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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랜 전통이 있어 보이는 캠퍼스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수학과 강의실에서 노 교수는 대학원 학생들에게 전쟁을 이길 수 있던 힘이 수학자들에게서 나왔다고 한편으로는 자랑을 다른 한편으로는 은근히 ‘사회적 책무’를 강조한다.
당시는 2차 대전이 막 끝난 직후라서 아직 미국사회는 전쟁에 대한 기억이 생생했고 대학 또한 그 영향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 먼저 2차 대전은 어떤 성격의 전쟁이었을까 생각해보자. 무엇보다 가장 많은 사람이 동원되고 죽어 나가고 가장 넓은 지역이 파괴되었다는 것이 떠오른다. 이렇게 전쟁이 잔인해진 원인으로는 무엇보다 과학기술이 총동원되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영국이 프랑스에서 쫓겨나고 거의 몰락 직전에 처했을 때 독일 공군의 엄청난 공습을 견디게 한 것은 무엇일까? 물론 비행기를 몰고 쉴틈 없이 출격해나가 하늘에서 산화해간 영국귀족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도 한몫을 했다. 하지만 실상 하늘을 막아준 것은 적의 위치를 보다 빨리 발견하게 만든 레이더였다. 이 기술 하나로 영국은 자신의 공군력을 훨씬 강력하게 보이게 했고 히틀러에게는 좌절을 안겨주었다.
다시 독일은 잠수함을 발전시켜 영국의 자원줄을 끊으려했고 실제 거의 끊어질 뻔했다. 이 때 다시 영국을 살려준 것은 바로 바닷속 잠수함을 찾아주는 음파탐지기의 개발이였다. 이외에도 전쟁에는 요즘도 가끔 거론되는 ‘대량살상무기’인 독가스, 젯트 엔진으로 날으는 비행기, 혼자 무작정 날라가 터지는 미사일의 개발에 과학은 총력을 다해 봉사했다. 그리고 하이라이트인 원자폭탄 프로젝트는 최고의 물리학자였던 아인쉬타인의 적극 후원으로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최고의 학자들을 모두 모아 만들어낸 결실이었다.
미국과 영국이 유태인의 독립을 적극 후원하게 된 것도 한편으로는 독일이 자행한 학대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점을 미안하게 생각한 점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서 유태인 출신 과학자들의 협력이 컸기 때문이다. 아인쉬타인을 비롯하여 많은 수의 유태계 과학자들은 연합국이 이기는 데 큰 공로를 세웠고 그 보상으로 이들은 독립된 유태국가를 원했다.

그러면 수학은 이런 전쟁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딱딱한 수학책과 과연 전쟁은 어떤 상관이 있을지 쉽게 떠올리기 힘들 것이다. 먼저 전쟁을 잘해서 황제에 오른 나폴레옹을 보자. 나폴레옹은 훌륭한 정치가이고 전략가였지만 그전에 뛰어난 포병장교로서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내 위태로왔던 프랑스 혁명 정부를 지켜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수학을 잘 했다. 자 대포를 잘 활용한 것과 수학을 잘하는 것에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쉽게 인터넷게임 포트리스를 떠올리면 된다. 지형과 기상 조건을 해석해서 상대방에게 포탄을 날리는 것이 승리의 간단한 비결이고 그 핵심에는 수학공식이 놓여있다.
이와 같은 군사와 수학의 관계는 계속 이어져 2차 대전때 우리가 활용하는 컴퓨터를 개발하는 목적 또한 암호해독과 미사일의 탄도계산이 된다. 바로 그런 컴퓨터를 개발한 노이만도 수학자였다.

근대전에 들어서서 암호의 중요성은 급속도로 커졌다. 2차 대전때 연합국은 에니그마라는 해독기를 만들어 독일의 암호를 다수 풀어냈다. 서부전선에서 독일 군사력의 방어태세가 그렇게 강하지 않다는 점도 확인하고 노르망디에 상륙한다. 실제 여러 곳에서 진행된 상륙작전에서는 병력 피해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참혹한 전투 장면으로 유명한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배경이 되는 오마하 해변의 전투 한 곳에서는 수천명의 희생자가 발생했지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어쨌든 빠르고 정확한 암호 해독은 많은 수의 생명을 구해낼 수 있고 군사관계자들은 여기에 몰두하게 된다.
여기서 암호에 대해 조금만 더 생각을 해보자. 내가 무슨 물건을 감추고 싶다고 해서 완벽하게 잠그기만 하려고 한다면 쉬울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원래의 의미를 다시 찾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모든 암호는 풀어낼 수 있는 열쇠를 가져야 하고 이를 가로채려는 쫓고 쫓기는 싸움이 계속 전개된다.

