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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전쟁 - 종교에 미래는 있는가?
신재식 외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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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무엇인가? 경험과 관찰이 아닌가? 종교란 무엇인가? 믿음의 영역이 아닌가? 과학과 종교가 토론을 한다고.. 만도 안돼! 생각해보라. 창조의 문제를 과학으로 풀 수있다고? 너무 오만한 것이 아닌가? 어떻게 경험되지 못한 사실을 과학의 이름으로 정의할수 있단 말인가? 과학을 종교의 이름으로 정죄한다고?? 이것 또한 아이러니 아닌가? 미국에서 일어났던 원숭이 재판이 될 것이 아닌가? 과학의 종착역은 어디인가? 무엇 때문에 과학을 하는가? 과학의 종착역은 역시 철학이요, 종교이다. 진실로 과학도 자신의 의도된 사기극이라는 토마스쿤의 제안을 다시한번 생각해 보야 한다. 이 문제는 전적으로 인간이 물질에 불과한가? 아니면 영혼을 가진 존재인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없이 시작되는 무모한 시도에 불과한 것이다. 너무 극성 맞게 광고하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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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민 2009-06-30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책을 구매하고 읽어 보셨는지 궁금하네요. 다소 자극적인 책의 마케팅 전략과 제목(원제목은 "과학과 종교의 대화"였지요)은 저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전체적인 책의 내용에는 부합하지 않는 서평이라 생각됩니다. 깊게 읽어 보시면 생각할 가치가 있는 내용이 많습니다. 과학과 종교 모두 인간과 사회가 섞여 있는 것이니깐요.

낭만인생 2009-06-30 20:33   좋아요 0 | URL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문제는 책에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저자들을 모두 알지는 못하지만, 대충 알고있는 분들이고 저들의 신앙관도 어느정도 압니다. ..참고는 저는기계공학, 철학과 신학을 전공했습니다. 저도 좋은 부분이 어느정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이나 자연철학등 배타적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토론 자체가 부족합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을 뿐입니다.
 
십자가와 칼 - 위에 서는 힘, 아래에서 섬기는 힘
그레고리 보이드 지음, 신선해 옮김 / 한언출판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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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911테러 이후 급격히 좌경화되어가는 조국인 미국을 향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곳인가를 도전적으로 제시한다.  

십자가와 칼은 저자가 보려주는 참된 신앙인의 생존방식을 일러주고있다. 일찌기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했으며, 또 다른 곳에서 칼을 가진자는 칼로 망하며, 하나님의 나라에서 최고의 자리는 이 땅에서 가장 낮은 자가 앉는다고 역설적으로 말씀하셨다.  

그렇다. 하나님의 나라는 물리적 힘이나, 강제적으로 되는 곳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스스로 낮아지는 곳이요, 섬기는 곳이요, 헌신하는 곳이다. 십자가는 바로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표식이다.  

칼빈 이후 개신교 안에는 특히 네덜란드의 칼빈주의 사상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일터이며, 모든 직업은 신성한 것이라고 선언함으로 이원화된 세계관을 하나로 묶는 놀라운 작업을 단행했다. 어떤 면에서 놀라운 혁명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아주 날카로운 비수가 그 신학사상 안에 숨겨져있다는 것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타락한 이세상, 부조리와 부패가 가득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하는 오류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네덜란드의 수상이요, 3대 칼빈주의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아브라함 카이퍼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소유가 아닌 곳은 단 한평도 없다고 선언하며 이 세상의 신성화의 신학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소위 하나님 주권사상이라 불리는 이러한 신학사상의 맹점은 교회가 더이상 소외되고 연약한 자들의 피난처요, 위로자가 아니라 통치자의 입장에서 선다는 것이다. 교회가 정치에 가담하고, 경제를 주도하고, 교육계를 지배하는 것이다. 왜? 모든 곳은 다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단척결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기독교회가 그토록 혐호해왔던 세상에 대한 이해가 완벽하게 전복되어 이제는 멋진 천국으로 화한 것이다. 교회는 더이상 섬김의 단체가 아니다. 지배하고, 물리적으로 강제하고, 요구하고, 착취할 수있는 가능성을 무한히 갖게 되었다. 십자가가 아니라 칼을 잡은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대 기독교의 어리석음을 폭로하면서 진정으로 다시 교회가 십자가로 돌아가야 할 것을 도전한다. 만약 교회가 칼을 쥐게 되면 사람을 죽이고 억압하게 되지만, 십자가는 죄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십자가로 돌아가자. 그 높은 고딕건축물을 버리고 낮고 천한 광야의 배회하는 청년으로 돌아가자. 교회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렸다. 더 이상 멈출수가 없다. 지금 당장 십자가로 돌아가야 한다. 바로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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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hen55 2022-01-10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좌경화? 우경화 아닌가요?;
 
