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접기 창작나라 2 - 종이접기 창작활동의 길잡이
일본종이접기협회 엮음 / 종이나라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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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샀다. 여러가지를 함께 담고 있어서 좋을 것 같았다.  

아차...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7살짜리 막내는 잘도 하는데.. 마흔이 다된 나는 어렵기만 하다. 무슨 이유일까? 참내~~~ 나도 나이가 들었나? 벌써 아이들에게 무시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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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하는 기독교 사도행전 강해설교 6
마틴 로이드 존스 지음, 정상윤 옮김 / 복있는사람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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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로이드 존스의 사도행전 강해집 5번째 책이다. 

도전하는 기독교라는 제목으로 거창하게 나왔다. 성령파요, 분리파에 가까왔던 로이드존스의 세상을 향한 외침은 무엇일까?  

첫번째 

로이드 존스는 먼저 세상이 타락했다고 전재한다. 이것은 전적으로 성경에 따른 것이다. 타락한 세상을 향하여 기독교인들이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 당연히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그들을 구원하는 전도자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다섯번째는 바로 이런 세상을 향한 복음 사역에 촛점이 맞추어져있다.  

두번째  

로이드 존스는 세상과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가장한다. 세상을 평가하는 기준은 많다. 크게..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은 부족하다는 의미이며 채우면된다고 본다. 다른 하나는 배역 또는 반역했다고 본다. 이것은 배타적 전투를 요구한다. 로이는 존스는 첫번의 것을 인정하면서도 두번째에 더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로이드 존스의 세상을 향한 도전은 바로 배역한 세상이 주님께 항복하고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전쟁이요, 대립이다.  

세번째 

로이드 존스는 이 책을 통하여 세상의 어리석음을 폭로하고 있다. 인간의 어리석음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불신앙이요, 죄의 길을 가는 것이다. 왜 인간은 어리석을 수 밖에 없는가? 이유는 하나님이 세상의 창조주요 역사의 주관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정할 때 진정한 회복과 치유는 일어난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한다.  

인간은 주님께 항복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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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팅, 명쾌함으로 승부하라
잭 트라우트 지음, 김명철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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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명쾌함은 곧 인지력이다.  

명쾌하지 않으면 소비자는 무슨 말인지 잘 알지 못한다. 잘 알지 못한다는 뜻은 광고에서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간판작업을 3년 동안 일해온 나로서는 간판을 볼 때면 아름답지만 눈에 띄지 않는 간판이 있다. 이건 꽝이다. 정말 멋진 간판이 있다. 그런데 무엇을 광고하려는 지 모호한 간판도 꽝이다. 중요한 것은 이 간판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명쾌함, 명료함이다.  

사람들은 모호한 좋은 상품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알고있는 약간 안좋은 명확한 상품을 믿고 선택한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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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 - 우파는 부도덕하고 좌파는 무능하다??
조지프 히스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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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때로는 경제학이 참 우스꽝 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여지껏 20년대의  미국 경제공황은 정답을 찾지 못했다. 또한 지금의 미국발 경제위기는 어떤가? 보이는 손이니 보이지 않는 손이니 하는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스꽝 스럽기까지하다. 그런것들이 존재하기나 한단 말인가? 분명 아담스는 '그 손'을 신의 영역으로 설정해 놓았지만 후대 사람들은 무엇이나 있는 것처럼 떠들어 댔다. 아담스가 들으면 몹시 기분나쁠 것이다.  

경제라는 자체가 욕망의 덩어리가 아니던가? 복지라는 것도 알고보면 서로의 욕망을 배분하는 효과를 가져 오는 것임에도 서로를 위한 보이지 않는 차별이 엄연히 존재한다. 부자들은 굳이 의료보험이 필요없고-돈이 많으니, 정말 가난한 사람들은 한달에 몇만원씩 낼 돈이 없기에 의료보험에서 제외된다. 차별이 아닌가. 이건 분명히 가진자들의 놀음인 것이다. 진정한 복지가 이루어 지기위해서는 극빈자에게는 돈을 받아서는 안되고 부자들에게서 많이 뜯어 내야한다. 이것이야 말로 좌파주의 극치다.  

만약 이렇게 경제를 이끌면 어떻게 될까? 공산주의 몰락은 바로 여기서부터이다. 모든 것을 평준화(?? 멋지다 이말)시킨 것이 화근인 것이다. 나의 소유가 없으니 굳이 '내다 더' 일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치명적 오류다. 경제에서 좌파는 완전히 틀렸다. 경제학은 우파에서 논의될 일이지 좌파의 것이 아니다. 좌파는 경제학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공동체만 존재할 뿐이다. 그 공동체는 억지로 강요된 것이기에 문제이지만... 

자유방임의 경제학은 인간의 자존심을 극대화 시킨 것이다. 그러나 곧 그것은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수정 자본주의는 어떤가? 국가가 어느정도 개입해서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이것 또한 우스꽝 스럽다. 국가는 진정으로 경제를 살리고 죽이는 능력이 존재하기나 할까? 이것이 문제다.  

 

조지프 히스의 [자본주의는 부도덕하고 좌파는 무능하다]는  명언은 경제학의 근본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욕망을 따라가고 좌파는 지맘대로 경제학이니 무능하고... 정말 이 시대에 무엇이 진정한 경제학이란 말인가?  

