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그만둔 후, 차 한잔을 하자거나 술이나 한 잔 하자거나 그냥 얼굴이나 보자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왜 그만두었냐고 묻는데 남은 사람들이 있는데 이말 저말 하는 것이 불편했다. 그리고 한동안은 생각만 해도 울컥울컥 했다. 그러니 누구를 만날 수 있겠는가.

어제 처음으로 함께 자원활동을 했던 이를 만났다.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다시 차를 마시고... 12시간 동안 얘기를 나눴다. 고맙게도 왜 그만두었냐고 묻지 않았다. 오만가지 얘기를 하고...... 그 중에는 분명 사소한 얘기들도 많았다.
올해는 그냥 쉬어가라는 말, 그가 건네는 위로였다. 빈 통장은 생각하지 말고 좀 느긋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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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만큼 폐지줍는 노인이 많은 나라는 없다는 칼럼을 본 적이 있다.

취약한 복지를 말하기 전에 부지런히 내 몸을 굴려 일해도 보상이 터무니 없다는 생각이 든다.


종종 공병을 모아 작은 손수레에 담아가는 할머니들을 봤다. 당연히 병에 찍힌 공병보증금을 다 주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작은 가게들은 그마저도 깎기 일쑤라 제 돈 다 받기 위해서 대기업이 운영하는 이름 있는 슈퍼마켓으로 모여드는 것이다.  

소주병을 모아 마트에 간다고 다 받아주는 것도 아니다. 하루에 1인당 30병으로 제한하고, 그것도 요일과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딱딱 맞춰서 가야한단다. 

그런데 30병을 모아가서 무엇을 할 수 있나?

소주 공병보증금이 40원이니 겨우 1,200원이다. 

1,200원으로 뭘 살 수 있나? 가장 저렴한 라면도 겨우 2개 살 수 있을 정도.

돈이 없으니 공병이라도 모으는데 그마저도 규정이 까다롭다. 

작은 손수레에 공병 가득 담아가는 할머니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속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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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방문자가 100명을 넘어섰습니다.

이웃들만 찾던 작은 책방인데.. 무슨 영문인지 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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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6-06-09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그런때가 있어요^^

rosa 2016-06-09 15:38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런 가요? 저는 이런 경우가 없어서 뭔 일인가 깜짝 놀랐어요. ^^;;
 

외국도서 등록하는 건 정말 불편했다.

FAQ에 딱 올려놨으면 여러 번 묻고 답을 기다리지 않아도 됐을 텐데.


저자명, 출판사명이 검색되지 않는 경우, 

저자는 '작자미상'으로 검색해서 선택하면 되고, 출판사는 '기타'로 올려야 된다.

상세정보는 따로 입력하고.


이번에 중고샵에 올린 책들을 보니 내가 한 때 정말 열심히 홀로코스트 관련 책들을 많이 사다 모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제껴놓은 책들도 많은데.. 


다하우 수용소에 관한 책은 유로 환율이 1700원에 육박하던 2008년에 구입했다. 유로 환율이 많이  떨어져서 실제 구입가와 차이가 많아서 판매가를 책정할 때 조금 고민했다. 결국 구입가에서 20% 정도 저렴하게 책정했다. 적당한가? 잘 모르겠다. 


테레진 수용소에 관한 책은 구입가를 알 수가 없었다. 급하게 한국으로 돌아올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베를린으로 되돌아가야 했을 때 기차표를 구하지 못해 하루 더 프라하에 머물러야 했다. 그때 부랴부랴 가는 길을 알아보고 정신없이 다녀왔던 터라. 비행기 타고 온 책이라 이 정도는 괜찮겠지...싶은 가격을 적었다. 사진이 끔찍한 게 많아서 19세 이상 구입가능으로 체크했다. 


이 책들은 정말 꼭 필요한 분들이 구입해서 읽으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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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께서는 1986년 처음으로 조그만 주택을 빚을 내 장만하셨다. 소심한 아버지는 반대했지만 대범한 어머니가 밀어붙이는 바람에 가능했다.
그 집에서 30년을 살았다.
투기나 투자는 우리와는 먼 얘기고.
우리는 살던 동네 ,익숙한 사람들과 오래 함께 살았다.
그래서 여러모로 이사는 쉽지 않았다.

알뜰하고 절약이 몸에 밴 어머니는 새 냄비, 새 후라이팬, 반짝반짝 광 나는 갖가지 사이즈의 플라스틱 그릇들과 온갖 생활용품을 집안 뿐만 아니라 창고 곳곳에 숨겨두셨다.

아마도 그것은 가난했던 지난 날 덕분일 것이다. 아끼고 검소하게 사는 것은 미덕이었을 뿐만 아니라 딸 다섯 둔 어머니가 자식들을 포기하지 않고 공부시킬 수 있었던 비결이었을 것이다.

이사올 집은 좁아서 그 모든 살림을 다 가지고 올 수가 없었다. 엄마는 오랫동안 소중하게 가꿔왔던 화분들을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셨다. 반질반질 닦아 놓으셨던 장독도 대부분 포기해야 했다. 베란다는 어머니의 화분과 장독을 모두 가져올 만큼 넓지 않아서.

어머니의 손때 묻은 살림들은 이삿짐 업체 사람들에게 고물 취급을 받았다. 이사하던 날 엄마는 자꾸만 옥상에 올라가 있었는데 그게 이삿짐 업체 사람들 때문에 속상했기 때문이란 걸 몰랐다.

이참에 좀 정리하자는 딸들의 말도 어머니를 서운하게 했다. 예전같지 않은 몸 상태도 속상하고, 답답할 때 올라가는 옥상이 사라진 것도 속상하고, 처음 겪는 층간 소음 문제도 어렵다.

적다보니 어머니에겐 이번 이사가 전부 다 서운하고 속상한 일 투성이었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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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6-06-07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ㅜㅜ정말 속상하셨겠어요.ㅜㅜ

rosa 2016-06-08 08:14   좋아요 0 | URL
그러네요.ㅜㅜ
주택은 계속 관리해가며 살아야 하는데 아버지는 손놓고 계시니 마냥 어머니가 고생이시라 아파트가 더 나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머니와 함께 집 보러 다니며 구했는데도 막상 살아보니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들이 많네요. ^^;;

2016-06-08 1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08 2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16-06-07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0년을 사셨다니 아주 정이 깊었던 집을 떠나시는 것이람 마음이 아프시겠네요.베란다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아 단독에서 아파트로 이사가시나 봅니다.
30년을 사셨다니 갑작기 응팔이 생각나네요^^

rosa 2016-06-08 08:23   좋아요 0 | URL
사연많은 집이죠. 우리 부모님의 첫번째 집이고, 이모들의 응원과 저력을 확인시켜준 집이죠. ^^ 셋방 살다가 처음 집을 장만했을 때는 온 식구가 참 좋아했습니다.
집을 사서 7년을 살다 비가 새고 문제가 자꾸 생겨서 집을 헐고 그 자리에 다시 2층 양옥을 짓고 살았어요. 그 동네가 비슷비슷한 시기에 다 단층집에서 2층 벽돌집들로 탈바꿈했죠. ^^ 저야 몇 년 동안 나가 살기도 하고 독일에도 가 있느라 비운 시간들이 있지만 부모님은 내내 처음 가진 내 집을 살뜰히 생각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