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사람들
헨리 제임스 지음, 김윤하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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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제임스 사망일이자 제 생일에 배송예정이니 너무 뜻깊은 생일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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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책은 많고 이 속도대로라면 80세까지 앞으로 900권의 책 밖에 더 못 읽는다니 분발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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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세계를 스칠 때 - 정바비 산문집
정바비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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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러면 그렇지 책 표지도 정바비의 시그니처 컬러인 주황색이다. '지성인은 원색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괴테의 색채론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남자의 색은 아주로 에 마로네 azzurro & marrone 라고 생각하는 내게 주황색을 좋아하는 남자는 보라색을 좋아하는 여자처럼 뭔가 좀 상당히 웃프다. 

그렇지만 '한국 소녀의 겨울'을 지나 한국 아줌마의 여름으로 접어든 줄리아 하트의 팬으로서 자신을 '잡범'이라고 노래하는 남자가 쓴 이 '잡문'들은 사전적 의미로서 원색에 가까운 주황이 아니라 그가 부르는 노래들처럼 엉뚱하지만 '한없이 사랑스러움에 가까운 주황' 이 아닐까 싶다. 
 
사실 이 단행본 역시 내가 뮤지션의 삶을 택한 것과 유사한 매커니즘에 따라서 만들어졌다고 해야겠다. 내킬 때 흥미를 느끼는 분야에 관해서만 써온 글들의 묶음인 것이다. 블로그에 쓴 글은 말할 것도 없고, 매체의 의뢰로 기고한 원고조차 직접 주제를 잡았다. 구미가 당기지 않는 글감으로 청탁이 오면 정중히 사양했다.

줄리아 하트를 하면서 동시에 바비빌과 둔치 보이스와 가을 방학을 하듯이 여기 실린 글들 역시 그의 흥미에 따라 취사선택된 철저히 바비본색의 글들이다. 문화와 연애와 음악과 일본어와 인생을 이야기하는 그 글들은 인터뷰 용 옷차림처럼 단정하고 때로는 건조식품처럼 바스락거리지만 물을 부으면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듯 유머가 살아 숨쉰다. 조금은 슬픈 이야기도 아픈 이야기도 있지만 대체로 정말 재미있다. 물론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연애 이야기다. 기억에 남는 부분을 옮기면...
 
'진단명 사이코 패스'를 읽은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혹시 내가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다. 여자를 만나면 '나는 공감능력에 문제가 있다'고 미리 말한다. 여자의 눈물 앞에서 약해져본 기억이 별로 없고 마지막으로 울어본 게 언제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외로움이란 게 뭔지 도통 모르겠어서 얼마전 집에 누워서 한참을 생각해봤다. 외로움이 뭘까. 외롭다는게 어떤 기분일까... (뭐냐 덱스터냐 ㄷㄷㄷ) 그러나 두달 남짓 데리고 있던 고양이를 건강상의 이유로 되돌려 보내고 고양이 털이 군데 군데 붙어있는 침대에 혼자 앉으니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렇게 몇 시간을 울었다. 

농담으로 하는 이야기를 진담으로 받아치는게 우습지만 그가 정말 공감능력에 문제가 있다면 이토록 사랑스러운 노래를 부르고 이토록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글을 쓸리가 없다. 선글라스를 쓰고 세상을 보는 왕가위가 아름답고 슬픈 사랑 영화를 만들듯이 '언젠가 멀지 않은 미래에 울게 될거라고 나를 거절한 당신에게' 같은 편지를 보내는 남자야말로 소녀감성 팬들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노래가사와 멜로디를 만들 수 있는게 아닐까.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쌍년이고 사이코 패스인 시절을 보내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예전에는 나이가 들면 코코 샤넬 여사처럼 방돔 광장이 내려다 보이는 릿츠호텔 같은 데 외롭게 살면서 가난하지만 잘 생긴 인디 밴드를 후원하면서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한달에 한번 정바비의 블로그에 들어가기도 힘든 저녁이 없는 삶. 물질로 후원할 수 없다면 예쁜 배경이라도 되어야 하는데 오랜만에 공연장에 가면 나이스 바디 소녀팬들이 왜 이렇게 많은 것이야. 이러면 안 되지만 사랑하는 남자가 아파서 병들어 누워있길 바라는 여자처럼 정바비가 빨리 늙어버리길 바라는 못난 마음도 생기고... 아아 나야말로 사이코 패스같은 팬이다.
 
