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고르는 데는 다소 시간이 걸렸지만 '청춘의 문장들'을 펼치자 마자 단숨에 아우토반으로 달린 다음 숨을 고르느라 앤소니 버클리 콕스의 추리소설 '독초콜릿 사건'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런 문장이 나오더라. '기억은 쉽게 사라져도 편견은 오래 남는다' 그러고 보면 나는 김연수에 대한 어떤 편견이 있는 거 같다. (작가나 팬 모두 너그럽게 봐주시길)

 내 경우 장르는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읽으면서도 작가에 대한 호불호는 심하다 싶을 만큼 극명하게 갈리는지라 '특기'가 '독서'인 사람치고는 대표작 한 권도 제대로 읽지 않고 건너띄는 작가가 많은데, 사실 김연수도 그런 운 나쁜 케이스에 속한다.

 아무 생각없이 단편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를 읽다가 내 취향이 아니길래 다 읽지도 않은 상태에서 친구에게 선물했는데, 내 취향이 아니라는 편견은 지금까지 강하게 남아 있지만 도대체 그 글이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부끄럽다) 단 한 문장도 생각이 나지 않는 거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김연수에 대한 미씸쩍은 불안은 나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지만 그래도 '청춘의 문장들' 이 수필집만큼은 나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한 문장, 한 문장들이 편견을 뛰어넘을 정도로 너무 많아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모르겠다. 가끔 들리는 맥주집 바에 앉아 좋아하는 버드와이저를 (그것도 3병이나) 마시며 읽어서 그런 걸까.. 애초에 내 편견이 옳지 않았던 걸까.. 다시 꼼꼼히 읽어보는 수 밖에 없다.

 요즘 세상은 박민규의 표현처럼 너무 '쿨하고 자빠져서' 때로 세상 다 산 늙은이들처럼 그래도 옛날이 정답고 좋았어, 라는 착각을 할 때가 많은데, 그럴 때 이런 청춘의 환영같은 책을 만나면 갑자기 억장이 무너지면서 언제 그랬느냐는 듯 구식의 문장들 하나하나가 눈에 와 밟히고 어느새 그 시절 그 골목길을 울면서 달리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마치 고향을 떠나온 다음 소식이 끊겼던 옛친구를 만난 거처럼 반갑고 소중하고 이제는 돌아가고 싶어도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애닯고 애틋한 그런 마음들..

그 시절에는 즉석 떡볶이 가게에서 떡이 불어터질 정도로 떨리는 가운데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만나 데이트를 했고, 음악다방 dj 인혁이 하는 팝송강좌를 들으면서 녹음 테잎을 가지고 공부했으며, 아직 김광석이 살아있을 때라 대학 캠퍼스에서 그가 부르는 청승맞은 노래를 들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의 미덕은 그런 과거를 되살려내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세월이 지난 다음 돌아온 청춘의 화살을 다시 그 시절로 되돌려 보내는 작가의 담담한 포즈에 있는 거 같다. (쓰면서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매 펙트마다 따라오는, 작가의 취미라는 고상한 한시 때문에 더 그런 생각이 드는 지도.. 한시가 이렇게 가슴 저미도록 아름답다는 사실.. 예전엔 미처 몰랐던 사실이다.

하긴 나이가 들고보니 예전엔 미처 몰랐던 거 투성이다. 지긋지긋해서 도망치듯 떠나온 D시가, 그 곳에 남겨두고 온 가족들이, 친구들과 친척들이, 그리고 추억들이 때때로 너무 그리워서 가슴에 암덩어리가 올라온 거처럼 몹시 뻐근하다. 왜냐하면 빚이 있는 자는 언제나 마음이 무거울 수 밖에 없다. 나는 그 곳에 내 청춘을 저당잡혔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김연수는 인기있는 작가라도 되서 기가 막히게 멋진 청춘의 문장들로 그 시절을 찾는 데 성공했지만 나는 그 놈의 청춘을 전당포에서 되찾아오기 위해 도대체 무엇을 지불해야 좋을지 아직도 모르겠다. 설령 맡겨둔 그 값어치보다 더 비싼 이자를 호되게 치르더라도 언젠가는 유전기간이 끝나기 전에 내 청춘들이 돌아왔으면 좋으련만.

