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소녀의 기도 - 피아노 소품집
낙소스(NAXOS)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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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랑 누나는 강변에 살았다. 남강변이었을 테다. 촉석루가 지근거리에 있었다. 아빠도 있었다. 하지만 엄마랑 누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다. 아빠는 돈을 벌어야 했다. 그게 아비가 자식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애정표시였다.  

 집에는 피아노가 있었다. 이모는 가끔 놀러와 피아노를 들려줬다. 소녀의 기도라 했다. 나는 기도란 말이 손을 모아 누구에게 소원을 비는 말이란 건 알았다. 이모는 어린 게 똑똑하다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들어보라 했다. 내가 비는 소원이란건 엄마가 나를 덜 때렸으면 하는 거였다. 이모는 내 소원을 아닌지 모르는지 피아노를 연주했다.  

 어디서 많이 듣던 곡 같았다. 아마 티비에서 배경음악으로 자주 틀어 준 곡이었던 듯하다. 그렇게 멍하니 다 듣고 나니 이모는 내게 피아노를 가르쳐 준다며 건반 하나하나를 눌러보랬다. 그러면서 그 건반에 이름을 가르쳐 줬다.  

 "이건 도, 이건 레, 이건 미." 

 건반에 이름이 있다는 건 그때 처음 알았다. 하지만 이내 싫증이 난 나는 피아노를 두드리다 집앞 놀이터로 갔다. 이모는 조카의 심드렁한 반응에 입이 튀어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그 때 이모가 들고 있던 피아노 악보 표지엔 누나 두명이 있었다. 그게 루느아르 그림이란걸 안 건 내가 그림 속 두 여자만한 나이가 됐을 때였다.  

 피아노 소품집이다. 어릴 때 이모가 들려 준 쉬운 곡들이 가득하다. 구성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작곡가의 의도는 몰라도 된다. 그냥 어릴 때 한번쯤 들어봤을 곡들이다. 앨범 표지에도 두명의 여인네가 있다. 르누아르 그림처럼 마냥 화려하진 않지만 정갈한 멋이 있다. 연주도 소박하다. 꾸미지 않은 맛이다. 

 가끔은 이모가 들려주던 피아노 곡이 그리울 때가 있다. 곱던 이모는 시집을 간 뒤 손이 뭉뚝해진 아줌마가 됐다. 지금 그 연주를 듣는다면, 피아노를 치는 이도 듣는 이도 세월의 무게가 더께로 앉았다지만 마음만은 슬거워질 테다. 추억을 반추해 줄 소품이 있단 것과 추억 속 사람을 만나러 갈 수 있다는 건, 참 소중한 일이다. 지금 엄마랑 누나는 강변에 살지 않는다. 더더욱 김소월의 시를 곡진히 읊고 싶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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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사티 : 피아노 작품집 (짐노페디,녹턴 외)
이엠아이(EMI)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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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릭 사티는 기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음악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짐노페디일 테다. 영화 '여친소'에도 삽입되었다 하는 데 영화를 보지 않아 어떤 느낌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에릭 사티의 작품 중 다음으로 유명한 것은 벡사시옹 일테다. 메트로놈을 기준으로 하면 14시간이 넘게 연주된다는 이 음악은 같은 멜로디를 840번 연주해야 한다. 무한 반복의 괴로움이다. 어차피 벡사시옹이란 명칭도 '고통'이란 뜻이니 그리 나쁘지 않은 불림이다. 그는 이런 곡을 왜 만들었을까? 모를 일이다. 아마 어떤 멜로디가 금찍하게도 단속적으로 머리에 울렸나 보다. 고통을 나누자는 의미였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냥 심심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허제씨가 지은 책에서 추천을 받고 산 음반이다. 허제씨는 별점 다섯개를 이 음반에 줬다. 사티 음반이 이 하나 밖에 없으니 좋고 그름이 잘 구분되지 않는다. 곡이 특이하니 차이도 잗다랄 테다. 2 for 1이니 그냥 집었다. 곡은 대충 이런 식이다. 가랑비에 옷 젖듯 잔상이 몸을 훑는다. 딱히 떠오르는 멜로디도 리듬도 없다. 그냥 흐른다. 

