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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시대에 이르면 과거의 수렵이나 작은 촌락을 이루면서 살던 시대와는 판이한 미술이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신과도 같은 왕을 중심으로 강력한 신권사회를 이루는 것이 고대 국가의 특징이지요. 기원전 3000여년 경에 세워진 이집트는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을 거치면서 이후 300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도1은 나일강 유역의 도시국가를 통합하여 고왕국을 시작하였던 통치자, 나르메르의 승전을 기념하는 그림이 새겨진 판입니다. 그 앞면을 보면 나르메르 왕이 적을 물리치는 장면이 알기 쉬운 이야기 그림처럼 전개되어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런데 왕은 크고 포로는 작습니다. 패널의 뒤쪽 상단을 보아도 깃발을 들고 왕의 앞 뒤를 호위하는 신하들은 왕의 1/3크기에도 못 미칩니다. 이 패널을 제작한 사람들에겐 사물의 실제 크기나 비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겠지요. 다만 왕은 더 위대한 사람이고 그가 적을 포로로 잡았다는 사실 만을 명료하게 나타내는 것이 중요했고, 이집트의 미술가들은 그러한 목적을 분명하게 달성한 것입니다. 이집트의 이 기념판은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에서 같은 목적으로 제작된 <나람신 승전비>(도2)와 그 모습이 흡사합니다. 왕과 쓰러진 적의 모습을 묘사하는 정해진 방식이 있었으며 이러한 묘사방식은 이집트에서 생겨나 근동의 고대국가에서 두루 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도1 <나르메르 왕의 팔레트>
기원전 3150-3125년경, 높이 63.5 cm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도2 <나람신 승전비>,이란
수사출토,기원전 2254-2218년경, 사암
파리, 루브르 박물관
 
 
이집트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피라미드입니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의 지평선 위에 묵중히 자리잡은 사각뿔 형태의 피라미드는 조형적인 면에서 매우 절대적입니다. 인간이 만든 조형물 중에서 가장 기하학적이고, 가장 추상적인 구조물일 것입니다. 이집트는 절대적인 신권사회였습니다. 왕 파라오는 거의 신적인 존재였으며, 이집트 미술을 대표하는 파라미드는 이러한 왕의 무덤이었습니다. 그들에겐 죽음이 종말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삶의 영원한 지속이었기 때문입니다.

 

도3 <기자의 피라미드>, 맨카우레, 카프레, 쿠푸 고분
 
 
 
 
도4 <기자의 대 스핑크스>, 기원전 2570-2544년경, 사암, 높이 19.8 m
 
 
 
 
가장 유명한 기자의 세 피라미드는 고 왕국 시대의 왕 맨카우레, 카프레, 쿠푸왕의 무덤입니다. 무덤의 긴 연도 앞 입구에는 스핑크스가 무덤을 지키고 있지요.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쿠푸왕의 피라미드를 건립하기 위하여 10만 명이 3개월 씩 동원되어 기초공사에만 10년, 그리고 본 공사는 20년이 걸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십 킬로 밖에서 채석된 돌을 다듬고 뗏목으로 옮겨와 이곳에 쌓은 과정을 상상하면 이러한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력이 얼마나 강하였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사후에도 현세가 지속되므로 피라미드 내부엔 현세에서 누린 삶의 현장들이 그림으로 그려지고 왕의 소유물들이 함께 부장되었습니다. 보다 후대의 것이지만 아래 보는 황금 마스크가 발굴된 투탄카멘의 피라미드는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어 그 호화스러움이 어느 정도였는지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육체는 사후에도 영원한 삶을 지속시켜야 하는 일종의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육체를 썩지 않게 하는 방법, 즉 미라를 제작하는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두개골과 내장을 먼저 작은 관에 안치하는데 도6의 관 모양의 용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미이라로 만들어 안치될 수 있는 사람은 파라오와 부자가 된 고위관리들 뿐이었습니다. 이집트의 미술은 다른 많은 역사적인 시기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최고 권력자의 미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5 <투탄카멘의 마스크>
이집트, 테베, 18왕조, 기원 전 1323년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도6 <투탄카멘의 내장을 담은 관>
이집트, 테베, 18왕조, 기원 전 1323년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이집트의 양식

이집트 미술은 역사상 가장 완고하고 보수적인 미술로 알려져 있습니다. 3000여 년 동안 지속된 양식의 일관성은 놀라울 따름입니다. 도7에서 볼 수 있듯이 이집트의 인물상은 항상 얼굴은 옆면, 눈은 정면, 가슴은 정면, 발은 옆면으로 조합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나타내었을까요. 이집트 미술은 조각이나 회화나 할 것 없이 모두 대상의 특징을 가장 명확하게 제시할 수 있는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도8의 규범에서 보듯 그 규칙은 언제 어디서나 적용되었습니다. 그림의 크기가 크던 작던 높이를 23.5로 나누어 금을 긋고 무릎은 언제나 7선을, 허리는 13선을, 어깨는 19선을 지나게 그렸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그리던지, 어느 왕을 그리던지 결과는 언제나 똑같은 상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왜 이렇게 획일적으로 했냐고요? 이러한 질문은 우리시대에 가능한 것이고, 만약 이집트 미술의 제작목적을 생각한다면 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형상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왕과 왕조의 지속성이 강조되듯 그 안의 미술도 변함없는 모습을 취해야 했을 것입니다.

 

도7 <헤지라의 초상>
기원전 2778-2723년경, 높이 115 cm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도8 이집트 벽화의 인체비례
 
 
 
 

 

그러나 한편 고분에서 발굴된 관리들의 초상에서는 매우 사실적인 느낌을 받게 됩니다. <카푸레 왕의 상>(도9)과 관리였던 <카 아페르상>(도10)을 비교해 보면 왕의 상은 엄격한 규범에 맞춰 제작하였지만 관리의 상은 구체적인 한 사람의 초상 같습니다. 얼굴이 크고 네모나며 신체가 건장한, 아마도 무관을 담당하였을 듯한 남자입니다. <서기관>(도11)의 모습도 매우 현실적입니다. 정직한 얼굴, 왕 앞에서 항상 같은 자세로 이렇게 쓰고 있었을 반듯한 정좌자세, 중년의 신체가 지닌 배의 주름 등 우리는 바로 실제의 서기관을 보고있는 것 같습니다.