어쨌든 전쟁은 끝났지만 상황은 그리 많이 바뀌지 못했다. 두 강대국은 각자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유럽과 아시아에서 체제 경쟁을 하게 되고 세계는 냉전의 시대로 돌입한다. 이어서 중국에서는 혁명이 한국에서는 새로운 전쟁이 발생했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이들은 계속 새로운 세계대전의 위협으로 인류를 몰아갔다.
사실 2차대전 중에는 미국도 물자를 소련에게 무상 지원하였고 이런 소련과의 협력을 위해 미국은 공산주의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대한 정책을 폈었다. 하지만 냉전으로 들어서자 미국사회는 내부적으로 삐딱한 이단자들을 모두 몰아내는 사상전을 전개한다. 미국에도 공산당이 있었고 좌파에 동조적인 지식인들도 상당수였지만 이러한 빨갱이 사냥을 통해 사회는 급속히 획일화된다. 심지어 로젠버그와 같은 과학자는 증거도 없음에도 기밀누설죄로 사형을 선고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같다. 이러한 움직임은 같은 기간 프랑스에서 공산당이 레지스탕스 운동의 혁혁한 공로를 인정받아 급속히 세력을 확대한 것과는 명백히 반대되는 방향이었다.
당시 사회를 풍자한 영화로는 역시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가 압권이다. 냉전이 끝난 지금의 눈으로 본다면야 딱딱한 흑백화면 만큼이나 영화에서 나오는 인물들은 당시의 분위기를 생생히 전달한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 내쉬는 개인적으로 보면 원래 사람과 가깝게 지내는 성격이 아니었다. 학생들이 캠퍼스에서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보이는 썰렁한 농담들이나 여러가지 행동들에서 그는 항상 남보다 앞서기만을 바랬다.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내쉬의 태도와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처음 빅 브라더를 만나서 주고 받던 이야기 중에 원자폭탄의 사용에 따르는 희생보다는 전쟁을 위해 필요했다고 옹호하는 주장을 폈던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는 시대적 시대적 사명감에 적극 호응하려는 자세를 취했던 것이 그만큼 과학기술의 사회적 영향이나 가치에 대한 고민 보다는 남보다 앞서는 성과를 내는 것 자체에 더 집착했던 것이다.

그의 천재성과 독창성을 볼 수 있는 예는 게임이론에서 남긴 업적이다. 원래 교과서에 나오는 가장 흔한 예는 교도소에 갖혀 있는 불쌍한 두 죄수의 경우다. 각자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게 되면 둘 다 망한다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모두가 블론드 미인을 쫓다보면 모두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라는 재미있는 비유로 나오게 된다. 약간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을 붙여보자. 남자가 블론드 미인을 차지 했을 때의 만족도는 2, 보통 여자를 차지했을 때는 만족도가 1이라고 한다. 모든 미인에게만 달려들면 한 남자를 제외하고 나머지에게는 아무것도 돌아가지 않는다. 전체 만족도의 합은 딱 2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각자가 ‘사전 조율’을 통해 보통 여자를 추구해서 맺어진다면 만족도는 블론드 미인을 제외하고도 최소한 4 이상이 될 것이다. 이러한 비유를 통해 내쉬는 과감하게 아담 스미스가 틀렸다는 주장을 한다.
독창적인 이론이 이해되고 대중화되는 것은 긴 시간이 걸리지만 기반이 단단할수록 멀리까지 영향이 미친다. 수학에서 출발한 이론은 물리, 화학 등등을 거쳐 마침내 경제학과 사회이론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영화는 그가 승승장구해서 명예롭게 올라서는 것으로 계속 이어지지만 한순간에 반전이 나오게 된다. 주인공 내쉬나 쳐다보는 관객 모두에게 두 가지 세계의 긴장을 놓고 고민하게 하다가 갑자기 진실을 드러내보이는 그런 수법은 경탄을 자아낸다. 마치 <식스 센스>를 떠 올릴 수 있는 놀라운 플롯 구성이다.
어쨌든 판명된 세가지 허상은 어린 소녀, 동년배의 룸메이트, 사명을 부여해 줄 수 있는 비밀요원 등이다. 이는 주변으로부터 이해되고, 사랑받고, 권력을 위임 받고 싶다는 세가지 차원의 욕구와 일치한다. 결국 문제를 만든 것은 내쉬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 원인도 간단하게 판명된다. 대부분의 병이 그렇듯이 스트레스가 가장 큰 원인이다. 어찌 보면 허상은 한편으로는 내쉬의 강한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자기 치유의 기능이었던 것이다. 허상이 강한 것 만큼이나 내쉬의 욕구가 강했던 것인데 잘 쳐다보면 그에게는 원자폭탄의 위협에서 자신의 가족, 이웃, 위대한 미국 모두를 구원한다는 대 사명을 안고 있었다. 그 짐 하나만 내려놓아도 훨씬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했다.
니체나 고흐를 생각해보아도 천재와 광기의 사이가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신병에 대한 약도 알고 보면 주로 머리의 회전을 둔하게 만드는 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사람을 바보 쪽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너무나 비참한 현실이다. 하지만 천재를 이렇게 몰아간 것은 결국 당대의 사회다. 영화가 배경으로 냉전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긴 기간을 담고 있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관객의 입장에서도 그런 배경에 대해서 하나 하나 이해를 넓혀간다면 내쉬의 고통은 결코 개인 혼자만의 고통이 아니라는 것을 찾아 갈 수 있다.
사회적 고통이 개인에게 고스란히 안겨지고 그 개인은 그걸 모두 짊어지려다 완전히 무너져 버리는 그런 비극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는 않았다.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몸을 추스려 다시 일어섰고 그 외로운 싸움은 마치 돌을 밀어 언덕을 올라가려고 해도 다시 넘어지고 마는 시지푸스와 같은 고난의 길이었다.

