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너희들 중 누구든 죄없는자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라고 했다. 하지만 예수가 인터넷으로 이러한 댓글을 남겼다면 ‘웃기시네’, ‘너는 뭐 잘나서’, ‘너 걔 친구지?’라는 말과 함께 예수를 향해서 돌을 던지는 이가 많을 것이다.
지난 세밑, 인터넷은 뜨거웠다. 지하철 반말녀를 찾기 위해서였다. 어르신에게 반말을 한 그이를 찾기 위해 누리꾼들은 분주했다. 덕분에 신상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고 공공의 또다른 ‘무개념녀’가 탄생했다. 그이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전후사정이 있었는지는 고려되지 않았다. 그저 무개념녀일 뿐이었다.
인터넷이 없었다면 주윗 사람 몇몇이 혀를 끌끌차고선 끝날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가 손가락질 하는 일이 됐다. 다들 저이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줘야 겠다며 고압적인 비판을 가한다. 가벼운 손가락질로 그이의 가벼운 언사를 질타한다.
문제는 척박한 현실이다. 일상에선 상사의 자잘한 폭력 앞에서 침묵하거나 지인끼리 뒷담화를 통해 분노를 배설할 뿐이다. 이렇게 업압된 현실이 인터넷이란 접점을 만나면 분노로 용솟음 친다. 욕먹을 상대가 받을 상처는 안중에 없다. 다들 현실에서 구현되지 못한 정의를 온라인에서라도 실현하기 위해 애쓸 뿐이다.
이러한 인터넷상에서만 구현하려는 소시민적 ‘정의’의 문제는 무책임성과 비연관성에 기인한다. 인터넷이야 자유롭게 말이 오가는 곳이고 무개념녀는 나와 전혀 알지 못하는 대상이니 책임 없는 ‘정당한’ 비판만 넘치는 것이다.
이들의 말은 과잉처벌이라는 데서도 문제가 있다. 법은 특정 범죄에 대해 사회적으로 합의된 양형 기준에 따라 범죄자를 처벌한다. 인터넷 상에서 가해지는 인민재판은 이러한 양형 기준 없이 네티즌의 넷심에 따라 달라진다. 단순 훈계로 끝날 일이 사형에 준하는 사회적 압박으로도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다.
오프라인과 단절된 온라인은 이렇게 무섭다. 사람들은 세상이 점점 편해졌다고 하지만 그만큼 살기 무서워졌는 지도 모른다. 휴대폰이란 기기에 내장된 수천만대의 CCTV가 돌아다니는 요즘, 개인은 말 조심에 신경써야 하고 네티즌들은 또다른 공격대상을 찾아 두리번 거린다.
미셸푸코가 말한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원형감옥인 ‘파놉티콘’은 이제 현실이다. 조지오웰이 말한 ‘빅브러더’는 어쩌면 네티즌 전체를 지칭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들 각자가 파놉티콘에 갇혀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과 부지불식 간에 빅브러더의 악행에 힘을 실어 주고 있다는 현실이 무엇보다 가장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