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기원』의 저자 찰스 다윈을 소개합니다.


찰스 다윈은 흔히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 지동설을 증명한 갈릴레이와 함께 인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3대 과학자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 다윈이 1859년에 발표한 『종의 기원』은 인류 역사를 바꾼 100권의 책 가운데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중요한 책이지요.


1962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제임스 왓슨은 다윈에 대해 다음과 같은 극찬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내 어머니보다 더 중요하다. 그가 없었다면 생명과 존재에 대해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다윈은 청년기에는 의사가 되기 위해 에든버러 대학에 들어갔으나 도중에 그만 두고 박물학만 파고들었는데, 실망한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성직자로 만들기 위해 케임브리지 대학에 보냈다고 하지요. 그러나 결국 그는 자연사(自然史)를 평생의 학문으로 선택하였고, 1831년에는 영국 해군 측량선 비글호를 타고 5년에 걸친 '역사적인 항해'를 하게 도지요. 이 비글호가 갈라파고스 섬과 함께 인류의 역사를 바꾼 가장 유명한 배가 되리라고는 그 당시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테지요.


다윈은 비글호와 함께 여행하는 동안 남미와 대서양, 태평양과 인도양을 넘나들며 수많은 동물과 식물을 채집하였으며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마침내 '종의 기원'에 대한 극적인 영감을 얻게 되지요.


다윈은 그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관찰 전에 추리하는 것은 필요하고 관찰 후에 추리하는 것은 유용하지만, 관찰 중에 추리하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이다'라고 말이지요. 그토록 신중한 그였기에 그는 비글호와 함께 했던 5년 동안의 오랜 항해 끝에 영국으로 돌아와서도 연구에만 몰두했습니다. 여행기인 『비글호 항해기』를 출판한 뒤 무려 20여 년 동안, 오로지 진화론을 입증할 방대한 증거와 자료들을 수집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던 셈이지요. 

오랜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마침내 그는 1859년에 인류를 미망에서 깨어나게 만든 『종의 기원』을 출판합니다. 다윈의 이론은 비록 일부의 오류는 포함하고 있지만 그의 대부분의 이론은 고도로 발달한 현대의 과학적 발전에 의해서 약화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더욱 확고한 이론으로 자리를 잡고 있지요.

『종의 기원』의 핵심 내용은 간략합니다. 생물은 창조되지 않고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으며 생물이 생존하는 동안 생식과 유전을 통해 끊임없는 변이를 일으키며,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를 거친다는 것이지요. 한편 자연계의 생물은 제한적인 생존환경 때문에 서로간의 생존경쟁이 벌어지며, 결국 환경에 대하여 유리한 변이를 가진 개체만이 생존하고 그 외에는 도태되는 ‘적자생존’이 일어나며, 이 같은 과정을 거친 생물의 형질변이가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축적되어 진화가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결국 개체 뿐만 아니라 생물종 자체도 끊임없이 새로운 변종을 낳으며 오랜 기간 동안의 진화를 거치고 나면 결국 새로운 종이 탄생한다는 것입니다.


다윈이 살던 시대에만 하더라도 세계는 창조의 입김에 의해 생명이 불어넣어 졌으며, 인간은 그 중에서도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존재였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윈은 자연계의 생물의 진화를 '나뭇가지'에 비유해 설명하고, 포유류나 영장류 역시(인간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무수히 많은 생물체와 똑같이 나뭇가지 중 하나일 뿐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다윈의 이론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정도로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다만 그러한 이론이 기존의 '창조적 세계관'과는 너무나 상반되는 이론이었기 때문에 그는 평생에 걸쳐 '반박당하지 않을만큼 완벽한' 이론을 세우기 위해 끊임없는 연구에 매달렸으며, 그런 그의 노력이 그를 위대하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과학자로서의 나의 성공은, 그것이 어느 정도의 것인지는 별도로 하고 ······ 복잡한 갖가지 심적 소질과 조건에 의해 결정되어 왔다. 이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 과학에의 사랑 - 어떤 문제라도 오랫동안 끝까지 생각하는 무제한의 강한 인내심 - 그관찰이나 사실 수집에서의 근면함 - 그리고 창안력과 상식이 함께 부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 "

 - 다윈,『자서전』 중에서

『종의 기원』은 생물학은 물론 사상사적인 측면에서도 획기적인 기준을 세운 고전입니다. 다윈이 생존했던 시기에도 종(種)이 진화한다는 생각은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었으나, 다윈은 자연선택이라는 진화 메커니즘을 주장하고, 나무에서 뻗어가는 가지에 비유해 종의 분화를 설명했던 것입니다.

다윈의 진화론이 몰고 온 파장은 대단했으며, 신에 의한 창조설이 일반론으로 받아들여지던 시대였기에 종교계는 물론, 다윈의 진화론에 반대하는 기존 학계로부터도 심한 반박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거역하는 못된 궤변”이라는 종교계의 거센 비난은 다윈으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다윈의 생각과 주장에 열광하는 옹호자들도 속속 생겨났습니다. "난 정말 바보다. 이처럼 쉬운 설명을 왜 떠올리지 못했을까!” 영국 동물학자 T.H. 헉슬리의 이 탄식은 『종의 기원』의 가치를 단번에 알려줍니다.


다윈의 ‘혁명’은 이 책이 출간된 지 16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다윈의 '생명은 진화한다'는 사상은 자연과학은 물론 의학.철학.심리학.문학.경제학 등 수많은 잔가지들로 계속 자라나 뻗어나가고 있으며 그 성장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종의 기원』을 읽어 보면 생명체의 진화와 다양성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우리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깊은 사색을 하게 만듭니다. 내용이 너무 전문적일 것 같아서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온갖 다양한 생명들을 왕성한 호기심으로 관찰하고 그 가운데서 진리를 찾아 내고자 했던 다윈의 열정도 느낄 수 있으며, 또 여러 동식물들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도 가득 담겨 있습니다.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을 발표한지 12년 뒤에 마침내 『인간의 유래』를 발표합니다. 『종의 기원』에서 '훗날 인간의 기원과 역사에 한줄기 빛이 비춰지게 될 것'이라고 예고한 대로, 인류의 조상이 과연 어디서부터 갈라져 나왔는가를 추적하는 집요한 연구가 이 책에 담기게 되지요.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다윈이 밝혀낸 인류의 조상은 협비원류, 일명 긴꼬리원숭이였습니다. 여기서 갈라져 나온 유인원들이 오랑우탄, 고릴라, 침팬지, 보노보 그리고 인간이었습니다. 인류가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와 침팬지와 구분된 시기는 대략 지금으로부터 700만 년 전이었습니다.

 

다윈의 끈질긴 관찰과 추론으로 밝혀낸 심오한 생각들은 오늘날 수많은 생물학자들과 진화심리학자들을 너무나 자주 좌절시킨다고 합니다. 현대에 와서 비약적으로 발전한 첨단 분자생물학이나 유전학 등에 힘입어 현대의 과학자들이 '인간 본성'에 관한 새롭고도 탁월한 이론을 전개해 볼 욕심으로 눈에 번쩍 뜨이는 주제를 찾아 막상 연구에 착수하려고 하더라도, 그런 시도들의 대부분은 오래 전에 찰스 다윈이 내놓은『종의 기원』이나『인간의 유래』등에 '이미 다 나와 있기 때문에' 도무지 새로운 연구 주제를 찾는 일조차 어렵기 때문입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들이 단 하나의 기원으로부터 유래되었다는 놀라운 생각을 떠올리게 된 결정적 계기는 갈라파고스 섬에서였습니다. 비글호를 타고 여행하는 동안, 이미 남아메리카에서 많은 화석을 발견한 다윈은 과거에 멸종한 생물이 현재 살아 있는 종과 유사하고, 특히 태평양의 갈라파고스 제도에 서식하는 동식물이 기후 조건이 비슷한 남아메리카 대륙에 존재하는 동식물과 크게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생물이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르게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관찰하게 된 것이지요.


런던으로 돌아온 다윈은 표본에 대한 깊은 고찰과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결국 '진화'가 일어났으며, 이러한 변화는 오랜 세월 동안 서서히 일어났고, 현존하는 모든 종은 결국 하나의 생명체에서 기원했다는 이론을 세우게 됩니다. 다윈은 생물종 내의 변이가 무작위하게 일어났고, 이렇게 다양한 변이를 갖춘 개체들은 환경의 적응능력에 따라 선택되거나 소멸된다고 봤습니다. 이른바 '자연선택 이론'이 탄생한 것이지요.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탄생한 배경인 갈라파고스는 흔히 세상을 바꾼 섬으로 불립니다. 다큐멘터리 제작에 뛰어난 역량을 갖춘 BBC의 자연사 프로젝트팀은 다윈이 방문했던 갈라파고스에 대해 생생한 사진과 글로 담아낸 책을 펴낸 적이 있는데, 그 책만 살펴보더라도 갈라파고스가 다윈에게 얼마나 중요한 섬이었는지를 금세 알수 있습니다.

 

1859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지구상의 생명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종은 영속하지도 않으며, 지적 창조자의 완벽한 작업도 아니다.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끊임없이 변화할 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은 경쟁을 통해 생존해온, 단순히 자연의 맹목적인 힘에 의해 선택된 순간적인 모습이다. 500쪽에 이르는 그 책에서 비록 갈라파고스는 단 한 줌 잠깐 언급되지만, 먼 청춘 시절 한 번 방문했던 매혹적인 작은 섬들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질 무렵, 다윈은 그곳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만큼 그 섬들은 그의 모든 견해의 기원이고, 『종의 기원』의 근원이었다.

 

찰스 다윈 이후 가장 유명한 생물학자이자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인 리처드 도킨스가 이 책의 서문에 남긴 글도 무척이나 인상적입니다.

과학의 착한 요정이 전 세계를 날아다니다가 그녀의 요술지팡이로 건드리고 싶은 가장 멋진 곳을 찾는다. 그리고 그곳을 과학의 낙원이자 지리학과 생물학의 에덴동산, 진화생물학자들의 아르카디아(이상향)로 바꿔놓았다. 아마도 여러분은 요정의 의도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만, 요정이 빛을 비춘 그곳에 대해서만큼은 아무런 의의가 없을 것이다. 그곳은 서경 91도 남위 1도로 에콰도르 해안에서 서쪽으로 1,170킬로미터, 동태평양에 위치한 다윈의 '적도공화국', 바로 갈라파고스다. ······ 『갈라파고스』는 내가 다음에 이곳을 방문할 때 귀중한 동반자가 될 것이다. 나는 탑승할 배의 서가에 기증하기 위해 이 책 한 권을 더 가져가려 한다. 만약 여러분이 갈라파고스를 개인적으로 방문할 수 없다면, 이 책을 읽고 감상하기를 권한다. - 리처드 도킨스

 

찰스 다윈이 '갈라파고스 섬'에 상륙한 날은 1835년 9월 17일이었습니다. 그가 비글호에 몸을 싣고 영국 남단에 위치한 데번포트 항구를 떠난 지 4년이 다 되어가던 무렵이었습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감정에 복받쳐 있던 26세의 다윈'은 그날 자신의 일기에 '끊임없이 불어오는 산들바람과 어두운 하늘'이라고 적어 놓았다고 하지요.

 

다윈이 그곳에서 보낸 시간들이 결국 갈라파고스를 '세상을 바꾼 섬'으로 바꿔놓았습니다. 그는 1835년 10월 20일에 갈라파고스를 떠났고, 이듬해 10월 2일에 영국 해안의 팰머스에 도착해서 비글호에서 내렸지만, 그가 갈라파고스에서 봤던 풍경들은 무려 24년 동안이나 '놀라운 생각과 연구를 거듭하는 밑거름' 역할을 계속 한 끝에 마침내『종의 기원』으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뉴튼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유추해 낼 수 있었던 게 자신의 눈 앞에서 툭~ 떨어지는 '한 알의 사과'였다면 다윈이 '생명의 기원과 진화'를 찾아낸 건 멀고도 먼 항해 끝에 다다른 '갈라파고스에서 보낸 시간들'이 결정적이었던 셈이었습니다.


