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어젯밤에 창고를 정리했다.
그 안에 어떤 잡동사니들이 들어있는지 미처 파악되지 않는, 천장까지 빼곡이 쌓여 있는  종이 박스들을 하나하나 열어 버릴 것들을 과감하게 버리고 차곡차곡 정리했더니, 창고의 면적이 두 배로 늘어난 것 같다. 사실 집안을 반들반들 닦고 사는 살림꾼들이라면 사는 동안 이런 걸 이렇게 대책 없이 쌓아두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이사 오기 전에 다 말끔히 해결을 봤을 일이다. 나처럼 늘 마음 한 자락이 여기 아닌 어딘가에서 헤매고 다니는 사람이나 하루 날잡아 창고를 뒤집어엎을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여기까지 이 고물더미를 고스란히 끌고 오는 거지......
어쨌든 몇 년째 한번도 꺼내 쓰지 않은 모자나 가방 등속(내가 좋아하는 물건들이라서 이 장르에서 좀 욕심을 부린다...)을 과감하게 쓰레기 봉지에 넣고, 이런저런 잡동사니들을 맥락을 잡아 정리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한번 창고 속에 들어간 물건들은 끝내 창고 안에서 일생을 마치게 되겠구나, 먼지의 무게와 곰팡이 내음과 눅눅한 습기 속에서 변색하고 노쇠해 가다가 끝내 쓰레기장으로 가는 일 말고는 다시 햇빛 속에 끄집어 내지지 않은 채....... 결국 이 물건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사란 '창고에서 또 다른 창고로의 이동'이었던 셈.
물건들을 정리하다 보면 몇 년 묵은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물건의  표면 위에 잔해처럼 소복이 내려앉아 있는 뿌연 잿빛 먼지 덩어리들을  만나곤 한다. 젖은 걸레로 먼지를 닦아 내면서 내내 맴도는 말 한마디가 있었다.-- '먼지의 증식'. 그래, 사는 게 어쩌면 먼지의 증식 과정인지도 몰라.......


 

 

 

 

 

 

 

 

 

 

 

하얀 변기에 '샘'이라는 번듯한 제목을 붙여 전시회에 내놓음으로써 하나의 경계를 넘어선 화가 마르셀 뒤샹. <워홀과 친구들>이란 책에 보면 마르셀 뒤샹과 사진작가 만 레이와의 오랜 교우 관계가 잘 그려지고 있다. 1915년 뒤샹과 인연을 맺은 만 레이는 언어의 장벽에도 불구하고(뒤샹은 프랑스 출신, 만 레이는 뉴욕 출신) 서로가 동종(同種)의 정신 세계를 지니고 있음을 간파하고, 이후 둘의 우정은 오래도록 이어졌으며 다양한 프로젝트의 협력자로 함께 한다.


그 교우 관계에서 생긴 일화 중 하나. 
"뒤샹은 이따금 재미로 여장을 하고 타인 행세를 했고,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로즈 셀라비(Rose Selavy)라고 명명했는데, '셀라비'란 '그것은 인생(C'est la vie)'에서 따온 말이었다. 만 레이는 뒤샹의 여장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는데 원래의 것은 없어졌으며 재생한 것이 지금 구겐하임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다. 사진을 보면 뒤샹은 양손에 반지를 끼고 털목도리를 둘렀으며 얼굴에 화장을 했는데 실제 여자를 방불케 했다. 그의 원래의 모습은 마치 흉악범처럼 보이는데 여자로 분장했을 때는 아주 매력적인 여인처럼 보였다."-- <워홀과 친구들>(1997년, 미술문화, 김광우 지음)에서 인용



 

 

 

 

 

 

 

 

 