 

도9 <왕 카푸레>, 이집트, 기자출토
기원전 2520-2494년경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도10 <카 아페르> 이집트 사카라의 고분
기원전 2450-2350년경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도11 <서기관> 사카라출토
기원전 2400년경, 석회암, 높이 53.3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12의 패널은 티(Ti)라고 하는 귀족이 하마 사냥을 지켜보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의 모습은 우리가 앞서 본 규칙에 맞게 그려졌지만, 작살로 고기를 잡고 있는, 작게 묘사된 노예들은 규칙과는 관계없이 아주 생동감이 있습니다. 또한 이집트의 한 부조에 묘사된 밧줄을 끌고 있는 노예의 다리를 보면 해부학적인 관심까지 보입니다(도13,14). 노예들에게 법칙을 적용하지 않은 것은 그들에겐 위엄을 부여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도12 <하마사냥을 지켜보는 티>
기원전 2510-2460년경 부조
높이 114.3 cm, 티의 무덤
 
 
도13 <밧줄 끄는 인부들>
기원전 2400년경
티 마스타바, 사카라
 
 
도14 도13의 가운데 인물 도면
 
 
 
 
우리는 무덤에 부장되어 있는 흙 조각에서도 이러한 활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절구에 반죽을 하는 듯한 여자 노예(도15)는 일로 세상을 산 튼튼한 신체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낚시를 하는 어부들은 빠른 동작들을 보여줍니다(도16).

 

도15 <여자 노예>, 기자 출토
기원전 2325년경, 높이28cm,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도16 <어부>
기원전 2000년경, 높이 31.5cm, 폭90cm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이러한 비교를 통하여 다시 왕의 상을 보면, 어느 왕에게나 똑같이 적용된 엄격한 규범의 의미를 더욱 잘 알 것 같습니다. 즉 그들은 관리나 일반인들과는 다른 절대적이고 영원한 존재여야 했으며, 이들을 나타내는데 적용한 엄격한 규범은 바로 그들을 절대적이고 영원한 존재로 나타내는 적절한 조형언어였던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조각가를 지칭하는 말은 '영원히 살아있게 하는 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새기고 깎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우리말이 행위에 기준을 두었다면, 이집트어에서의 조각가는 역할에 의미를 두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미술을 다시금 생각하면, 무한한 개성과 순수함을 요구하는 현대미술은 오히려 특별한 상황으로 이해됩니다. 역사 속의 미술은 언제나 목적을 지니고 제작되었으니까요.

 

 

이집트의 회화

그리스부터 이어져오는 서구의 회화는 크게 보아서 사실과 표현이라는 두가지 기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비교해 볼 때 이집트의 회화는 이후 지속되는 서구회화와는 매우 다른 방식을 택하고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왕의 새 사냥(도17)과 연못이 있는 정원(도18)의 그림을 봅시다. 왕은 우리가 앞서 본 규범에 맞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왕은 크고 왕비인 듯한 서 있는 여자는 그 보다 작고, 왕의 다리 사이에 있는 여자는 더 작습니다. 새들은 모두 옆면으로 그려져 있고 물 속에 있는 물고기까지 옆면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보이려면 우리 눈이 물 속에 들어가 있어야겠죠. 즉 화가가 한 시점에서 모든 사물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고 각 사물마다 다른 시점에서그린 것입니다. 어린애들 그림 같다고요? 그러나 오리 한 마리, 물고기 한 마리를 그린 묘사력을 보십시오. 관찰력이 매우 뛰어난 묘사력이지요. 우리는 지금도 이러한 묘사력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순수미술분야가 아니지요. 바로 자연도감의 그림들입니다. 도감의 그림들은 새나 물고기를 옆으로 그립니다. 그래야 그 특징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으니까요. 이집트 미술을 이해하는 힌트가 되지요? 네, 바로 이집트 미술은 사물의 특징을 정확히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보는 시점에서의 사물이 아니라 사물의 특징을 전달하는 관점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이해하면 연못 그림(도18)도 전혀 엉뚱하지 않습니다. 연못은 위에서, 오리와 물고기 그리고 연꽃은 옆에서, 나무는 옆에서 본 모습입니다. 아마 한 시점에서 연못을 보았다면 우리는 연못이 사각이었는지, 연못 속에 무엇이 있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나무들에 가려서 연못이 거의 안 보였을 테니까요. 이 그림은 우리에게, 네모난 연못이 있고, 연못 주위엔 나무들이 빙 둘러 있었으며, 연못엔 오리와 물고기, 연꽃이 떠다니고 있었음을 마치 말로 전하듯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17 <수풀 속의 새 사냥>
기원경 1400-1350년경, 프레스코
런던, 대영박물관
 
 
도18 <네바의 정원>
테베의 고분벽화, 기원전 1400년경, 64×74.2 cm
런던, 대영박물관
 

 

아마르나 문화

이집트 미술은 거의 3000여 년 동안 변함없이 이어져 왔지만 기원전 14세기에 약 20-30년 동안 다양하게 변화했던 기간이 있었습니다. 아메노피스 4세 치하의 개혁에서 였습니다. 그는 당시 수구세력의 힘이 지나치게 크고 주로 승려들에 의해 좌우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를 개혁하기 위해 아몬신을 믿던 종교체계를 태양신인 아톤 신으로 바꾸고, 테베에 있던 수도도 현재의 아마르나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수도의 이름을 '아케나톤' 즉 아톤신의 지평이라고 부르고, 자신의 이름도 '아크나톤' 즉 '아톤 신을 대리하는 자'라고 바꾸었습니다. 그는 매우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였습니다. 시장에 돌아다니며 서민들과 격의 없이 대화하기도 하고, 왕 혼자의 권위보다, 부인과 가족이 함께 있는 자신의 모습을 즐겼습니다. 그는 온 가족이 함께 아톤신의 빛을 받는 모습을 새기게 하고(도19), 부인 네페르티티의 상을 많이 제작하게 했습니다(도20,21). 도20,21에서 보는 부인상은 정말 매력적이지요? 아주 모던한 머리장식과 화장법이 특히 눈길을 끕니다.

 

도19 <왕의 가족> 아마르나 출토
기원전 1365-1349년경, 높이 44cm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도20 <네페르티티> 옆면
기원전 1353-1335년경
석회석에 채색, 베를린, 국립박물관
 
 
도21 <네페르티티>
 
 
 
 
 
 
 
왕 자신의 모습도 종래 왕의 상과는 매우 다르게 제작되었습니다. 도22의 아메노피스 4세를 보십시오. 신체의 유연한 선과 긴 얼굴이 매우 감성적이지요. 두상(도23)을 보면, 측면의 얼굴에 눈은 정면인 종래의 법칙을 적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얼굴이 길고, 눈은 옆으로 가늘며, 두텁고 육감적인 입을 지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왕의 상을 이렇듯 개성 있게 나타낸 시대는 일찌기 없었습니다.

