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인의 취향>에서는 집안을 온통 핑크빛으로 도배하고 장식한 어느 여자의 '유치한 미적 취향'을 드러내놓고 웃음거리로 삼았었다. 또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서는 도쿄로 출장간 남편 빌 머레이에게 새로 산 집에 거실 바닥은 무슨 색깔로 할까를 상의하는 아내의 전화가 부부 관계의 씁쓸하고 쓸쓸한 면모를 보여주는 장치로 등장했다.
영화의 그 장면들을 보고 있을 때는 감독의 의도대로 일상이 보여주는 통속과 속물 근성에 가벼운 웃음과 환멸의 시선을 날려보냈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막상 그런 일상 속에 들어와 있을 때는 나 또한 지극히 사소하고 속물적인 취향과 선택의 고민에 허둥거리게 된다.

다음 주 화요일에 이사 날짜를 잡았다.
평소에 집안을 깔끔하게 정리해 놓고 반들반들 닦으며 살아 온 살림꾼들이야 이사라 한들 크게 종종거릴 일은 없겠지만, 나처럼 십수 년이 되도록 쭉 집안일이 몸에 배지 않고 손에 익지 않은 '후루꾸 주부'에게 집을 옮기는 일은 내 몸과 머리 전체에 과부하가 걸리는 대사(大事)이다. 
과감하게 버려야 할 것들, 맥락을 잡아 정리해야 할 것들, 각 계의 전문가들에게 맡겨야 할 것들, 이런저런 일들의 날짜와 시간을 조정해야 하는 것...... 거기에 덧붙여 이참에 몇몇 전자 제품들의 애프터 서비스도 몰아서 받는 바람에 이번 주 내내 정신없이 종종거리고 있다. 일 못하는 사람은 남에게 일을 맡기는 것도 지혜롭게, 빠릿빠릿하게 잘 처리할 줄 모른다. 같은 일로 전화를 몇 번씩 하고, 이리저리 쫓아다니고, 순간적으로 뭔가를 선택 결정해야 할 때마다 고민에 빠지고......
어쨌든 '이사 모드'라는 것이다. 짐 풀고 자리 잡을 때까지 계속 불안정한 '이동 대기중' 상태....... 그래도 이 심리적 유목민의 기간 동안에도 잠시 잠깐 짬이 날 때마다 서재를 기웃거릴 생각이다. 그때마다 막간 엽서나 한 장씩 띄워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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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물고기 2004-10-06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사라니.. 한여름 북새통에 집 옮긴답시고 몸살 앓던 일이 바로 엊그제랍니다. 부디 건강 챙기시길..

로드무비 2004-10-06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우짭니까?
후루꾸 주부 대표자리를 놓고 다투게 생겼네요 우리....
헤헤 뭐 좋은 자리라고!
너무 신경 많이 쓰지 마시고 중요한 대목만 메모해서 차질없이 잘해보세요.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맛있는 것 드셔가며 쉬엄쉬엄 준비하시길...
막간엽서 기다릴게요.
아, 그리고 선물을 그렇게 거하게 보내시면 우짭니까.
박스를 풀고 입은 찢어졌지만......
책 잘 읽고 리뷰 띄울게요. 기약없는 약속이지만...호호호
고맙습니다.
우리 남편 돌아오면 향초 띄워놓고 분위기 잡을래요.
말리지 마세요.^^

2004-10-06 15: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레져 2004-10-06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낮시간에 가서 이사갈 집 점검을 하라더군요.
물의 수압은 괜찮은지 누전된 것은 없는지...
오늘 받은 주소 수첩에 적어놓았는데 소용이 없게 되는가요?
집들이 하실 때 주소 알려주세요 ^^