치콜리니 연주다. 가끔 들릴 듯 말듯한 연주가 아롱거린다. 서풍의 신 제피로스가 아무렇지 않게 뺨을 어루만지면 이렇듯 희미할 테다. 여름이 저문다. 가을이 눈을 뜨려한다. 소슬해질 마음에 사티의 선율이 얹혀진다. 마음이 가볍다. 흘러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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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8-01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벌써 여름의 저묾을 느끼시는군요..섬세한 눈이시네요^^
전 한 해, 한 해 여름이랑 친해지는 법을 배워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티를 들을 때마다 드뷔시와 다른 점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인상주의 흐름과는 조금 다른, 마치 물이 끊임없이 흐르며 가끔 몇 방울 튀는 느낌이라는 생각도 드는데요. 사티는 최근에 타로가 낸 음반이 참 좋더군요.


바밤바 2009-08-01 21:25   좋아요 0 | URL
타로의 음반을 들어본 적이 없네요. ㅎ 다음주에 태풍이 찾아오면 여름도 서럽게 사위어들 것 같습니다. 가을엔 모든 게 다 풍성했으면 하네요^^
 
[수입] 쇼팽 : 13개의 녹턴
DG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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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샀던 녹턴 음반이다. 아니 처음 샀던 클래식 음반이다. 내 돈 주고 사진 않았다. 

 고 1때 쯤이었을 거다. 아비는 가망없는 회사를 그만 두고 집에 있었다. 몇 주 쉰다고 생각했겠지만 쉬는 날은 나날이 늘었다. 아비의 속은 나날이 핍진해졌으리라. 아비를 위해서라도 난 공부를 잘해야 했다. 공부는 별 어렵지 않았다. 반에서 종종 1등을 하곤 했다. 하지만 아비의 얼굴은 여전히 그늘졌다. 그러던 하루는 영영사전을 사달라며 아비와 함께 시내로 나섰다. 

 사려했던 영영사전은 다 팔린 후였다. 콜린스코빌드 영영사전이었는데 '영어 세계'라는 잡지에서 추천해 준 유일한 사전이었기에 그것만이 필요했다. 잠시 우울했을 아들의 마음을 헤아린 아비는 다른게 필요 없냐며 손을 잡았다. 그때도 난 음반 수집병이 있었다. 친구 아버지 차를 얻어타며 아낀 차비와 군것질을 하지 않으며 모은 돈으로 매주 시디 하나씩 사곤 했다. 아비를 붙잡고선 자주 가던 음반 할인점을 향했다. 

 가는 길에 뭘 살지 고민 했다. 몇 달 전 아비의 친구 집에서 그 집 아들이 듣던 클래식이 떠올랐다. 그 집 아들내미와 나는 동기간 마냥 친했다. 나보다 두 살 많은 그 형을 난 어릴 때 부터 따랐다. 그 때 같이 들었던 음반을 사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곡 제목이 야상곡이었단 것만 떠올랐다. 연주자나 레이블 따윈 알게 아니었다.  

 가게에 가서 야상곡을 달라 그랬다. 가게 주인은 어린 놈이 이런 걸 듣냐며 내심 기특해 하는 눈치였다. 장삿속에 그랬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비는 이런 음악도 듣는 아들이 자랑스러웠나 보다. 아비답지 않게 아들 자랑을 막 했더랬다. 우리 아들이 감성이 예민해서 그렇다며. 나 또한 맘 고생 심했을 아비의 얼굴에 웃음 하나 띄울 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속이 슬거웠다. 

 그 후로 이 야상곡 음반을 계속 들었다. 연주자가 다니엘 바렌보임인지도 모르고 녹턴 전곡 연주가 아닌 발췌 음반인지도 모른 채. 피아노를 전공하던 한 친구는 내가 녹턴을 좋아한다고 하자 어떤 곡을 좋아하냐 물은 적이 있었다. 나는 그냥 녹턴을 좋아한다 했다. 13트랙으로 나뉘어진 음반 전체가 내겐 그냥 녹턴이었다. 자잘이 분화된 녹턴은 내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 유명한 작품번호 9-2번으로 시작되는 바렌보임의 음반이 내겐 녹턴 그 자체였다.  

 내게 녹턴을 사주셨던 아비는 이제 이 앨범 자켓 표지마냥 저 먼곳으로 갔다. 소주를 좋아하더니 붉은 저녁 놀에 취해 가뭇없이 떠나버렸다. 그래서 녹턴은 가끔 내게 슬픔을 준다. 몇몇 날은 야상곡(夜想曲)이 부상곡(父想曲)이 되기에 그렇다. 특히 바렌보임의 연주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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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6-09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집니다!!