'이토록 어마어마한 곡을 듣고도 내 인생이 불과 3분도 지나지 않은 데 대해 전율한다...'는 문장을 읽으면서 줄리아 하트를 만나고 어마무시하게 흐른 시간에 깜짝 놀라고 있다. 음악은 너무 짧고 인생은 너무 긴데 이 책을 읽는 하루는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 아무리 읽어도 바비의 마음은 알다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들킬까 말까 하는 그 지점이 바로 이 남자의 모에 포인트가 아닐까. 우리를 또 다른 세계로 데려다 주는  멋진 음악처럼 지금은 너의 세계를 자전거를 타고 스쳐 가지만 언젠가 우리도 충돌할 수 있을거라 믿으며  '인디 달링을 찾아서' 북토크에 간다. 비가 올지도 모르는데 바비씨는 자전거를 타고 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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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룸 수납 인테리어 - 수납의 달인 ‘사오리’의 작은집 완벽 정리술
혼다 사오리 지음, 박재현 옮김 / 심플라이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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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까지 살던 방보다 딱 절반에 불과한 방으로 이사왔다. 방, 부엌, 베란다가 분리되어 환기가 잘 되는 점이 마음에 들었으나 싱글침대와 120*80책상과 오디오도 들여놓지 못할 정도로 짐도 절반 이상 줄여야 했다. 게다가 생각도 못한 120*60책상과 이케아 의자 등을 인테리어 비용으로 날리는 바람에 어떻게든 있는 붙박이장으로 나머지 수납을 해결해야하는 스트레스까지 찾아왔다. 그렇게 넓은 가로형에서 높은 세로형으로 붙박이장이 바뀌면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나에게 깜짝 놀랄만한 영감을 준 이 책을 소개하고 싶다.

우선 인테리어에 관심이 생겼다면 어떤 집을 만들고 싶은지 자신에게 물어보자. 멋진 가구로 아름답게 장식하고 싶은지 아니면 쉐비풍으로 DIY하고 싶은지. 그것도 아니면 만사 다 귀찮다 정리정돈이라도 잘 하고 싶은지. 나처럼 청소하는게 귀찮아서 어지르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독일식 타니아의 작은 집에서+ 일본식 사오리 수납 인테리어를 거쳐+ 한국식 효재처럼 살아요 이 3가지 스타일만 알아도 인테리어는 당분간 걱정없지 않을까.

작가 혼다 사오리는 붙박이장이 딸린 방, 거실, 주방, 화장실, 욕실, 베란다로 이루어진 오래되고 작은 12평 정도 되는 투룸을 청소와 수납과 정리정돈만으로 누구나 한번쯤 살고 싶은 멋진 집으로 바꾸는 마법을 발휘하였다. 무엇보다 사는병에 걸려 집안을 물건으로 채우느라 큰 돈을 쓰지도 않고(이케아, 무인양품, 중고 인터넷 사이트 이용), 시트지 따위도 붙이지 않아 공간에 자연스러운 질감이 드러나며, 못질 없이 압축봉을 활용해서 수납하는 아이디어가 주렁주렁이다. 단순히 수납만 잘 하는게 아니라 소품 하나를 놓아도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놓는 감각이 놀랍다. 거실 테이블에 놓인 게 먹는 밤이라는 것을 알자 정말 이 여자는 고수 중의 상고수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여기 나와있는대로만 따라하면 내가 싫어하는 원룸 인테리어 3요소 방 포인트 벽지+주방 시트지+엄한 자리의 못질을 않고도 퇴근후 저녁이 있는 집을 인테리어할 수 있을거 같다. 일단 생각은 그렇다. 궁금하겠지만 자세한 수납 아이디어는 책을 사서 확인하기 바라고 ^^