 

도22 <아메노피스 4세 흉상> 기원전 1365-1360년경, 사암
높이 153cm, 카르낙 출토,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도23 <아메노피스 4세(아크나톤)> 기원전 1360년경
석회적, 부조, 높이 14cm, 베를린, 국립박물관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개혁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그의 왕위를 계승한 아들은 수구세력의 힘을 이기지 못하여 수도를 다시 테베로 옮기고 자신의 이름도 '투탕카톤'에서 '투탕카몬'으로 바꾸어야 했습니다. 미술의 성격 또한 다시 보수적으로 변하였지요. 아메노피스의 개혁과 성격은 너무 과격하여 그는 광인이라고 까지 불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같은 시대에 지중해 윗 쪽, 주제3에서 살펴 볼 에게문화에서 전개되고 있었던 자유로운 미술과 비교해 볼 때 너무나 엄격하였던 이집트 미술을 생각한다면, 아마르나 문화의 이른 종식은 너무나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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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4-09-24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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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티브 아트(primitive art)

신석기 혁명이후 나일, 유프라테스, 그리고 갠지즈와 황하와 같은 비옥한 충적층을 기반으로 원시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규모의 국가 공동체사회가 등장하면서 인류 미술의 역사는 새로운 장을 맞게 됩니다. 기원전 수 천년 전에 등장하는 이러한 고대국가는 신권에 가까운 권력자와 성문화된 율법을 바탕으로 보다 조직된 사회체제입니다. 미술의 규모와 기능도 이러한 사회의 변화에 걸맞게 보다 기념비적인 규모로 추진되며 그 기법은 더욱 세련되고 정교해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개의 과정은 서양미술사의 큰 줄기를 이루는 흐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포스트 모던을 주장하는 21세기 현재의 지구촌 사회에도 문명을 받아들이기 이전의 원시부족사회의 미술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신앙과 전설을 바탕으로 한 종교적인 제의품이나 여러 공예적인 생활용품들, 장신구들을 대대로 전수되어온 솜씨로 만들어 냅니다. 그들이 생산한 민속미술, 혹은 장식품들은 관광객을 위한 상품으로 개발되기도 하고 도시의 미술관에 수집되어 전시되기도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최근에 문신이 유행하는 것처럼 원시미술은 이국적인 패션의 하나로 현재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도1 관광기념품으로 팔리는 아프리카 마스크
 
 
 
 
도2 몸에 문신을 한 남자
 
 
 
 
도3 마르케사스 섬
문신을 하고 곤봉을 든 전사
19세기, 에칭
 
 
 
 
일반적으로 역사이전의 선사시대 미술이나 부족의 미술을 일컬어 '원시미술', '프리미티브 아트'라고 부릅니다. 지역적으로는 크게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중앙 아메리카의 프리 콜롬비아 미술을 통칭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공예적인 생산품에 대해서 어떻게 미학적 가치를 매기고 미술의 역사에서 어떤 위상을 부여할 수 있을까요. 부족미술의 경우 그 양식이 수천년에 걸쳐서 크게 변화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동서양의 타 미술과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근래에 들어 이러한 지역의 미술에 대한 연구와 유적의 발굴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원시미술을 미술사에서 어떻게 위치 지울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현대미술과 프리미티비즘 : 모더니즘 속의 프리미티비즘

19세기 프랑스의 개성적인 후기 인상주의 화가 폴 고갱은 남태평양의 섬으로 떠나며 자신이 현대의 야만인임을 자랑스럽게 자처하였습니다. 그의 회화 <그리스도의 탄생>(도4)은 어두운 마스크를 쓴 인물, 장식적인 패턴의 문양이 새겨진 기둥 등 남태평양 부족미술의 신비한 색채와 도상으로 가득합니다. 서구의 전통적인 기독교 주제가 원시미술의 조형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하겠지요. 도6과 같이 그가 즐겨 제작하였던 거친 목판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원시미술의 영향이 두드러집니다.

 

도4 폴 고갱 <그리스도의 탄생, 신의 아들 테 타마리 노 아투아>
1896년, 캔바스에 유채, 뭔헨 시립미술관
 
 
도5 파푸아 뉴기니 민속의상
1953-54년 사진
 
 
도6 폴 고갱 <십자가의 그리스도>
나무조각
 
 
도7 마르케사스 부족의 지팡이 장식
 
 
 
 
 
20세기 큐비즘으로 이행하는데 선구적인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는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도8)은 그가 당시 민속박물관에서 보았던 아프리카의 조각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도9). 오랫동안 이 그림을 공개하지 않았던 피카소는 수 차례에 거쳐 화면의 구성과 여인들의 포즈를 변경하였는데 오른쪽 두 여자의 얼굴이 처음과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10의 사진을 보면 젊은 시절 피카소의 작업실에 다양한 아프리카 조각과 가면들이 수집되어 있었던 것이 보이지요? 이러한 예는 20세기 미술사에서 너무 쉽게 발견됩니다. 마티스나 드렝과 같은 야수파의 회화, 브랑쿠지와 자코메티의 조각에 이르기까지 현대미술의 선구자들은 원시미술의 단순함과 과감한 생략, 왜곡을 높이 찬양하고 그것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도8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여인들> ,
1907년캔바스에 유채, 244×234 cm
뉴욕 근대미술관
 
 
도9 아비뇽의 아가씨와 아프리카 조각의 비교
 
 
 
 
 
도10 바토 라브와르 작업실에 있는 피카소
파리 1908
 
 
 
 
 
이러한 현대미술과 부족미술, 혹은 원시미술간의 유사성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1984년 뉴욕의 근대미술관 (Museum of Modern Art)에서 열린 대규모 전시 《20세기 미술 속의 원시주의: 부족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의 유사성 Primitivism in 20th Century Art: Affinity of the Tribal and the Modern》에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도11은 이 전시회의 성과물로 나온 도록의 표지입니다. 피카소의 여인의 두상과 아프리카 조각의 형태상의 유사성을 두드러지게 강조한 편집이 눈에 띄는군요. 이 도록에는 피카소 뿐 아니라 원시미술과 유사한 현대작가들의 예를 수없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 언급된 파울 클레의 회화와 뉴기니아 전사들의 나무 방패의 채색문양은 그 선의 패턴과 색채에 있어서 정말 흡사하지 않습니까?(도12, 도13)

 

도11 <20세기 미술 속의 프리미티비즘 >
뉴욕 근대미술관 1984년 전시 도록
 
 
 
도12 파울 클레 <의도> 1938
캔바스에 채색과 신문 접착, 75×112 cm
베른 미술관
 
 
도13 뉴기니아, 전사들의 방패, 목재에 채색
 
 
 
 

이 전시회를 기획하였던 미술관의 의도는 현대미술과의 형태적인 유사성을 통해 부족미술의 독특한 미학적인 특질을 드러내고 그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형태적인 측면만을 강조함으로써 원시미술의 제의적인 측면이나 서사적인 내용, 그리고 장소성 등은 배제될 수밖에 없었겠지요. 형식을 중시했던 현대미술의 이념에 부족미술의 본모습이 가려졌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20세기 초 원시주의는 서구미술에서 바라본 입장이 주가 되었던 것입니다.

