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교회일까? -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교회가 교회에게 해야 할 질문
김기승 지음 / 샘솟는기쁨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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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교회에 대한 고민이 많다. 특히 코로나 이후 한국교회는 정체성을 잃은 것처럼 갈팡질팡하고 있다. 버티는 것도 힘들다. 겨울을 맞이하기 위해 나무들은 몸의 일부를 땅으로 떨군다. 코로나는 교회의 덜 중요해 보이는 부교역자들을 잘라냈다. 열악한 환경과 미미한 사례를 받던 부교역자들은 교회에서 추방되어 길바닥에 주저앉을 판이다. 뜨거웠던 온라인 교회 논쟁도, 온라인 성찬도 생존 앞에서는 무의미해졌다. 그러한 논쟁은 어쩌면 처음부터 배부른 사역자들의 와각지쟁(蝸角之爭)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생각해도 교회가 뭔지 잘 모르겠다.



또 한 분의 교회 이야기를 듣는다. 책 제목이 꽤나 마음에 와 닿는다. ‘왜 교회일까?’ 이전부터 물어왔지만 코로나로 인해 더욱 깊어진 나의 물음이다. 교회가 무엇인가를 너머, 왜 교회 이어야만 하는가를 묻는다. 이 책은 교회에 대한 신학적 변증이나 논쟁이 아니다. 개척교회를 시작하면서 경험하고 느끼고 고민한 내용들을 소박하게 적어 내려간 경험의 고백이다. 사실, 프롤로그에서부터 가슴 졸였다. 냄새 풀풀 나는 노숙자가 교회를 찾아와 함께 예배드린다는 것은 고통이다. 그 냄새.... 말로 형언하기 힘든 그 냄새를 맡으면 한 시간 동안 자리에 동석한다는 것은 모험이자 극도의 인내가 필요하다. 수년 전에 외진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지역 주민들에게 식사를 마련해 대접했다. 말이 주민인지 절반이 노숙자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특히 그 중의 몇 분은 냄새가 지독해 함께 참석한 사람들도 조차 코를 막을 정도였다. 앞에서 어르신들에게 재미나 이야기도 해주고 식사도 대접했지만 뛰쳐나가고 싶었다. 진심으로. 그런데 하필 그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뛰쳐나가고 싶었다’고. 


코로나 시대, 교회는 혐오(嫌惡)의 대상의 되었다. 코로나가 교회에서 집단감염되어 뉴스에 나오기 때문이다. 어떤 기사 댓글을 보니 ‘교회 차만 지나가도 꼴 보기 싫다’고 적었다. 과연 우리는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귀인의 종들과 같다. 귀인은 먼 길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은 열 므나를 주며 장사를 하라고 했다. 그런데 그 지역의 사람들은 그 귀인을 싫어했다. 맞습니다. 교회의 지금이 딱 그렇다. 사람들이 교회를 싫어한다. 그래도 장사를 해야 한다. 이러한 시기에 사람들은 묻는다.

“굳이 교회에 소속되어야 하는가?”

“하나님을 믿으며 돼지 왜 굳이 꼴 보기 싫은 사람들과 함께 교회에 다녀야 하는가?”

세상 사람들을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하나님만 믿으면 됐지 왜 교회까지 다녀요?’라고 묻는다. 저자는 이러한 질문에 명확한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굳이 답을 할 필요도 없죠. 저자는 그저 왜 교회 이어야 하는 가를 삶으로 답한다.


몸으로 써내려간 저자의 일상은 때로는 우울하고, 때로는 감격스럽고, 때로는 두렵다. 개척교회의 형편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필자가 잘 아는 목사님도 결국 수년 동안 지속한 개척교회를 닫았다. 더 이상 공간에서 모일 수 없는 시대가 되었고, 교회 해체될 위기에 놓여 있다. 우리는 여기 다시 ‘교회가 무엇인가?’를 물을 수밖에 없다. 저자가 교회를 개척하고 일구어간 여정은 눈물겹다. 아내와 함께 8,000장의 전도지는 나눈 이야기는 더 이상 묻지 않아도 상상이 된다. 딱 한 마디 ‘전도지를 붙이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62쪽)로 충분하다.


