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이명박 찍지는 않았고 좋아하지도 않았습니다. 아직도... 비판은 물론 해야죠.
하지만 지금은 우리의 조타수이고 선장입니다. 저도 386으로서 사회 비판의식 아직 죽지 않았지만 이 순간에 이명박이 잘 하는 측면도 살펴주는 공정한 시각을 가져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노무현의 가장 큰 실패는 부동산버블과 88만원세대에 대한 무책임한 방치입니다. 저는 적어도 이 부분들에서 이명박은 훨씬 나은 대안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믿음이 굳어지면 굳어지지 저바라지지는 않는다고 믿습니다.

한국 사회가 멀리 삼전도의 비극을 보았고 식민지의 쓰라린 경험을 하게 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적에게서 장점을 배우려하지 않는 태도라고 생각됩니다.
한국사회는 일본은 없다라는 한풀이적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지만 한국사회에 가장 큰 피해를 준 두 일본 사람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이토 히로무비에 대해서 책이 나오지 않은 사회입니다. 번역본만 최근에 약간 나왔고 별로 팔리지도 않습니다.

반면 일본은 이순신에게 진 장수가 7주일 밤낮을 금식하면서 패전의 원인을 복기하였고 그 결과는 막바로 칠천량 전투에서 조선 수군을 섬멸하는 전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이순신을 꾸준히 공부했고 섬겼습니다.
비록 자국민 수만을 섬멸한 상대방이지만 그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삼아 무덤을 파헤치겠다는 자세가 아니라 일본의 군사 지도자들이 이순신의 사당에 참배하는 자세로 나갔습니다. 어느 쪽이 훌륭할까요?
우리 교과서에서 <사천 전투>를 검색해봅시다. 이순신의 승전보가 나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사천전투, 일본군이 승리해서 조선,명군의 코 40000개를 베어간 전투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바로 이게 1류와 2류,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과 맨날 신세 타령하다가 고 수준에 머무는 사람의 차이죠.
한국과 일본을 논하는 것을 잠시 떠나보면 이명박 분명 진보로서는 분할 만한 존재가 됩니다. 하지만 정권을 다시 찾아오고 싶으면 적을 무시하지 말고 적에게서 배워주세요. 미국의 민주당이나 영국의 노동당이 정권을 찾아 올 수 있었던 큰 계기는 적에게서 배우는 자세입니다. 그걸 변절로만 보지는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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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80 2008-05-09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끌어오신 역사적 비유 자체가 굉장히 파시즘적이십니다.
제가 보기엔 광장에 모인 학생들과 인터넷 공간에서 벌어지는 mb 정권에 대한 비판의 양상이 신세타령만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맞상대할 '적'으로 규정하고 시작하는 것은 옳습니다. 사실 '적'이라는 게 굉장히 정치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어야지만 성립할 수 있는 개념이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오히려 '적'에게 단시간내에 과잉 배움을 받은건 아닌가요. 반면으로 혹은 전면으로.

사마천 2008-05-25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 감사합니다. 제가 요즘 프로젝트라 너무 정신이 없어서 댓글도 못 달았습니다. 쓰다 보니 길어져서 다른 페이퍼로 남겼습니다. 감사 ^^
 

경제신문을 보다 보니 한국 기술 중국으로 마구 흘러들어간다는 기사가 나왔다.
주범은 물론 내부자다. 보안사고의 대부분은 먼저 내부에서 나오는 것이 태반인데 여기서도 확인된다.
경제적 파급효과가 결코 작지 않은 이러한 사건들을 보면서 혀를 끌끌차는 사람도 있지만
이 세태는 충분히 예견되는 현상이었다.

한국 기업들의 기술수준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될 수 있었던 계기는 일본기업들의 구조조정이었다.
그 전에 기술 한 가지 얻기도 쉽지 않았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퇴직 혹은 퇴직이 예상되는 일본인들의
기술 이전 협조를 꽤 많이 받을 수 있었다.

똑 같은 모습이 한국과 중국 사이에서도 다시 발생하는 것이다.

답은 물론 충성심의 회복 및 공동체의 부활이다. 국내 S그룹만 해도 기술자들의 연봉을 차별화해서
막대한 보상금을 지불하고 다른 한편으로 철저한 보안검색을 실시한다.