만 레이가 찍은 뒤샹의 여장 모습

뒤샹의 작품 세계에 대한 얘기를 하려던 건 아니었으므로 다시 돌아와서, 어젯밤 오래된 물건들의 먼지를 닦으면서 나는 문득 뒤샹의 집에 다녀온 조지아 오키프의 감상이 떠올랐던 것이다. 뒤샹은 결혼을 두 번 했지만 첫 번째 결혼 후 얼마 안 있어 이혼을 하고 육십이 넘도록 독신으로 지냈다. 혼자 사느라 그랬는지 너무 청소를 안 해 그의 집은 먼지가 수북이 쌓였던 모양이다.  뒤샹의 집에 놀러온 친구 만 레이는 그걸 사진으로 찍었다. 사진 속의 먼지들은 마치 화성의 분화구처럼 보이는데 뒤샹은 거기에 <먼지의 증식>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혼자 살아서가 아니라, 청소를 게을리 해서만도 아니라,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 자체가 '먼지의 증식'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요 며칠 내 머릿속에는 "삶은 계란"이 아니라, "삶은 먼지를 일으키고 증식시키는 과정"이라는 구절이 속엣말을 구시렁거리는 노인처럼 저 혼자 자꾸 중얼거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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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혼 2004-10-20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좀 덜어내고 가볍게, 할랑하게 사는 것, 살빼기만큼이나 어려운 것 같아요 ㅜㅜ
저도 뭐 하나 버리려면 백만 스물 한 번쯤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뒤에나 가능하답니다...

hanicare 2004-10-20 0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월이 가면 시드는 욕심도 있고, 가급적 형태가 보이는 물건은 사들이지 않으려 마음먹곤 합니다.가볍게 살고 싶어서요.나비 한 장 만큼.

에레혼 2004-10-20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니케어님, 샘실 풍경을 보고 있으면 나비의 날개같이 섬세하고 예민한 삶의 갈피가 느껴집니다.
일단 님의 몸피는 가볍고 가뿐하잖아요? 우아하고 소담한 나비처럼.......

 


 

 

 

 

 

 

 

 

 

 

비가 오려 할 때

 

문 태 준

 

비가 오려 할 때

그녀가 손등으로 눈을 꾹 눌러 닦아 울려고 할 때

바람의 살들이 청보리밭을 술렁이게 할 때

소심한 공증인처럼 굴던 까만 염소가 멀리서 이끌려 돌아올 때

절름발이 학수형님이 비료를 지고 열무밭으로 나갈 때

먼저 온 빗방울들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펼 때

 

 

아메리카 인디언의 플룻연주 Canyon People - Carlos Nakai

 

 

지금 하늘의 표정이 딱 그렇습니다

비가 내리면,

저는 먼지를 닦고 허접한 살림살이들을 정리하는 일을 밀쳐두고,

이 사각의 벽 밖으로 나가야겠습니다

밖, 으, 로...

바람 부는 들판이든 물 위에 또 물이 떨어지는 강가이든

열려 있는 길 위를 좀 걸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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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4-10-19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는 맑습니다만. 하늘빛이 좀 흐리네요, 가을 하늘이라고 하기에는.

에레혼 2004-10-19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실시간 기상 정보 교환... ㅎㅎㅎ
그렇군요, 서울과 이 남녘의 날씨는 그 먼 거리만큼이나 좀 차이가 있네요, 구름이 움직여 가는 속도 때문이겠지요
오늘 하늘빛이 좀 블루합니다, 유아블루님......
 

 

이사를 와서 처음 산 물건들은 근사하고 폼나는 것들이 아니라,
부엌과 욕실 등에 쓸 휴지통과 이 지역에 할당된 쓰레기 봉투와 빨래집게와 발닦이용 매트 같은 것들...
작고 낮고 허접스러운 것들,
지저분해지고 때묻은 생활의 흔적을 닦고 품고 쓸어 담는 것들이 삶에 가장 긴요한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이사를 왔다, 는 걸 실감하는 때는
내부 구조나 욕조와 샤워기의 모양 등이 눈에 설어서 자꾸 두리번거리게 되는 낯선 공중 목욕탕에서 처음 목욕을 할 때와
광고 스티커만 보고 자장면을 시켜 먹던 중국 음식점을, 그 이름과 맛으로만 입력돼 있던 중국 음식점을 무심코 지나던 길에서 발견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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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04-10-18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사. 한 번도 계획하고 실행한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갑자기 후다닥 이사의 신이 내린 신탁을 받아들고 추운 계절만 골라 이사를 했군요. 시,도가 바뀌는 정도를 뛰어넘어지도의 상하좌우가 완전히 바뀌는 이사.그러나 그런 게 제게는 잘 맞았습니다.도무지 계획이니 꼼꼼한 실행은 젬병이어서요.

