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인의 띄어쓰기.맞춤법 (최신 개정판) - 한국인이 가장 잘 틀리는 우리말 5500제
최종희 지음 / 국민출판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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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인터넷에 떠도는 맞춤법 괴담 하나를 보았다. 썸남이 "**에서 **까지 갑갑니?"라고 문자를 보냈다. 알고 보니 '가깝니'를 '갑갑니'라고 적은 것이다. 정말 '갑갑하다'고 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아마도 이 썸남은 주로 귀로만 한글을 배웠나보다. 그러니까 책을 통 읽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SNS야 문자매체라기보다는 구술매체, 더 정확히는 (월터 옹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자 구술매체니까. 글이 아니라 말로 정신이 주조된다는 것은 (개인의 판단보다 집단의 흐름에 더 쉽게 휩쓸리고 나아가 쉽게 조종되는) 구시대적 인간형이라는 뜻이다. 맞춤법 정도 틀린 게 뭐가 문제냐는 인식은 위험하다.

얼마 전에 들은 이야기 하나 더. 어느 조직에서 중간 간부들이 조직원들에게 돌아가며 카카오톡으로 글을 보내는데, CEO께서 원고 검토하다 급기야 분노를 터뜨리셨다. 그래도 명색이 지도자들인데, 맞춤법 수준이 참담했던 거다. 해서 그 전까지는 교정만 봐주시던 어른이 이거 글 쓴 사람들 실명 공개하라고 했다는 거다. 그러자 넘버 투가 국문학과를 졸업하는 다른 관리자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맞춤법을 A4 한 장으로 정리할 수 있나는 거다. 말이 되는 소리냐, 그게.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맞춤법 책 <달인의 띄어쓰기 맞춤법>은 768쪽이다. 그것도 거의 크라운판 사이즈다(173*235).

간단히 말하자면, 맞춤법은 어렵다. 어려우니까 공부해야 한다. 지금도 수시로 국립국어원 사이트에 들어간다. 매번 헷갈린다. <달인의 띄어쓰기 맞춤법>을 앞에 가져다 놓은 이유다. 부제가 "한국인이 가장 잘 틀리는 우리말 5500제"다. 그러니까 통독용이 아니라 "곁에 두고 필요할 때마다 찾아보"라고 만든 책이다. 최소한 글을 만지는 사람에게는 이런 책이 필요했다. 모든 논의를 하나로 모아놓아 언제든 참고할 책이 필요했다는 소리다. 이 책의 유용성은 맞춤법 분야의 사전 혹은 상비약 정도로 생각하고 보면 분명해질 것이다.

마침 2021년 최신(5차) 개정판으로 다시 나왔다. 분량이 조금 줄었다. 그래도 752쪽. 베개로 써도 무방할 게다.
내 생각에 이 책은 글을 쓰거나, 글을 만지는 일을 하는 이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기본서다. 여기서 글을 쓰는 이는 전업 작가, 기자 등만 생각하기 쉬운데, 글을 통해서 진행되는 업무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도 포함해야 할 것이다. 또한 사이드잡으로 글쓰기를 생각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요즘 브런치 등 여러 플랫폼을 통해서 글을 올리는 이들이 많다. 그들에게도 이런 자료집 한 권은 구비되어야 한다. 그냥 상비약이라고 생각하고 구비하시라. 한글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이 책이 필요할 때가 수시로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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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시인이 온다
월터 브루그만 지음, 김순현 옮김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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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브루그만은 별다른 소개할 필요가 없는 세계적 구약학자이다. 그의 명성에 힘입어 그의 책을 소개하는 것은 매우 적절한 전략일 게다. 여기서는 비슷한 소개 행렬에 동참하기보다 차라리 브루그만의 특정한 문제의식에 주목하고자 한다.