바밤바 2009-06-10 00:03   좋아요 0 | URL
^^;;

무해한모리군 2009-06-09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버지를 쇼팽곡조와 함께 떠올릴 수 있다는 것, 작지만 그것도 행복 아니겠습니까?
제게 아버지는 부엌냄새와 칼질 소리로 기억됩니다. 도각도각..
저는 경상도 꼴촌놈인데 우리집에서 유일하게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그게 인연이 되어서 우리집 유일의 클래식을 듣는 인간도 되었지요..
제가 피아노를 치면 저희 어머니는 그렇게 좋아하십니다. 돈들인 표난다고 ㅎㅎㅎ

바밤바 2009-06-10 00:04   좋아요 0 | URL
저도 경상도 출신인데.. 헤헤
휘모리님 마지막 글에서 김애란 단편 소설의 향기가 나네요.. 그 소설 제목이 피아노였던거 같은데..
 
밤과 낮 - Night and Day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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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새벽에 일어나 티비를 트니 '밤과 낮'을 막 시작하려 했다. 자세를 고치고 티비에 집중한다. 영화의 얼개는 익히 알고 있었다. 다만 나른할지도 모르는 전개 방식이 걱정됐다. 하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쉽게 와닿고 적잖이 유쾌했다. 다만 티비 버젼이라 그런지 쿠르베의 '세계의 근원'이란 작품이 뿌옇게 처리된 것과 욕설이 중간중간 끊기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쿠르베의 '세계의 근원'이란 작품은 4년 전쯤 오르세에서 친구와 보았다. 이 민망한 그림은 뭐냐며 터부시하면서도 그 치밀한 묘사에 계속 눈이 갔다. 4년 전에도 미술 관련 지식이 풍부했다 자부했던 나는 쿠르베가 누군지 잘 몰랐다. 무식을 감추기 위해 수사학만 넘치던 시절이였던 듯하다. 쿠르베가 실존하지 않기에 천사와 악마를 그리지 않았다는 사실주의의 거장인걸 감안해도 이 '버자이너 모놀로그'같은 치밀한 그림은 썩 아름답지 않다. 영화에선 이 작품을 두고 자그마한 충돌이 일어난다. 김영호와 같이 갔던 여자가 '인류의 기원'이라며 작품을 칭하자 김영호가 그녀의 잘못을 수정해주는 과정에서 홍상수식의 묘한 비틀기가 나타난다. 그러면서도 그 그림의 음탕함에 불편을 느끼는 김영호의 머뭇거림과 예술은 신성하다는 여인의 의뭉스러움은 둘 사이의 역학 관계를 다시금 뒤집어 놓으며 묘한 재미를 선사한다. 

 이런 식의 비틀기는 자주 일어난다. 이선균이 등장하는 장면에선 오히려 너무도 직접적인 비틀기가 나타나 약간 불편해지기까지 한다. 영화를 계속 보면서도 여주인공이 예쁘다.. 싶으면서도 누군지 도통 모르는 정식적 해리 현상을 겪었다. 검색을 해보니 박은혜란다. 그녀가 출연한 작품을 제대로 본적이 없으니 모르는 것도 당연하다. 난 대장금도 안봤다.  

 영화를 다 보고 나자 얼마전 봤던 샘 멘더스 감독의 '레볼루셔너리 로드'가 떠올랐다. 멘더스 감독이 하나의 주제를 치밀하고 깊게 파고 드는 반면에 홍상수는 자잘한 주제를 스케치 하듯 훑고 지나기 바쁘다. 담론의 다양화는 홍상수 작품의 사생아이나 담론의 치열함은 샘 멘더스의 차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무엇보다 홍상수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의 연기를 보며 '연기를 진짜 잘한다'라는 느낌을 받기 힘들다. 특유의 즉흥 연기를 강조하는 촬영 방식 때문이다. 치열한 연기론이 확대 재생산 되기 보단 콘텍스트에 집중하며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수월하다. 레볼루셔너리 로드에 나온 디캐프리오와 윈슬렛의 연기는 격정적이며 살떨린다. 진짜 연기를 하는 듯하다. 치밀한 직조 과정 끝에 나온 튼실한 피륙이다. 드팀전에 내 놓고 팔기엔 다소 과한 정성이다. 홍상수의 가벼움은 다양한 변주로 커버가 가능하고 샘 멘더스의 무거움은 날카로운 한방으로 진정성을 확보한다.  

