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알지만 저자를 모른다. 이럴 수도 있겠지. 워낙 많은 책을 읽으니... 책 내용은 기억하는데 저자를 모를 수 있다. 오늘에야 저자의 이름을 외웠고, 기억해 두었다. 그리고 더 읽고 싶은 저자의 책들을 모았다.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들도 적지 않다. 몇 권을 원서를 구입해 읽을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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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라, 네가 누구인지를 - 세례를 받는 모든 이에게 비아 에세이
윌리엄 윌리몬 지음, 정다운 옮김 / 비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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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례는 끝이 아니라 함께 살아감의 시작이다.


매력적 필체의 저자는 누구일까? 몇 페이지를 읽지 않았는데 얼마되지 않은 문장으로 설레게 한 저자가 궁금했다. 탁월한 안목과 매력적인 필체로 독자들을 사로잡는 저자를 만나는 것은 독자로서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윌리엄 윌리몬이 그렇다. 아마 이 책을 읽게 된다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저자가 낯설어 검색을 해보니 스탠리 하우어워스와 공저하여 <십계명><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 <성령>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 등을 저술했을 뿐 아니라 <예배가 목회다> <목회자> 등의 수많은 저술을 남긴 저자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2주 전에 구입하고 아직 읽지 못하고 있는 <십계명>의 저자라니. 한 번도 저자를 경험해 본적이 없기에 저자의 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 년에 150권 이상을 읽어내는 잡식성이 강한 다독가인 필자의 눈에 한 번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다. 너무나 늦게 알게 되어 아쉬운 저자이다. 다른 책을 읽어보지 않아 저자에 대한 공평한 평가는 내리기 힘들겠지만 그동안 출간한 책들과 본 책의 내용을 감안한다면 저자는 목회적 글쓰기의 대가다. 실용적일뿐 아니라 성경에 대한 깊은 조예와 더불어 삶과 사람에 대한 애정이 넘친다.

 

“1996년 베일러 대학교에서 선정한 영어권에서 가장 탁월한 설교자 12명 중 한 명이며 유진 피터슨, 헨리 나우웬과 더불어 미국 개신교 목회자들이 가장 많이 읽는 그리스도교 저술가 중 한 사람으로 꼽는다.”

 

필자는 출판사의 저자소개에 놀랍지만 기꺼이 동의한다. 단 한 권으로 나머지 책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세례에 대한 신학적 통찰로 가득 차있다. 원제는 ‘Remember Who You Are’인데 한글 제목은 이것을 직역했다. 심지어 문장을 만들지 않고 도치형으로 그대로 두었다. 이것은 매우 잘한 것이다. 부제로 세례를 받는 모든 이에게라고 작게 적어 두었으니 책의 의도와 목적도 충분히 드러내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단지 제목으로 책을 평가하기엔 아쉬운 것이 한 둘이 아니다. 이제 이 책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세례에 대한 10가지 주제의 묵상으로 정의할 수 있다. 책의 제목을 마지막 10장의 제목이기도 하다. 먼저 10장부터 시작해 보자. 세례는 세례를 받는 당사자에게 네가 누구인지 기억하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사람을 성욕을 쫓는 존재’(200)로 정의한다. 학교는 당신은 지적 존재’(201)라고 답한다. 상품을 팔아야 하는 이들은 당신이 가진 돈이 곧 당신입니다’(201)라고 답할 것이다. 사람에 대한 수많은 정의는 수단화된 정의이며, 왜곡된 정의이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을 절박하며 긴요하다. 교회는 우리에게 세례를 주고 공동체로 받아들인다. 그럼 그것으로 완벽하게 정의될 것일까? 저자는 이렇게 들려준다.

 

교회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우리가 누구인지, 어떻게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세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세례는 세례 받은 아이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주며 그 정체성이 선물’, 주님께서 교회 공동체를 통해 은총으로 주신 선물이라고 이야기합니다.”(205)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렇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은 선물이다. 우리는 나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의해 인식되어지고, 나또한 그들과 관계를 맺음으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익혀’(205) 간다. 세례는 우리에게 새 이름을 부여하고, 새 존재로서의 생명을 갖게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그리스도이 지체가 된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라 그동안 망각해왔던 인간의 기억을 되찾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자신의 사람들을 되찾는 사건이다.