에레혼 2004-10-07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사라고 엄살을 좀 떨었더니, 걱정들을 많이 해주셨네요, 고맙습니다.
제가 재바르게 일을 잘 못해서 그렇지, 그것 말고는 잘하는 게 많습니다.
맛잇는 것 챙겨 먹기, 재미있는 것 찾아서 놀기, 마음 가는 대로 한껏 게으름 부리기, 몰아서 열 시간 넘게 자기, 자고 일어나서 좀 쉬다가 다시 자기, 일하다가 딴짓 하기...... 이런 장기를 살려 이사 모드 중에도 잘 지낼 거라고 믿어요 ㅎㅎㅎ
오늘 저녁에도 유등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강변을 두 시간이나 기웃거리며 돌아다니다 왔는걸요
[플레져님, 그 주소는 집 주소가 아니므로, 제 연락처로는 유효하답니다]
 

 

사랑이란 두 사람 사이의 공동 체험이다. 그러나 사랑이 공동 체험이라는 사실은 당사자 두 사람이 서로 비슷한 경험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각각 다른 나라에서 온다.

사랑받는 사람은 지금까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 오랫동안 간직되어 온 사랑에 대한 하나의 자극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 모두는 이러한 사랑을 다소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영혼 안에서 자신의 사랑이 고독한 것임을 느끼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어떤 새롭고 낯선 고독을 알게 되고 이러한 사실을 앎으로써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이 할 일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그는 자신의 가슴 속에 간직되어 있는 사랑을 위해 가장 아름다운 집을 지어야 한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새로운 내면 세계, 즉 강렬하고 새롭고 완전한 세계를 구축해야 한다.

사랑받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을 끊임없이 발가벗기려고 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비록 그 경험이 자신에게 고통만을   안겨 준다 할지라도 가능한 한 사랑받는 사람과 어떤 관계라도 맺으려고 열망한다.

-- 카슨 메컬러즈, <슬픈 카페의 노래> 중에서

 


 

 

 

 

 

 

 

 

 

 

 

 

 

 

Paramithi Hehasmeno 전설같은 사랑 - Anna Vis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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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0-06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악이 참 좋네요.
단순한 멜로디인데 스며들어요.

hanicare 2004-10-06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슨 맥컬러즈. 한 세대 위의 작가인데 이렇게 이름을 호명해주시니 괜히 내가 반갑네요.호명,그러면 왜 또 사평역에서가 떠오르는지.

2004-10-06 1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레혼 2004-10-06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제가 대체로 좋아하는 선율이랍니다, 저런 색조......

하니님, 속삭이신 님,
얼마전 헌책방(온라인)에서 우연히 눈에 띄어 골라든 책이지요.
아마도 우리는 한 시절, 같은 웃음과 눈물을 공유했던가봐요..... 카슨 맥컬러즈, 프랑소와즈 사강, 펄벅, 루이제 린저...... 그러니까 우린 분명 같은 거리에서 어깨를 부딪히거나 시월의 어느 날 어둑한 주점에서 비슷하게 취해 있거나 했을걸요!
 

 

<막달레나 시스터즈 The Magdalene Sisters (2002)>

  피터 말랜 감독

  제라르딘 맥이완, 앤-마리 듀프, 노라-제인 눈


 

 

 

 

 

 

 

 

 

 

 

 

 

 

 

 

 

 

 

 

 

 

 

"감옥이 공장이나 학교, 병영, 병원을 닮았고, 다시 이 모든 기관들이 감옥과 닮았다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일까?"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그렇게 묻고 있다.

분리와 감금, 처벌을 통해서 '나쁜 사람'을 '보다 나은 사람'으로, '정상인'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고 싶어하는 심리의 밑바닥에는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악인(惡人)을, 그 악덕의 가능성을 이미 보아 버린 자의 근원적인 두려움. 그 두려움이, 그 근원적인 공포가 아직 오지 않은 '나쁜 것들', 부도덕 또는 정상적이지 않은 것의 불길한 싹을 미리 잘라내도록 부추긴다. 햇빛도  들지 않는 높은 담장 안에 가둠으로써, 매섭게 매질함으로써, 바깥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굳게 닫아둠으로써. 그렇게 나쁜 싹은 애초에 밟아 버려야 한다는 믿음이 정작 그들을 서로 속이고 가두고 병들게 한다. 그들은 수치와 모욕으로 버무려진 공기 속에서 숨을 쉬며 시들어 간다. 그 믿음이야말로 나쁜 병의 원인이란 걸 모르는 채로.


