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후세의 서양문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라틴문학의 걸작으로 흔히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꼽는다고 하지요. 그런데 제 생각엔 베르길리우스가 쓴 '로마 건국 신화'가 아무리 장중하고도 생동감 넘치는 문체로 '로마의 위대함'을 노래했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천 년 이상이나 오랜 세월 동안 로마 제국에 편입되어 지냈던' 수많은 유럽 사람들의 자의식 형성에 오랫동안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오비디우스가 쓴 신화 속에 담긴 드넓은 주제와 기가 막힌 이야기들에 비할 바가 못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는 너무나 로마 중심적인 데다가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엄숙하고 고상한 분위기를 지닌 탓에 라틴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에게조차 여전히 접근하기가 만만찮은 책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오비디우스가 쓴 『변신 이야기』는 그 주제의 범속성이나
세계성 측면에서 베르길리우스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치 폭넓고도 보편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지요. 또한 후세의 서양문학뿐만 아니라 음악, 미술, 조각 등 온갖 예술작품에 두루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쳤다는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그리고 로마의 밖에서만 살아온 수많은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조차도 그리 낯설지 않거나 심지어 친숙한 이야기들이 많다는 점에서도 저는 두 천재 시인 가운데 오비디우스의 작품을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보다 좀 더 쉽게 읽어볼 만한 책으로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더군다나 오늘날 그 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만큼 무수하게 쏟아져 나온 '그리스·로마 신화'를 다룬 온갖 책들도 결국 그 내용의 대부분은 오비디우스의 작품에 담긴 이야기에서 비롯됐다는 사실까지 고려해 본다면, 그런 이야기들의 원조격이나 다름없는 오비디우스의 작품을 한번쯤 제대로 살펴보는 일은 '신화의 원형'을 직접 고스란히 마주 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좀 특별한 경험이 아닐 수 없지 싶습니다. 더군다나
서양에서조차 오비디우스가 쓴 신화가 고대 로마의 '서사시' 형식으로 쓰여진 탓에 읽기가 결코 쉽지는 않았던 때문인지 미국 사람 토마스 불핀치가 산문으로 풀어 쓴 신화집이 오비디우스의 작품보다 훨씬 더 큰 인기를 끌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오비디우스의 원전에 다가가는 일이 더욱 흥분되는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그리스·로마 신화의 원조나 다름없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가 왜 그토록 재미있고도 유명한 책이면서도 여전히 읽기 어려운 묘한 책이 되었을까요. 그 이유를 저는 무엇보다도 우선 '신화'가 지닌 본질적인 성격에서 찾아보고 싶습니다. 신화는 말 그대로 신들의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신들은 너무나 여러 '계보'가 있어서 그들의 족보와 촌수를 따지는 일이 여간 복잡한 일이 아닌데다가, 거기에 덧붙여 온갖 다양하고 낯선 이름들을 지닌 인간들조차 쉼없이 끼어드니 신화는 일단 너무나 복잡하다는 느낌부터 들게 됩니다. 게다가 신화에는 결코 신과 인간만 등장하는 법이 없지요. 수많은 강과 바다에 사는 온갖 요정들도 신과 인간들 사이에 쉼없이 끼어들기 마련이고, 다양한 이름들을 지닌 여러 지방과 섬과 도시, 산과 강, 호수와 바다가 끊임없이 이어져 나오니 도무지 거기에 휘둘리지 않을 도리가 없지요. 그러니 신들의 이야기가 아무리 재미있다 한들 갈피도 잡히지 않는 이야기를, 더군다나 온갖 함축적인 표현들로 가득찬 '시인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신화'를 읽는 일이 어려울 수밖에 없게 되지요.

 

오비디우스의 신화를 읽게 되면서 겪게 되는 두 번째 어려움은 대체로 '이야기의 방대함'에 있지 싶습니다. 이 작품만 하더라도 '시로 함축시켜' 펼쳐 놓은 이야기의 전체 행수가 무려 1만 2천 행에 이르는데,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가 9천 9백 행에 못 미치는 걸 고려해 보면 그 길이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지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1만 5천 행, 『오뒷세이아』가 1만 2천 행 정도여서 그와 비슷한 길이라고 여길 수도 있으나, 라틴어는 그리스어에 비해 표현이 훨씬 더 함축적이기 때문에 오비디우스의 작품이 길이가 훨씬 더 긴 작품으로 느껴진다고들 하지요.

 

오비디우스의 신화를 읽게 되면서 겪게 되는 세 번째 어려움이자 쉽게 극복하기 힘든 커다란 난제는 또 있습니다. 그건 대체로 '사전 지식의 부족' 때문이지요. 호메로스의 작품이 되었건, 베르길리우스의 작품이 되었건, 혹은 고대 그리스 비극 작가들의 작품이 되었건 그 작품들은 거의 모두 기본적으로는 시로 쓰여진 작품들이며, 아무리 이야기 형태의 시라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함축적인 표현'들로 이루어져 있지요. 그런데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는 그런 경향이 유난히 더 강합니다. 가령 헤라클레스의 죽음을 다룬 짧은 이야기만 하더라도 그 유명한 '12 고역'을 자세히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저 어리둥절한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는 형편이지요. 그 대목을 여기서 조금만 살펴 보고 넘어가지요.  

 

"이러자고 내가 잔혹한 안타이우스에게서 어머니의 힘을 빼앗았던가요?"라는 짧은 구절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안타이우스가 땅의 자식으로서 땅에 닿을 때마다 힘을 얻기 때문에 헤라클레스가 그를 공중에 들어 올린 후 목졸라 죽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주석'을 살펴보고나서야 겨우 그 뜻을 이해하게 되고, 그런 사실을 알고난 뒤라도 뭔가 여전히 미진한 구석이 남아서 알 듯 모를 듯한 아리송한 느낌을 떨치기 어렵지요. 그런데 '이러자고'라는 표현이 그저 한 두번에 그치는 것도 아니고, 마치 그 책을 읽는 독자들의 인내심을 시험하듯이 줄기차게 계속 이어져 나온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요. 결국 '이러자고 내가 이 책을 펼쳤단 말인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갑자기 그 틈을 비집고 불쑥 튀어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겠지요.


사실 헤라클레스의 '12 고역'만 하더라도 이야기 하나 하나가 온갖 흥미로운 요소들을 두루 지니고 있지요. 가령 불을 내뿜는 용이 지키고 있는 '황금 사과'를 따오기 위해 지축을 떠받치고 있던 아틀라스를 찾아가고, 거기서 어쩔 수 없이 그를 대신해서 그 무거운 짐을 떠메고 있다가 나중에 결국 황금사과를 손에 넣게 되자 이 영웅이 교묘한 꾀를 내어 그 무거운 짐을 도로 아틀라스에게 되돌려주는 이야기는 얼마나 '상상력'을 즐겁게 자극하는가요. 도저히 이뤄낼 수 없을 듯한 난제들을 척척 해내는 이 고대의 영웅을 보고 열광하지 않을 사람들이 거의 없었던 탓에 마치 고대판 '미션 임파서블'을 보는 즐거움과 통쾌함을 누구나 만끽할 수 있었던 셈이지요.


고대 그리스의 비극 시인들조차 헤라클레스의 영웅담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는지 지금까지 온전히 전해지는 33편의 고대 그리스 비극 작품 가운데 무려 세 편이 그의 신화를 다룬 작품이며,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또한 이 영웅의 이야기만 따로 떼어내어 온전히 한 권의 책으로 펴냈을 정도이지요. 최근에는 '현대판 헤라클레스'로 종종 여겨지는 축구 영웅 호날두의 연인 이리나 샤크가 영화『허큘리스』에서 주연 여배우로 출연한 일이 화제가 된 적도 있었을 정도로 그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생생히 살아있는 영웅'처럼 우리 주변에 가까이 있지요. 도무지 믿기지 않는 그의 영웅적인 활약상을 고대 로마의 시인이 '헤라클레스의 입'을 통해 '이러자고 내가 그 고생을 했단 말인가'하고 열두 번씩이나 거푸 탄식을 연발하는 식으로 응축시켜 놓았으니, 그 이야기가 온전히 '귀에 들리는 사람에게만'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반쯤만 열려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지요.

 

이러한 여러 난관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매혹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건 무엇보다도 오비디우스가 집대성해 놓은 수많은 신화들 자체가 지닌 이야기의 매력과 더불어 시인이 풀어가는 기가 막힌 이야기 솜씨 덕분일 테지요. 그는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로부터 널리 알려진, 그래서 나름대로 꽤나 식상한 이야기들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아니면 도저히 쓸 수 없는 문체로 그 이야기들을 정말 기가 막히도록 재미있게 술술 풀어내지요. 이 책을 번역한 천병희 선생님은 '그의 표현이 평이하고 유려하고 우아하면서도 재치와 유머와 파토스와 위엄이 있기 때문에' 오비디우스가 널리 읽힌다고 말했는데, 역자의 평가만 들어봐도 그의 문체가 얼마나 다채로운 매력을 지니고 있는지 금세 알 수 있지요.

 

오비디우스의 신화가 여전히 매혹적인 또다른 이유는 좀 더 근본적입니다. 그가 쓴 신화를 읽으면 우리는 그 속에 담긴 '인간 본성을 탐구할 수 있는 상징체계'를 무수히 많이 발견할 수 있지요. 아무리 위엄있는 신이라고 하더라도 오비디우스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그들의 이야기'는 인간 속물들과 크게 달리 비치지 않지요. 신들도 인간처럼 질투하고 시기하고 남의 아내를 넘보고 자신의 욕망이 좌절될 때마다 분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쉽게 걸려 넘어지며 어떨 땐 어린애처럼 엉엉 울고 있어서 얼른 그들에게 달려가 덥석 끌어안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고 싶을 때조차 있지요. 그래서 이 작품을 읽으면 우리는 신화 속의 영웅들이 우리와는 다른 머나먼 세계에 존재하는 별종들이 아니라 마치 소설 속 등장인물들처럼 우리와 비슷한 존재로 그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지요.

 

오비디우스의 생애는 특기할 만한 대목이 몇 있습니다. 그는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암살된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난 바로 이듬해에 태어났는데, 그가 차츰 성장하여 로마에서 시인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는 마침 로마의 정치 체제가 공화정을 끝내고 제정으로 넘어간 때였습니다.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암살된 이후 젊은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건곤일척의 승부를 겨룬 끝에 젊은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제국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개막된 소위 '아우구스투스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지요.  

 

그는 초창기엔 주로 여러 가지 사랑 이야기를 담은 『사랑의 노래』, 신화와 전설 속의 유명 여성들이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된『여걸들의 서한집』, 연애 기술을 다룬『사랑의 기술』, 실연한 자들을 위한 『사랑의 치료약』등을 썼는데, 여기서 크게 성공하게 됩니다. 그 뒤에 그는 『로마의 축제일들』과 함께 자신의 대표작인『변신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는데, 그때는 이미 선배 시인들이었던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마저 세상을 떠나고 오비디우스가 로마의 문학계를 대표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돌연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흑해 서안의 토미스(오늘날의 루마니아)로 유배되고 맙니다. 거기서 그는 비참하고 쓸쓸한 만년을 보내다가 유배된 지 10년 만인 기원후 17년 또는 18년에 눈을 감고 마는데, 그가 얼마나 간절히 로마로 돌아가고 싶어 했는지는 유배지에서 쓴『비탄의 노래』와『흑해로부터의 편지』에 잘 담겨져 있다고 하지요.

