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the dog of flanders (파트라슈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patrache</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이 세상은 내게 단 한번만 주어진다</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Wed, 07 Oct 2026 07:36:43 +0900</lastBuildDate><image><title>파트라슈</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t_7264211871459820.jpg</url><link>https://blog.aladin.co.kr/patrache</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파트라슈</description></image><item><author>파트라슈</author><category>문학/소설/시/에세이</category><title>아주 오래된 연애</title><link>https://blog.aladin.co.kr/patrache/17526076</link><pubDate>Sat, 19 Sep 2026 21:0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patrache/17526076</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0389043&TPaperId=1752607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6/3/coveroff/8980389043_1.gif" width="75" border="0"></a>&nbsp;<br/><br/><br><br>탑골공원. 가을이 당도해 있었다. 은행잎들이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이따금 서늘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마다 은행나무들이 순금빛 해의 비늘들을 눈부시게 털어내고 있었다. 플라타나스 이파리들은 이미 녹물이 들어 오그라든 채로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노인들이 기울어지는 시간속을 걸어와 가을 유배자들처럼 쓸쓸히 공원을 배회하고 있었다. 며칠간 청명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하늘이 높아져 있었다. 높아진 하늘 변두리로 새털구름 몇 자락도 가벼이 떠 있었다<br>&nbsp;4년전 영면한 이외수의 &lt;벽오금학도&gt; 첫 부분이다. 어떤 작가가 가을 풍경을 묘사했을 때 &lt;벽오금학도&gt;의 이 대목만큼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묘사한 글을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이 대목을 천천히 읽으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탑골공원의 가을이 바로 눈앞에 펼쳐진 것 같은 기시감이 든다. “가을이 당도해 있었다” 라는 첫 문장이 나는 좋았다. 평이하게 가을이 왔다가 아니라 당도했다는 서술어에는 생동감이 느껴진다. 세월이 흘러 저절로 오는 가을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예정되어 있어서 탑골공원으로 아무도 모르게 오고 있었던 가을이 어느날 도둑처럼 홀연히 와있는 장면. 와타나베 준이치의 소설 &lt;실락원&gt;에도 이와 결이 비슷한 문장이 나온다.그리고 일년.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오는 것이 아니라, 가을은 이미 한여름 속에 와 있다<br>&nbsp;어느날 문득 예고 없이 당도해 있는 가을이지만 이미 한여름 가장 뜨겁고 울창할 때 서늘한 기운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로 다 그럴지도 모른다. 가장 좋고 아름다울 때는 그렇지 않을 때를 전제하고 있으니까. 어쨌든 가을이다. 마찬가지로 지금부터 겨울의 냉기는 서서히 짙어지겠지만 겨울이 당도하기 전까진 가을이다. 계절이 끝남을 알기에 단 하루의 가을도 소흘히 보낼 수 없다.