내 경우 참고하고 싶은 방법은 1.붙박이장의 수납 2.압축봉의 활용 3.냉장고의 아침식사 세트 4.식탁을 포기하고 거실에 둔 테이블 5.향의 여러가지 용도 6.가방 속 가방 7.물걸레 청소용 양철 양동이 8. 적은 갯수의 타월 9. 걸레는 세탁기로 보내기 등이다. 타니아 아줌마나 사오리나 매일 청소기를 돌리거나 손빨래라는 무식한 방법은 권하지 않는게 마음에 든다.
성격상 안 맞는 방법은 1.옷을 세워서 보관 2.너무 많이 거는 것은 싫다 3.박스에 라벨 붙이기 4. 세탁기 위의 선반 필요 X 정도.&

작가의 말처럼 '세상에는 세탁물을 개면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과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사람으로 나뉜다. 나는 후자에 속하지만 어느 쪽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성격에 맞는 수납을 하면 그뿐이니까' 그러니까 이 책을 읽고 그대로 따라하는 것도 좋지만 자신의 성격에 맞는 수납 방법을 찾는 것도 중요할 거 같다. 아니 굳이 찾으려고 하지 않아도 읽다보면 나처럼 어느 집이나 한 군데 쯤 있는 데드 스페이스에 대한 아이디어까지 떠오를 것이다. 그만큼 인테리어 상상력을 폭발시키는 멋진 책이다. 하지만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인테리어 관련 리뷰를 올리게 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한번 읽고 말 실용서라고 하기에는 문장마저 너무 좋다. 정리수납 컨설턴트로서 그녀가 말하는 인테리어 철학이 '사물에 이끌리는 수납'이라는 문구처럼 적재적소에 놓여져 그 동선을 따라갈 때마다 뚝뚝 묻어나는 편리함에 시적인 아름다움까지 느껴지는 것이다. 미사여구로 멋을 부리지 않아도 이렇게 관점이 살아있는 문장이라니 일본 최고의 정리전문가라는 칭찬이 괜한 말은 아닌거 같다. 마음에 드는 몇 문장을 옮겨본다.

얼마전 한 잡지에서 '주방은 콕피트(cockpit, 항공기 조종석)'라는 표현을 보았을 때 깜짝 놀랐다. 바로 내가 지향하는 주방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냉장고 수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해진 위치 관리'다. 교실에 앉을 자리가 정해져 있는 것처럼 냉장고도 빈 곳을 한눈에 알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가장 이상적인 수납은 평소 별 생각 없이 지내지만 저절로 물건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형태다. '어디에 두자'라는 특별한 생각을 할 필요 없이 물건에 이끌려 저절로 수납하는 시스템 말이다. 마치 편지가 우편번호별로 쓱쓱 분류되어 배달 장소로 운반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방에 꽃이나 초록색이 있으면 그 자체만으로도 옆에 지저분하게 늘어져 있던 것들을 말끔하게 치우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아름다움의 상호작용인 셈이다.
누구나 그렇지만, 특히 작은 집에 사는 사람은 물건을 살 때 진심으로 원하고 오랫동안 쓸 수 있는 '질 좋은 것'과 만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한정된 공간 내에서 얼마만큼 활용할 수 있을까? 이것은 공간과 물건 그리고 수납용품과의 철저한 대화다. 화장실은 여러가지 시도를 가볍게 해볼 수 있는 공간이다.

