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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 1 ㅣ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5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가능하면 스포일러가 없도록 썼지만 주의해서 읽으세요.
일본 시추에이션 추리 드라마 중에 사건을 거꾸로 푸는 "33분 탐정" 이 있다. 일단 범인의 자백을 듣고 사건은 5분만에 해결되지만 쿠라마 로쿠로 탐정이 진범을 찾겠다고 방송시간 33분 동안 질질 끌면서 시간만 때우는 게 콘셉트다. 애초부터 진짜 범인을 찾으려고 한 게 아니니 마지막에 가서 밝혀지는 반전도 진범은 대개 처음의 그 범인이었다는 식의 허무 개그다. 그러니 시청자 역시 범인을 찾는데는 신경쓰지 않고 대충 시간이나 때우려고 헛다리 잡는 추리 수사나 함께 즐기는 것이다. 이 묘미가 실은 만만치 않은데 이런 장르가 실제로도 존재하는지 모르지만 '탈락계(다소 힘빠지는) 서스펜스'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범인이 밝혀진 상태에서 사건을 거꾸로 푸는 방식을 택한 추리소설이 있다. 미야베 미유키의 "낙원" 은 "모방범"의 후속작으로 1권 표지에 실린 줄거리를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모방범' 사건으로부터 9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날 여전히 사건의 트라우마를 껴안고 살아가던 르포라이터 마에하타 시게코에게 한 중년의 여자가 찾아와서 죽은 아들에게 예지능력이 있었던 것 같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평소 그림을 좋아하던 아들의 스케치북에 한 소녀가 부모에게 살해되어 16년간 마루 밑에 묻혀 있던 살인사건을 연상시키는 그림이 있다는 것. 하지만 사건이 밝혀진 것은 소년이 이미 교통사고로 죽고 난 후였다. 과연 소년은 그 가족의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특수한 능력(사이코메트리)이 있었을까?
미야베 미유키는 히토시라는 죽은 소년이 정말 사이코메트리라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으로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도하지만 사실 이 건 '맥거핀' 에 가깝다. '맥거핀'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사이코" 에서 나온 용어로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지만 극적 서스펜스를 높이기 위해 관객이 줄거리를 따라가면서 계속 헛다리를 짚게 만드는 일종의 속임수이다. 사실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따로 있으니 바로 2권에 나오는 도이자키 가족의 이야기다. 누구 말 따나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면 바깥에 내다 버리고 싶은 게 가족이라지만 실제로 그렇게 한 부모도 있었던 것이다.
부모에게 살해당해 16년 동안 집 아래 묻혀 있던 소녀 도이자키 아카네. 관계자들의 조사를 진행하던 시게코는 그녀의 배후에 있던 한 남자의 존재를 알게 되고 딸의 죽음에 대한 부모들의 석연찮은 태도에도 의문을 가지게 된다. 자기 손으로 딸의 죽음을 불러와야 했던 도아자키 부부의 비극은 어디서 연유했을까?
도아자키 가족의 비극은 우연히 화재가 일어나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6년 전 당시 15살이었던 불량소녀 도이자키 아카네를 부모가 실수로 목 졸라 죽인 다음 마루 밑에 묻었다고 실토한 것이다. 그러나 공소시효가 끝난 사건이라 조사 후 도이자키 부부는 이사를 떠나 잠적해버리고 마에하타 시게코는 남겨진 그 주변 인물들(친척, 회사, 이웃 등)을 하나 둘 찾아다니면서 가족의 사연을 추적하게 된다. 동료 추리소설가인 교구코 나쓰히코와 마찬가지로 다소 장황설로 흐를 때도 있지만 인간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촘총한 이 그물망이야말로 미야베 미유키 소설의 장점이기도 하다.
이 세상 모든 가족이 그렇듯이 가족간의 관계는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당사자들이 아니고서는 함부로 설명할 수 없지만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이렇다. '사이코메트리'를 굳이 불러오지 않아도 우리에게도 '제3의 눈' 이 있는 것이다.
도이자키 부부는 버블경제 시대에 평범한 중산층(다소 서민에 가깝다)이지만 주위 이웃들과 왕래가 별로 없는 약간 폐쇄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다행히 작은딸 세이코는 성품이 밝아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예민하고 자아가 강한 큰딸 아카네는 답답함을 느낀다.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지만 서로 잘 안 맞았던 것이다. 거기다가 천사표 동생과 비교되면서 더 삐뚤어지고 급기야 탈선의 길로 빠져든다. 가족이라는 관계 속에서 '좋은 예 나쁜 예'가 있듯이 그녀에게는 하필이면 '나쁜 예' 역할이 주어진 것이다.