 

 

19세기 유럽의 원시미술 수집 붐 : 트로카데로 인류학박물관

원시미술에 대한 수집 붐은 19세기 프랑스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식민지에 대한 영토적, 학문적인 확장의 결과로 인류학, 인종학의 발달과 고고학적인 발굴이 진행되었으며, 이때 수집된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등지의 부족미술품은 박물관에 수집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만국박람회와 같은 전시를 통해 유럽인들에게 소개되었습니다. 아래 도14의 삽화는 1978년 만국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것인데 왼쪽에 트로카데로 박물관이 눈에 띄는군요. 오른쪽(도15)은 그 내부의 모습입니다. 현재 파리의 에펠탑을 마주보고 있는 트로카데로 인류학 박물관은 1887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서 건립된 볼거리의 하나였습니다.

 

도14 왼쪽에 트로카데로 민속박물관과 오른쪽의 샹 드 마르
1887년 파리 만국박람회 일러스트레이션
 
 
 
도15 파리, 트로카데로 박물관
오세아니아 갤러리, 1930년
 
 
 
 

 

 
 
원래 프리미티브 미술이란 유럽이외 지역의 미술이라는 말과 함께 단순하면서도 순수한 느낌을 주는 전성기 르네상스 이전의 15세기 이탈리아 미술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원시미술이라는 뜻은 공간적인 의미와 함께 시간적인 의미도 함께 갖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주로 과거, 그러니까 미술이 진보하기 이전의 원형의 시기를 의미합니다. 영국의 19세기 중반 라파엘전파 미술가들은 회화에 있어서 순수함의 원형을 바로 15세기에서 찾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는 지리적인 의미가 더욱 강해집니다. 처음에는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브류타뉴나 퐁타벵과 같은 도시 밖의 미술을 지칭하는 데서 더 나아가 점차 유럽이외의 오지의 미술을 일컫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현대미술에서의 원시주의는 서구인들이 자신과는 다른 문명, 소외된 타자의 미술을 정의하는 식민주의적인 측면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19세기 일어난 원시적인 것에 대한 동경과 충동은 물론 근대화에 따른 자연에 대한 희구와 문명 밖으로의 도피심리의 결과이기도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부족미술이라 할 수 있는 원시미술로는 크게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콜럼부스의 아메리카 대륙발견 이전의 중남미 미술과 북미의 인디안 미술 등이 있습니다.

 

 

아프리카미술

현재 52개의 국가로 형성된 아프리카는 사실은 그 지형적 다양성 못지 않게 수 백 여 개의 다른 인종, 언어 문화적인 집단들로 이루어진 부족사회의 모습을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부족미술이 그렇듯이 아프리카 미술에는 고급미술과 응용, 혹은 공예와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최근에 이르기까지도 시각미술을 지칭하는 'art' 즉 '미술'이라는 개념을 대부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아프리카 미술은 사후세계에 대한 염원과 통치자에게 신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미술에서 기원한 문화적인 양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초기 아프리카 조각(도16, 17)은 영원한 느낌을 주는 양식화된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도16의 수염을 기른 남자의 두상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굴된 조상(2주 두 번째 주제 참조)과 그 인상이 흡사합니다.

 

도16 <턱수염이 있는 남자>
기원전 500년경, 테라코타
20×14.5×8.5 cm, 튜니지아, 바르도 박물관
 
 
도17 <여인상> 나이지리아, 노크문명
대략 기원전 500년-기원 400년, 테라코타
볼티모어 박물관
 
 

 

 
 
그러나 11-12세기, 나이지리아 서쪽지역인 이페(Ife)에서는 사실적인 표정과 모델링이 돋보이는 자연주의적인 양식이 등장하기도 하였습니다(도18, 19). 이페에서 출토의 통치자상(도18)은 얼굴이 신체보다 커 비례상의 어색함은 남아 있으나 인물의 표정이 자연스럽게 묘사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례상 머리가 커진 것은 솜씨의 미숙함 때문이 아니라 머리를 지혜가 머무르는 곳으로 중시하는 토속신앙에 따라 통치자의 이상화시키는 한 방편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강렬한 눈빛까지도 포착한 도19의 청년의 두상은 그 다부진 표정에 있어서나 근육의 해부학적인 묘사에 있어서 뛰어난 자연주의 초상의 예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18 <왕의 초상> 나이지리아 이페 출토
, 11-12세기
아연합금, 높이 약 183 cm 이페 박물관
 
 
도19 <왕의 초상>
이페 출토, 황동, 13세기
 
 
 
도20 제단, 나이지리아, 베닌
17-18세기, 청동, 높이 약 45 cm
 
 
 
도21 여왕의 두상, 상아
나이지니아 베닌, 16세기 중반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한편 아프리카는 역사적으로 상아해안이라 알려진 서부의 해안을 따라 문명과 교류가 활발하였고, 13세기에서 18세기까지 이 곳에서는 베닌(Benin)이라는 도시국가가 번성하였습니다. 15세기 포르투칼과 무역을 하기도 하였던 이 도시국가는 신전에 앉은 통치자를 묘사한 개인용 제단(도20)이나 상아로 만든 인상적인 왕의 모후의 조각상(도21)에서 보듯 상당히 정교한 청동조각과 궁정미술을 남기고 있습니다.