1964년 아일랜드의 시골 마을, 세 명의 여성이 교회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막달레나 수녀원으로 보내진다. 그곳에서 그들은 자신의 죄를 참회할 것을 강요  당한다. 그들의 죄는 이렇다. 마가렛은 가족의 결혼식날 사촌에게 강간당한 사실을 발설했다. 로즈는 결혼하지 않은 채 아기를 낳았다. 고아원에서 자란 버나뎃은 남다른 미모가 동네 남자애들의 눈길을 끌었다. [인상적인 대목: 남자애들을 자극한다는 이유로 원장에게 야단맞은 버나뎃. 고아원 동생들이 그에게 묻는다. "예쁜 게 죄야?""아니, 예쁜 게 죄는 아니야. 예쁜 척 하는 게 죄지."]
마가렛과 로즈와 버나뎃, 그들 셋 말고도 '막달레나 수녀원의 자매들'은 모두 평생 동안 참회해야 할 원죄를 갖고 있다. '평균치'를 넘어서거나 못 미친다는 것, 너무 예쁘거나 못생겼다는 것, 너무 똑똑하거나 멍청하다는 것, 본능적 욕구에 약한 남자라는 종족의 불안한 욕망을 충동질했다는 것, 타락했거나 타락할 소지가 있다는 것, 한마디로 사회적 약자라는 것, 여자라는 것...... 이 모든 게 거기 있는 '막달레나'들의 원죄이다. 
그들은 '막달레나 세탁소'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그 수녀원에서 하루 종일 더럽혀진 침구와 옷가지들을 빨래한다. '더럽혀진 여자들'이 평생 해야 하는 참회의 과제로 주어진 '세탁'의 의미와 상징은 참담하고 눈물겹다. 그들에게 부과된 세탁은 지상의 방식으로 행해지는 영혼의 세척인 것이다. 최소한의 휴식 뒤에 끝없이 주어지는 빨래를 통해 그들의 절망은 나날이 견고해져 가고, 그들의 희망은 낡은 시트처럼 닳아 간다.


수녀들은 때로 무료함을 잊기 위해 '자매들'의 옷을 벗기고 그들의 맨몸을 놓고 품평회를 벌이기도 한다. 누구의 젖가슴이 가장 큰지, 누구의 음모가 가장 무성한지 우열을 가르며 키득거리는 그네들의 표정 뒤로 인간에 대한 깊은 악의와 광기가 힐끗 엿보인다.  

갇혀 있음과 희망 없음에 길들여진 이들은 어느 날 기적처럼 열린 문을 보고도 선뜻 그 문을 활짝 열고 나서지 못한다. 자유로움은 서서히 시들어 버린 그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크고 밝은 '지나침'인 것...... 열려진 문 밖으로 살짝 나가 보았다가 순순히 제 발로 담장 안으로 되돌아와 조용히 문을 닫는 막달레나 자매를 보는 우리의 마음 역시 그 순간 아득하게 닫혀 버린다. 희망의 암전.   


 

 

 

 

 

믿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막달레나 수녀원은 1996년에 와서야 문을 닫았다고 한다. 가톨릭 교회의 불만과 반발 속에서 2002년 베니스 영화제 대상을 받은 이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 크레딧에는 수많은 이름들이 배경 화면으로 등장한다. 3만 명의 이름들. 오랜 세월 그곳을 거쳐간 3만 명의 자매들....... 이제 막달레나 수녀원은 문을 닫았지만, 여전히 세상에는 '공장이나 학교, 병영, 병원을 닮은' 감옥들이 존재하고 있다. 적절한 강압과 폭력이, 감금과 처벌이 세상을 건전하게 유지시켜 준다고 믿고 싶어하는 '감옥의 수녀들'이 남아 있는 한, 이 영화의 정직한 고발과 분노는 계속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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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0-06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 영화 대단하네요.
꼭 보고 싶어요.
그리고 님......뭐하는 분이세요?

hanicare 2004-10-06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을 열어줘도 못 나간다. 인간 내부의 깊은 악의와 광기. 인간이란 종족을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정나미떨어집니다.슬프고 잔혹한 코메디.때로 너무 가볍고 때론 너무 무겁고. 중용은 그 여름 겨울에 끼인 아주 짧은 봄가을같군요. 또 횡설수설입니다.