마지막으로 단순히 인테리어 수납이 아닌 우리의 삶을 말하는 거 같아 울컥했던 작가의 후기를 길지만 옮겨본다.
고객의 집을 방문해 수납과 정리를 돕는 것이 나의 직업이지만, 숱한 현장 경험을 쌓는 동안 저절로 깨닫게 된 것이 있다. 바로 인생을 '조금 떨어져 관조하게 된 것'과 '스스로 선택하는 삶'의 중요성이다. 눈앞에 놓인 숙제를 해나가듯 살아가는 팍팍한 삶의 쳇바퀴 안에서 사물과 대상을 떨어져 관조한다는 것은 쉽지않은 일이다. 하지만 약간의 거리를 두고 내가 일하는 모습이나 집안을 관찰하는 것은 나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것 뿐 아니라 수납을 하는 데도 무척 큰 도움이 됐다.
좋아하는 일은 내버려둬도 결국 하게 되어 있다'는 말 또한 관조의 시선과 닿아있다. 관조하는 자세로 산다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관찰하고, 깨닫고, 선택한다는 뜻과도 같다. 흔히 말하는 '~해야만 한다'는 말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이 좋아서 선택한 것이나 가치관을 실천하는 삶이야말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만큼 가치 있는 일이다. 이런 경험들은 삶의 모범답안만을 의식하고 살아온 나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결국 문제는 인테리어 수납이 아니라 정리가 안 된 우리의 삶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읽고 감동은 받았지만 수납을 제대로 하든 안 하든 뭐 크게 상관없을 거 같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에게는 좁아터진 집 말고도 친구, 카페, 술집, 여행, 동물 등 마음을 기댈 수 있는 다른 공간도 많이 있지 않은가. 여기 알라딘 서재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왜 그것이 꼭 집이어야 하나. 과연 인테리어 수납이 작가가 아닌 우리에게도 고민에 대한 답이 되어줄 수 있을까. 좋은 책은 답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게 하는 책이다. 나는 지금 또 다시 붙박이장 수납을... 방 청소를... 서재 리뷰를... 할까 말까 고민에 빠져있다. 작가의 의도는 이런 것이 아니겠지만 말이다. '이 책을 읽는 당신도 집 외에 마음을 기댈 공간이 있다면 생활의 질이 한층 높아질 것이다. 이렇게 나의 치유의 기술로 몸과 마음을 새롭게 재충전하는 시간을 만들어보자. 당신은 지치고 힘든 자신을 재충전하는 나만의 방식을 갖고 있는가?'
이 책과 함께 인생을 조금 떨어져 관조하고 스스로 선택하는 나만의 방식을 찾아보자. 그것이 인테리어 수납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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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4-05-17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나, 왜 이러세요? 사고 싶게스리.

2014-05-17 0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낙원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5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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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하면 스포일러가 없도록 썼지만 주의해서 읽으세요. 

일본 시추에이션 추리 드라마 중에 사건을 거꾸로 푸는 "33분 탐정" 이 있다. 일단 범인의 자백을 듣고 사건은 5분만에 해결되지만 쿠라마 로쿠로 탐정이 진범을 찾겠다고 방송시간 33분 동안 질질 끌면서 시간만 때우는 게 콘셉트다. 애초부터 진짜 범인을 찾으려고 한 게 아니니 마지막에 가서 밝혀지는 반전도 진범은 대개 처음의 그 범인이었다는 식의 허무 개그다. 그러니 시청자 역시 범인을 찾는데는 신경쓰지 않고 대충 시간이나 때우려고 헛다리 잡는 추리 수사나 함께 즐기는 것이다. 이 묘미가 실은 만만치 않은데 이런 장르가 실제로도 존재하는지 모르지만 '탈락계(다소 힘빠지는) 서스펜스'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범인이 밝혀진 상태에서 사건을 거꾸로 푸는 방식을 택한 추리소설이 있다. 미야베 미유키의 "낙원" 은 "모방범"의 후속작으로 1권 표지에 실린 줄거리를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모방범' 사건으로부터 9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날 여전히 사건의 트라우마를 껴안고 살아가던 르포라이터 마에하타 시게코에게 한 중년의 여자가 찾아와서 죽은 아들에게 예지능력이 있었던 것 같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평소 그림을 좋아하던 아들의 스케치북에 한 소녀가 부모에게 살해되어 16년간 마루 밑에 묻혀 있던 살인사건을 연상시키는 그림이 있다는 것. 하지만 사건이 밝혀진 것은 소년이 이미 교통사고로 죽고 난 후였다. 과연 소년은 그 가족의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특수한 능력(사이코메트리)이 있었을까?