 
 

 

유럽인들의 식민지가 된 이후의 아프리카의 미술

19세기까지 유럽과 관계가 활발하였던 서부해안 지역의 아프리카 많은 지역은 이슬람이나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면서 토착의 신앙과 문화에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에 의해 이교의 우상숭배의 증거로 혹은, 개인이나 상인들에 의해 민예품으로 아프리카의 많은 부족 미술품들이 유럽으로 유입되었고 많은 컬렉션들이 생겨났습니다. 이것들은 현재 아프리카 미술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콜럼부스 이전의 아메리카 미술

1492년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이전 중남미에서는 현재의 멕시코, 과테말라, 페루 등을 중심으로 기원전 2세기이후 부터 화려하고 강력한 문명이 꽃피었습니다. 수학과 천문학이 발달하여 정교한 달력을 만들 줄 알았으며 거대한 도시를 건설하였던 마야문명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도22, 23, 24). 도23과 같이 토템신앙을 바탕으로 장식적인 문양이 두드러진 거석들이 고원도시의 광장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또한 최근의 고고학적인 발굴로 알려지기 시작한 서부 멕시코 일대의 기원 7세기 경의 테오티후아칸 유적에서는 건축물을 뒤덮은 다양한 타일장식에서 보듯 도자기 공예에 있어서 뛰어난 솜씨가 발휘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도25, 26). 현재 페루에서 발견되는 사람의 얼굴모양을 한 부장용 용기(도27) 역시 사실성과 높은 표현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22 피라미드 성전, 과테말라
마야문명,
기원후 700년 경
 
 
도23 <통치자상>
온두라스, 코판 계곡
높이 약 357cm
 
 
도24 온두라스
코판 계곡, 마야의 대성전 상상복원도
하버드 대학 피바디 박물관
 
 
도25 멕시코, 테오티후아칸 유적의 조망도
앞쪽 <달의 피라미드>, 뒤쪽 <태양의 피라미드>
기원후 50-200년 경에 건설
 
 
도26 멕시코, 테오티후아칸 유적
신전의 벽돌 부조장식
기원후 3세기
 
 
도27 <통치자의 초상을 한 물병>
도기, 높이 35.6 cm, 페루

버킹험 펀드

 
 
콜럼부스의 상륙을 역사적인 기점으로 삼는 이유는 현재 신대륙의 문화를 이 지역의 토착문명과는 그 뿌리를 달리하는 유럽문명의 확장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중남미의 문명은 콜럼부스 이후 포르투칼과 스페인의 식민지정책에 의해 완전히 사라졌으며, 다만 그 미술이 토착민들에 의해 공예적인 방식으 로 전승되고 있을 뿐입니다.
 
 
미술에서 '원시적인 것'에 대한 관심의 변모과정 역시 서구의 식민지 확장의 역사와 같이 하였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 현대미술의 형성기에 고갱, 마티스, 블라맹크, 드렝, 피카소에 이르는 여러 미술가들과 개인 콜렉터들에게 깊은 영향을 준 원시주의, 프리미티비즘은 부족의 실재 미술이기보다는 서구 모더니즘의 한 양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문명의 외곽에 있는 이러한 원시미술은 먼저 앞 시간에 보았던 선사시대의 미술이 그러하였던 것 같이, 사회 공동체 내에서의 시각이미지의 본래의 기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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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적인 발굴에 의하면 기원전 3만년을 즈음하여 예술적인 창조성이 크게 발현되기 시작된다고 합니다. 이 시기는 아프리카나 서유럽에서 크로마뇽인이 네안데르탈인을 대체하는 기간에 해당하는데, 그들은 인류의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과 동물의 모습을 이미지로 표현해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미술의 재현(representation)의 역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발견된 동물형태의 간단한 그림(도1)이나 독일 홀란스타인 지역에서 발견된, 기원전 3만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동물의 얼굴을 한 조각상은(도2.3) 바로 인류 초기의 미술활동을 보여주는 예들입니다.

 

도1 동물의 형상, 기원전 23,000년경, 돌에 목탄그림,
아프리카 나미비아 동굴출토
 
 
 
도2 동물의 머리를 한 인간상
독일 홀렌스타인
기원전 3만년-2만 8천년
맘모스의 상아, 울름 박물관
 
도3 동물의 머리를 한 인간상, 옆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와 같은 고대문명들이 발생하기 이전의 미술을 선사시대 혹은 원시미술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시기는 다시 오랜 빙하기 동안 동굴에서 살면서 채집과 사냥에 의존하였던 구석기 시대와 온화해진 기후에서 농경생활을 하였던 신석기 시대로 크게 나눌 수 있겠습니다

 

동굴벽화

미술을 시대에 따라 발전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우리의 먼 조상들이 동굴에 그려놓은 놀라운 형상들을 보고 충격을 받게 될 지 모릅니다. 1879년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에서 처음 벽화를 발견한 사람은 아마튜어 고고학자 돈 마르셀리노 산츠의 어린 딸이었다고 하는군요. 동굴의 낮은 천장에 그려진 아래 도4의 천장화는 아무래도 시선이 낮은 어린아이의 눈에 발견되기 쉬었던 것이겠지요. 천장에 그려진 웅크린 들소들은 하나같이 모두 위에서 내려다 본 시점이어서 흥미로운데, 학자들은 아마 죽어서 땅에 쓰러진 들소들을 묘사한 결과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편 알타미라 벽에 그려진 들소의 모습(도5)은 부분적으로 추상화되었으나, 곤두선 털과 우람한 야생의 근육의 특징이 생생하고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지요? 20세기 피카소가 즐겨 그린 황소(도6)와 흡사하여 그 시간적인 간격이 더욱 놀랍기만 합니다. 이 놀라운 동굴벽화는 발견된 다음해인 1880년 열렸던 고고학 학회에서 그 진정성이 의심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후 많은 동굴 벽화들도 속속 발견되었을 뿐 아니라 이 그림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오래 전인 수 만 년 전 구석기인들의 솜씨라는 것이 점차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구석기 동굴벽화는 남프랑스와 스페인 접경지역의 여러 석회암 지대에서 발견되었는데 현재 알려진 것만도 이백여 곳이 넘는다고 합니다.

