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밀키웨이 > 반 고흐 예술의 아버지, 밀레
밀레와 반 고흐전(9. 17~1999. 1. 3 파리 오르세 미술관)
밀레와 반 고흐 작품의 양식적·주제적 유사성은 물론, 인간적 면모의 유사성에 대해 새롭게 해석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 반 고흐는 밀레를 ‘정신적 아버지’로 간주할 만큼 단순히 예술적으로 영향받은 것을 넘어, 정신적으로 깊은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연일 엄청한 인파가 몰려들고 있는 이번 기획전을 직접 취재했다.
유명한 감독·배우가 제작 출연한 영화는 이미 제작 당시 반 이상은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미술 전시회 역시 관객을 몰리게 하는 인기 작가가 있게 마련이다. 이 중 반 고흐의 전시회는 거의 매번 미술관에 엄청난 수입을 가져다준다. 이번 전시 역시 9월의 전시 시작부터 많은 인파로 들끓어 전시장인 오르세 미술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줄을 서 있어야 했다. 막상 미술관에 들어가서도 이 특별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시 2시간 혹은 3시간을 꼬박 서서 기다려야 하는 현상이 계속되었다. 신문이나 잡지에서는 주말을 피해 관람하는 것이 좋으며, 예약만이 시간을 아낄 수 있다는 기사를 실을 정도다. 그러나 연이어 너무나 많이 몰려드는 인파 때문에 미술관 직원들은 일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급기야 미술관 노동조합에서 파업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유는 관객들이 너무 오래 기다린다는 것과, 그러므로 자신들이 너무나 과중한 일을 해야 하고, 결국 미술관이 제 기능을 제대로 못한다는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90)가 자기보다 약 2세대 앞선 장 프랑스와 밀레(Jean Francois Millet, 1814~75)의 작품을 모사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사실 반 고흐가 밀레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은 이미 10년 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밀레와 반 고흐전>이라는 같은 제목의 전시회가 열렸을 정도로 미술사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관계는 다소 무시되는 경향이 있으며, 일반 대중들에게는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반 고흐에게 있어 밀레의 영향은 반 고흐가 밀레를 ‘정신적 아버지’로 간주할 만큼 단순히 예술적 영향 관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오르세 미술관에서는 바로 이 같은 점을 강조하면서 작품의 양식적 면과 테마의 유사성은 물론이고, 인간적 면모의 유사성에 대해서도 새롭게 해석했다. 더 나아가 각각의 화가들의 재능과 개성도 함께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이번 전시회는 대부분의 반 고흐에 대한 전시회가 그렇듯이 회고전 형식의 전기적 접근이었던 데 비해 그와는 반대로 그 동안 다소 무시되었지만 명백하게 존재하는 반 고흐가 받았던 예술적 영향과 조형적인 추구에 관한 전시회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신경이 예민한 고독했던 한 천재의 신화를 깨뜨리는 것이 될지도 모르나, 렘브란트·들라크르와·고갱·피사로를 걸쳐 자포니즘(japonisme)에 이르기까지 반 고흐가 받은 좀더 일반적인 영향에 관한 폭을 넓히면서 밀레의 작품 세계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기회도 되고 있다.
반 고흐는 밀레의 작품을 모사했다
반 고흐가 밀레의 그림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875년 밀레가 사망하면서 드루(Drouot)에서 열렸던 유작 경매에서였다. 이때 반 고흐는 밀레의 작품 세계에서 신선한 예술적 충격과 종교적 느낌을 맛본다. 이때부터 그는 밀레 작품과 관련된 판화와 사진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1880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부터 밀레의 판화 및 사진을 보고 데생의 기초를 다졌으며, 밀레와 마찬가지로 농부들을 주제로 습작을 했다. 그렇지만 예술적 측면을 넘어 이 화가의 마음을 흔들었던 것은 오히려 밀레의 정신적인 면이었다.