 

세례는 사건이다. 죽음의 사건이며, 다시 태어남의 사건이다. 땅에서 물에서 솟아오르듯 생명은 물에서 솟아오른다. 세례는 죽음인 동시에 탄생이다. 저자는 세례를 시작하면서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죽음의 악취가 나는 곳에서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교육을 받고 시험을 통과해 세례를 받았던 초대교회로 이끈다. 초대교회에서 교회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입교할 수 있는 금지된 성역이었다. 특히 1세기 후반이 되면서 로마의 핍박으로 인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지로 끌려 나갔다. 그런데도 세례 받는 이들은 점점 불어났고, 기꺼이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리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초대교회가 생각했던 세례의 특징은 이렇다.

 

1. 회심하지 않고, 배우지 않고, 삶의 방향을 전면적으로 수정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다고 교회는 확신했습니다.

2. 세례를 그 자체로 회심과 성장이라는 긴 과정의 정점이자 지속적인 변화와 성장이라는 또 다른 긴 과정의 시작이었습니다.

3. 세례를 교회에 가입하는 것을 뜻했습니다. 초대교회는 분명하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가 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라는 몸을 이루는 지체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교회 없이 그리스도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4. 세례란 머리로, 몸으로 가슴으로 주님이 통치하는 나라에 참여하는 활동, 주님의 낯설지만 영광스러운 일에 참여하는 활동입니다.

 

세례는 과연 자신의 생명과 맞바꿀만한 가치를 지녔을까? 저자는 그렇다!’라고 말한다. 세상은 가치 없는 자로 낙인찍는다. 그러나 우리는 세례 받음으로 왕족이 된다. 세례가 우리의 손이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표를 받고 믿음을 고백할 때 교회가 주는 선물이다. 즉 하나님의 일 또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49)이다. 세례는 결코 인간의 일이 아니다. 계몽중의와 경건주의는 많은 장점이 있음에도 큰 실수를 하나 하는데 그것은 세례 행위와 의미를 순전히 인간 편에서만 다룬다’(51)는 것이다. 실로 세례는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세례는 우리의 주의 보혈로 씻는 상징적 행위이다. 보혈은 죽음이며, 세례도 죽음이다. 보혈을 통해 하얗게 되고, 세례를 통해 죄가 씻겨 진다.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자각(自覺)이 일어나야 한다. 첫 번째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 두 번째는 주님이 필요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C.S.루이스는 인간이 비참한 죄인인 이유를 스스로 그러한 상태를 자각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 다는 데’(93) 있다고 했다. 세례식은 너는 죽어 마땅하다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리고 그것을 알기에 자신을 물속 곧 죽음에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물속에서 나올 때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세례를 받을 때 주님의 거룩한 형상은 재발견되고, 회복되며, 새롭게 됩니다. 세례를 받은 다음 물 밖으로 나올 때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105)

 

세례는 마무리가 아니라 시작이다. 배움의 기나긴 과정을 시작하는 것이며, 새롭게 거듭났기 때문에 계속하여 죄를 씻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연속이다. 세례는 씨앗의 발화와 같다. 저자는 이것을 새로운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 풀이한다. 교만은 본질적으로 소외이며 관계의 죽음이다. 회개는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시작점이다. 저자는 통찰력 있는 문장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은 일련의 고결한 생각이나 고매한 제안, 올바르고 선한 행동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윤리 체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아래 거룩한 성도들과 함께 살아가고 일치를 이루려 애쓰는 삶의 방식’(112)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독립적 존재인 동시에 관계적 존재이다. 이제 혼자서 뭔가를 이룩하려 하지 않는다. ‘함께한다. 그가 교회이며, 교회의 일부이며, 교회 안에 있기 때문이다.

 

세례에 대해 이렇게 매력적으로 서술한 작가를 본 적이 없다. 세례에 대해 풍성한 신학적의 의의를 끌어낸 저자들은 많다. 하지만 단순하면서도 세례의 본질을 꿰뚫는 저자는 여태껏 없었다. 지금에야 윌리엄 윌리몬을 만나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 예배와 성찬이 한창인 이때, 다시 세례를 묵상하며 우리가 누구인지 알아가려는 몸부림을 다시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 책은 세례를 집례하는 목회자나, 세례를 받는 이에게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기억을 되찾으려는 이들에게 기꺼이 선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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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옳다고 볼 수는 없지만 지금 필요한 책들이 보여 일단 모아 놓기로 한다. 코로나 의학 경제 민주적 바이러스 전쟁 정치 등등이 엮이고 묶인다. 이게 세상인가 보다. 


