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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일기 - 남극의 비극적 영웅, 로버트 팔콘 스콧
로버트 팔콘 스콧 지음, 박미경 편역 / 세상을여는창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제목 '울 준비는 되어 있다'로 이 글을 시작하는 것은 너무 생뚱맞은 시도일까. 그러나 나는 앤 패디먼의 '서재 결혼시키기'에서 처음으로 로버트 팔콘 스콧 대령의 영웅적인 죽음을 알게 된 그 순간부터 이미 울 준비는 충분히 되어 있었다.
여남은 페이지에 불과한 짧은 글이지만 나는 지금도 '아름다운 발데르가 죽었다. 죽었다'라고 외치는 부분부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다. 그래, 나는 어쩔 수 없는 낭만주의자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 텔레비전과 신문은 신년특집으로 남극을 집중 조명한 적이 있는데 그 때 극지방에 가기 위해서는 일주일에 최소 1천만원의 돈이 필요하다는 절망적인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세종기지에서의 연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이상 남극은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은 아무리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빌어먹을,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신이다.
그런데 기대도 하지 않았던 로버트 팔콘 스콧의 '남극일기'가 출간되었다. 장소가 같다는 거 말고는 별 상관 없는 동명의 영화 '남극일기'때문인 지 모르지만, 그 이유야 어떠하든 간에 12.000원이라는 헐값에 남극에 대한 갈망을 대리 배설할 수 있게 된 데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 이곳은 정말 지독한 곳입니다. 최초의 정복이라는 보답을 받지 않고는 감히 발을 들일 엄두가 나지 않는 지독한 곳입니다' 1월 17일 스콧, 윌슨, 보우어, 오츠, 에반스 이 다섯 사람의 영국인 탐험대가 갖은 고생 끝에 극점에 도달했을 때 그 곳에는 이미 34일 전 아문센이 꽂아놓은 노르웨이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아문센이 먼저 극점을 정복할 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기에 남긴 날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임무 그 자체이지 뒤따르는 갈채가 아니다'라고 담담하게 그 심정을 밝히긴 했지만, 분명 괴로울 수 밖에 없는 귀환이었다.
그런데 귀환길에 최저 -41.5도F까지 내려가는 비정상적인 기온저하와 저장소의 연료부족으로 2월 17일 대원 중의 한 명인 에반스가 뇌진탕의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그리고 오츠 대령 또한 자신의 동상걸린 발로 인해 팀 전체가 위험에 빠지자 3월 16일 혹은 17일 영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죽음 중 하나를 스스로 맞이한다. 선원 한 사람이 '신사, 대단한 신사, 언제나 신사'라고 묘사했다는 영국 신사다운 고결한 선택이다.
'밖에 좀 나갔다 올텐데,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소' 그는 비틀거리며 눈보라가 휘몰아 치는 텐트 밖으로 나가더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날은 그의 서른두번째 생일이었다. 아름다운 발데르가 죽었다. 죽었다' (앤 패디먼 '서재 결혼시키기' p48 중에서)
그리고 마지막 저장소인 원톤 캠프까지 겨우 17.7km 밖에 남지 않은 지점에서 남은 세 사람은 극도의 굶주림과 혹한으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들에게는 '고난을 끝내는 수단'인 30알의 진정제와 몰핀 한 튜브가 있었지만 '우리는 자연스럽게 죽기로 결정했다. 효과가 있거나 없거나 다음 저장소로 출발할 것이고 가다가 죽을 것이다'라는 결심 그대로 저장소로 가는 발걸음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로버트 팔콘 스콧의 일기는 3월 29일을 마지막으로 끝이 난다.
그들은 아문센과의 경쟁과 남극 최초 정복에도 실패하고 결국 본국으로 살아서 돌아가지도 못했지만 죽는 그 순간까지도 연구를 위해 암석지대에서 가지고 온 16kg의 돌들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사후 일기가 발견되면서 남극의 비극적 영웅이 되었다.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은 정말 만족스럽다. 만약 극점 정복이 실현되면 심지어 최초 정복이 아니라 할지라도 극지로 들어갔던 가장 중요한 탐험대 중의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라는 9월 10일 일기 그대로였다.
아아, '남극일기'를 읽으면서 나는 내내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감상적인 눈물처럼 남극(혹은 북극)에 가고 싶다는 나의 열망은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다는 감상적인 생각인 게 분명하다.
평생 극 지방을 동경했지만 단 한번의 시원찮은 모험을 제외하고는 (이건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비교다!) 도시 밖으로 절대 나가는 일이 없었다는 글렌 굴드처럼, 나같이 유약한 정신에 허약한 체질의 소유자는 '강인한 정신과 강인한 육체의 이상적인 소유자'인 로버트 팔콘 스콧 일행의 발꿈치도 못 따라갈 게 분명하니, 아뿔사 백일몽만 꾸다 저 극 지방의 아름답고 장엄한 백야나 오로라는 못 보고 죽을 게 틀림이 없다.
나는 1천만원이나 쏟아부어 '신발을 신는데만 30분이 걸렸다'는 남극으로 떠나는 대신 따뜻한 내 방에 남아 '남극일기'나 읽으며 눈보라와 빙하, 크래바스가 만들어내는 안전한 모험 속으로 텔레포트하는 것을 기꺼이 선택한다. (아쉬운 게 있다면 이 책에 생생한 컬러 화보가 빠진 거다!)
그러나 아무리 상상력이 탁월해도 동창이 밝아오는 이 시간에 리뷰를 남긴다는 것은 '극도의 단순한 생활이 곧 극도의 건강한 생활임을 보여준다'는 일기 속 한 구절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이 세상에는 지구상의 모든 책을 다 읽어도 알 수 없는 사실과 체득할 수 없는 경험이 있다. '바람을 맞는 것이 아니라 바람에 코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다'는 극 지방의 바람, 그 바람은 정말 어떤 느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