'기억은 쉽게 사라져도 편견은 오래 남는다'라는 문장으로 처음을 연 거처럼 역시 한 문장으로 끝을 맺어보자. 작가의 말처럼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내)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

참, 쓰다보니 너무 감상적으로 흐른 이 글을 읽은 나머지 쉬- 김연수의 문장들도 감상적일 거라는 편견을 가지지 않을 지 걱정이 드는데, 염려 붙들어 놓으세요. 책 날개에 나온 프로필을 그대로 옮기자면 '전적으로 이과에 적합하게 태어난 냉철한 머리가 그만 이상과 김수영과 김지하의 시를 읽으면서 이상해지기 시작해 대학에 들어갈 때는 수많은 문학과 중에서 천문학과를 택했다가 결국 영문학과에 들어가게 됐다'지만 '드넓게 바라볼 때, 두 과 사이에 별 차이는 없었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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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3-10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새파란 청춘이시면서......
에세이집이었군요. 전 소설집인 줄 알았어요.
그리고 별로 감상적으로 안 흘렀답니다.
꼭 한번 읽어보고 싶게 쓰셨는데요, 뭐.
김연수, 저도 왠지 호감을 가지지 않은 작가였답니다.

히나 2005-03-10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아직 서슬퍼런 청춘이라죠 흑흑.. 꼭 한번 읽어보세요 청춘이란 말은 언제 들어도 설레이잖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재미있어요..
 
남극일기 - 남극의 비극적 영웅, 로버트 팔콘 스콧
로버트 팔콘 스콧 지음, 박미경 편역 / 세상을여는창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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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제목 '울 준비는 되어 있다'로 이 글을 시작하는 것은 너무 생뚱맞은 시도일까. 그러나 나는 앤 패디먼의 '서재 결혼시키기'에서 처음으로 로버트 팔콘 스콧 대령의 영웅적인 죽음을 알게 된 그 순간부터 이미 울 준비는 충분히 되어 있었다.

여남은 페이지에 불과한 짧은 글이지만 나는 지금도 '아름다운 발데르가 죽었다. 죽었다'라고 외치는 부분부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다. 그래, 나는 어쩔 수 없는 낭만주의자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 텔레비전과 신문은 신년특집으로 남극을 집중 조명한 적이 있는데 그 때 극지방에 가기 위해서는 일주일에 최소 1천만원의 돈이 필요하다는 절망적인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세종기지에서의 연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이상 남극은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은 아무리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빌어먹을,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신이다.

그런데 기대도 하지 않았던 로버트 팔콘 스콧의 '남극일기'가 출간되었다. 장소가 같다는 거 말고는 별 상관 없는 동명의 영화 '남극일기'때문인 지 모르지만, 그 이유야 어떠하든 간에 12.000원이라는 헐값에 남극에 대한 갈망을 대리 배설할 수 있게 된 데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 이곳은 정말 지독한 곳입니다. 최초의 정복이라는 보답을 받지 않고는 감히 발을 들일 엄두가 나지 않는 지독한 곳입니다' 1월 17일 스콧, 윌슨, 보우어, 오츠, 에반스 이 다섯 사람의 영국인 탐험대가 갖은 고생 끝에 극점에 도달했을 때 그 곳에는 이미 34일 전 아문센이 꽂아놓은 노르웨이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아문센이 먼저 극점을 정복할 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기에 남긴 날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임무 그 자체이지 뒤따르는 갈채가 아니다'라고 담담하게 그 심정을 밝히긴 했지만, 분명 괴로울 수 밖에 없는 귀환이었다.

그런데 귀환길에 최저 -41.5도F까지 내려가는 비정상적인 기온저하와 저장소의 연료부족으로 2월 17일 대원 중의 한 명인 에반스가 뇌진탕의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그리고 오츠 대령 또한 자신의 동상걸린 발로 인해 팀 전체가 위험에 빠지자 3월 16일 혹은 17일 영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죽음 중 하나를 스스로 맞이한다. 선원 한 사람이 '신사, 대단한 신사, 언제나 신사'라고 묘사했다는 영국 신사다운 고결한 선택이다.