반 고흐가 밀레에게 시종일관 충실했던 이유는 우선 밀레의 작품 세계에서 보여지는 형태적 요소의 엄격함 때문이었다. 동시에 자신의 생각과 밀레의 이념이 완벽하게 일치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즉 밀레와 마찬가지로 반 고흐는 자연에 뿌리 박은 농민들의 정서와 일체감을 느꼈으며, 이들의 삶 속에서 양식을 구하는 인간에 대한 성서적 이미지를 보았던 것이다. 또 밀레와 마찬가지로 영속적인 것과 겸허함이라든가 동정심을 농촌에서 찾고자 했다. 즉 그는 밀레의 농촌 풍경 그림들이 자신이 표현하고자 했던 하나님 혹은 ‘저 높은 곳에 있는 그 무엇’의 존재성을 일깨워 주고, ‘진지한 인간적인 감정’을 전달한다고 생각했다.
한편 밀레는 전통적인 종교 도상과는 다른 방법으로 인간의 삶을 조심스럽고 단순하게 그렸다. 따라서 그는 <만종> (1857~59), <이삭 줍는 여인들>(1857), <키질하는 사람>(1847~48) 등과 같은 농촌 생활들을 통해 자연의 종교적 차원과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의 종교적 차원을 성공적으로 표현한 화가였다. 반 고흐의 이러한 밀레에 대한 경의는 쌍시에(Alfred Sensier)의 《밀레의 생애 및 작품》(1881)을 읽고 난 후 더욱 심화된다. 쌍시에는 밀레를 산업화 및 근대화와는 거리가 있는 소박한 촌사람으로서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가난한 미술가로 과장되게 묘사했으나, 반 고흐는 밀레의 이 같은 측면에 오히려 깊이 매료되었다.
그러므로 반 고흐에게 있어서 밀레는 단순히 예술적인 안내자일뿐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도 모범이 되는 것이다. 언젠가 반 고흐는 “나는 미술가의 작품 세계에서 작품 자체만큼이나 그 작품을 만든 사람에게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반 고흐는 밀레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몇몇 모티프를 끌어 왔으며, 또한 자연 속에 살아가는 인간 존재에 대해 밀레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농민의 노동에서 찾은 종교성
이번 전시에는 이 두 화가의 작품 80여 점이 전시되었다. 이들 작품들은 이 두 화가들의 작품 세계를 쉽게 비교할 수 있도록 테마별 혹은 연대기적으로 배치되었다.
첫 번째 전시실에는 반 고흐가 1886년 파리에 오기 전까지 제작했던 초기 습작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시기에 그는 <감자 캐는 여인>(1885), <농부 아내의 얼굴> (1885) 등과 같이 농부들을 주제로 작품에 몰두했다. 이러한 작품들에서 보이는 인물 표현은 실제로 잘 다듬어지지 않았다. 이는 쌍시에가 <곡괭이에 지탱하여 쉬고 있는 농부>(1860~62)를 제작하던 시기 밀레를 묘사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쌍시에는 “그(밀레)는 농촌 그림 속에 거칠고 세련되지 않은 인물들, 즉 인간 존재가 항상 동물 위에 존재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는 듯한 표현을 주저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사실 반 고흐는 밀레보다 오히려 더욱 야만적인, 거의 캐리커처에 가까운 인물상을 보인다.
결국 이 시기 반 고흐의 작품들은 밀레의 작품과 주제·배치·채색 등에서 매우 유사함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두 화가의 차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즉 밀레의 작품이 모든 것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인물, 부드러운 풍경 위에 비롯되는 고요함이 주된 분위기라면, 반 고흐가 그린 네덜란드 농부들의 얼굴은 야만성이 넘치는 개성과 무엇인가 어색한 뒤틀림을 보여주고 있다. 같은 시기 반 고흐는 밀레가 <만종> <이삭 줍는 여인들> 등에서 등장 인물들을 매우 인간적이며 숭고하게 표현한 것을 재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젊은 화가의 유화 습작들은 밀레가 보여주었던 인물들을 다시 재현해 내는데 성공하지 못한다. 화면의 인물에 운동감을 부여하는 것이 그리 쉬운 작업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두 번째 전시실에 들어서게 되면 관람객들은 반 고흐가 농촌이라는 테마를 이용해 밀레가 구현한 경건하고 종교적인 정신성을 표현하기에 이르렀음을 파악하게 된다. <영원의 문>에서 반 고흐는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음울한 느낌과 죽음 이후의 은신처, 혹은 내세에 대한 느낌을 표현했다.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행위를 일생 동안 지속하다가 결국 자기 자신도 흙으로 돌아가는 농부의 자세에 대해 반 고흐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포가 아니라 그에 대한 경건함이었다.