 

미야베 미유키는 히토시라는 죽은 소년이 정말 사이코메트리라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으로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도하지만 사실 이 건 '맥거핀' 에 가깝다. '맥거핀'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사이코" 에서 나온 용어로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지만 극적 서스펜스를 높이기 위해 관객이 줄거리를 따라가면서 계속 헛다리를 짚게 만드는 일종의 속임수이다. 사실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따로 있으니 바로 2권에 나오는 도이자키 가족의 이야기다. 누구 말 따나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면 바깥에 내다 버리고 싶은 게 가족이라지만 실제로 그렇게 한 부모도 있었던 것이다.


부모에게 살해당해 16년 동안 집 아래 묻혀 있던 소녀 도이자키 아카네. 관계자들의 조사를 진행하던 시게코는 그녀의 배후에 있던 한 남자의 존재를 알게 되고 딸의 죽음에 대한 부모들의 석연찮은 태도에도 의문을 가지게 된다. 자기 손으로 딸의 죽음을 불러와야 했던 도아자키 부부의 비극은 어디서 연유했을까?


 
도아자키 가족의 비극은 우연히 화재가 일어나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6년 전 당시 15살이었던 불량소녀 도이자키 아카네를 부모가 실수로 목 졸라 죽인 다음 마루 밑에 묻었다고 실토한 것이다. 그러나 공소시효가 끝난 사건이라 조사 후 도이자키 부부는 이사를 떠나 잠적해버리고 마에하타 시게코는 남겨진 그 주변 인물들(친척, 회사, 이웃 등)을 하나 둘 찾아다니면서 가족의 사연을 추적하게 된다. 동료 추리소설가인 교구코 나쓰히코와 마찬가지로 다소 장황설로 흐를 때도 있지만 인간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촘총한 이 그물망이야말로 미야베 미유키 소설의 장점이기도 하다.
 

이 세상 모든 가족이 그렇듯이 가족간의 관계는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당사자들이 아니고서는 함부로 설명할 수 없지만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이렇다. '사이코메트리'를 굳이 불러오지 않아도 우리에게도 '제3의 눈' 이 있는 것이다.

도이자키 부부는 버블경제 시대에 평범한 중산층(다소 서민에 가깝다)이지만 주위 이웃들과 왕래가 별로 없는 약간 폐쇄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다행히 작은딸 세이코는 성품이 밝아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예민하고 자아가 강한 큰딸 아카네는 답답함을 느낀다.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지만 서로 잘 안 맞았던 것이다. 거기다가 천사표 동생과 비교되면서 더 삐뚤어지고 급기야 탈선의 길로 빠져든다. 가족이라는 관계 속에서 '좋은 예 나쁜 예'가 있듯이 그녀에게는 하필이면 '나쁜 예' 역할이 주어진 것이다. 

  

시게코는 문득 예전에 취재 때문에 만난 사람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의 행복이나 불행은 자기가 결정하는 게 아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결정하는 것이다' 라는. 행복이든 불행이든 결정권은 그의 손 안에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도이자키 아카네의 불행을 결정지은 것은 가족. 그 중에서도 여동생이 아닐까? 어른이 된 동생 세이코(당시 9살로 집을 떠나 있었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 한다)는 히토시 일로 알게 된 마에하타 시케고에게 왜 부모님이 언니를 죽였는지 조사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가족의 이야기인 동시에 이 세상 모든 언니와 여동생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실제로 미야베 미유키는 언니에 대한 꿈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원래 이 작품은 제 꿈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제게 또 한 명의 언니가 있는데, 제가 모르는 사이에 살해되었으며, 그 시신이 집 마루 밑에 묻혀 있다- 는 내용의 꿈이었습니다. '또 한 명'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제게 진짜 언니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언니가 있는데 어릴 때 같은 방을 쓰는 언니의 일기장을 딱 한번 훔쳐본 적이 있다. 하필이면 그 안에 아빠가 동생(=나)을 더 좋아하는 거 같다 는 내용이 쓰여 있었고 나는 너무 놀라 그 후로 다시는 언니의 일기장을 뒤져볼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 했다. 나는 그 반대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둘째 때문에 양보만 한다며 일찍 태어나는 건 손해라고 생각하지만 둘째는 둘째대로 첫째의 외로움을 달래주기 위해 태어난 인형(?)이라는 후발주자의 안타까움이 있다. 자매 관계는 그런 것이다. 
 