갈라파고스는 비록 우리와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여전히 매혹적인 모습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생명이 신비로운 창조주의 입김에 의해 창조된 게 아니라, 단 하나의 기원으로부터 발생하여 끊임없이 진화하는 동안에 이토록 경이로운 광경들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생각할수록 놀랍기만 합니다. 아득한 옛날, 찰스 다윈이라는 20대의 젊은 청년의 눈앞에도 똑같이 펼쳐졌던 그 섬의 풍경들을 마저 소개하는 것으로 이 영상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 * *


동영상 링크 주소는 ☞ https://youtu.be/EvH_PWB-4g4




 * *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느덧 2020년도 시간의 흐름 저 편으로 넘어갔다.


기나긴 인류의 역사에서 보면 어느 한 해인들 격동 없이 잠잠하게 지나간 때가 있었으랴만, 2020년 한 해를 둘러보면 전인류에게 유난히 힘든 시기였음에 틀림없을 듯하다. 어느 날 소리 없이 번지기 시작한 괴질 하나가 이토록 짧은 시간에 드넓은 지역으로 빠르게 번져 나가고, 사람들의 존재 방식들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줄 그 누가 쉽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바이러스는 사람들의 삶을 극적으로 뒤바꿔 놓았으니, 이름하여 언택트 사회의 도래다. 어느 순간 재택근무가 일상화되었고, 똑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해야만 성립 가능한 활동이나 비즈니스는 극적으로 축소된 반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활동들은 비약적으로 확대되었다.


똑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는 기반 위에서 이뤄지던 수많은 활동들이 랜선으로 연결된 가상의 공간으로 전환되었다. 학교 수업은 물론, 종교 활동, 취미 생활, 운동 까지도 학교나 교회나 운동장이 아니라 랜선으로 연결된 동영상 앞에서 이뤄졌다. 사람들이 모이는 게 필수불가결한 수많은 활동들이 강력하게 억제되었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은 물론, 대규모 관중이나 관객을 필요로 하는 각종 문화공연이나 스포츠 활동들이 극도로 제약되었고, 수많은 종류의 '모임 비즈니스'는 한 마디로 폭망했다. 좌우지간 모이면 위험하고 흩어져야 안전했다! 먼지 때문에 가끔씩 쓰던 마스크가 생존에 필수적인 아이템으로 졸지에 격상되었다.


갑작스레 시작된 언택트 시대에도 사람들은 발빠르게 적응하기 시작했다. 이미 여러 해 전부터 무서운 속도로 이용자를 끌어모으던 유튜브 플랫폼은 코로나의 확산 덕분에 비약적으로 팽창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는 물론, 필라테스 강사, 그림 선생님, 음악 선생님, 심지어 과외를 하는 대학생들까지도 유튜브로 모여들었다. 순식간에 직업을 잃어버린 관광 가이드까지도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기에 이르렀다.


엘빈 토플러가 『부의 미래』에서 '유달리 느린 속도로' 변화한다고 꼬집은 학교조차도 유튜브에 의지하는 마당인데, 독서 활동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많은 작가, 수필가, 시인들이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고, 평범한 일반 독자들도 블로그 활동에서 벗어나 동영상을 만들어 채널에 올리기 시작했다. 인터넷 서점인 알라딘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도 어느 날 갑자기 유튜브 채널을 만들기 시작했다. 시작할 무렵만 하더라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출현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때였다. 채널을 만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바이러스가 창월하기 시작했고, 언택트 시대를 맞아 유튜브 이용자들은 급속도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물론 나 같은 초보 유튜버는 그런 변화에 발빠르게 대처할 아무런 비전도, 능력도, 기반도 없었다. 그저 강 건너 불 구경 하듯 바라볼 뿐이었다.


맨 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어떻게든 책 소개 동영상을 꾸역꾸역 만들어 올려봤다. 꽤 오랫동안 설비투자는 거의 없었다. 5년 전부터 쓰던 컴퓨터도 그대로였고, 녹음장비라고는 친구 녀석이 쓰던 1만 원짜리 핀 마이크가 주무기(!) 였다. 동영상 녹화 프로그램과 영상 편집 프로그램은 '공짜' 아니면 최대한 저렴한 걸로 '1년 이용권'을 샀다. 장차 유튜브 활동을 얼마나 오래 할 지도 몰랐고, 언제 그만둘 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시중엔 그런 말이 떠돌았다.


"유튜브를 시작하는 사람이 100명이면, 그만두는 사람은 150명이다."


영상을 만들고 편집하는 데 조금씩 재미를 붙였지만, 영상 제작과 편집에는 생각보다 엄청난 시간이 소모되었다. 알라딘에 글을 쓰는 것과는 비교조차 하기 힘들었다. 영상 제작을 위해 별도로 대본을 쓰는 작업이 전체 작업 과정의 1할 정도이니 영상 제작은 똑같은 분량의 글쓰기에 비해 열 배나 힘든 작업이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알라딘에서는 글을 하나 올리더라도 적당한 피드백만 있으면 그걸로 사실상(!) 끝이다. 꾸준한 조회수와 좋아요와 댓글은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튜브 영상 올리기는 전혀 그렇지 않다!


동영상을 하나 올리면 그때부터 조회수, 좋아요, 구독, 댓글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잔뜩 기대했던 동영상인데도 조회수가 부진하면 허탈감이 엄습한다. 사나흘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록 구독자가 1도 늘어나지 않을 땐 심각한 좌절감이 밀려든다. 세상에! +1이 그토록 어마어마한 숫자인지도 예전엔 미처 몰랐고, -1이 그토록 아픔을 주는 숫자인지도 처음 알았다. 누구나 다 겪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그 아픔을 헤아리기 쉽지 않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는 사이에 어느새 1년이 흘렀고, 이제야 겨우 '광고수익'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비록 올린 영상의 갯수도 터무니없이 부족하고, 구독자수 / 채널 조회수 / 시청시간 등등이 두루 부족하지만, 유튜브를 시작한 보람을 조금이나마 느낀다.


유튜브 책소개 영상 만들기에 몰두하다 보니 당연히 알라딘에 글쓰는 일은 뒷전이다. 여러 해 동안 받아왔던 <서재의 달인> 엠블럼조차도 이젠 관심밖이 되었다. 이제는 알라딘 대신 유튜브에서 이런 메일을 보내온다. 알라딘에서 꽤나 오랫동안 접해왔던 익숙한 스타일과 닮아 있어서 깜짝 놀랐다!


북트래블 Book travel님을 위한 2020년 결산








유튜브로부터 뜻밖의 이메일을 받은 날짜는 12월 12일이었다. 사실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잘것 없는 성과다. 그런데 뜻밖의 반전이 일어났으니 하필 이 무렵에 올린 영상 하나가 부웅~~ 떴다. 영상 하나가 3주 만에 61,676조회수에 시청시간 1.2만을 기록한 것이다. 이 맛에 유튜브를 하나 보다...






그 덕분에 구독자수도 2,719명까지 급증했다.

https://www.youtube.com/channel/UCtbZg9t1yZ2THcPuf3SinHg



지난 1년 동안의 조회수도 부쩍 늘어났다...





내 동영상을 시청하는 지역도 차츰 넓어지고 있다!




가장 고무적인 건 아무래도 '광고수입'이 아닐까 싶다!

하루에도 몇 권의 책을 구입할 만큼 쑥쑥 늘어나고 있으니...





1976년에 타계한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라디오 방송"을 두고 '가까움에 대한 본질적인 경향'을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통찰한 적이 있었다.


가까움에 대한 본질적인 경향


거리를 없앰은 거리를, 다시 말해서 어떤 것의 멂을 사라지게 함을, 가까워지게 함을 말한다.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거리를 없애며 존재한다. 그는 그가 무엇인 그 존재로서 그때마다 존재자를 가까이에서 만나도록 해준다. 거리를 없앰은 멂을 발견한다. 이 멂은 거리와 마찬가지로 현존재적이지 않은 존재자에 대한 범주적 규정이다. 그에 반해서 거리를 없앰은 실존범주로서 확고하게 견지되어야 한다. 도대체 존재자가 현존재에게 그것의 멂이 발견되는 한에서만 세계내부적인 존재자 자체에서 다른 것과 관련되어서 "거리"와 간격이 접근 가능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존재자들 가운데 어떤 것도 그것의 존재양식상 거리를 없앨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단지 거리를 없앰에서 발견되는 측정 가능한 간격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거리없앰은 우선 대개 둘러보는 가깝게 함, 조달함으로서의 가까이 가져옴, 예비해놓음, 손안에 가짐이다. 그런데 존재자를 순수하게 인식하며 발견하는 특정한 방식들도 가깝게 함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현존재에는 가까움에 대한 본질적인 경향이 놓여 있다.  우리가 오늘날 다소 강요되듯이 함께 행하고 있는 모든 종류의 속도상승은 멂을 극복하도록 몰아세운다. 예를 들면 "라디오 방송"과 함께 현존재는 오늘날 일상적 주위세계의 확장과 파괴라는 방법으로써 그것의 현존재의 의미를 아직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세계'의 거리를 없애고 있다. (149쪽)


 -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하이데거의 표현대로, 오늘날 우리가 다소 강요되듯이 함께 행하고 있는 모든 종류의 랜선 활동들도 결국 '가까움에 대한 본질적인 경향'이 고안해 낸 필연적인 행동양식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가 이런 양식들을 더욱 빠른 속도로 몰아세우고, 일상적인 주변삶을 가차없이 파괴하고 확장시켰을 뿐인...


* * *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호랑이 2021-01-01 18: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oren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롭게 유튜브에서 좋은 성과를 얻으셨군요. 내년에도 건승하시길 기원합니다!^^:)

oren 2021-01-01 19:30   좋아요 2 | URL
겨울호랑이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요!!
유튜브 채널은 아직도 밑바닥을 헤매고 있습니다요.
서두르지 말고 꾸준히 하다 보면 차츰 나아지리라 믿고 있습니다요.

김형수 2021-01-12 0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렌님
알라딘과 유튜브에서의 활발한 활동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새해에도 열정적인 북여행에 동참하겠습니다.
제가 드릴 것은 구독 좋아요..공유입니다만 그래도 좋은 글 부탁 드립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코로나가 조기 종식되기를 기원합니다.

oren 2021-01-12 21:34   좋아요 0 | URL
김형수 님, 반갑습니다.^^
새헤에 들어서도 더 좋은 책 소개 동영상 열심히 만들어 보겠습니다.
기존에 사용하던 영상 편집 프로그램이 너무 구려서,
새로운 편집 프로그램인 <프리미어 프로>로 동영상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동영상 강의를 듣고 실습해 보고 있습니다.
머잖아 새로운 편집 프로그램으로 만든 쌈빡한 영상으로 만나뵐 수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구독, 좋아요, 응원댓글까지..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탄허 스님의 놀라운 예지력에 관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탄허 스님은 유불선과 주역에 큰 발자취를 남긴 분이었습니다. 탄허스님이 살아계실 때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던 함석헌 선생이 동양 사상에 대한 의문점을 해소하려고 자주 가르침을 청했고, 양주동 박사는 《장자》에 관한 가르침을 청하러 월정사에 며칠씩 머물렀다고 하지요. 박정희 전 대통령을 포함한 많은 정치인들이 스님에게 정치적 자문을 구했으며, 성철 큰스님은 탄허 스님의 처소인 방산굴에 보름 동안 함께 머물렀다고도 하지요.


탄허 스님은 동양의 여러 경전에 통달했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예지력으로 한반도의 미래와 국제 정세뿐만 아니라 우주의 거대한 변화까지도 미리 내다본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널리 알려진 스님의 예언들을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북극의 빙하가 완전히 녹아내린다. 대양大洋의 물이 불어서 하루에 440리의 속도로 흘러내려 일본과 아시아 국가들을 휩쓸고 해안 지방이 수면에 잠기게 된다.


둘째, 소규모 전쟁들이 계속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인류를 파멸시킬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고 지진에 의한 자동적 핵폭발이 있게 되는데, 이때는 핵보유국들이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셋째, 장차 세계 인구의 60퍼센트 내지 70퍼센트가 소멸되리라고 본다. 이때는 일본 영토의 3분의 2가 침몰할 것이고, 중국 본토와 극동의 몇 나라들이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넷째, 파멸의 시기에 우리나라는 가장 적은 피해를 입을 것이다. 그 이유는 한반도가 지구의 주축主軸 부분에 위치하여 지진이나 홍수에서 좀 더 안전한 지대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우리나라의 장래는 매우 밝다. 오래지 않아 우리나라에는 위대한 인물들이 나타나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고, 평화로운 국가를 건설한다. 우리의 새로운 문화는 다른 모든 국가의 귀감이 될 것이며 전 세계로 전파될 것이다.

