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에 잠이 깼다.
악몽에 시달리거나 가위에 눌리거나 한 것도 아닌데, 오래 나쁜 꿈속을 헤매다 깨어난 것처럼 몸이 무겁고 어딘가가 아팠다. 잠시 눈을 감은 채로 생각했다. 이런 느낌이 뭐지? 모욕감. 그 낯설고도 지독히 생생한 단어가 까마귀처럼 내 감은 눈 위를 휙 지나갔다.
전날 그가 나에게 무심하게 던진 한 마디, 아니 지극히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가정과 논리에서 던진 한 마디 말이 지금 나를 이런 감정에 빠뜨리고 있다.
그는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 걸까. 그가 '보고 있는' 나는 나와 얼마나 겹쳐 있으며 동시에 얼마나 멀리 있는가. 나는 그에게 오랫동안 내 얘기를 해 왔으나 그는 내 얘기를 듣고 있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다만 자신의 통찰력에 비친 내 모습만을 줄기차게 바라보면서, 나로부터 전달되는 모든 정보와 이미지들을 그 상에 맞추어 분석, 종합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하기는 그만 그랬겠는가. 나 역시 사람들에 대해 그런 과오를 수없이 저지르며 살아왔다.
어두운 방에 불을 밝힌 뒤 컴퓨터를 켜고 국어사전에서 낱말을 찾아본다.
모욕(侮辱): 깔보고 욕보임.
모독(冒瀆): (신성한 것이나 존엄한 것, 청정한 것 등을) 욕되게 함.
치욕(恥辱): 수치와 모욕.
모욕은, 모독은 '오독(誤讀)'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상대방이 나를 잘못 읽는 데서 오거나, 내가 상대방의 진의를 잘못 해석하는 데서 생기는 상처와 흔적.
세상의 모든 이해가 기껏해야 '잘한 오해'라는 말도 있지만, 그런 오독(誤讀)은 깊게 패인 바퀴자국을 남기며 시간과 함께 지나간다.
아프다거나 슬프다거나 따위의 엄살스런 감각에 무뎌지려는 기제의 발동으로, 잠 속으로 들어간다.
내 밖에서 천천히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저 혼자 웅얼거리는 라디오 음악처럼, 시간이 끊어질 듯 이어지며 흘러갔다.
날이 저물어 버렸다.
아직 내 안에 무엇이 고여 있는지, 어떤 흔적이 남아 있는지 알 수 없다.

주말 저녁의 드라마를 보고, 비디오를 두 편 보고, 책을 읽는다.
몇몇 말들이 내 안에 잠시 머물러 빙빙 맴돈다.
"너는 좋은 가수가 될 거야."
"좋은 가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지?"
"사람들의 마음을 만져 주는 가수가 좋은 가수지."
"예쁜 게 죄야?"
"아니. 예쁜 건 잘못이 아니야. 예쁜 척 하는 게 죄야."
"우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이상한 것이 아니라, 정말 아주 이상하다."
"우주의 끝을 찾을 수 없는 것과 똑같은 이유 때문에, 우주의 중심에 서서 '이곳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이곳이 바로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저 우리는 언제나 우주의 중심에 있을 뿐이다."
Handel's Saraban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