멈추지 않았다. 방법을 찾고 또 찾았다. 맘카페 활동을 통해 모임을 만들었던 경험, 도서관을 통해 지역주민의 어려움을 공유했던 시간들이 쌓여갔다. 저자는 전도가 좀더 명민(明敏)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전할 지역이 어떤 곳인지 질문해야 한다. 이 고민 없이 복음을 전하러 나가면 커피콩만 가지고 거리로 나가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91쪽)


경험을 통한 저자의 답은 ‘상황화’(35쪽)이다. 이 상황화는 복음의 변질이 아니라 지역에 맞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교회와 고린도교회에 다르게 복음을 전하듯. 어쩌면 교회는 지금까지 획일적인 방법으로 전도하고, 예배하고, 신앙생활을 지도해 왔다. 어느 지역을 가도 예배 시간도 같고, 설교 방식, 심지어 찬양도 거의 비슷하다. 교회가 프렌차이즈도 아닌데 말이다. 


몸으로 쓰고 삶으로 적었다. 사연 없는 인생 없듯, 아프지 않는 개척교회 없다. 말미에서 ‘혈관종’ 제거 수술을 했다는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부디 건강하시길. 다시 ‘왜 교회인가’를 물었다. 저자는 명료한 답을 주거나 교조적(敎條的) 해석도 붙이지 않는다. 그냥 살아간다. 책을 모두 읽고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알 수 없는 울림이 있다. ‘지금은 글을 써야 하는 시간’(211쪽)이란 표현이 아름다운 동시에 아픈 이유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허물어진 예루살렘의 성전을 보며 예레미야는 글을 썼다. 우리는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을 붙였고,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읽고 있다. 아픈 고백이다. 문장과 행간 사이에 적신 눈물 자국을 읽을 수 있다면 이 책은 충분히 가치 있을 것이다.


밑줄 친 문장


교회도 온도가 있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실 때 그곳은 진동하였고, 뜨거웠다. 24


우리가 느끼는 교회의 온도를 예수님도 느끼고, 마음 아파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회피하지 않고 뼈를 깎는 고통이 있더라도 온도를 느껴야 한다. 예수님처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하다. 36


불신자와 접촉하지 않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거룩일까? 거룩은 불신자와 접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다. 81


우리는 교회보다 예수를 먼저 전해야 한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따라가면 그들이 모여 건강한 교회를 이룬다. 예수 없이 모인 교회는 시기의 차이일 뿐 형편없이 무너진다. 119


한국도 쇼핑몰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 복음을 전하는 곳이 아니라 관광지로 추락한다. 왜 우리는 신실한 농부처럼 살아가기보다 육체의 모양, 진열품처럼 외관에만 집착하고 있을까? 128


교회는 성령을 통해 세상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공동체이다. 교회를 통해 복음을 듣고 사람들은 하나님과 무너졌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 교회는 회복된 주님의 사랑을 다시 세상에 흘려보내는 공동체이다. 151


한국도 쇼핑몰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 복음을 전하는 곳이 아니라 관광지로 추락한다. 왜 우리는 신실한 농부처럼 살아가기보다 육체의 모양, 진열품처럼 외관에만 집착하고 있을까? - P128

교회는 성령을 통해 세상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공동체이다. 교회를 통해 복음을 듣고 사람들은 하나님과 무너졌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 교회는 회복된 주님의 사랑을 다시 세상에 흘려보내는 공동체이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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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틈에 서서 - 땅과 하늘 그 사이에서 분투하는 이들을 위해
박윤만 지음 / 죠이북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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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틀 뒤에 이사한다. 삼년 동안 이사를 무려 4번이나 했다. 작년에만 이사를 두 번이나 했으니 이사란 말만 나와도 입에서 단내가 난다. 평생 단 한 번도 이사하지 않는 사람들이 수두록 한데 이제껏 수십 번을 이사했으니 삶아가는 것이 곧 이사라 할 만큼 나는 이사와 인연이 깊다. 이젠 제발 이사하지 않고 한 곳에 적어도 십 년은 살아보고 싶다.


