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들은 기원전 8세기경부터 신상(神像)을 제작하고 숭배해 온 것으로 짐작됩니다. 아래 기원전 7세기초에 제작된 <만티클로스 아폴로>상은(도1) 작지만 신을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낸 초기 청동조각의 예를 보여줍니다. 인체의 비례를 머리와 상반신, 하반신으로 삼등분하고 상체를 역삼각형으로 나타내는 방법은 초기 도자기 그림에서 보았던 기하학적인 양식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도1 <만티클로스의 아폴로> 앞과 뒤
기원전 7세기 경 , 청동
 
 
도2 <뉴욕 쿠로스 > 앞과 뒤, 높이 184cm
기원전 600년경,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7세기에서 5세기에 이르는 사이 인체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놀라운 발전을 보여주었습니다. 만티클로스의 아폴로와 뉴욕에 있는 쿠로스상의 표현양식의 차이는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도2,3). 그러나 뉴욕 쿠로스 인체표현을 유심히 본 사람은 직립의 부동자세나 머리처리 등에서 금방 이집트 조각을 떠올릴 것입니다. 아래의 격자도표에서도 보듯이, 실제로 전체 키를 23 1/4 단위로 나눈 이 상의 비례는 우리가 이미 이집트 미술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집트 조각의 비례와 일치합니다. 당시의 기록을 보아도 그리스 기술자들이 이집트에서 조각술을 익혔음을 알 수 있습니다(도3,4).

도 3 뉴욕 쿠로스(도.2와 동일)
 
 
 
도 4 이집트 조각과 그리스
<뉴욕쿠로스>의 비례비교
 
 
도5 이집트 조각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조각과 그리스 조각은 큰 차이를 지니고 있습니다(도3,5). 그리스 장인들은 우선 팔과 상체 사이, 다리와 다리 사이의 돌을 걷어 냄으로써 자연스러운 인간의 형상에 더 다가가려 하였습니다. 또한 인체의 느낌을 보면 이집트 조각이 지배자의 힘과 권위를 강조하고 있다면 그리스상은 건장하고 절제 있는 남성상을 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 조각이 신의 모습을 나타내는 작은 조상에서 등신대 크기의 대리석상으로 발달한 것은 7세기 중엽부터입니다. 기원전 7세기 즈음에 만들어진 뉴욕 쿠로스 (Kouros:소년 또는 젊은이라는 의미)상은 다소 경직되어 있기는 하지만, 건장한 남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슴과 허벅지, 그리고 무릎의 묘사에서 그리스 장인들의 해부학적인 관심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 즉 인체의 자연스러움을 닮게 하면서 동시에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이상화된 인간의 모습을 구현하려는 조각가들의 시도가 기원전 6세기 전반의 아나비소스의 조각에서는 훨씬 더 성공적으로 구현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도8).

 
 
 

주로 아르카익 시대에 만들어진 쿠로스상들은 신전 안에 모셔진 신들에게 봉헌하는 상이거나 무덤의 표시였습니다. 사모스 섬에서 몸통만이 출토된 아래 쿠로스상의 허벅지에는 "레우키오스가 나를 아폴론에게 바쳤다"라고 새겨져 있어 이 상이 신에게 봉헌된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도6). 아나비소스의 쿠로스(도8) 좌대에는 "여기 죽은 크로이소스의 무덤에 서서 그를 가엽게 여기라. 그가 전장에서 싸운 것 같이 아레스를 전멸시켜 그를 분노케 하였노라"라고 쓰여있습니다. 이 조각상은 무덤에 세워져 있어서, 지나는 이로 하여금 멈춰 서서, 이 상을 보고, 명문을 읽어 청년의 죽음을 애도하게 하는 매개체였습니다. 전쟁으로 죽은 주인공은 비록 땅 속에 묻혔으나 조각을 통하여 이러한 젊은이로 존재케 하려는 그리스인들의 바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도6 사모스섬 출토 쿠로스
기원 전 575-550년경, 높이 100 cm
바티, 사모스, 고고학 박물관
 
도7 테네아 쿠로스
기원 전 6세기 중엽
바비에라의 모나코, 글립토테카
 
도8 <아나비소스의 쿠로스>
기원 전 530년 경, 높이 194 cm
아테네, 국립 고고학박물관
 

뉴욕 쿠로스보다 약 반세기 후에 제작된 아나비소스 쿠로스는 인체묘사에서 큰 발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도8). 우선 머리를 작게 함으로써 전체의 인체비례는 8등신에 가깝게 되었습니다. 또한 선 묘사에 의존하던 뉴욕 쿠로스와는 달리 정확한 살붙임으로 뺨과 턱뼈가 해부학적으로 정교해졌을 뿐 아니라, 도식적이던 가슴묘사도 탄력 있는 근육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우리는 위의 네 상을 보면서 아르카익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묘사하고자 하는 인물이 아폴로 신이거나, 봉헌자거나, 심지어는 전장에서 죽은 병사이거나 상관없이 모두 젊고 이상적인 신체의 누드상으로 묘사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제작된 수많은 남자 누드상을 보면서 우리는 이 시대 그리스인들이 지향하던 도덕적인 이상을 읽을 수 있을 듯합니다. 그들은 사회적 권위의 옷보다는 누드의 남성성 자체를 숭상하였으며, 또한 그들이 숭상하는 이상적인 인간은 젊고 생명력이 넘치나 또한 절제된 남성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근대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누드는 여성묘사의 전용처럼 인식되어 왔습니다. 이와는 달리 그리스 조각에서는 남성상은 누드로 제작된 반면 여성상은 옷을 입고 있습니다. 니칸드레 (Nikandre) 코레는 보존상태는 좋지 않지만 명문이 남아 있어 미술사적 의미가 있는중요한 상입니다(도9). 갈래머리를 한 머리는 이집트 조각을 연상시키며, 납작한 돌에 전체적으로 평평한 느낌을 주는 것은 아마도 초기의 목조방식을 대리석에 적용했기 때문인 듯 합니다. 이 여자 봉헌상의 치마 왼쪽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습니다. "니칸드레가 나를 활 잘 쏘는 궁수, 즉 아르테미스에게 바쳤습니다. 그녀(니칸드레)는 낙소스인인 네이노디케스의 딸이자 데이노메네스의 누이이며, 지금은 프락소스의 아내이다." 즉 이 상은 친정과 남편의 가문에 긍지를 지닌 한 여성이 아르테미스 신전에 봉헌하기 위해 나무보다는 더 비싼 재료인 대리석으로 주문한 것입니다.

도9 <니칸드레의 코레>
기원 전 650년경, 높이 175cm
아테네 국립고고학 박물관
 
 
 
도10 <페플로스를 입은 코레>
기원 전 530년경 . 채색 대리석, 높이 120cm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도11 <페플로스를 입은 코레>의 복원 모형
케임브리지, 고전고고학박물관
 
 
 
 
 

위의 코레보다 1세기 뒤에 제작된 일명 페플로스을 입은 코레(도10, 11, 12)는 같은 유형의 여자 봉헌자상이지만 니칸드레의 코레보다 훨씬 사실적입니다. 밝게 미소지으며 왼손의 물건을 봉헌하는 매력적인 코레는 채색된 흔적을 지니고 있어서 원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합니다(도12).