가을이 오면 항상 떠오르는 이 대목이 실린 소설 &lt;벽오금학도&gt;를 구입하던 그 날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1992년 10월 정도일 것이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연도를 정확히 기억하진 못했는데 책을 다시 꺼내 인쇄정보를 보니까 1992년 5월 초판이었다. 경북 영천의 S서점은 나의 단골 책방이었다. 인터넷이 없었던 시절이니 서점 주인이 매대에 진열해놓은 책이 곧 베스트셀러였고 따끈한 신간이었다. 그날 &lt;벽오금학도&gt;가 서점 어디쯤에 놓여 팔리고 있었는지 지금도 정확히 특정할 수 있다. 서점 맨 안쪽에 왼쪽 매대였다. 주로 신간 소설이 놓이는 자리였다.<br style="box-sizing: border-box; margin: 0px; padding: 0px;">&nbsp;이 책은 표지 디자인부터 너무 잘 되어 있었다. 강렬한 원색으로 그려진 산 위에 새빨간 해가 떠 있는 그림인데 지금 봐도 참 예쁘고 신비롭다. 책날개 안쪽에는 “때로는 신화보다 현실이 몇 배나 더 신비스러울 경우가 있다”라는 문구가 세로로 박혀 있었다. 이 책을 지금 당장 사라고 하는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 오는 듯 했다. 망설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주머니를 탈탈 털어 4천 얼마를 내고 &lt;벽오금학도&gt; 들고 나서는 그때가 얼마나 행복하고 즐겁던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아 부러운게 없었다. 서점을 나와 다리를 건너 버스 정류장쪽으로 걸을 때 내가 한가지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멈춰 섰다. 버스 차비가 없었다. 차비까지 싹 털어 책을 샀기 때문이다. 지금 기억으로도 그때의 갈등이 선명하다. 책값을 지불할 때 차비가 없다는 걸 분명히 알았지만 책 구매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이렇게 순간순간 대단히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성정이 있었다. 책에 환장한 바보였던 것일까? 차비가 없다면 집까지 50리 길인데 어쩌자고 책을 샀단 말인가? 완행버스 이외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수단은 없던 시절이다. 집까지 걸어간다면 5시간 이상이 소요될 거리다. 당장 돌아가서 책을 환불해야 될 처지였는데 그러지 않았다. 내 자신에게 황당해하면서도 환불하러 가지 않았던 내 기괴한 고집도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어의가 없을 뿐이다. 그때 책을 사지 못하면 다시는 그 책을 사지 못할 것 같은 터무니 없는 미신이 나를 지배했던 모양이다.<br style="box-sizing: border-box; margin: 0px; padding: 0px;">&nbsp;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걸음을 멈추고 지나가는 아무나 붙들고 차비를 빌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마침 다리 반대편에서 몰몬교 선교사들이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게 보였다. 미국에서 온 브래드베리 일행이었다. 그들은 항상 두 명씩 짝을 지어 까만 양복을 갖춰 입고 한 손에는 몰몬 성경을 들고 다니며 친절하게 말을 걸어 주던 사람들이었다. 지난번에도 다리 위에서 브레드베리와 짧은 영어회화를 연습하고 몰몬경 한 권을 얻었던 터였다. 책이라면 닥치는대로 구해 읽던 나였으니 몰몬 성경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성서도 내겐 그저 읽을거리중에 하나였지만 미안하게도 몰몬경은 내게 별다른 감흥을 주진 못했다. have no money, going home, please give me... 개떡같은 영어로 브레드베리한테 처지를 대충 설명하니 찰떡같이 알아듣고 천원짜리 지폐 한장을 내 주었다. 버스비를 하고도 남을 돈. 착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다음에 만나면 꼭 갚겠노라고 약속했지만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다시는 브레드베리를 볼 수 없었다. 아마 선교 사역 기간이 만료되어 본국으로 돌아갔던 것이겠지. 여기서 오래 머물지 못한다고 했던 그의 짧은 말이 기억났다. 