예언자적 상상력 - 구약연구시리즈 24
W.브루지만 지음, 김쾌상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1981년 11월
품절


오늘 우리들의 의식은 허위의식과 언어와 논리의 우상적 체계에 의해 물들어있다.-11쪽

이와같은 문화적응 현상을 빚어낸 내적인 원인은 우리가 신상의 전승을 버림으로써 우리의 주체성을 상실한 때문이다. 우리의 소비문화는 역사에 거슬러 조직화된 것이다. 기억을 얕잡아보고 희망을 우습게 여기는 것은 모든 것을 현재-그것이 코 앞의 현재이거나 영원한 현재이거나-에 붙박아 두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는 한, 모든 형태의 신앙상의 권위란 빛을 잃고, 우리의 신앙생활이나 목회라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12쪽

모세의 대항문화란 결핍된 세계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모든 군왕들이 항상 인식했듯이 이와 같은 의식에 대항 할 수 있는 단하나의 길은 포만이다. 포만한 상황에서 자유와 정의의 혁명을 지속시킨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44쪽

이스라엘 예언자의 특징적인 방식은 시와 서정이다. 모든 것을 실현 가능케 하는 이 왕권의식이 상상력을 위축시킨다. 따라서 전체 주의적 체제는 예외 없이 예술가를 두려워한다.-64쪽

따지고 보면 지배적인 현실에 도전하고 그와 맞서는 마지막 남겨진 길은 시적인 상상력이다. 지배적 현실은 어쩔 수 없이 산문적이다.-65쪽

이렇듯 현재의 질서의 지나친 권리주장은 희망없음을 전제로 한다. 실현된 종말론의 이 음험한 형태는 인간들로 하여 희망 없이 살 것을 요구한다.-94쪽

이 아픔을 느끼는 인간이 무감각해져 버린 예루살렘 한복판에 자리잡는다. 그리고 오로지 이 아픔만이 마침내 무감각 상태에 침투할 수 있다.-142쪽

예수가 여기서 선언한 희망은 무겁고 힘들다. 이 희망은 왕권의식에서 나온 값싸고 십자가 없는 희망과는 날카로운 대조를 이룬다. 이미 부요하고 배부르고 지금 웃어대는 사람들에게 희망은 안이하고 옅은 것이지만, 부를 거부당하고 배부름에서 차단되고 도대체 웃을 사연이 없는 사람들에게 희망은 힘든 것이다. 이러한 예언자적 동력화의 신기함은 그것이 바로 역사 없는 무인격들에겍 전해진다는 점에 있다. -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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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로 다룰 문제는 교회사에 관련된 부분이다. 사실 두번째 성경해석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시작도 못했지만,, 전부 다를 수는 없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교리 속에 갇히 메시야 예수 - 24쪽..[ 알다시피 오늘 대개의 사람들에게 예수는 갈릴래아에서 온 메시아도 유다에서 온 메시아도 아닌 '교리 속에서 온 메시아'다. ]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그 연원은 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325년 최초의 기독교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여기서도 라틴어를 쓰고있다. 무엇때문일까?. 영어로는 콘스탄틴이다)는 니케아에 있는 제 별장에 세계의 주요한 주교들을 모아놓고 회유와 협박으로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본질'이라는 결정을 내리게한다...이내 예수가 하느님의 지위를 얻으면 자신의 지위도 함께 격상된다는 점을 간파했다. 교리의 통일을 통해 자신의 통치력을 한껏 강화할 수 있다는 것도...그리고 그 결정이 오늘 우리가 알고있는 기독교 교리의 뼈대가 되었다] 

정말 놀라운 식견이 아닐 수 없다. 김규항에 의하면 지금의 예수는 후대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가짜 예수인 셈이다. 처음에 예수는단지 좋은 사람에 불과했는데 그를 신의 아들로 만들면 도움이 되기 때문에 콘스탄틴이 억지로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도무지 교회사를 배우고 이 것을 주장하는 것인지. 모르고 한 것인지 알수가 없다. 알고 했다면 참으로 의도적 거짓으로 만든 것이고 모르고 했다면 무모한 주장에 불과한 것이다. 난 그가 어떻게 이 이야기를 끄집여 들여는지 알지 못하지만 황당하는 말 밖에는 할말이 없다.  