박윤만 교수의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에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데 ‘그 틈에 서서’라는 제목을 듣는 순간 에세이인가 싶어 멈칫했다. 그런데 ‘땅과 하늘 그 사이에서 분투하는 이들을 위해’라는 표지 문구를 읽는 순간 나올 것이 나왔다는 기대감으로 충만해졌다. 그렇다! 그리스도인은 분투하는 사람들이다. ‘이미’와 ‘아직’의 ‘그 틈’에서 말이다. 채영삼 교수는 이 책을 이렇게 소개한다.


“예수님을 믿고 떠도는 삶, 상속자가 받아야 할 고난을 기쁘게, 함께 감당하는 삶, 만물을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시키는 구체적 실천의 삶, 새 창조와 출산까지, 폭넓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주체들이 풍성하게 담겨있다.”


그 어떤 문장이나 설명으로도 이 보다 더 명징하게 이 책을 소개하지 못할 것이다. 필자의 떠돌이 삶이 그리스도인의 나그네 삶으로 규정될 수는 없지만 필연적 맥락으로 연관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 땅은 안착할 수 있는 곳이 아니며, 안착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본질적으로 나그네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1부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며 살았던 구약의 인물들을 탐색한다. 2부에서는 신약에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를 탐색해 나간다. 마지막 3부에서는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에 대해 묻는다. 구약을 중심으로 몇 곳을 주의하여 보자.


족장들은 하나님께 특별히 사용되었던 인물들이다.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계시 영역’(18쪽)이었다. 족장들의 이름으로 불려지기를 기뻐하셨던 하나님께서 어떻게 족장들을 사용하셨는지 잘 설명한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개척자로 살아간다는 것’(20쪽)이다. 하나님은 ‘이삭의 수동성’(26쪽)을 사용하셔서 계획을 이루신다. 야곱을 통해서는 세상의 가치관에 역행하는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의 전통을 세’(33쪽)워 나가신다. 그 전통은 ‘하나님의 자유’이다.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부분은 섬뜩할 정도다. 아합의 아내이며 시돈 왕의 딸이었던 이세벨은 거짓을 이용하여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는다. 이세벨에 동조했던 거짓 증인들과 장로와 귀족들은 ‘농부 나봇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이세벨의 권력이 무서워 진리를 거짓으로 바꾼다.’(65쪽) 엘리야는 거짓에 굴복한 이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칼날 앞에 세운다. 


“힘없는 한 농부의 죽음으로 온 이스라엘 사회 전체의 민낯이 드러났다. 농부의 죽음 위에는 불량배가 있었고, 불량배 뒤에는 장로와 귀족들이 있었고, 장로와 귀족 뒤에는 이세벨이 있었으며, 이세벨 뒤에는 우상이 있다. 우상은 혼자 일하지 않는다. 탐심에 끌려 다니는 아합, 진리가 아닌 권력을 숭배하는 이세벨, 권력 추종자 장로와 귀족, 그리고 아무 생각 없는 불량배를 이용하여 온 이스라엘 사람을 부패시키고 있다.”(66쪽)


아직 구약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읽는 내내 심장 박동수가 평균을 상회한다. 


박윤만 교수의 책은 세 번째다. 한 번은 킹덤북스에서 출간된 『마가복음』 주해서이고, 두 번째 책은 박사학위 논문을 다듬어 출간한 『신약성경 언어의 의사소통 기술』(그리심)이다. 워낙 존경하고 좋아하는 분이기에 거침없이 읽기는 했지만 묵직함과 경직된 언어로 일관하고 있어서 부담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책은 사뭇 다르다. 주해가 다운 묵직함을 잃지 않으면서 일상을 관통하는 예리한 해석과 부드러운 수필의 가벼움이 공존한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긴 여정을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온 느낌이다. 그런데 지루하지 않고 설렌다. 언어학을 전공한 저자의 내공일까? 인용하고 싶어 밑줄 그은 곳이 많아 책이 지저분해지는 것은 감내해야 할 것이다.