 

그가 유배된 이유는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데, 그 자신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두 가지 죄('詩'와 '과오')를 지었다고 합니다. 정작 본인은 '이에 관해 자세히 언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까지 말했지만, 후세 사람들은 대체로 그가 말한 시(詩)가 『사랑의 기술』일 것으로 보는 데 대해 의견 일치를 보인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 작품은 그가 추방되기 무려 8년 전에 나온 작품이기 때문에 유배의 직접적인 이유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가 추방된 결정적인 이유는 결국 '과오' 때문으로 보이는데, 오비디우스는 자신의 처지를 '악타이온'에 비교했다고 하지요. 쉽게 말해서 '못 볼 것을 보았다'는 것이지요. 오비디우스가 '본'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비록 오비디우스는 끝내 로마로 돌아오지 못하는 비운을 겪었지만 그의 작품은 자신이 예언했던 대로 끝까지 살아남아 영생하는 영광을 누리고 있지요. 그의 예언은 이랬습니다.

 

이 작품은 윱피테르의 노여움도, 불도, 칼도, 게걸스런 노년의 이빨도 없앨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변신 이야기』에 담긴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지요.

 

이 작품에 담긴 이야기는 약 250편이며, 크게 신들에 관한 이야기(1권 452∼6권 420행), 영웅들에 관한 이야기(6권 421∼11권 193행), 역사적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11권 194∼15권 744행)로 나뉘어 있지요. 그런데 신화의 경우에는 전후 관계나 인과 관계가 분명하지 않을 때가 많아 '시간적 순서'에 따라 이야기를 전개하기 몹시 힘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제의 유사성이나 상이성, 지리나 계보 등을 따라 절묘하게 이야기들을 연결시켜놓았습니다. 그래서 이 책 속에 담긴 이야기들은 어쩌면 거의 대부분 따로 떼어놓아도 좋을 이야기들이지만 시인의 솜씨 덕분에 느슨하게나마 주욱 이어진 이야기처럼 읽힐 수 있는 것이지요.

 

신들의 이야기든 영웅들의 이야기든 서로 아무런 관계조차 없을 정도로 동떨어진 이야기들을 오비디우스가 이 작품에서 한데 두루 붙들어 놓을 수 있도록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물론 '변신'입니다. 그렇지만 '변신'은 이 작품의 주제라기 보다는 이야기를 끌어모으는 데 필요한 하나의 '구실'이나 '핑계거리'에 더 가까운 인상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이 작품에 담긴 모든 이야기들이 반드시 '변신'을 포함하지는 않는 데다가, '변신'이 꼭 필요하거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지요. 어쩌면 '변신'은 그저 인간들의 상상이 만들어낸 신화 속에 자연히 딸려나오는 또다른 상상으로의 자연스런 변주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르지요.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놀라게 되는 건 '여자들의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섬세한 심리 묘사'인데, 이 책을 번역한 천병희 선생님의 작품 해설에 따르면 이 부분은 그리스 비극 시인 에우리피데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헤라클레스의 죽음'을 노래한 대목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작품을 온전히 제대로 감상하려면 '당연히' 오비디우스가 여기 저기서 끌어온 이야기들을 독자들이 미리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점에 대해 옮긴이의 설명을 조금 인용해 보지요.

베르길리우스 시의 묘미를 느끼려면 호메로스의 시를 알아야 하듯,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도 그의 선배 시인들의 시를 알고 있으면 그 깊은 맛을 구석구석 느낄 수 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를 비롯한 그리스 라틴문학의 읽는 재미를 극대화하려면 텍스트 간의 관련성(intertextuality)을 파악할 것을 권한다. 앞서 말했듯이 네스토르는 젊은 나이에 칼뤼돈의 멧돼지 사냥에 참가하지만 멧돼지가 덤벼들자 당장 이를 피해 마치 장대높이뛰기 하듯 창자루를 짚고 나무 위로 도망치는데, 이 장면은 그가 『일리아스 』에서 그리스 장수들의 회의석상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자기는 젊었을 때 아무리 강한 적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며 다른 장수들을 나무라는 장면들을 알고 있어야만 더 재미있게 읽히는 것이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기 위해서는 과연 얼마만큼 '그의 선배 시인들의 시를 알고 있으면' 좋을까요. 제 판단으로는 적어도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 그리스 3대 비극작가들의 비극시,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정도는 미리 읽고 난 뒤에 이 시를 읽는 게 좋겠다 싶습니다. 가령 이 책에 실린 대표적인 명문장 가운데 하나인 '아킬레스의 무구를 두고 벌이는 아이약스와 울릭세스의 설전'만 하더라도, 이 두 영웅이 트로이아 전쟁에서 얼마만큼 드높은 무공을 쌓았으며(『일리아스 』), 아킬레스만 빼고는 그 누구도 자신에게 필적할 만한 장수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아이약스(아이아스)가 '무구 재판'에서 울릭세스(오뒷세우스)에게 패했을 때 그가 왜 기어코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소포클레스의 비극『아이아스』), 또한 트로이아 전쟁이 끝난 뒤 오뒷세우스가 귀향하던 중에 고난을 겪는 와중에 잠시 저승으로 내려갔을 때, 그의 눈에 띄었던 '아이아스의 혼령'이 오뒷세우스에게 '끝내 말 한 마디 건네지 않고' 그냥 돌아서고 말았던 장면까지 떠올릴 수 있다면(『오뒷세이아』), 오비디우스가 노래한 두 영웅 사이의 설전이 훨씬 더 깊은 울림과 감동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으리라 여겨지기 때문이지요.

 

오비디우스는 이 책 속에서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낼 수 있는 온갖 다양한 '사랑 이야기'를 자유자재로 '변주'해서 들려줍니다. 이미 젊은 시절부터 '연애시'에 특별한 능력을 발휘했던 시인이 자신의 특출난 재능을 '사랑 이야기'에 아낌없이 쏟아낸 덕분에 시인의 노래는 '어떤 사랑'에서나 거침이 없으며, 몽테뉴가 말했던 것처럼 '마치 풍부한 물이 억지로 맹렬하게 밀려 나가다가 좁은 홈통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찾지 못하는 것과 같은' 그런 느낌은 조금도 찾을 수 없지요. 

 

오비디우스가 노래한 사랑 이야기 가운데 특히 매혹적으로 다가온 이야기들만 해도 일일이 다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사랑의 쾌감'에 대한 남녀간의 차이를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현명하게' 밝힌 사랑의 쾌감을 이야기한 티레시아스에서부터 시작하여, 자기 자신을 사랑한 나르킷수스와 에코 이야기, 셰익스피어가 지어낸 '로미오와 줄리엣'의 원조가 된 퓌라무스와 티스베 이야기, 낙랑공주 이야기를 닮은 이아손과 메데아 이야기, 해서는 안 될 사랑, 오라비를 사랑한 뷔블리스 이야기, 글룩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에 나오는 아리아 '에우리디체 없이 어찌 살라고'라는 노래로 더욱 유명한 오르페우스와 에우뤼디케 이야기, 자신의 조각 작품을 사랑한 퓌그말리온의 기도, 애닯고도 가슴 절절한 사랑 이야기인 물총새로 변한 케윅스와 알퀴오네 등이 제게는 하나같이 매혹적으로 다가왔고, 그 이야기들에 얽힌 명화들을 찾느라 한동안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으니까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는 이미 오래 전부터 '예술가들의 보물 창고'와 다름없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숱한 회화와 조각 작품들은 물론 수많은 음악 작품에도 그 소재를 제공했으니까요. 오페라의 효시로 인정받는 1607년에 초연된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 글룩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캉캉 춤'으로 유명한 오펜바흐의 <지옥의 오르페오> 등이 모두 오르페우스와 에우뤼디케 이야기에서 비롯된 작품이지요. 아예 <변신 이야기>를 교향곡의 제목으로 내세운 작품들도 여럿인데, 벤자민 브리튼의 <변신 이야기>와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디터스도르프(1739∼1799)의 <변신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대해 이미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이 작품과 관련해서 한가지 덧붙여 말씀드릴 게 있다면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작가 이탈로 칼비노가 고전에 관해 남긴 말들입니다. 그는 『왜 고전을 읽는가』라는 책에서 고전을 재미있는 표현들로 새롭게 정의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문장은 다음과 같았지요.

 

 1.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를 읽고 있어."라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칼비노의 '고전의 정의'를 계속 따라가다 보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가 얼마나 그의 주장과 찰떡 궁합을 이루는지 놀라게 됩니다. 

 

6. 고전이란 독자에게 들려줄 것이 무궁무진한 책이다.

10. 고전이란 고대 전통 사회의 부적처럼 우주 전체를 드러내는 모든 책에 붙이는 이름이다.

  

이런 설명들은 한결같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도 너무나 잘 들어맞지요. 칼비노가 '고전'에 관해 언급한 다음의 문장들을 읽으면 현대의 독자들이 왜 하필 2000년 전쯤에 쓰여진 까마득한 고대의 신화에 다시금 귀를 기울여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쯤 되면 근본적인 문제를 더 이상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즉 고전을 읽은 체험을, 고전이 아닌 책을 읽은 경험과 어떻게 관련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질문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동시대를 잘 이해하게 해 주는 다른 책들을 제쳐 두고 왜 굳이 고전을 읽어야 하는가?' 여기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이어질 수 있다. '오늘날 홍수처럼 쏟아지는 수많은 정보들 사이에서 허우적거리는 우리는 고전을 읽을 수 있는 정신적인 여유와 시간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이상적인 상황은 한 고전 작품에서 잘 구성된 음악처럼 울리는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현재에 관한 모든 것들은 창밖의 자동차 소음, 날씨의 변화와 같은 저 바깥의 잡음처럼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사람들은 이와는 반대로 행동하기 일쑤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전의 실체를 먼 메아리처럼 듣는다. 지금 발생하는 일들과 관련한 소식들은 쩌렁쩌렁 울리는 텔레비전 소리처럼 듣고, 고전은 그 바깥에서 들려오는 머나먼 메아리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어지는 칼비노의 얘기는 결국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마무리되지요. '고전이란,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라고 말이지요. 이와 같은 결론은『평생독서계획』을 쓴 클리프턴 패디먼의 얘기와 너무나 닮았습니다.

 

"고전을 다시 읽게 되면 당신은 그 책 속에서 전보다 더 많은 내용을 발견하지는 않는다. 단지 전보다 더 많이 당신 자신을 발견한다."

 

미국의 사상가인 랄프 왈도 에머슨은 "좋은 책을 읽을 때면 나는 3천 년은 더 사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와 같은 작품이 바로 이런 표현에 딱 어울리는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에머슨의 절친이었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월든』에 남겨놓은 문장 속에도 이와 비슷한 생각들이 거듭 발견되지요.

 

 

인류의 가장 고귀한 생각을 기록한 것

요즘 저렴한 가격에 많은 출판물이 쏟아져 나오고 번역된 책도 많지만, 고대의 영웅을 그린 작가들은 좀처럼 소개되지 않는다. 그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멀리 동떨어진 사람들처럼 보이고, 그들의 작품을 인쇄한 문자는 희한하고 이상해 보인다. 그래도 고대 언어에서 영원히 잊히지 않을 암시와 자극이 될 만한 몇 마디를 배워 길거리의 천박함을 딛고 일어선다면, 젊은 날과 소중한 시간을 투자할 가치는 충분하다. 때때로 사람들은 고전 연구가 결국에는 더 현대적이고 실용적인 학문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할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모험을 즐기는 학생이라면 어떤 언어로 얼마나 오래전에 쓰인 것인지 상관하지 않고 고전을 손에서 놓지 않을 것이다. 고전이 인류의 가장 고귀한 생각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고전은 결코 썩지 않는 유일한 신탁이어서, 지금 이 시대의 의문에 대한 해답까지 담겨 있다. 델포이와 도도나도 그 시대에 대한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주석달린 월든』, <독서> 中에서

 

이것으로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대한 소개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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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4 15: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24 2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투르게네프의 대표작 『아버지와 아들』을 소개합니다.