이는 조금 확대하면 중국 진출한 외국기업들 사이에서 보안 소프트웨어에 대한 투자가 막대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내부의 중국인들은 어느 순간 훌쩍 사라질지 모른다. 막대한 자산이 들어간 정보를 들고.
수십명이상의 중국 디자이너를 고용하는 모기업은 현지 오피스에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하게 하고
다시 일하고 아무것도 못 가져가게 하는 강력한 보안책을 취한다고 한다.
마치 예전에 버스 안내양 삥땅 검사하듯이 말이다.

이런 산업 도둑들을 막기위해 한국보다 훨씬 강력한 보안조처가 취해진다.

내부 보안소프트웨어의 흥성, 구조조정, 세계화가 서로 물려가면서 재미난 현상들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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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시비돌이 > 진정한 자유주의자 고종석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 - 고종석 시평집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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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실망은 - 차라리 환멸은- 한동안 공적 발언에 대한 내 의욕을 납작하게 짓눌렀다. 글쓰기가 내게 허락된 유일한 생업이 아니었다면, 나는 진즉 키보드를 치워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은근히 기대를 걸었던 공인의 정치적 파산은 내게 '사람됨 일반'에 대한 건강한 경계심을 회복시켜 주었다. 그렇다면 그는 내게 환멸을 줌으로써 한편으론 은혜를 베푼 셈이다. 불혹지년을 한참 넘겨서, 나는 잠시 무엇에 홀렸었다. -4쪽

그러나 버핏에 대한 이 환호를 '나눔의 방식'에 대한 논점 하나를 흐려버릴 수 있다. 그것은 가난 퇴치가 부자들의 기부를 통해, 그들의 자선을 통해 이뤄져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기부에 바탕을 둔 자선사업을 선양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덜 혜택받은 사람들을 일종의 '구걸자'로 만드는 것이다. 자선의 아름다운 손길 뒤에는 음험한 위계 철학이 웅크리고 있다. 가난한 사람은 부자의 너그러움과 친절에 기대어 살아가게 마련이라는 생각 말이다. 그러나 부는 '환원'의 대상이 아니라 '분배'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 분배의 엔진은 개인의 너그러움이 아니라 공동체의 법이다. -18쪽

1등과 2등의 능력 차이는 아주 작을 수 있지만, 그들이 받는 보상의 차이는 터무니없이 크다. 그 차이를 줄여 사회 갈등을 눅이는 것이 세법이다.(중략) 버핏이 꿈꾼 '평평한 경기장'은 '부자의 자식들에게 유리하게 더욱 기울어진 경기장' 보다는 정의로운 경기장이다. 그러나 더 정의로운 경기장은 '서민의 자식들에게 유리하게 약간 기울어진 경기장'일 것이다. -20쪽

사회당 정권 아래 프랑스에서도 국가의 오른손이 왼손보다 힘이 셌다면, 신자유주의 해일 속에서 허우적대는 지금 한국에 국가의 왼손이 있기나 할까 하는 체념도 엉뚱하진 않다. 그래도 계급적 양극화의 긴장 속에서 경제국가로 치닫는 대한민국의 페이스메이커로서 국가의 왼손 비슷한 것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국가인권위원회일 것이다. -52쪽

자유지상주의와 국가주의의 이념적 친화를 뜻하는가? 그럴 리는 없다. 개인의 선택을 절대시하는 자유지상주의와 집단을 물신화하는 국가주의는 물과 기름이다. 그 둘을 동시에 주장한다는 것은, 그 주장이 진심이 아니거나 주장자가 정신분열증 환자라는 뜻이다.(중략) 이 범우파 블록 안에서 시간은 자유지상주의 편일 것이다. 세계화의 해일은 이내 국가주의자들의 기를 꺾어놓을 것이고, 분열증적 개인들의 내면에서도 자유지상주의는 국가주의를 이길 것이다. 국가 위세를 특별히 중시하는 초강대국이 아닌 나라에서, 동원된 애국심이 계속 자본에 맞먹는 결기를 유지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국가보안법이 자본운동의 걸림돌이라고 판단되는 순간, 우익 진영의 폐지 반대 목소리는 쑥 들어갈 것이다. 자유지상주의는 한국의 전통적 수구기득권층만이 아니라 그들의 정치적 경쟁자들도 꽤 개종시켰다. 지금 한국에서 자유지상주의는 개혁의 이름으로 관철되고 있고, 여권의 주류는 총자본에 굴복한 듯 하다. -61쪽