시게코는 문득 예전에 취재 때문에 만난 사람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의 행복이나 불행은 자기가 결정하는 게 아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결정하는 것이다' 라는. 행복이든 불행이든 결정권은 그의 손 안에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도이자키 아카네의 불행을 결정지은 것은 가족. 그 중에서도 여동생이 아닐까? 어른이 된 동생 세이코(당시 9살로 집을 떠나 있었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 한다)는 히토시 일로 알게 된 마에하타 시케고에게 왜 부모님이 언니를 죽였는지 조사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가족의 이야기인 동시에 이 세상 모든 언니와 여동생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실제로 미야베 미유키는 언니에 대한 꿈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원래 이 작품은 제 꿈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제게 또 한 명의 언니가 있는데, 제가 모르는 사이에 살해되었으며, 그 시신이 집 마루 밑에 묻혀 있다- 는 내용의 꿈이었습니다. '또 한 명'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제게 진짜 언니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언니가 있는데 어릴 때 같은 방을 쓰는 언니의 일기장을 딱 한번 훔쳐본 적이 있다. 하필이면 그 안에 아빠가 동생(=나)을 더 좋아하는 거 같다 는 내용이 쓰여 있었고 나는 너무 놀라 그 후로 다시는 언니의 일기장을 뒤져볼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 했다. 나는 그 반대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둘째 때문에 양보만 한다며 일찍 태어나는 건 손해라고 생각하지만 둘째는 둘째대로 첫째의 외로움을 달래주기 위해 태어난 인형(?)이라는 후발주자의 안타까움이 있다. 자매 관계는 그런 것이다.
언니와 내가 그랬듯이 네 살 터울인 여자 조카를 보면 엄마의 사랑을 받기 위해 나름 눈에 안 보이는 경쟁이 치열하다. 언니가 잘 못 한 게 있으면 동생이 몰래 고자질하고 동생이 야단 맞고 있으면 언니가 고거 참 쌤통이다 하면서 기분 좋아하는 게 보여서 재미있다. 그러다가도 부모가 자리를 비우면 둘이서 챙겨주고 따르고 그렇게 애틋할 수가 없다. 언니의 딸인 조카들을 보면서 나는 언니와 나의 관계를 되돌아 보는 일이 더러 생기는데 액자소설 형식을 취한 이 소설의 '단장' 부분도 그러하다. 작가는 이미 죽은 도아자키 아카네 대신 초등학생으로 똑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귀여운 반항아 사토 마사코의 입을 빌어 말하고 있다.
시케고는 깨달았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복도 끝에 서 있는 저 아이는 어린 아카네다. 여기에도 또 아카네가 있다.
누구나 어린 시절은 불완전하다. 몸도 생각도 크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더러 실수도 저지른다. 그러나 아카네라는 소녀의 불행은 실수만 저지르고 어른이 되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반성할 시간을 갖지 못 한 것이다. 결코 용서 못 할 과거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녀도 어른이 되었다면 죄값을 치루고 옆집소녀 나오미처럼 한때 불량청소년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쌍둥이 엄마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악을 옹호해서는 안 되지만 미야베 미유키 역시 그 점을 안타깝게 여겼을 것이다.
이 그림이 슬프고 쓸쓸한 건, 히토시가 아카네란 여자아이를 애도하고 있기 때문이야. 초능력이니 뭐니 하는 건 잘 모르지만, 특별한 감각이 있는 사람이 있잖아? 히토시에게는 그게 있었던 거야. 보통 사람에게는 없는 눈, 제3의 눈 말이야. 그게 마음 속에 있는 거야
본성이 맑고 선한 아이였던 히토시는 나이는 어렸지만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 것을 '사이코메트리'라고 부른다. 소년은 아름다운 것도 보았지만 때로는 사람들이 감추고 싶어하는 추한 것도 보았다. 자신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기억에서 불륜과 성추행을 목격했고 우연히 '모방범'의 산장도 목격했다. 어린 아이에게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어두운 세계였고 종종 그 안에서 길을 잃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는 또래인 사토 마사코와 달리 도망가지 않았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었던 종이쪽지를 봉인해버렸던 소녀와 달리 히토시는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능력인 그림으로 그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다. 안타깝게도 그 결과는 죽음이었지만 말이다. '사이코메트리'라는 능력처럼 이 세상을 보는 '제3의 눈'을 가진 사람이 또 하나 있다면 바로 예술가(=작가)일 것이다. 실제 우리가 사는 세상이 소설보다 드라마보다 더 흥미롭다고 하지만 굳이 책을 읽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세상에 진실이 있다면 좀 더 똑똑히 보기 위해서 말이다. 미야베 미유키는 히토시를 통해 가족이라는 관계에 메스를 들이대고 그 속에 감춰진 비밀을 전하려고 한 것이다.
