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 최진석의 자전적 철학 이야기
최진석 지음 / 북루덴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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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원래 추상적인 학문이 아니다. 매우 현실적인 의문을 추궁하다가 탄생한 것이 철학이다. 물론 학문의 발생은 노예 제도라는 비인간적 토대 위에서 성립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은 자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인간과 자연을 탐구하는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 인류에게는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철학의 발생 배경을 확인했다면 우리는 더 겸손해져야 한다. 그리고 철학이 사변적인 학문으로 방치될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힘을 발휘하는 학문이 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그런 점에서 최진석 선생의 저서들은 많은 도움이 된다. 특히 이번에 출간된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의 경우 자유로운 신분으로 저자 특유의 사상을 마음껏 펼쳐 놓은 특징이 두드러지기에 철학이 좀 더 실용적이면서도 그 본분이 일반 대중에게 전달되기에 매우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먼저 목적과 목표를 구분함으로써 삶이 진정으로 지향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별처럼 빛나는 삶을 살 것인가, 그림자에 머무는 삶을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목적은 기능적이고 제한적인 것으로, 목표는 가치와 의미의 문제에 해당한다.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해 교회의 사례를 드는데 매우 와닿았다. 교회가 세워지는 원래 의미는 복음을 전하고 온전한 구원을 이루는 데 덕이 되기 위해서다.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별이 되기 위해서”다. 그런데 교회가 정도를 넘어 신도 수를 늘리는 데 집중하고 교회를 크게 짓는 일에 몰두하다 갈등하고 사회적으로 지탄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기능적 목표에 빠져 본질을 망각하는 전형적인 사례다.

철학이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경우는 봉건사회에서 시민사회로 전환된 혁명을 들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아무 의심 없이 자신의 신분에 순응하며 살 때,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역사의 책임자가 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 역사의 방향을 바꾸었다. 앞서 언급한 ‘별’의 역할을 왕 혼자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짊어지자는 것이다. 모두 별이 되어 빛날 수 있다는 의식의 전환, 혁명이 세상을 바꾸었다.

저자는 ‘내가 별이 되는 삶’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다른 사람이 뿜는 별빛에 박수만 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빛나는 사람들의 집합체가 바로 시민사회이며 민주주의의 올바른 모습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저자는 “정치가 혼란스럽다는 것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했으며 그 이유가 제대로 주인 역할을 하는 시민이 등장하지 않은 것으로 진단한다. 저자는 여기서 성숙의 개념을 설명하는데, ‘돈은 많은데, 그 많은 돈이 자본으로 바뀌는 것이 아직 부족한 상태’, 그리고 ‘부자는 있는데 그 부자가 아직 자본가로 바뀌지 않은 상태’를 미성숙한 사회 시스템의 예로 들며, 오늘 우리 사회가 그런 상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 책은 참다운 인간됨에 대해서도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저자는 “인간으로서 제대로 사는 일은 스스로 불편을 자초하는 일”과 같다고 주장한다. 여기서도 절묘한 비유를 드는데, 대답만 하는 사람과 질문하는 사람으로 나누어, 앞서 언급했던 기능적 존재에 머무는 것과 그 사람 특유의 가치를 드러내는 존재로 승화하는 경우를 설명한다. 질문하는 사람은 내면의 호기심이 발동하는 인격적 활동을 통해 참다운 인간됨을 실현하는데, 이때 겉으로 나타나는 두드러지는 특징이 바로 스스로 불편을 감수하고 장애의 단계까지 나아가는 경지라고 한다. 여기서도 교회의 예가 적절히 활용된다. 일요일에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주차한 차들 때문에 사람들이 큰 불편을 겪는다. 사실 이 불편은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근처 주민들을 위해서 차를 몰고 가지 않거나, 가져오더라도 스스로 더 먼 곳에 주차하고 걸어오는 수고를 감수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 정도다. 그렇게 교회에 나오는 목적과 이유를 실현시키는 과정을 성숙의 한 예로 든다.