 

탄허 스님의 예지력에 따르면 다음 세계의 주축은 바로 동방의 대한민국이며, 그 주인공은 당연히 한국인이라는 데로 귀결됩니다. 스님은 현재 23도 7분 기울어진 지축이 바로잡히는 날이 도래할 것으로 내다봤지요.

 

탄허 스님의 예지력은 생전에도 이미 몇 차례 적중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 하나는 6·25 직전, 큰 난리를 예감하고 스승 한암 스님의 만류도 뿌리치고 기어이 양산 통도사로 남하했던 일이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울진, 삼척 지방에 무장공비가 몰려들기 직전 화엄경의 번역 원고를 월정사에서 영은사로 급히 옮겼던 일이었습니다.


탄허 스님은 《화엄경》을 번역한 일로도 유명하지요. 부처가 행한 49년의 설법 중에서 가장 심오하고 위대하며 광대무변하다는 《화엄경》을 우리말로 풀어 주석을 다는 일은 원고지로 6만 2천 5백여 장이나 되는 대불사였다고 합니다. 《화엄경》역해는 유불선을 두루 통달해야 가능한 작업이라고 하지요.

 

탄허 스님에 대한 소개는 대략 이 정도로 마무리하고, 스님이 내다본 미래 세계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 보지요. 우선, 북극의 빙하가 녹고 일본 열도가 침몰한다는 내용부터 먼저 살펴보지요.

 

여기서 잠깐, 일본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대지진에 관한 짤막한 뉴스부터 하나 살펴보지요.

 

“30년 이내 80%의 확률로 일어난다”고 알려진 일본 난카이 트로프(남해 해저협곡) 대지진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고 닛칸겐다이가 최근 보도했다.

 

난카이 트로프는 시즈오카현 쓰루가만에서 규슈 동쪽 태평양 연안 사이 깊이 4000m 해저 봉우리와 협곡지대다. ‘수도직하지진’(首都直下地震·진원이 도쿄 바로 밑에 있는 지진)과 함께 현재 일본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지진 위험 지역이다. 수도직하지진이 도쿄를 강타해 국가 기능을 마비시킬 우려가 있다면 난카이 트로프 지진은 거대한 쓰나미(지진해일)로 태평양 연안 일본 주요 도시가 물에 잠기는 대재앙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

  

일본 열도는 지각과 화산 활동이 왕성해 '불의 고리'라고 부르는 환태평양 조산대에 속해 있어서 크고 작은 지진이 잦은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용어조차 생경한 '수도직하지진'이나 '난카이 트로프 지진'이 미래에 실제로 일어난다면 그 충격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일으켰던 2011년의 대지진과는 비교조차 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전문가도 경종울렸다…日 난카이 대지진 ‘전조’ 잇달아

 

그런데 일본은 생각할수록 장래가 참 걱정되는 나라이긴 하지요. 일본이 폭망한다는 예언은 굳이 탄허 스님이 아니더라도 이미 셀 수도 없이 자주 거론되어 왔었지요. 지진만 문제가 아니라 일본 열도가 통째로 가라앉는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등장했었습니다. 세계적인 투자가인 짐 로저스 할아버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일본이 '경제학적으로도' 아예 사라질 나라라고 주장하고 있지요.

 

 로저스의 日비관론 "사라질 나라… 주식 다 팔았다

 

탄허 스님이 남긴 글들을 모은 책인 『탄허록』을 읽어 보면, 스님의 미래에 대한 예견은 단순히 일본 열도만 가라앉는 정도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변화를 예견합니다. 그 내용들을 일부만 소개하면 대략 이렇습니다. 무려 46억 년에 달하는 지구의 기나긴 역사가 우리 세대에 와서 다시 한번 중대한 변화를 맞는데, 그 가운데 가장 큰 변화는 23.7도로 기울어진 지축이 바로 선다는 내용이지요. 이 얼마나 놀랍고도 엄청난 변화인가요. 그런데 지구의 과거 역사를 알고 보면 이 정도의 변화는 도리어 사소한 일로 치부될 정도입니다.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험준한 지형을 자랑하는 히말라야 산맥들도 한 때는 해저였으니 말이지요.

 

 5억 년 전에는 공기중에 지금보다 20배나 많은 이산화탄소가 있었다. 2억 년 뒤 이산화탄소의 양이 줄어들었을 때 역전된 '온실효과'가 일어났다. ...... 심지어 지구의 하루에 해당하는 시간도 변해왔다. 달은 그 이웃의 자전에너지를 약화시키기 때문에, 지구의 자전 속도가 느려진다. 산호는 매일 변동하는 활동과 연간 변동하는 활동을 하는데, 4억 년 전부터 만들어진 성장 고리는 당시에는 1년이 400일이었음을 말해준다.(402쪽)

 

 - 스티브 존스, 『진화하는 진화론』 중에서

 

다시, 탄허 스님의 예언으로 돌아 오지요. 스님은 일본이 미래 역사에서 가장 불행한 나라가 될 것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저지른 죄악이 틀림없이 인과응보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제가 봐도 그렇습니다. 아직도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강제 징용과 위안부 문제까지도 저런 식으로 다루는데 달리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일본은 지난 5백 년 동안 무려 49차례나 우리나라를 침략했다. 만약 임진왜란 때 천운이 우리 편이 되어 주지 않았다면 세력으로만 보자면 일본에게 우리 땅을 열 번도 더 빼앗겼을 것이다. 수차례 왜군의 침략으로 삼남三南은 쑥대밭이 되었고, 결국 함경도까지 함락되면서도 나라를 완전히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우리나라의 국운 덕분이었다. 즉 우리 선조들이 수많은 역경 속에서도 동양의 전통적 가치를 지키며 남을 해칠 줄 모르고 살아온 것이 결국은 우리나라의 미래를 밝히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동양 사상의 근본 원리인 인과법칙이자 인과응보이며 우주의 법칙이다. 이것을 역학의 원리로 풀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주역》의 팔괘에서 우리나라는 ‘간방艮方’에 위치해 있다. 《주역》에서 ‘간艮’은 사람에 비유하면 ‘소남小男’이다. 이것을 나무에 비유하면 열매다. 열매는 시종始終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소남을 풀이하면 ‘소년少年’이라 할 수 있는데, 소년은 시종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소년은 청산靑山이면서, 아버지 입장에서는 결실이기 때문이다. 소년이 다시 시작되면 성장하여 언젠가는 아버지가 된다. 열매는 결실 전 뿌리에 거름을 주어야 효과가 있고, 일단 맺게 되면 자기를 낳아 준, 다시 말해 열매를 만들어 준 뿌리와 가지의 말을 듣지 않는다. 오히려 열매는 뿌리를 향하여 자기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간艮’의 원리이자 소남의 해석이며 시종의 논리다.

 

《주역》을 지리학상으로 전개해 보면 우리나라는 간방에 해당되는데 지금 역의 진행 원리로 보면 이 간방의 위치에 간도수(艮度數; 《주역》에서 인간과 자연과 문명의 추수 정신을 말함)가 비치고 있다. 이 간도수는 이미 1900년 초부터 시작되었다.(42∼44쪽)

 

일본 열도가 물에 잠기면 우리나라라고 안전할까요? 그럴 리는 없습니다. 우리나라 또한 동남 해안 쪽 1백 리의 땅이 피해를 입는다고 봅니다. 그러나 서부 해안 쪽으로 약 두 배 이상의 땅이 융기해 도리어 국토는 늘어나리라 봅니다. 지구 대변화의 시기에 우리나라는 가장 적은 피해를 입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한반도가 지구의 주축 부분에 위치하기 때문이지요. 우리나라는 간방에 간도수가 접합됨으로써 새로운 역사 또한 우리 땅에서 시작된다고 봅니다. 남북 문제에 대한 스님의 이야기도 몹시 흥미롭습니다.

 

결국 시종을 함께 포함한 간방의 소남인 우리나라에 이미 간도수가 와 있기 때문에 전 세계의 문제가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게 될 것이다.

 

구체적인 예로 우리나라의 남북 분단과 통일 문제를 살펴보자. 전체 인류사적 관점에서 보면 작고 사소한 문제처럼 보이지만, 이 문제야말로 오늘날 국제 정치의 가장 큰 쟁점이며, 한반도 문제 해결이 곧 세계 문제 해결로 직결됨을 알아야 할 것이다.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있는 현상은 곧 지구의 남극과 북극의 상대적인 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고 하겠다. 지구에 남극과 북극은 있지만 서극과 동극은 없지 않은가. 이는 지난 세기에 있었던 동서의 문제가 바로 역사의 결실기를 맞아 남북의 문제, 즉 지구의 표상인 남극과 북극의 상대적인 현상과 닮아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중략) 

 

역시 역학의 원리로 본다면 오늘날 우리나라가 당면하고 있는 어려운 문제들도 일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과거 일본이 우리나라를 36년 동안 강점할 당시 그들은 일본 황궁皇宮을 한반도로 옮기려고 궁터까지 마련한 적이 있었다. 또한 영구히 일본 본토로 만들기 위해 우리 민족의 대부분을 만주 등으로 이전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36년이라는 일시적 강점 시대는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끝이 났다.

 

일본의 식민지 통치가 일시적 현상으로 끝났듯이 우리나라의 남북 분단 문제 또한 그러할 것이다. 물론 위정자나 학자들이 남북 분단 문제를 민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 중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앞으로도 멈추지 말고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천륜天倫의 법칙에는 당할 수가 없다. 인간이 자연에 아무리 강력하게 도전한다 해도 결코 자연을 완전히 정복할 수 없듯이 말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추세가 아닌가.

 

결국 머지않아 통일을 위한 우리의 모든 노력에 하늘의 섭리가 필연적으로 작용할 것이다.(44∼47쪽)

 

여기서 꼭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은 '미국의 역할'입니다. 좋든 싫든 미국은 우리의 혈맹이자 군사동맹국입니다. 일찌기 마키아벨리가 지적했던 것처럼, 자국의 군대로 자신의 나라를 지킬 수 없을 때는 강력한 군사동맹만이 스스로를 보호하는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우리나라에 주한 미군이 주둔하게 된 것도 다른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군대만으로는 우리 자신을 지켜낼 힘이 없기 때문이지요. 우리 주변에 강대국들이 너무 많은 탓이기도 하고요. 탄허 스님은 우리나라와 주변국의 관계에도 음양의 이치가 작용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풀이합니다.

 

우리나라와 미국과의 관계는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까? 8·15 광복은 미국의 힘이 크게 작용했는데, 이것은 일본의 진주만 공격,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 등 여러 각도에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이 우리나라를 일본으로부터 독립시킨 것은 알다시피 우리나라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이 일본을 항복시키고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의 독립을 도왔다는 것은 역학으로 풀이하면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자 우주의 필연적인 원리이기도 하다.

 

역학에서 ‘소남小男’과 ‘소녀小女’, ‘장남長男’과 ‘장녀長女’, ‘중남中男’과 ‘중녀中女’는 서로 음양陰陽으로 천생연분의 찰떡궁합의 배합配合이다. 미국은 역학에서 ‘태방兌方’이며 ‘소녀’다. 이 소녀는 소남인 우리나라와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고, 그런 까닭에 해방 이후 정통적인 합법 정부를 수립한 우리나라가 미국을 제일의 우방으로 삼게 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미국은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건국을 도왔고, 6·25 동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함께 전선戰線에서 피를 흘린 맹방盟邦이 되었으며, 전후에는 수많은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물론 그 원조 속에는 미국의 국가적 이익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정치적 이익관계를 떠나서 우주의 원리에서 본다면 미국은 소녀이자 부인婦人으로 풀이된다. 미국이 우리나라에 도움을 준 것은 마치 아내가 남편을 내조하는 것과 같아 결과적으로 남편의 성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중략)

 

여기에서 미국과 월남전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

 

나는 이미 오래 전에 미국이 월남전에 개입을 확대해 나가자, 미국은 월남에서 망신만 당하고 물러나게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함께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행원 스님(화계사 조실 숭산 스님; 미국으로 건너가 우리나라 불교 포교에 힘씀)은 당시 내 견해에 의구심을 가지고 반문했다.

