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어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앨범을 빌려갔다. 때는 겨울이고 날도 시리니 라흐마니노프와 잘 어울리는 시간인 듯하다. 친구에게 곡에 대한 설명과 연주자의 특색에 대한 첨언을 해준 뒤 나또한 그의 음악이 듣고 싶어졌다. 올 들어 가장 춥다는 오늘 자정 즈음, 나는 그의 교향곡 2번을 들었다. 순서대로 듣지 않고 각별히 생각나는 3악장을 먼저 들었다. 3악장이 전해주는 풍부한 감성은 이불처럼 나를 따스히 덮어줬다.   

 

 

  

 

 

 

 

  

 이 곡은 1906년 가을과 1907년 봄 사이에 만들어졌다. 즉 겨울에 만들어진 것이다. 눈이 눈부시게 흩날릴 때 그는 따스한 선율을 만들었다. 그답다. 겨울이기에 특별히 제 몸을 웅크리고선 만들었을 테다. 제 몸과 몸의 부딪힘으로 자신을 눅이며 머릿속 선율을 오롯이 오선지에 그려 냈을 것이다. 어차피 교향곡 1번의 실패의 참담함은 피아노 협주곡 2번 덕에 적절히 보상 받은 그였다. 어느 때보다 살갑고 정겨운 겨울이었을 테다.   

 1악장은 Largo다. E단조 소나타 형식이다. 도입부는 여러 개의 동기로 구성되었으며 주요부에서는 제 1주제가 바이올린으로 제시된다. 제 2주제는 G장조로 목관과 현이 제시한다. 발전부는 제 1주제가 잉글리시 호른으로 등장하고 재현부는 2주제가 연주된 뒤, 도입부의 제 1바이올린 동기가 코다 주제로 사용된다.

 2악장은 Allegro molto다. A단조의 스케르초 형식이다. 주제는 호른으로 제시된 후 현으로 이어진다. 중간부에서는 대위법적인 선율이 진행된다.

 3악장은 Adagio다. 가장 선율이 매혹적인 부분이다. A장조이며 제 1바이올린으로 선율이 시작되며 클라리넷으로 연결된다. 이후 1악장의 제 1바이올린 동기가 나타나고 오보에로 이어지며 따스하면서 애절한 음이 미끄러지듯 울린다. 마음이 절로 가라앉는다. 참고로 3악장의 주요 선율은 김연아가 나오던 ‘위스퍼’ 광고에도 삽입됐다. 빙상 위 그녀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해주는 음악이었다. 단 3초 정도 나왔지만 그녀와 그의 음악은 그렇듯 빛났다.

 4악장은 Allegro vivace로 E장조다. 포르티시모를 시작으로 제 1주제가 이어진다. 제 2주제는 D장조로 현악기가 제시한다. 코다는 제 1주제를 중심으로 진행한다.

 고클에 있는 게시판의 설명을 참조했다. 음악을 그들만의 용어로 풀어내니 삿된 말보다 울림이 적은 듯하다. 너무 많은 말도 사치겠지만 적절히 음악을 감싸 안을 수 있는 섬세한 말이 더 나은 듯 보인다.

 라흐마니노프는 신경 쇠약을 앓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음악에는 연약함이 느껴진다. 신경 쇠약을 앓았다는 사실 때문에 연약함이 느껴지는 게 아니라 그의 음악에서 연약함을 느끼고선 그의 신경쇠약을 이해했다는 말이다. 그러한 이해는 그의 음악으로 명징해진다. 수많은 음들이 1악장에선 주로 충돌하듯 부서진다. 광폭하고 거침없다. 허나 2악장, 혹은 3악장에선 종종 그 광폭함이 부러 행했던 ‘위악(僞惡)’ 이런 걸 음으로 증명한다. 사실 나는 섬세하고 연약하니 본인을 괴롭히지 말라며 구걸하듯 애원한다. 라흐마니노프가 들려주는 멜랑콜리하며 얼음장처럼 잔약한 선율의 향연에는 이러한 자기 고백이 있다. 아름답지만 마음껏 그 아름다움에 도취할 수 없는 그 애절한 선율엔 이런 그의 뒷모습이 있다.