 말이 길었다. 영화는 감독의 것이 아닌 관객의 것이다. 다만 주도권을 관객에게 넘기지 않으려는 몇몇 감독들의 작품을 우리는 예술영화라 부르곤 한다. 홍상수는 점점 대중과 소통하는 예술영화를 만드는 듯하다. 박찬욱은 점점 대중과 괴리되며 예술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를 보인다. 언젠간 두 감독의 영화관람객 수가 역전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박찬욱의 외로이 되는 심사가 자뭇 불편하고 홍상수의 널리 이롭게 하는 심사가 꽤나 정겹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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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전쟁 잔혹사 - 학벌과 밥줄을 건 한판 승부 인사 갈마들 총서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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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은 계급 상승 욕망이 강하다. 서구의 경우 군인은 전쟁을 담당하고 농부는 농사, 성직자는 종교적 의제, 귀족은 나름의 사회적 책무를 담당하는 식으로 역사가 전개됐다. 계급에 걸맞은 사회적 역할을 부여받았기에 계급 자체가 강한 특권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은 양반이란 사회적 지위만 있으면 무위도식하며 민중을 수탈할 수 있는 시대가 있었다. 이전 시대를 돌이켜 봐도 계급이 의무 보다는 권리에 초점이 맞춰진 일종의 지대추구와 같은 수탈적 역할을 했다. 조선 후기, 사회가 혼란에 빠지면서 여기저기서 양반 행세를 한 사례가 늘어난 것을 보면 민중의 계급 상승 욕망을 읽을 수 있다.

지리학적 영향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산지가 많고 평지가 드물다. 또한 출산율이 높았던 편에다 공동체 생활을 통한 지식의 공유로 유아 사망률이 낮았다. 당연히 인구 밀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부대껴 살아온 역사는 ‘관계’라는 개념에 대한 대중의 민감성을 높였다. 또한 유교 문화의 영향으로 체면을 중시하는 풍조가 강했다. 자연히 사회적 지위에 대한 갈망이 높았을 테다. 한마디로 인간관계에서 사회적 위치를 찾고자 하는 경향이 강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은 공동체 속 다른 일원과의 비교나 자연스레 발생한 질투를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았음을 알게 한다. 최소한 이웃집 누구 보다는 잘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내재돼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 사회는 계급이 없다. 단지 자본이나 권력을 척도로 사회적 지위의 규명이 가능하다. 사농공상의 풍조가 남아있어선지 자본 보다는 권력에 대한 집착이 아직은 강한 듯하다. 이러한 권력을 얻는 가장 손쉬우면서도 합법적인 방법은 교육이다. 여기서 말하는 교육이란 자격증 몇 개와 같은 실질적 능력을 뜻하기 보다는 학벌과 같은 상징 자본에 기여하는 형태를 말한다. 자식이나 혹은 본인이 명문대에 입학하면 주위 사람의 시선부터 달라지는 게 현실이다. 현대식의 계급 상승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강준만은 학벌의 폐해로 끼리끼리 해먹는 ‘학연’문화를 든다. 소수 학교가 고위 공무원을 독식하다 시피 하고 사회적 노른자위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유가 있다는 거다. 물론 개별자의 능력 차이도 원인이다. 하지만 학연으로 이어진 배타적 상호부조의 탓도 크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강준만은 SKY라 불리는 명문대 정원을 축소를 주장한다. 정운찬이 이야기 했듯 인구 3억인 미국의 상위권 10개 사립대학이 한 해 배출하는 학생이 1만 명 남짓인 데 비해, 인구 4900만인 한국의 상위권 세 대학 신입생 수가 해마다 1만5000명에 육박한다며. 이런 ‘대중교육’으론 명문대들이 되뇌는 ‘고등교육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며. 물론 본인도 근본적 해결책이 아니란 건 안다. 오히려 근본적 해결책을 촉구하는 이들을 비판한다. 근본주의자는 비판에 비판만 계속할 뿐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며 그들 주장의 현실적 한계를 지적한다. 스카이 대학 정원을 줄이면 학연 문화의 폐해를 줄이며 다른 대학의 발전을 가져 올 거라 본다. 수능 시험을 잘 치루지 못한 아이들의 패자부활전이 가능하다며. 명문대를 나온 사람은 학벌이 제공하는 독점적 지대 때문에 자기계발에 소홀해지고 명문대를 들어가지 못한 사람은 사회적으로 패자라는 낙인이 찍혀 패배감에 제 실력 발휘를 못하는 현상도 개선된다는 주장도 곁든다.