에레혼 2004-10-18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니님, 저 방금 몰운대행에 올랐다 돌아오는 길인데^^
어제 저녁 뉴스에서 '민둥산 억새 축제'가 한 꼭지 뉴스거리더군요..... 전 그 산을 가득 메운 등산객들을 보며 자연스레 하니님을 떠올렸지요, 아, 하니님이 저 산자락 가까이에 살고 있구나 하고.....
그나저나 '이사의 신이 내린 신탁'이라구요? 언제나 우아하고 품위있는 하니님! 저의 이사는 그런 분위기와는 영 거리가 먼 '먼지 속의 생활'인데요......

urblue 2004-10-18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사를 할 때면, 인간 생활에 필요한게 왜 이리도 많은가 생각하게 되더군요.
라일락와인님의 새 이미지 멋집니다. 바다 위에 날리는 붉은 스카프!

내가없는 이 안 2004-10-18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저는 왜 이렇게도 기다리는데 이사의 신이 내려오지 않는 걸까요? ^^ 라일락와인님이 마지막에 쓰신 "이름과 맛으로만 입력돼 있던 중국 음식점을 무심코 지나던 길에서 발견했을 때" 부분이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데요, 저도 그런 기억 있거든요. 그게 이사를 해서가 아니라 회사 근처에서 어쩌다 길을 잘못 들어 뱅뱅 도는데 갑자기 간혹 점심으로 자장면을 시켜먹던 중국집 이름이 떠억하니 보이는 거였죠. 순간 그 집의 허름함의 정도를 슬쩍 지나치면서 재빠르게 훑었는데 그곳이 만약 기가 막히게 위생이 불결해보이는 곳이었다면 얼마나 실망스러웠을까, 하는 생각까지 다 들었다죠. ^^
그리고... 새로 올려놓으신 이미지, 이것도 님의 심미안을 여지없이 보여주시는군요.

에레혼 2004-10-19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 요즘 날마다, 매 순간 그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 인간이란 존재를 유지, 영위하는 데 이렇게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니...... 그렇다고 니어링 부부 같은 삶을 실천할 생각이나 자세 같은 건 애초에 없고.......

새벽별님, 이사를 심심하면 분위기 전환용쯤으로 여기는 선인장님도 계십디다만, 정말 막막하고 부담스런 力事에요,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가능하면 한 곳에 뿌리 내리고 정주하면 좋겠지만, 살아가다 보면 또 여러 가지 변수가 생기니까...... 여하튼 저도 이제 이 집에서 오래오래 살아야겠다 생각하고 있어요

이 안님, 자꾸 '이사'를 언급하며 기웃거리다 보면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어느 날 불쑥 이사의 신이 내려온다니까요, 주의 요망!
늘 전화로 배달만 시키던 중국집이나 분식집의 실체를 맞닥뜨렸을 때의 기분은  참 묘한 것이더군요, 그죠?  어딘가 낯설어 보이는 고단한 행색의 식구를 뜻하지 않게 버스 안이나 거리에서 마주쳤을 때의 기분과 좀 닮았다고 할까.....

바뀐 새 이미지, 다들 칭찬해 주시니, 제 마음에도 흡족했던 데다 백 이십 프로 업, 업!

 

 


 

 

 

 

 

 

 

 

 

 

 

이 영화의 소재가 된 곡은 수많은 사람들의 자살을 불렀다고 한다.

1936년 4월 30일, 프랑스 파리의 레이 벤츄라 오케스트라 콘서트 홀에서 '글루미 썬데이'를 연주하던 단원들이 드럼 연주자의 권총 자살을 시작으로 모두 자살하는 기이한 사건이 벌어졌다.