 슈만에겐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광기가 있었고 라흐마니노프에겐 지나치게 섬세한 감성이 있었다. 둘의 음악에서 제어할 수 없는 격정이나 분노를 느꼈다면 그건 그들의 자기고백이 성공적이란 방증이다. 물론 차이코프스키에게서도 깊은 슬픔과 자신을 구제해 달라는 애타는 외침을 들을 수 있다. 허나 그의 죽음은 동성애에 대한 세간의 시쁜 눈을 이기지 못한 자살이었다. 슈만이나 라흐마니노프와는 다르다. 무엇보다 세속적 성공을 바라며 섬세한 사람이고 싶었던 라흐마니노프였다. 제 목숨을 스스로 앗는 일 따윈 생각지 않을 만큼 생의 의지가 그득했기에 신경쇠약은 역설적으로 그를 옮아 맸다. 힘들다며 이해해달라는 고백이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엔 담겨있다.

 

 

 

 

 

 

 

 

 

 

 

 

  고흐는 그림으로 보들레르는 시로 세상과의 불화를 증명했듯 라흐마니노프는 음악으로 제 약함을 드러내고 세상과 쉽게 어우러지지 않는 제 자신을 위로했다. 그러기에 그의 음악은 겨울에 알맞다. 몸을 부비고 살갗을 데워 줄 이가 없는 외로운 영혼에겐 그 애절한 외침이 마음을 다습게 해줄 테다. 가을이 브람스의 것이라면 겨울은 라흐마니노프의 것이다. 내겐 그렇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0-01-13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은 브람스, 겨울은 라흐마니노프군요^^!! 잘 읽고 갑니다아~

바밤바 2010-01-14 20:27   좋아요 0 | URL
너무 추상화시킨 얘기이긴 한데 또 그런게 말의 맛 아니겠습니까~^^
낼 눈 온다는데 눈 길 조심하세요~ㅎ

무해한모리군 2010-01-14 0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 좋아합니다.
반고흐의 영혼의 편지는 그닥 재미가 없어 겨우겨우 읽었지만 ㅋㄷㅋㄷ

바밤바 2010-01-14 20:28   좋아요 0 | URL
음.. 누난 좋아할거 같았어~ ㅎ
글고 환쟁이의 글은 재미가 없을 듯~ ㅎㅎ

Mephistopheles 2010-01-14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제대로 들은 적은 없지만....
라흐마니노프하면 기억나는 건 영화 "샤인"에서 데이빗 할프갓을 미치게 만드는데 톡톡한 역활을 해줬던 건 기억하고 있어요..^^

바밤바 2010-01-14 20:30   좋아요 0 | URL
그 피아노 협주곡 3번 같은 경우 요즘 웬만한 피아니스트들은 다 칠 수 있는 듯~ ㅎ
3번 연주는 할프갓 보다는 호로비츠 연주가 최고인 듯 해요.
한음 한음 또렷이 짚어내는 기교가 멋드러지죠^^ 라흐마니노프도 제 곡을 자신보다 더 잘 연주해내는 피아니스트라고 했구요~ㅎ
 


하방 경직성. 임금을 이야기 할 때 주로 사용하는 개념이다. 전공 수업인 노동 경제학 시간에 종종 회자되곤 했다. 높아진 임금은 낮추기 힘들다는 말이다. 임금의 하방 경직성이 임금 체계의 탄력성의 저해하여 노동 시장의 유연화를 막는다는 주장도 종종 제기된다. 이런 하방 경직성은 임금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삶과 더 절실히 맞닿아 있다. 어젯밤, 정확히는 오늘 새벽 난 그 절실함을 명징하게 느꼈다.

새벽에 잠을 깼다. 선잠을 자려 눈을 감았지만 예민해진 신경은 마음만 번잡스레 했다. 구석에 쌓아 둔 한겨레신문을 꺼내 들었다. 신문을 다 보고 나서 구석에 쌓아 둔 신문 더미에 무심코 던졌다. ‘툭’하는 소리와 함께 오디오가 멈췄다. 슈만의 ‘시인의 사랑’을 듣고 있던 순간이었다. 별 일 아니라 생각했기에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지만 기계는 시디를 읽지 못했다. 고장 난 것이었다. 새로 산지 반년도 안 되었기에 잠시 짜증도 났지만 동트기 전부터 마음을 핍진케 하는 건 스스로에게 해로웠다. 잠시 명상에 빠졌다.