언니와 내가 그랬듯이 네 살 터울인 여자 조카를 보면 엄마의 사랑을 받기 위해 나름 눈에 안 보이는 경쟁이 치열하다. 언니가 잘 못 한 게 있으면 동생이 몰래 고자질하고 동생이 야단 맞고 있으면 언니가 고거 참 쌤통이다 하면서 기분 좋아하는 게 보여서 재미있다. 그러다가도 부모가 자리를 비우면 둘이서 챙겨주고 따르고 그렇게 애틋할 수가 없다. 언니의 딸인 조카들을 보면서 나는 언니와 나의 관계를 되돌아 보는 일이 더러 생기는데 액자소설 형식을 취한 이 소설의 '단장' 부분도 그러하다. 작가는 이미 죽은 도아자키 아카네 대신 초등학생으로 똑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귀여운 반항아 사토 마사코의 입을 빌어 말하고 있다.

시케고는 깨달았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복도 끝에 서 있는 저 아이는 어린 아카네다. 여기에도 또 아카네가 있다.

누구나 어린 시절은 불완전하다. 몸도 생각도 크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더러 실수도 저지른다. 그러나 아카네라는 소녀의 불행은 실수만 저지르고 어른이 되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반성할 시간을 갖지 못 한 것이다. 결코 용서 못 할 과거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녀도 어른이 되었다면 죄값을 치루고 옆집소녀 나오미처럼 한때 불량청소년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쌍둥이 엄마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악을 옹호해서는 안 되지만 미야베 미유키 역시 그 점을 안타깝게 여겼을 것이다.

이 그림이 슬프고 쓸쓸한 건, 히토시가 아카네란 여자아이를 애도하고 있기 때문이야. 초능력이니 뭐니 하는 건 잘 모르지만, 특별한 감각이 있는 사람이 있잖아? 히토시에게는 그게 있었던 거야. 보통 사람에게는 없는 눈, 제3의 눈 말이야. 그게 마음 속에 있는 거야

 

본성이 맑고 선한 아이였던 히토시는 나이는 어렸지만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 것을 '사이코메트리'라고 부른다. 소년은 아름다운 것도 보았지만 때로는 사람들이 감추고 싶어하는 추한 것도 보았다. 자신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기억에서 불륜과 성추행을 목격했고 우연히 '모방범'의 산장도 목격했다. 어린 아이에게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어두운 세계였고 종종 그 안에서 길을 잃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는 또래인 사토 마사코와 달리 도망가지 않았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었던 종이쪽지를 봉인해버렸던 소녀와 달리 히토시는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능력인 그림으로 그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다. 안타깝게도 그 결과는 죽음이었지만 말이다. '사이코메트리'라는 능력처럼 이 세상을 보는 '제3의 눈'을 가진 사람이 또 하나 있다면 바로 예술가(=작가)일 것이다. 실제 우리가 사는 세상이 소설보다 드라마보다 더 흥미롭다고 하지만 굳이 책을 읽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세상에 진실이 있다면 좀 더 똑똑히 보기 위해서 말이다. 미야베 미유키는 히토시를 통해 가족이라는 관계에 메스를 들이대고 그 속에 감춰진 비밀을 전하려고 한 것이다.

이게 바로 내부에 있는 사람은 모르고, 바깥에서 온 사람의 눈에는 보이는 '가족의 습성' 이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이코가 그렇게 느끼지 못한 것은, 도아자키 부부가 딸만은 눈치채지 못하게 행동했기 때문이 아닐까. 솜씨가 서툰 마술사의 클로즈업 매직 같은 것이다. 정면에서 보는 관객들은 모른다. 하지만 옆에서 보는 사람에겐 그 속임수가 보인다.


