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달레나 시스터즈 The Magdalene Sisters (2002)>
피터 말랜 감독

"감옥이 공장이나 학교, 병영, 병원을 닮았고, 다시 이 모든 기관들이 감옥과 닮았다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일까?"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그렇게 묻고 있다.
분리와 감금, 처벌을 통해서 '나쁜 사람'을 '보다 나은 사람'으로, '정상인'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고 싶어하는 심리의 밑바닥에는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악인(惡人)을, 그 악덕의 가능성을 이미 보아 버린 자의 근원적인 두려움. 그 두려움이, 그 근원적인 공포가 아직 오지 않은 '나쁜 것들', 부도덕 또는 정상적이지 않은 것의 불길한 싹을 미리 잘라내도록 부추긴다. 햇빛도 들지 않는 높은 담장 안에 가둠으로써, 매섭게 매질함으로써, 바깥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굳게 닫아둠으로써. 그렇게 나쁜 싹은 애초에 밟아 버려야 한다는 믿음이 정작 그들을 서로 속이고 가두고 병들게 한다. 그들은 수치와 모욕으로 버무려진 공기 속에서 숨을 쉬며 시들어 간다. 그 믿음이야말로 나쁜 병의 원인이란 걸 모르는 채로.

1964년 아일랜드의 시골 마을, 세 명의 여성이 교회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막달레나 수녀원으로 보내진다. 그곳에서 그들은 자신의 죄를 참회할 것을 강요 당한다. 그들의 죄는 이렇다. 마가렛은 가족의 결혼식날 사촌에게 강간당한 사실을 발설했다. 로즈는 결혼하지 않은 채 아기를 낳았다. 고아원에서 자란 버나뎃은 남다른 미모가 동네 남자애들의 눈길을 끌었다. [인상적인 대목: 남자애들을 자극한다는 이유로 원장에게 야단맞은 버나뎃. 고아원 동생들이 그에게 묻는다. "예쁜 게 죄야?""아니, 예쁜 게 죄는 아니야. 예쁜 척 하는 게 죄지."]
마가렛과 로즈와 버나뎃, 그들 셋 말고도 '막달레나 수녀원의 자매들'은 모두 평생 동안 참회해야 할 원죄를 갖고 있다. '평균치'를 넘어서거나 못 미친다는 것, 너무 예쁘거나 못생겼다는 것, 너무 똑똑하거나 멍청하다는 것, 본능적 욕구에 약한 남자라는 종족의 불안한 욕망을 충동질했다는 것, 타락했거나 타락할 소지가 있다는 것, 한마디로 사회적 약자라는 것, 여자라는 것...... 이 모든 게 거기 있는 '막달레나'들의 원죄이다.
그들은 '막달레나 세탁소'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그 수녀원에서 하루 종일 더럽혀진 침구와 옷가지들을 빨래한다. '더럽혀진 여자들'이 평생 해야 하는 참회의 과제로 주어진 '세탁'의 의미와 상징은 참담하고 눈물겹다. 그들에게 부과된 세탁은 지상의 방식으로 행해지는 영혼의 세척인 것이다. 최소한의 휴식 뒤에 끝없이 주어지는 빨래를 통해 그들의 절망은 나날이 견고해져 가고, 그들의 희망은 낡은 시트처럼 닳아 간다.

수녀들은 때로 무료함을 잊기 위해 '자매들'의 옷을 벗기고 그들의 맨몸을 놓고 품평회를 벌이기도 한다. 누구의 젖가슴이 가장 큰지, 누구의 음모가 가장 무성한지 우열을 가르며 키득거리는 그네들의 표정 뒤로 인간에 대한 깊은 악의와 광기가 힐끗 엿보인다.
갇혀 있음과 희망 없음에 길들여진 이들은 어느 날 기적처럼 열린 문을 보고도 선뜻 그 문을 활짝 열고 나서지 못한다. 자유로움은 서서히 시들어 버린 그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크고 밝은 '지나침'인 것...... 열려진 문 밖으로 살짝 나가 보았다가 순순히 제 발로 담장 안으로 되돌아와 조용히 문을 닫는 막달레나 자매를 보는 우리의 마음 역시 그 순간 아득하게 닫혀 버린다. 희망의 암전.

믿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막달레나 수녀원은 1996년에 와서야 문을 닫았다고 한다. 가톨릭 교회의 불만과 반발 속에서 2002년 베니스 영화제 대상을 받은 이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 크레딧에는 수많은 이름들이 배경 화면으로 등장한다. 3만 명의 이름들. 오랜 세월 그곳을 거쳐간 3만 명의 자매들....... 이제 막달레나 수녀원은 문을 닫았지만, 여전히 세상에는 '공장이나 학교, 병영, 병원을 닮은' 감옥들이 존재하고 있다. 적절한 강압과 폭력이, 감금과 처벌이 세상을 건전하게 유지시켜 준다고 믿고 싶어하는 '감옥의 수녀들'이 남아 있는 한, 이 영화의 정직한 고발과 분노는 계속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