 

“미국이 가지고 있는 핵무기 하나면 월남은 꼼짝 못할 것 아닙니까?” 그러다 3년 후 일본에 갔을 때 그곳에서 행원 스님을 다시 만났는데, 그때 내 예언이 어쩌면 그렇게 적중할 수 있느냐고 놀라워했다.

 

역학의 원리로 보았을 때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역학의 오행으로 보더라도 월맹은 ‘이방离方’인 남쪽으로, 이것은 ‘화火’로 풀이된다. 반면 미국은 태방兌方으로 ‘금金’인데, ‘금’이 불[火]에 들어가면 녹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화극금火克金’의 원리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금덩어리가 워낙 크다 보니 다 녹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손해를 본 것은 사실이다. 역학적으로 미국은 소녀少女, 월남은 중녀中女다. 두 나라가 음陰이어서 서로 조화를 이룰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로 나는 미국의 국력이 제아무리 막강하더라도 월남전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음을 예견할 수 있었다.

 

앞서 언급했지만 우리나라는 간방에 위치해 있으며, 지금은 결실의 시대로 진입해 있다. 결실을 맺으려면 꽃잎이 져야 하고, 꽃잎이 지려면 금풍(金風; 여름의 꽃이 피어서 열매를 맺게 하려면 가을의 차가운 기운이 있어야 한다. 가을은 ‘금’ 기운의 상징이고 방위는 서쪽임)이 불어야 한다.

 

이때 금풍이란 서방西方 바람을 말하는데, 이 바람은 우리나라에 불기 시작한 이른바 미국 바람이다. 금풍인 미국 바람이 불어야만 꽃잎이 떨어지고 열매가 맺는 가을철인 결실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미국의 도움으로 인류사의 열매를 맺고 세계사의 새로운 시작을 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47∼50쪽)

 

이 대목은 지금 다시 읽어도 소름이 돋을 정도입니다. 1983년에 입적하신 턴허 스님은 최근 몇 년 동안 북한 핵문제를 둘러싸고 한반도를 중심으로 숨가쁘게 진행되어온 온갖 격변들까지도 미리 훤히 내다본 듯한 느낌이 듭니다.

 

다시 일본 이야기로 되돌아가 보지요. 일본이 정말로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마는가, 하는 문제 말입니다. 스님은 다음과 같이 소상히 예견했습니다. 스님이 살아 계실 당시만 하더라도 화석연료 사용과 이산화탄소 과다 배출이 결국 지구 온난화로 이어지고, 북극의 빙하를 녹여 해수면 상승을 초래한다는 정도로까지 과학이 발전하지 못했을 터인데, 1983년에 입적하신 분이 어떻게 이토록 멀리, 정확하게 내다봤는지 그저 스님의 혜안이 놀라울 뿐입니다.

 

서양 종교의 예언은 인류 종말을 말해 주고 예수의 재림으로 이어지지만, 정역의 원리는 후천 세계의 자연계가 어떻게 운행될 것인가, 인류는 어떻게 심판받고 부조리 없는 세계에서 얼마만한 땅에 어느 정도의 인구가 살 것인가를 알려 주고 있다.

 

미국의 어느 과학자는 25년 내에 북빙하北氷河가 완전히 녹을 것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1980년 〈경향신문〉과의 대담 중). 북빙하의 해빙으로부터 시작되는 정역 시대는 ‘이천·칠지二天·七地’의 이치 때문이다. 《성경》에 따르면 말세末世의 세계는 불로써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되어 있고, 그때는 아기 가진 여자가 위험하니 집밖에 나가 있으라고 쓰여 있다. 이것은 곧 지진에 의하여 집이 무너진다는 말이다. 여기에 열거한 사례들은 지구의 종말에 대하여 어느 지점에서 일치하는 점이 있다.

 

그렇다면 북빙하의 빙산이 완전히 녹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다음과 같은 일이 예상된다.

 

첫째, 대양大洋의 물이 불어서 하루에 440리의 속도로 흘러내려 일본과 아시아 국가들을 휩쓸고 해안 지방이 수면에 잠기게 될 것이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미국 캘리포니아 서부 해안이 점차 가라앉고 있으며, 바닷물이 강으로 역류하는 현상이 관찰되고 있는데, 이것은 북빙하의 빙산이 녹아서 물이 불어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또한 이제까지 지구의 주축主軸은 23도 7분이 기울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지구가 아직도 미성숙 단계에 있다는 것을 말하며, 4년마다 윤달과 윤날이 있게 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과학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1890년 이래로 지구의 기온은 상승하고 있다고 한다. 역학의 이천 칠지에 의하면 지축地軸 속의 불기운[火氣]이 지구의 북극으로 들어가서 북극에 있는 빙산을 녹이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소규모 전쟁들이 계속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인류를 파멸시킬 세계 전쟁은 일어나지 않고 지진에 의한 자동적 핵폭발이 있게 되는데, 이때는 핵보유국들이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남을 죽이려고 하는 자는 먼저 죽고, 남을 살리려고 하면 자신도 살고 남도 사는 법이다. 수소탄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민중의 맨주먹뿐이다. 왜냐하면 오행五行의 원리에서 ‘토극수土克水’를 함으로써 민중의 시대가 핵의 시대를 대치해서 이를 제압할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비극적인 인류의 운명인데, 이는 세계 인구의 60퍼센트 내지 70퍼센트가 소멸된다는 것이다. 이중 수많은 사람이 놀라서 죽게 되는데, 정역 이론에 따르면 이때 놀라지 말라는 교훈이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이때는 일본 영토의 3분의 2가 침몰할 것이고, 중국 본토와 극동의 몇몇 나라들이 피해를 입게 되는데, 이러한 조짐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넷째, 파멸의 시기에 우리나라는 가장 적은 피해를 입을 것이다. 그 이유는 한반도가 지구의 주축主軸 부분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정역 이론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지구 중심 부분에 있고 ‘간태艮兌’가 축軸이 된다고 한다. 일제시대 일본의 유키사와行澤 박사는 계룡산이 지구의 축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과거에 우리 민족은 수많은 외국의 침략과 압제 속에서 살아왔으며, 역사적으로 빈곤과 역경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앞으로 펼쳐질 후천시대에는 한반도의 미래가 매우 밝다고 하겠다.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는 이 정역 시대正易時代에 태어났음에 감사해야 한다. 오래지 않아 우리나라에는 위대한 인물들이 나와서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고, 평화로운 국가를 건설할 것이다. 또한 모든 국내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나라의 국위를 선양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새로운 문화는 다른 여러 나라의 귀감이 될 것이며 전 세계로 전파될 것이다.

 

중·러 전쟁과 중국 본토의 균열로 인해 만주와 요동 일부가 우리 영토에 편입되고, 일본은 독립을 유지하기에도 너무 작은 영토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영향권 내에 들어오게 되며, 한·미 관계는 더욱 더 밀접해질 것이다.

 

이러한 대변화의 시기를 세계의 멸망기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정역의 시대는 지구의 멸망이 아니라 성숙기라 할 수 있다. 결국 복희팔괘는 천도天道를 밝혔고, 또 문왕팔괘는 인도人道를 밝혔으며, 정역팔괘正易八卦는 지도地道를 밝힌 셈이다. 특히 정역팔괘는 후천팔괘後天八卦로서 미래역未來易이므로 이에 따르면 지구의 멸망이 아니라 지구는 새로운 성숙기를 맞이하게 되며, 이는 곧 사춘기 처녀가 초조初潮를 맞이하는 것과 같다.

 

20년 전후에 북극 빙하가 녹고, 23도 7분가량 기울어진 지축이 바로 서고, 땅속의 불에 의해 북극의 얼음물이 녹는 현상은 지구가 마치 초조 이후의 처녀처럼 성숙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지구 표면에는 큰 변화가 온다. 현재는 지구 표면에 물이 4분의 3이고, 육지가 4분의 1밖에 안 되지만, 이와 같은 변화를 거치고 나면 바다가 4분의 1이 되고, 육지가 4분의 3으로 바뀌게 된다. 또 인구의 60∼70퍼센트가 소멸되고, 육지의 면적이 3배로 늘어나는데 어찌 세계의 평화가 오지 않겠는가.

 

후천의 세계는 마치 처녀가 초조 이후에 인간적으로 성숙하여 극단적인 자기감정의 대립이 완화되듯이, 지구에는 극한과 극서가 없어질 것이다.

 

불이 물속에서 나오니

천하에 상극相克의 이치가 없다.

 

이 구절은 《주역》에 나오는 문장으로 미래 세계는 전쟁이 없는 평화시대가 온다는 뜻이다.(50∼55쪽)

 

탄허 스님의 말씀을 가만히 음미해 보면, 금년 2월에 있었던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순수 한국산 영화 <기생충>이 감독상과 작품상 등 4개 부문을 휩쓴 일도 결코 우연처럼 생각되지 않습니다. 또한 방탄소년단이 바로 지금 이 시대의 지구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인기 보이 그룹으로 우뚝 올라서 있는 현실도 넉넉히 받아들일 만합니다.

 

문득 되돌아 보니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2020년 올해는 우리나라가 일본한테 나라를 통째로 빼았겼던 치욕을 겪은지도 110년이나 지났고, 나라를 되찾은지도 75년, 한국전쟁을 겪은 지도 70년, 올림픽을 치른지도 32년이나 지난 해입니다. 이런 시국에서조차 이웃나라 일본은 식민지배 당시의 만행에 대한 배상과 사과 문제로 아직까지도 우리나라와 첨예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만 보더라도 과연 일본이라는 나라의 미래에 도대체 무슨 희망이 있을까 싶은 생각부터 앞섭니다. 지난 500년 동안 우리나라를 49차례나 침략하고도 아직도 저 모양 저 꼴이니 말이지요.

 

다른 한편으로는, 나라마저 통째로 일본에 빼앗겼던 1913년에 태어나, 일제의 간악한 식민 지배와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까지 겪는 등 평생 동안 나라의 불행하고 위태로운 모습만 보고 겪었던 탄허 스님이 우리나라의 미래를 이토록 밝게 내다본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또한 스님이 입적할 당시와는 비교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금껏 우리나라가 눈부시게 발전해 왔음에도, 다가올 미래에는 우리나라가 더욱더 발전하여 세계의 중심국가로 우뚝 올라서게 된다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찹니다. 알고 보니 스님의 부친도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은 이름난 독립운동가였습니다. 