기계치이긴 하지만 오디오를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에 잠을 깬 것도 억울한데 음악마저 없으면 긴긴밤이 서러울 듯해서이다. 오디오를 분해하고 어찌하다 보니 고쳐진 듯 했다. 허나 기계는 예전과 같지 않게 늘어지는 소리를 냈다. 다시 분해하고선 한 시간을 씨름하다 결국엔 굴복했다. 대안으로 예전에 자주 듣던 미니 콤퍼넌트를 꺼냈다. 그 고적한 품새가 마음에 들었기에 나름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허나 먹먹한 소리는 참기 힘들었다. 좀 더 세밀한 소리를 내는 새 오디오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번스타인과 빈필의 ‘라인’ 교향곡을 듣는데 그 묵직함이 끝내 와 닿지 않았다. 관현악은 하나의 악기처럼 뭉툭한 소리를 내고 빈필 특유의 현악 선율은 귀에 감기지 않았다. 이런 도구로 음악을 들었던 예전의 내가 대견했다. 세세한 음의 향연은 잠시 동안 내 것이 아닐 듯하다.

‘일야구도하기’에서 연암(燕巖)이 지적했듯 사람의 마음은 실로 간사한가 보다. 나와 몇 년을 함께한 콤퍼넌트를 시쁜 눈으로 바라보는 내가 다소 안타까웠다. 좀 더 부족하고 좀 덜 가지고 사는 것에 익숙해져야겠단 다짐을 한다. 일상에 감사하고 사소한 일에 기꺼워하는 자아가 진정 삶을 밝게 할 테다. 다소 뻔한 아포리즘에 살을 붙이는 건 이런 사소한 경험이다. 고장난 오디오는 음악을 들려주진 못하지만 마음의 소리를 울리게 했다. 덕분에 어제보다 좀 더 살가운 내가 된 듯하다. 하방경직성이 하방수월성이 될 때 삶은 견디는 게 아니라 영위하는 그 무언가가 될 테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0-01-12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악은 (모든 장르가 다 그렇겠지요..) 삶과 맏닿을 때, 그리고 다시 그것을 기억할 때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나 싶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음반을 구입하고 다시 그것을 듣는 까닭은 그 느낌과 기억을 되살리고 싶어서 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보고요.

싸구려 CDP와 스피커로 듣고 있지만 다른 장르, 다른 작곡가, 다른 연주자들이 들려주는 느낌은 다르게 전해져 다행입니다. 언제나 첫번째는 음악 그 자체겠지요.

그나저나 오디오가 고장나셨다니..이런 안타까운 마음이 드네요. 그래도 마음의 소리가 울리신다니 부럽네요^^

바밤바 2010-01-12 10:43   좋아요 0 | URL
인문학을 공부하다보니 마음 수양이 절로 되는 것 같아요. 인문학을 삶에 맞추어 공부한 게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그에 반해 고장난 오디오가 공간만 차지하여 어찌할 가 걱정입니다. 집에가면 예전처럼 그 뚜렷한 소리를 다시 들려줄거 같단 기대가 드는 것도 사실이구요. 집 떠나기 전 하라세비치의 쇼팽 즉흥곡을 들었습니다. 오래된 녹음에 구식 오디오지만 들려주는 소리는 여전히 좋더군요. 바람결님 덕분에 나날이 수양에 정진하는 듯 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남겨 주세요~
 


세상은 다들 제 말만 하고픈 이들로 가득하다. 어딜 가나 말은 넘치는데 소통의 부재를 외친다. 제 말에만 충실한 슬픈 결과다.