그 날 이후 브레드베리 일행 대신 또 다른 양복쟁이 둘이 다리를 건너 다니며 사람들한테 말을 거는 모습은 여전했다.<br style="box-sizing: border-box; margin: 0px; padding: 0px; font-family: ">&nbsp;&nbsp;미국인 선교사가 1992년 10월 차비까지 털어 기어코 책을 사버린 고집 쎈 남학생에게 차비를 빌려줬다. 빌린 돈으로 버스를 타고 가던 어느 가을날 오후 국도옆 노란 은행잎들이 반짝이는 풍경은 얼마나 눈부셨던가. 버스에서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책의 첫 문장은 “가을이 당도해 있었다” 였다. 지금도 가을이 당도하면 차비를 빌려줘서 고마웠던 미국인 선교사 브레드베리가 떠오르는데 그가 빌려주었던 것은 그저 돈 몇 푼 뿐이었을까? 나는 그가 빌려준 돈 덕분에 책에 대한 내 열정이나 낭만이 좀 터무니 없긴 해도 여전히 나를 지탱하고 살게하는 생존 원리임을 자처하고 유지해 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책에 좀 사치를 부려도 괜찮구나 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 해야하나.<br style="box-sizing: border-box; margin: 0px; padding: 0px;">&nbsp;그 날 이후로도 책은 몰몬교 선교사 브레드베리처럼 내 인생의 거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구세주였고 희망이었다. 앎에 대한 갈증의 해결도 좋았지만 책 그 자체에 대한 추앙은 내가 제일 자신있게 즐길 수 있는 낭만이었다. 차비까지 털어 책을 안고 나오던 눈부신 그 가을날에 느끼던 설렘과 희망, 환희를 누구에게 정확히 설명할 수 있을까. 유난히 외로움을 많이 타던 내가 그토록 책에서 위안을 느낀 건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책을 펼치고 한 글자 한 글자 읽어나가면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솔직하게 하는 이야기들 때문이었으리라. 특히 이외수의 에세이들이 그랬다. 외롭고 적적한 깊은 가을밤, 쌀자루와 늙은 호박이 쌓여있던 시골방에 홀로 앉아 침잠하면 귀뚜라미 울음조차 그치고 마침내 들려오는 형광등 타들어가는 지~이잉 하는 소리. 그때 내가 읽은 글들에서 발견한 보석같이 환하게 빛나던 문장들. 젊은날의 이외수 그도 나처럼 홀로 밤새우면서 형광등 타들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지독히 외로웠던 모양이다. 그의 글들은 외로움, 가난, 굶주림, 추위, 그리움, 슬픔, 비애로 가득차 있었지만 어쩐지 그 말들이 너도 완전히 혼자는 아니구나 하고 걸어오는 반가운 말걸기였다. 요즘 말로 하면 선톡이다.<br style="box-sizing: border-box; margin: 0px; padding: 0px; font-family: ">&nbsp;나는 그 시절에 읽었던 책들에서 얻은 위안과 기쁨, 설렘을 앞으로도 잊지 못할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손 가는대로 책을 사 모으거나 그 때 읽던 책들을 다시 뒤적거리는 이유는 그때의 그 환한 설렘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는 비가역적인 소망 때문일지도 모른다. 책을 대하는 내 태도는 그때 차비까지 털어내던 대책없고 순종적인 맹목적 추앙과 달라진 건 크게 없다. 지금은 책보다 더 재미있고 자극적인 것들이 넘쳐나는 세상이지만 책만큼 나를 오랫동안 가슴 저리게 하는 존재는 없었다. 나는 여전히 책이라면 설렌다. 도서관에 갈 때도 그렇고 서점에 갈 때도 그렇다. 마음에 담아두고 좋아하는 사람을 우연히 거리에서 마주칠 때처럼 늘 설레지만 희한하게도 식상하거나 질리지 않는다. 아주 오래된 연애다. 사람은 이렇게 오래전 자그만 행복감을 평생 잊지 못하고 다시 찾아 나선다. 