙양시켜 조선의 문화를 아시아 곳곳에 퍼져나게 만들 한류를 만들려고 한 것인데
너무나도 이해하지 못한다.
참 안타깝게 느끼지만 여기서 물러설수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 형성된 자유로운 시대를 기득권층은 강하게 거부하게 된다.
후일 성군이라 꼽히는 정조 또한 문체의 자유로움을 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유가 매한가지였다.
문체의 자유로움은 권위를 부정하게 되고 이는 사회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도 잘 나타난다. 웃음을 가져오는 문학이 종교적 경건성을
위협하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중 희극 부분을 불태우게 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조선의 신료들이 보기에 풍자극을 계속 놔둔다면 신분의 상하도 없는 혁명이 일어나고 자신들이 쌓은 권력이 다 무너질 것처럼 느끼게 된다.
그래서 연산왕에 대한 반란과 함께 광대들의 숙청이 일어나고 질서는 예전으로 돌아간다.

멀리 영국의 셰익스피어 극장이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모여 음란패설을 포함한 시대비평을
보고 웃었는데 그 관객에 엘리자베스 여왕도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 비하면 조선에서 연산왕의 시도가 실패로 결말지어진 덕분에 사회 발전을
수백년 앞당길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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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있는 영화였습니다. 패러디 했으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마시고 같이 한번 웃어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역사적 사건을 보는 시각 또한 다양해질 필요가 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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