영화에서는 시간이 흐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교정을 걷는 내쉬의 발걸음 주변에서 그의 뒤뚱거림을 흉내내는 버르장머리 없는 젊은 학생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들의 자유로운 머리, 옷 무엇보다 권위에 대한 부정을 드러낸다. 베트남전 반대의 열기에서 만들어진 세상과 대학의 변화, 수십년의 세월이 짧은 영상에서 보여지는 것이다.
어쨌든 그 과정에서 내쉬의 마음은 점점 넓게 열린다. 학생을 가르치는 것조차 자신의 시간을 헛되게 낭비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그이였기에 종종 강의시간이라는 중요한 약속을 머리에서 흘려버렸다. 하지만 이제 그는 웃으며 눈높이를 낮추고 자신으로부터 도움을 받고자하는 모두에게 기꺼이 도움을 준다.

이렇게 그가 변해가는 것에는 주변의 도움이 컸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힘은 무엇보다 가족의 사랑이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감싸안기에는 고통이 정말 너무도 컸다. 화장실에서 깨져나가는 유리 정도로 묘사하기에는 너무나 큰 고통이다. 비록 영화에서는 이를 밋밋하게 아름답게만 처리했지만 실제로는 결코 간단치 않았을 것이다.
사회에서 우뚝서려고만 노력하던 천재였지만 주변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사람, 사랑, 사회 모두를 새롭게 이해해가는 과정이 찬찬히 그려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노벨상 수상의 소감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머리에 있지 않고 가슴에 있다고 하는 말이 내쉬의 삶 전체의 교훈일 것이다.