 

2020년의 세계는 그 누구도 쉽사리 예측하지 못했던 코로나 바이러스의 출현 때문에 전세계가 꽁꽁 발이 묶인 형국이지만, 지구의 자전과 공전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해진 움직임을 항해 조금도 흐트러짐없이 움직이고 있지요. 그러나 지구의 온도는 우리가 내뿜는 탄소의 배출만으로도 꾸준히 올라가고 있으며, 북극의 빙하가 무서운 속도로 녹아내리고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입니다. 탄허 스님이 미리 내다본 미래 세계가 과연 언제 어떻게 마법처럼 우리의 눈앞에서 전개될지는 누구도 결코 예단할 수 없지만, 이제껏 우리가 직접 겪은 일들만 살펴보더라도 스님의 예견과 적잖이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을 결코 부정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이것으로 탄허 스님에 관한 소개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


동영상 링크 주소는 ☞ https://youtu.be/MLyeQiiAzWE

 

 

 

 * *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딩 2020-12-31 2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Oren 님 잘 지내시죠 ^^
ㅜㅜ 요즘 제가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어요.
2020년 한 해 감사했습니다 ^^
2021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oren 2020-12-31 23:34   좋아요 1 | URL
제가 감사했지요^^
2021년 한해도 늘 건강하시고,
멋진 일들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후세의 서양문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라틴문학의 걸작으로 흔히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꼽는다고 하지요. 그런데 제 생각엔 베르길리우스가 쓴 '로마 건국 신화'가 아무리 장중하고도 생동감 넘치는 문체로 '로마의 위대함'을 노래했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천 년 이상이나 오랜 세월 동안 로마 제국에 편입되어 지냈던' 수많은 유럽 사람들의 자의식 형성에 오랫동안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오비디우스가 쓴 신화 속에 담긴 드넓은 주제와 기가 막힌 이야기들에 비할 바가 못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는 너무나 로마 중심적인 데다가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엄숙하고 고상한 분위기를 지닌 탓에 라틴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에게조차 여전히 접근하기가 만만찮은 책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오비디우스가 쓴 『변신 이야기』는 그 주제의 범속성이나
세계성 측면에서 베르길리우스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치 폭넓고도 보편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지요. 또한 후세의 서양문학뿐만 아니라 음악, 미술, 조각 등 온갖 예술작품에 두루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쳤다는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그리고 로마의 밖에서만 살아온 수많은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조차도 그리 낯설지 않거나 심지어 친숙한 이야기들이 많다는 점에서도 저는 두 천재 시인 가운데 오비디우스의 작품을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보다 좀 더 쉽게 읽어볼 만한 책으로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더군다나 오늘날 그 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만큼 무수하게 쏟아져 나온 '그리스·로마 신화'를 다룬 온갖 책들도 결국 그 내용의 대부분은 오비디우스의 작품에 담긴 이야기에서 비롯됐다는 사실까지 고려해 본다면, 그런 이야기들의 원조격이나 다름없는 오비디우스의 작품을 한번쯤 제대로 살펴보는 일은 '신화의 원형'을 직접 고스란히 마주 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좀 특별한 경험이 아닐 수 없지 싶습니다. 더군다나
서양에서조차 오비디우스가 쓴 신화가 고대 로마의 '서사시' 형식으로 쓰여진 탓에 읽기가 결코 쉽지는 않았던 때문인지 미국 사람 토마스 불핀치가 산문으로 풀어 쓴 신화집이 오비디우스의 작품보다 훨씬 더 큰 인기를 끌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오비디우스의 원전에 다가가는 일이 더욱 흥분되는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그리스·로마 신화의 원조나 다름없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가 왜 그토록 재미있고도 유명한 책이면서도 여전히 읽기 어려운 묘한 책이 되었을까요. 그 이유를 저는 무엇보다도 우선 '신화'가 지닌 본질적인 성격에서 찾아보고 싶습니다. 신화는 말 그대로 신들의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신들은 너무나 여러 '계보'가 있어서 그들의 족보와 촌수를 따지는 일이 여간 복잡한 일이 아닌데다가, 거기에 덧붙여 온갖 다양하고 낯선 이름들을 지닌 인간들조차 쉼없이 끼어드니 신화는 일단 너무나 복잡하다는 느낌부터 들게 됩니다. 게다가 신화에는 결코 신과 인간만 등장하는 법이 없지요. 수많은 강과 바다에 사는 온갖 요정들도 신과 인간들 사이에 쉼없이 끼어들기 마련이고, 다양한 이름들을 지닌 여러 지방과 섬과 도시, 산과 강, 호수와 바다가 끊임없이 이어져 나오니 도무지 거기에 휘둘리지 않을 도리가 없지요. 그러니 신들의 이야기가 아무리 재미있다 한들 갈피도 잡히지 않는 이야기를, 더군다나 온갖 함축적인 표현들로 가득찬 '시인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신화'를 읽는 일이 어려울 수밖에 없게 되지요.

 

오비디우스의 신화를 읽게 되면서 겪게 되는 두 번째 어려움은 대체로 '이야기의 방대함'에 있지 싶습니다. 이 작품만 하더라도 '시로 함축시켜' 펼쳐 놓은 이야기의 전체 행수가 무려 1만 2천 행에 이르는데,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가 9천 9백 행에 못 미치는 걸 고려해 보면 그 길이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지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1만 5천 행, 『오뒷세이아』가 1만 2천 행 정도여서 그와 비슷한 길이라고 여길 수도 있으나, 라틴어는 그리스어에 비해 표현이 훨씬 더 함축적이기 때문에 오비디우스의 작품이 길이가 훨씬 더 긴 작품으로 느껴진다고들 하지요.

 

오비디우스의 신화를 읽게 되면서 겪게 되는 세 번째 어려움이자 쉽게 극복하기 힘든 커다란 난제는 또 있습니다. 그건 대체로 '사전 지식의 부족' 때문이지요. 호메로스의 작품이 되었건, 베르길리우스의 작품이 되었건, 혹은 고대 그리스 비극 작가들의 작품이 되었건 그 작품들은 거의 모두 기본적으로는 시로 쓰여진 작품들이며, 아무리 이야기 형태의 시라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함축적인 표현'들로 이루어져 있지요. 그런데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는 그런 경향이 유난히 더 강합니다. 가령 헤라클레스의 죽음을 다룬 짧은 이야기만 하더라도 그 유명한 '12 고역'을 자세히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저 어리둥절한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는 형편이지요. 그 대목을 여기서 조금만 살펴 보고 넘어가지요.  

 

"이러자고 내가 잔혹한 안타이우스에게서 어머니의 힘을 빼앗았던가요?"라는 짧은 구절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안타이우스가 땅의 자식으로서 땅에 닿을 때마다 힘을 얻기 때문에 헤라클레스가 그를 공중에 들어 올린 후 목졸라 죽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주석'을 살펴보고나서야 겨우 그 뜻을 이해하게 되고, 그런 사실을 알고난 뒤라도 뭔가 여전히 미진한 구석이 남아서 알 듯 모를 듯한 아리송한 느낌을 떨치기 어렵지요. 그런데 '이러자고'라는 표현이 그저 한 두번에 그치는 것도 아니고, 마치 그 책을 읽는 독자들의 인내심을 시험하듯이 줄기차게 계속 이어져 나온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요. 결국 '이러자고 내가 이 책을 펼쳤단 말인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갑자기 그 틈을 비집고 불쑥 튀어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겠지요.


사실 헤라클레스의 '12 고역'만 하더라도 이야기 하나 하나가 온갖 흥미로운 요소들을 두루 지니고 있지요. 가령 불을 내뿜는 용이 지키고 있는 '황금 사과'를 따오기 위해 지축을 떠받치고 있던 아틀라스를 찾아가고, 거기서 어쩔 수 없이 그를 대신해서 그 무거운 짐을 떠메고 있다가 나중에 결국 황금사과를 손에 넣게 되자 이 영웅이 교묘한 꾀를 내어 그 무거운 짐을 도로 아틀라스에게 되돌려주는 이야기는 얼마나 '상상력'을 즐겁게 자극하는가요. 도저히 이뤄낼 수 없을 듯한 난제들을 척척 해내는 이 고대의 영웅을 보고 열광하지 않을 사람들이 거의 없었던 탓에 마치 고대판 '미션 임파서블'을 보는 즐거움과 통쾌함을 누구나 만끽할 수 있었던 셈이지요.


고대 그리스의 비극 시인들조차 헤라클레스의 영웅담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는지 지금까지 온전히 전해지는 33편의 고대 그리스 비극 작품 가운데 무려 세 편이 그의 신화를 다룬 작품이며,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또한 이 영웅의 이야기만 따로 떼어내어 온전히 한 권의 책으로 펴냈을 정도이지요. 최근에는 '현대판 헤라클레스'로 종종 여겨지는 축구 영웅 호날두의 연인 이리나 샤크가 영화『허큘리스』에서 주연 여배우로 출연한 일이 화제가 된 적도 있었을 정도로 그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생생히 살아있는 영웅'처럼 우리 주변에 가까이 있지요. 도무지 믿기지 않는 그의 영웅적인 활약상을 고대 로마의 시인이 '헤라클레스의 입'을 통해 '이러자고 내가 그 고생을 했단 말인가'하고 열두 번씩이나 거푸 탄식을 연발하는 식으로 응축시켜 놓았으니, 그 이야기가 온전히 '귀에 들리는 사람에게만'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반쯤만 열려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지요.

 

이러한 여러 난관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매혹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건 무엇보다도 오비디우스가 집대성해 놓은 수많은 신화들 자체가 지닌 이야기의 매력과 더불어 시인이 풀어가는 기가 막힌 이야기 솜씨 덕분일 테지요. 그는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로부터 널리 알려진, 그래서 나름대로 꽤나 식상한 이야기들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아니면 도저히 쓸 수 없는 문체로 그 이야기들을 정말 기가 막히도록 재미있게 술술 풀어내지요. 이 책을 번역한 천병희 선생님은 '그의 표현이 평이하고 유려하고 우아하면서도 재치와 유머와 파토스와 위엄이 있기 때문에' 오비디우스가 널리 읽힌다고 말했는데, 역자의 평가만 들어봐도 그의 문체가 얼마나 다채로운 매력을 지니고 있는지 금세 알 수 있지요.

 

오비디우스의 신화가 여전히 매혹적인 또다른 이유는 좀 더 근본적입니다. 그가 쓴 신화를 읽으면 우리는 그 속에 담긴 '인간 본성을 탐구할 수 있는 상징체계'를 무수히 많이 발견할 수 있지요. 아무리 위엄있는 신이라고 하더라도 오비디우스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그들의 이야기'는 인간 속물들과 크게 달리 비치지 않지요. 신들도 인간처럼 질투하고 시기하고 남의 아내를 넘보고 자신의 욕망이 좌절될 때마다 분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쉽게 걸려 넘어지며 어떨 땐 어린애처럼 엉엉 울고 있어서 얼른 그들에게 달려가 덥석 끌어안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고 싶을 때조차 있지요. 그래서 이 작품을 읽으면 우리는 신화 속의 영웅들이 우리와는 다른 머나먼 세계에 존재하는 별종들이 아니라 마치 소설 속 등장인물들처럼 우리와 비슷한 존재로 그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지요.

 

오비디우스의 생애는 특기할 만한 대목이 몇 있습니다. 그는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암살된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난 바로 이듬해에 태어났는데, 그가 차츰 성장하여 로마에서 시인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는 마침 로마의 정치 체제가 공화정을 끝내고 제정으로 넘어간 때였습니다.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암살된 이후 젊은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건곤일척의 승부를 겨룬 끝에 젊은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제국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개막된 소위 '아우구스투스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지요.  

 

그는 초창기엔 주로 여러 가지 사랑 이야기를 담은 『사랑의 노래』, 신화와 전설 속의 유명 여성들이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된『여걸들의 서한집』, 연애 기술을 다룬『사랑의 기술』, 실연한 자들을 위한 『사랑의 치료약』등을 썼는데, 여기서 크게 성공하게 됩니다. 그 뒤에 그는 『로마의 축제일들』과 함께 자신의 대표작인『변신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는데, 그때는 이미 선배 시인들이었던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마저 세상을 떠나고 오비디우스가 로마의 문학계를 대표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돌연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흑해 서안의 토미스(오늘날의 루마니아)로 유배되고 맙니다. 거기서 그는 비참하고 쓸쓸한 만년을 보내다가 유배된 지 10년 만인 기원후 17년 또는 18년에 눈을 감고 마는데, 그가 얼마나 간절히 로마로 돌아가고 싶어 했는지는 유배지에서 쓴『비탄의 노래』와『흑해로부터의 편지』에 잘 담겨져 있다고 하지요.

 

그가 유배된 이유는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데, 그 자신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두 가지 죄('詩'와 '과오')를 지었다고 합니다. 정작 본인은 '이에 관해 자세히 언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까지 말했지만, 후세 사람들은 대체로 그가 말한 시(詩)가 『사랑의 기술』일 것으로 보는 데 대해 의견 일치를 보인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 작품은 그가 추방되기 무려 8년 전에 나온 작품이기 때문에 유배의 직접적인 이유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가 추방된 결정적인 이유는 결국 '과오' 때문으로 보이는데, 오비디우스는 자신의 처지를 '악타이온'에 비교했다고 하지요. 쉽게 말해서 '못 볼 것을 보았다'는 것이지요. 오비디우스가 '본'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비록 오비디우스는 끝내 로마로 돌아오지 못하는 비운을 겪었지만 그의 작품은 자신이 예언했던 대로 끝까지 살아남아 영생하는 영광을 누리고 있지요. 그의 예언은 이랬습니다.

 

이 작품은 윱피테르의 노여움도, 불도, 칼도, 게걸스런 노년의 이빨도 없앨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변신 이야기』에 담긴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지요.