 

도12 <페플로스를 입은 코레>
기원 전 530년경, 채색 대리석, 높이 120 cm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도13 키오스의 코레
기원 전 520년경, 높이 55.3cm
아테네, 아크로폴리스박물관
 
 

채색이 남아 있는 코레에서 우리는 화려한 장신구와 잔주름이 많은 아름다운 의상을 복원해 볼 수 있습니다. 키오스에서 출토된 코레(도13)에서도 보듯이, 머리장식과 귀걸이, 목걸이로 아름답게 꾸미고 한 손엔 언제나 봉헌물을 지닌 모습으로 만들어지는 여성상은 젊은 신체로서 자신의 가치를 드러냈던 남성상과 여러모로 비교됩니다. 이러한 차이에서 우리는 그리스 사회에서 남자는 젊은 청년으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반면, 여자는 니칸드레 코레의 명문에서 보았듯이 자신의 이름보다는 아버지의 딸로, 오빠의 누이동생으로 그리고 남편의 아내로 존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인체묘사에 대한 관심은 지속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아테네 부근 피레우스에서 발굴된 아폴로상은 청동조각의 발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도14,15). 오른손엔 넓적한 기물을 들고 왼손엔 활을 들고 신전 안에 모셔져 있던 상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도16). 맨 처음에 보았던 작은 청동 아폴로상(도1)와 비교해 본다면 해부학적으로 정확하면서도 탄력있는 인체묘사의 방법 뿐 만 아니라 청동조각의 기법에서도 크게 발전하였음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높이 192cm의 이 상을 제작하기 위하여는 머리, 손, 발등을 따로 주물로 떠서 이었을 것이나 이음새의 흔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도14 <피레우스 아폴로>
기원 전 510년경, 높이192cm
피레우스 고고학박물관
 
 
도15 도14의 가슴 윗부분
 
 
 
 
도16 <신전 속의 아폴로>, 세부,
기원전 4세기, 적화식 아풀리안 크라테르 세부
 
 
 

 

 

청동조각은 속이 비어있어 가볍고 운반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대리석으로는 불가능한 자유롭고 열린 포즈의 상을 제작할 수 있습니다. 팔을 쭉 뻗어 번개를 던지는 제우스 상의 모습은 청동이 아니면 나타내기 힘든 포즈였을 것입니다(도17). 피디아스 작품으로 추정되는 오른쪽 청동조각은 입술에는 구리와 이빨에는 은과 같이 다른 금속을 더해졌을 뿐 아니라, 채색까지 되어 있어서 후대에 로마시대 복사품으로 많이 알려진 흰 대리석의 조각상들이 그리스 당시 사실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도18).

도 17 <아르테미시온의 조각상>
기원전 450년경, 높이 209cm
아테네, 국립고고학 박물관
 
도 18 피디아스 작으로 추정, 리아체의 <청동상A>
, 기원전 450년경, 높이 198 cm
레조 칼라브리아 국립박물관
 
 
 

이처럼 그리스에서 크게 애용되던 청동조각은 그러나 후대의 전쟁을 이겨내기는 어려웠습니다. 청동은 약탈하여 녹이면 무기를 만드는 귀한 재료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치명적인 약점 때문에 그리스의 청동조각은 대부분 없어지고 로마시대의 복제된 상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현재 나폴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참주 살해자들>(도19)은 기원전 477년경 아테네의 크리티오스(Critios)와 네시오테스(Nesiotes)라는 두 조각가가 만든 청동상을 로마시대에 대리석으로 복제한 것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이 조각상 또한 기원전 510년경 안테노르(Antenor)가 만든 조각상을 480년에 있었던 페르시아 전쟁 중에 빼앗기고 다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청동상을 대리석으로 옮길 때 가장 어려운 점은 무게지탱과 균형의 문제였습니다. 로마인들이 하는 수 없이 나무기둥 모양으로라도 버텨 놓아야 했으므로 조형상의 장애는 감수해야 했습니다. 버팀목을 생략하고 <참주 살해자들>의 원래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도20). 두 상은 좀더 가까이서 등을 맞대고 서로를 방어해 주면서 참주에게 공격하는 상이었을 것입니다.

도19 <참주 살해자들> 그리스 청동 원작의 로마 복제본,
기원전 477년경, 대리석, 높이 195cm, 나폴리 국립고고학 박물관
 
 
 
 
도 20<참주살해자들>
 
 
 
 
 
 

여기서 잠시 조각상의 정치적 역할을 언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군상은 아테네 민주제의 기초가 성립된 기원전 510년경 시민생활의 중심지에 세워지고 이 상 주변엔 다른 상을 세우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었다고 합니다. <참주 살해자들> 상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숭배되었던 것입니다. 마치 뉴욕의 <자유여신상>이 미국의 자유를 상징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역사서들은 이 군상의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이 동성애 관계에 있었으며 이들의 히파르코스 참주를 살해한 동기는 개인적인 것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참주제에서 민주주의로 바뀌는 정치의 전환점에서 개인의 사건은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미화된 것입니다. 역사는 언제나 영웅을 필요로 했고, 공공장소에 세워진 영웅의 상들은 언제나 민심을 규합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리스의 도시국가는 위기 때 함께 대처하고, 같은 수호신을 모시는 공동체였습니다. 따라서 고대 신전은 신을 모시는 공간이었을 뿐 아니라 시민들의 공동체 의식, 즉 애국심을 결성하는 공공의 장소였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의 도시와 신전, 그리고 정치는 서로 복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신전은 산 속이나, 바닷가, 혹은 시장이나 극장이 이뤄진 도시의 한 가운데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어디에 세워지건, 신전은 언제나 시민의식의 지향점이였으며, 그리스인들은 신전의 건축과 조각을 통해 국가의식을 공유하고 과시하였습니다.

최근의 미술사 연구는 미술을 독립적으로 다루기보다 정치,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그 참 모습을 찾아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 수업에서는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을 통해 신전과 정치의 관계를 추정하겠는데, 그러기에 앞서 새로운 형태를 위한 건축가들의 창안과 경쟁적인 노력을 살펴보는 것부터 시작해야겠습니다. 그리스 건축이라 하면 당연히 신전의 기둥 장식에 따라 도리아식(도1, 4), 이오니아식(도2, 5), 코린트식(도3, 6)과 같은 세 가지 양식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고대 건축에 있어서 柱式 (order)이 단순히 주두장식의 차이만을 일컫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이러한 양식의 차이에 따라 각 부분의 비례와 조각의 배치 방법들까지 달리하였습니다.