'밖에 좀 나갔다 올텐데,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소' 그는 비틀거리며 눈보라가 휘몰아 치는 텐트 밖으로 나가더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날은 그의 서른두번째 생일이었다. 아름다운 발데르가 죽었다. 죽었다' (앤 패디먼 '서재 결혼시키기' p48 중에서)

그리고 마지막 저장소인 원톤 캠프까지 겨우 17.7km 밖에 남지 않은 지점에서 남은 세 사람은 극도의 굶주림과 혹한으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들에게는 '고난을 끝내는 수단'인 30알의 진정제와 몰핀 한 튜브가 있었지만 '우리는 자연스럽게 죽기로 결정했다. 효과가 있거나 없거나 다음 저장소로 출발할 것이고 가다가 죽을 것이다'라는 결심 그대로 저장소로 가는 발걸음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로버트 팔콘 스콧의 일기는 3월 29일을 마지막으로 끝이 난다.

그들은 아문센과의 경쟁과 남극 최초 정복에도 실패하고 결국 본국으로 살아서 돌아가지도 못했지만 죽는 그 순간까지도 연구를 위해 암석지대에서 가지고 온 16kg의 돌들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사후 일기가 발견되면서 남극의 비극적 영웅이 되었다.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은 정말 만족스럽다. 만약 극점 정복이 실현되면 심지어 최초 정복이 아니라 할지라도 극지로 들어갔던 가장 중요한 탐험대 중의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라는 9월 10일 일기 그대로였다.

아아, '남극일기'를 읽으면서 나는 내내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감상적인 눈물처럼 남극(혹은 북극)에 가고 싶다는 나의 열망은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다는 감상적인 생각인 게 분명하다.

평생 극 지방을 동경했지만 단 한번의 시원찮은 모험을 제외하고는 (이건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비교다!) 도시 밖으로 절대 나가는 일이 없었다는 글렌 굴드처럼, 나같이 유약한 정신에 허약한 체질의 소유자는 '강인한 정신과 강인한 육체의 이상적인 소유자'인 로버트 팔콘 스콧 일행의 발꿈치도 못 따라갈 게 분명하니, 아뿔사 백일몽만 꾸다 저 극 지방의 아름답고 장엄한 백야나 오로라는 못 보고 죽을 게 틀림이 없다.

나는 1천만원이나 쏟아부어 '신발을 신는데만 30분이 걸렸다'는 남극으로 떠나는 대신 따뜻한 내 방에 남아 '남극일기'나 읽으며 눈보라와 빙하, 크래바스가 만들어내는 안전한 모험 속으로 텔레포트하는 것을 기꺼이 선택한다. (아쉬운 게 있다면 이 책에 생생한 컬러 화보가 빠진 거다!) 

그러나 아무리 상상력이 탁월해도 동창이 밝아오는 이 시간에 리뷰를 남긴다는 것은 '극도의 단순한 생활이 곧 극도의 건강한 생활임을 보여준다'는 일기 속 한 구절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이 세상에는 지구상의 모든 책을 다 읽어도 알 수 없는 사실과 체득할 수 없는 경험이 있다. '바람을 맞는 것이 아니라 바람에 코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다'는 극 지방의 바람, 그 바람은 정말 어떤 느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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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ky 2005-03-02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스콧의 남극이야기를 '광기와 우연의 역사' (스테판 츠바이크 지음) 통해 알게 됐는데요. 저도 엄청 울었었어요. 이 책 꼭 읽어보고 싶다 했더랬는데..님 리뷰 읽고나니 더 땡깁니다. ^^

히나 2005-03-02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보 고맙습니다. '광기와 우연의 역사'도 읽어봐야겠네요.

분홍달 2005-03-10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 '산'에 관한 책을 열심히 읽었던 적이 있는데...다시 한번 산속으로 들어가고 싶네요^^

히나 2005-03-12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우일이 도쿄 여행기에서 그런 말을 하더라구요. 등산이라면 딱 질색이지만 등산복 브랜드는 너무 좋다고. 저도 그래요 산은 안 타도 노스 페이스 정신의 추종자죠 ^^ 그러고보니 심산의 마운틴 오딧세이가 생각나네요..
 