 

이 작품에 담긴 이야기는 약 250편이며, 크게 신들에 관한 이야기(1권 452∼6권 420행), 영웅들에 관한 이야기(6권 421∼11권 193행), 역사적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11권 194∼15권 744행)로 나뉘어 있지요. 그런데 신화의 경우에는 전후 관계나 인과 관계가 분명하지 않을 때가 많아 '시간적 순서'에 따라 이야기를 전개하기 몹시 힘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제의 유사성이나 상이성, 지리나 계보 등을 따라 절묘하게 이야기들을 연결시켜놓았습니다. 그래서 이 책 속에 담긴 이야기들은 어쩌면 거의 대부분 따로 떼어놓아도 좋을 이야기들이지만 시인의 솜씨 덕분에 느슨하게나마 주욱 이어진 이야기처럼 읽힐 수 있는 것이지요.

 

신들의 이야기든 영웅들의 이야기든 서로 아무런 관계조차 없을 정도로 동떨어진 이야기들을 오비디우스가 이 작품에서 한데 두루 붙들어 놓을 수 있도록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물론 '변신'입니다. 그렇지만 '변신'은 이 작품의 주제라기 보다는 이야기를 끌어모으는 데 필요한 하나의 '구실'이나 '핑계거리'에 더 가까운 인상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이 작품에 담긴 모든 이야기들이 반드시 '변신'을 포함하지는 않는 데다가, '변신'이 꼭 필요하거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지요. 어쩌면 '변신'은 그저 인간들의 상상이 만들어낸 신화 속에 자연히 딸려나오는 또다른 상상으로의 자연스런 변주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르지요.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놀라게 되는 건 '여자들의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섬세한 심리 묘사'인데, 이 책을 번역한 천병희 선생님의 작품 해설에 따르면 이 부분은 그리스 비극 시인 에우리피데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헤라클레스의 죽음'을 노래한 대목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작품을 온전히 제대로 감상하려면 '당연히' 오비디우스가 여기 저기서 끌어온 이야기들을 독자들이 미리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점에 대해 옮긴이의 설명을 조금 인용해 보지요.


베르길리우스 시의 묘미를 느끼려면 호메로스의 시를 알아야 하듯,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도 그의 선배 시인들의 시를 알고 있으면 그 깊은 맛을 구석구석 느낄 수 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를 비롯한 그리스 라틴문학의 읽는 재미를 극대화하려면 텍스트 간의 관련성(intertextuality)을 파악할 것을 권한다. 앞서 말했듯이 네스토르는 젊은 나이에 칼뤼돈의 멧돼지 사냥에 참가하지만 멧돼지가 덤벼들자 당장 이를 피해 마치 장대높이뛰기 하듯 창자루를 짚고 나무 위로 도망치는데, 이 장면은 그가 『일리아스 』에서 그리스 장수들의 회의석상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자기는 젊었을 때 아무리 강한 적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며 다른 장수들을 나무라는 장면들을 알고 있어야만 더 재미있게 읽히는 것이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기 위해서는 과연 얼마만큼 '그의 선배 시인들의 시를 알고 있으면' 좋을까요. 제 판단으로는 적어도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 그리스 3대 비극작가들의 비극시,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정도는 미리 읽고 난 뒤에 이 시를 읽는 게 좋겠다 싶습니다. 가령 이 책에 실린 대표적인 명문장 가운데 하나인 '아킬레스의 무구를 두고 벌이는 아이약스와 울릭세스의 설전'만 하더라도, 이 두 영웅이 트로이아 전쟁에서 얼마만큼 드높은 무공을 쌓았으며(『일리아스 』), 아킬레스만 빼고는 그 누구도 자신에게 필적할 만한 장수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아이약스(아이아스)가 '무구 재판'에서 울릭세스(오뒷세우스)에게 패했을 때 그가 왜 기어코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소포클레스의 비극『아이아스』), 또한 트로이아 전쟁이 끝난 뒤 오뒷세우스가 귀향하던 중에 고난을 겪는 와중에 잠시 저승으로 내려갔을 때, 그의 눈에 띄었던 '아이아스의 혼령'이 오뒷세우스에게 '끝내 말 한 마디 건네지 않고' 그냥 돌아서고 말았던 장면까지 떠올릴 수 있다면(『오뒷세이아』), 오비디우스가 노래한 두 영웅 사이의 설전이 훨씬 더 깊은 울림과 감동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으리라 여겨지기 때문이지요.

 

오비디우스는 이 책 속에서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낼 수 있는 온갖 다양한 '사랑 이야기'를 자유자재로 '변주'해서 들려줍니다. 이미 젊은 시절부터 '연애시'에 특별한 능력을 발휘했던 시인이 자신의 특출난 재능을 '사랑 이야기'에 아낌없이 쏟아낸 덕분에 시인의 노래는 '어떤 사랑'에서나 거침이 없으며, 몽테뉴가 말했던 것처럼 '마치 풍부한 물이 억지로 맹렬하게 밀려 나가다가 좁은 홈통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찾지 못하는 것과 같은' 그런 느낌은 조금도 찾을 수 없지요. 

 

오비디우스가 노래한 사랑 이야기 가운데 특히 매혹적으로 다가온 이야기들만 해도 일일이 다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사랑의 쾌감'에 대한 남녀간의 차이를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현명하게' 밝힌 사랑의 쾌감을 이야기한 티레시아스에서부터 시작하여, 자기 자신을 사랑한 나르킷수스와 에코 이야기, 셰익스피어가 지어낸 '로미오와 줄리엣'의 원조가 된 퓌라무스와 티스베 이야기, 낙랑공주 이야기를 닮은 이아손과 메데아 이야기, 해서는 안 될 사랑, 오라비를 사랑한 뷔블리스 이야기, 글룩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에 나오는 아리아 '에우리디체 없이 어찌 살라고'라는 노래로 더욱 유명한 오르페우스와 에우뤼디케 이야기, 자신의 조각 작품을 사랑한 퓌그말리온의 기도, 애닯고도 가슴 절절한 사랑 이야기인 물총새로 변한 케윅스와 알퀴오네 등이 제게는 하나같이 매혹적으로 다가왔고, 그 이야기들에 얽힌 명화들을 찾느라 한동안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으니까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는 이미 오래 전부터 '예술가들의 보물 창고'와 다름없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숱한 회화와 조각 작품들은 물론 수많은 음악 작품에도 그 소재를 제공했으니까요. 오페라의 효시로 인정받는 1607년에 초연된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 글룩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캉캉 춤'으로 유명한 오펜바흐의 <지옥의 오르페오> 등이 모두 오르페우스와 에우뤼디케 이야기에서 비롯된 작품이지요. 아예 <변신 이야기>를 교향곡의 제목으로 내세운 작품들도 여럿인데, 벤자민 브리튼의 <변신 이야기>와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디터스도르프(1739∼1799)의 <변신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대해 이미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이 작품과 관련해서 한가지 덧붙여 말씀드릴 게 있다면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작가 이탈로 칼비노가 고전에 관해 남긴 말들입니다. 그는 『왜 고전을 읽는가』라는 책에서 고전을 재미있는 표현들로 새롭게 정의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문장은 다음과 같았지요.

 

1.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를 읽고 있어."라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칼비노의 '고전의 정의'를 계속 따라가다 보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가 얼마나 그의 주장과 찰떡 궁합을 이루는지 놀라게 됩니다. 


6. 고전이란 독자에게 들려줄 것이 무궁무진한 책이다.

10. 고전이란 고대 전통 사회의 부적처럼 우주 전체를 드러내는 모든 책에 붙이는 이름이다. 


이런 설명들은 한결같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도 너무나 잘 들어맞지요. 칼비노가 '고전'에 관해 언급한 다음의 문장들을 읽으면 현대의 독자들이 왜 하필 2000년 전쯤에 쓰여진 까마득한 고대의 신화에 다시금 귀를 기울여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쯤 되면 근본적인 문제를 더 이상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즉 고전을 읽은 체험을, 고전이 아닌 책을 읽은 경험과 어떻게 관련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질문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동시대를 잘 이해하게 해 주는 다른 책들을 제쳐 두고 왜 굳이 고전을 읽어야 하는가?' 여기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이어질 수 있다. '오늘날 홍수처럼 쏟아지는 수많은 정보들 사이에서 허우적거리는 우리는 고전을 읽을 수 있는 정신적인 여유와 시간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이상적인 상황은 한 고전 작품에서 잘 구성된 음악처럼 울리는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현재에 관한 모든 것들은 창밖의 자동차 소음, 날씨의 변화와 같은 저 바깥의 잡음처럼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사람들은 이와는 반대로 행동하기 일쑤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전의 실체를 먼 메아리처럼 듣는다. 지금 발생하는 일들과 관련한 소식들은 쩌렁쩌렁 울리는 텔레비전 소리처럼 듣고, 고전은 그 바깥에서 들려오는 머나먼 메아리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어지는 칼비노의 얘기는 결국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마무리되지요. '고전이란,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라고 말이지요. 이와 같은 결론은『평생독서계획』을 쓴 클리프턴 패디먼의 얘기와 너무나 닮았습니다.

 

"고전을 다시 읽게 되면 당신은 그 책 속에서 전보다 더 많은 내용을 발견하지는 않는다. 단지 전보다 더 많이 당신 자신을 발견한다."

 

미국의 사상가인 랄프 왈도 에머슨은 "좋은 책을 읽을 때면 나는 3천 년은 더 사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와 같은 작품이 바로 이런 표현에 딱 어울리는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에머슨의 절친이었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월든』에 남겨놓은 문장 속에도 이와 비슷한 생각들이 거듭 발견되지요.

 

 

인류의 가장 고귀한 생각을 기록한 것

요즘 저렴한 가격에 많은 출판물이 쏟아져 나오고 번역된 책도 많지만, 고대의 영웅을 그린 작가들은 좀처럼 소개되지 않는다. 그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멀리 동떨어진 사람들처럼 보이고, 그들의 작품을 인쇄한 문자는 희한하고 이상해 보인다. 그래도 고대 언어에서 영원히 잊히지 않을 암시와 자극이 될 만한 몇 마디를 배워 길거리의 천박함을 딛고 일어선다면, 젊은 날과 소중한 시간을 투자할 가치는 충분하다. 때때로 사람들은 고전 연구가 결국에는 더 현대적이고 실용적인 학문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할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모험을 즐기는 학생이라면 어떤 언어로 얼마나 오래전에 쓰인 것인지 상관하지 않고 고전을 손에서 놓지 않을 것이다. 고전이 인류의 가장 고귀한 생각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고전은 결코 썩지 않는 유일한 신탁이어서, 지금 이 시대의 의문에 대한 해답까지 담겨 있다. 델포이와 도도나도 그 시대에 대한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주석달린 월든』, <독서> 中에서

 

이것으로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대한 소개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


동영상 링크 주소는 ☞ https://youtu.be/kIU5cCNfqs4

 

 

 

 

* *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11-24 15: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24 2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투르게네프의 대표작 『아버지와 아들』을 소개합니다.

 

투르게네프는 러시아를 빛낸 위대한 소설가에 반드시 포함되는 작가지만, 일반적으로 가장 덜 알려져 있고 또 그만큼 덜 친숙한 작가이지요. 그가 다루는 주제는 1840년대와 1850년대에는 정말 매력적이었지만 지금은 그만큼의 호소력을 지니지 못한 탓도 있는 듯합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200년 전에 태어난 작가가 우리에게 과연 얼마나 친숙할 수 있을까요. 더구나 러시아 작가인데 말이지요.

 

어쨌든 그의 작품을 조금이라도 더 깊이 이해하자면 우선 그가 살았던 시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무렵의 세계를 좀 더 폭넓게 둘러 보면 대략 이렇습니다.

 

구대륙에서는 나폴레옹이 유럽 전역을 휩쓴 끝에 알프스를 넘어 러시아 원정(1812.5∼1812.10)까지 감행한 적이 있었지요. 그 원정은 결국 실패하고, 그 여파로 이듬해 파리가 함락되고 파리 평화 조약이 체결됩니다(1814년). 새로운 유럽의 국제 질서는 빈 회의에 맡겨지는데, 빈 회의가 잠시 난항을 겪자 그 틈을 비집고 나폴레옹은 또다시 파리로 되돌아오지요. 그러나 그의 지배는 100일 천하로 끝나고, 워털루 전투(1815년)에서 패해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를 떠납니다. 빈 회의가 끝난 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제창으로 신성 동맹이 성립되고, 영국 · 러시아 · 오스트리아 · 프로이센이 4국 동맹(1815년)을 맺지요.