내가없는 이 안 2004-10-06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를 보고 나선 또다른 할 말들이 생길 것 같군요.
미셸푸코의 말을 괜히 언급하신 게 아니군요.

urblue 2004-10-06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봐야겠네요.

에레혼 2004-10-06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이 영화, 기교나 기술을 쓰지 않는 정직함, 곧바로 내지르는 창법과도 같은 데서 오는 깊은 맛이 있지요.
그리고 님.... 저는 그냥 집에 있는 사람입니다.[이 질문과 연결되는 페이퍼를 하나 써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하니케어님, 인간 종족에 대해서 알게 되면 될수록 정나미가 떨어지면서도, 또 완전히 체념하거나 덮어 버릴 수는 없는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또 아직 다 열지 못한 문을 향해 걸어갑니다.

이 안님, 또다른 말을 들려주세요, 님의 따뜻하고도 예리한 마음의 말들을 듣고 싶어요.

유아블루님, 언제나 간명하고 담백하군요. 구해서 한번 보시기를!



선인장 2004-10-06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의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이리도 무서운 것이어서, 문만 열면 나갈 수 있는 공간에서도 우리는 꼼짝을 못하곤 하지요. 그저 닫혀 있을 뿐, 잠겨있는 문이 아닌데도, 문고리 한번 돌려볼 생각을 하지 못할 때가 너무 많아요. 잠겨 있겠지, 포기하는 것이 문을 열고 나가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처럼 느껴지다니, 정작 두려운 건, 바로 이런 감정이겠지요... 근데 이런 영화는 어떻게 보지요? 개봉 안 한 거 같은데...

에레혼 2004-10-06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DVD로 봤어요, 추석 연휴 때 동네 비디오 샵에 갔다가 제목에 이끌려서 골라왔는데....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나중에 찾아보니까 씨네큐브에서 무슨 유럽 영화 주간인가 그런 주제로 상영했더군요.... 가까운 비디오 샵에서 찾아 보세요.

숨은아이 2004-10-09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잊지 않도록 퍼가서 간직하렵니다.

에레혼 2004-10-09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아이님, 이 글을 가져가시는 것보다 영화를 한번 보시는 게 더 나을 텐데.... 어쨌든 인상 깊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오늘 구름이 환상적이었다.

운전을 하다가 앞 유리창 가득히 들어오는 구름들 때문에 '환장하겠다'는 말의 뜻이 무언지 몸의 세포들이 저 먼저 깨닫고 만다.

아, 이러다 사고 나고 말지...... 정신을 부여잡아야 했다.

그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이렇게..... 허공을 날 수 있다면.....

잘사는 것과 잘 꿈꾸는 것이 삶의 두 날개라고 말한 것은 바슐라르였던가.

잘 꿈꿀 줄 아는 이만이 잘살 수 있고, 잘사는 이만이 잘 꿈꿀 수 있다.

 

 

 

 

 

 

 

 

 

 

 

 

 

 

Across the univer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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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04-10-06 0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닭털천사 마리온같기도 하고, 저녁놀이 의인화되어 나타난 것도 같고. 저 곡도 맞춤입니다.라일락 와인님의 세계는 숨은 보석상자군요. 로드맥퀸의 목소리로 듣던 저 곡도 좋았단 기억. 가을이니 첼로소리가 깔리는 그의 노래 ' you ' 도 들어보고 싶네요.

2004-10-06 06: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가없는 이 안 2004-10-06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유리창 가득히 들어오는 구름이었다니, 눈앞에 그려집니다. 허공을 나는 거, 저도 언젠간 해보고 싶은 종목입니다. ^^ 번지점프를 하다, 를 보면서 딱딱한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다 위로 떨어져봐야겠단 뜬금없는 결심 비슷한 것도 해봤는데... ^^ 그리고 빨간머리 휘날리며 그네도 타고 싶어졌어요.