자유지상주의의 범람은 세계화에 시큰둥한 유럽에서까지 목격되고 있다. 그러나 서유럽 국가들에 맞먹는 경제규모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나라들이 두세 세대 전에 이룩한 복지시스템이 없는 한국에서 이것은 재앙이다. 서유럽과 달리 우리에게는 줄일 복지 자체가 없다.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위한 복지시스템 구축과 공동체 구성원 사이의 연대를 핵심 가치로 삼는 좌파적 감수성이 우리 사회에 특히 긴요한 것은 그래서다. "부자에게는 세금을, 서민에게는 복지를"이라는 슬로건은 한 정당의 선거구호를 넘어 우리 사회를 운영하는 기술적 근본원리가 되어야 한다. 세법 손질 움직임이 조금이라도 부자에게 불리하다 싶으면 좌파 세상이 왔다고 호들갑 떠는 야당과 우익언론이 민생을 얘기하는 것은 뻔뻔한 일이다. 민생은 본디 좌파적 가치다. 우리 사회에는 좀 더 많은 좌파가 필요하다.-62쪽

강준만 교수의 새로운 글쓰기가 깊은 곳에서 현실정치와 소통하고, 그 큰 틀의 정치평론이 인터넷에서 그림자와 메아리를 얻는 표준적 규범텍스트가 되길 기대한다. 그는 아직도 지식인들의 지식인이고, 논평가들의 논평가다. -72쪽

시청 앞에서 인공기를 흔들어대는 것은 분명히 대다수 한국인들의 미감을 거스르고 눈살을 찌푸리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철없음이나 유치함 자체를 형벌 대상으로 삼는 것은 시민적 자유의 밑바탕을 위협한다. 시청 앞에서 부시 당선을 위해 기도를 올리거나 히틀러 사진을 들고 있는 것 자체를 처벌하는 것이 자유주의를 위협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80쪽

사실 이 정권은 출범 이후 지지자들 심정에는 아랑곳없이 신성동맹 눈치를 살피느라 끊임없이 오경화의 길로 매진함으로써 제 지지기반을 허물어왔다. 그러다 사면초가다 싶으면 사소한 '껀수'를 잡아 온 나라가 들썩이도록 신성동맹과 각을 세우며 지지자들을 규합하는 방식의 조잡한 정치공학을 되풀이해왔다. -91쪽

노 정권의 핵심과 그 지지자들이 '조선일보'와는 비길 수 없을 만큼 자유민주주의에 친화적이라는 것은 안전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보다 더 큰 잘못을 저지르는 집단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않고서는 제 정당성을 주장하지 못하는 '개혁세력'을 보는 일은 슬프다.-113쪽

줏대를 버린 뇌동은 그 당사자에게만이 아니라 공동체에도 크게 해롭다. 그러나 줏대를 지닌다는 것은 독선적이 된다는 것과 크게 다르다. 줏대를 지니되, 진리는 늘 여러 겹이라는 사실도 잊지 마라. 독립은 고립과 아주 다르다. 고립은 단절된 상태를 뜻하지만, 독립은 연대 속에서도 우뚝하다. 연대는 어느 쪽으로도 향할 수 있지만, 아비는 네 연대가 공동체의 소수자들, 혜택을 덜받은 사람들에게 건네지기를 바란다. -145쪽

김수영의 산문 한 대목이 생각난다.
"소설이나 시의 천재를 가지고, 쓰지 못해 발광을 할 때는 세상이란 이상스러워서, 청탁을 하지 않는다. 반드시 그런 재주가 고갈되고 나서야 청탁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무릇 시인이나 소설가는 청탁이 밀물처럼 몰려올 때는 자기의 천재는 이미 날아가 버렸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 세상은 참 우습다. 그렇게 이를 갈고 속물들을 싫어할 때는 아무 소리도 없다가 이렇게 내 자신이 완전무결한 속물이 된 뒤에야 속물에 대한 욕을 쓰라고 한다. 세상은 이다지도 야박하다."(거룩한 속물들)-329쪽

위에 인용한 김수영의 이죽거림을 내 식으로 고치면 이렇다. 젊어서 온힘을 다해 글을 쓰면, 그 글은 반드시 출판사 편집자에게 난도질당한다. 나이 들어 슬렁슬렁 쓰면, 그 글은 고스란히 활자화되기 마련이다. 무릇 글쟁이는, 제 글이 고스란히 활자화될 땐, 그 글이 별볼일 없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3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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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북한에는 고립화와 봉쇄정책이 효과 없다"

슬라보예 지젝과의 몇년 전 (전화)대담 기사를 하나 옮겨놓는다. <월간중앙>(2003년 2월호)에 게재됐던 것인데(나는 지면에서 처음 읽었었다), 지젝은 그해 가을 방한한 바 있다. 대담자는 김영희 중앙일보 상임고문이며 타이틀은 "북한과 같은 나라에는 고립화와 봉쇄정책이 효과 없다"이다. 아무래도 잡지의 독자층을 고려한 제목이겠다. 아무튼 당시에도 최대 화두는 북한이었으니 시의적으로 읽어볼 만한 기사이다.  