아침부터 할 일은 많은데 해찰을 부리며 컴퓨터에 앉았다. 인터넷 상 사람들은 다들 제 말을 쏟아내기에 바빴다. 미욱한 자들은 나르시시즘에 젖은 저만의 말을 남용했고, 조금 영리한 자들은 조목조목 제 생각을 읊으며 나름 공정한 언어인 듯 행동했다. 그런 말의 넘실됨이 편치 않았고 글로 증명된 그들의 생각 또한 성긴 구석으로 그득했다. 핍진한 마음이 말로 드잡이를 하고 어깃장을 부리라 강요했지만 말이 낳을 파장으로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진 않다.

친구 중에 드라마를 자주 보는 이가 있다. 그는 드라마 속 관계로 세상을 안다 여기며 개별적 사례를 일반화 하려 든다. 기실 드라마 또한 몇 명의 작가가 현실에 빗대어 풀어낸 생각인데 뭐 그리 대단할 게 있겠는가. 다만 영상이란 매체 활용으로 그 다가감이 간편하단 이점 말고는 책에 비해 하등 나을게 없다고 본다. 그렇기에 나는 그 친구의 말을 들을 때 마다 그 약한 고리가 쉬이 눈에 띄어 설득은커녕 내 생각을 강화하곤 한다.

결국 언어가 제 존재증명을 위한 가장 절실하면서 편리한 수단이라면 말을 벼릴 필요가 있다. 타인의 생각을 차용하고 제 자신의 생각만 추어올리면 그는 말 그대로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 테다. 말이 말을 낳지만 대부분 그 말들은 맺음을 향해 다가간다. 어떤 맺음이냐는 어떤 말이냐에 달려있는 듯하다.

마찬가지로 달을 가리키는데 왜 손가락만 보느냐는 아포리즘은 틀렸다. 사람들은 당연히 손가락에 집중하기 마련이다. 손가락에 먼저 눈이 가게 하는 그 낮은 헤아림을 우선 탓해야 한다. 그래도 사람들이 달을 보지 않는다면 시각 자료를 활용하거나 또 다른 유인책을 써야한다. 개인의 시간을 앗는다는 데 그 정도 노력 없이 타인의 미욱함만 탓하는 일은 진정 가엾은 일이다. 제발 제 언어도 감당치 못하면서 타인의 불민함을 탓하지 말자. 그 지적질이 온당하면 자연히 대중은 달을 향해 눈길을 줄 것이다.


댓글(7) 먼댓글(1)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몸의 언어에 대해서
    from 木筆 2010-03-07 07:52 
      ** 몸의 언어에 대해, 지촉화가나 고흐의 작품을 설명하는 가운데, 반복작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다. 한번두번 같은 색이나 무늬, 물결을 그리다보면, 그것이 머리, 가슴을 넘어서 몸으로 그리는 경우, 그 반복이 가져다주는 것은 머리나 가슴의 울타리를 넘어선다. 그리고 그 몸의 언어가 고스란히 그것을 음미하는 너에게 전달된다고 한다. 정녕 이런 언어가 있다면, 이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 것,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는 말씀
 
 
2010-01-11 0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밤바 2010-01-11 08:43   좋아요 0 | URL
이거 잠결에 쓴 글이라 비공개로 돌릴라고 했는데 여러 사람이 본 거 같네요. 허허~ 우리 맥주 언제 마셔요?^^

무해한모리군 2010-01-11 09:27   좋아요 0 | URL
당신의 뜻대로 ㅋㄷㅋㄷ

Mephistopheles 2010-01-11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군요..으흑...반성해야지..

바밤바 2010-01-12 08:41   좋아요 0 | URL
메피님~ 왜그러세요~ ㅎ 성인군자시잖아요~^^

다락방 2010-01-11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전 친구를 만나서 대화를 하는데 말이죠, 우리가 하나의 글을 읽고 서로 다른걸 생각하고 느끼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 글은 분명 하나인데, 우리 둘은 서로 두개의 의견을 가지게 된거죠. 물론 우리 둘중의 하나가 저자의 글을 제대로 이해한 걸수도 있지만, 우리 둘다 전혀 다른 맥락으로 이해했을 수도 있을거에요. 우리 둘다 손가락도, 달도 아닌 손톱을 본걸지도 몰라요.

잘 읽었습니다. 물론 이 글을 잘 읽었다고 해도 앞으로 계속 달을 볼 수 있을지 확신할 순 없지만 말이죠.




