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둠즈데이 북
코니 윌리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무려 800페이지가 넘는 이 묵직한 책을 한 열흘 정도 출퇴근시간에 읽어 독파했습니다.
'반지전쟁'(네, 바로 반지의 제왕의 국내 최초 완역본이죠.) 읽던 생각이 나더군요. 일단 분량에 주눅이 들어 읽기 꺼려진데다, 처음 책을 집어들고는 한 30페이지쯤 읽다가 수없이 등장하는 인물들과 생소한 어휘들에 질려서 그만 책을 덮었던 것까지 똑같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다시 책을 잡고 정신없이 읽어나갔던 것도 똑같습니다. 부피와 도입부의 장황함에 질리지 않는다면 정말 멋진 체험이 될 겁니다.
책 이야기를 한다면, 소년 콜린이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는 말이 이 소설의 분위기를 압축해 표현합니다. "정말 묵시적이야!" 번역본을 본 지라 원어 표현은 알 길이 없습니다만, 이 말은 아마도 '묵시록같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네요.
묵시(계시)는 보통 '신이 직접 그의 뜻을 보여주다'는 정도로 설명할 수 있는 긍정적인 단어입니다. 반면 묵시록이라는 말은 요한묵시록에서 묘사하는 지옥도, 절망적인 분위기를 연상케 합니다.
실제 이 소설에서 묘사하고 있는 흑사병의 시대에는 모든 이들이 묵시록의 예언들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렇게밖에는 이 저주스러운 시대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겠죠. 이 소설에서 묘사되는 흑사병은 정말 끔찍함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소설에서는 현대의 같은 곳-옥스포드-에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퍼지는 사건을 묘사합니다. 결국 이 바이러스는 과거로부터 온 것으로 파악이 되죠. (흑사병도,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것도 아닙니다) 미래로부터 과거로 보내진 키브린은 과거의 지옥도를 목격하게 되고, 과거로부터 미래로 보내어진 바이러스는 다시 한 번 암흑시대를 재현해 냅니다.
이러한 상호연관성, 혹은 과거와 현재의 병치는 인물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 제자를 위해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는 던워디 교수는 중세에서 키브린을 헌신적으로 돕는 로슈 신부와 겹쳐지고, 종교적 맹신에 빠져 다른 이들을 괴롭히는 존재도 양 시대 모두 존재합니다.
그러고 보니 귀엽지만 정신없는 아이들도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군요.
이 작가가 콜린과 아그네스의 행동을 묘사하는 부분은 정말 탁월합니다. 특히 아그네스에 대해 작가는 엄청난 애정을 갖고 이 소녀를 그려내고 있는데, 의외로 그녀가 흑사병에 희생되는 부분은 너무나 간단하게 언급되고 맙니다. (집사나 언니 로즈먼드가 발병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집요하다못해 지독한 묘사라던가, 이 소설 전체의 엄청난 수다를 생각한다면 이 부분은 정말 소설에서 유일하게 파격적인 생략의 미가 돋보입니다. ^^)
아마도 작가는 정말로 키브린에 감정이입되어 이 다섯살 소녀를 자신의 동생처럼 생각하면서 소설을 썼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차마 이 소녀가 끔찍한 고통을 겪고 온몸이 망가지면서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는 것을 쓰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싶네요.
결국 작가는 과거이건 미래이건 사람은 똑같은 사람이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혹은 황석영식으로, 암흑같은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거죠) 이 긴 소설을 그렇게 간단하게 주제 요약해 버리는 것은 물론 제가 받은 국어교육의 병폐이겠지만, 이 소설을 덮으면서 작가가 '진짜' 휴머니스트라는 것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살벌하고' '묵시록적'이지만 따뜻한 소설이었습니다.
* 역자를 비롯해 수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1993년에 이 책을 쓴 작가는 휴대통신의 발달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고, 그래서 이 소설의 2050년대는 별로 현실감이 없습니다. 이 소설의 사건들은 결국 모두 전화 불통 내지는 부재 때문에 벌어지게 되는데...영화로 만든다면 과연 무슨 사건이 이 모든 이들간의 커뮤니케이션 불가능 상태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
**이것 역시 다른 분이 지적한 것이지만, 동아일보 기자는 책을 아예 읽지도 않고 새로운 '둠스데이 북'을 창조해 냈습니다. 게으른데다 뻔뻔한 기자 같으니라고.(아래 굵게 표시한 부분은 전부 틀린 부분입니다)
(전략)
페스트가 창궐하던 시절로 보내진 키브린은 미래로 돌아가기 위해 알아둬야 할 '랑데부' 장소를 찾아내지 못한 채 페스트에 걸리게 된다. 한편 현재의 옥스퍼드 역시 페스트에 걸린 채 과거로부터 귀환해 온 시간여행 기술자 때문에 환자들이 속출하게 된다. 질병이 시간을 가로질러 전염된 것이다. 결국 던워디 교수만이 키브린을 구해내야겠다는 각오를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중략)
'둠즈데이 북'은 주인공 키브린이 중세 관찰기를 녹음하기 위해 손목뼈에 이식한 녹음기의 이름이다. - 권기태 기자(2005-02-19) 동아일보 Copyright ww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