 

이제 다시 러시아로 눈길을 돌려 보지요.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1세(재위 1801∼1825)는 몹시 분주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을 치른 뒤에는 파리에 입성하여 빈 회의와 신성동맹 결성을 주도했지요. 그런데 1825년에 갑자기 사망하면서 새로운 후계자 문제로 어수선한 틈을 타 저 유명한 데카브리스트(12월 당원) 반란이 일어납니다. 나폴레옹을 추격해 유럽 원정에 나섰던 진보적인 청년 귀족들이 1816년부터 혁명적 결사를 조직해 활동해 오다가, 반동적인 니콜라이가 즉위하는 1825년 12월 26일에 거사를 일으켰던 사건이었이지요. 반란은 군대에 의해 곧바로 진압되고, 반란에 참가한 대다수는 잔혹하게 처형당하거나 시베리아 유형을 당하지요. 데카브리스트 반란은 러시아 최초의 무장 봉기이자 러시아 혁명 운동사의 시작인 셈인데, 러시아 전역에 오래도록 커다란 충격파를 남겼습니다. 데카브리스트와 깊숙히 교유했던 작가 푸시킨이 이 반란을 소재로 여러 작품을 남겼고, 톨스토이가 쓴 『전쟁과 평화』 또한 구상 단계에서는 데카브리스트 혁명이 중심 소재이자 배경이었지요.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맨 처음 쓰기 시작하던 무렵에는 데카브리스트 혁명 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시베리아 유형 생활을 겪는 지식인의 이야기를 쓸 참이었습니다. 그러자면 데카브리스트 반란보다 앞서 일어났던 나폴레옹 전쟁부터 먼저 고찰해야 했지요. 그런데 나폴레옹 전쟁(러시아 국민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도중에 그만 작가의 생각이 바뀌었다고 하지요. 데카브리스트 지식인 몇 사람보다는 나폴레옹 전쟁을 겪은 러시아 민중들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여긴 것이지요. 그래서 『전쟁과 평화』는 나폴레옹 전쟁 이야기로 바뀌었고, 프랑스 군대가 모스크바에서 완전히 철수한 이듬해인 1813년까지의 이야기가 웅대한 장편으로 탄생했습니다. 1825년 12월에 일어난 데카브리스트 혁명 이야기는 『전쟁과 평화』에서는 끝내 담기지 못하지요.

 

투르게네프가 활동하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 말고도 작가의 주변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1860년 이후 검열이 가혹한 러시아의 분위기에 환멸을 느끼고 평생 동안 쫓아 다녔던 여가수인 폴린 비아르도를 따라 홀연 프랑스로 건너간 뒤 유럽에서 여생을 보냈고, 거기서 수많은 작가들과 교유하며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습니다. 그가 교유한 인물들은 플로베르, 에밀 졸라, 모파상, 빅토르 위고, 알퐁스 도데, 조르주 상드, 헨리 제임스 등이었지요. 물론 그는 러시아에서 활동할 동안 푸시킨(1837년), 레르몬토프(1839년), 도스토예프스키(1845년), 톨스토이(1855년) 등과 직접 만났으며, 특히 『아버지와 아들』을 탈고하던 해인 1861년에는 톨스토이와 결투까지 갈 정도로 심한 언쟁을 벌였던 적도 있었고, 1867년에는 바덴바덴에서 도스토옙스키와 언쟁을 벌이기도 했지요.

 

대략 이정도로 투르게네프의 주변을 둘러보고 나면 그가 우리에게 조금은 덜 낯설게 다가올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투르게네프와 그의 대표작인 『아버지와 아들』을 얘기하자면 이런 식으로 작가의 주변을 한번쯤 빙 둘러 돌아보는 방식이 약간은 필요할 듯합니다. 왜냐하면 작가가 이 작품에서 다루는 주제야말로 '세대 간의 갈등'이 핵심 주제인데, 세대 간의 갈등이란 결국 동시대를 살면서도 서로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파생되는 문제이기 때문이지요.

 

앞에서 굳이 200년 전쯤의 시대적 배경들을 주마간산 격으로나마 시시콜콜 들추어 낸 이유 또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도 그런 역사적 배경 지식들이 얼마간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겪는 세대 간의 갈등 속에는 뜻밖에도 나폴레옹 전쟁뿐 아니라, 1825년에 일어났던 데카브리스트 반란, 알렉산드르 1세, 니콜라이 황제 등이 너무나 자주 등장하며, 심지어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서도 중요한 인물로 등장했던 실존 인물인 꾸뚜조프 장군(러시아군 총사령관) 같은 인물까지도 등장하지요.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아버지와 아들』 속에서  푸시킨의 작품 『예브게니 오네긴』에 나오는 싯구절이 슬며시 인용되는 정도는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조금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이지요.

 

작품의 배경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설명하고, 이제부터는 작품에 담긴 가공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지요. 소설 제목의 원뜻은 『아버지들과 아이들』이지만 두 세대의 대립과 갈등을 강조하기 위해 『아버지와 아들』로 굳어졌다고 하지요.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의외로 단촐합니다. 아들들을 대표하는 인물은 주인공 바자로프와 그의 대학 동창인 아르카디 키르사노프입니다. 아버지들을 대표하는 인물은 아르카디의 아버지인 니콜라이와 아르카디의 큰아버지인 파벨이지요. 이들 네 사람은 당대 러시아 사회가 떠안고 있던 온갖 현안 문제들에 대해서 사사건건 견해를 달리하고 날카롭게 대립하지요. 그 충돌의 중심에는 늘상 바자로프와 파벨이 자리잡고 있고요.

 

1859년 5월, 페테르부르크에서 학업을 마친 아르카디는 귀향길에 오르는데, 학창시절의 절친이자 스승 격인 바자로프를 함께 데려가지요. 아버지의 영지인 마리노 마을에 도착한 두 사람은 첫날부터 어른들과 이런저런 갈등을 겪게 되는데, '아버지 세대'인 니콜라이와 파벨은 귀족 출신들이고 이상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인 데 반해, '아들 세대'인 바자로프는 잡계급 출신의 혁명적이고도 급진적인 민주주의자였기 때문이지요.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러시아의 농노해방(1861년 1월)을 목전에 둔 때였으며, 진보와 보수라는 두 이념 사이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였습니다.

 

파벨과 바자로프는 대면한 첫날 저녁부터 '서로가 강력한 적수'임을 직감하게 되지요. 당시 러시아 사회를 지배하던 이슈였던 농노제도, 서구주의와 슬라브주의, 유물론과 관념론, 문학과 예술, 러시아의 미래 발전 방향 등등에 대해 어느 하나 서로의 견해가 다르지 않은 게 없었기 때문이지요. 파벨이 보기에 바자로프는 '몹시 오만하고 뻔뻔스러운 냉소주의자이자 천한 놈'일 뿐이었고, 바자로프에게 파벨은 철주한 귀족주의자이자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현상'일 뿐이었지요. 그들의 견해 차이는 너무나 커서, 그 둘 사이에 끼인 온건한 보수주의자인 니콜라이와 온건한 진보주의자인 아르카디가 몹시 곤란한 지경에 빠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파벨은 젊어서 한때 페테르부르크에서도 제법 잘 나가는 젊은 귀족 신분이었으나 어느새 영락하여 홀몸으로 동생의 영지에 얹혀 사는 신세였으며, 니콜라이는 아내와 사별하고 나서 아들보다 더 나이 어린 동네 처녀를 데려와 후처 삼아 함께 생활하고 있었지요. 그런 시골 영지에 일부러 '친구 따라' 시골로 찾아와 손님 신세로 머무는 바자로프 또한 자신의 처지가 마냥 편할 리는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 다함께 모여 차를 마실 시간이나 식사 시간만 되면 파벨과 같은 '꼴통 보수'와 매번 마주쳐야 하니 얼마나 불편했을까요. 파벨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자로프가 설령 자신과 가치관이 너무나 다르며 아무리 그 청년이 못마땅하다고 하더라도, 사랑하는 조카가 가장 믿고 따르는 절친이자 일부러 손님으로 데려온 전도유망한 청년을 함부로 내쫓을 형편도 아니었으니까요.

 

『아버지와 아들』에는 딱히 젊은 세대와 나이든 세대 사이의 '세대 갈등'만 담겨 있진 않지요. 연인들의 심리 묘사에 탁월했던 투르게네프는 이 작품 속에 어김없이 다양한 유형의 커플들을 창조해 냈습니다. 그 가운데는 동네 처녀인 페네치카에 대한 향반(鄕班) 귀족 니콜라이의 동정 어린 사랑이나 카챠를 향한 청년 아르카디의 순수한 사랑 만으로도 인상적이지만, 아무래도 젊은 과부인 오딘초바를 향한 바자로프의 사랑이 단연 돋보이지요.

 

바자로프는 자칭 니힐리스트로서 '사랑의 감정' 자체를 냉소하고 배척하려 애쓰지만, 아름답고 지적인 젊은 과부인 오딘초바 앞에서는 자신의 신념마저 속절없이 무너지는 걸 절감합니다. 바자로프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면서도 젊은 청년과의 불확실한 사랑 때문에 새로운 번민에 빠지기 보다는 안정과 평온을 선택하는 오딘초바는 냉정하고도 이기적이지요. 사랑의 열병에 빠져 허우적대는 바자로프에게 결단코 먼저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는 않기 때문이지요. 오딘초바의 그런 태도 때문에 바자로프는 더욱 애타게 그녀 주위를 맴돌지만 그 두 사람의 사랑은 끝끝내 오딘초바에 의해 거부되고, 두 사람은 기약없이 결별합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아파하면서도 스스로 위로하고, 아픈 사랑에 대한 미련과 회한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도리어 안도하는, 그런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정도로 매혹적이지요.

 

오딘초바는 바자로프가 뜻하지 않게 사랑을 고백했던 그 방이 아니라 객실에서 그를 맞이했다. 그녀는 그에게 다정하게 손가락 끝을 내밀었지만 얼굴 표정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되어 있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 바자로프가 서둘러 말했다. "우선 당신을 안심시켜야 하겠습니다. 지금 당신 앞에 있는 한 평범한 인간은 오래전에 정신을 차렸고, 자기가 행했던 어리석은 행동을 다른 사람들이 잊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번에 떠나면 오랫동안 뵙지 못할 겁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연약한 사람은 아니지만, 당신이 혐오감으로 저를 회상하리라 생각하며 떠난다면 아주 불유쾌할 겁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높은 산 위에 방금 올라온 사람처럼 심호흡을 했다. 얼굴은 미소로 활기를 띠었다. 그녀는 다시 바자로프에게 한 손을 내밀어 그의 악수에 응했다.

 

"지난 일을 떠올려서 뭘 하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게다가 솔직히 제게도 잘못이 있었어요. 애교를 부리진 않았다 해도 뭔가 다른 잘못이 있었어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전처럼 친구로 지내요. 그건 꿈이었어요. 그렇잖아요? 누가 꿈을 기억하겠어요?"

 

"누가 그런 걸 기억하겠습니까? 게다가 사랑이란 …… 그건 위선적인 감정이니까요."

 

"정말이에요? 그 말을 들으니 정말 기뻐요."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이렇게, 바자로프는 그렇게 말했다. 그들은 둘 다 진실을 말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진실이었을까? 그들 자신도 모르는 일을 작가가 어찌 알겠는가.(271∼272쪽)

 

 

한편, 파벨과 바자로프의 갈등은 엉뚱한 데서 끝내 폭발하고 말지요. 의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장차 뛰어난 의사가 될 소양이 풍부했던 바자로프는 친구네 집에 머무는 동안 친구 아버지인 니콜라이의 후처 페네치카와 사이가 돈독한 편이었지요. 그녀가 낳아 기르는 갓난아기가 아플 때 정성껏 돌봐주기도 했고요. 그런 두 사람이 어느날 아침 산책길에 정원에서 만나, 서로 함께 장미꽃 향기를 맡으면서 키스하는 장면이 우연히 파벨에게 발각되고 만 게 발단이었습니다. 파벨은 더이상 바자로프의 행동거지를 눈뜨고 지켜볼 수 없었고, 참을 수 없는 모욕감에 결투를 신청하기에 이르지요. 뿌리깊은 증오심과 경멸을 담은 상대방의 도발에 바자로프도 곧바로 결투에 응합니다. 다음날 아침 곧바로 권총 결투가 벌어졌지만 다행히 파벨이 다리에 총상을 입는 정도로 그치고, 바자로프는 이내 그곳을 떠나게 되지요.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귀향한 아들을 맞이하게 된 바자로프의 부모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지요. 얼마 전에도 아들이 친구인 아르카디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 곁에 잠시 머무르긴 했지만 그 기간이 너무나 짧았었지요. 그때 바자로프는 오랜만에 찾은 고향집에서 고작 사흘밤만 묵은 뒤 갑작스레 훌쩍 떠났으니까요. 자바로프의 부모는 어쩌면 아직도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잠깐 그 때의 느닷없는 이별 장면으로 되돌아가 보지요.