또 하나 이 대목에서 더 배워야 할 점은 서구 사회가 천재를 아낄 줄 안다는 점이다. 누가 정신병력이 있는 사람에게 학생들을 맡기고 싶을까? 허름한 대학도 아니고 미국에서 세번째로 만들어진 프린스턴 대학에서라면 더더욱 쉬운 일은 아니다. 분명 여기저기서 반대는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서구에서는 잘하는 것을 인정하고 더 잘할 수 있게 만드는 전통이 저변에 깔려 있다. 소년 피히테는 가난한 소치기였지만 그 천재성을 인정해준 후원자들에 의해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천재는 신의 창조품이지만 사회의 어느 곳으로 떨어질지는 모른다. 그 창조품을 찾아서 키울 줄 아는 것은 사회의 몫인데 한국 사회는 그런 일들을 제대로 못해내었고 지금도 못하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은 상을 받는 것으로 끝난다. 조금 더 상식이 풍부한 사람은 수학이 노벨상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내쉬는 수학이 아니라 경제학 분야에 대한 기여를 가지고 이 상을 받게 되었다. 노벨상의 대상이 아니라고 해서 수학이 중요하지 않다는 점은
그래서 필드상이라는 이름으로 수학 분야에서 노벨상과 견줄만한 상이 따로 있다. 이 상은 4년마다 한명에게 주기 때문에 노벨상보다 더 귀하게 여긴다.
영화의 대사를 꼼꼼히 살펴본 사람은 대학원에 막 들어간 내쉬가 투덜대며 왜 필드상을 주지 않느냐고 농담조로 이야기하는 대목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또 영화를 아주 즐기는 사람이라면 수학자가 주인공인 또 하나의 영화 <굿 윌 헌팅>에서 교수를 보고 필드 메달리스트라고 높이는 말이 나왔다는 점도 기억에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 상이 바로 그 상이다.
여기서 하나 알아야 할 수학의 포인트는 이 상은 40세가 넘은 사람에게는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학의 세계에 있어서 나이는 창조력에 대해서 가장 큰 적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버트란드 러셀이라는 대단한 수학과 철학, 넓게 사회학에 까지 많은 영향을 끼친 분이 있다. 이 사람은 처음 창조력이 가장 왕성할 때 수학을 공부해서 명저와 함께 많은 업적을 남겼고 자신의 창조력이 떨어져간다고 생각한 순간 철학으로 분야를 바꾸어 다시 훌륭한 연구를 남겼다. 이제 아주 머리가 나빠졌다고 생각하게 되자 아예 사회운동쪽으로 방향을 틀어버렸다.
그래서 40이 넘어가는 경우는 대부분 더 이상 창조력이 발휘되기 어렵다고 보고 상을 주지 않는다.
수학에 대한 이해를 조금 높였으니 주인공의 상태를 돌아보자. 주인공 내쉬도 마찬가지로 안타깝지만 프린스턴에서 다시 연구를 하게 되었을 때는 이미 창조력은 많이 쇠퇴하게 된 상태였다. 그리고 그의 업적이 나중에야 이해되고 대중화되었기 때문에 필드상을 받을 수는 없었고 또 다른 공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요 업적은 젊은날의 성취에 주로 머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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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살바도르:엘살바도르와 광주, 1980년

올리버 스톤의 실질적 감독 데뷔작 "살바도르"
올리버 스톤의 감독 데뷔작은 1981년의 공포영화 "악마의 손(The Hand)"이었지만, 그를 할리우드의 이단아, 숨겨진 뇌관으로 만든 데뷔작은 "살바도르"였다. 이 영화가 중요한 것은 그가 앞으로 펼쳐나갈 작업들과 그의 생각들을 엿볼 수 있는 문제작이었기 때문이다. 올리버 스톤은 미국사에서 가장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분들을 조망함으로써 가장 미국적인 감독이자, 미국적이지 않은 감독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올리버 스톤은 미국 현대사의 명암을 정공법으로 파고드는 감독으로 정평이 나 있지만, 그가 처음부터 그런 감독은 아니었다. 그의 데뷔작인 "악마의 손"은 컬트적인 구성이 돋보이긴 했으나 소수의 매니아들에게나 인정 받는 작품이었고, 그는 일찍 감독 데뷔를 했으나 이후엔 감독보다는 시나리오 작가로 더 명성을 얻었다. 그는 감독상을 받기 전에 "미드나잇 익스프레스(1978)"로 먼저 각본상을 받았다.

이후 브라이언 드 팔마와 "스카페이스", 마이클 치미노와 "이어 오브 드라곤" 등을 촬영하며 전형적인 장르영화에 충실한 각본을 썼다. 이 무렵 그리고 이후에 다소 약화되기는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인종차별적인 묘사와 지나친 폭력으로 많은 비판을 받아 왔고,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는 한 때 한국에서도 영화를 볼 수 있었던 이들에게 한국적 인권 상황을 생각하게 해 많은 인기를 얻었으나 지금은 인종적 편견을 드러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올리버 스톤 자신도 “난 인종차별주의자였고 국수주의자였으며 총을 숭배했다”며 당시 자신의 문제점을 시인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새로운 감독 데뷔작(?)이 된 "살바도르"는 그런 과도기적 상황에 놓인 자신의 처지를 종군 기자 리처드 보일(제임스 우즈)에 투사해내고 있는 작품인지도 모르겠다. 보일은 한때는 그나마 잘 나가던 카메라 기자였고, 영화 "킬링필드"의 주인공이기도 한 "시드니 쉔버그"와 함께 캄보디아 취재 기자로 나선 적도 있었다. 그러나 타고난 냉소와 좌충우돌하는 기질 때문에 그를 고용해주는 통신사 하나 없이 시시껄렁한 생활을 해나가고 있다. 아내는 넌덜머리 나는 결혼 생활을 끝장내버리고, 그는 밀린 아파트 월세에 쪼들리다 못해 통신사에 전화를 해대며 취재거리를 달라고 애걸복걸한다.