에레혼 2004-10-06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니케어님, 그래요, 로드 맥퀸의 목소리는 이즈음 바람 빛깔과 가장 잘 어울릴 듯싶군요. 제 보물상자(!) 속에 그의 음성이 들어있나 한번 뒤적거려 봐야겠네요

귓속말로 웃음 남겨 주신 님,
이 안님, 잠시나마 같이 허공을 시원하게 날아 보는 기분 음미해 보셨기를!
 

 



 

 

 

 

 

 

 

 

 

 

 

 

 

 

 

가을 햇살이 짧다. 노루 꼬리처럼 짧다, 라는 말을 떠올린다. 어느새...... 그 짧은 햇살의 끝무렵에 Y와 풀밭 공원 앞 나무의자에 걸터앉아 차를 마신다. 편의점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 타 온 종이컵 커피. 커피는 금세 미지근해지고 들큰했다. 바람이 커피보다 더 진하고 감미로웠다. 이번 추석은 예년보다 유독 덥지 않았어? 그러게 말이야. 더운 기운이 가시자마자 바람이 이렇게 선득해지다니. 가을이 점점 짧아져 가는 모양이야. 좋은 것들은 왜 그리 빠르게 사라져 가는 걸까.


가을 햇살이 이쁘다고, 이 바람이 아깝다고 느끼는 건 내가 나이 들었음을 고스란히 비쳐주는 서글픈 거울이다. 햇살 좋은 날 길가에 나와 꾸벅꾸벅 졸거나 초점 잃은 눈으로 우두커니 앉아 있는 노인들의 심경을 알 것 같다. 그들은 빠르게 사라져 가는 것들을 아까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생한 시간들, 이 좋은 햇빛, 살아 있다는 것, 한번 가면 그뿐 되돌이킬 수 없이 흘러가 버리는 것들, 그것들을 향한 몽롱한 상실감.


빠르게 해가 저물어 간다. 그러는 사이 아이들은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소리내 웃거나 장난을 친다. 어디선가 개 한 마리 어슬렁거리며 나타나 나무 밑둥에 코를 대고 킁킁거린다. 보기 좋게 그을리고 마른 근육을 지닌 사내 하나가 강변을 따라 달린다. 종이컵 안에 몇 모금 남아 있던 커피는 진작에 식어 버렸다. 또 하루가, 한 줌의 가을 햇살이 흘러가 버렸다.

 

슈베르트 - 첼로와 아르페지오네를 위한 소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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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물고기 2004-10-05 0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일락님도 늦게 주무시는군요. 글에서 언뜻 밟힌 Y라는 이니셜 때문에 엉거주춤 나무의자에 앉아 느리게 퍼지는 햇살을 즐기는 상상을 합니다. 바람도 좋고 풀밭 주위의 사람들 풍경도 보기에 좋군요. 편히 주무세요, 부디.

에레혼 2004-10-05 0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부디..... 그대도.......

hanicare 2004-10-05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숲속을 한참 걸어갔지요. 그 끝에 철로 엮은 레이스같은 거대한 아르데코풍의 대문을 지나 물살이 급한 개울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다리는 좁은 외나무다리. 나는 비틀거리다가 미끄러져 버렸는데 누군가 손을 내밀어 주었습니다. 그 얼굴을 보려던 순간 꿈을 깼어요. 어릴 때 꾼 꿈인데 그 색조가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바로 저 사진의 색감이었습니다.

에레혼 2004-10-05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오래된 꿈속의 그 숲길을 제가 거닐었더랬지요
바로 그 나무 곁을요......

2004-10-06 06: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레혼 2004-10-06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이렇게만 살면 또 지루해할지 몰라요, 착하고 좋은 것들로만 이루어진 세상은 그 '완벽함'으로 우리를 숨막히게 할지도...... 아주 잠깐씩 마주치는 이런 순간들이 맑은 공기의 소중함을 느끼게 하지요,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도......
근데, 왜 오늘은 귀엣말로만 얘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