미국에 계시는 분은 한결같이 이번에 자본주의에 함몰된 미국 의료계의 치부가 드러났다고 말한다. 민영화된 의료체계는 코로나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고, 엄청난 의료비와 혐오로 인해 숨어 다녀야할 판이란다. 지금까지 의료보험 내는 것을 '낭비'라고 여겼던 많은 사람들의 입이 다물어 졌다. 최근에 코로나19로 인해 사스나 메르스도 코로나 바이러스였음이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 백신이 없는 것일까? 이유는 단 하나.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자본주의는 좋은 듯하나 위험한 도박인 셈이다. 이유야 어떻든 대한민국은 잘 버티고 있다. 앞으로 더 잘 하리라 생각한다. 
















전염병의 세계사라... 문화사도 보인다. 다함에서 출간된 기독교 서적도 보인다. <전염병과 마주한 기독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지금까지 기독교의 역사 중 한 축은 의료사업이었는데 이상하게 최근에 보이는 교회들은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신천지도 신천지 나름이지만 대부분의 많은 교회들은 전염병 방치 대책을 '핍박'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 이건 뭔가 이상한 해석이다.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루터나 칼뱅도 그러지는 않았다. 미국처럼 한국교회도 퇴보할 것인지... 어쨌든 읽을 책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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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보다 나중이 좋은 책


책을 급하게 읽는다. 수백쪽은 몇 시간 만에 읽어 낸다. 속독가는 아니지만 굉장히 빠르게 읽는 편이다. 잘 몰랐지만 최근들어 빠르게 읽으면 '맛'을 못 느낄 때가 많다는 것을 느낀다. 

도널드 매킴의 <칼빈과 함께하는 매일 기도>를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는 짜깁기 느낌이 강했다. 왜냐하면 칼빈의 서적들에서 발췌하거나 설명한 것들은 다시 풀어 쓴 책이기 때문이다. 의도는 알지만 입에 착 달라 붙지 않아 겉돌았다. 번역을 잘못 한 것 같지 않으니 아마도 원저자가 글을 깊이 없이 쓴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오늘 다시 서평을 기고하기 위해 읽었다. 지난 주와는 전혀 다른 맛이다. 아주 맛깔스럽다. 문장들에게서 은은한 향도 나고 달콤새콤한 맛도 난다. 

아하.. 이런 맛이구나. 

급하게 음식을 먹으며 맛을 잘 느끼지 못하듯, 책도 마찬가지다. 급하게 읽으면 맛을 느끼지 못한다. 뭐.. 그렇다고 책을 천천히 읽겠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다는 것이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말했든 글이란 너무 빨리 읽지도 말고, 너무 천천히 읽지도 말아야 한다. 왜 둘 다 맛을 못 느끼기 때문이다. 적당한 독서의 속도가 필요한 시기다. 참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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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기장이 신간 분노와 스트레스


총선이 마무리되었다. 이번처럼 극명하게 동서가 갈리기는 오랫만인 듯 싶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코로나가 많은 변화를 주었다는 점이다. 토기장에서 '분노'에 대한 책을 두 권 이어 출간했다. 물론 <악한 분노 선한 분노>는 작년(2019년) 6월에 출간했으니 10달을 넘긴 구간이다. 하지만 그 맥은 동일하다. 분노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옳다고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분노는 긍정적 측면에서 정의이고, 부정적 측면에서 절제 못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두 사이에서 늘 긴장하며 살아간다. 


분노는 존경 받지 못함에 대한 인간의 본서잉 아니던가. 왜곡되게 받아 들인다면 문제가 될 것이고, 선하다면 옳은 분노이다. 투표도 분노가 아닌가. 정의에 분노와 지키고자하는 분노... 우리는 그것을 정치라고 부른다. 


시간은 흐르고 또 다른 투표가 기다린다. 그 때는 어떤 상황이 연출될까? 그 때는 어떤 분노를 표출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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