 

투르게네프는 러시아를 빛낸 위대한 소설가에 반드시 포함되는 작가지만, 일반적으로 가장 덜 알려져 있고 또 그만큼 덜 친숙한 작가이지요. 그가 다루는 주제는 1840년대와 1850년대에는 정말 매력적이었지만 지금은 그만큼의 호소력을 지니지 못한 탓도 있는 듯합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200년 전에 태어난 작가가 우리에게 과연 얼마나 친숙할 수 있을까요. 더구나 러시아 작가인데 말이지요.

 

어쨌든 그의 작품을 조금이라도 더 깊이 이해하자면 우선 그가 살았던 시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무렵의 세계를 좀 더 폭넓게 둘러 보면 대략 이렇습니다.

 

구대륙에서는 나폴레옹이 유럽 전역을 휩쓴 끝에 알프스를 넘어 러시아 원정(1812.5∼1812.10)까지 감행한 적이 있었지요. 그 원정은 결국 실패하고, 그 여파로 이듬해 파리가 함락되고 파리 평화 조약이 체결됩니다(1814년). 새로운 유럽의 국제 질서는 빈 회의에 맡겨지는데, 빈 회의가 잠시 난항을 겪자 그 틈을 비집고 나폴레옹은 또다시 파리로 되돌아오지요. 그러나 그의 지배는 100일 천하로 끝나고, 워털루 전투(1815년)에서 패해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를 떠납니다. 빈 회의가 끝난 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제창으로 신성 동맹이 성립되고, 영국 · 러시아 · 오스트리아 · 프로이센이 4국 동맹(1815년)을 맺지요.

 

이제 다시 러시아로 눈길을 돌려 보지요.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1세(재위 1801∼1825)는 몹시 분주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을 치른 뒤에는 파리에 입성하여 빈 회의와 신성동맹 결성을 주도했지요. 그런데 1825년에 갑자기 사망하면서 새로운 후계자 문제로 어수선한 틈을 타 저 유명한 데카브리스트(12월 당원) 반란이 일어납니다. 나폴레옹을 추격해 유럽 원정에 나섰던 진보적인 청년 귀족들이 1816년부터 혁명적 결사를 조직해 활동해 오다가, 반동적인 니콜라이가 즉위하는 1825년 12월 26일에 거사를 일으켰던 사건이었이지요. 반란은 군대에 의해 곧바로 진압되고, 반란에 참가한 대다수는 잔혹하게 처형당하거나 시베리아 유형을 당하지요. 데카브리스트 반란은 러시아 최초의 무장 봉기이자 러시아 혁명 운동사의 시작인 셈인데, 러시아 전역에 오래도록 커다란 충격파를 남겼습니다. 데카브리스트와 깊숙히 교유했던 작가 푸시킨이 이 반란을 소재로 여러 작품을 남겼고, 톨스토이가 쓴 『전쟁과 평화』 또한 구상 단계에서는 데카브리스트 혁명이 중심 소재이자 배경이었지요.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맨 처음 쓰기 시작하던 무렵에는 데카브리스트 혁명 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시베리아 유형 생활을 겪는 지식인의 이야기를 쓸 참이었습니다. 그러자면 데카브리스트 반란보다 앞서 일어났던 나폴레옹 전쟁부터 먼저 고찰해야 했지요. 그런데 나폴레옹 전쟁(러시아 국민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도중에 그만 작가의 생각이 바뀌었다고 하지요. 데카브리스트 지식인 몇 사람보다는 나폴레옹 전쟁을 겪은 러시아 민중들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여긴 것이지요. 그래서 『전쟁과 평화』는 나폴레옹 전쟁 이야기로 바뀌었고, 프랑스 군대가 모스크바에서 완전히 철수한 이듬해인 1813년까지의 이야기가 웅대한 장편으로 탄생했습니다. 1825년 12월에 일어난 데카브리스트 혁명 이야기는 『전쟁과 평화』에서는 끝내 담기지 못하지요.

 

투르게네프가 활동하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 말고도 작가의 주변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1860년 이후 검열이 가혹한 러시아의 분위기에 환멸을 느끼고 평생 동안 쫓아 다녔던 여가수인 폴린 비아르도를 따라 홀연 프랑스로 건너간 뒤 유럽에서 여생을 보냈고, 거기서 수많은 작가들과 교유하며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습니다. 그가 교유한 인물들은 플로베르, 에밀 졸라, 모파상, 빅토르 위고, 알퐁스 도데, 조르주 상드, 헨리 제임스 등이었지요. 물론 그는 러시아에서 활동할 동안 푸시킨(1837년), 레르몬토프(1839년), 도스토예프스키(1845년), 톨스토이(1855년) 등과 직접 만났으며, 특히 『아버지와 아들』을 탈고하던 해인 1861년에는 톨스토이와 결투까지 갈 정도로 심한 언쟁을 벌였던 적도 있었고, 1867년에는 바덴바덴에서 도스토옙스키와 언쟁을 벌이기도 했지요.

 

대략 이정도로 투르게네프의 주변을 둘러보고 나면 그가 우리에게 조금은 덜 낯설게 다가올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투르게네프와 그의 대표작인 『아버지와 아들』을 얘기하자면 이런 식으로 작가의 주변을 한번쯤 빙 둘러 돌아보는 방식이 약간은 필요할 듯합니다. 왜냐하면 작가가 이 작품에서 다루는 주제야말로 '세대 간의 갈등'이 핵심 주제인데, 세대 간의 갈등이란 결국 동시대를 살면서도 서로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파생되는 문제이기 때문이지요.

 

앞에서 굳이 200년 전쯤의 시대적 배경들을 주마간산 격으로나마 시시콜콜 들추어 낸 이유 또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도 그런 역사적 배경 지식들이 얼마간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겪는 세대 간의 갈등 속에는 뜻밖에도 나폴레옹 전쟁뿐 아니라, 1825년에 일어났던 데카브리스트 반란, 알렉산드르 1세, 니콜라이 황제 등이 너무나 자주 등장하며, 심지어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서도 중요한 인물로 등장했던 실존 인물인 꾸뚜조프 장군(러시아군 총사령관) 같은 인물까지도 등장하지요.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아버지와 아들』 속에서  푸시킨의 작품 『예브게니 오네긴』에 나오는 싯구절이 슬며시 인용되는 정도는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조금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이지요.

 

작품의 배경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설명하고, 이제부터는 작품에 담긴 가공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지요. 소설 제목의 원뜻은 『아버지들과 아이들』이지만 두 세대의 대립과 갈등을 강조하기 위해 『아버지와 아들』로 굳어졌다고 하지요.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의외로 단촐합니다. 아들들을 대표하는 인물은 주인공 바자로프와 그의 대학 동창인 아르카디 키르사노프입니다. 아버지들을 대표하는 인물은 아르카디의 아버지인 니콜라이와 아르카디의 큰아버지인 파벨이지요. 이들 네 사람은 당대 러시아 사회가 떠안고 있던 온갖 현안 문제들에 대해서 사사건건 견해를 달리하고 날카롭게 대립하지요. 그 충돌의 중심에는 늘상 바자로프와 파벨이 자리잡고 있고요.

 

1859년 5월, 페테르부르크에서 학업을 마친 아르카디는 귀향길에 오르는데, 학창시절의 절친이자 스승 격인 바자로프를 함께 데려가지요. 아버지의 영지인 마리노 마을에 도착한 두 사람은 첫날부터 어른들과 이런저런 갈등을 겪게 되는데, '아버지 세대'인 니콜라이와 파벨은 귀족 출신들이고 이상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인 데 반해, '아들 세대'인 바자로프는 잡계급 출신의 혁명적이고도 급진적인 민주주의자였기 때문이지요.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러시아의 농노해방(1861년 1월)을 목전에 둔 때였으며, 진보와 보수라는 두 이념 사이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였습니다.

 

파벨과 바자로프는 대면한 첫날 저녁부터 '서로가 강력한 적수'임을 직감하게 되지요. 당시 러시아 사회를 지배하던 이슈였던 농노제도, 서구주의와 슬라브주의, 유물론과 관념론, 문학과 예술, 러시아의 미래 발전 방향 등등에 대해 어느 하나 서로의 견해가 다르지 않은 게 없었기 때문이지요. 파벨이 보기에 바자로프는 '몹시 오만하고 뻔뻔스러운 냉소주의자이자 천한 놈'일 뿐이었고, 바자로프에게 파벨은 철주한 귀족주의자이자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현상'일 뿐이었지요. 그들의 견해 차이는 너무나 커서, 그 둘 사이에 끼인 온건한 보수주의자인 니콜라이와 온건한 진보주의자인 아르카디가 몹시 곤란한 지경에 빠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파벨은 젊어서 한때 페테르부르크에서도 제법 잘 나가는 젊은 귀족 신분이었으나 어느새 영락하여 홀몸으로 동생의 영지에 얹혀 사는 신세였으며, 니콜라이는 아내와 사별하고 나서 아들보다 더 나이 어린 동네 처녀를 데려와 후처 삼아 함께 생활하고 있었지요. 그런 시골 영지에 일부러 '친구 따라' 시골로 찾아와 손님 신세로 머무는 바자로프 또한 자신의 처지가 마냥 편할 리는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 다함께 모여 차를 마실 시간이나 식사 시간만 되면 파벨과 같은 '꼴통 보수'와 매번 마주쳐야 하니 얼마나 불편했을까요. 파벨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자로프가 설령 자신과 가치관이 너무나 다르며 아무리 그 청년이 못마땅하다고 하더라도, 사랑하는 조카가 가장 믿고 따르는 절친이자 일부러 손님으로 데려온 전도유망한 청년을 함부로 내쫓을 형편도 아니었으니까요.

 

『아버지와 아들』에는 딱히 젊은 세대와 나이든 세대 사이의 '세대 갈등'만 담겨 있진 않지요. 연인들의 심리 묘사에 탁월했던 투르게네프는 이 작품 속에 어김없이 다양한 유형의 커플들을 창조해 냈습니다. 그 가운데는 동네 처녀인 페네치카에 대한 향반(鄕班) 귀족 니콜라이의 동정 어린 사랑이나 카챠를 향한 청년 아르카디의 순수한 사랑 만으로도 인상적이지만, 아무래도 젊은 과부인 오딘초바를 향한 바자로프의 사랑이 단연 돋보이지요.

 

바자로프는 자칭 니힐리스트로서 '사랑의 감정' 자체를 냉소하고 배척하려 애쓰지만, 아름답고 지적인 젊은 과부인 오딘초바 앞에서는 자신의 신념마저 속절없이 무너지는 걸 절감합니다. 바자로프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면서도 젊은 청년과의 불확실한 사랑 때문에 새로운 번민에 빠지기 보다는 안정과 평온을 선택하는 오딘초바는 냉정하고도 이기적이지요. 사랑의 열병에 빠져 허우적대는 바자로프에게 결단코 먼저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는 않기 때문이지요. 오딘초바의 그런 태도 때문에 바자로프는 더욱 애타게 그녀 주위를 맴돌지만 그 두 사람의 사랑은 끝끝내 오딘초바에 의해 거부되고, 두 사람은 기약없이 결별합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아파하면서도 스스로 위로하고, 아픈 사랑에 대한 미련과 회한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도리어 안도하는, 그런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정도로 매혹적이지요.

 

오딘초바는 바자로프가 뜻하지 않게 사랑을 고백했던 그 방이 아니라 객실에서 그를 맞이했다. 그녀는 그에게 다정하게 손가락 끝을 내밀었지만 얼굴 표정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되어 있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 바자로프가 서둘러 말했다. "우선 당신을 안심시켜야 하겠습니다. 지금 당신 앞에 있는 한 평범한 인간은 오래전에 정신을 차렸고, 자기가 행했던 어리석은 행동을 다른 사람들이 잊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번에 떠나면 오랫동안 뵙지 못할 겁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연약한 사람은 아니지만, 당신이 혐오감으로 저를 회상하리라 생각하며 떠난다면 아주 불유쾌할 겁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높은 산 위에 방금 올라온 사람처럼 심호흡을 했다. 얼굴은 미소로 활기를 띠었다. 그녀는 다시 바자로프에게 한 손을 내밀어 그의 악수에 응했다.