 

도4 들소, 알타미라 동굴 천정화,
스페인, 기원전 만 2천년-만천년 경
 
 
 
 
도5 들소, 알타미라 동굴 벽화,
스페인, 기원전 만 2천년-만천년 경
 
 
 
 
도6 파블로 피카소 <황소> 1945, 동판화
 
 
 
 
 

 

거대한 동굴의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벽화는 오랜 옛날 인류에게 있어서 미술이 어떠한 힘을 가지는 것이었는지, 어떤 기능을 하였는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동굴 벽화 중 가장 잘 알려진 프랑스 몬티악(Montignac) 근처 라스코 지방의 동굴 벽화를 보도록 합시다(도7, 8, 9, 10, 11). 기원전 만 오천 년에서 만 년 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들소, 사슴, 순록, 곰과 같은 동물들의 모습이 아래 도9의 지도에서 보듯이 길게 뻗은 동굴의 길을 따라 빼곡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야말로 시간을 초월하여 선사시대의 힘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들소들의 방'으로 불리는 동굴의 넓은 광장의 벽화는 실로 장관을 이룹니다(도7). 벽면을 따라 그려진 동물들의 무리들이 우렁찬 소리를 내며 질주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 중에는 불룩한 배를 한 새끼를 가진 동물(도10)도 묘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동굴인들이 사냥감의 습성과 움직임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울퉁불퉁한 석회암 표면을 이용하여 아주 생동감 있게 표현하는 방법도 터득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사슴, 들소, 말 등의 동물들은 때로 검은색 윤곽선만으로 그려지거나, 혹은 내부에 붉은색과 검은색의 색채로 채워져 있군요. 동굴인들은 붉고 검은 색 광물성 안료를 속이 빈 동물의 뼈에 넣고 불어서 윤곽을 그리거나 혹은 다른 매제에 개어서 사용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서는 어두움을 밝히기 위해 사용하였던 돌로 만든 램프도 발견되었습니다.

 

도7 황소들의 방, 라스코
프랑스 도르도뉴, 기원전 만 5천년-만 3천년
 
 
도8 라스코 동굴 회랑벽화
프랑스 도르도뉴 몬티악
기원전 만 5천년-만 3천년 경
 
도9 라스코 동굴벽화 지도
 
 
 
도10 새끼를 밴 말, 라스코 동굴 벽화
프랑스 도르도뉴 몬티악
기원전 만 5천년-만 3천년 경
 
도11 창에 찔린 들소, 라스코 동굴벽화
프랑스 도르도뉴 몬티악
기원전 만 5천년-만 3천년 경
 

 

그러면 수렵과 채집생활을 하며, 동굴에서 거주하였던 구석기인들은 왜 이러한 이미지들을 재현하였던 것일까요. 자신들의 거주지가 멋지게 보이도록 장식 삼아 그렸던 것일까요. 그러나 이러한 추측은 벽화들이 빛이 들지 않는 동굴 깊숙한 곳에, 그것도 자꾸 중첩해서 그린 이유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들소들의 방'만 하더라도 처음부터 일대 사냥장면의 스펙터클을 묘사하기 위해 수많은 동물들을 한꺼번에 그린 것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사실은 수 천 년에 걸쳐서 이미지를 덧 그린 결과라는 것이지요. 가장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는 가설은 선사시대 수렵인들이 두려운 존재인 야생동물을 이미지화하여 그들을 포획하고 지배하고자 하였다는 것입니다. 벽화에는 도11처럼 창을 맞고 피를 흘리는 장면을 그리거나 혹은 실제로 그림에 창을 꽂았던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야생의 동물들을 그림으로서 그것들을 소유하고 영혼을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는 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재현된 이미지가 초자연적인 마술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지요. 사실 현대를 사는 우리도 자신의 사진을 쉽게 찢어버리거나 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러한 설명이외에도 후대에도 많이 제작되는 반인반수의 토템상과 관련하여 동물조상신을 섬기는 선사시대의 신앙이 반영된 결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인류최초의 여성상: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거대한 규모의 동굴벽화이외에도 구석기인들은 짐승의 뼈나 돌을 깎아 인간이나 동물형상의 부조나 조각을 제작하였습니다. 그중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이 오스트리아에서 발견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상(도12, 13, 14)입니다. 여기 아래 보시면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전면에서 뿐 아니라 옆에서 그리고 뒤에서 보았을 때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높이 11센티미터의 작은 돌 조각으로 머리모양은 둥글둥글한 패턴으로 간략화되어 있고 이목구비는 생략되어 있군요. 특히 왜소한 팔에 비해 가슴과 배, 엉덩이와 같은 여성의 상징은 매우 과장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도12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전면
오스트리아 빌렌도르프, 높이 110cm
 
 
 
 
도13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옆면
기원전 2만 8천년-2만 5천년,석회암
빈 국립역사박물관
 
 
 
도14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뒷면
 
 
 
 
 
 
서양미술사에서 비너스와 같은 여인의 누드가 매우 빈번하게 그려지고 조각되어 왔던 점을 상기해 볼 때, 구석기 시대 인물조각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여성의 이미지가 많은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뿐 아니라 풍요의 여신을 주제로 삼은 여성상은 도15나 도16에서 보듯이 매우 많습니다. 이는 도19의 라스코 벽화의 한 장면에서 보듯 황소의 공격을 받고 쓰러진 왜소한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된 선사시대의 남성상과는 분명하게 다른 모습입니다. 구석기 시대 발견되는 여성상들은 인류학자들에 의해 비너스 상으로 명명되었는데, 신화가 구성되기 훨씬 전에 제작된 여성상에 사랑과 관능의 여신인 비너스의 이름을 붙인 것은 모순되면서도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도17과 도18을 비교해 보면 알겠지만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에는 고대 이래 비너스 상에 투영된 관능의 시선도, 신성(神性)도 담겨져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생산과 다산과 풍요의 기원이 여성의 신체를 이렇게 왜곡하였던 것입니다. 여성의 몸은 이미 선사시대부터 남성의 신체보다 대상화되기 쉬운 존재였던 것일까요? 풍요의 여성을 나타내는 불룩한 형태의 여성도상이 유럽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오랜 시기에 걸쳐 발견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인간과 동물의 생산성, 대지의 산출력이 인류의 삶과 깊은 연관을 지녔다는 반증이라고 하겠습니다.

 

도15 <들소의 뿔을 들고 있는 여인> 프랑스 도르도뉴 러셀
기원전 2만 5천년-2만년전 경, 석회암에 채색
보르도 박물관
 
 
 
도16 <풍요의 여신> 터어키, 차탈효육
기원전 약 6천년 경, 도기, 높이 20.3 cm
터키 앙카라 고고학 박물관
 
 
 
도17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전면
오스티라아 빌렌도르프
기원전2만 8천년-2만 5천년, 석회암
빈 국립역사박물관
 
 
도18 프락시텔레스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
기원전 350년경, 로마시대 복제품, 대리석
높이 205cm, 로마 바티칸 박물관
 
 
 
도19 <부상당한 남자> 프랑스 라스코 벽화,
기원전 만 5천년-만 3천년
 
 
 
 
 
 
 