저자는 경박함을 버리고 불편함을 감당하며 공공의 책임을 기꺼이 지고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덕이 있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여기서 저자는 동양철학과 서양의 하이데거 철학을 연결시키는데, 하이데거의 ‘존재’ 개념을 ‘덕’이 활동하는 곳으로 파악한다. 여기서 우리는 ‘덕’이라는 개념이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체가 있는 활동적인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스스로 불편을 감수하는 것은 물론이고 ‘장애’의 단계까지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참된 시민의식을 구현하는 진정한 ‘시민’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여러 수단으로 ‘문화’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내용을 설명했다. 최진석 교수도 여기에 동참하는데, 무척 설득력이 있다. 저자가 말하는 문화란 ‘무언가를 만들고 제조하고 생산하여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적 상태와는 대비되는 개념이다. 이것은 인간만이 가지는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이다. 다시 말해 항상 무언가를 만들거나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최소한 그런 것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는다면 그는 참다운 인격적 존재라고 보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탁월한 통찰은 ‘허무’와 ‘무한확장’이라는 상반되어 보이는 개념을 통합하는 시도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어느 순간 인생이 매우 허무하고 아무 가치가 없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다. 그런데 이것은 심리적인 현상만이 아니라 우주의 속성이기도 하다. 하지만 저자는 이 허무를 근거로 무한이 성립될 수 있다는 독특한 발상을 보여준다. 사실 이런 역발상이 바로 인간을 인간답게 했고 지금까지 생존하게 한 가장 큰 원동력이었음을 밝힌다.

이 책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근거, 그 사람만의 바탕이 무엇인지 탐구하고 알아가는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목적과 목표를 구분하고, 기능적인 존재에서 본질을 탐구하는 존재로, 편리함보다 불편을 자초하면서 인격적 성숙을 이루고, 문화적 존재로서 항상 자신과 세계에 대한 변화를 야기함으로써 가치를 입증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주어진 환경과 형편에 순응하거나 굴복하지 않는 것이다. 항상 질문해야 한다. 더 나은 상태, 개선책이 없는지 궁금증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비루한 현재의 상황을 바꿀 수 있다. 역사를 돌아볼 때, 그런 노력들의 총합, 정수가 어쩌면 철학이라는 형태로 결정화된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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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물었다 - 소중한 것들을 지키고 있느냐고
아나 아란치스 지음, 민승남 옮김 / 세계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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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가장 현실적인 문제이면서도 삶의 중심 이슈로 부각되지 못하고 항상 뒤에 미뤄진 채로 방치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가 어떤 대형 사고나 사건이 발생해 그 현상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많은 관심을 받고 이야기의 주제로 자주 등장한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듯 죽음은 또 사람들로부터 외면받는다.

대부분의 죽음은 고통을 수반한다. 평안하고 안정적인 죽음을 보기는 쉽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편히 쉬듯, 잠이 들듯 죽음을 맞는 이상적인 모습은 드문 축복이다. 따라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순간에 경험하는 두려움과 공포, 분노, 부정, 불안, 괴로움, 고통 등은 거의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더욱 강화한다.

저자는 이런 죽음의 패턴에 변화를 일으키려 한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저자는 죽음이 삶의 결과물이며, 죽음을 앞둔 고통의 시간은 정리가 필요한 시간이라고 말한다. 온전한 정리를 위해서는 적어도 고통으로 신음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는 돌봄이 필요하다. 줄어든 고통은 죽음을 앞둔 시간을 보다 인간적이고 존엄성을 지키는 시간으로 바꿀 수 있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갖고 갈 것인가. 이에 대한 저자의 비유가 인상적이다. 죽음은 쪽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죽음은 삶을 새롭게 바라보아야 할 훌륭한 이유가 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하루키의 소설에서 본 것으로 기억되는 한 문장이 떠오른다. 그 문장의 요지는 이랬다. 죽음은 그대로 끝이 아니라 삶의 대극으로서 이어져 있다는 내용이었다. 죽음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이별을 의미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도 마지막까지 남은 과제가 있는 셈이다. 죽음을 의연하게 맞을 수 있다면, 죽음은 단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완성하는 최종 단계이자, 이어지는 영속적 의미를 갖는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저자가 말하는 완화의료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다 포괄적인 관점에서 돌보는 것을 의미한다. 고통스러워하는 환자의 심리는 어루만져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완화 효과를 보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실제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약물의 적절한 활용도 중요함을 알려준다. 이렇게 얻어낸 죽음을 앞둔 환자의 안정된 심리는 본인은 물론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할 사람들에게도 평화의 원천을 제공한다.