 

슬로베니아의 철학자·역사가·문명비평가 슬라보이 지젝은 정열적으로 질문에 대답했다. 50여 분 동안의 전화대담에서 그는 듣는 사람의 귀가 아플 만큼 큰소리로,그리고 자신있게 9·11 테러 이후 부시가 펴온 대외정책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한반도 안팎을 가릴 것 없이 새해 최대 화두는 이라크와 북한이다. 미국의 조지 부시 정부는 이라크를 공격할 준비를 사실상 끝낸 상태다. 남은 문제는 이라크에서 활동중인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무기사찰단이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많이 만들어 숨겨두고 있다는 물증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런 증거를 못 찾으면 미국의 이라크 공격은 정당성을 잃고 영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동맹국과 우방국들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한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이라크 공격을 재가하는 제2의 결의안을 채택할 수도 없다. 그럴 경우 미국은 단독으로 이라크를 공격해 사담 후세인을 축출하고 석유부국 이라크에 친미정권을 세울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세운 정권은 성공할 것인가.


북한 핵문제는 어렵사리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듯하다. 북한이 핵무기를 먼저 포기해야 대화하겠다던 미국이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겠다고 선언만 해도 대화하겠다는 쪽으로 한 발 물러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화는 대화일 뿐 협상은 아니다. 대화에서 협상, 협상에서 합의는 전혀 별개의 절차다. 과연 북한이 바라는 북·미 관계 정상화와 북한의 안전보장이라는 보따리와 미국이 바라는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포기라는 보따리를 교환하는 일괄타결이 실현될 것인가. 아직도 길고 긴 여정(旅程)이 남은 것이 북한의 핵문제다. 그래서 한반도 주변은 앞으로도 오래 오래 불안정한 상태를 유지할 것이다.


슬로베니아의 철학자·역사가·문명비평가 슬라보이 지젝(Slavoj Zizek)은 9·11 테러 이후 부시가 펴온 대외정책에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신랄하게 비판적이다. 영·미(英美) 편향의 견해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지젝의 견해는 충격으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대부분의 진보적 학자와 언론인들과 유럽의 거의 모든 전문가들은 이라크에 대한 부시의 강경노선에 지젝처럼 비판적이다. 그들은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해도 사담 후세인을 성공적으로 제거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후세인을 제거한다고 해도 그것이 바로 중동정세의 안정과 선진국가들에 대한 안정된 원유 공급을 보장하는 것인지도 확실치 않다는 전망이다.


슬라보이 지젝은 정열적으로 질문에 대답했다. 50여 분 동안의 전화대담에서 그는 듣는 사람의 귀가 아플 만큼 큰소리로, 그리고 자신있게 말했다. 발칸반도의 슬로베니아는 수백 년 동안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를 받은 나라다. 그래서 그 지역, 그 나라 사람들은 강력한 외세의 간섭이 현지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본능적으로 안다.


슬로베니아가 배출한 유럽 최고의 지식인과, 람보 이미지의 조지 부시의 대외정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부시의 자유주의가 점점 많은 이슬람들을 反美적 원리주의자로 만들고 있다"


김영희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공격이 임박해 보입니다. 9·11 테러가 지난해의 아프가니스탄전쟁과, 그것보다 훨씬 파괴적일 이라크전쟁을 정당화한다고 보십니까.


지젝 아프가니스탄전쟁은 정당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라크전쟁의 목표는 전혀 다릅니다. 미국은 석유 공급을 확보하려고 테러와의 전쟁을 이용하고 있어요. 테러와의 전쟁과는 무관합니다. 사담 후세인은 알 카에다와 아무 관련이 없어요. 미국도 지금은 후세인이 알 카에다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지 않아요.