지금은 수렵인들의 동굴벽화나 조각을 '미술'이라는 용어로 부르지만 당시에는 원시집단의 제의(祭儀)적인 측면이 무엇보다 강했습니다. 그런점에서 선사시대 '작품'을 동굴에 남겼던 최초의 미술가들의 위치는 어떠했을까요. 수렵인들의 정신세계에 관여하는 마법사나 영매자의 역할을 했을 지도 모르며, 어쩌면 사냥의 대열에서 제외되어 그림 그리는 일에만 전념하였을 지 모릅니다. 그들의 작업이 '창조력의 발산과 승화'라는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미술의 기능과는 동떨어져 있을지 모르나 오히려 집단의 생존과 신앙과 관련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겠습니다. 신비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구석기시대 시각적인 생산물에 대한 다른 견해와 논쟁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선사인들에게 있어서의 마술로서 기능하였던 '미술'은 미술관이나 예술의 이름으로 박제된 현재의 미술보다 더욱 인간의 삶에 깊숙하게 침투하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신석기 시대의 미술

지금으로부터 만 여년 전은 빙하기가 끝나고 유럽의 지형과 기온이 현재와 비슷해지는 시기입니다. 기온이 따뜻해지면서 유럽의 한 중심을 뛰어다니던 들소나 맘모스, 순록과 같은 동물들이 지금처럼 북쪽으로 물러가게 됩니다. 그리고 기원전 5000년 정도가 되면 신석기 농업혁명으로 선사인류들은 점차 정착하고 농경을 통해 생활을 영위하게 됩니다. 먹을 것을 찾아 이동하던 생활양식에서 생산과 정착의 생활양식으로 바뀌고 구석기시대 미술의 가장 중요한 주제였던 사냥도 이제 제의적인 의식으로서 상징적인 행위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신석기 시대에도 역시 인류의 조상들은 농기구나 생활에 필요한 여러 물건들을 만들고 추상적인 문양의 도기들을 제작하였지만 놀라운 장관을 연출하였던 구석기 시대의 미술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그 결과가 왜소합니다. 물론 앞으로 더 많은 고고학적인 발굴이 이러한 공백을 메워나가겠지만 근본적으로 신석기 시대로 진입하면서 인간에게 있어 이미지의 재현이 지니는 의미가 달라진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겠습니다.

 

 
 
지금의 터키 일대에서 발굴이 한창인 차탈효육 유적은 기원전 7천년에서 5천년에서 정도의 신석기 시대 정착지 중 한 곳입니다. 신석기인은 지붕이 평평한 저택을 잇달아 짓고 군집 생활을 하게 되는데(도22) 주거지에서 재미있는 벽화들이 발굴되었습니다(도20, 21, 23, 24). 도20을 보면 벽에 그려진 붉은 색 그림이 발색되어 잘 보이지 않지요? 아래 도23의 드로잉을 보도록 합시다. 바둑판처럼 생긴 기하학적인 문양은 화산이 있는 마을의 풍경을 그린 것입니다. 실제 마을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개념도에 가깝습니다. 도21, 24의 그림은 사슴을 사냥하는 사람들을 마치 춤추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군요. 이 벽화들은 구석기 시대의 역동적인 동물 그림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렇게 사실적인 묘사를 하던 조상들의 솜씨는 어디로 간 것인지, 이미지는 흡사 기호처럼 변하였습니다. 이는 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마술적인 힘의 환기보다는 기록과 의사소통의 기능이 더욱 강해졌다고 생각되는데, 이러한 과정을 거쳐 문자가 발생하고 인류는 역사시대로 진입하게 됩니다.

 

도20 <폭발하는 화산과 마을풍경>
터키 챠탈훈육 벽화
기원전 6천년 경
 
 
 
도21 <동물사냥>
터키 챠탈훈육, 신전의 주실
기원전 6천년 경, 68.5×165 cm
 
 
 
도22 가옥과 신전들
터키 챠탈훈육 유적
기원전 6천년 경
 
 
 
도23 <폭발하는 화산과 마을풍경>
터키 챠탈훈육 벽화 부분 모사
기원전 6천년 경
 
도24 <사슴사냥> 신석기 벽화 부분 모사
터키 챠탈훈육
기원전 5750년 경
 
 
 

스톤헨지: 거석문화의 탄생

서유럽에서 인류가 농사를 짓고 정착하게 되자 토기가 생산되고 기원전 사천년경에는 거대한 자연석을 쌓아 기념비적인 건축형태를 만드는 거석문화가 생겨나게 됩니다. 인류역사상 놀라운 변화의 시기입니다. 고인돌은 실용적인 목적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권력자의 매장문화, 그리고 장례와 종교의식이 발생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때로 고인돌들은 원형의 형태로 세워지는데, 영국 남쪽 찰츠베리 평원의 스톤헨지가 그중 가장 유명합니다(도25, 26, 27, 28). 직경이 대략 30미터에 이르는 원의 모양을 따라 두 열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기둥(post) 위에 상인방(lintal) 즉 들보를 올리는 건축의 기본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거석유물은 최초의 건축물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도26의 복원도를 보면 빙 두른 원 안에 제실(祭室)이 있고 중앙에는 제단형태의 돌이 있어서 이것이 그리스의 신전이나 중세의 교회를 구성하는 건축방식과 기본적으로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단지 원의 한 부분이 끊겨 있는데, 이곳은 일년 중 해가 가장 긴 하지에 해가 뜨는 곳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아마도 농사를 위한 절기와 관계 있을 것으로도 짐작합니다. 이 모든 사실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아마 이렇게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을 짐작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정착생활을 하였고, 집단의 힘을 이용하였으며, 농사를 지으면서 느끼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도25 스톤 헨지, 조감도, 영국 윌트셔 찰즈베리 평원
기원전 2550-1600년, 지름 29.6 m
 
 
도26 스톤 헨지 복원도
 
 
 
도27 스톤 헨지, 영국 윌트셔 찰즈베리 평원
기원전 2550-1600년, 지름 29.6 m
 
 
도28 스톤 헨지, 하지 때 모습, 영국 윌트셔 찰즈베리 평원
기원전 2550-1600년, 지름 29.6 m
 
 
 
 
 
지금까지 고대문명이 발생하기 이전의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의 미술의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저명한 미술사가 곰브리치는 미술의 모든 역사는 기술적인 숙련에 관한 진보의 이야기가 아니라 변화하는 생각과 요구들에 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수 만 년 전 문명의 초기단계의 조상들은 당시의 조건에 맞는 미술의 독특한 형태를 발현시켰음을 이 시간을 통해 확인하였습니다. 미술은 그런 점에서 인간의 삶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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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선, 면, 색채, 빛, 구성 등 미술의 형식에 따라 감상하는 방법-양식사적방법