올해 가을에는 어떤 책이 또 나를 설레게 할지 밤마다 스탠드 조명을 밝히고 책상 앞에 앉아본다<br> <br><br><br><br><br><br><br><br><br><br><br>이외수<br>&lt;하악하악&gt;,&lt;여자도 여자를 모른다&gt;,&lt;청춘불패&gt;,&lt;아불류 시불류&gt;,&lt;글쓰기의 공중부양&gt;<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6/3/cover150/8980389043_1.gif</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0395</link></image></item><item><author>파트라슈</author><category>문학/소설/시/에세이</category><title>투명한 나선이라는 결핍된 이야기, 히가시고 게이고를 추모하며 - [투명한 나선]</title><link>https://blog.aladin.co.kr/patrache/17482684</link><pubDate>Mon, 31 Aug 2026 11:2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patrache/1748268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82130602&TPaperId=1748268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02/11/coveroff/s83213128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82130602&TPaperId=1748268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투명한 나선</a><br/>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다 / 2026년 07월<br/></td></tr></table><br/>&nbsp;히가시노 게이고가 지난 7월 23일 새벽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사인은 대장암. 8월 초 폭염이 한창일 때 그날도 습관적으로 인터넷서점 알라딘에 접속했는데 히가시노 게이고가 별세했다는 소식이 적힌 팝업창이 커다랗게 떠 있는 것이 아닌가. 잘 못 본 것인가 싶어 인터넷서점 앱을 종료하고 다시 열어봐도 같은 팝업창이 떴다. 그가 죽었구나! 무라카미 하루키보다 훨씬 젊은 나이로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것일까. 네이버를 열어 검색어를 넣어보니 대장암에 걸려 향년 68세로 별세했다고 한다. 비통한 심정에 잠시 묵념을 하고 명복을 빌었다. 이제 더는 그의 신작 소설을 볼 수 없겠구나. 그의 소설 공장은 이제 문을 닫는구나. 그의 소설 덕분에 일본소설이라는 신세계에 입문할 수 있었고 책읽기에 재미를 붙일 수 있었다. 언제까지나 그는 소설을 생산하고 신작을 내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내가 그의 작품을 읽는 속도보다 신작이 나오는 속도가 더 빠를 정도였다. 물론 이는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이고 그의 작품을 부지런히 읽지 않았다는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지만 그래도 인터넷 서점에 접속하면 항상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작 소설이 소개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의 소설 창작은 24시간 365일 가동되는 반도체팹처럼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br>그런데 더는 그의 신작 소설이 인터넷서점에 소개되는 일은 없는 것이다. 허망하고 아쉽고 슬펐다. 그는 지금까지 무려 106권의 단행본을 집필했다고 한다. 20대 중반부터 글을 썼다면 대략 45년의 필력인데 연간 2~3권의 책을 꾸준히 낸 셈이다. 그야말로 소설을 끊임없이 찍어내는 팩토리 수준이었다. 이렇게 다작을 한다고 해서 그의 작품들 수준과 편차가 떨어지는 것도 아닌 듯 하다. 그의 별세 소식을 듣고 정말 오랜만에 망설임없이 구매한 최신작 &lt;투명한 나선&gt;을 단숨에 읽어치웠는데 오래전에 읽은 &lt;나미야 잡화점&gt;이나 &lt;용의자 X의 헌신&gt;만큼의 밀도있는 이야기로 인해 최근 가장 즐거운 독서 경험을 했다. 이번에 &lt;투명한 나선&gt;을 선뜻 구매한 동기는 그의 별세에 대한 일종의 조문이라고 해야겠다. 소설책 값 1만8천원은 큰 돈은 아니지만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의였다. 그의 작품을 읽고 단조로웠던 삶이 풍족해지고 즐거워지는 경험에 비하면 책값 1만8천원은 너무 싸게 느껴진다. 