뉴요커 - 한 젊은 예술가의 뉴욕 이야기
박상미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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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102층 전망대,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마시는 커피, 이른 아침 센트럴 파크를 달리는 뉴요커 그리고 담배 연기 자욱한 jazz 클럽과 수다스런 우디 알렌의 영화들!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 속에 자기만의 도시를 하나 정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미국 영화를 보고 자란 우리들에게 뉴욕은 언젠가는 한번쯤 가고 싶은 꿈의 도시다.

한때는 메어리 히긴스 클라크의 [누군가가 보고 있다]를 읽고 랠리라는 퇴역교사처럼 모든 관계를 끊고 전재산을 종이가방에 든 채 뉴욕 그랜드 센트럴 역에서 노숙자로 살고싶다는 어처구니 없는 꿈도 꾼 적 있다. (실제로는 늙어서 행려병자가 되는 게 제일 두렵지만 -_-) 하지만 대부분은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뉴요커를 동경해온 게 사실이다. 마크 제이콥스의 스니커즈를 신고 프라다 백을 맨 어깨에 한 손에는 스타벅스 커피, 한 손에는 뉴욕 타임즈를 든! 

이 책 [뉴요커]는 브룩클린 윌리엄즈버그 공장지대의 로프트에서 남편과 고양이와 함께 살며 그림을 그리고 번역을 하는 박상미라는 '한 젊은 예술가의 뉴욕 이야기'로 뉴욕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겐 마치 마리화나처럼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한번도 피워본 적은 없지만 중독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것을 볼 때 분명 그 맛도 끝내주리라는 상상을 할 때처럼.

박상미는 '뉴요커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그리고 사람들이 잡지 속에서 상상하는 뉴요커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 환상부터 깨뜨린다. 그러나 그녀가 보여주는 뉴욕의 구석구석은 관광 가이드보다 더 유혹적인 게 사실이다.

인디언 말로 '천국과도 같은 지상'이라는 우디 알렌의 '맨하튼'부터 시작해 어디에서나 베이스 플레이어들(재즈 연주자)들을 만날 수 있는 지하철을 타고 빌딩처럼 쌓여있다는 책과 5만달러짜리 책금고가 있는 중고서점 '스트랜드 북스토어'로 가서 내리는 거다. 그리고 벼룩시장 '헬즈 키친'을 거쳐 이스트 빌리지, 이스트 빌리지를 떠나온 예술가들이 모여산다는 윌리엄즈버그까지 걸으면서 '예술가들은 도대체 어디서 살아야 하나'를 고민해 보는 거다.

그 뿐 아니다. 뉴욕에는 멋진 건물 뿐만 아니라 멋진 예술가들도 너무나 많다. 400미터 높이의 쌍둥이 빌딩 가운데 60미터 길이의 줄을 놓고 쌍둥이 빌딩을 건넌 필립 프티와 도시의 고독과 외로움을 그린 에드워드 호퍼, 명사들의 집과 개인적인 공간을 상상력으로 그리는 덱스터 달우드, 그리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있는 베르메르와 존 싱거 사전트.. 마지막으로 로프트에서 사는 무명의 예술가들까지..

이렇게 글과 사진을 함께 따라가다 보면 마치 현지통신원이 전해주는 거처럼 뉴욕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지고 지금 당장이라도 슈트케이스에 짐을 싸서 떠나고 싶을 정도다! 훌륭한 문장가는 아니지만 읽기에 부담이 없고 뉴욕의 스트리트 예술처럼 독특한 유머와 예술가적 안목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1부 뉴욕 뉴욕'과 '2부 뉴욕 그리고 예술'에 비해 '3부 뉴요커 스토리'에 담긴 몇몇 글들은 페이지 수를 채우기 급급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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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2-11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사느냐 마느냐로 계속 고민인데 아무래도 사야겠습니다.
땡스투 눌러요.^^