도1의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제작한 <최후의 만찬>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 놓인 도2의 작품은 같은 주제를 그린 틴토레토의 작품입니다. 서로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도1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1498년, 460×880cm
밀라노, 산타마리아 델라 그라찌아
 
 
도2 틴토레토 <최후의 만찬>
1592-94년, 캔버스에 유채, 363×568cm
베네치아, 산 조르지오 마죠레
 
 

레오나르도는 예수를 중앙에 놓고 12명의 제자를 식탁의 양쪽에 놓았으며, 마치 그들이 방의 한쪽에서 식사하고 있듯이 보이도록 하였습니다. 넓은 방의 양쪽 창문과 천장의 선들에 기하학적인 원근법을 사용하여 소실점이 주인공인 예수에게 모아지기 때문에 우리의 시선은 주인공에게 집중하게 됩니다. 반면에 틴토레토는 식탁을 대각선으로 놓았습니다. 주인공인 예수와 제자들보다 음식을 나르는 사람들이 더 크고 번잡스럽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시선은 예수를 찾게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예수의 두광에 강한 빛을 구사하였기 때문입니다. 레오나르도는 화면 왼쪽에서 오는 은은한 광선을 적용하여서 모든 인물과 사물은 양감과 함께 중간 톤의 색채를 띄는데 반해, 틴토레토는 인물들의 뒤에 강한 등불을 놓아 인물들은 역광을 받아 어둡게 처리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은 과학적인 공간묘사와 안정된 구도, 사실적인 인물묘사를 끌어내었습니다. 이와 달리 틴토레토의 <최후의 만찬>은 역동적인 구도와 인물의 순간적인 묘사, 그리고 사건의 극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전자는 르네상스양식을 후자는 매너리즘양식을 대표합니다. 이렇게 그림이 지닌 형식을 기준으로 바라보는 방법을 우리는 양식사적인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2)도상학적 방법

그럼 우리는 식탁에 여러 사람이 앉아있는 위의 그림을 보고 어떻게 <최후의 만찬>인 줄 알았을까요. 그것은 예수가 열 두 제자와 마지막 저녁을 하였다는 성경의 이야기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천사가 한 여자에게 다가와 말을 건네고 있는 장면이 있다면 그것은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아기를 가질 것이라고 예고하는 <수태고지>이야기입니다(도3).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고 있는 남자의 그림을 보고 부처님이라고 말 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이렇게 특정한 이야기를 특정한 형태로 전하는 방법을 우리는 도상학적인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도상학적인 방법은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게 하는 열쇠인 것입니다.

 

도3 프라 안젤리코 <수태고지>
1430년대 후반, 프레스코, 230×321cm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
 
 
도4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1485년경,패널에 템페라, 172.5×278.5cm
피렌체, 우피치
 
 

여기 아름다운 여성이 누드인 채 조개 위에 서 있으면 여러분은 누구라고 하겠습니까(도4). <비너스의 탄생>이라고 하죠. 비너스는 美의 여신이고, 조개에서 태어났으니까요.

 

3)지식을 필요로하는 도상학적 방법

 

그러나 위와 같이 잘 알려진 도상도 있지만 많은 지식을 필요로 하는 도상들도 있습니다. 도5의 그림을 보십시오. 1784년 프랑스의 화가 다비드가 그린 그림입니다. 무장한 젊은이 셋이 중년의 남자에게 손을 뻗고, 중년의 남자는 그들에게 줄 칼을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그들의 가족인 듯한 여인들이 슬퍼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로마 건국 때 이야기로 로마와 오랫동안 숙적이었던 알바와의 싸움을 위해 출두하는 호라티우스형제들이 아버지에게 승리를 맹세하는 장면입니다. 호라티우스 형제들이 싸워야 할 적은 알바시의 퀴리아스 형제들이었는데 호라티우스형제의 누이 하나는 적의 형제들 중 한 명과 약혼한 사이였습니다. 누이들이 슬퍼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럼 프랑스의 18세기 말에 왜 로마의 이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18세기 말 프랑스사회가 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혁명 즈음 프랑스에서는 개인의 행복보다는 국가를 위한 애국심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도상은 무엇을 그린 것인가라는 단순한 문제만이 아니라 왜 그것을 주제로 택하였는가를 해석하는 필요한 기본지식입니다.

 

도5 다비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1784년

캔버스에 유채, 330×425㎝, 파리, 루브르 박물관
 
 

그러나 위에 설명한 미술품을 보는 방법들은 어느 한가지가 우월한 것은 아닙니다. 양식적인 방법과 도상학적인 방법은 미술품을 감상하는데 언제나 필요한 기본적인 눈이며 지식입니다. 그리고 작품에 따라서 요구되는 방법이 다를 수 있습니다.

작품들을 어떤 한 가지 절대적인 잣대만으로 잴 수는 없으며, 이 양식은 좋고 저 양식은 나쁘다고 평가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미술품을 보는 우리는 언제나 당시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미술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출처 ㅣ 출처 소개...http://home.mokwon.ac.kr/%7Earthistory/index.html

이은기와 함께 멀티미디어로 보는 서양미술사

이은기

홍익대학교 서양화과 졸업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이탈리아 피사대학 문학박사
서양미술사학회 회장역임
홍익대학교와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고대,중세,르네상스미술 강의
現 목원대학교 미술대학 재직


저서
<르네상스 미술과 후원자> 시공사
e-mail: eunkielee@hotmail.com

 

김미정

연세대학교 불문과 졸업
홍익대학교 미술사학과 졸업
홍익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수료

역서
<베네치아의 르네상스> 예경
<바로크와 로코코> 시공사
<에곤 실레> 시공사

e-mail: mee_jung@hanmail.net

 

서양미술사 강의 자료가 있길래 주욱 퍼 오려고 합니다. 관심있으신 분들 보시면 좋을 듯 해서요. 그런데 복사해서 붙였는데 그림이 뜨나요? 안 뜨면 다시 올릴테니, 알려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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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04-09-23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그림도 잘 뜨고.. 책보다 더 선명하고 크게 뜨니까 훨씬 좋구만요...
좋은 글을 공유할 수 있게 해 주셨으니 추천해드려야는거 맞지요? ^^

호랑녀 2004-09-23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
이거 프린트해두고 줄 그어가면서 봐야할 것 같은데요?

stella.K 2004-09-23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퍼가요.^^

panda78 2004-09-23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ㅡㅡㅡㅡㅡㅡ^ 관심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루에 두 세편씩 계속 올릴테니, 끝까지 봐 주셔요- ^^

2004-09-28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심히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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