 답은 바로 이것이다. [착하게 살자] 사기치지 말자. 속이지 말자. 양심대로 살자. 그리고 용기있게 행동하자. 욕심부리지 말자. 이게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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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 2009-06-19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은 바로 이것이다. [착하게 살자] 사기치지 말자. 속이지 말자. 양심대로 살자. 그리고 용기있게 행동하자. 욕심부리지 말자. 이게 정답이다 ------ 그렇군요 .. 간단하네요

낭만인생 2009-06-19 15:26   좋아요 0 | URL
댓글 감사합니다. 전 아직 경제학을 잘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역사적 측면에서 다만 그렇다고 말할 뿐이죠.

ks0792 2009-06-19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건 경제학의 답은 아닌 것 같군요.

낭만인생 2009-06-19 15:27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정확하네요. 저는 경제학을 잘 모릅니다. 다만 경제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인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기계적인 어떠한 이론에 불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지적능력이 현저히 미치지 못하기는 하지만, 저의 소원은 그런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경제학보다는 공동체론을 더 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엘륄을 뒤 따라 가며....


엘륄의 가장 깊이 있게 다가왔던 책은 도시의 의미이다. 그 책에서 가장 강열하게 다가왔던 주제는 도시의 의미를 통하여 나타내고자 했던, 뿌리 잃은 이들을 위한 뿌리 내림을 돕는 공동체의 역할이다. 역사 속에서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는 현대의 방랑자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려 했던 엘륄의 도전은 저주 받은 도시에서 찾아야 하는 인간의 의미는 아닐까? 하여튼 이러한 묘한 연결고리들은 나 혼자만의 푸념이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마지막 구원의 걸림돌은 정통신앙이다” 혁명적으로 다가왔던 그 짧은 문장은 가슴 깊이 사무치도록 나를 괴롭혔다. 인간의 구원은 교리나, 논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잊어버리는 망각의 헌신을 통해서이다. 그들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마25장에는 아주 이상한 비유가 나온다. 예수님께서 종말의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의인들을 향하여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 말을 들은 의인들은 깜짝 놀라서 이렇게 외친다.

37 '주님, 저희가 언제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또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 들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으며, 39 언제 주님께서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저희가 찾아가 뵈었습니까?'

예수님의 의도는 명확하다. 의인의 조건, 좀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구원의 조건은 자신이 구원 받을 만한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구원을 선포했을 때 놀라는 것이다. 그들은 철저히 자기의 희생적 삶을 잊어버리며 살아갔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 기억되는 것이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다음으로 나오는 저주받은 자들 역시 의인들과 동일한 질문을 한다. 우리가 언제 주님을 입히지 않았고, 먹이지 않았고, 찾아뵙지 않았습니까? 그들의 질문이다. 그들 역시 의인들처럼 놀라 경악하고 있다. 어떤 철학자는 그랬지, 사람들이 심판대 앞에서 놀라는 이유는 자신이 모르는 상급이 있기 때문이며, 자신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답변을 듣기 때문이라고.

칼빈주의가 자랑하는 ‘하나님의 주권사상’ 때문에 얼마나 고민했던가? 그것 때문에 수많은 이단들(?)이 죽어갔고, 바로 그것 때문에 세상에서 소유한 것들이 하나님의 선물이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되고,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 아니었던가? 내가 너무 칼빈을 오도하는 것일까? 그도 사회적 약자로 살았던 사람인데. 칼빈의 정치사상은 그야말로 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너무나 매혹적인 이론이었다. 모든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신자는 그것들을 관리하는 청지기적 소명을 받은 자들이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바르게 사용만 한다면 얼마든지 좋은 것들이다. 정말이지 이처럼 좋은 이론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저 위대한 칼빈주의 후계자인 아브라함 카이퍼의 “이 세계에 하나님의 땅이 아닌 곳은 단 한 평도 없다”는 유명한 말은 철저한 칼빈주의자인 나에게 얼마나 가슴 설레게 했던가!

그러나 엘륄을 접하면서, 그 말은 곧 나에게 수치가 되었다. 병들고 연약한 자들을 위하여 목마르고, 헐벗고, 고통당하셨던 주님의 모습은 도무지 찾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초대교회 교인들이 카타콤에서 칙칙한 모습으로 서 계시는 익명의 주님을 그리다가 얼마 후 시대가 변하여 천상의 주인이요, 우주적 주권자인 그리스도를 그리는 성화의 변천을 보는 듯하다. 천박하기 그지없던 주님이 만유의 그리스도로 그려지자 그들의 신앙은 아름답고 화려해지고, 세련되고 교양적이 되었다. 그러나 세상이 두려워하게 했던 그들의 시퍼런 신앙은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하는 권력으로 다시 태어났다.

나는 분명 엘륄파는 아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벌써 따라가고 있다. 어색한 동행이다. 십자가를 지고 저주받은 골짜기로 나아가셨던 주님의 Via dorosa를 따라 가야지. 아직도 도시 밖에서 떠돌아다니는 가인의 저주받은 백성을 찾아 가 봐야지. 영문 밖으로 나아가야지. 그리고 잊혀지고 또 잊혀져 망각의 삶을 살아 가련다. 그것은 나팔이 아닌 침묵, 그것은 거리가 아닌 골방.  

자크엘룰의 책들은 비범한 통찰력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탁월한 책은 아무래도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자유의 투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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