나는 문학작품이나 영화, 음원등을 저작권에 맞게 정식으로 구입하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알게 되었지만 한 권의 책을 써내는 일이 얼마나 큰 공력과 노력이 들고 어려운 일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좋은 영화와 좋은 글, 좋은 음악을 생산해내는 예술가들은 충분한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세상을 살만한 어떤 이유도 즐거움도 찾지 못한다.<br>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전부 읽은 것은 아니지만 그가 쓴 어떤 작품을 골라도 결코 실망하는 일은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한국에서는 추리, 미스터리 소설을 좀 읽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그의 책을 단 한 권만 읽은 사람은 없지 않을까? 그만큼 그의 작품은 읽는 재미와 중독성을 보장하고 밤을 새게할만큼 독보적이다. 그의 작품은 읽기 시작해서 중도에 그만두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읽지 않음이 있을진대 읽게 된다면 끝을 보지 않고는 그만두지 못하리라. 그가 이 세상을 떠나던 그 순간, 그리고 그가 없는 지금도도 그의 작품은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있다.<br> 사실 일본소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이외에는 아는 작품이 거의 없었고 오래전에 미야베 미유키의 &lt;모방범&gt;을 읽다가 질려버린 경험을 한 이후로 일본 추리소설이나 장르소설에 흥미를 잃었었다. 미야베 미유키의 &lt;모방범&gt;은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곁가지 이야기들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그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자질구레한 일상사를 꾸역꾸역 읽고 있으니 시간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양파껍질처럼 끝없는 곁다리가 이야기가 이어지는 홍명희의 &lt;임꺽정&gt;처럼 &lt;모방범&gt;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소설 전체와 어떤 유기적 관계를 맺지도 못하는 모래알 같았다. &lt;모방범&gt;을 읽는 내내 먼저 읽었던 페이지를 수시로 펼쳐서 앞에서 나온 인물들의 이름을 확인해야 하는 번거로움은 몰입도와 소설적 재미를 크게 떨어뜨렸다. 소설 읽기가 아닌 사전찾기나 색인찾아보기 같은 작업이 되어버린 &lt;모방범&gt; 읽기는 2권째 읽다가 포기해 버렸고 한동안 일본추리소설은 재미없고 지루해라는 선입견이 생기고 말았다.<br> 그러다가 십여년 전 도서관에서 우연히 집어든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lt;나미야 잡화점의 기적&gt;을 시작으로 일본 장르소설에 새롭게 미친듯이 빠져들었다. 어렵고 복잡한 책들은 잠시 한켠에 제쳐놓고 일본소설 읽는 재미에 매료된 시기였다. 원래 소설은 잘 읽지 않는 편이었고 장르소설이라 불리는 추리나 스릴러, 공포, 판타지 분야에는 더더욱 흥미가 없었다. 그런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lt;나미야 잡화점의 기적&gt;부터 시작해서 다카노 가즈아키의 &lt;제노사이드&gt;, &lt;13계단&gt; 같은 작품을 읽고 나서는 이렇게 재미있고 유익한 일본 소설이 많았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특히 다카노 아키아즈의 &lt;제노사이드&gt;는 방대한 전문자료를 토대로 한 지식오락물의 절정 그 자체였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인간의 사랑과 희노애락이라는 감정을 깊게 파고든다는 점이 좋았다.&nbsp;<br>&nbsp;이런 미친 정신 나간 사랑도 있을까 할 정도로 극단적이고 지고지순한 사랑을 묘사한 &lt;용의자 X의 헌신&gt;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 작품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이라는 평이 압도적이다. 나는 추리소설을 가장한 사랑 이야기로 읽었다. 사랑의 형태와 변주의 극단이 어느 정도까지 갈 수 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수학이라는 이데아에 탐닉하다가 모든 희망을 잃고 죽을 날만 기다리던 천재수학자이자 수학교사 이시가미. 