 

"지난 일을 떠올려서 뭘 하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게다가 솔직히 제게도 잘못이 있었어요. 애교를 부리진 않았다 해도 뭔가 다른 잘못이 있었어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전처럼 친구로 지내요. 그건 꿈이었어요. 그렇잖아요? 누가 꿈을 기억하겠어요?"

 

"누가 그런 걸 기억하겠습니까? 게다가 사랑이란 …… 그건 위선적인 감정이니까요."

 

"정말이에요? 그 말을 들으니 정말 기뻐요."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이렇게, 바자로프는 그렇게 말했다. 그들은 둘 다 진실을 말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진실이었을까? 그들 자신도 모르는 일을 작가가 어찌 알겠는가.(271∼272쪽)

 

 

한편, 파벨과 바자로프의 갈등은 엉뚱한 데서 끝내 폭발하고 말지요. 의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장차 뛰어난 의사가 될 소양이 풍부했던 바자로프는 친구네 집에 머무는 동안 친구 아버지인 니콜라이의 후처 페네치카와 사이가 돈독한 편이었지요. 그녀가 낳아 기르는 갓난아기가 아플 때 정성껏 돌봐주기도 했고요. 그런 두 사람이 어느날 아침 산책길에 정원에서 만나, 서로 함께 장미꽃 향기를 맡으면서 키스하는 장면이 우연히 파벨에게 발각되고 만 게 발단이었습니다. 파벨은 더이상 바자로프의 행동거지를 눈뜨고 지켜볼 수 없었고, 참을 수 없는 모욕감에 결투를 신청하기에 이르지요. 뿌리깊은 증오심과 경멸을 담은 상대방의 도발에 바자로프도 곧바로 결투에 응합니다. 다음날 아침 곧바로 권총 결투가 벌어졌지만 다행히 파벨이 다리에 총상을 입는 정도로 그치고, 바자로프는 이내 그곳을 떠나게 되지요.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귀향한 아들을 맞이하게 된 바자로프의 부모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지요. 얼마 전에도 아들이 친구인 아르카디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 곁에 잠시 머무르긴 했지만 그 기간이 너무나 짧았었지요. 그때 바자로프는 오랜만에 찾은 고향집에서 고작 사흘밤만 묵은 뒤 갑작스레 훌쩍 떠났으니까요. 자바로프의 부모는 어쩌면 아직도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잠깐 그 때의 느닷없는 이별 장면으로 되돌아가 보지요.

 

다음 날 바자로프와 아르카디가 떠났다. 아침부터 온 집안이 침울한 분위기였다. ……  바실리 이바니치는 전에 없이 부산을 피웠다. 그는 눈에 띄게 허세를 부리고 큰 소리로 말하면서 발을 쿵쿵 굴렀지만, 그의 얼굴은 삐쩍 말라버렸고 눈길은 끊임없이 아들 쪽을 스쳐지나갔다. 아리나 블라시예브나는 조용히 울었다. 남편이 아침 일찍 꼬박 두 시간 동안 달래지 않았다면 노파는 망연자실하여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 달 안에 꼭 돌아오겠다고 여러 번 약속을 하고 자기를 붙잡고 있던 포옹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바자로프가 여행마차에 올라탔을 때, 말들이 움직이고 방울이 울리고 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이젠 더 이상 배웅할 필요가 없고 피어올랐던 먼지도 가라앉았을 때, 티모페이치가 완전히 등을 구부리고 비틀거리면서 조그만 자기 방으로 되돌아갔을 때, 갑자기 쪼그라들고 낡아버린 것 같은 집에 노부부만이 남았을 때, 조금 전만 해도 현관 계단에 서서 힘차게 손수건을 흔들던 바실리 이바니치는 맥없이 의자에 주저앉아 머리를 가슴에 푹 떨어뜨렸다. "버렸어. 우리를 버렸어!" 그는 중얼거렸다. "우릴 버렸어. 우리와 있는 게 답답했던 거야. 이젠 혼자야. 이 손가락처럼 혼자 남았어!" 그는 몇 번이나 되뇌었고, 그때마다 집게손가락만 편 한 한쪽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때 아리나 블라시예브나가 다가와 백발이 성성한 자기 머리를 하얗게 센 남편의 머리에 가져다 대면서 말했다.

 

"바샤, 어쩔 수 없어요! 아들이란 부모의 슬하를 떠나는 거예요. 그애는 매처럼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지만, 우리는 한 구멍 속에 난 버섯처럼 나란히 앉아서 꼼짝하지 않지요. 나만은 영원히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당신도 그럴 테지요."(215∼216쪽)

 

어딘가 실의에 잠긴 모습으로 불쑥 집으로 되돌아온 아들이 말합니다. 육 주 동안 머무를 생각으로 왔으며, 공부를 하고 싶으니까 제발 아무런 방해도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이지요. 아버지는 아들에게 서재를 통째 내어주고, 아들이 공부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쓰지요. 그러던 아들에게 우울한 권태와 막연한 불안이 찾아오고, 공부에 대한 열정이 갑자기 사라지지요. 혼자 산책하는 것도 그만두고 사람들과 어울릴 기회를 찾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일을 찾아내지요. 군의(軍醫)로 복무하다 퇴역한 아버지가 아들이 보는 앞에서 부상당한 농군을 힘겹게 치료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나서는, 자신이 아버지의 진료를 직접 도와드리는 게 좋겠다고 마음먹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자로프가 아버지의 방으로 찾아가 '질산은'이 있느냐고 묻지요. 자신의 상처를 지져야 한다고 말이지요. 이웃 마을에 발진티푸스에 걸려 사망한 환자가 나타났고, 일부러 간청해서 그 환자의 해부 실습에 참여했다가 그만 손가락을 좀 베었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티푸스에 감염되었다면 이미 때가 늦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손가락을 베었을 때만 하더라도 군의(郡醫)에게 질산은이 없었던 탓이지요. 그로부터 사흘 째 되던 날, 아들은 이미 식욕도 잃고, 두통과 오한과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바실리 이바니치는 말없이 아들을 간병했다. 아리나 블라시예브나가 아들 방으로 들어와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 바자로프는 '훨씬 좋아졌다'고 말하고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바실리 이바니치는 아내를 향해 두 손을 내저었다. 그녀는 울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깨문 채 밖으로 나갔다. 갑자기 집 안의 모든 것이 어두워졌고 사람들은 모두 풀죽은 얼굴을 했다. 집 안은 이상한 정적에 휩싸였다. …… 바실리 이바니치는 아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것이 아들을 피로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 저 다시 안락의자에 죽은 듯이 앉아서 이따금 손가락만 딱딱 꺾었다. 노인은 잠깐씩 정원으로 나와 형용할 수 없는 충격으로 장승이 되어버린 듯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그리고 아내의 질문을 피하면서 다시 아들에게로 돌아갔다. 결국 참다 못한 아내가 그의 손을 붙들고 거의 위협하듯이 발작적으로 말했다. "우리 애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그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대답 대신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웬일인지 미소 대신 웃음이 터져 나왔다.(295∼296쪽)

 

삶의 막바지에 다다른 바자로프에게 단 하나 남은 유일한 소망은 오딘초바를 다시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평생을 바자로프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꿋꿋이 버티며 살아왔던 부모 입장에서는 너무나 뜬금없는 '아들의 소원'이었지만 그 요청을 흔쾌히 들어주지요. 소식을 들은 오딘초바는 독일인 의사까지 데려왔지만, 이미 환자는 죽은 사람 같은 창백한 얼굴과 흐릿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지요. 그가 힘겹게 그녀에게 건네는 말 속엔 '다시 오지 못할 순간들'에 대한 깊은 회한과 더불어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는 절박한 메시지가 함께 농축된 느낌을 주지요.

 

"아,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해야만 하는데…… 저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이것은 전에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지만 지금은 더욱 그러합니다. 사랑은 하나의 존재 형태인데, 나 자신의 형태가 이미 해체되고 있으니까요."

 

바자로프가 죽고 나서도 세월은 무심하게 계속 흘러갑니다. 그러나 마리노 마을의 지주 저택에서 일어난 몇몇 중요한 변화들(두 쌍의 합동 결혼식이 있었지요. 아르카디는 오딘초바의 여동생 카챠와 결혼하고, 니콜라이는 후처 페네치카와 정식 결혼식을 올립니다. 오딘초바는 정치가를 지망하는 유능한 법률가와 결혼하지요. 파벨은 모스크바로 떠납니다.)을 모두 합친다고 하더라도,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노부부의 삶에 닥친 극적인 변화에 비하면 턱없이 사소해 보일 뿐이지요. 바자로프의 무덤가 풍경을 묘사한 작가의 문장은 너무나 애통하고 가슴이 시려 계속 읽기 힘들 정도입니다.

 

러시아의 한 벽촌에 조그만 마을 공동묘지가 있다. 러시아의 거의 모든 공동묘지가 다 그렇듯이, 이 공동묘지도 서글픈 모습을 하고 있다. 공동묘지를 에워싼 도랑은 오래전부터 잡초로 뒤덮였다. 잿빛 나무십자가들은 옆으로 기울어진 채 예전에 한번 페인트칠을 했던 십자가 지붕 밑에서 썩어가고 있다. 돌비석들은 마치 누군가가 밑에서 떠밀어 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조금씩 제자리에서 벗어나 있다. …… 그러나 그 무덤들 가운데 사람의 손길도 닿지 않고 동물의 발에도 짓밟히지 않은 무덤이 하나 있다. 그저 새들만이 그 위에 앉아서 노래를 부를 뿐이다. 철책이 무덤을 둘러싸고 있고, 어린 전나무 두 그루가 양쪽 끝에 심겨 있다. 이 무덤에 예브게니 바자로프가 묻혀 있다. 그리 멀지 않은 마을에서 이미 노쇠한 부부가 자주 이 무덤을 찾아오곤 한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면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걸어온다. 울타리에 가까이 다가가서는 무릎을 꿇고 쓰러져 오랫동안 서럽게 울면서 말 못하는 비석을 빤히 바라본다. 그 비석 아래 그들의 아들이 누워 있다. 그들은 몇 마디 말을 주고받으면서 비석에 앉은 먼지를 털고 전나무 가지를 다듬어주다가 다시 기도를 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거기에 있으면, 아들에게 더 가까이 있고, 아들과 관련된 추억에 더 가까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정말로 그들의 기도, 그들의 눈물이 헛된 것일까? 정말로 사랑, 그 성스럽고 헌신적인 사랑이 무력한 것일까? 오, 아니다! 아무리 정열적이고 죄 많은 반역의 심정이 그 무덤 속에 숨어 있을지라도 무덤 위에 자란 꽃들은 순진무구한 눈으로 평온하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이 꽃들은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이나 '무심한' 자연의 위대한 평온만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영원한 화해와 무궁한 생명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 (315∼316쪽)

 

이렇게 소설은 끝나지요. 그런데 작가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이 작품을 두고 '엄청난 소란과 논쟁'을 벌였다고 합니다. 논쟁의 핵심은 바자로프에 대한 투르게네프의 태도에 관한 문제였는데, 보수주의자들은 니힐리스트인 바자로프의 장점을 너무 과장하고 미화했다는 주장을 펼쳤고, 반대로 진보주의자들은 작가가 바자로프를 통해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을 악랄하게 희화하고 중상모략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독자들은 당대 사람들이 이 작품을 두고 왜 그토록 엄청난 소란을 일으켰는지를 쉽게 수긍하기 어렵지요. 양쪽 진영이 극단적인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며 주장했던 내용들이 현대의 독자들에겐 그다지 커다란 공감을 불러 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이 소설은 19세기 중반을 살았던 사람들이 겪었던 '세대 간의 갈등'을 그린 사회·정치적인 소설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시대를 살던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겪었던 온갖 삶의 애환들을 그린 세태 풍속 소설이나 연애 소설, 혹은 가족 소설의 요소들도 두루 지니고 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과거의 좋았던 한 때를 자주 회상하는 파벨과 니콜라이의 모습에서 차츰 스러져가는 러시아 특유의 귀족 문화에 대한 애가를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지요. 니콜라이가 자식 또래에 불과한 마을 처녀를 데려다 사는 모습도 어딘지 모르게 토속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깁니다. 더구나 젊은 청년 바자로프가 마을 처녀의 발산하는 젊은 매력에 홀딱 빠져 느닷없이 입맞춤을 시도하는 모습은 도리어 순수하고도 낭만적으로 다가옵니다. 전도 유망한 의사 지망생이었던 바자로프가 늙은 부모에게 다소 쌀쌀맞게 대하고, 그 부모들은 아들이 원하는 건 무엇이든 헌신적으로 수용하는 듯한 태도 또한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는 않습니다.