도1 도리아식 주두
기원 전 447-438년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도2 이오니아식 주두
프리에네의 미네르바 폴리스
 
 
 
도3 코린트식 주두
로마 파르테논 신전
 
 
 
도4 도리아식 주두
기원 전 450년 경,
실라로의 보물창고, 파에스툼
 
 
도5 이오니아식 주두
기원 전 500년 경
아테네, 페스토 박물관
 
 
도6 코린트식 주두
기원 전 4세기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아래 두 신전의 외양을 비교해 봅시다. 그리스 북방 도리아민족이 가져온 도리아식은 육중하고 단순한 반면(도7), 해양민족이었던 이오니아에서 유래한 이오니아식은 가늘고 경쾌합니다(도8). 두 양식은 그리스 본토에서 융화되어 기원전 5세기경엔 같은 신전에 함께 쓰이기도 하며, 더 화려한 코린트 양식이 창안되기에 이릅니다.

 

도7 도리아 신전, 헤라신전( 포세이돈 신전으로 알려져옴 )
기원전 460년 경, 이탈리아 파에스툼(고대 그리스 식민지)
 
 
도8 이오니아식 신전, < 에렉트레티움 >
기원전 421-405년,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민족의 이름에서 유래한 두 양식과는 달리 코린트 양식은 코린트 지방의 한 건축가가, 이오니아 주두가 땅에 떨어져 무성한 아칸투스 잎으로 둘러싸인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창안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도3, 6). 이 외에도 긴 드레스를 입은 여성상이 무거운 건물을 떠받들고 있는 모양의 기둥인 카리아티드양식도 있습니다(도9). 이 양식의 기원에 대해서 카리아티드 도시를 무찌른 후 여자들을 노예로 삼았던 데서 유래한 것이라 전해져 오기도 하지만, 글쎄요, 크게 설득력이 있는 근원은 아니라고 봅니다.

 

도9 에렉테이온, 기원전 421-405년 경,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같은 방식의 신전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양식이 변한다는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기원전 6세기와 5세기의 도리아식 신전을 비교하면 6세기의 아르테미스 신전은 박공과 엔타블라처가 전체 높이의 거의 반을 차지하는데(도10) 이에 비해 기원전 5세기에 지어진 파르테논 신전에선 그 부분의 비중이 적어지고 기둥이 높아졌고, 기둥사이의 간격도 넓어졌기 때문에 훨씬 조화롭게 느껴집니다.(도11).

 

도10 아르테미스 신전 정면도면, 기원 전 6세기 초
 
 
 
도11 파르테논 신전 정면도면, 기원 전 447-438년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자리 잡은 흰 대리석의 파르테논 신전은 많은 부분이 손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답습니다(도12, 13). 많은 학자들이 이 건축물에서 황금분할 비례를 찾아내어 이를 규범화했으며 그리스 고전기의 가장 훌륭한 신전이라고 칭송하여 왔습니다.

 

도12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신전 전경
 
 
 
도13 파르테논 신전, 기원 전 447-438년,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신전이 우리 눈에 균형 있게 보이는 데는 건축가의 섬세한 계산이 있었던 결과입니다(도14). 건축가는 기둥의 가운데 부분이 가늘게 보이는 착시 현상을 방지하기 위하여 기둥에 배불림(엔타시스)을 주고 기둥 윗부분을 조금 안쪽으로 기울여 안정감 있게 보이도록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도14 파르테논 신전 정면, 기원전 447-438년,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지금은 관광유적일 뿐이지만, 기원전 5세기의 당시를 상상한다면 아테네의 모든 시민이 줄지어 신전에 봉헌하며, 범 아테네 축제를 벌이는 모습이 실로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 곳은 종교적인 역할을 넘어 도시국가(police)로서의 공동체를 인식하는 정치적인 공간이기도 하였습니다. 실제로 파르테논 신전의 건축은 그리스 연맹이 페르시아에 승리한 후, 연맹을 주도하던 아테네가 정치력을 확고히 하려는 의도에서 추진하였습니다. 페리클레스는 이같은 거대한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연맹의 군자금까지 전용했다고 하는데, 아테네가 신전의 건축과 조각에 이렇듯 큰돈을 들인 것은 미술이 민심을 결집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파르테논 신전의 위치와 신전 안팎의 조각들을 살펴보면 신전의 정치적인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전은 아크로폴리스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도시의 어디에서나 보이며 사방의 길이 이 곳을 향하게 되어 있어서 파르테논 신전은 당시 아테네 사회의 중심이었습니다.

 

도15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전경
 
 
 
 
 
 

신전 안에 모셔 놓았던 아테네 파르테노스(순결한 아테네)상은 비록 실물이 남아있지 않아 작은 모형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으나 원래의 높이는 12m에 달하는 실로 거대한 상이었으며, 아테네상의 옷을 장식하는 데만 1144Kg의 금을 사용하였다고 하니 화려했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도16). 순결을 상징하는 파르테노스상 임에도 불구하고 아테네 여신은 여전사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투구 양쪽엔 날개 달린 말이 달려있고, 아이기스 갑옷엔 무서운 고르곤이 꼼짝 못하고 있습니다. 창과 방패는 물론 이려니와 오른손엔 승리의 신 니케를 들고 있습니다. 아테네는 이 도시의 초월적인 보호자인 것입니다.

 

도16 피디아스, < 아테네 파르테노스 > 복원모형
원작품 기원전 438년 경, 토론토, 온타리오 왕립박물관 제작
 
 
 
 
 

건축안쪽의 이오니아식 프리즈에는 범아테네 (판 아테네)지역 축제에 참가하는 봉헌자들의 긴 행렬이 새겨 있습니다(도17). 이들 중엔 기마병과(도18), 물동이를 이고 가는 봉헌자(도19), 제물로 바칠 양과 소를 데려가는 봉헌자도 보입니다(도20).

 

도17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 서쪽 파사드, 내부의 프리즈
 
 
 
 
도18 파르테논 신전 내부 프리즈 , 행렬중 < 말탄 사람>
 
 
 
도19 파르테논 신전 프리즈 <물동이를 들고 가는 봉헌자들 >
 
 
 
도20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 프리즈 <양을 바치는 사람들 >
 
 
 
 
 

그들의 의도는 건물의 외부의 장식에 더욱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오르며 제일 먼저 만나는 서쪽 박공에는 이 도시를 놓고 아테네와 포세이돈이 겨루는 장면이 새겨져 있으며(도21), 그 반대편에는 아테네 여신의 탄생장면을 나타내는 조각들이 채워졌습니다(도22). 이러한 주제의 이야기들은 도시의 기원과 성격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도21 파르테논 신전 서쪽 팀파늄, <아테네와 포세이돈의 경쟁>
복원모형
 
 
도22 파르테논 신전 동쪽 팀파늄, <아테네의 탄생 >, 복원모형
 
 
 
 
 

건물의 양 박공 이외에도 메토프와 프리즈에는 많은 장식조각들이 새겨져 있는데, 주로 거인족들과 싸우는 신들의 무용담, 아마존과 싸워 이긴테세우스, 켄타우로스와 싸우는 아테네 영웅들의 이야기를 다루었습니다(도23, 24).