“환자의 극심한 고통을 다뤄야만 하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것이 아닌 통증을 흡수한다” 이 대목에서는 죽음을 앞둔 환자의 문제뿐만 아니라, 그 환자를 대하는 의료진의 심리와 건강도 무척 중요함을 알려준다. 저자 역시 자신만의 경험과 이론이 온전히 정립되기 전에 환자를 대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고통을 경험한 것으로 묘사된다. 이런 개인적인 고난의 시간을 겪으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통찰을 이끌어낸다. “환자들을 온전한 인간으로서 포괄적인 돌봄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는 나의 모든 일들은 우선 나 자신과 내 삶을 보살피는 데 헌신한 뒤에야 의미를 지닐 수 있었다”

“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병을 치료할 방법은 없을지라도, 그 환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이 남아 있다” 환자를 돌본다는 것은 단순히 그 환자의 병을 관리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그 환자의 존재, 삶을 돌보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일깨운다. 여기에서 나는 우리나라 의료시스템도 상당히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환자 한 사람을 온전히 인격적으로 대하기에는 너무나 바쁘게 순환되는 진료시스템이 궁극적으로 죽음에 대한 인식마저 경색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민영화 논란이 여전한 가운데, 과연 산 사람이나 죽음을 앞둔 사람 모두를 인격적 차원까지 포괄하는 폭넓은 돌봄이 가능할지, 우리나라가 진정한 의미의 의료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을까? 등의 의문이 잇따른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제공하는 양질의 삶, 이것은 저자가 생각하는 완화의료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다. 죽음이 고통스럽고 피하고 싶고 두렵고 떨리는 현상이 아니라 삶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임을 마지막 순간까지 인식하게 하는 것은 저자가 주장하는 완화의료 효과의 핵심 중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신체적 증상을 통제할 수 있게 되면...” 정서적 돌봄의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것도 상당한 효과를 보인다고 저자는 설명하지만, 병 때문에 심각한 통증을 겪는 환자의 경우 약물적 조치는 필수다. 이를 위해서는 현실적인 접근도 중요하다. 모르핀을 비롯한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다양한 약물이 보다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광범위한 제도적, 재정적 마련이 시급해 보인다. 뜻있는 몇몇의 노력만으로는 제한된 수의 환자들만이 그 혜택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자연스러운 죽음을 넘어 아름다운 죽음”으로 죽음의 대중적 인식의 단계를 보다 발전·확립시키려는 저자의 그간의 노력과 흔적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책은 죽음이 단순히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완성을 위한 단계임을 보다 깊이 인식하게 한다. 우리는 죽음을 인지하지만, 온전히 경험할 수 없다.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고 타인에 대해서도 그렇다. 하지만 죽음은 엄연히 존재하며, 우리는 겸허하면서도 적극적인 태도로 죽음을 더 깊이 생각하고 일상의 담론으로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 이것은 물질만능주의로 경박해진 오늘날의 세태를 조금은 바른 방향으로 개선해줄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이에 적절한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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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견디는 기쁨 - 힘든 시절에 벗에게 보내는 편지
헤르만 헤세 지음, 유혜자 옮김 / 문예춘추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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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헤르만 헤세의 삶, 다시 말해 그의 경험과 사색을 통해 추출된 삶의 지혜가 녹아 있다. 헤세의 소설과 산문들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영향을 주는 것은, 그만큼 그의 삶과 세계에 대한 통찰이 설득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설득력이 있다는 것은 보편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며, 이것은 보통의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기준 혹은 설명서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책의 어떤 내용들이 그런 지혜가 빛을 띠고 있는지 살펴보자.

그는 우선 분주한 삶의 위험성을 우려한다. 헤세가 살았던 시대는 우리 때보다는 좀 덜하지 않을까 싶지만, 모든 시대는 사실 오늘, 최신의 반복이라는 점에서 문제의 본질은 다르지 않다. 분주함이란 조바심으로 가득한 삶을 말한다.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하고 싶은,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도록 계속 마음을 몰아가는 것이 시대를 초월한 사람들의 고집이요, 고통이다.

그래서 헤세는 ‘절제’를 강조한다. 절제는 모든 시류에 자기 자신을 내맡기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심리적, 시간적 여유는 정말 중요하고 소중한 것을 보게 하는 기회를 준다. 헤세에게 있어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은 자연, 생명의 변화와 그 아름다움, 아이들의 웃음, 초록의 정원 등이다. 이러한 사소한 기쁨들의 절대 가치는 절대 사소하지 않다. 사람을 늘 생기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사람들을 피로하게 하거나 피폐하게 하지 않는다.