 

레코드로 발매된 당시 8주만에 헝가리에서 이 노래를 듣고 187명이 자살했다.

뉴욕 타임즈는 '수백명을 자살하게 한 노래'라는 헤드라인으로 기사를 실었다.

 

이 곡의 작곡자인 레조 세레스(Rizso Seress)는 연인을 잃은 아픔으로 이 곡을 작곡했는데,

1968년 겨울 고층아파트에서 투신자살했다.

 

이곡은 지금까지 빌리 할리데이, 루이 암스트롱,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지미 위더스푼,

애타 존스, 엘비스 코스텔로, 레이 찰스, 모리스 쉬발리에, 톰 존스,

셸리 만, 사라 맥라클란, 시네이드 오코너에 이르기까지 많은 가수들이 애창했다.


 

 

 

 

 

 

 

 

 

 

 

 

 

 

 

 

 

 

 

 

 

 

 

 

 

 

 

 

 

 

Sunday is gloomy, my hours are slumberless,
Dearest, the shadows I live with are numberless,
Little white flowers will never awaken you,
Not where the black coach of sorrow has taken you,
Angels have no thoughts of ever returning you,
Would they be angry if I thought of joining you?
Gloomy Sunday
Gloomy Sunday, with shadows I spend it all,
My heart and I have decided to end it all,

Soon there'll be candles and prayers that are said I know,
Let them not weep, let them know that I'm glad to go,
Death is no dream, for in death I'm caressing you,
Gloomy Sunday
Dreaming, I was only dreaming,
I awake and I find you alspeep in the deep of my heart, dear
Darling I hope that my dream never haunted you,
My heart is telling you how much I wanted you,
Gloomy sunday

 

Big Maybelle

 

Sahra Brightman

 

Marianne Faithful

 

유키 구라모토

 

Billie Holiday

 

 

Sarah Mclach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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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0-17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례로 들어봤어요.
맛이 다 다르네요.
저는 첫번째, 두번째 올려놓으신 곡이......^^
퍼갑니다.

hanicare 2004-10-18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 이미지 무척 마음에 듭니다. 자유롭게 저 하늘을 날아가도 놀라지 않을게요.미드나잇 레드라고 명명하고 싶은 깊고 붉은 색감이 좋네요.

에레혼 2004-10-18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나중에 빌리 할리데이와 사라 맥클레인 버전을 추가했는데......
정말 맛이 다 다르지요? 하기는 같은 재료에 같은 양념으로 버무린 김치 맛도 다 다른 법인데.... 로드무비 버전과 라일락와인 버전도 다르겠지요? 언제 함 비교해 볼까요?^^

하니케어님, 몸은 좀 괜찮아지셨나요?
이미지... 참 변덕스럽지요? 어제 저녁 좀 지루해서요, "자유롭게 저 하늘을 날아가도 놀라지 않을" 마법의 스카프쯤으로 기분 전환해 보려구요. '미드나잇 레드' 멋진 이름이네요! 그러니까 전 또 'Twilight Red'란 이름이 떠오르네요[말이 되는 이름인지..;;]
 

 

김정호, 이름 모를 소녀

 

 

아름다운 청춘

 

고트프리트 벤

 

갈대밭에 한 소녀가 오랫동안 누워 있었다.

소녀의 입을 무언가가 갉아먹은 듯했다.

가슴을 열었을 때 식도에는 많은 구멍이 나 있었다.

마침내 횡경막 아래 한 亭子에서

어린 쥐들의 보금자리를 찾았다.

작은 암컷 쥐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다른 쥐들은 간과 콩팥을 먹고 살고 있었고,

차가운 피를 마시고 살고 있었다.

아름다운 청춘을 여기서 보냈다.

그들의 죽음도 아름답게 그리고 빨리 왔다.

그들은 한꺼번에 물 속으로 던져졌다.

아, 그 작은 주둥이들의 찍찍거리는 소리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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