어느 날 그의 이웃집에 이사 온 모녀. 이시가미가 탐닉한 순수에 대한 의지는 아름답고 맹목적이었다. 그러나 순백은 늘 때가 타고 변색 되기 쉽고 맑은 물은 더러워지 쉬운 법. 소설에서 사랑하는 이에 대한 이시가미의 헌신은 끝내 좌절되고 만다. 한국에서도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국판 용의자x가 제작되었다. 방은진 감독, 류승범, 이요원, 조진웅 주연이었는데 흥행에는 실패한 모양이다. 내가 보기엔 원작의 묘미와 의도를 잘 살린 수작이었는데 류승범, 이요원, 조진웅의 연기가 좋았고 방은진 감독의 연출도 좋았다. 이시가미 역을 맡은 류승범의 연기는 원작소설보다 더 잘 된 것 같다. 한국판 용의자x는 원작과 결말이 확연히 다르다. 한국판 영화 용의자x는 결말이 원작과 어떻게 다른지 집중해보는 것도 재미있다.<br> 오버사이즈 무채색 양복을 입고 매일 같은 시간에 도시락 가게에 들러 이요원이 파는 도시락을 수줍게 사서 털레털레 학교로 출근하는 지독하게 외로운 이시가미(류승범)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한 가슴아린 캐릭터다. 내가 류승범의 연기를 좋아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바로 이 한국판&lt;용의자X&gt;를 본 이후부터이리라. &lt;용의자X&gt;에서 천재 수학자가 보여준 사랑 이야기는 비현실적이라 할 수 있지만 오히려 그런 비현실적, 비합리적, 비이성적인 사랑이라는 감정이 인간들을 추동하는 원동력이었다. 사람은 심지어 사람뿐만 아니라 로봇, 사이보그, AI와도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 아닌가.<br> &lt;용의자X의 헌신&gt;처럼 맹목적 사랑 이야기 뿐만 아니라 딸을 잃은 아버지의 분노와 상실감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가슴을 후벼파는 &lt;방황하는 칼날&gt;이라는 작품도 있다. 이 작품도 한국에서 정재영 주연으로 영화로 만들어졌다. 한국판 &lt;방황하는 칼날&gt;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딸을 가진 부모님들은 이 소설이나 영화를 끝까지 보는 게 좀 부담스러울 것 같다. 철없는 일진 고등학생들에게 딸을 잃은 아버지의 복수 이야기. 사적 복수를 허용하지 않는 국가체제에서 살 고 있는 우리가 범죄의 피해자가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볼 기회를 주는 소설이다. 이 소설도 역시 빠르게 잘 읽힌다.<br> 또 &lt;새벽거리에서&gt;에서는 탐욕적 불륜이라는 소재로 인간 본성의 밑바닥을 처절하고 집요하게 파묘해 나간다. 불륜을 소재로 한 작품인데 결말의 반전이 대단히 충격적이다. 작가는 불륜에 대한 호오를 말하거나 윤리적 판단을 내리지는 않는다. 마지막 몇 십장까지 통속적인 불륜소설처럼 보이지만 예상하지 못한 반전은 독자들 뒷통수를 무자비하게 후려친다. 결말은 희극도 비극도 아니고 불륜은 희미한 안개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와타나베 준이치의 &lt;실락원&gt;처럼 불륜남녀가 동반자살을 하는 비극적 선택은 없지만 불륜이라는 행위 그 자체는 진짜 실감나게 묘사된다. 소설을 읽는 내 자신이 불륜의 당사자가 된 것처럼 들킬지 말지 조마조마하다. 영화로 제작되도 좋을 스토리다.<br>  히가시노 게이고의 또 다른 대표작 &lt;나미야 잡화점&gt;을 빠뜨릴 뻔 했다. 살아오면서 읽은 최고의 소설 다섯 가지를 꼽으라면 이&lt;나미야 잡화점의 기적&gt;이 포함될 것이다. 읽으면서 눈시울이 무섭게 뜨거워지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한 소설은 아사다 지로의 단편 &lt;철도원&gt;이후 처음이었다. 오락성과 작품성을 모두 겸비한 최고의 소설이다. 현실과 과거를 잊는 종이 편지라는 설정이 독창적인 것은 아니지만(한국영화 시월애도 이런 설정이었음)요즘 종이편지는 공과금 청구서와 다를 바 없는 시대이고 사람들은 더 이상 종이편지에 사연과 이야기를 적지 않는다. 중고등학교 시절 가슴 두근거리며 쓴 펜팔 편지처럼 히가시노 게이고는 나미야 잡화점에서 과거와 현재를 오고 가는 환상 편지에 희망과 사랑을 담는 따뜻한 이야기를 엮어 놓았다. 