헤세는 「행복」이라는 시를 통해 ‘행복을 찾아 헤매는 동안 그대는 행복해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 내 곁에 있는 것, 나와 가까이 있는 모든 사람, 시간, 공간, 일들이 곧 행복의 재료가 된다. 어딘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이 가장 소중한 것, 즉 행복하게 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것은 네잎클로버와 세잎클로버의 교훈을 떠오르게도 하는 내용이다.

헤르만 헤세가 살았던 시기를 보면 인류가 경험할 수 있는 극단적인 감정이 모두 거쳐간 시기임을 알 수 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을 통해 인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찬 시기가 있었는가 하면, 그런 노력들이 모두 헛것이라고 알려주기라도 하듯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인간의 유한함과 문명의 허무함으로 휩싸인 시기도 있었다. 어디로 가야할 지 그 방향성을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즈음까지가 헤세의 인생 말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헤세도 많은 절망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세계가 너무나 부패하고 위태로워 보여서 그로 인해 인류에 대한 믿음과 협력에 대한 의욕을 상실해 버릴 지경”이라는 표현이 이를 잘 나타내준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헤세는 완전히 실족하지 않고 인간의 ‘기뻐할 줄 아는 능력’에 희망을 걸었다. 무너진 폐허 속에서 핀 한 송이 꽃에 희망과 기쁨의 빛을 발견할 줄 아는 것이 또한 인간의 특별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쁨과 지혜, 감동, 재미를 통해 헤세는 존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한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런 감각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요즘 많이 언급되는 ‘회복탄력성’ 또는 ‘회복력’이 헤세가 말한 능력의 현대 버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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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 쾌락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7
에피쿠로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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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에피쿠로스의 사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잘못 인식되어 왔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단순한 ‘쾌락주의’가 아님을 알 수 있지만, 피상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에게는 ‘쾌락’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 때문인지 대체로 감각적이고 말초적인 것에만 집중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는 많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개념도 그렇고,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 같은 말도 본질과는 동떨어진 이해로 오용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의미에서 원전을 읽고 제대로 된 의미를 파악하는 노력은 무척 중요하다. 모든 사상이나 개념은 고유의 맥락 속에서 그 의미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지성에서 출간된 『에피쿠로스 쾌락』은 에피쿠로스의 쾌락 개념과 전반적인 사상을 바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쾌락은 진정한 행복이라는 개념과 연결된다. 즉 참된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으로 내놓은 것이 바로 ‘쾌락’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쾌락은 단어에서 느껴지는 것과 다르게 “모든 정신적·육체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의 사상에는 배려와 공손함, 친절함, 경건심, 애국심 등을 아우르는 인간애를 바탕으로 한다.

‘쾌락’이라는 단어의 느낌에 대해 반복적으로 언급하게 되는데, 사실 역자에 따르면 이 용어는 ‘즐거움’으로 번역되어도 무관하다고 한다. 에피쿠로스가 ‘참된 쾌락’과 ‘방탕함’을 구별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쾌락보다는 ‘즐거움’이 더 적절하며, 행복이라는 개념과 연결되는 즐거움의 관점에서 에피쿠로스 철학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 합당하다.

에피쿠로스는 원자론적 유물론자였다고 한다. 영혼, 신과 같은 개념을 물질적 관점에서 파악했다. 당시의 보편적인 세계관에 비추어 보면 그의 사상은 오히려 급진적이고 오늘날에 더 어울리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참된 지식을 통한 마음의 평정을 의미하는 ‘아타락시아’, 소박하고 지속가능한 쾌락을 누리는 ‘아포니아’라는 개념을 지향했다. 이런 특성은 오늘날 과도한 소비지향적 문명이 초래한 위기에 대한 주요 해법과 맞물린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가 전하는 삶의 지혜, 철학적 통찰은 매우 현실적이다. 현실적이기 때문에 존재의 한계를 깨닫게 하고, 실제로 고통이 최대한 억제되는 상태를 쾌락의 최고 상태로 상정한다. 이것은 우리가 너무나 많은 정보에 노출되어 있고, 그것들을 적절히 걸러내지 못한 채로 휩쓸려 고통스러운 지경에까지 이르는 현실을 돌아보는 데 적절한 사고 도구를 제공한다. 그가 말하는 쾌락이 고통과 괴로움의 부재를 최대로 추구한다는 점과, 또 그것이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정도(正道)라고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인들에게 가장 실용적인 철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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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청 - 잃어버린 도시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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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의 소설은 당연하게도 작품 그 자체만으로도 흡인력 있는 스토리와 문장으로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당기는 힘을 보여주지만,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이 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독자들에게 전하는 작가의 말, 즉 ‘서문’에서 느껴지는 울림도 상당하다는 데 있다.