 

투르게네프에게는 도스토옙스키에게서 느껴지는 혁명적이고 테리리스트적이며 충격적인 기질은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그 대신에 (정말 뜻밖에도!) 우리나라의 근대 문학 작품들에서 곧잘 느껴지는 특유의 토속적인 향수나 우수, 혹은 아이러니가 느껴집니다. 모처럼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환자들을 돌보며 돈독하고 즐겁게 지낼 꿈에 잔뜩 부풀어 오른 바자로프의 부모들에게 들이닥친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은 얼마나 황당하고도 슬픈가요. 이런 대목에서 현진건의 단편 『운수 좋은 날』을 떠올리는 건 조금도 이상하지 않지요. 인력거를 끌던 김첨지가 억세게 운수 좋은 날이라고 몹시 들떠 하루를 보내지만, 정작 그날 저녁에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아내의 죽음이었으니 말이지요. 오딘초바와 바자로프의 지극히 조심스러운 사랑 접근법은 얼핏 주요섭의 『사랑 손님과 어머니』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은근히 서로를 사랑하지만 현실의 장벽 때문에 끝내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서로 안타까워하면서 이별한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이것으로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소개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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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를 소개합니다.

 

『돈키호테』는 흔히 '비교의 대상이 없는, 세계 최고의 장편소설'이라고 불리고 있지요. 지금으로부터 무려 400년 전에 쓰여진 소설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지금껏 쓰여진 그토록 많은 소설들을 모조리 제치고 당당히 세계 최고의 소설이라는 위치를 차지하게 된 걸까요?

 

그 이유들을 살펴보기 위해 우리가 몇몇 인물들을 만날 필요가 있다면, 아마도 도스토예프스키 선생부터 가장 먼저 불러내야 마땅하지 싶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하지요.

 

전 세계를 뒤집어 봐도 『돈키호테』보다 더 숭고하고 박진감 넘치는 픽션은 없소이다.

 

현대 소설의 개척자로 불리는 『마담 보바리』의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또 무슨 말을 했을까요?

 

나는 『돈키호테』 속에서 나의 근원을 발견했소이다.

 

『대중의 반역』,『돈키호테 성찰』을 쓴 스페인의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또 무슨 말을 남겼을까요?

 

아! 세르반테스의 문체가 어떤 것이며,

사물에 접하는 그의 방식이 어떠한 것이지 분명히 알 수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얻을 텐데!

 

'인문학계의 찰스 다윈'으로 불린 르네 지라르는 더욱 자극적인 말을 남겼습니다. 『돈키호테』 이후에 쓰인 소설은 『돈키호테』를 다시 쓴 것이나 그 일부를 쓴 것이라고 말이지요. 밀란 쿤데라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지요. "모든 소설가는 어떤 식으로든 세르반테스의 자손들"이라고 말이지요.

 

예일대에서 오랫동안 문학을 강의하다 작년에 타계한 해럴드 블룸 또한 이 불후의 걸작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남겨놓았습니다.

 

소설을 읽는 방법과 읽어야 하는 이유를 말할 때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는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모든 소설의 선두요 최고를 차지하는 이 책은 소설 그 이상이다.

 

나는 지난 4세기 동안 상상력으로 흘러넘친 문학계에서 세르반테스야말로 셰익스피어의 유일한 경쟁자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돈키호테는 햄릿의 대적자요 산초 판사는 폴스타프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나는 그 이상의 찬사가 떠오르지 않는다.

 

『돈 키호테』에서는 끊이지 않고 사건이 일어나는데, 가장 중요한 건 산초와 돈키호테 간에 쉴새없이 이어지는 대화라고 볼 수 있다. 그냥 손길이 닿는대로 아무 페이지나 펼쳐 봐도 두 사람이 대화의 늪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 밑바탕에는 서로 으르렁거리며 변덕을 부리기는 해도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깔려 있다.

 

세르반테스는 우리 중 대다수의 사람에게 돈키호테적인 모습과 산초척인 측면이 섞여 있다고 생각했다. 왜 『돈 키호테』를 읽는가? 모든 극작가들 가운데 셰익스피어가 최고라면, 세르반테스의 작품은 모든 소설 중 으뜸이며 최상이다. 따라서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를 알기 전에는 우리 자신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돈키호테』는 실로 까마득한 옛날에 쓰여진 작품인데도 그 작품을 읽는 독자들이라면 시대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웃음을 참지 못할 정도로 아주 재미있는 소설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 작품이 유발하는 '웃음'이 참으로 정의하기가 어렵다는 점이 몹시 특별합니다. 또다른 문학평론가의 이야기를 들어보지요.

 

『돈키호테』는 아주 유머러스한 소설이다. 이 책과 관련하여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스페인의 펠리페 3세가 지방 순찰을 나갔다가 길옆에서 책을 읽고 있던 어떤 남자가 눈물을 줄줄 흘릴 정도로 크게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왕은 말했다. "저 남자는 미쳤거나 아니면 『돈키호테』를 읽고 있을 것이다." 어떤 독자들은 큰 소리로 웃고, 어떤 독자는 빙그레 웃고, 어떤 독자는 겉으로 웃고, 또 어떤 독자는 속으로 웃는다. 그리고 어떤 독자는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기이한 감정 상태로 읽는다. 세르반테스의 유머는 정의하기가 어렵다.

 - 클리프턴 패디먼, 『평생독서계획』중에서

 

그렇습니다. 이 책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불리면서도 정작 이 작품이 유발하는 '웃음'을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렵다는 점에서 몹시 특별한 책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잠깐 '웃음 연구'의 권위자인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의 말을 살펴볼 필요도 있을 듯합니다.

 

˝넘어지는 것은 물론 똑같다. 하지만 한눈을 팔다가 우물에 빠지는 것과, 별만 바라보다가 우물에 빠지는 것은 다르다. 돈키호테가 열심히 보았던 것은 바로 별이다. 이 공상과 망상의 정신이 추구한 웃음의 깊이는 얼마나 심오한가.˝
- 앙리 베르그송, 『웃음』중에서
 

 

그렇습니다. 중세에 유행했던 기사 소설에 미친 끝에 스스로 늙은 말 한 필을 이끌고 편력 기사가 되어 모험을 떠나고, 풍차를 거인으로 오해하고 달려들어 싸우다가 만신창이가 되는 등 온갖 기발한 모험을 끝없이 펼치는 이 용감무쌍하고도 초라한 몰골의 기사, 돈키호테 데 라만차를 우리는 단순히 미치광이로만 취급할 수가 없습니다. 그 까닭은 조금 더 뒤에 차차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 이 걸작을 써낸 작가 세르반테스에 대해 조금 살펴보고 넘어가지요. 

 

이 소설을 쓴 세르반테스는 비록 '길거리에 떨어져 있는 찢어진 종이라도 주워 읽는 열렬한 독서광'이었다고는 하나, 제대로 된 대학 과정을 밟은 적도 없고, 『돈키호테』1부를 출판(1605년)한 58세 때까지 참으로 굴곡이 많은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20대 초반에 그는 '스페인 법'을 어긴 일이 있었는데, 별로 중대하지도 않은 죄목으로 중벌에 처해지자 고향 마드리드를 떠나 이탈리아로 도망쳤고, 거기서 2년 동안 고위급 사제의 시종이자 수행원으로 일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군대에 자원 입대하게 되지요.

 

그가 참전한 전쟁은 저 유명한 '레판토 해전'이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투르크 군대와 용감무쌍하게 싸우다가 큰 부상을 입어 왼손을 잃게 되면서 '레판토의 외팔이'라는 별명을 얻지요. 그런 후에도 그는 5년 동안이나 더 군대에 몸을 담았습니다. 마침내 명예롭게 전역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던 그는 그만 태풍에 휩쓸려 터키 해적의 습격을 받은 끝에 알제로 끌려가 그리스인 해적에게 양도되어 5년 동안이나 포로로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되고 말지요. 포로로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 네 번의 탈출 시도가 모두 실패했지만 교회 수사의 도움으로 몸값을 치르고 극적으로 자유의 몸이 된 그는 다시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그가 전역 후 취직한 직장에서 맡은 일도 <무적함대>에 식량을 납입하고 조달하는 일이었다고 하지요. 그 일을 하면서도 그는 두 번이나 옥살이를 하는 등 늘 신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곤궁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돈키호테』를 구상한 것도 감옥에서였다고 하지요. 체납 세금 징수원으로 일하던 50세 때 하필 징수한 돈을 예금해 둔 은행이 파산하는 바람에 세비야에서 8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던 무렵이었습니다. 이토록 굴곡진 삶을 살았던 그가 결코 적지 않은 나이인 58세 때 내놓은 소설이 바로『돈키호테』였습니다. 1부의 원제목은 『기발한 이달고 돈키호테 데 라만차』였지요. 그런데 더욱 놀라운 건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68세 나이에 또다시 『돈키호테』 2부를 내놓았다는 점입니다. 그 책의 원제목은 『기발한 기사 돈키호테 데 라만차』였지요.

 

그런데 어떤 작품이든지 전작이 빅히트를 치고 나서 그 다음에 후속편이 나오면 대개 그 후속편은 전작 만큼의 감동을 주기 어려운 게 일반상식이지요. 그렇지만 늘상 예외없는 법칙은 없듯이 『돈키호테』또한 그런 통념을 여지없이 깨트리는 불후의 걸작이 되었지요.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의 속편을 얼마나 훌륭하게 썼는지를 알게 되면 돈키호테의 전편만 읽고 소설 『돈키호테』를 다 읽었다고 말하는게 얼마나 어리석은 이야기인지도 알게 됩니다. 

 

이왕 얘기가 나온 김에 여기서 잠시 (작가의 말도 들어볼겸) 소설 『돈키호테』 속으로 직접 뛰어들어가 보지요. 

 

「그런데 혹시 ······.」돈키호테가 말했다. 「그 작가가 후속편을 약속하고 있소?」 

 

「그럼요.」삼손이 대답했다. 「하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며 누가 그것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책이 나올 것인지 안 나올 것인지 우리도 궁금해하고 있답니다. 이런 사정인 데다 <속편은 절대로 좋지 않다>라고 말하는 자도 있어서 후속편은 나오지 않을 거라고들 생각하지요. 토성보다 목성의 영향 아래 태어난 사람들 중에는 <돈키호테 같은 짓을 더 보여 다오. 돈키호테는 돌진하고 산초 판사는 말하라,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그래야 우리가 그것으로 즐거울 것이다>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긴 하지만요.」

 

「작가는 어쩔 생각이라 하오?」

 

「그가 혈안이 되어 찾고 있는 이야기를 발견하는 즉시, 다시 칭찬을 얻겠다는 뜻에서라기보다 그에 따를 이익 때문에 인쇄로 넘기겠지요.」

 

 - 『돈키호테 2』 <4. 산초 판사가 학사 삼손 카라스코의 의문을 풀어 주고 질문에 대답한 내용, 그리고 알아 두고 이야기할 만한 다른 일들에 대하여> 중에서

 

 작가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 2부를 얼마나 긴밀하고도 흥미롭게 1부와 서로 엮어 놓았는지를 알게 되면 독자들은 누구라도 작가의 이야기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도리가 없지요.