거듭 말하지만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이용해 다른 경제적 목표를 추구하고 있어요. 부시 독트린이라는 미국의 정치철학이라고 할까, 이데올로기가 걱정입니다. 그것은 미국에는 현실의 적뿐만 아니라 잠재적인 적까지 선제공격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소수의견)의 경찰과 같아요. 이 영화에서 경찰에는 앞으로 범죄를 저지를 사람을 알아내는 초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어요. 경찰은 그 사람이 지목하는 미래의 범죄자를 미리 체포합니다. 경찰은 이렇게 말해요.


"당신은 30분 뒤에 살인합니다. 그래서 당신을 체포합니다."


미국은 국제정치 차원에서 범죄가 있기도 전에 사람들을 공격하고 체포하고 벌을 주는 셈입니다. 독일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이라크전쟁에 반대한 것은 '슈뢰더판(版) 마이너리티 리포트'라고 하겠어요. 지정학적으로 중국이 미국의 슈퍼파워 지위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등장할 것으로 보이는데 미국이 이 영화의 경찰처럼 중국을 예방공격할 것인가 주목됩니다. 이라크 공격의 배후에는 참으로 위험한 논리가 숨어 있어요.


김 사담 후세인을 제거한다면 중동 지역은 평화에 한 발 가까이 가는 것입니까.


지젝 그 반대의 결과가 예상됩니다. 후세인 정권은 이슬람 원리주의 정권이 아니에요. 이라크의 기본 이데올로기는 이라크 애국주의일 뿐입니다. 후세인이 이슬람과 손잡은 것은 10년 정도밖에 안돼요. 재미있는 예를 하나 들지요. 몇 달 전에 이라크에서 대통령선거가 있었는데 후세인이 100%의 지지를 받았어요. 선거 운동 기간 중 이라크 방송들이 후세인 지지 슬로건을 실어 계속 내보낸 노래는 미국의 흑인 가수 휘트니 휴스턴의‘나는 언제나 너를 사랑할 거야’였습니다. 이슬람 원리주의 나라에서는 그렇게 못 해요. 이 나라의 제2인자인 부총리 타리크 아지즈는 기독교 신자 아닙니까. 이라크는 전형적인 민족주의 국가입니다.


만약 미국이 후세인을 몰아내고 이라크에 일종의 신식민지주의 정부를 세워 군정(軍政)을 실시한다면 그때야말로 전 세계를 망라한 이슬람 원리주의 민중들의 반미운동이 일어날지도 몰라요.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겁니다. 이라크를 원리주의 국가로 만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미국의 무력간섭이에요.


김 설마 부시 대통령이 그걸 모를까요?


지젝 물론 알지요. 그러나 정치란 이상한 겁니다. 뻔히 알면서 재앙을 부르는 것이 정치죠. 헨리 키신저를 봐요. 얼마나 똑똑한 사람입니까. 그런 사람이 베트남을 잃었어요. 그런가 하면 로널드 레이건 같이 별로 영민하지 못한 사람이 소련을 상대로 무자비한 군비경쟁을 벌여 소련 제국을 파멸시킨 경우도 있어요. 어느 한 사람의 머리가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정책 수행에 이용되는 비극적인 논리의 문제입니다.


"북한이 이라크보다 더 위험"


김 부시 정부는 이라크말고 북한이라는 문제도 안고 있습니다. 한반도는 슬로베니아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만 일반론으로 말해 북한 핵문제도 군사적으로 풀려고 할까요?


지젝 북한과 이라크가 자주 비교되는데 나는 북한이 이라크보다 더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내 친구인 영국 언론인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세계에서 가장 살기 나쁜 나라를 조사한 결과 북한이라는 결론을 얻었어요. 권위주의 국가에는 자유가 없는 대신 질서라도 있고, 중앙통제를 잃은 나라에는 질서가 없고 국민이 배고픕니다. 북한은 강력한 독재 아래 국민이 굶주리는 독재와 카오스(Chaos)를 갖춘 나라라는 것입니다. 북한에 대해 유화(Appeasement)정책을 써야 할 것입니다. 북한체제가 개탄스럽지 않아서가 아니라 쿠바의 경우를 봐도 고립화와 봉쇄정책이 효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김 부시 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을 빙자해 경제적 목표를 추구한다고 하셨는데 부시 대통령은 9·11 테러를 이용해 미국의 패권을 추구하는 것 같습니다. 그의 단독주의는 우방국가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나쁩니다. 부시는 미국의 패권이라는 야망을 달성할 수 있을까요?