히나 2005-02-11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게을러서 오랜만에 올렸는데.. 로드무비님 반가워요..

kumaaa 2005-03-01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흥미롭게 본 책입니다만 말씀처럼 3부는 약간의 뒷심부족의 느낌을 지울수가 없군요.^ ^;;; 그러나 뭐랄까 무겁지않으면서 시원한 느낌의 문체가 저같은 붙박이에게는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왔습니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Mr. Know 세계문학 45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오종우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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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무식한 일이다. 나는 안톤 체홉의 소설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고, '갈매기'나 '벚꽃동산'같은 연극만 봤을 뿐이다. 그리고 저 정도의 연륜이 나오려면 오십은 넘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뿔사, 그러나 그는 44살의 나이로 죽었다. 줄리아 하트 콘서트에서 정대욱이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말한 적이 있다. 꼭 읽어보라고. 그 후로 난 서점에 갈 때 마다 습관처럼 안톤 체홉을 기웃거렸다.

그러다 올 8월 '열린책들'에서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표제작으로 소설선집이 나온 걸 알았다. 3,4쪽 분량의 손바닥만한 소설부터 60쪽에 가까운 중편소설까지 대표작이 고루 실려있었다. 작고 가벼워서 출퇴근길에 읽으면딱일 거 같다. 물론 나는 늘 하던대로 침대에 누워 읽었다.

본업이 의사라 그런지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대고 냉정하게 인간과 사회를 들여다 보긴 했지만, 사람들 하나하나를 건드리는 손길은 의외로 따뜻했다. 젊은 날 생계를 위해 유머작가로 활동한 만큼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인물들을 생기발랄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마스크'나 '어느 관리의 죽음' '실패'가 그러하다.

나는 안톤 체홉을 읽기 전까지 러시아 사람들이 이렇게 호들갑이나 떠는 줄 몰랐다. 사실 조금 실망했다. 러시아 작가를 별로 알지 못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 마야코프스키를 읽으면서 굉장히 심각한 햄릿형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이 온통 눈으로 뒤덮힌 얼어붙은 밤, 인테리켄챠는 검은색 모피코트를 두르고 보드카를 마시며 깊은 사색에 잠겨 민중을 생각하고 걱정하고 또 번민하고 있으리라 여겨졌다. 그러나 아니었다. 이거 원 돈 키호테형 인간들이 아닌가!

그러나 사소한 일상과 그 보다 더 사소한 사람들 속에, 그 우스꽝스런 야단법석 속에, 떠벌거리는 말들 속에 지독한 비애가 뿜어져 나왔다. 러시아 남자들의 평균연령을 깎아먹고 과부와 아빠 없는 불쌍한 아이를 만들면서도 절대 끊을 수 없다는 보드카 맛처럼 슬프고 괴로우며 그래서 너무 아름답다. 나는 마셔본 적 없기 때문에 짐작만 할 뿐이다. 분명 러시아 사람들은 소주보다 더 독한 보드카를 마시며 소설을 쓰고... 또한 사랑도 혁명도 그렇게 치렀을 것이다.

그런 반면에 '농담'이나 '어느 여인의 이야기'는 사랑에 관한 농담 같은 단편들로 서정적이고 시적이고 감상적이다. 나이가 들어 젊은 날을 되돌아보며 가장 아름다웠던 때를 추억한다. 젊은이는 늙은이가 되고 사랑은 일상으로 변하고 지나갔던 순간은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인생은 그렇게 지나간다.

단편 '농담'에서 나는 무서워하는 나젠까를 설득해 썰매를 타고 빠르게 내려간다. 그리고 바람 속에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쟈'라고 속삭인다. 읽는 나도 나젠까도 그게 진담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실망할까봐 차마 다시 확인하지 못했다. 그 대신 나젠까는 썰매만 타자고 졸라댔다. 그리고 더 이상 썰매를 탈 수 없는 계절이 오면서 바람이 실어다 주는 그 사랑 고백도 끝이 난다. 그리고 '나'는 다음날이면 다른 도시로 떠난다. 슬퍼하면서 다른 먼 곳을 바라보는 나젠까. 그 때 바람이 불어오고 나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쟈'라고 말한다. 이제 나젠까는 '나'를 바라보지 않고 너무나도 기쁜 얼굴로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에 그 말이 처음부터 농담이었다는 것을 밝힌다. 지금도 왜 그런 농담을 진담처럼 내뱉았는지 알 수 없다고 고백한다. 사랑해서 결혼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나젠까는 이미 진작에 결혼했다. 아마 화자인 '나' 역시도 결혼했을 것이다. 인생은, 그렇게 지나간다.