수긍이 가는 주장이다. 명문대 독식 현상이 해결되면 사교육에 투입되는 많은 돈이 가처분 소득으로 전환되어 내수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우석훈의 주장과도 맞닿아 있다. 하지만 언론의 자성이 없이는 이러한 개선 또한 실효가 크지 않을 것이다. 정치학자 버나드 코헨이 이야기 했듯 언론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생각하라고 말하는 데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할지 모르지만, 무엇에 대해 생각하게끔 하는 데엔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의제설정 기능이다. 지방대 출신의 누군가가 대기업에 입사했다는 신문의 보도를 보자. 지방대 출신의 구직자는 이 보도를 보며 희망을 가질 것이다. 기실 이 보도가 주는 메시지는 절망에 가깝다. 가뜩이나 뉴스거리가 많은 한국 신문에 커다랗게 보도가 될 정도면 희귀 사례라는 뜻이다. 뉴스가 될 만한 이슈의 가장 큰 충분조건은 희소성이다. 일상적으로 보도 되는 명문대 관련 기사는 다른 대학 관련 기사를 압도할 정도지만 독자는 그런 것을 눈치 채기 힘들다. 명문대 기사는 희소성이 없다. 화제성과 주목성이 있을 따름이다. 신문이 명문대 얘기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래야만 할 듯하다. 신문이 설정한 의제 설정 기능에 포섭되어 이른바 언론이 만든 프레임이 갇힌 것이다.

이 문장을 보자. 20세기의 한 정치철학자는 사회가 부자들에게 유리하게 유지되는 것은 부자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일종의 ‘상식’으로 만드는 헤게모니 문화를 통해서라 말한 적이 있다. 이러한 문화헤게모니에 휘둘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에게 이로운 것이 제게도 이롭다 여기게 되고, 그래서 부자들처럼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부자들의 가치를 자연스러운 규범으로 만드는 문화헤게모니를 해체해야 좀 더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그 철학자의 생각이다. 부자들의 헤게모니란 단어에 명문대 프레임이란 단어를 바꿔 넣어도 말이 된다. 이러한 헤게모니 강화는 언론을 통해 지속된다.

진보 언론 또한 이러한 명문대 프레임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술자리에서 만났던 한겨레 김 모 기자의 말에 따르면 한겨레신문 구성원의 대다수는 명문대 출신이다. 그러다 보니 명문대 프레임을 강화하는 주요 언론의 현실에 대해선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 명문대 위주의 입시를 강요하는 학원가의 문제만 지적할 따름이다. 현실에서 부딪히는 학벌의 장벽이나 학벌 카르텔이 가져다주는 문제에 대해선 언급이 없다. ‘더 이상 개천에서 용 나지 않는다’라는 프레임으로 빈부격차와 함께 사교육 시장의 문제만 제기할 뿐이다. 학벌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나 반성의 시각은 부재한다. 그들도 학벌이 주는 후광효과의 수혜자인데다 정당한 경쟁을 통해 성취한 성취지위라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일 테다.

강준만 교수는 종종 서울대의 독과점을 비판하며 서울대의 자성을 촉구한다. 이에 대해 강준만이 서울대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를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 한마디로 열등감의 소산이라는 거다. 매우 저급한 논리다. 이런 식으로 한다면 군가산점 문제는 군대 갔다 온 남자들이 억울해서 그런 것이고 장애인 복지 확충에 대한 장애인의 요구는 비장애인에 대한 시샘 때문이다. 한마디로 발전적 논의로 나가지 못하고 어떠한 주장도 같은 논지로 반박하면 되는 편리하고도 위험한 방식이다. 이미 1인 매체로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지만 지방 대학에서 교편을 잡는 그를 보라. 언행일치하는 지식인의 표상이다. 반미주의자지만 기러기 아빠 노릇을 하며 아이를 미국에 유학 보낸 지식인과는 차원이 틀리다. 이건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거다. 이런 어쭙잖은 지식인에게 언행일치의 부재함을 비판하면 이런 말을 종종 한다.

“애들이 미국에서 공부를 하며 그 나라를 알아야 미국에 대한 비판을 하지.”

이런 개소리나 할 거면 경영학에서 이야기하는 포지셔닝 전략으로써의 좌파 지식인이란 명함도 버리라. 역겹다. 고종석이 이야기 했듯 역겹다는 말은 윤리적 판단이 아니라 미적 판단이다. 악한 사람이라기보다 못생기고 못난 사람이란 뜻이다. 추함에 대한 본능적 기피로써 나온 말이다.

강준만 같은 사람이 열 명만 더 있으면 우리나라의 품격은 아마 선진국 중 가장 밑바닥에 있는 어느 나라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국가적 순위 싸움이 아닌 그냥 강준만 교수에 대한 애정에서 하는 첨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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