바밤바 2010-01-12 08:43   좋아요 0 | URL
텍스트가 세상에 공개되면 그걸 해석하는 건 독자의 재량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굳이 저자의 생각을 오롯이 이해하려 할 필요는 없을 듯 하네요.^^
요즘 '무엇이'보다 '어떻게'에 방점을 찍고 생각을 벼리는 중입니다.
 

 

 지난 밤에 눈이 소오복히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내리지




 내가 외우는 몇 안 되는 시(詩)중에 하나다. 윤동주에게도 이런 어린 마음이 있었다. 일제의 칼날보다 마음이 시릴 때면 옛 추억을 되돌아 봤을 테다. 추억 속엔 자랑스러운 애미도 고샅길도 누렁이도 있음직하다. 제 마음이 겨울보다 추울 땐 이런 시를 읊으며 마음을 눅였을 그네다.

 이 시를 외우게 된 건 서예학원에서 ‘작품’을 해야 했던 추억 탓이다. 작품이란 4만원에 값하는 액자에 넣을 붓글씨를 남기는 거다. 많아봤자 10자 정도 되는 글만 끄적였던 나였다. 작품으로 선정된 윤동주의 ‘눈’과 같은 긴 글은 버거웠다. 무엇보다 작은 글씨로 써야 했기에 더더욱 힘겨웠다. 반듯이 접혀진 종이에 선 따라 오롯이 글을 내려 적는 건 쉽지 않았다. 붓이 만들어 낼 작은 세상을 아름답게 하기엔 내 신경은 잔약했고 그 좁음을 견디기 힘들었다. 나를 밀어 넣고 바지런을 떨어도 끝내 그 글은 끝을 보지 못하였다. 난 어미에게 더 이상 배울게 없다는 선언적 외침을 하고선 학원을 그만 두었다.

 이 이야기는 종종 내 질기지 못한 근성을 이야기할 때 회자되곤 한다. 그래도 중학교 땐 내 이름으로 된 붓글씨가 교실 뒷켠에 종종 걸리곤 했다. 글은 보통 8자나 10자 정도였다. 좁은 글로 여백을 채우기 보단 널따란 글씨로 여백에 어울리는 게 나다웠던 탓이다. 붓글씨는 잘 쓰는 편이지만 글씨체는 가지런하지 못한 지금에 이르러서야 내겐 선비의 마음보단 환쟁이의 재주가 더 있는 듯하다. 반듯한 모양새보다 흐트러진 형체를 좋아하는 것 또한 같은 이유에서다.

 길거리에 소오복히 쌓인 눈을 보고선 그때의 추억이 떠올랐다. 남쪽에서 보낸 어린 시절, 눈 오는 날은 소풍날보다 더 절박한 놀이의 장이었다. 몇 년에 한번 오는 눈을 보고선 그만큼 쟁여둔 온갖 놀이를 다 선보이곤 했다. 그런 포실한 추억도 지금은 빛이 바랬다. 서울 살이 속 눈은 못내 귀찮은 지분거림일 뿐이다. 유희의 수단이 아닌 그저 삶의 거추장스런 방해물이다. 그런 마음이 못내 밉고 또 서글픈 날이다. 나 또한 성냥팔의 소녀의 작은 불씨처럼 그 때의 시를 되새겨 본다. 내 눈에도 눈싸움하던 동네 친구들이, 귀마개를 한 어린 꼬마의 홍시 같은 시린 볼이 그날처럼 아른댄다. 가슴에 생채기가 날 정도로 꼬옥 안아주고픈 기억이다. 그럼 동주의 시처럼 내 마음에도 따스한 이불이 감길 듯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10-01-10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라디오에서는 슈만의 "어린이의 정경" 이 들려오더군요. 책을 읽다가 눈오는 창가로 눈길을 옮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떨어지는 눈. 흐린하늘이지만 반짝이는 그 모습과 들려오는 음악은 어릴적 푸대자루에 몸을 담아 신나게 썰매를 타던 시간과 장소로 데려갔거든요.