그리고 조금 긴 중편소설 '6호 병동'과 '검은 수사'는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에다 철학적이고 회의적이다. 두 주인공 다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미치고만다. 적어도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결국 둘 다 죽는다. 한 사람은 정신 병동에 갇힌 채 죽고 나머지 한 사람은 헛것을 보다 죽지만 결국 죽음은 죽음일 뿐이다. (얘기하려면 너무 길어져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이 책 끄트머리에 실려있다. 사는 게 권태로운 유부남 구로프는 휴가지에서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안나와 만난다. 처음엔 물론 단순한 정사였지만 이내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사랑에 빠지기 전에도 불행했지만 이제 사랑에 빠지고서도 불행한 두 사람. 조만간 끝나고 말 열정임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다. 끝날 땐 끝나더라도 오늘은 안나를 만나러 가야 하는 것이다.

'지금 기온은 3도인데, 그래도 눈이 내리는구나' 구로프가 딸에게 말했다. '하지만 따뜻한 건 땅의 표면이지. 대기의 상층에서는 기온이 전혀 다르단다.'

눈이 내릴 수 없는 따뜻한 날씨에 눈이 내린다. 그건 땅과 하늘의 기온이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게 인생이다. 실온과 체감온도가 다른 인생. 이 비슷한 구절은 '검은 수사'에도 나온다.

'이보게, 알 수 없는 건 말이야...' 숨을 돌리기 위해 멈춰 서서 그가 말을 꺼냈다. '땅의 표면이 이렇게 얼었는데도, 막대에 달린 온도계를 지상에서부터 2사젠 위로 올려 보면, 그곳은 따뜻하거든... 대체 왜 그런가?'

물론 알 수 있지만 또한 알 수 없다. 대기권의 온도가 지상보다 따뜻한 건 과학이지만 그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은 과학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건 신비로운 그 어떤 것이어야 한다. 농담처럼 내뱉은 말을 바람이 사랑을 고백했다고 믿는 바보 같은 여자의 진담처럼 말이다.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은 단편소설이라는 장르에 이 위대하고 신비로운 '농담'을 불어넣고 44살에 죽었다. 나는 이 농담이 너무 웃기고 비극적이고 아름다워서 조금 울었다. 아마 내 옆에 보드카가 있었다면, 적어도 쐬주라도 있었다면 마지막 작품 '벚꽃동산'처럼 화려하게 꽃피우고 사라진 그 농담에 경의를 표하며 한 잔 정도는 마셔줬을텐데. 맥주로는 사실 조금 싱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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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0-20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숨자고 일어나 알라딘 서재에 기어들어왔더니 이렇게 재미있는
글을 올려 놓으셨군요.^^
리뷰만 읽고도 쐬주 한잔이 땡기네요.

urblue 2004-10-20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방에서 보고 건너왔습니다.
훌륭한 리뷰네요.
러시아 소설엔 의외로 돈키호테형 인간과 수다쟁이들이 넘쳐납니다. ^^

히나 2004-10-20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월 30일까지 정동극장에서 조민기의 '갈매기' 공연하는데..
보러갈 수 있을지..
암튼 urblue님 반갑습니다. :)

로쟈 2004-10-20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식한 일이다. 나는 안톤 체홉의 소설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고, '갈매기'나 '벚꽃동산'같은 연극만 봤을 뿐이다" But I think you know him(Chekhov) from now on...

마음의 평화 2004-11-20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홉이 40대에 죽었군요...저도 단편집을 읽으면서 그가 50대는 훌쩍 넘겼으리라 생각했는데..