 

다음 날 바자로프와 아르카디가 떠났다. 아침부터 온 집안이 침울한 분위기였다. ……  바실리 이바니치는 전에 없이 부산을 피웠다. 그는 눈에 띄게 허세를 부리고 큰 소리로 말하면서 발을 쿵쿵 굴렀지만, 그의 얼굴은 삐쩍 말라버렸고 눈길은 끊임없이 아들 쪽을 스쳐지나갔다. 아리나 블라시예브나는 조용히 울었다. 남편이 아침 일찍 꼬박 두 시간 동안 달래지 않았다면 노파는 망연자실하여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 달 안에 꼭 돌아오겠다고 여러 번 약속을 하고 자기를 붙잡고 있던 포옹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바자로프가 여행마차에 올라탔을 때, 말들이 움직이고 방울이 울리고 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이젠 더 이상 배웅할 필요가 없고 피어올랐던 먼지도 가라앉았을 때, 티모페이치가 완전히 등을 구부리고 비틀거리면서 조그만 자기 방으로 되돌아갔을 때, 갑자기 쪼그라들고 낡아버린 것 같은 집에 노부부만이 남았을 때, 조금 전만 해도 현관 계단에 서서 힘차게 손수건을 흔들던 바실리 이바니치는 맥없이 의자에 주저앉아 머리를 가슴에 푹 떨어뜨렸다. "버렸어. 우리를 버렸어!" 그는 중얼거렸다. "우릴 버렸어. 우리와 있는 게 답답했던 거야. 이젠 혼자야. 이 손가락처럼 혼자 남았어!" 그는 몇 번이나 되뇌었고, 그때마다 집게손가락만 편 한 한쪽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때 아리나 블라시예브나가 다가와 백발이 성성한 자기 머리를 하얗게 센 남편의 머리에 가져다 대면서 말했다.

 

"바샤, 어쩔 수 없어요! 아들이란 부모의 슬하를 떠나는 거예요. 그애는 매처럼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지만, 우리는 한 구멍 속에 난 버섯처럼 나란히 앉아서 꼼짝하지 않지요. 나만은 영원히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당신도 그럴 테지요."(215∼216쪽)

 

어딘가 실의에 잠긴 모습으로 불쑥 집으로 되돌아온 아들이 말합니다. 육 주 동안 머무를 생각으로 왔으며, 공부를 하고 싶으니까 제발 아무런 방해도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이지요. 아버지는 아들에게 서재를 통째 내어주고, 아들이 공부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쓰지요. 그러던 아들에게 우울한 권태와 막연한 불안이 찾아오고, 공부에 대한 열정이 갑자기 사라지지요. 혼자 산책하는 것도 그만두고 사람들과 어울릴 기회를 찾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일을 찾아내지요. 군의(軍醫)로 복무하다 퇴역한 아버지가 아들이 보는 앞에서 부상당한 농군을 힘겹게 치료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나서는, 자신이 아버지의 진료를 직접 도와드리는 게 좋겠다고 마음먹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자로프가 아버지의 방으로 찾아가 '질산은'이 있느냐고 묻지요. 자신의 상처를 지져야 한다고 말이지요. 이웃 마을에 발진티푸스에 걸려 사망한 환자가 나타났고, 일부러 간청해서 그 환자의 해부 실습에 참여했다가 그만 손가락을 좀 베었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티푸스에 감염되었다면 이미 때가 늦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손가락을 베었을 때만 하더라도 군의(郡醫)에게 질산은이 없었던 탓이지요. 그로부터 사흘 째 되던 날, 아들은 이미 식욕도 잃고, 두통과 오한과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바실리 이바니치는 말없이 아들을 간병했다. 아리나 블라시예브나가 아들 방으로 들어와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 바자로프는 '훨씬 좋아졌다'고 말하고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바실리 이바니치는 아내를 향해 두 손을 내저었다. 그녀는 울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깨문 채 밖으로 나갔다. 갑자기 집 안의 모든 것이 어두워졌고 사람들은 모두 풀죽은 얼굴을 했다. 집 안은 이상한 정적에 휩싸였다. …… 바실리 이바니치는 아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것이 아들을 피로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 저 다시 안락의자에 죽은 듯이 앉아서 이따금 손가락만 딱딱 꺾었다. 노인은 잠깐씩 정원으로 나와 형용할 수 없는 충격으로 장승이 되어버린 듯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그리고 아내의 질문을 피하면서 다시 아들에게로 돌아갔다. 결국 참다 못한 아내가 그의 손을 붙들고 거의 위협하듯이 발작적으로 말했다. "우리 애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그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대답 대신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웬일인지 미소 대신 웃음이 터져 나왔다.(295∼296쪽)

 

삶의 막바지에 다다른 바자로프에게 단 하나 남은 유일한 소망은 오딘초바를 다시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평생을 바자로프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꿋꿋이 버티며 살아왔던 부모 입장에서는 너무나 뜬금없는 '아들의 소원'이었지만 그 요청을 흔쾌히 들어주지요. 소식을 들은 오딘초바는 독일인 의사까지 데려왔지만, 이미 환자는 죽은 사람 같은 창백한 얼굴과 흐릿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지요. 그가 힘겹게 그녀에게 건네는 말 속엔 '다시 오지 못할 순간들'에 대한 깊은 회한과 더불어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는 절박한 메시지가 함께 농축된 느낌을 주지요.

 

"아,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해야만 하는데…… 저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이것은 전에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지만 지금은 더욱 그러합니다. 사랑은 하나의 존재 형태인데, 나 자신의 형태가 이미 해체되고 있으니까요."

 

바자로프가 죽고 나서도 세월은 무심하게 계속 흘러갑니다. 그러나 마리노 마을의 지주 저택에서 일어난 몇몇 중요한 변화들(두 쌍의 합동 결혼식이 있었지요. 아르카디는 오딘초바의 여동생 카챠와 결혼하고, 니콜라이는 후처 페네치카와 정식 결혼식을 올립니다. 오딘초바는 정치가를 지망하는 유능한 법률가와 결혼하지요. 파벨은 모스크바로 떠납니다.)을 모두 합친다고 하더라도,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노부부의 삶에 닥친 극적인 변화에 비하면 턱없이 사소해 보일 뿐이지요. 바자로프의 무덤가 풍경을 묘사한 작가의 문장은 너무나 애통하고 가슴이 시려 계속 읽기 힘들 정도입니다.

 

러시아의 한 벽촌에 조그만 마을 공동묘지가 있다. 러시아의 거의 모든 공동묘지가 다 그렇듯이, 이 공동묘지도 서글픈 모습을 하고 있다. 공동묘지를 에워싼 도랑은 오래전부터 잡초로 뒤덮였다. 잿빛 나무십자가들은 옆으로 기울어진 채 예전에 한번 페인트칠을 했던 십자가 지붕 밑에서 썩어가고 있다. 돌비석들은 마치 누군가가 밑에서 떠밀어 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조금씩 제자리에서 벗어나 있다. …… 그러나 그 무덤들 가운데 사람의 손길도 닿지 않고 동물의 발에도 짓밟히지 않은 무덤이 하나 있다. 그저 새들만이 그 위에 앉아서 노래를 부를 뿐이다. 철책이 무덤을 둘러싸고 있고, 어린 전나무 두 그루가 양쪽 끝에 심겨 있다. 이 무덤에 예브게니 바자로프가 묻혀 있다. 그리 멀지 않은 마을에서 이미 노쇠한 부부가 자주 이 무덤을 찾아오곤 한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면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걸어온다. 울타리에 가까이 다가가서는 무릎을 꿇고 쓰러져 오랫동안 서럽게 울면서 말 못하는 비석을 빤히 바라본다. 그 비석 아래 그들의 아들이 누워 있다. 그들은 몇 마디 말을 주고받으면서 비석에 앉은 먼지를 털고 전나무 가지를 다듬어주다가 다시 기도를 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거기에 있으면, 아들에게 더 가까이 있고, 아들과 관련된 추억에 더 가까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정말로 그들의 기도, 그들의 눈물이 헛된 것일까? 정말로 사랑, 그 성스럽고 헌신적인 사랑이 무력한 것일까? 오, 아니다! 아무리 정열적이고 죄 많은 반역의 심정이 그 무덤 속에 숨어 있을지라도 무덤 위에 자란 꽃들은 순진무구한 눈으로 평온하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이 꽃들은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이나 '무심한' 자연의 위대한 평온만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영원한 화해와 무궁한 생명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 (315∼316쪽)

 

이렇게 소설은 끝나지요. 그런데 작가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이 작품을 두고 '엄청난 소란과 논쟁'을 벌였다고 합니다. 논쟁의 핵심은 바자로프에 대한 투르게네프의 태도에 관한 문제였는데, 보수주의자들은 니힐리스트인 바자로프의 장점을 너무 과장하고 미화했다는 주장을 펼쳤고, 반대로 진보주의자들은 작가가 바자로프를 통해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을 악랄하게 희화하고 중상모략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독자들은 당대 사람들이 이 작품을 두고 왜 그토록 엄청난 소란을 일으켰는지를 쉽게 수긍하기 어렵지요. 양쪽 진영이 극단적인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며 주장했던 내용들이 현대의 독자들에겐 그다지 커다란 공감을 불러 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이 소설은 19세기 중반을 살았던 사람들이 겪었던 '세대 간의 갈등'을 그린 사회·정치적인 소설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시대를 살던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겪었던 온갖 삶의 애환들을 그린 세태 풍속 소설이나 연애 소설, 혹은 가족 소설의 요소들도 두루 지니고 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과거의 좋았던 한 때를 자주 회상하는 파벨과 니콜라이의 모습에서 차츰 스러져가는 러시아 특유의 귀족 문화에 대한 애가를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지요. 니콜라이가 자식 또래에 불과한 마을 처녀를 데려다 사는 모습도 어딘지 모르게 토속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깁니다. 더구나 젊은 청년 바자로프가 마을 처녀의 발산하는 젊은 매력에 홀딱 빠져 느닷없이 입맞춤을 시도하는 모습은 도리어 순수하고도 낭만적으로 다가옵니다. 전도 유망한 의사 지망생이었던 바자로프가 늙은 부모에게 다소 쌀쌀맞게 대하고, 그 부모들은 아들이 원하는 건 무엇이든 헌신적으로 수용하는 듯한 태도 또한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는 않습니다.

 

투르게네프에게는 도스토옙스키에게서 느껴지는 혁명적이고 테리리스트적이며 충격적인 기질은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그 대신에 (정말 뜻밖에도!) 우리나라의 근대 문학 작품들에서 곧잘 느껴지는 특유의 토속적인 향수나 우수, 혹은 아이러니가 느껴집니다. 모처럼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환자들을 돌보며 돈독하고 즐겁게 지낼 꿈에 잔뜩 부풀어 오른 바자로프의 부모들에게 들이닥친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은 얼마나 황당하고도 슬픈가요. 이런 대목에서 현진건의 단편 『운수 좋은 날』을 떠올리는 건 조금도 이상하지 않지요. 인력거를 끌던 김첨지가 억세게 운수 좋은 날이라고 몹시 들떠 하루를 보내지만, 정작 그날 저녁에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아내의 죽음이었으니 말이지요. 오딘초바와 바자로프의 지극히 조심스러운 사랑 접근법은 얼핏 주요섭의 『사랑 손님과 어머니』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은근히 서로를 사랑하지만 현실의 장벽 때문에 끝내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서로 안타까워하면서 이별한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이것으로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소개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


동영상 링크 주소는 ☞ https://youtu.be/vpjYPjzxYaU



 * *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