 

자, 그렇다면 이제부터 『돈키호테』의 이야기 속으로 조금 더 깊숙히 들어가 볼까요? 우선,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는 도대체 왜 그토록 무모하고도 어리석은 모험을 떠나게 되었을까요?

 

우리의 주인공 돈키호테는 스페인 라만차의 어느 마을에 사는 알론소 키하노라는 쉰을 넘긴 시골 노인네였습니다. 그는 이달고라는 신분에 어울리는 유유자적한 삶을 살고 있었는데, 당시 유행하던 기사도 소설에 빠져 식음을 전폐하며 탐독을 하다가 그만 미치게 되어 스스로 편력기사를 자처하게 되지요. 그리고 세상에 만연한 불의를 바로잡고 약한 자들을 돕는다는 원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모험에 나서게 됩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이름을 기사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돈키호테 데 라만차로 고치고, 이웃 마을의 촌부 알돈사를 둘시네아 델 토보소라는 이름의 공주이자 귀부인으로 격상시키고, 낡은 갑옷으로 무장하고, 비쩍 마른 말인 로시난테에 올라 길을 나서게 되지요.

 

첫 번째 출정에서는 객줏집 주인에게서 기사 서품을 받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요. 기사로서 갖추어야 할 준비사항들이 너무 허술했기 때문이었지요.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도 그는 어설픈 기사 흉내를 내다가 상인들에게 우롱 당하고 심한 매질을 당하게 되지요. 만신창이가 되어 땅바닥에 뒹구는 돈키호테를 발견한 이웃 사람이 겨우 구출하여 집으로 데려오게 됩니다. 이로써 사흘간의 첫 출정은 끝나지요.

 

돈키호테가 집에서 몸을 추스르는 사이에 참으로 안타까운 대참극이 하나 벌어집니다. '책' 때문에 '돈키호테 삼촌'이 너무 이상하게 변했다고 생각한 조카딸이 마을 신부에게 '서재 검열'을 요청했고, 그 검열에 참여한 신부와 이발사와 가정부와 조카딸이 주인장도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책들을 '화형'에 처하고 사건이 벌어졌으니까요.

 

그 때 불길 속으로 사라진 책들이 과연 어떤 작품들이었는지, 그 눈물겨운 화형식이 얼마나 흥미롭게 진행되었는지만 살펴 보더라도 돈키호테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또한 작가 세르반테스가 얼마만큼 지독한 독서광이었는지를 넉넉히 짐작하고도 남지요. 아무튼 그 엄숙한 검열과 화형식에 관한 이야기는 무려 11쪽 분량으로 길게 이어지는데, 그 때 살아남은 몇 권의 책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아마디스 데 가울라』였지요.

 

그 책은 스페인 기사 소설의 대표작인데,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에도 포함될 정도로 걸작인 데다가, 소설 『돈키호테』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책이기도 하지요. 돈키호테는 바로 그 책을 전범으로 삼아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지요. 아무튼 그 때 화형식에 처해진 책들의 목록은 『장미의 이름』을 쓴 작가 움베르토 에코의 『궁극의 리스트』에도 등장할 만큼 무척 인상적입니다.

 

자신의 서재가 '엄숙한 검열'을 당한 끝에 애지중지하던 책들은 물론 서재까지 통째로 사라졌는데도 돈키호테는 태연스레 그 상황을 받아들입니다. 어떤 현자의 마법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조카딸의 대답에 응당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도리어 한 술 더 뜨는 반응까지 보이지요. 그는 여전히 자신만의 환상 속에서 깨어나기 싫을 뿐 아니라, 일부러라도 그런 상황 속으로 자신을 밀어넣을 정도였지요.

 

이렇게 해서 돈키호테가 다시 '편력 기사의 모험'을 떠나기 위해 '본격적인 준비'에 착수하는데, 바로 여기서 '서양 문학의 역사상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등장하니 그가 바로 '산초 판사'이지요.

 

이 기간 동안 돈키호테는 이웃에 사는 착한 ㅡ 이러한 표현을 가난한 사람에게 붙일 수 있다면 말이다 ㅡ 그러나 머리가 약간 모자라는 한 농부에게 간청했다. 돈키호테의 간절한 부탁과 설득과 약속으로 결국 이 가엾은 자는 돈키호테의 종자가 되어 집을 나가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돈키호테가 그에게 한 여러 가지 약속들 중 하나는, 만약 그가 기꺼이 자기를 따라나서 준다면 모험으로 아무리 못해도 어떤 섬을 얻게 되었을 때 그 섬을 다스리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약속에 끌려 산초 판사는 마누라와 자식을 버리고 자기 이웃의 종자가 될 것을 승낙했다.

 

그다음 돈키호테는 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어떤 것은 팔고 어떤 것은 저당 잡히며 모든 것을 헐값에 처분하여 적지 않은 돈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친구에게 방패 하나를 빌리고 부서진 투구도 최대한 잘 손질했다. …… 모든 준비가 끝나자 산초 판사는 처자식에게 작별 인사도 없이, 돈키호테는 가정부와 조카딸에게 작별 인사도 없이, 어느 날 밤 아무도 모르게 그곳을 떠났다. 그날 밤 얼마나 걸었던지 새벽녘이 되었을 때에는 누가 그들을 찾아 뒤쫓아 온다 해도 따라잡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산초 판사는 자루와 술통을 당나귀에 매달고 그 위에 앉아서 주인이 약속한 섬의 통치자가 되리라는 강한 희망에 사로잡힌 채 족장처럼 우쭐대며 가고 있었다. 돈키호테는 처음 길을 떠났을 때의 그 방향과 그 길로 우연히 다시 가게 되었는데 그곳은 바로 몬티엘 들판으로, 이번에는 지난 번보다 훨씬 수월하게 나아갈 수 있었다. 아침나절이라 햇살이 비스듬하고 뜨겁지 않아 그들을 지치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산초 판사가 주인에게 말했다.

 

「편력 기사 나리, 제게 약속한 섬 이야기를 잊으시면 안 됩니다요. 아무리 큰 섬이라도 전 문제없이 다스릴 수 있거든요.

 

 - 『돈키호테 1』, <7. 우리의 착한 기사 돈키호테 데 라만차가 두 번째로 집을 나서는 이야기>

 

산초 판사는 돈키호테와 모험을 함께 하는 동안 '섬 이야기'를 수백 번도 더 끄집어 내지요. 왜냐하면 그는 돈키호테와 달리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이기 때문이지요. 그가 돈키호테와 함께 '편력 기사의 종자'로 따라다니며 온갖 곤욕을 다 치르면서도 결코 '동행'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도 오로지 '섬을 다스릴 부푼 희망'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돈키호테의 속편에서 (공작 부부의 농간에 의해) 진짜로 그 희망이 실현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의 꿈이 헛되다는 걸 절감하고 도리어 '평범했던 옛날'로 되돌아가기를 갈망하게 되지요.

 

주변 사람들이 한사코 만류하는데도 섬의 통치자에서 기어코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산초의 이야기가 더욱 재미있는 건, 애시당초에 작가가 돈키호테의 전편을 쓸 때만 하더라도 그 이야기가 작가의 구상에는 전혀 없었다는 점이지요. 『돈키호테 1』이 너무나 빅히트를 치는 바람에 돈키호테의 속편을 내세우는 짝퉁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자 세르반테스는 결국 『돈키호테 2』를 썼는데, 나중에 쓴 이야기가 어쩌면 그토록 긴밀하게 『돈키호테 1』과 호응하는지 참으로 놀랍습니다. 아무튼 작가는 산초의 이야기를 통해 '능력 밖의 거창한 꿈'이 얼마나 어리석고 부질없고 허황된 것인지를 똑똑히 보여주지요. 

 

돈키호테가 산초 판사와 함께 나선 '두 번째 모험'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소설『돈키호테』를 상징하는 <풍차 모험> 이지요. 풍차를 보자말자 대뜸 거인으로 오인하고 덤벼들었다가 로시난테와 함께 크게 다친 돈키호테는 산초의 '제발 정신 차리라'는 충고를 듣고도 조금도 개의치 않지요. 두 사람은 도전하는 모험마다 거의 매번 만신창이가 되도록 부서지고 깨어지기만 할 뿐인데도 결코 모험을 멈추지 않지요. 그 어떤 터무니 없는 상황에서도 결코 현실을 잊지 않는 산초는 기회가 될 때마다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겁 많고 순박하기 그지 없는 현실주의자의 전형을 보여주지요. 그 반면 돈키호테는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들에 늘 집중하지요. 군사, 행정, 법, 자유, 평등, 인류애, 문학, 통치, 철학 등에 관한 돈키호테의 놀라운 견해들은 이상주의적인 휴머니스트로서 나무랄 데가 없지요. 이렇듯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온갖 문제들에 관한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의 끝없는 충돌과 대화 속에는 그 어떤 훌륭한 금언집이나 속담집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유쾌한 해학이 가득 담겨 있지요.

 

돈키호테의 두 번째 모험은 끝내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 의해 좌절되고, 돈키호테는 우리에 갇히고 소달구지에 실린 채 집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마무리되지요. 그 다음에 이어지는 세 번째 모험 이야기는 전편이 출판되고도 무려 10년이나 더 지난 1615년에서야 다시 이어지게 되지요.

 

그런데 속편 돈키호테가 전편 돈키호테보다 훨씬 더 뛰어나면서도 재미있는 까닭은 앞에서도 미리 말씀드렸듯이,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가 전편에서 겪은 일들이 이미 책으로 출판되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이지요. 소위 현대문학에서 말하는 마술적 리얼리즘이 이미 돈키호테에서 진작에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웠던 셈이지요. 돈키호테 1편을 너무나 재미있게 읽은 독자들인 공작 부부가 주변 사람들과 미리 짜고 이 두 주인공을 골탕 먹이려고 '진짜 마법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얘기야말로 배꼽을 잡는 유머의 또다른 핵심이지요.

 

기사 신분의 돈키호테가 (산초에게 속아 넘어가) 마법에 걸려 농사꾼 아낙네로 변모했다는 못 생긴 둘시네아 공주를 만나는 이야기, 산초 판사가 공작 부부의 농간으로 마침내 오랫동안 꿈꾸었던 섬의 통치자가 되어 훌륭한 통치술을 발휘하는 이야기, 자신을 편력 기사로 착각하는 돈키호테를 고향으로 데려가기 위해 끈질긴 추적에 나섰던 삼손 카라스코 학사가 <하얀 달의 기사>로 분장한 끝에 돈키호테와의 대결에서 승리하여 마침내 편력 기사로서의 모험에 종지부를 찍게 만드는 이야기, 초라한 몰골로 집으로 되돌아온 돈키호테가 마침내 꿈을 잃은 자로서 우울증에 빠져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은 그저 단순한 우스개 모험 소설을 뛰어 넘어 독자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스스로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도록 자극하지요.