일본 부동산 버블이 붕괴하던 과거와 현대, 그리고 환광원이라는 고아원 출신의 다양한 캐릭터들이 잘 짜여진 톱니바퀴처럼 굴러가는 기가 막히게 맛있는 소설이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요즘 한국소설에서 잘 찾아볼 수 없었던 서사의 힘을 다시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재미와 진한 감동 두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최고의 작품. 누구한테나 추천하고 싶다.<br>  이번에 읽은 &lt;투명한 나선&gt;은 혈통에 대한 사랑과 집착이 얽어놓은 카르마에 대한 이야기가 무척 매력적이다. 이 책의 제목이 왜 &lt;투명한 나선&gt;인가. 책을 읽어 보신 분이나 앞으로 읽게 될 분은 알게 되겠지만 이 책의 제목 &lt;투명한 나선&gt;은 바로 DNA이중나선을 문학적으로 변형시킨 표현이라고 보는게 중론이다. 실제로 일본의 출판사에서도 &lt;투명한 나선&gt;은 DNA이중나선을 뜻한다고 한다. &lt;투명한 나선&gt;은 바로 생명과 혈통을 유전하는 물리적 실체인 디옥시리보핵산이 화학적 상보성으로 결합된 모습인 이중나선이다. 이 책의 내용이 자식을 보육원에 버린 한 여인이 수 십 년 뒤 그 아이를 다시 찾아 나선다는 내용이고 그 과정에서 혈통과 출생에 얽힌 사람들의 거짓과 탐욕, 핏줄에 대한 원초적인 애정이 빚어내는 파멸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DNA 이중나선은 극미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물리적 실체여서 인간들의 육안으로는 결코 볼 수 없다. 그래서 투명한 나선이라 할 만하다. 이 투명한 나선은 보이지 않지만 혈통이라는 유전정보를 복제하고 전달하면서 인과 연이라는 업을 만들고 눈에 보이는 인간과 사회를 움직이고 창조하는 씨앗이다. 소설에서는 히데미라는 여인이 자신의 딸을 보육원에 맡긴 뒤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성취하지만 자신의 유일한 핏줄이었던 딸을 찾아나섰다가 파국적 결말을 맞게 되는데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흥미로운 점이 있었다. <br> 히데미는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딸의 자식, 즉 손녀가 자신의 친손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손녀를 위해 살인을 서슴치 않는다. 이 상황에서 합리적 인간이라면 손녀가 정말로 자신의 피를 이어받았는지 친자확인 작업을 하겠지만 히데미는 그러지 않았다. 인간은 혈통이라는 결정론적 인연의 사슬에 묶여 있는 것 같지만 히데미를 실제로 움직인 것은 어떤 확고한 믿음이었다. 그 믿음은 합리적이지 않고 비이성적이고 부조리하지만 히데미는 주저 없이 그 믿음을 밀고 나가 스스로 살인자가 되고 만다. 히데미라는 여인은 결국 유전적 핏줄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마음을 준 사람에게 매몰된 인물이었다. 그 매몰이 바로 투명한 나선이고 마음의 길이었다. 이런 설정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인 &lt;용의자 X의 헌신&gt;에서도 이미 동일하게 반복되었던 적이 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자살할 날만 꿈꾸던 천재수학자 이시가미가 우연히 마음을 나눈 옆집의 여인에게 자신의 남은 인생을 송두리째 바치는 어이없는 행동을 이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삶과 행위는 이렇듯 보이지 않는 투명한 나선이라는 마음의 길을 따라가고 있다. 가식 없이 진정으로 행동하고 뭔가에 미치도록 빠져든 인간이 가는 길은 투명한 나선의 홈이다. 종교가 없어도 모종의 믿음 체계는 모두에게 있기 마련이고 그 믿음이 인생의 토대가 되는 게 인간들이 가진 고유한 삶의 양식이다. 그 믿음은 자신만이 품은 고유한 이야기나 서사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br> 이 작품에서 히데미가 품은 이야기는 자신이 지키지 못했던 완전한 가족이라는 서사였다. 딸을 보육원에 버린 뒤 술집을 차려 크게 성공하지만 껍데기일뿐인 삶이었고 가짜였던 인생이었다. 히데미 자신이 꿈꾸던 진짜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자신이 끝내 키우지 못한 딸에 대한 죄책감로부터 만들어진 이야기를 완성하는 일이 히데미를 움직이게 하는 추동력이었다.