이게 바로 내부에 있는 사람은 모르고, 바깥에서 온 사람의 눈에는 보이는 '가족의 습성' 이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이코가 그렇게 느끼지 못한 것은, 도아자키 부부가 딸만은 눈치채지 못하게 행동했기 때문이 아닐까. 솜씨가 서툰 마술사의 클로즈업 매직 같은 것이다. 정면에서 보는 관객들은 모른다. 하지만 옆에서 보는 사람에겐 그 속임수가 보인다.
다만 의문이 있다면 도이자키 세이코라는 여동생의 존재이다. 나는 혹시 그녀가 범인이 아닐까 생각했다. 동생이 실수로 언니를 죽이고 부모는 이 사실을 덮기 위해서 이 사건을 무덤까지 끌고가려고 한다고. 일부러 나 같은 독자의 눈을 흐리게 하기 위해 '어딘가 차가워보이지 않아?' 라는 남편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런 암시도 몇 번 주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은 미야베 미유키가 그녀에게 면죄부를 주었다는 사실이다.
세이코는 아름다운 여자다. 타고난 천성도 천사같은 성격이라 주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한다. 그래서 이를 질투한 언니에게 종종 위협을 당하기도 했다. 결국 부모가 언니를 죽인 사실이 들통나는 바람에 남편하고 이혼까지 당하는 어려움도 겪었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어린 시절이라 언니를 잘 기억하지도 못 한다. (나는 살인을 저지른 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생각했지만...) 하필이면 부모 말로는 사건 당시 집에 있지도 않았다는 점이 더 수상하다. 아홉살 밖에 안 된 어린아이가 말이다. 읽으면 읽을 수록 남편 다쓰짱이나 하기타니 도시코에게 어리광이나 부리는 등 점점 더 안 좋은 모습이고 어쩌면 부모나 작가나 세이코를 변명해주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언니를 잘 이해하게 되었어요. 세이코는 딸국질을 했다. "도이자키 아카네는 쓸모없는 사람이었어요. 저는 엄마나 아빠나 훌륭했다고 생각해요. 부모님은 저를 위해 언니를 그렇게 만들었던 거예요. 저를 위해서 그렇게 해주신 거죠. 저를 지키기 위해서. 그렇죠?" 시게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제목처럼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낙원'에 대해 얘기해 보자. 우리 인간이 기억하지 못 하지만 늘 꿈꾸는 이상향의 세계. 어떤 사람은 현 생애에서 그 장소를 발견하는 행운도 누리지만 대개는 다음 세상을 기약하는 유토피아. 그 '낙원' 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부모는 세이코의 행복을 위해서 또 다른 딸을 죽였지만 그 딸이 술에 취해 이렇게 중얼거리는 걸 보면 낙원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나 보다. 나는 그녀가 부모와는 다른 이유로 살인자라고 생각한다. 뭔가를 잃어버렸다 되찾은 손에는 당연히 피가 묻어있다. 그 피 묻은 손으로 낙원에 들어갈 수는 없다. 아무리 작가가 면죄부를 주었지만 세이코와의 마지막 통화에서 마에하타 게이코가 그토록 냉정한 모습을 보였던 것도 그런 찜찜함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있잖아요. 행복해진다는 거, 참 어려운 거예요. 핏줄이 이어진 사람이란 말이죠. 끊어버려야만 할 때도 있는 법이에요. 쓸모없는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잖아요? 그렇죠? 쓸모없는 사람이라면 말이에요. 제 언니 말이에요. 제 부모님은 그렇게 해주셨어요. 그런 경우도, 있는 거예요. 마에하타 씨는 몰라. 절대 이해 못해.
이 소설과는 상관없는 사실이겠지만 작가 미야베 미유키는 나와 세이코처럼 여동생이다. 우리 여동생들은 살아남아 여동생들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
시게코는 내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세이코의 표정. 마치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 아카네 이야기를 하는 목소리와, 수기에 적혀있는 말들. 그 안에 담겨있을 생각들. 살아있다- 살아남은 사람은 현재를 살아가야 한다.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필요한 논리와 설명을 스스로 만들어내면서. 도이자키 세이코는 지금까지 아주 훌륭하게 그 작업을 해왔다. 확실히 그녀는 강하다. 그것을 차갑다고 해석하는 게- 아주 이상하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