하지만 제가 체홉의 단편-이 책 말고 민음사에서 나온 것-을 읽으면서 느낀 러시아인들은 그렇게 호들갑스럽지 않았던 거 같은데...

어쨌거나 이 책도 읽어보고 싶어서 전에 읽은 책과 겹치는 게 없는지 목차확인 작업에 들어갈 참입니다..^^

포로롱 2005-04-30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음사의 체홉 단편집을 읽고 있는 중인데 님의 차근차근 응시하는 이야기가 재미있네요. 좋은 리류 잘 읽고 갑니다.
 
어느 날 '엄마'에 관해 쓰기 시작했다
이충걸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0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은 T시에 계신 엄마가 너무 보고싶다. 달리 바쁜 일도 없으면서 내려갔다 오지, 늘 보고싶다 투정만 부린다. 그 대신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와 그리움의 속도로 읽기 시작한다. 해질녘 시장에 간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서글픈 고아의 마음. 이젠 파고들 엄마 품도 없는데.

이충걸은 아시다시피 그 나이에도 아파트에서 엄마와 단둘이 사는 독신남자다. 롱코트와 구두, jean을 좋아하는 패션피플답게 그가 엄마를 추억하는 방식도 다분히 패셔너블하다. 아들이 말쑥한 양복을 입길 원하는 노모와 청바지가 스무벌이나 되는 아들은 티격태격 싸울 수 밖에 없다. 아들은 서랍에 차곡차곡 개켜둔 5,60년대 엄마의 레이스 달린 블라우스를 통해 그 시절 예뻤던 엄마를 그리워하길 원한다.

한때 미워했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도 돌아가신 후 입던 코트를 태우면서, 그게 얼마나 비싼 건데 비싼 건데 하는 안타까움으로 애둘러 표현되고. 하필이면 그 많은 색 중에 팥죽색 밥통을 사줄게 뭐람. 마음이 맞지 않는 형들에 대한 기억도 한번도 형의 옷을 물려 입지 않았다는 옷에 관한 추억으로 불러들이는 식이다.

이충걸의 문체는 사실 좀 남사스러울 정도로 서정적이고 문장은 가스오부시처럼 살랑살랑거리지만 그래서 독보적인, 나름대로의 순정적인 아우라가 있다. 마치 영화 '러브레터'처럼 그의 추억도 살짝 더 예쁘게 장식되어 있지만, 구태여 마이크로 필름으로 보관된 6, 70년대 보도사진으로 개인적인 추억을 들여 봐야할 이유가 있을까.

패션과 술과 탐닉에 관한 미사여구를 조심스럽게 들쳐보면 거기엔 노모의 주름이 있고 아픈 팔다리와 뚱뚱한 육체가 있다. 그리고 남편이 없는 엄마와 아내가 없는 아들이 만들어내는 엇박자 사랑이 삐죽 고개를 내민다. 엄마를 기억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충걸은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엄마에 관해 쓰기 시작했다. 아, 이런 막무가내로 사랑스런 아들을 둔 엄마는 얼마나 행복할까. 엄마, 나도 엄마에게 잘 할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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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0-15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의 문체는 남사스러울 정도로 서정적이고 문장은 가스오부시처럼 살랑살랑거리지만...
어쩜 그렇게 꼭 집어내셨는지...
지겹고 짜증나면서도 그의 글은 찾아 읽게 되니 참 별난 일이죠?^^

히나 2004-10-19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제서야 봤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번달인가 지난달에 '허스토리'에 김갑수, 김어준씨와 함께 나온 인터뷰 혹시 읽어보셨나요?

로드무비 2004-10-20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못 읽어봤는데요.

히나 2004-10-20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스토리에 이충걸, 김갑수, 김어준씨가 나와 여자에 대해 어쩌구 저쩌구 했던 거 같은데 함 읽어보세요 재밌더라구요..

로드무비 2004-10-20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올려주실 순 없을까요? 헤헤
서점 가면 꼭 서서 읽어보고 오겠습니다.^^

히나 2004-10-20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저도 퍼오려고 '허스토리' 사이트 가 봤는데 안 올라와 있더라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