다만 의문이 있다면 도이자키 세이코라는 여동생의 존재이다. 나는 혹시 그녀가 범인이 아닐까 생각했다. 동생이 실수로 언니를 죽이고 부모는 이 사실을 덮기 위해서 이 사건을 무덤까지 끌고가려고 한다고. 일부러 나 같은 독자의 눈을 흐리게 하기 위해 '어딘가 차가워보이지 않아?' 라는 남편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런 암시도 몇 번 주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은 미야베 미유키가 그녀에게 면죄부를 주었다는 사실이다. 
 

세이코는 아름다운 여자다. 타고난 천성도 천사같은 성격이라 주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한다. 그래서 이를 질투한 언니에게 종종 위협을 당하기도 했다. 결국 부모가 언니를 죽인 사실이 들통나는 바람에 남편하고 이혼까지 당하는 어려움도 겪었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어린 시절이라 언니를 잘 기억하지도 못 한다. (나는 살인을 저지른 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생각했지만...) 하필이면 부모 말로는 사건 당시 집에 있지도 않았다는 점이 더 수상하다. 아홉살 밖에 안 된 어린아이가 말이다. 읽으면 읽을 수록 남편 다쓰짱이나 하기타니 도시코에게 어리광이나 부리는 등 점점 더 안 좋은 모습이고 어쩌면 부모나 작가나 세이코를 변명해주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언니를 잘 이해하게 되었어요. 세이코는 딸국질을 했다. "도이자키 아카네는 쓸모없는 사람이었어요. 저는 엄마나 아빠나 훌륭했다고 생각해요. 부모님은 저를 위해 언니를 그렇게 만들었던 거예요. 저를 위해서 그렇게 해주신 거죠. 저를 지키기 위해서. 그렇죠?" 시게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제목처럼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낙원'에 대해 얘기해 보자. 우리 인간이 기억하지 못 하지만 늘 꿈꾸는 이상향의 세계. 어떤 사람은 현 생애에서 그 장소를 발견하는 행운도 누리지만 대개는 다음 세상을 기약하는 유토피아. 그 '낙원' 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부모는 세이코의 행복을 위해서 또 다른 딸을 죽였지만 그 딸이 술에 취해 이렇게 중얼거리는 걸 보면 낙원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나 보다. 나는 그녀가 부모와는 다른 이유로 살인자라고 생각한다. 뭔가를 잃어버렸다 되찾은 손에는 당연히 피가 묻어있다. 그 피 묻은 손으로 낙원에 들어갈 수는 없다. 아무리 작가가 면죄부를 주었지만 세이코와의 마지막 통화에서 마에하타 게이코가 그토록 냉정한 모습을 보였던 것도 그런 찜찜함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있잖아요. 행복해진다는 거, 참 어려운 거예요. 핏줄이 이어진 사람이란 말이죠. 끊어버려야만 할 때도 있는 법이에요. 쓸모없는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잖아요? 그렇죠? 쓸모없는 사람이라면 말이에요. 제 언니 말이에요. 제 부모님은 그렇게 해주셨어요. 그런 경우도, 있는 거예요. 마에하타 씨는 몰라. 절대 이해 못해.


이 소설과는 상관없는 사실이겠지만 작가 미야베 미유키는 나와 세이코처럼 여동생이다. 우리 여동생들은 살아남아 여동생들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
  

시게코는 내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세이코의 표정. 마치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 아카네 이야기를 하는 목소리와, 수기에 적혀있는 말들. 그 안에 담겨있을 생각들. 살아있다- 살아남은 사람은 현재를 살아가야 한다.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필요한 논리와 설명을 스스로 만들어내면서. 도이자키 세이코는 지금까지 아주 훌륭하게 그 작업을 해왔다. 확실히 그녀는 강하다. 그것을 차갑다고 해석하는 게- 아주 이상하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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