 

도23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 남쪽 메토프
<켄타우로스와 싸우는 라피타이족>
 
 
도24 파르테논 신전 남쪽 메토프
기원 전 447-438년경, <켄타우로스와 싸우는 라피타이족>
 
 
 
 

이 같은 주제에서 우리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즉 아테네를 지킨 神과 영웅을 善에 놓고 그와 싸운 트로이나 아마존, 거인족, 반인반수의 켄타우로스를 惡에 놓은 기본 구조가 그것입니다. 아래, 아폴로 신전의 프리즈 부분인 <아마존을 내리치는 그리스 병사> 역시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도25).

 

도25 아폴로 신전, 프리즈 <아마존을 내리치는 그리스 병사>
기원 전 420-410,년, 높이 64cm, 런던 대영박물관
 
 
 
 
 

그리스를 위협하였던 적들은 되도록 혐오스럽고, 동물 같은 존재, 혹은 여성으로 그려내고 있는 반면 이들과 싸운, 즉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는 건강하고 보기 좋은 젊은 영웅의 모습으로 그려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범 아테네 도시 연방 외부의 적들은 아테네의 문명화된 질서와 신성을 위협하는 파괴적인 존재라는 무언의 이미지라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의 우리는 고대 그리스의 미술 생산품들을 미적인 범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리스신전 건축과 조각은 도시국가의 정치와 분리하여서는 생각할 수 없는 대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리스철학이 서구 사상사의 근간을 이루고, 신화가 서구 문화에 끊임없는 상상력을 제공하듯이, 그리스 미술 또한 이후 2500여 년에 이르는 서양미술의 역사에 중요한 전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수많은 예를 서양의 건축이나 조각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으로 대표되는 그리스 신전은 열주 위에 가로의 보와 삼각형의 박공을 얹는 형태였습니다(도1). 이러한 신전 건축양식은 시대에 따라 건축의 기능이 끊임없이 변해왔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식 고층빌딩이 세워지기 이전까지 무수한 변화를 겪으며 지속되었습니다. 팔라디오가 지은 비센차의 16세기의 별장(도2)이나 18세기 유럽의 왕궁, 그리고 워싱턴의 백악관(도3)과 같은 19세기 미국의 공공건물에 이르기까지 열주와 삼각형의 팀파늄은 서양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였읍니다. 이러한 신전건축 양식은 근대기에 우리나라에도 전해져 덕수궁의 석조전과 같은 건물들이 세워집니다(도4).

 

도1 익티누스 설계 <파르테논 신전 >
기원전 448-432년, 동쪽, 대리석, 아테네
 
 
 
도2 팔라디오 <빌라 카프라 로톤다 >
1567년 시작, 비센차, 이탈리아
 
 
도3 백악관, 1800년 건축 후 소실
1814년 재건축, 미국 워싱턴 D.C
 
 
도4 덕수궁 석조전, 서울
 
 
 
 
 

인체 조각방식 또한 르네상스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재 탐구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켈란젤로는 2000여 년 전의 그리스 작품 <창들고 가는 사람>에서 인체의 비례와 구조를 빌려옴으로써 르네상스 인체조각의 완벽함을 구현하고, 19세기의 카노바는 이를 다시 반복함으로써 신고전주의 조각을 이루었습니다(도5, 6, 7).

도5 폴리클레이토스
<창들고 가는 사람>
기원전 450년 경, 로마시대 모작
나폴리 국립 박물관
 
도6 미켈란제로 <다윗>
1504년, 대리석, 높이 434cm
피렌체 아카데미 미술관
 
 
도7 카노바, <나폴레옹 상>
1809년, 청동, 325*125cm
 
 
 
 
 
 

그리스인이 이룩한 이상적인 사실주의는 인류가 역사를 통해 만들어낸 가장 완성된 아름다움이라 칭송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움이나 취향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각 시대와 지역의 여건에서 형성된다는 점에서 본다면 고전적 아름다움 또한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사회와의 관련 속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대상물을 박물관이나 관광지에서 미술품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 당시 대상들은 미술품이기 이전에 사회에서 구체적인 기능을 지닌 건물이며 조각이었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의 원래 모습을 상상하여 그려놓은 아래 드로잉은 공공건물로서의 신전의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도8). 그리스 시대에 신전은 시민들이 모여 전쟁에서의 승리와 사회적 평안을 염원하던 장소였습니다. 또한 신전이나 광장에 장엄하게 세워졌던 조각상들은 그리스 사회의 갈등과 혼란을 해결하고자 신에게 올리는 봉헌물이었으며, 또한 통치자들의 정치이념을 전달하던 공공조각이었던 것입니다.

 

도8 파르테논 신전 상상도
 
 
 
 
 
 

대영 박물관에 있는 <헤라클레스>(도9)는 감상이 편리하도록 관람자의 눈 높이에 전시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오른쪽 그림에서 보다시피 이 조각은 원래 신전의 높은 팀파늄에 놓인 건축 장식의 한 부분이었습니다(도10). 헤라클레스 상이 박물관에 놓여 있을 때 관람자들은 이 조각상의 인체의 표현, 비례, 양감과 같은 조형적인 요소를 보게됩니다. 그러나 원래의 위치에 놓여지면 미술품으로서의 가치보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기능이 더욱 중요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9 박물관에 놓인 헤라클레스
 
 
 
도10 파르테논신전 동쪽 페디먼트
기원전 438-432년경, 대리석
 
 

이러한 위치변화는 고대유물에 대해 관심이 높았던 18-19세기, 유럽인들의 유물수집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19세기의 그림을 보면 파르테논 신전의 신상들 중 하나였던 헤라클레스 상이 원래의 자리에서 분리되어 귀족들에게 완상품처럼 감상되고 있는 모습을 잘 볼 수 있습니다(도11). 그러므로 과거의 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술품 한 점을 독립시키기보다 되도록 원래의 장소, 기능과 연관짓는 노력을 해야할 것입니다.

 
 

 

도11 아커발드 아처, <엘진 룸 >
1819년, 런던 영국 미술관
 
 
 

고대의 신전과 신상을 제작한 미술가들은 오늘날의 작가와는 달리 '장이'에 지나지 않았지만 파르테논을 설계한 건축가 익티누스나 조각 총감독이었던 피디아스와 같은 뛰어난 기술자들은 당시 최고의 정치 지도자 페리클레스와 대면하는 등 사회적 대우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 미술의 활발한 전개는 바로 이들의 경쟁적인 노력의 결실이었습니다. 기하학적인 그림의 도자기가 유통될 때 아테네 도공들은 신화의 한 장면을 실감나게 묘사함으로써 사실적인 이야기 그림의 길을 열었고, 조각가는 경직된 자세의 정면 포즈에서 벗어나 움직이는 듯한 자연스러움에 해부학적인 사실성을 구사하였습니다. 이러한 활발한 기법의 발달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 변하여서 격동적인 시대인 그리스 말기엔 더욱 격렬한 미감을 표현한 조각들을 생산하게 됩니다. 미술사에서는 이러한 조형형식상의 변화를 양식의 흐름이라 부릅니다.