지젝 장기적인 시각에서 보면 부시는 스스로 패배하는(Self-defeating) 게임을 하고 있어요. 부시는 두 가지를 잘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9·11 테러후 테러와의 전쟁을 다루는 국제재판소 같은 법적 체계를 갖췄어야 하는데, 미국은 국제형사재판소(ICC)에도 구속되지 않고 단독행동을 하겠다는 겁니다. 미국은 국제적인 체제에 들기를 거부해요.


미국이 저지른 또 하나의 잘못은 140개국이 참가하고 국제통상기구(WTO)가 지지하는 에이즈에 관한 국제적 협정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것은 제3세계의 가난한 나라들이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 제약회사들이 개발한 에이즈 치료제를 특허료 없이 생산하는 것을 허용하는 협정입니다.


미국 정부는 제약회사들의 막강한 로비에 따라 이 협정에 조인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9·11 테러후 미국 자신은 독일의 바이엘 제약회사에 탄저균 치료제를 싸게 수출하라고 압력을 넣었어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미국이 가난한 나라들에 인류의 재앙인 에이즈 치료제 생산을 못하게 하는 겁니다.


이것이 미국이 무자비하게 추구하는 패권입니다. 21세기의 패권국가는 미국이고, 미국에 도전할 미래의 슈퍼파워는 중국뿐인데 미국과 중국이 대표하는 정치질서로서의 두 개의 문명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끔찍합니다. 그래서 유럽통합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디지털 디바이드는 인류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


김 세계화를 두고 말이 많습니다. 세계화는 필요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지젝 세계화는 피할 수 없어요. 그러나 어떤 세계화인가라는 선택의 문제는 있습니다. 세계화 반대 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은 지금 진행되는 세계화가 자본주의의 세계화라고 주장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보십시오. 경제적 세계화, 상품의 교환은 오히려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새로운 장벽들을 쌓고 있어요. 미국은 멕시코와의 국경선을 더 철저히 감시하고, 서유럽은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이스라엘은 요르단 강 서안(西岸)과의 사이에 새로운 벽을 세워요.


이런 세계화는 자본주의를 위한 세계화입니다. 나는 약품이 세계 곳곳에 분배되는 그런 세계화를 지지해요. 인터넷을 널리 보급하는 디지털 세계화도 중요합니다. 디지털 보급의 격차를 말하는 이른바 디지털 디바이드(Digital divide)는 운명이 아니라 인류의 집단적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어요. 그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선택의 문제입니다.


"자본주의는 스스로 만든 위기를 통제할 능력이 없다"


김 영국의 권위 있는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현실정치체제로서의 사회주의는 붕괴했지만 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 사상은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긴 글을 실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어떤 유산을 남겼습니까.


지젝 '자본주의는 그 물질적 조건에 지속적인 혁명적 변화를 주어야 살아남을 수 있고, 자본주의는 자체의 논리상 끊임없이 확장을 계속하고, 자본주의는 전통을 파괴한다'는 자본주의 발전의 역동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진단이 오늘의 세계화 현상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데는 누구나가 동의합니다. 그러면서도 오늘날 살아남은 마르크스의 진단은 자본주의가 스스로 대립과 위기를 만들어 내고 자본주의는 그런 대립과 위기를 통제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통찰입니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관한 낡은 환상을 버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자본주의 너머(Beyond)를 생각할 필요도 있어요?

김 부시 정부 아래서 미국은 경쟁제일주의와 시장원리주의의 깃발을 높이 든 신자유주의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발은 없을까요?


지젝 단기적으로 부시의 경제적 자유주의는 잘 굴러갈 겁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새로운 갈등과 모순이 생길 거예요. 벌써 당장의 정책과 관련해서 기본적인 긴장이 생겼어요. 부시는 자유시장을 옹호하는 과격한 경제적 자유주의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의 이해가 걸리면 언제나 자유주의의 룰을 깨고 나와요. 한국도 피해를 입은 수입철강에 대한 관세 인상이 그런 경우 아닙니까.


부시의 미국은 다른 나라에 강요하는 룰을 따르지 않아요. 부시는 자유주의를 주창하면서 동시에 도덕적으로는 보수적인 가치를 옹호합니다.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그러면서 부시는 자신이 주장하는 도덕적 아젠다(Agenda=과제)를 뒤집어 엎는 경제정책을 펴는 거죠.