 

특히, 마지막 임종을 앞둔 돈키호테에게 어서 일어나 편력 기사의 모험을 다시 떠나자며 오열하는 산초 판사의 모습을 보노라면, 돈키호테의 무모하기 짝이 없는 용감한 모험들도 결국은 인간의 근원적인 한계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는 서글픈 감정에 빠져들게 됩니다. 또한 그렇게 무모하리만치 용감하게 모험을 떠났다가 실패로 귀결된 그 두 사람의 여정이야말로 자신들의 꿈을 행동으로 옮겼던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이었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또한 산초 판사의 모습 속에는 어느덧 피동적으로 편력 기사의 모험에 마지 못해 따라 나섰던 지극히 현실적인 인간이었던 인물이 어느새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망상에 빠진 이상주의자였던 돈키호테에게 동화되고 감화된 나머지, 스스로가 주체적인 인물로 우뚝 성장해 돈키호테처럼 과감한 모험에 나설 채비가 갖춰진 성숙한 인간 유형도 엿볼 수 있지요.

 

작품 『돈키호테』는 오늘날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 버금가는 탁월한 모험소설로 대접받고 있지요. 사람들은 늘 오뒷세우스나 돈키호테가 겪은 영웅적인 모험담을 마음 속으로 꿈꾸면서도 정작 현실에서는 지극히 이해타산적인 인물 속에 머무르고 말지요. 또한 사람들은 누군가가 우리 대신 나서서 사회 도처에 만연한 불의를 돈키호테처럼 속시원히 용감하게 바로잡아 주기를 바라면서도 정작 그 임무가 자신들한테 떠맡겨지는 건 무슨 핑계를 대더라도 회피하기에 급급하지요.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는 어찌보면 바로 그런 인간 내면에 도사린 기묘한 이중성을 상징하는 인물이지요. 많은 독자들이 『돈키호테』를 읽으며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기이한 감정 상태에 빠지는 이유 또한 우리들의 내면 상태가 끊임없이 그 두 인물 사이를 드나들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돈키호테』가 마음의 모험담으로 읽히는 이유 또한 그런 까닭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것으로 소설 『돈키호테』에 대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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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0-09-14 1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성스러운 글 잘 읽고 갑니다^^

oren 2020-09-14 20:33   좋아요 0 | URL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찰스 디킨스의 대표작인 『황폐한 집』을 소개합니다.

 

많은 작가들이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다작으로 유명한 작가이지요. 그런데 작가가 남긴 여러 작품 가운데 최고의 작품이 가장 널리 읽히는 경우는 그리 일반적이지는 않은 듯합니다. 당장 제임스 조이스와 마르셀 프루스트만 떠올려 보더라도 그런 사정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토마스 만도 예외는 아니지요. 그의 대표작이 『마의 산』이라고 해서 토마스 만의 독자들이 그 작품을 가장 많이 읽었으리라고 짐작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찰스 디킨스의 『황폐한 집』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이 훌륭한 소설이 찰스 디킨스의 다른 많은 작품들에 비해 훨씬 덜 읽힌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가볍게 받아들여야 옳지 싶습니다. 비록 이 작품이 지닌 훌륭한 가치에 비해 독자들의 독서 열정이 지나칠 정도로 반비례 관계에 있는 듯한 느낌을 좀처럼 떨치기 어렵더라도 말이지요.

 

찰스 디킨스의 주된 특징은 '유머와 위트와 재치와 긍정'으로 요약할 수 있지 싶습니다. 문학의 역사에서 이런 특징이 극에 달했던 작가는 누가 뭐래도 셰익스피어였습니다. 이같은 이유로 찰스 디킨스는 자주 셰익스피어에 비견되지요. 시인이자 극작가이자 배우였던 셰익스피어가 넘치는 열정과 문재(文才)를 시로 마음껏 발산했다면, 소설가이면서도 배우에 대한 열정과 기질이 넘쳤던 디킨스는 자신의 머리 속에 끊임없이 샘솟는 이야기를 소설을 통해 풀어냈지요.

 

그가 『황폐한 집』에서 은연 중에 발설했던 다음 대화는 바로 작가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으흠! 셰익스피어처럼 말씀을 잘하시는데요!"

 

심지어 그는 소설 속에서조차 시인처럼 '반복되는 후렴'을 리드미컬하게 구사할 정도였습니다. 그게 등장 인물의 대화 속이든 전경이나 배경 묘사든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등 뒤로는 늘상 셰익스피어가 엿보이는 듯한 느낌이 들며, 때로는 그 너머로 고대 그리스 비극 시인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릴 때도 있습니다. 가령 『황폐한 집』에서 주인공 격인 에스더 서머슨 양이 마침내 자신의 생모로 밝혀진 데들록 부인을 만났을 때 나눈 대화가 그렇습니다.  

 

"어머니, 이미 결심하셨나요?"

 

"결심했어. 난 지금까지 어리석음에 어리석음을 더하고, 자존심에 자존심을 더하고, 경멸에 경멸을 더하고, 자만에 자만을 더하고, 큰 허영에 더욱 큰 허영을 덧칠하며 살아왔어. 할 수 있다면 이 위기도 잘 극복해 죽을 때까지 무사할지도 몰라. 난 위험에 둘러싸여 있어. 체스니 월드가 이 깊은 숲에 둘러싸여 있듯이. 하지만 난 언제까지나 그 안을 걸을 거야. 내가 걸을 길은 오직 하나, 단 하나밖에 없단다."

 

찰스 디킨스는 남달리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은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요. 그가 어릴 때 겪었던 감정인 부모에게 버림받아 비천한 신분으로 떨어졌다는 절망감과 굴욕감은 그에게 평생 동안 지워지지 않는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비록 그 체험이 작가에게 기필코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굳은 결심과 향상심과 출세욕을 심어주긴 했지만 말이죠.

 

'이런 생각이 가져오는 비통함과 굴욕감이 내 성격 전체에 스며들어 버려서 나는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 칭송받고 행복해진 지금까지도 가끔 꿈을 꾼다. 그 꿈에서 나는 내게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생겼다는 사실, 아니 내가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홀로 외롭게 그 시절을 헤매다가 돌아온다.'

 

바로 이런 작가의 경험 때문에 그가 쓴 작품에는 유독 고아나 가난한 사람들이나 부랑자나 비천한 신분의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올리버 트위스트』의 올리버, 『위대한 유산』의 핍, 『데이비드 코퍼필드』의 데이비드, 『어려운 시절』의 루이자, 『황폐한 집』의 에스더 서머슨, 에이더 클레어, 리처드 카스톤, 부랑아 조 등이 대표적이지요.

 

몹시도 아픈 과거를 지닌 작가를 과거로부터 마침내 해방시킨 작품은 『데이비드 코퍼필드』(1849∼1850)였습니다. 주인공이 세상에 막 태어날 때부터 시작하여 마침내 어엿한 작가로 성공할 때까지의 온갖 삶의 기억들을 '웃음과 눈물과 기쁨과 애환'을 가득 담아 그려낸,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 자전적 소설이야말로 작가에게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나의 사랑하는 자식' 같은 작품이었지요. 다른 한편으로는 『데이비드 코퍼필드』야말로 작가를 끊임없이 붙들고 옭아매던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뚜렷이 결별할 수 있도록 도와준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대작인『데이비드 코퍼필드』를 끝낸 작가는 곧이어 『황폐한 집』(1852∼1853)을 통해 본격적인 사회 비판에 깊숙하게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디킨스의 최대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 방대한 장편소설은 이보다 나중에 쓰여진 『어려운 시절』(1854년),  『리틀 도릿』(1855∼1857)과 『우리 서로의 친구』(1864∼1865) 등과 함께 묶여 '사회 비판'을 다룬 작품군을 이루는데, 이 가운데 단연 뛰어난 작품이 바로 『황폐한 집』이지요.

 

사실 디킨스는 알고 보면 20대에 쓴 초기 작품인 『픽윅 페이퍼스』에서부터 일찌감치 '사회정의'를 일깨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작가였지요. 이러한 디킨스의 작품 경향으로부터 자못 강렬한 인상을 받은 버나드 쇼는 『리틀 도릿』에 대해 "『자본론』 보다도 더 폭동을 유발하는 책"이라고 말할 정도였고, 칼 마르크스는 『리틀 도릿』을 최초의 자본주의 공격 소설로 평가했다고 하지요. 칼 마르크스는 심지어 "세계의 모든 정치인, 사회운동가들이 한 모든 것보다 디킨스가 세상의 핍박 받는 민중을 위해 한 일이 더 많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다시『황폐한 집』으로 되돌아 오지요. 이 작품이 다루는 주제는 얼핏 손에 빤히 잡히는 쉬운 주제들만을 다루지는 않지요. 디킨스의 초기 작품들에서는 특정한 사회적 폐해가 개별 현상으로서 언급되고, 사회악의 책임이 특정한 개인의 탓으로 돌려지는 반면, 후기 작품을 대표하는 『황폐한 집』에서는 각종 사회 제도나 조직 자체가 사회악의 근원으로 다뤄집니다. 의회 정치에 대한 불신이나 하릴없이 무위도식하면서 무료한 나날을 보내는 상류층에 대한 조롱과 풍자와 비난이 이 작품 곳곳에 담겨 있지만 그 방식이 대체로 모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건 마치 런던을 가득 덮고 있는 안개와 진창을 바라보는 것과 닮아 있지요. 

 

어디를 둘러봐도 안개다. 템스 강 상류에도 안개가 푸른 섬과 목장 사이를 흘러간다. 강 하류에도 안개가 자욱하다. 이곳에서는 수없이 정박한 배들 사이와 이 커다란(그리고 더러운) 도시의 지저분한 강기슭을 더러운 안개가 소용돌이를 그리며 지나간다. 에섹스 주 늪지 위도 안개요, 켄트 주 구릉 위도 안개다. 안개는 석탄을 운송하는 범선 상갑판 주방으로도 스멀스멀 들어 오고, 커다란 배 돛대 위에도 잠들어 있으며, 삭구 안을 돌아다니고, 거룻배도 작은 뱃전에도 웅숭그리고 있다. 그리니치 해군병원 병실 난로 옆에서 콜록거리는 노병의 눈과 목구멍 안으로 기어들어 가고, 공연히 성질난 선장이 비좁은 자기 방에서 피워대는 오후의 담뱃대와 재떨이에 기어들어 가고, 갑판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어린 수습 선원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매몰차게 꼬집는다. 다리 위를 지나가는 난간 너머로 하늘에 낮게 깔린 안개를 바라본다. 그들 사이에도 안개가 자욱해서 이들은 마치 열기구에 올라타 구름 속을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11∼12쪽)

 

안개가 가장 자욱하고 거리가 가장 진흙으로 범벅이 된 곳에 링컨 법조원의 대법관 법정이 자리잡고 있지요. 거기가 바로 소설의 주무대입니다. 해롭기 그지없는 늙은 무뢰한이나 다름없는 이 법정에 대한 묘사는 아주 길게 이어지지요.  