그리스 미술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시대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기하학적인 시기 Geometric period 기원전 900-700
아르카익 시기 Archaic period 기원전 620-480
고전기 Classical period 기원전 480-323
헬레니즘 시기 Hellenistic period 기원전 323-146
후기 헬레니즘 시기 Late-Hellenistic period 기원전 146-30

 

자료 출처는 서양미술사 1 페이퍼에 나와있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tarrysky 2004-09-25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판다님, 서양미술사 6번 페이퍼, 똑같은 게 3개나 올라왔어요. ^^
아래 2개는 지워주셔요~

panda78 2004-09-25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어? 오류났나보네요. 네이- 지우러 갑니다요- ^^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강력한 신권사회에서 미술은 어느시대 보다 장엄하게만들어졌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정형화된 형태가 쉽게 변할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현재의 그리스 지역에서 발달한 에게 미술은 밝고 명랑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지역은 그리스 동남쪽의 키클라데스 제도, 크레타 섬 그리고 그리스 본토인 미케네 지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들은 고분을 장식하기 위해서가 아닌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세속적인 즐거움이 묻어있는 미술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이 지역은 서구의 고대신화가 펼쳐지고 서양 미술의 고전을 이루는 그리스라는 점에서 더욱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키클라데스 미술

이집트의 고왕국이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설하던 기원전 2700년 경 에게해 동쪽의 작은 섬들에서는 청동기 문명이 독자적으로 꽃피었습니다. 우리는 이곳을 키클라데스 또는 시클라데스 제도 라고 부르는데 이곳에서는 아래 조각품 같은 단순하고 우아한 조각들이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눈, 코, 입의 구체적인 형태없이 코 부분만 조금 높이거나, 사각형의 상체에 단순한 선각 만으로 팔을 나타낸 절제된 미감이 실로 돋보입니다(도1,2). 전체적으로 추상화되어 있는 이 우상들은 20세기의 추상조각, 특히 브랑쿠지의 조각형태를 생각나게 하죠.

도1 <여성상>
기원전 2500-2000년 경, 대리석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
 
 
도2 <하프를 타는 남자>
기원전 2700-2500년전, 그리스, 키클라데스, 대리석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
 
 
 
 

미노스 미술

키클라데스 바로 남쪽에 있는 크레테 섬에서는 훨씬 세련되고 평화로운 문명이 발전합니다. 전설적인 왕인 미노스를 본따 미노스라 불리는 이 문명은 지중해 동쪽 전 지역을 포괄하며 번창하였습니다. 고대 그리스 문명이전의 시대를 말해주는 이 지역에 관한 이야기는 오랫동안 구전문학을 통해 신화로만 전해져왔습니다. 그러나 19세기 말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쉴레이만이 미케네와 트로이를 발굴해 냄으로써 허구로만 받아들여졌던 호머의 서사시가 역사적인 배경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 졌습니다.

크레테는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와 같은 중앙집중식의 강력한 국가는 아니었습니다. 이 곳에서 발굴된 크노소스 궁전만 보더라도 이집트의 고분이 보여주는 전체적인 외관의 일관성을 찾기는 힘듭니다(도3,4,5,6). 도4의 도면을 보면 미로처럼 작게 구획된 방들이 겹겹이 싸여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 신화에서는 이 곳을 미노타우르스의 '미궁'으로 묘사했는지도 모릅니다.

 

도3 크레테, <크노소스 궁전> 기원전 1700-1400년 전
 
 
 
 
도4 <크노소스 궁전>의 도면, 그리스
 
 
 
 
 
 
생활공간 보다 사후세계의 무덤을 더 크게 지은 이집트인들은 내세를 중요시 여긴 반면, 크레테인들은 궁전을 아름답게 지어 현세를 즐겼습니다. 크노소스 궁전의 회랑(도5,6)은 건물 내부공간과 외부를 원활하게 이어주는 역할을 하여서 사계절 온난한 지중해성 기후의 생활방식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도5 <크노소스 궁전> 입구,
기원전 1700-1400년전, 그리스, 크레테
 
 
도6 <크노소스 궁전> 대회랑
기원전 1700-1400년전, 그리스, 크레테
 
 
 
 
 
회랑을 지나 내부로 들어가면 방들은 경쾌한 프레스코 벽화들로 장식되어 있습니다(도7,8). <옥좌의 방>(도7)은 아마도 왕의 집권실이었겠지요. 옥좌 양쪽엔 그리핀(griffin: 반은 사자, 반은 새 모습의 환상적인 동물)을 좌우대칭으로 배치하여 옥좌를 더욱 권위있게 하였습니다. 환상적인 동물을 좌우대칭으로 배치하는 방식은 주제2에서 살펴 보았듯이 메소포타미아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미지는 현실에서 찾아볼 수 없는 초자연적인 힘이 왕을 보호한다는 암시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도7 일명 <옥좌의 방>
 
 
 
 
도8 일명 <왕후의 메가론> 기원전 1600-1450
크레테, 크노소스 궁전
 
 
 
고고학자들이 <왕후의 메가론>이라 불러 온 도8의 방은 아마도 중요한 방문객을 맞이하였던 접견실이었다고 짐작됩니다. 바다 속을 헤엄쳐 다니는 돌고래의 모습이 아주 경쾌하죠? 궁전 내부를 자신들과 친숙한 소재로 이렇게 밝게 장식한 민족은 미술의 역사에서 다시 찾아보기 어려울 듯 싶습니다.
 
 
크레테 섬 북쪽에 있는 테라섬(Thera, 현재의 Santorini)에서는 당시의 집 몇 채가 그대로 발굴되어 생생한 모습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집은 기원전 2000년대의 중반에 일어난 화산폭발에 의해 화산재로 덮여 있다가 1976년에 발굴되었습니다. 기원 후 79년에 화산재로 덮였다가 19세기에 발굴 된 로마시대의 도시 폼페이처럼 말입니다.

이 집(도9)의 한 방은 도10과 같은 구조를 보여줍니다. 이 방에 남아있는 벽화를 한번 봅시다. 낚은 고기들을 엮어서 들고 가는 소년들(도10,11)은 그들 사이에 있는 작은 제단(방 왼쪽 코너)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보아 이들은 생선을 봉헌물로 바치고 있는 듯 합니다. 잠시 양식을 볼까요? 이집트 벽화의 인물같이 이들도 측면의 얼굴, 정면의 어깨, 측면의 발을 하고 있어서 이 시대의 이집트와 에게는 공통의 양식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면도 있지요? 이집트 인물은 엄격한 법칙에 의해 그려진데 비해서 이 소년은 윤곽선이 좀 더 자유로운 모습입니다. 그리고 도10의 왼쪽 소년은 정 측면으로 그려지기도 하였습니다.