이것이 진정으로 그가 순수한 마음으로 성경을 보는 것일까? 그가 주장한 대로 마가복음이 가장 처음 쓰여진 책이라면 왜 그곳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표기되어 있으며, 가장 덜 종교적이라는 마가복음에 강력한 복음이 들어가 있단 말인가?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되심은 300년 뒤에 생긴 것이 아니고 예수 당신에 이미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마가복음은 학자들에 의하면 AD 1세기 중반쯤으며, 후에 기록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1세기 후반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된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 전에 알고있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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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향씨의 예수전에 대한 문제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역시 그의 성경해석에 관한 것이다.  

 그는 머리말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런 형식이 예수에 관한 '김규항의 견해'를 전달하는 데 효율적이지만, '예수의 견해'를 전달하는 데는 좋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12쪽)고 말한다. 그는 이 책이 자신의 견해가 아닌 예수의 견해를 전달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제부터 그의 예수의 견해를 한번 분석하고 그것이 과연 옳은가를 진단해 보자.  

 먼저 마가복음에 관하여  

이 책은 마가복음을 주 텍스트로 삼아 서술되었다. 역시 12쪽에서 "이 책은 바로 마르코복음을 읽기 위한 책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왜 마가복음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네 개의 복음서,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쓰이고 그만큼 종교적 첨가도 적"기 때문이다.(12쪽) 

 

[마르코복음]이는 용어에 있어서-마르코는 영어식으로하면  [Mark]이고 한국 개신교는 [마가]로 번역했다. 그럼 마르코는 어디서 왔는가? 천주교식 용어이다. 이 말은 라틴어를 그대로 번역한 글로 마르코라고 읽혀진다. 그가 채택한 성경도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성경이 아니라 천주교에서만 사용되는 천주교전용 성경이다. 그는 일러두기에서 이것을 밝히고 있는데, 분도출판사에서 출간된 [200주년 신약성서]이다. 이건 분명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이다. 천주교는 2차 바티칸 회의를 통해 방향자체를 완전히 틀어버렸다. 보수꼴통에서(그곳에 내가 좋아하는 한스큉이있다) 완전한 개방과 진보로.. 그러나 여전히 라틴어는 살아있다. 라틴어로 미사를 들여야 한다는 보수주의 말이다.  

또 다른 마가복음은.. 

그는 분명 마르코 복음을 선택한 이유가 덜 종교적이고, 가장 먼저 기록되었기 때문이란다. 이것이 사실일까? 당연히 거짓이다. 마가복음은 덜 종교적이지 않다. 누구나 알듯이 마가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사상을 돋보이기 위해 기록된 가장 강력한 복음이다. 마가복음 자체가 복음이라는 뜻이다. 마가복음 1:1을 보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한글개정개역판 / 김규항은 끊임없이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에 대한 부정으로 나아가며, 오로지 그의 인간됨에 촛점을 맞추려 하지만 틀렸다. 성경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단정하고 시작한다. 그런데도 애써 이것을 부인하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예수를 읽기를 원하다면서  자신 마음대로 해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또하나.. 마가복음이 과연 가장 처음 기록되었는가?  

답은 모른다는 것이다. 마가복음이 가장 처음 기록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이론이요 설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의 상당한 부분들이 마가복음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비평학의 원리에 따라 원문서는 가장 간단하고 명료하다는 것에서 [마가복음우선설]을 지지하는 것이다. 이런식이다. 비평학에 의하면,, 초기의 문서는 아주 간단한 몇개의 문장으로 되었있었는데 후대 사람들이 그것을 설명하거나 첨가해서 더 부풀려진다는 식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오래전의 일이지만 이러한 비평학의 중요한 원리는 어느정도 권위를 잃었다. 다르게 생각해보자. 초기의 작품이 책10권의 분량이다. 후대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싶지만 많은 분량에 눌려 읽지 못하자. 어떤 사람이 요약본을 내어 놓는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수도없이 많다. 만약 이것이 믿기지 않는다면 폴터 사이트에서 마가복음 우선설을 검색해보라.

이러한 간단한 예만으로 이 책이 얼마나 얼토당토 않는 전제를 가지고 시작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마가복음 우선설에 대하여 알고 싶다면 다음 사이트로가서 송영목교수의 공관복음의 유래라는 글을 읽어보라.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7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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