1997년에 『살아간다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고, 2007년에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새롭게 번역되어 개정판으로 나온 장편소설의 서문은 개인적으로 얼마나 인상적이었던지, 당시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의 작가서문 부분만 따로 복사해 몇 번이고 반복해 읽었던 적도 있을 정도였다.

위화는 “진정한 작가는 영원히 자신의 속마음에 따라 글쓰기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번에 출간된 『원청』 역시 그런 작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대외적으로 무너져가는 청나라를 배경으로 한 개인의 기쁨과 비극, 굵직한 선이 느껴지는 인생의 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실제로 역사적 배경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다만 중간중간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이 시대가 어느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지 스쳐가듯 전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꼭 청나라 말기, 근대화로 이끌려 들어가는 중국이라는 배경이 크게 중요한 요소라고 보이지는 않았다. 어느 나라, 어느 문명마다 격변의 시기는 언제나 있었고, 그 가운데서 수많은 인생들의 비극과 슬픔, 애증, 희망, 기쁨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할 뿐이다. 세상은 늘 그런 식으로 돌아갔다. 다만 글을 쓰는 사람들, 특히 작가들에 의해 한 조각 포착된 삶의 이야기는, 특히 위화 같은 작가들의 마음을 통과한 이야기들은 독자들에게 특별한 감동을 주는 것이고, 이것이 위화를 세계적인 작가 대열에 오르게 한 것이다.

‘원청’은 실제 존재하는 도시가 아니다. 소설 속에서는 ‘시진’이라는 도시가 원청의 탈을 뒤집어쓰고 주인공이 삶을 계속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으로 존재한다. ‘원청’이 알려주는 가장 큰 인생의 진리 중 하나는, 인간은 실제하지 않는 것, 상상으로만 존재하는 것, 그렇지만 정말 중요하다고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붙잡고 살아갈 명분과 의지를 얻는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 무게감을 더해주는 것은 상징과 현실이 탁월한 조화다. 이야기 중간중간에 나타나는 정보들, 다시 말해 북양군과 국민혁명군의 전쟁, 그 전쟁 가운데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의지로 꿋꿋이 버티는 백성들, 그리고 체념한 듯 역사의 격랑에 순응하는 빛을 잃은 사람들, 서구식 교육기관이 상하이에 자리 잡고 있는 모습, 속아서 외국에 노예와 같은 일꾼으로 팔리는 사람 등의 작은 이야기들이 서구 열강의 침탈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대륙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꼭 특정 나라의 역사가 아닌, 보편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더 많은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가진다.

특별히 이 소설에서 크게 비교되는 두 인간상이 있다. 시대의 혼란을 틈타 극악의 잔혹함을 서슴지 않는 도적떼들, 그리고 그들에 맞서 어떻게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더 큰 역사적 흐름에 휩쓸려 숨겨진 본성이 극단적으로 발현된 두 가지 인간성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는 위화가 그려내는 인간의 잔혹한 본성이 너무 실감나게 다가와, 인간이 얼마나 비참하게 타락할 수 있는지를 실제로 겪는 것 같아 몸이 떨릴 정도였다. 

저자는 “작가는 아침저녁으로 대하는 현실을 표현해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작품은 거기에서 더 확장되어 구체적 역사 속에서 지금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지나갔지만 분명한 흔적을 남긴 거대한 사건 속에서 일어났던, 혹은 일어났음직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삶의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작가로서 진정으로 찾아야 한다는 ‘진실’의 또 다른 모습을 더 크고 현실적인 세계관에서 구현해낸 저자의 문학적 성과를 동시대에 이렇게 읽어볼 수 있어서 무척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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