도9 테라섬의 아크로티리에 있는 서쪽 집
 
 
 
도10 도 9의 내부 중 5번 방, 기원전 16세기경
 
 
 
 
도11 <어부> 도10의 부분
아크로티리 출토, 기원전1450년경
프레스코, 높이109cm
아테네, 국립고고학 박물관
 
 
도12 <작은 함대들>
도10 방의 한 부분
 
 
 
 
 
도12의 프레스코 벽화는 도10의 방 남쪽 벽 윗 부분에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림을 보니 어떻습니까? 항구도시의 활발한 모습이 생생하지요. 벽돌로 쌓아 지은 집들은 굴곡진 산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사슴들이 사자에게 쫓기고 있군요. 섬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에는 돌고래가 튀어 오르고, 마을 앞 바다에는 배가 두 척 보입니다. 줄 지어 노를 젓는 가운데 배와 짐과 카노피가 있는 왼쪽의 배, 작은 함대라고 추정되는 이 배들에 탄 사람들은 화면 왼쪽 방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마을의 사람들도 집 앞의 문이나, 옥상에서 같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함대의 행렬이나 볼 만한 풍경들이 펼쳐지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크레테 문명의 또 한가지 특징은 거대한 신상을 별로 만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발견되는 것은 뱀을 들고 가슴을 드러낸 여자 정도입니다(도13,14). 이는 아마도 여사제를 형상화한 도기라고 추측됩니다. 또한 에게 미술에서는 소가 자주 등장합니다. 황소 등을 타고 넘는 곡예의 장면(도15)을 보면 황소가 무섭기 보다 마치 인간이 동물과 함께 즐기는 듯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장면이 조각으로도 많이 제작된 사실(도16)에서 미루어 보건데 이는 일종의 의식이었던 듯 싶습니다.

 

도13 <뱀을 든 여신>
기원전 1600년 경, 파이앙스 도기, 높이 34cm
헤라클레리온, 고고학 박물관
 
 
도14 <뱀을 든 여신>
기원전 1600년전, 파이앙스 도기
헤라클레리온, 고고학 박물관
 
 
도15 <황소와 곡예> 크노소스 궁의 프레스코,
기원전 1450-1400년경, 헤라클레니온, 고고학 박물관
 
 
 
도16 <황소 위로 뛰어 오르는 곡예사>, 크레테, 크노소스 궁전
기원전 1600년경, 청동, 길이 15.5 cm, 런던, 대영박물관
 
 
 
 
 
에게 미술의 규모는 이집트나 서아시아 지역과는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작지만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 지역의 미술이 따뜻하고 자유분방하여 인간의 평화로운 삶을 느끼게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도17의 도기 전면을 휘감은 문어의 모습은 사실적이면서도 자유롭고 경쾌한 느낌을 줍니다. 도18 도기의 <추수>장면을 보면 수확을 하고 일터에서 돌아오는 농부들의 즐거워하는 표정이 역력합니다. 이처럼 세련되고 현실적인 삶의 모습이 드러났던 크레테 문명은 기원전 1400년경에 갑작스럽게 중단되었습니다. 학자들은 그 원인을 화산폭발이나 지진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도17 <문어 장식의 항아리>
기원전 1500년전, 그리스, 크레타
헤라클레리온, 고고학 박물관
 
 
도18 <추수>
기원전 1500년전, 그리스, 크레테, 하기아 트리아다 출토
헤라클레리온, 고고학 박물관
 
 
 
 
미케네 미술

평화롭고 경쾌한 크레테 섬의 미노스 미술과 비교해 볼 때 그리스 본토에서 전개된 미케네 미술은 훨씬 경직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면 도17 항아리의 변형이라 볼 수 있는 도19의 문양을 보면 같은 문어그림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느낌을 줍니다. 살아 꿈틀대는 듯 하던 문어는 좌우 대칭의 기하학적 문양으로 변해 있습니다. 도20의 입이 넓은 항아리도 미케네의 군사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미노스 미술과 미케네 미술에 이러한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완전히 민족성의 탓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일면 경계해야 할 태도이기도 합니다. 도19와 같은 미케네 미술의 대부분은 크노소스 왕궁보다 800년이나 지난 기원전 8세기경에 제작된 것이었으니까 시대적 변화라는 측면도 고려해야겠습니다.

 

도19 <문어모양 물병> 코스의 랑가다 제39호분 출토
기원전 12세기경
코스, 고고학 박물관
 
 
도20 <전사 크라테르>
 
 
 
 
 
 
미케네 미술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사자문>(도21)은 성벽의 한쪽 문 위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1250년 경에 성벽을 재확대하면서 놓았다고 추측됩니다. 그리스 본토는 북방민족의 침입이 잦아 성벽이 발달했는데 성문 위에 이러한 상징적인 이미지를 설치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이는 자국민과 이민족 모두에게 향한 군사적 과시이니까요.

 

도21 <사자문> 미케네
기원전 1250년경
 
 
 
도22 메소포타미아 도장의 세부
 
 
 
 
이 <사자문>은 지난 세기 동안 고고학자들에게 큰 관심이 되어왔습니다. 미케네에서 보기 드문, 거의 예외적인 조각이라는 점, 성벽은 거친 돌인데 반해 이 조각만 유독 고운 대리석이라는 점, 그리고 동물이 양쪽에 대칭적으로 있는 이러한 모티브의 출처에 대한 의문 때문입니다. 동물이 대칭으로 있는 모티브는 분명 메소포타미아의 전통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의 원 기둥은 크노소스궁전의 원기둥(도6)과 매우 흡사합니다. 아마도 왕궁의 기둥으로 신성함을 나타내고 힘의 상징인 사자가 이를 받치게 함으로써 통치자의 합법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였을 것입니다.
 
 
미케네 지역에 있는 <사자문>이 미노스와 메소포타미아의 특징을 공동으로 지니고 있음에서 보았듯이 지중해 동쪽은 문물의 교류가 활발하였습니다. 터키부근에서 침몰된 배(도23)는 도자기를 가득 채워 운반하고 있으며, 사이프러스에서 발굴된 도24의 도자기는 우리가 크노소스왕궁(도7)과 미케네의 <사자문>(도21)에서 본 좌우대칭 동물 모티브의 변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도23 울루 부룬(터어키)의 난파선 재조립
기원전14세기
 
 
 
도24 크라테르
엔코미 출토
 
 
 
 
 
이들은 또한 매우 특징적인 분묘문화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아래 납골당은 오랫동안 미케네 인들에 의해 사용되었던 돔형의 고분으로, 기둥없이 지어진 건축형태입니다(도25,26).