“나도 이 초라한 늙은이와 마찬가지로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무엇인가 저 높은 곳’에 대한 믿음을 느낀다.”라는 그의 언급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반 고흐는 죽음은 끝이 아니며 흙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는 매우 상징적인 개념으로 농부의 죽음을 해석했다.
반 고흐가 밀레의 그림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875년 밀레 사망 직후 열렸던 유작 경매에서였다. 이때 반 고흐는 밀레의 작품 세계에서 신선한 예술적 충격과 종교적 느낌을 맛본다. 이때부터 그는 밀레 작품과 관련된 판화와 사진을 모으기 시작했고, 1880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부터 이를 보고 데생의 기초를 다졌다.
‘씨 뿌리는 사람’에 담긴 교감
반 고흐는 밀레의 <그레빌 성당> (1871~74)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는다. 이를 계기로 <농부들의 공동 묘지> (1885), <오베르 쉬르 와즈 성당>(1890) 같이 시골의 성당들을 많이 그리게 된다. 그러나 성당이라는 건물 자체를 표현하는데 충실했다기보다는 어떤 감정을 전달하고자 했다. 그런데 <농부들의 공동 묘지>에 묘사된 네덜란드 누아낭(Nuenen) 교회의 탑이 1885년 어느 날 무너진다. 이때 반 고흐는 그 사건을 매우 상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즉 인간과 마찬가지로 종교 역시 시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으므로 결국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영원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느낌이 <오베르 쉬르 와즈 성당>에 표현된다. 이 작품의 매우 강렬한 색채와 표현적인 특성, 특히 성당 위편의 검푸른 하늘은 1885년 당시 반 고흐의 놀랍고 복잡했던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반 고흐는 이러한 영원성을 농부의 일상적인 노동에서 찾았다. 즉 씨 뿌리기·밭 갈기·수확하기 등은 끊임없는 창조의 행위이며, 농부의 죽음 역시 반복의 순환인 것이다. 결국 반 고흐에게 있어서 땅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들은 작품 모델 이상인 셈이다. 이 같은 느낌은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에 근거한 반 고흐의 일련의 작품들에서 살펴볼 수 있으며, 아울러 그가 어떻게 밀레의 작품 세계와는 다른 순수한 자신만의 세계에 이르게 되었는지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밀레는 <씨 뿌리는 사람>에서 일하는 농부의 고귀함을 처음으로 표현한다. 반 고흐는 이 작품을 폴 에드메 르 라(Paul-Edme Le Rat)가 밀레의 그림에 근거해 제작한 판화에서 처음 보게 된다. 반 고흐는 씨 뿌리는 사람의 형상에서 창조 행위의 알레고리와 그의 신성함을 간파한다. 1881년 <씨 뿌리는 사람>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에서 인물의 역동성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발걸음도 불안스럽고, 팔의 자세도 어색하다. 그렇지만 1882년 같은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에서는 생동감 있는 인물을 창조, 거기에 의도적으로 인물을 동물에 가까운 형태로 표현한다.
1883년 이후 반 고흐는 <씨 뿌리는 사람> 시리즈를 유화로 그리기 시작했다. 유화로 그린 첫 번째 작품은 유실되어 볼 수 없다. 그러나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밀레의 어두운 색을 좀 더 다양한 색채로 대체했다고 밝히고 있다. 1888년 프랑스의 아를르(Arles) 시기부터 그는 다시 이 작업을 시작, 밀레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그는 밀레의 휴머니즘을 들라크르와의 강렬한 색채와 연결시키게 된다. 빛나는 색채로써 흙에 사는 인간의 고귀함을 고양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 시기의 또 다른 작품에서 그는 고갱의 영향으로 인물의 실루엣을 변형시킨다. 씨 뿌리는 사람은 전경에 위치하여 몸의 일부는 화면으로 잘려지고, 대각선으로 지나가는 나무가 화면을 압도한다. 1889년 생 레미 요양소에서 제작한 같은 시리즈의 다른 두 작품에서는 씨 뿌리는 사람이 밀레처럼 더 이상 화면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 대신 대신 밀레와는 달리 매우 강렬한 색채를 사용한다. 결국 반 고흐는 밀레를 모델로 출발하여 근대적이고 자율적인 <씨 뿌리는 사람>을 제작하는데 성공한다.