 

알다시피 <마침내 시인이 온다>는 설교학 책이다. 설교 분야에서 명성이 높은 라이먼 비처 강좌 원고를 책으로 묶어 펴낸 것이다. 여기서 시인의 자리에 설교자를 얹어놓는다. 성경의 언어가 시인의 언어, 즉 예언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그분을 따르는 데 있다. 그분을 따르고 싶다면 경청해야 한다. 성경에서 복종은 경청의 형태를 띤다. 복종하는 삶은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귀담아듣고, 그 음성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 음성에 응답하는 삶이다." (124쪽)

 

"폴 리쾨르가 알아챈 대로, 복종은 상상력을 따른다. 우리의 복종은 우리가 상상하는 세계 너머로 나아가는 모험을 하지 않는다. 변화된 복종(즉,좀더 신실하게 응답하는 경첨)을 수행하고 싶다면, 우리는 대안 상상, 곧 세상과 우리 자신을 다르게 상상할 것을 권유받아야 한다. 복종과 상상력의 연결은 불굴의 윤리는 시적이고 예술적인 담화에 달려 있음을 암시한다. 시적이고 예술적인 담화야말로 변화된 경청을 이끌어 내는 최상의 담화다."(129쪽)

 

두 인용문을 결합하면, 설교자가 곧 시인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설교를 통해 교인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시인의 언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인은 곧 예언자다. 모든 시인이 다 예언자는 아니지만, 모든 예언자는 다 시인이다. 예언은 현실 너머를 보여주는 다른 상상을 품고 있다.

 

따라서 설교자가 예언자의 언어, 즉 시인의 언어로 구성된 성경에 대해 시인의 언어로 설교한다면, 회중에게 다른 상상을 위한 공간이 제공된다. 이를 통해 회중의 새로운 경청, 즉 회중의 새로운 순종이 빚어질 것이다.

 

월터 브루그만은 <예언자적 상상력>로부터 줄곧 이어지는 자신의 오랜 문제의식을 여전히 붙잡고 있다. 그는 성경이 품고 있는 예언자의 언어가 우리 시대의 회중에게 그대로 들려주길 바란다. 성경을 예언자의 음성으로 듣게 하는 것이 그의 연구가 지향하는 방향이다. 나는 그의 한결 같음을 높이 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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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는 처음입니다만 - 톰 라이트의 하나님 나라 신학 입문
마를린 바틀링 지음, 박장훈 옮김 / IVP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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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 전문가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나름 열심히 공부했다. 그가 쓴 것이나 그에 대해 쓴 것 모두 적잖이 읽었다. 하지만 턱도 없이 부족하다 여긴다. 워낙 많이 써제끼니 제대로 따라잡을 수 있겠나. 흡사 신학계의 지젝을 보는 것 같다. 

톰 라이트가 많이 써내려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저 수다쟁이라서거나 타고난 달변가라서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가고자 하는 고투의 결과일 것이다. 16세기에 루터가, 20세기 바르트가 어마어마한 분량의 글을 남긴 이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들의 핵심 주장은 의외로 간단하다. 하지만 낯선 주장이라 쉽게 받여들여질 리가 없다. 해서 같은 말을 다양한 상황과 맥락에 맞춰 수도 없이 변주해야 한다. 자기 주장을 과감하게 선포하고, 학계의 논쟁자들과 치열하게 싸워야 하고, 일반 대중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주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를린 바틀링이 내놓은 톰 라이트 입문서는 유용하다. 매우 깔끔한 요약과 다소 조악한 그림으로 구성된 소품이다(솔직히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 별 하나 뺀다). 당연히 어렵지 않게 금방 읽어치울 수 있다. 

그러나 그게 또 문제일 수도 있다. 금방 완독하고, 그 결과로 나름 머릿속으로 정리도 될 것이다. 그런데 그가 준 충격이 잘 와닿을 것인가는 의문이다. 내가 생각할 때 저자는 그 점에 대해서 충분히 전달한 것 같지는 않다. 

하나 이 분량으로 담아내는 입문서의 한계일 지도 모르겠다. 이를 해결하려면, 두 가지 해법이 있다. 하나는 이 책을 반복해서 읽는 것이다. 최소 두세 번을 읽어서 그 패러다임의 골자가 우리 내면에 새겨지게 하는 것이다. 여러 번 읽고 나면 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파괴력이 와닿을 수도 있다. 

다른 하나는 이 책을 지도 삼아 톰 라이트의 책들을 하나하나 섭렵하는 것이다. 굳이 두툼한 전문서적들을 읽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저 대중을 상대로 쓴 책들을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제법 많은 권수가 국내에 소개되었을 뿐더러, 동시에 각 권별 분량은 많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모두 공통적으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성경과 신학(가령 이신칭의와 같은 구원론이나 천국과 지옥 같은 종말론 등)에 대한 일정 수준의 지식이다. 그래야 이 지식을 중심으로 형성된 기존의 인식틀이 무너지는 충격을 경험할 수 있다. 