 

도25<그리스, 미케네, 보물의 납골당>의 외부 모습
기원전 1300-1250년경
 
 
 
도26<그리스, 미케네, 보물의 납골당>의 실내 천장의 모습
기원전 1300-1250년경
 
 
 
 
 
이 묘를 처음으로 발견한 슐리만은 이곳을 '아트레우스의 보물창고'라고 이름하였습니다. 황금으로 만든 유물들이 많이 발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그렇게 믿고 있는 학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곳에서 발굴된 컵과 매장용 마스크를 봅시다. 도27,28의 잔은 황금을 두드려서 만든 잔입니다. 물론 일상에서 쓰던 잔은 아니며 특히 소로 밭을 가는 모습과 투우를 벌이는 모습은 소와 관계된 의식의 하나로 생각됩니다. 단축법을 사용하여 좁은 공간에 효율적으로 재현한 생동감 있는 모습이죠. 도29의 황금가면 역시 금을 두드려서 만든 것입니다. 죽은 이의 얼굴에 씌웠던 가면인데 여러가면이 서로 다른 얼굴 모습인 점에서 미루어 보면 아마도 죽은이와 닮게 만들려는 노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케네 문명은 기원전 8세기 즈음 북쪽에서 남하한 도리아인들에게 멸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 본토로 상륙한 해양문명 특유의 현실적이면서도 낙천적인 기질은 그대로 그리스 미술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도27<바피오의 컵>
기원전 1500년경, 7.5 :9cm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
 
 
도28<바피오의 컵>
기원전 1500년경, 7.5 :9cm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
 
 
도29 <황금가면>
기원전 1600-1500, 금, 높이 약 19cm
아테네 고고학 박물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메소포타미아 지역

 유프라테스 강 하류의 비옥한 지역에 분산되어 있던 농경사회에서도 신격화된 지배자가 통치하는 고대국가가 형성되었습니다. 지금의 이란, 이라크에 해당하는 아라비아 지역으로 우리에겐 서아시아이지만 유럽인에겐 오랫동안 동방으로 지칭되었습니다. 이민족의 침입 통로가 없었던 이집트와는 달리 이 지역은 사방이 이 민족이었습니다. 현대에도 분쟁이 끊이지 않는 이 지역의 종족간의 갈등은 그 뿌리가 매우 깊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4000년 전에도 이곳에서는 수메르로부터 시작하여 아카드,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페르시아와 같은 수많은 인종의 왕국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였습니다.

 

 
 

 

수메르

수메르 인들은 이 지역에 기원전 3000년 전 부터 인공으로 만든 계단식 언덕 꼭대기에 지구라트라는 거대한 건축물을 짓고 이 곳을 중심으로 경배를 드리고 생활하였습니다(도1,2,3,4). 지구라트는 '높은 건물'이라는 뜻이죠. 지구라트는 신전과 가옥이 혼합된 복합적인 건축 공간으로 죽은 이를 위한 건축인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비교되는 구조물입니다. 이 건축물은 주변에 큰 바위나 돌을 구할 수 없어서 진흙을 구워 쌓아갔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형태는 비슷하지만 그 재료와 용도가 다르지요. 벽돌 건축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특징으로 후대의 왕조에서 지은 바빌로니아의 성벽은 유약을 바른 벽돌로 발전하여 그 화려함을 더 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구라트는 수메르,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왕조를 거쳐 계속해서 건축되었습니다.

 

도1 <지구라트> 우르왕조, 기원 전 2100년 경, 이라크
 
 
 
도2 우룩 (Warka)의 지구라트 위에 세워진 <화이트 템플> 유적,
기원 전 3500-3000년경
 
 
도3 <지구라트>의 북동쪽 전면과 복원된 계단, 우르왕조
이라크, 기원 전 2100년 경
 
 
도4 <지구라트>를 공중에서 본 모습,
아랫분은 복원된 것이다.
 
 
 

 

 
 
수메르의 아부 신전에서는 크고 작은 인간 모양의 형상들이 많이 발굴되었습니다(도5,6). 커다란 눈은 무엇인가를 응시하는 듯, 그 느낌이 매우 종교적입니다. 상들이 한결같이 두 손을 쥐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경배자의 모습 같습니다. 이집트와 같이 이 상들의 경우에도 신체의 자연스런 움직임이나 사실적인 묘사는 만든 이의 관심 밖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보다는 큰 눈을 통한 종교적인 교감을 표현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을 것입니다.

 

도5 <아부 신전 출토의 조상들>
기원 전 2700-2500년경, 이라크, 텔 아스마, 가장 높은 것 76.3 cm,
시카고 대학 동양미술관
 
 
도6 <여성 두상>
기원 전 3500-3000년경, 석회석, 높이 20.3cm
바그다드, 이라크 박물관
 
 
 
 
메소포타미아의 미술에서는 반인반수 형태를 지닌 상상의 모티브가 자주 등장합니다. 우르 왕의 묘에서는 청동과 보석으로 만든 황소가 장식된 하프가 발견되었습니다(도7,8). 황소 머리 아래엔 동물 우화적인 이야기가 펼쳐 있습니다(도7). 사람 얼굴에 몸통은 소 형태의 반인반수가 중앙의 사람에 의해 좌우대칭으로 서 있으며, 그 아래 엔 사자와 갖가지 동물들이 사람 같이 두 발로 걸어 다니면서 음식물은 나르고 있습니다. 아마 향연을 준비하고 있는 듯합니다.

 

도7 우르 출토 하프의 상감 패널
기원 전 2600년 경, 31.1×11.3 cm
필라델피아, 펜실베니아 대학 박물관
 
 
도8 우르 왕 고분에서 출토된<황소 머리모양의 하프>
기원 전 2600년 경, 31.1×11.3 cm
필라델피아, 펜실베니아 대학 박물관
 
 
 
 
 

 

아카드의 바빌로니아 왕국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일찍 차지한 수메르 인들이 이 지역을 선사문명에서 자치도시 국가로 변모시켰다면, 수메르를 침략하여 승리한 아카드 족은 왕이 통치하는 전제국가로 이끌었습니다. <나람 신의 승리비>(도9)를 통해 우리는 호전적인 왕의 승리를 볼 수 있습니다. 뿔이 달린 헬멧을 쓴 왕은 태양과 달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아카드 족이 세운 바빌로니아 왕국은 함무라비왕 시대에 법을 만드는 등 체계가 잡힌 국가로 성장하였습니다. 높이 2.1m의 돌 아랫 부분에 쐐기 문자로 새겨진 이 법은 인류 최초의 법전입니다. 그리고 그 위엔 태양신 샤마쉬로부터 법의 내용을 전달 받는 함무라비왕의 모습을 새겼습니다.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듯이, 함무라비 왕의 법 또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신으로 부터 받은 것이라고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 법이 더욱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겠지요. 신은 함무라비 왕에 비해 훨씬 크게 묘사되었습니다. 어깨에서 무언가가 솟아 나오는 것을 보면 이는 아마 초자연적 능력을 가시화 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이처럼 법의 권위를 분명하게 나타내기 위해 이미지의 힘을 사용했습니다.