역설적입니다. 레이건도 그랬어요. 레이건과 아버지 부시는 가족과 공동체의 가치에 매혹되었으면서도 도덕적 가치와 가족의 가치를 파괴하는 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폈던 겁니다. 부시의 자유주의는 이미 긴장을 낳고 있어요. 대기업에 혜택이 돌아가는 부시의 자유주의 정책은 환경문제와 조화를 이룰 수 없고 사회불안을 다룰 수도 없어요. 장기적으로 볼 때 큰 위기가 오고 있습니다.


김 지젝 박사는 빌 클린턴에게 좋은 점수를 주지 않는데, 부시는 클린턴보다 나은 대통령입니까.


지젝 노! 나더러 선택하라면 클린턴입니다. 부시는 속임수의 유산을 남길 거예요.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지 않고, 이라크전쟁이 미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행되면 단기적으로 부시는 전형적인 성공한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시 통치의 장기적인 결과는 대실패일 겁니다.


김 우리는 이슬람 원리주의에 앞서 미국의 기독교 원리주의에 관해 많이 들었습니다. 십자군 점령 아래 있던 예루살렘을 탈환한 이슬람의 영웅 샐러딘(Saladin·1137~93)은 그에게 패배한 기독교도들을 관대하게 대접한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오늘의 이슬람은 샐러딘 시대의 이슬람, 어제의 이슬람과 다릅니까.


지젝 그 질문 참으로 반갑습니다. 나는 옛 유고연방의 일부였던 슬로베니아 사람이어서 이슬람에 대해서는 피부로 느끼는 바가 많기 때문입니다. 유고연방 안에서도 가장 관용적인 지방은 이슬람의 도시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였어요. 사라예보의 유대계 인구는 유고연방 안에서 가장 많았습니다.


이슬람은 다른 종교에 대해 기독교보다 훨씬 관용적이었어요. 오늘날도 이슬람은 비(非)관용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소수의 기독교들만이 자칭 도덕적 다수라는 원리주의자들이라는 사실을 잊고 지내는 경향이 있어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아직도 소수에 불과해요. 모로코와 이집트와 인도와 방글라데시와 인도네시아에는 원리주의자가 아닌 이슬람이 수억 명이 있어요. 원리주의자들은 훨씬 공격적입니다. 그러나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히려 조지 부시의 잔인한 자유주의입니다. 부시의 자유주의는 점점 많은 이슬람들을 반미적 원리주의자로 만들 겁니다.


"칸트가 살아 있다면 미국을 야만적인 나라로 꼽았을 것"


김 미국은 21세기에도 계속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의 지위를 누릴까요? 유럽공동체(EU)나 중국이나 러시아가 미국의 지위에 도전할 날이 오겠습니까.


지젝 러시아는 미국에 도전할 힘을 기를 수 없을 것이고, 어쩌면 중국이 미국의 경쟁자가 될지도 몰라요. 내가 바라기는 유럽이 하나로 통합되어 미국과 중국이 아닌 제3의 선택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패권주의는 이미 천천히 기력을 잃고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 미국이 이기고는 있지만 테러와의 전쟁은 일종의 공포(Panic)에 사로잡힌 반응이고, 다른 나라들이 강대국이 되는 것을 예방하는 전쟁입니다. 20세기는 미국의 세기였지만 21세기는 미국의 세기가 아닐 것으로 봅니다.


김 세계는 한없이 좁아지고 있습니다. 아시아에 유럽은 무엇이고 유럽에 아시아는 무엇입니까.


지젝 구체적으로 들어가자면 어느 유럽, 어느 아시아를 의미하는가를 따져야겠지만 일반적으로 말해서 유럽과 아시아는 이상한 문화적, 경제적 교환 관계에 있어요. 아시아에 유럽은 주로 경제적 모델입니다. 아시아는 유럽의 경제체제를 도입했어요. 반면 아시아는 유럽에 정신적인 것과 이데올로기를 전파했어요. 지금 유럽에서는 기독교가 서서히 퇴색하고 있어서 아시아의 정신적인 것이 유럽에서 점점 강한 이데올로기가 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유럽은 아시아에 경제 제도를 수출하고 아시아는 유럽에 이데올로기를 수출한다고 할 수 있어요.


김 마지막으로 이라크로 돌아가서, 만약 영구평화라는 도덕적 이상을 주창한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1724~1804)가 부시의 안보담당 고문이라면 부시에게 어떤 충고를 할까요?