"엘살바도르" - 피의 땅, 학살
결국 "리처드 보일"은 카메라 한 대를 달랑 들고 내전이 한창인 엘살바도르에 간다. 이 영화는 엘살바도르 내전(1980-81년) 당시의 종군 기자였던 보일의 자서전적 기록을 재구성한 영화다. DVD에는 그의 실제 회고 일부가 담겨 있지만 아쉽게도 자막이 없다. 영화 초반의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주된 배경이 되는 엘살바도르는 어떤 나라인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엘 살바도르는 1856년 독립하지만, 시몬 볼리바르가 꿈꾸었던 라틴아메리카 연방공화국의 꿈은 미국과 같은 새로운 강대국의 출현을 염려한 영국과 미국, 그리고 나머지 유럽 제국들의 방해, 내부적으로는 이미 기득권을 확보하고 있던 지주계급의 반대로 무산되고 만다. 특히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미국의 우선권을 주장하며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종속을 강화해나간다.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약소국들을 일컬어 "바나나공화국"이란 말로 부르는 것은 유나이티트 프루츠와 같은 미국계 다국적 기업이 한 나라의 경제와 사회를 좌우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냉소 섞인 풍자이다. 미국과 이해를 같이하는 소수 지주계급은 부를 축적하여 전국토의 56%를 14개 문벌에서 차지할 정도로 엘살바도르의 빈부차는 극심했다. 결국 1932년 농민을 이끌고 파라분도 마르티는 반란을 일으키지만 결과는 농민군 3만 명의 참살로 끝나고 만다.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의 게릴라 집단의 명칭은 대개 그 지역 출신으로 과거 반란을 주모했던 혁명가들의 이름에서 유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들의 저항, 아니 이들의 고통이 얼마나 오랜 역사적 연원을 지니는지 알 수 있다.
 
라틴아메리카 민중들 전체에 커다란 자극을 준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난다. 쿠바가 소모사 정권을 전복시키는 혁명에 성공했고, 베트남이 거대한 코끼리인 미국의 밑창에 구멍을 내는 승리를 거두었고, 이란에서는 팔레비 정권이 강력한 비밀경찰과 미국의 지원을 물리치고,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을 성공시킨다. 이런 연이은 혁명의 성공은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고, 1970년대부터 엘살바도르 안에서도 군부독재에 대한 좌익 게릴라 조직의 저항이 시작된다. 그리고 1980년 분열되어 있던 게릴라 조직은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으로 통합되기에 이르렀다. 같은 해 3월 로메로 대주교 암살사건으로 촉발된 엘 살바도르 내전은 더욱 극렬한 상황으로 치닫는다. FMLN은 1983년에 이르러서는 엘살바도르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거대 세력으로 거듭나지만 그 와중에 엘살바도르 군부는 "죽음의 군단"이란 퇴역군인과 치안경찰 등 우익 민병대를 조직해 무수한 민간인들을 학살한다.

기자 정신과 보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미국 언론
영화는 그런 시대 배경 속에 있으며, 그중에서도 FMLN의 결성과 로메로 주교의 암살, 새로운 람보 - 레이건의 등장이란 극적인 순간의 엘살바도르를 다룬다. 영화 속에서 제임스 우즈는 그의 연기사상 거의 최고의 연기 솜씨를 보여주는데, 그 자신이 리처드 보일이 아닐까 싶을 만큼 대단했다. 영화는 미국의 라틴아메리카의 소국 "엘살바도르"를 어떻게 실질적으로 지배하는가를 할리우드 영화치고는 대단하단 생각이 들만큼 잘 지적해내고 있다. 비판의 화살은 단지 정치인들에게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거기엔 한때 우리 사회에서 대통령을 하야시킬 만큼 대담한 비판정신과 공정성으로 찬탄의 대상이 되었던 미국의 언론이 어떤 방식으로 교묘하게 자본의 검열을 받는가를 살필 수 있다.