"메시아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새 창조의 개념에 맞춰 조율된다는 의미다. 소대 철학자들에게 사고란 세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에 맞게 우리를 조율하는 작업이었다. 바울에게 사고란 세상과 하나님의 새 창조가 마땅히 이루어야 할 조화에 부합하는 것이었다."(95-96쪽)


톰 라이트가 빌립보서 강연의 QnA 시간에 들려준 말이다. 이를 잘 곱씹어보면, 새로운 사고 형성은 상당한 수고를 요하는 조율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톰 라이트는 처음입니다만]을 처음으로 펼쳐드는 것은 이를 위한 첫걸음에 불과하다.



p.s.

여기까지 써놓고 나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극히 초보적인 지식만 갖춘 성도야말로 이 입문서의 최고 수혜자일 것 같다. 애초에 무너뜨릴 지식이 없으니 그냥 받아들이면 될 게 아닌가. 물론 이런 분에게 딱히 드릴 말씀이 없다. 나보다 더 잘 받아들이실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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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의 음악은 어떻게 우리의 영혼을 채우는가 - 예술과 명상의 만남을 위하여
요셉 피퍼 지음, 박윤정 옮김 / 파이돈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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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철학자 요셉 피퍼의 소품집(짧은 글과 강연 원고)인데, 음악과 미술 등 예술과 여가에 대한 단상이 흩뿌려져 있어요.

예술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계기를 제공합니다. 예술에는 무엇보다도 영적 차원이 내재하는데, 바로 이 지점에 우리의 눈길을 돌리게 합니다.


예술을 보고 듣는 눈은 영혼의 각성과 관련된 것입니다. 좋은 음악을 제대로 듣고, 좋은 그림을 제대로 보는 것은 교과서로 배운 지식으로 꿰어 맞추는 것과 달라요.

자기 영혼의 귀로 음악을 듣고 자기 영혼의 눈으로 그림을 듣는 것이지요. 곧 내가 직접 듣고 보는 거예요.


예술과 묵상은 그래서 상통합니다. 묵상도 세상의 시스템이 조형한 거짓 자아를 버리고 참 자아를 되찾게 해주기 때문이지요.

세상의 풍랑이 거셀수록 우리 내면으로 들어가서 다시 참 자아를 되찾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거짓 자아를 버리고 참 자아와 더불어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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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산 - 삶은 '혼자'가 아닌 '함께'의 이야기다
데이비드 브룩스 지음, 이경식 옮김 / 부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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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여름 우연히 집어들게 된 <보보스>를 통해 처음으로 데이비드 브룩스를 만났다. 곧바로 그의 언어에 매료되었다. 데이비드 브룩스의 책이 나올 때면, 언제나 열렬하게 반긴다.

 

처음에는 그를 상대할 만 한 논적으로 대했지만, 요즘은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있는 친구로 여긴다. 그에게도 흠결이 있고, 나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마침 이번 신작에서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우행을 말한다.

 

예전 작품들에는 브룩스의 사적인 면이 드러나지 않았다. 사실 처음에서는 주로 그의 재기가 빛났다. 하지만 최근 책으로 올수록 그의 성품이 드러나고 있다. 급기야 <두 번째 산>에서는 그의 이혼이나 성공을 향한 열망 등을 진솔하게 고백하기에 이른다. 

 

이 책은 인간의 품격을 넘어서 그의 품격을 보여준다. <소셜 애니멀>에서 단초(방향)를 보여주고, <인간의 품격>에서 윤곽을 제시하더니, 이제 마침내 <두 번째 산>에서 그 결실이 무르익었다.

 

브룩스에 따르면, 우리의 삶은 두 개의 산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첫 번째 산은 외적 성취를, 두 번째 산은 내적 성숙을 가리킨다. 성취와 성공 다음에는 성숙을 위한 고난이 기다린다. 첫 번째 산의 정상을 등정하고 난 후에, 누구나 죽음의 골짜기로 내려와 헤매게 된다. 그런 후에야 두 번째 산을 오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결국 죽음의 골짜기를 직면하게 된다. <두 번째 산>은 정확히 그런 처지에 놓인 이들을 위한 치료약이며, 앞으로 그런 상황에 처할 이들을 위한 예방주사다. 성숙을 향한 여정에 오르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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