지젝 아닌게 아니라 헤이그 국제전범재판소를 준비하던 사람들도 칸트의 세계평화의 이상을 참고했어요. 세계에 법질서를 펴는 것이 칸트의 이상이었어요. 그래서 칸트는 부시에게 모든 대외정책을 국제법에 맞게 수행하되 단독으로 행동하지 말라고 충고할 겁니다. 내 말을 안 들으면 단기적으로는 이익을 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재앙을 만난다고…. 세계법정의 절대적 귄위를 인정하고 유엔에 더 많은 권한을 양보하라고….


김 그런 충고라면 부시가 듣지 않겠네요?


지젝 이론적으로 부시는 야만인(Barbarian)입니다. 미국의 정치에는 처음부터 야만적인 요소가 있었어요. 칸트가 오늘의 국제정치판을 관찰한다면 미국을 야만적인 나라로 꼽을 겁니다.(김영희 중앙일보 대기자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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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상 회사를 여러곳 다니게 된다.

그 때 마다 되도록 많은 것을 관찰하려고 하는데 기업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여직원에 대한 몇몇 사항을 살펴본다.

첫번째 규모, 많은 가, 적은가를 본다.

적은 곳은 보수적이거나 일이 tough한 곳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꼭 규모가 많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여자를 쓰는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임금이 상대적으로 싸고
일찍 그만두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라는 혹심에도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복장이다. 여자들을 하나의 유니폼으로 묶어 규제하는 곳들이 많았다.
최근에는 줄었지만 이는 분명 회사의 문화가 자유로운가 그렇지 못한가를 잘 나타낸다.

세번째는 연령 분포를 본다.
나이 많아서 다닐 수 있는가 없는가도 기업의 중요한 지표다.
기업들도 인식이 바뀌어 여자들이 오래 다니는 것을 선호하는 곳이 여럿 생겼다.
이유는 아마도 남녀평등이 아니라 실리적인 측면이다. 아줌마에게 파는 물건을 만드는 산업이라면
아줌마가 기업내에 많이 존재하는 것도 괜찮다는 이론이 나온다.

화장품,가전제품 제조사는 일찍 바뀌었고 최근에는 심지어 아파트 만드는 건설사까지도 여자는
늘어난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가장 유심히 보는 것은 외모다.
외모의 수준은 연봉과 꽤 비례한다. 이말 듣고 황당해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스탕달이 <적과 흑>에서 언급한 말로 이유를 갈음하고자 한다.
"처음 출세한 사람이 가장 놀라게 되는 것은 상대하게 되는 여자의 외모다"

여직원을 통한 기업문화 탐구,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꽤 도움이 된 분석법이었다.

다른 분이 이 주제로 느낀바에 대해 의견을 주시면 적극 환영이다. 반론도 기대하고
토론이 활성화되면 아주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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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10-26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니폼, 절대 반대입니다.
유니폼을 입어야 할 경우 남자직원들도 함께 입어야지요
직장인이었던 시절(아시다시피 전직 공무원)여직원들 유니폼이 거론되었지요
결사 반대의 표를 던진건 놀랍게도 남자직원들과 일부 소수의 여직원이었슴다.
다수의 여직원들은 사복구입비가 절약된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그건 별로 효용가치 없는 발언이었구요.
전 그들의 편리한 의식속에 숨어있는 (여성특권기대)에 충격이었어요
일직과 당직조차 여자이니까~ 하는 말 앞에서는 입이 들어가더군요.

사마천 2006-10-27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 유니폼을 여자들에게만 강요하는 전통(?)은 일본에서 왔죠. 지금은 거의 없어져가는데 여기서 하나 살펴야 할 것이 사복에도 여러가지 타입이 있다는 점입니다. 개성을 어디까지 허용하느냐의 여부, 사복의 가격 등이 해당됩니다.
새벽별님/ 제가 경험해본바로 소규모 회사의 경우는 막바로 해당되고요 규모가 크면 조금 다르겠죠 ^^

sayonara 2006-12-05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유니폼은 일본식 불평등의 잔재라고 생각했었는데... 사복을 입었을 때의 '선'이 간혹 문제가 되는 걸 봤습니다. 남자 입장에서는 입으라면 입고, 말라면 마는 식으로 큰 의미를 두지 않겠지만, 막상 여성들의 입장은 또 다르겠지요. -_-+

사마천 2006-12-05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은 아직도 유니폼이 많은 편이죠. 여성들의 권한이 커져갈수록 표현의 자유 또한 커져간다고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