힘없는 한 농부의 죽음으로 온 이스라엘 사회 전체의 민낯이 드러났다. 농부의 죽음 위에는 불량배가 있었고, 불량배 뒤에는 장로와 귀족들이 있었고, 장로와 귀족 뒤에는 이세벨이 있었으며, 이세벨 뒤에는 우상이 있다. 우상은 혼자 일하지 않는다. 탐심에 끌려 다니는 아합, 진리가 아닌 권력을 숭배하는 이세벨, 권력 추종자 장로와 귀족, 그리고 아무 생각 없는 불량배를 이용하여 온 이스라엘 사람을 부패시키고 있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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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와 만나다 - 탄생, 갈등, 성장의 역사 비아 만나다 시리즈
로널드 헨델 지음, 박영희 옮김 / 비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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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만큼이나 다이나믹한 성경이 또 있을까? 신화와 역사의 경계에서 사람들을 혼돈의 도가니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고고학이 발달된 지금에도 여전히 창세기 5장의 족보는 난제 가운데 하나이다. 수도 없이 흩어져 있는 고대의 홍수 이야기는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문제는 영원히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창세기는 역사시대 이전의 신화시대 속에서 살아갔던 사람들을 엿볼 수 있는 상상력을 제공한다. 저자는 히브리 성서학자이자 유대인으로서 창세기의 특징들을 세밀하게 그려준다. 300쪽이 겨우 넘어가는 책임에도 이전의 어떤 책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창세기를 그려낸다. 서문에 기록한 ‘오류의 쓸모’에 대한 저자의 조언은 이 책의 유용성과 해석상의 쾌락을 ‘환상’(21쪽)으로 조명한다.


저자는 능수능란하게 고대 신화와 창세기의 이야기를 비교 분석한다. 보수신학의 맹점(盲點)에서 벗어나기를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황당해 보이는 이야기들은 창세기를 이해하는 넓은 이해를 도와주는 매개체이다. 창세기는 고대 신화와 구별되어 독립적으로 전승된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지역에서 살았고, 그들의 문화와 전설을 공유했다. 모세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창세기의 이야기는 고대 바벨론 신화와 그 이전의 수메르 신화를 공유하는 동시에 차별화된 관점을 견지(堅持)한다.


“바빌로니아 신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더 넓은 창조 전승군에 속해있다. 그러나 창세기는 오랜 전승을 단순히 반복하지는 않았다. 이 이야기는 오래된 생각과 이야기를 취하되 초점을 바꾸어 고유한 현실 이해를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해냈다.”(51쪽)


필자가 잘못 읽지 않았다면 이 책은 ‘상징’을 창세기를 읽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2장과 3장, 그리고 5장에서 상징을 통해 창세기를 읽어낸다. 6장에서는 이러한 상징에 대항하는 과학적 관점에서 읽으려는 현대의 근본주의자들의 오류를 더듬어낸다. 예를들어 성경이 과학과 일치한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교황청의 반대를 일으켰고 결국 그의 주장은 폐기된다. 하지만 역사는 그가 옳았다고 증명한다. 그렇다면 과연 천체를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교황청의 주장을 틀린 것일까? 저자는 이렇게 답한다.


“과학과 성서가 다른 말을 하고 있다는 점, 바로 이것에 문제였다.”(208쪽)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의 과오는 ‘성서에 대한 상징적 해석이 자연에 대한 상징적 해석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깨닫지 못’(212쪽)한 점이다. 신대륙의 발견은 가나안 중심의 역사관에 ‘새로운 도전’(227쪽)을 일으켰다. 그 이후 성서학자들은 민족 우월주의에 함몰되어 제국주의를 옹호한다. 아프리카는 함의 자손들이 살고, 아시아인들은 야벳의 자손들이라는 극단적 이론이 그들의 주장 가운데 하나다. 이러한 극단적 민족우월주의는 제국주의의 이론적 기반을 만들었고, 제노사이드의 기원이 되었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최근들이 일고 있는 오래된 지구와 젊은 지구에 대한 논쟁은 성경을 지나치게 과학적으로 해석하려는 과학자들의 억지이다. 저자는 이러한 논쟁에 휘둘리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250쪽)으로 해석한다.