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결핍된 존재다. 결핍을 깨달을 때 자신이 품을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결혼하지 못한 사람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꿈꾸고 자식을 잃은 부모는 크지 못한 자식을 평생 그리워한다. 부모님을 일찍 잃은 사람은 식당에서 부모님을 닮은 노인이 있으면 노인의 식사비를 기꺼이 부담하는 일도 부모님이라는 존재의 결핍에서 비롯되는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이다. 그런 결핍으로 인해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모습은 순전히 인과적으로 결정적일 수도 있고 때로는 완전하고 확고한 자유의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투명한 나선(이야기)은 아주 잘 이해되기도 하고 전혀 이해 할 수 없어 완벽한 부조리로 보일 때도 있다. 투명해서 훤히 보일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안 보일 수도 있는 나선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투명한 이야기 타래를 품고 있다가 때가 되면 서로 얽고 풀기를 반복한다. 이 소설의 제목 &lt;투명한 나선&gt;을 내 방식대로 해석해 보았다. <br>  히가시노 게이고는 추리소설 작가이므로 작품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반전이 있는 결말은 늘 독자에게 지극한 즐거움을 준다. 작가는 연관성이 부족한 사건과 이벤트를 레고블럭처럼 차곡차곡 아귀가 맞아떨어지게 전체적 이야기를 완성해 가는데 이 과정을 그려내는 작업이 너무 능숙해서 천의무봉이라 할 만하다. 그의 작품을 펼치면 이번에는 또 어떤 기막힌 설정이나 반전이 있을지 무척 설렌다. 무려 106권의 작품을 쓰면서 얻어진 내공이고 그를 미스터리의 대가라고 부르는 이유다. SNS에서 우연히 본 글인데 히가시노 게이고가 소설을 어떻게 그렇게 많이 쓸 수 있었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첫 문장을 쓴다, 그 다음 문장을 이어서 쓴다. 이 두 가지 과정을 무한 반복하면 소설이 한 편 완성된다” 정말로 그가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 확인 할 수 없지만 그 두 과정의 무한반복이라는 작업 없이는 어떤 글이든 글이 나올 수 없는 당연한 이야기다. 그렇지만 그 두 과정의 단순 반복 작업 이면에서 히가시노 게이고가 수 십년 간 해왔던 이야기 만드는 비밀이 궁금하기만 하다. 나는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지 관심이 많다. 시골길을 걷다가 살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 오래된 옛집을 보면 그 집의 주인이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무척 궁금하다. 소설 읽기의 가장 큰 즐거움이라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이야기가 허구라도 이야기로서 흠결은 전혀 없다. 이야기는 듣거나 말해질 때 허구와 사실을 구분하지 않는다. 마음을 울리거나 서늘하게 한다면 그 이야기의 가치는 충분하다. <br> &nbsp;한 명의 작가가 세상을 떠나도 그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가 살아 생전의 인연으로 빚어낸 106권의 소설이 남아 있다. 인간의 말과 글이 세월이 지나도 이어진다면 그의 글도 잊혀지는 법은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은 시대를 잠시 같이 살았고 멋지고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읽어서 더없는 행운을 누렸다. 아직 읽지 않는 그의 책이 많음은 다행인 것일까? 다시 한번 히가시노 게이고님의 명복을 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02/11/cover150/s83213128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8021172</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