 

도9 <나람신 승전비>
기원전 2254-2218년, 사암, 이란, 수사출토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10 <함무라비 법전 비석>
기원전 1769년경, 높이 2.1 m, 부조
높이 71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11 <함무라비 법전>의 윗부분
기원전 1769년경, 높이 2.1 m, 부조
높이71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앗시리아 왕국

바빌로니아와 서로 패권을 다투다 기원전 900년경에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앗시리아는 그 엄청난 힘을 왕궁에 과시하였습니다. 궁의 한쪽 길이가 200m에 달하는 사르곤 2세의 왕궁은 실로 화려했습니다(도12,13). 한 기록에서 사르곤 2세는 "나는 내가 내 손으로 내 발 밑에 복종시킨 아수르, 나부 (…) 등의 노동력으로 내 궁을 지었노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도12 사르곤 2세의 왕궁 추정도
기원전 720년경 (Charles Altman의 도면)
 
 
 
도13 사르곤 2세 왕궁의 내부 추정도
 
 
 
 
도14 <라마수>
사르곤 2세의 왕궁, 기원전 720년경, 대리석
파리, 루브르 미술관
 
 
도15 <라마수>
사르곤 2세의 왕궁, 기원전 720년경, 대리석
파리, 루브르 미술관
 
 
도16 <사르곤 2세>
기원전 720년경, 대리석
파리, 루브르 미술관
 
 
 

도13에서 보는 바와 같이 왕궁은 채색된 환조와 벽면의 부조로 장식되었습니다. 지금은 채색이 벗겨져 있지만 조각만으로도 우리는 그 성격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왕궁 안의 양쪽에 버티고 있었던 반인반수 조각 라마수(도14)를 봅시다. 우선 얼굴은 사람이고 다른 부분은 동물이죠. 수염이 더부룩하고 뿔 달린 왕관을 쓴, 눈이 큰 위엄 있는 얼굴입니다(도15). 많은 학자들이 이 얼굴은 사르곤 2세의 모습(도16)이라고 말합니다. 몸통은 황소인데 독수리 날개를 지니고 있군요. 라마수는 땅과 하늘에서 힘센 동물의 특징을 모은 초인간적인 힘의 상징인 듯 합니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보면 라마수는 다리가 다섯 개나 됩니다. 물론 다리가 5개이기 때문에 그렇게 나타낸 것은 아니겠죠. 아마도 정면에서 보면 다리가 2개, 옆면에서 보면 4개가 보이도록 이런 방법을 쓴 것 같습니다.

 

 
궁 내부의 벽면 전체에 새겨진 방대한 부조는 주로 전쟁과 사냥의 장면을 다루고 있습니다(도13). 앗시리아의 가장 중요한 장르인 부조는 아주 낮은 부조기법으로 이야기를 서술적으로 펼치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아쉬바니팔 왕의 사자사냥 장면을 봅시다. 마차에 탄 왕은 활을 힘껏 당기고 있으며 신하는 앞뒤에서 사각지대를 막아주고 있습니다. 으르렁대며 떼를 지어 달려오는 사자들은 아주 용맹스럽습니다(도17,18). 죽어 가는 사자들도 매우 실감나게 묘사되었습니다. 창에 찔려 죽어가면서 피를 토하는 사자나 암사자의 모습을 보면 그 처참한 광경의 피 냄새가 진동하고 포효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도19,20).

 

도17 전쟁중의 아쉬바니팔 2세, 아쉬바니팔 2세의 왕궁, 기원전 875년, 높이 약 101cm
런던, 대영박물관
 
 
 
도18 아쉬바니팔의 사자사냥, 이자르, 니네베 출토
아쉬바니팔 북쪽 궁전의 부조, 기원전, 645-640년경
런던, 대영 박물관
 
 
 
 
도19 피 토하는 사자
 
 
 
도20 아쉬바니팔의 사자사냥, 이자르
니네베 출토아쉬나르팔 북쪽 궁전의 부조
기원전, 645-640년경런던, 대영 박물관
 
 
그럼 왕은 왜 사자사냥의 장면으로 왕궁을 장식하였을까요. 아쉬바니팔 왕은 평소에 하느님이 자신을 위해 이러한 야생의 동물을 주었다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생전에 사자 370마리, 코끼리 30마리, 황소 257마리를 잡았다고 자랑스럽게 기록하였습니다. 즉 이렇게 용맹한 동물들을 잡을 수 있는 왕은 더 큰 힘이 있음을 과시하는 방법이지요. 한 시기도 쉴 틈 없이 적과 대치하여야 했던 앗시리아에서는 용맹스러움이 가장 큰 덕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신 바빌로니아

아쉬바니팔왕이 그토록 강성하여 주변국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의 계승자에 이르러 이 지역은 다시 아카드 족에 의해 정복되었습니다. 그리고 신 바빌로니아 왕조가 세워졌습니다(기원전 612-538). 구약 성경의 다니엘 편에 묘사된 이 왕조의 느브갓네살 왕의 위력은 실로 막강하였습니다. 그의 시대에 지어진 '공중 정원'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입니다. 또한 바빌로니아의 지구라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약에서 지칭하는 바벨탑이라고 추정됩니다. 즉 그 만큼 위협적인 존재였던 것입니다. 이들의 문화는 강인한 앗시리아의 미술과 비교해 볼때 보다 섬세하였습니다. <이쉬타르문>(도21)은 유약을 발라 구운 벽돌로 지은 세련된 건축물의 일부입니다. 이들도 역시 앗시리아인들이 애용한 사자로 벽을 장식하였지만 규칙적인 패턴으로 묘사된 사자는 용맹스럽기보다 오히려 장식적인 안정감을 줍니다.

 

 
도21 신 바빌로니아의 <아쉬타르 문>
기원전 575년경
베를린 시립미술관
 
 
도22 도21의 부분
기원전 575년경
베를린 시립미술관
 
 
 
 

 

페르시아 제국

바빌론 왕국을 멸망시킨 페르시아는 이 지역의 마지막 승자였으며, 이집트와 그리스에게도 대단히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기원전 525년엔 이집트를 멸망시켰으며 기원전 4세기에는 그리스와 여러 번 접전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330년의 익수스해전에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가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패함으로써 동방의 왕국은 막을 내렸습니다. 이긴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의 페르세폴리스 왕궁을 초토화 시켰지만 그 폐허만으로도 우리는 옛 웅장함을 엿 볼 수 있습니다(도23,24).

 

도23 페르세폴리스
다리우스 1세
기원전 500년경, 폴리스궁전
 
 
도24 도23의 층계 부분
 
 
 
 
 
 
이웃 나라 이집트가 3000여 년 동안 한 민족에 의해 지속된 것에 비교하면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실로 여러 민족의 힘의 각축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힘의 과시는 용맹스러운 미술을 낳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탑이라는 상징적인 건축물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부터 받는 위협을 묘사하였거니와 이 지역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적대감 또한 매우 컷습니다. 그리스에서 다루겠지만, 그리스 미술에서는 젊은 영웅과 추한 적을 대치시키는 주제를 많이 다루었습니다. 그리스인의 적은 바로 페르시아였으며, 그 들은 이 적을 반인반수로 그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수메르인의 하프(도7,8)나 사르곤 왕궁의 문지킴이 '라마수'(도14,15)에서 보았듯이 반인반수의 상상적 존재는 바로 이 지역의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태우스 2004-09-24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 제 그림도 보여드리고 싶군요... 호호호

panda78 2004-09-24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ㅡㅡㅡㅡㅡㅡㅡ^ 마태님, 언제 마태님 실물부터 보여 주세요. 정말 뵙고 싶어요. 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