확실히 성경해석은 유머가 필요하다. 경직된 고집은 성경이 의도한 본질과 상관없는 열심으로 이끈다. 이 한 권에 창세기에 대한 내외부적 관점과 역사적 해석을 담았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창세기를 깊이 읽고자 하는 이들에게 기꺼이 추천한다.


창세기는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루어진 인류 문화, 이륜 전기의 일보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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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놀랍고도 기이한 세계


제가 가장 사랑하는 성경은 요한복음과 시편입니다. 그리고 창세기입니다. 어떤 이유를 대라해도 잘 모르겠고, 그냥 좋습니다. 한 권더 말하면 마태복음이 유난히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 중에서도 창세기는 오래오래 읽고 또 읽고 묵상합니다. 창세기는 토라중의 토라이고, 신화와 역사의 기묘한 만남의 경계에 있기 때문에 논쟁 또한 적지 않습니다. 지난 2년 동안 수메르 신화와 문명, 그 이후의 역사들을 살펴보면서 창세기의 내용과 비교도하고, 창세기가 갖는 매력도 살폈습니다. 결국 수메르 신화와 공유하는 부분도 적지 않지만 신화와 세상을 해석하는 역사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을 명확히 이해했습니다. 


이번에 비아에서 창세기와 관련된 책이 또 한 권 출간되었습니다. 비아출판사의 책들을 무조건 좋아하는 타입이라 이번 책도 호기심 잔뜩 가지고 읽었습니다. 역시나 실망시키지 않네요. 

성공회 출판사이기에 저의 신앙관과 이질감도 있지만 그렇기에 성경을 새롭게 보도록 이끌어 주기도 합니다. 저는 성향상 미국에서 건너온 장로교 전통의 교리적 성경 해석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한때 미친듯이 하지니 워필드이 하면서 풀로와 웨민의 교수들의 책들을 게걸스럽게 읽어 나갔습니다. 물론 그들의 생각이 틀렸거나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그런 식이 해석은 삶은 핍절하게 하고 인생을 피곤하게 합니다. 어느 순간 읽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끊지는 않았죠. 지금도 종종 웨인 그루뎀을 비롯한 이후의 학자들의 책도 읽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주류에서는 밀려나 있습니다.


이번에 출간된 <창세기와 만나다>는 한 마디로 매력적인 책입니다. 문서설을 지지하지만 이전의 문서설이 가진 불필요한 논쟁을 제거하고 문화과 상징, 역사 속에서 창세기가 어떻게 해석되고, 흘러왔는가를 살피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미국 남북전쟁의 창세기 해석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내용이라 긴장할 만큼 주의해서 읽었습니다. 


저자가 누군가 싶어 찾아보니 확실히 멋진 분입니다. 제가 좋아할 수 밖에 없는 분입니다.


히브리 성서학자이며, 유대교학자네요. 역시 글이 뭔가 다르다 했네요. 하버드에서 민속학과 신화를 연구했고 고대근동에 대한 학식이 풍분한 분입니다. 이 분의 책을 더 많이 읽고 싶은데 이 책 외에는 아직 번역된 책이 없습니다. 또 번역하겠죠. 기대해 봅시다. 좋은 책 만나서 행복한 하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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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영 목사의 신간이다. 참 오랫만에 함께 마주했다. 시간이 참 빠르다 벌써 4년이 지난다니. 목포에서 뷰가 가장 좋다는 곳에 자리하고 오랜 시간을 보냈다. 책이 참 맘에 든다. 야고보서 강해서인데 굉장히 두껍다. 주해적 성향이 가장 강해서 이기에 분량이 많이 늘어 났다고 한다. 박대영 목사는 언어의 마술사다. 성실한 삶이 언어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2018년에 디도서도 출간했다. 갑자기 읽고 싶어진다. 요즘 유난히 마음이 허한데 말씀으로 채워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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