물론 그 나이에도 지금처럼 힘든 것도 있었을테고, 뭔가 불안한 마음도 있었겠지만 살포시 가슴에 와닿는 음악처럼 그 기억은 참 애틋하네요. 올해 말, 내년 초에는 꼭 눈이 오는 날 사진을 찍으러 훌쩍 떠나봐야겠습니다. 그걸로 그림도 그리고요.

눈이 차가움이 아닌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함으로 전해지시길 빕니다.^^

바밤바 2010-01-10 20:10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은 감성이 참 풍부하신 듯^^
저는 오늘 라디오에서 쇼팽을 들었어요. 무슨 곡인지 잘 모르겠더군요.
그의 음악은 종종 제 독특함은 드러내는데 무슨 곡인지는 종종 명확하게 파악하기 힘든 것 같아요. 좋은 하루 되세요~
 


‘장길산’을 읽다 마음에 와 닿는 구문을 발견하여 옮겨 놓는다.

‘약한 사람이 능멸을 받고 그것을 강한 상대에게 풀지 못하게 되면 자신에게로 그 원한을 돌리게 되고, 자신에게 돌린 원한이 깊으면 깊을수록 복수하겠다는 심정이 세상 전반에 향하게 되는 것이 인생살이의 이치가 아닌가. 따라서 일찍이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을 잘 다스림이 세상을 올바로 살아가는 첩경인 줄을 알지 못하고, 자신과 집안을 모두 그르치기가 쉬운 게 심약한 사람의 특징이었다.’

그 헤아림이 옳은 듯하다. 나또한 저런 모진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려 한 적이 있었기에 그 미욱함이 언젠가부터 심히 부끄러웠더랬다. 황석영의 마음도 아마 심약할 터이다. 그 심약함을 이겨내고 제 자신을 벼리며 살아왔기에 지금의 그가 있을 것이다. 심약하다 보니 사람을 잘 헤아리고 강해지려다 보니 세상사가 절로 이해됐을 테다.

많은 자잘한 이야기로 세상을 훑어내는 그 재주가 기이하다. ‘그럴법한 일’을 잘 전달하는 게 소설가의 큰 복이라 할 때 그는 정녕 제 재주를 고마워해야한다. 고마워하니 이런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소설보다 더 구라 같은 세상사라하나 기실 오롯이 남의 삶을 살피는 데는 신문보다 소설이 낫다. 덕분에 또 하나를 배운다.

그나저나 온실효과다 뭐다 하더니 날은 더 추워진 듯하다. 증명할 수 없는 설(說) 보다 피부가 느끼는 차가움이 더 명징한데 이산화탄소 배출을 무리해서 줄여야 하나. 너무 추우니까 좋자고 하는 일도 시쁜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옷자락을 여민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ephistopheles 2010-01-08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산파 장삼풍이 만든 태극권이라는 무술이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삼라만상 세상만사 물 흐르는대로 허허실실을 표병하는 무술이기에 실전보다는 심신수련에 많이 사용되고 있다더군요.(베이징 거리 아침광장에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집단으로 체조하는 모습처럼 보일 때도 있더군요)

바밤바 2010-01-08 20:39   좋아요 0 | URL
어.. 장삼풍은 무당판데.. ㅎ 영호충이 화산파.
의천 도령기에서 삼풍이 할배가 장무기한테 태극권 가르쳐 줄 때가 생각나네요.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야 그 깊이를 체득하게 되는 역설.
근데 태극권이 왜 생각나셨죠?ㅎ

Mephistopheles 2010-01-09 00:35   좋아요 0 | URL
악...동방불패, 소호강호와 잠깐 착각..무당파가 맞습니다. 제 자신을 버린다는 대목에서 무상무념을 모토로 삼는 태극권이 생각나버렸습니다.

비로그인 2010-01-08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마치 윗도리를 풀어헤치고 탁 내놓는 듯한 글들이 좋았는데요.
아쉽게도 끝까지 다 읽지 못했네요~

날씨가 추우시다니 이런어쩐다..36.5도의 난로를 하나 구하셔야겠네요. 이미 곁에 있으실지도 모르겠지만욥^^

바밤바 2010-01-08 20:39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난로를 구해야겠어요. 손난로!!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