미국은 베트남전의 패배를 군사적 패배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베트남전의 패배를 내부의 전쟁에서 패한 것, 언론과의 전쟁에서 패한 것, 고도의 정치전, 심리전에서 패배한 것으로 생각한다. 베트남에서의 패배를 군사적인 패배로 생각지 않는 까닭은 미국이 세계 도처의 전쟁에 참전한 이래 거듭되는 그들만의 산술방식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기실 이런 전통은 인디언 헤드헌터식 산술법이란 지극히 미국적인 산술법에 의한 것이다. 예를 들어 서부영화에 등장하는 인디언 헤드헌터들의 방식, 인디언 머리가죽을 벗겨오면 가죽당 얼마씩 달러를 지불하는 것 말이다. 베트남전에서 베트콩의 귀를 잘라 수집하는 것도 어찌보면 이런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다. 미국은 전사자의 시체 수로 전투의 승리를 가늠한다. 미군 전사자보다 많은 베트콩을 죽인 전투라면 그 전투는 승리한 것이고, 이런 식의 전투에서 미국은 단 한 차례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보일은 엘살바도르의 진실을 파헤치고자 하지만, 베트남전 이후 새로운 보도 정책과 검열 방식을 채택한 미국에서는 취재는 가능할지 모르나 이를 보도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종군기자들의 사망이 부지기수로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의 일이다. 이제 미군을 수행하는 종군기자들은 전쟁에서 가장 먼저 타깃이 되거나 에어컨디셔너에 의해 기온이 조절되는 안락한 브리핑룸에서 미군 보도통제관이 전해주는 뉴스만을 앵무새처럼 되뇌이는 존재가 되었다. 그 결과 미국의 시청자들은 안방에서 편안하게 매번 최고의 민간인 학살 수치를 갱신하는 미군의 전투 수행 방식을 역사상 가장 깨끗하고, 과학적인 첨단 전쟁으로 인식하게 된다. 미군은 그네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줌으로써 남북전쟁 당시 브로디의 사진처럼 전쟁은 일어났지만 단 한 명의 전사자 시신도 발견할 수 없는 화면을 본다. 영화 속에서 보일은 미 대사관에서 벌어지는 파티 석상에서 이런 기자들을 한껏 조롱한다. 그러나 보일 자신도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며 우익 지도자에게 밉보여 자신의 친구인 수녀일행이 강간당하고, 살해당하는 일을 겪는다.


엘살바도르와 광주, 1980년
나는 이 영화를 지난 1988년에 보았다. 87년의 후폭풍을 겪고, 88올림픽을 앞둔 노태우 정권은 민주화된 상징으로 코스타가브라스의 영화 "Z"와 올리버 스톤의 "살바도르"를 극장에서 개봉할 수 있게 해주었다. 1980년 5.18 광주로부터 8년 뒤에 다시 보는 1980년 엘살바도르의 상황은 광주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최후의, 최후까지 저항했던 사람들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나는 극장의 어두운 공간에서 엘살바도르가 아니라 광주를 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죽은 수녀들의 시체가 어둠 속에서, 흙 속에서 발굴되어 나오는 장면을 보며, 나는 욕지기를 느꼈고, 광주 인근의 어느 이름없는 둔덕 속에 묻혀있을 시신들이 떠올랐었다. 레이건의 등장이 전혀다른 새로운 미국의 출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트루먼 대통령 이래 지속되어 온 미국의 대외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일이었고, 1980년의 봄은 그런 미국의 저강도전쟁이란 정책의 변화 속에서 이루어진 소리없는(?) 학살들이었다. 레이건의 등장과 함께 전세계 곳곳에서 수 많은  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런 사실들은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한 전쟁이고, 학살이었으며, 단지 그 나라 독재정권이 한 짓들이었다. 미국은 베트남전 이래 직접 개입하는 방식 대신 그들의 하수인을 부리는 방식을 택했다.

리처드 보일은 엘살바도르에서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녀와 결혼하여 살바도르를 빠져나오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미국에 도달한 직후 국경감시대에 의해 그 여인은 다시 엘살바도르로 되돌려 보내진다. 그녀를 실고 떠나는 국경감시대 차량을 향해 보일은 외친다. "너희들은 되돌려 보낸다는 게 뭘 의미하는 지 모른다"고 말이다. 이 영화 역시 올리버 스톤의 작품들에 대해 쏟아지는 일반적인(인종편견적이라거나, 미국 비판이지만 그것은 또다른 이미지의 미국, 인권국가, 자유로운 미국에 대한 이미지를 증대시키는데 이바지한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고 있는 우리 영화인들 혹은 감상자들에게 되묻고 싶은 것이 있다. 그래, 우리는 이 영화보다 조금더 나은 영화를 만들었는가? 만들고 있는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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