<씨 뿌리는 사람> 시리즈 이외에 반 고흐가 밀레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다른 작품들을 볼 수 있다. 네덜란드 시기에 반 고흐는 밀레를 절대적인 모델로 간주했다. 그러나 1886년 프랑스에 도착한 이후 그는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신의 순수한 정체성을 갖기 위해 조금씩 변화한다. 즉 파리에 정착하면서 반 고흐는 자율적인 테크닉과 동시대 인상주의 화가들의 밝은 색채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밀레의 어두운 색채와는 동떨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1888년 봄, 파리 생활을 청산하고 아를르에 도착한 그는 꽃과 열매로 가득한 프로방스 지방의 과수원에 정경에 푹 빠지게 되어 다시 밀레의 농촌 테마로 돌아간다.
밀레를 뛰어넘은 반 고흐의 독창성
<밀 짚단이 보이는 밀밭>(1887) 등과 같이 이 시기에 그려진 농촌 풍경 그림에서 그는 농부들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표현한다. 밀레의 어두운 색을 버리고 프로방스 지방의 작열하는 태양과 밀밭의 생생한 색채를 사용했다. 결국 그는 이 시기에 근대 미술과 농촌이라는 주제를 양립시키기에 이른다.
1889년 생 레미 요양소에서 지내면서 반 고흐는 렘브란트·들라크르와·고갱 그리고 특히 밀레의 작품에 근거해 제작된 수많은 판화 작품들을 유화 및 색채화로 바꾸려고 하였다. 그는 테오가 보낸 밀레 작품의 판화들을 모눈 종이에 그대로 베낀 후 색깔을 칠하는 작업을 했다. 그는 이 같은 작업을 “이것은 순수하고 단순하게 복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른 언어-색채의 언어-로 흑백 명암에서 느껴지는 인상을 번역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작업은 1889년 밀레가 제작했던 <농사일>(1852) 시리즈 복사로 시작됐다.
이번 전시회장의 벽면 하나는 이 두 화가의 <농사일> 시리즈 작품들과, 반 고흐가 참조했던 자크 아드리앙 라비엘(Jacques Adrien Lavielle)의 판화 작품으로 채워져 있다. 이러한 작업 속에서 반 고흐는 주제에 대해서는 밀레를 잘 따른 반면, 세부적인 면은 나름대로 자유로운 해석을 시도했다. 예를 들면, <꼴 말리는 사람>(1889) 등은 배경을 자유롭게 표현하였으며, 새롭게 칠해진 색채로 작품은 더욱 풍요로워진다. 이어서 그는 밀레의 <삽질하는 사람들>(1889), <하루의 네 시기>(1889~90) 시리즈, <까마귀가 있는 겨울>(1862), <첫걸음>(1858년경) 등을 복사했다.
<하루의 네 시기> 시리즈 중 <낮잠>에서 반 고흐는 하늘과 인물들이 입고 있는 푸른 색 옷을 보라색 터치가 조금씩 가해진 밀밭의 노란 색과 대비시킴으로써 그 푸른 색의 뉘앙스를 강조하고 있다. 결국 그는 밀레가 <하루의 네 시기> 시리즈에서 표현했던 것처럼 인간과 자연 사이의 평화로운 교감을 따르면서 동시에 분할된 붓 터치의 생생한 색채를 사용함으로써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을 완성하게 된다. 이번 전시회는 기존의 다른 전시회들과는 달리 두 작가의 주제 및 형태의 유사성, 즉 양식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것을 넘어 반 고흐의 작품 전체에 흐르는 삶에 대한 이념이 밀레로부터 받은 가장 큰 영향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