 

오늘 같은 오후에야말로 대법관은ㅡ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지만ㅡ이 법정에 자리 잡고 앉아 안개처럼 몽롱한 후광에 싸이고 하늘거리는 붉은 천과 커튼에 둘러싸인 채, 요란한 구레나룻을 기른 거구이면서도 목소리는 개미만 한 변호사의 끝없이 장황한 설명을 들으면서, 안개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지붕의 들창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야 한다. 이런 오후에야말로 수십 명에 이르는 대법관 법정 판사들은ㅡ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듯이ㅡ언제 끝날지 모르는 소송 중 수천 단계 째의 일에 막연히 매달리고, 막히기 쉬운 판례에서 서로 꼬투리를 잡고, 소소한 전문적 법률 사항에 무릎까지 파묻혀 허우적거리고, 산양 털이나 말 털로 만든 가발을 뒤집어쓰고는 그것으로 법률 조문의 벽을 깨부수겠다고 무모하게 머리를 갖다 박고, 연극배우 뺨치게 자못 진지한 얼굴로 공명정대한 태도를 꾸며내야 한다. 이런 오후에야말로 사건에 관계된 온갖 사무변호사는ㅡ그중에는 부모님 대부터 담당하던 일을 맡은 사람도 두서넛 있고 모두 그 사건으로 이미 부를 쌓았지만ㅡ서기 책상과 칙선변호사 비단 법복 사이에 놓인 매트 깔린 기다란 변호사석에 앉아(그러나 이 우물 바닥에서 '진리'를 찾는 것은 소용없는 짓이다) 저마다 눈 앞에 소장, 답변서, 재항변서, 제2답변서, 강제명령서, 선서진술서, 소송쟁점서, 법원 주사가 읽을 심사보고서, 법원 주사의 보고서, 그 밖의 온갖 값비싼 잡동사니를 쌓아놓고 있어야 한다. 다 꺼져가는 촛불이 법정을 어두침침하게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안에 낮게 깔린 안개가 영원히 나가지 않겠다는 듯이 버티는 것만 같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색유리가 끼워진 창문들이 색채를 잃고 대낮의 햇빛이 통과시키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도시의 문외한들이 입구의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다가 내부의 올빼미 같은 광경을 보고 또 천이 깔린 윗자리에서 천장까지 우울하게 울리는 멍청한 변설을 듣고는 안으로 들어가기를 포기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윗자리에서는 대법관이 햇빛을 통과시키지 않는 들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고, 그 옆에 앉은 가발 쓴 법관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안개에 파묻혀 있다! 바로 여기가 대법관 법정이다. 이 법정을 위해 나라 곳곳에 다 쓰러져가는 집과 황폐한 땅이 존재한다. …… (12∼13쪽)

 

소설 『황폐한 집』의 <제1장_대법관 법정>은 오로지 '런던의 안개'와 그 가운데 자리잡은 '대법관 법정'을 묘사하는 데 온전히 할애하는데, 위에서 인용한 두 단락은 제1장 전체 분량에 비하면 고작 1/8 정도에 불과하다. 그만큼 이 소설의 '서주' 부분이 자못 장대하게 펼쳐져 있는 셈인데, 디킨스의 여느 작품에서는 좀처럼 느끼기 어려운 '무게 와 깊이'를 반증하고 있습니다.

 

총 67장으로 구성된 이 방대한 장편소설은 '여러 층위'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대체로 재미있으면서도 술술 읽힌다는 평가'를 받는 디킨스의 여느 소설과는 궤를 달리하는 소설이지요. 음악에 비유하자면 제1주제와 제2주제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의 부차 주제(題)들까지 다양하게 포함하고 있으며, 그런 주제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여러 악장들 속에서 때로는 단조로, 때로는 장조로 아주 다양하게 제시되고 전개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런 구성 때문에 처음에는 따로 떨어져 서로 낯설게만 들리는 여러 소소한 이야기들이 차츰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다가 나중에 마침내 하나로 합쳐져 장중한 피날레를 향해 숨가쁘게 내달릴 때에는 거대한 감동의 쓰나미에 휩싸이게 되지요.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런던 대법관 법정과 그 주변, 레스터 데들록 경과 데들록 부인이 살고 있는 링컨셔의 대저택, 잔다이스 씨가 살고 있는 '황폐한 집' 등입니다. 공간이 생각보다 그리 넓은 편은 아니지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소설의 방대한 규모에 어울릴 정도로 충분히 많습니다. 제1의 주인공은 에스더 서머슨 양이지요. 소설의 절반 정도는 에스더가 '나'로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끌어 나갑니다. '에스더의 이야기'가 두 장 혹은 세 장쯤 이어지고 나면 다시 전지적 작가 시점의 이야기가 시간과 공간을 바꿔 두 장 혹은 세 장 정도 분량으로 다른 이야기를 전개합니다.(이런 방식의 독특한 이야기 전개가 극대화된 작품으로는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 작품에서는 매 장마다 등장 인물의 이름이 장의 제목으로 달려 있는데, 바로 그 인물이 '1인칭 화자'로 나서서 이야기를 이끌지요. 윌리엄 포크너는 바로 찰스 디킨스의 이야기 전개방식을 모방한 셈이었습니다.) 

 

주인공인 에스더가 '나'로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끄는 부분은 자연스럽게 에스더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집니다. 어릴 때부터 고아나 다름없는 처지로 대모의 손에서 자란 에스더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는 철저히 베일에 가려진 채  '복종과 극기와 부지런함'을 강요받으며 자랍니다. 열네 살 때 대모마저 사망하면서 외톨이 신세가 된 에스더는 예기치 못한 후원자의 손길 덕분에 기숙사가 딸린 학교에 들어가고, 나중에는 잔다이스 씨의 '황폐한 집'으로 이주해서 그 집의 살림살이를 도맡게 되고, 점차 주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믿음과 사랑을 얻게 되지요.

 

전지적 작가 시점의 이야기 전개는 에스더 서머슨 양의 주변을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맴돌긴 하지만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벌써 수십 년째 해결될 기미조차 없이 지리하게 이어지고 있는 '잔다이스 대 잔다이스 소송 사건'을 둘러싼 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 거기에 더해 상류 사회를 대변하는 레스터 데들록 집안의 거대한 저택에 머무는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보태집니다. 다채롭고도 흥미로운 인물들은 대법관 법정 주변에 가장 많이 모여 있지요. 대서인, 문방구점 주인, 변호사, 하숙인 등등이 저마다 자기 직분에 몰두하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끝없이 전개됩니다.

 

독자들은 이 소설을 한참이나 읽어도 여전히 '안개에 휩싸인 듯한 기분'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도대체 에스더 서머슨 양의 이야기가 이제 막 흥미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겠구나 싶으면 어김없이 거기서 이야기는 중단되고, 다시 전지적 작가 시점의 이야기로 전환되면서 '다른 공간에서 펼쳐지는 다른 이야기'로 뒤바뀌고 마는데, 그들 두 이야기 사이의 '연결 고리'를 찾기가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읽을 때 끊임없이 '화자'가 뒤바뀌면서 '이게 도대체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하는 당혹감을 맛보는 경우와 몹시 닮았지요. 이런 수법이야말로 작가가 일부러 의도한 '교묘한 이야기 전달 방식'의 핵심 장치이지요.

 

자욱한 안개 속에 휩싸인 사람은 자주 길을 잃게 마련이고, 여기 저기 안개 속에서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들 때문에 적이 놀라기 마련입니다. 또한 안개 속에서 마주친 사람들이 과연 어디에서 왔으며 또 앞으로 어디를 향해 발걸음을 옮길 것인지는 가늠하기 어렵지요. 『황폐한 집』에 등장하는 여러 배경들이나 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매 장마다 다르게 펼쳐지는 이야기는 새로운 배경과 인물들이 끝없이 펼쳐지기만 할 뿐 좀처럼 정리되는 듯한 느낌을 갖기 어렵기 때문에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처음부터 긴장감을 늦추지 말고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이내 길을 잃기 쉽습니다. 어떤 인물들이 어떤 장면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어떠한 행동을 했는지를 무심코 지나치다 보면 한참 후에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그 사람이 불쑥 다시 나타났을 때 왜 그 사람이 거기서 다시 나타났는지 그 까닭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교묘한 장치들이 잔뜩 숨겨져 있지요.

 

그래서 이 소설을 읽을 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그 사람의 이름과 특징과 해당 쪽수를 함께 적어둘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 기나긴 장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아마도 백 명 가까이는 될 듯한데, 나중에 이야기 전개가 차츰 '안개가 걷히듯' 보다 뚜렷하게 드러난 때쯤이면,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어떤 식으로든 '잔다이스 대 잔다이스 소송 사건'과 서로 연관을 맺고 있거나, 혹은 이 소설의 주인공들인 에스더 서머슨 양과 데들록 부인 혹은 잔다이스 씨와 깊은 연관 관계를 맺고 있음이 뚜렷이 드러나지요.

 

에스더의 이야기와 전지적 작가의 이야기가 팽팽하게 평행선을 달리듯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이끌다가 마침내 서로 맞닿는 지점은 언제쯤일까요. 그 해답을 찾을 때쯤이면 이 소설은 어느새 클라이맥스에 가까이 다가가 있을 테지요. '미모와 자존심과 야심과 교만한 고집'으로 똘똘뭉친 데들록 부인이 아무도 모르게 '편지 한장' 딸랑 남기고 느닷없이 가출한 사실이 발견되고, 그 소식을 들은 잔다이스 씨가 한밤중에 에스더 서머슨 양을 깨우는 장면이 '마침내' 서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무려 1,000쪽에 가까운 소설이 바로 여기서부터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긴박하고 빠르게 전개되는데, 이 극적인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로 진입하기 위한 연결 다리는 866쪽에 이르러서야 겨우 발견됩니다.

 

『황폐한 집』을 읽고 나면 작가로서의 찰스 디킨스가 얼마만큼 탁월한 이야기꾼인지를 깨닫고 새삼 놀라게 됩니다. 그가 꾸며내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놀랍고 초정밀 시계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치밀하고도 교묘합니다. 또한 찰스 디킨스의 여느 다른 작품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그만의 '심오한 경지'를 발견하게 되지요. 찰스 디킨스가 도스토옙스키의 스승으로 불리우고 톨스토이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심지어 프란츠 카프카, 제임스 조이스, 윌리엄 포크너 등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디킨스는 오로지 소설만 쓴 작가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작품을 연재할 주간지도 20년이나 계속해서 발행했고, 잡지에 게재되는 원고를 일일이 검토했고, 자신의 소설뿐만 아니라 잡지 기사도 직접 작성했지요. 그뿐만 아니라 자선사업과 사회사업, 곳곳에서 열리는 강연과 사교 모임에도 활발히 참석했습니다. 그가 남긴 편지만 하더라도 한 권이 700쪽이 넘는 스물두 권짜리로 간행되어 있다고 합니다. 작가의 넘치는 에너지와 활력을 보고 랄프 왈도 에머슨이 "그토록 왕성한 창작력과 다채로운 재능을 지닌 한 예술가에 대해서, 또한 한 인간으로서 그가 가진 복합적인 성격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던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지요다.

 

찰스 디킨스의 작품들이 국내에 여럿 번역되어 나와 있지만 아직도 그의 방대한 작품 세계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지요. 그가 20대 중반에 '불꽃처럼' 드높은 명성을 얻은 끝에 그 인기를 한평생 동안 누리게 만들어 주었던 출세작인 『픽윅 클럽 여행기』만 하더라도 올해 들어서야 겨우 번역되어 나왔으니까 말이지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버나드 쇼가 "『자본론』 보다도 더 폭동을 유발하는 책"이라고 격찬했고, 그 자본론의 저자인 칼 마르크스가 최초의 자본주의 공격 소설로 평가했던 <리틀 도릿>이나 <우리 서로의 친구>, <니콜라스 니클비>, <마틴 처즐위트>, <돔비와 아들> 같은 작품들은 아직까지도 우리말 번역본을 찾기가 힘든 형편이지요. 사실 그의 방대한 작품세계를 살펴보면 그의 대표작인 『올리버 트위스트』, 『위대한 유산』, 『데이비드 코퍼필드』, 『황폐한 집』에 이르는 네 작품만 하더라도 다 읽기에도 벅찬 게 사실이지요.

 

마침 올해는 찰스 디킨스 사후 150주년이 되는 해라고 하더군요. 소설계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이 탁월한 이야기꾼의 작품들이 앞으로도 더욱 다양하게 번역되어 나오고, 그의 작품들을 찾는 독자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의 사후 나이가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그의 또다른 대표작인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소개할 수 있기를 바라며 『황폐한 집』에 대한 작품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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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20-08-16 22: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틀 도릿‘은 ‘작은 도릿‘으로 번역돼 있습니다. 네 권짜리라 강의에서 다루기 어려운 게 흠이에요..

oren 2020-08-16 22:1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그 번역본을 뒤늦게 발견했더랬습니다.
로쟈 님 말씀마따나 네 권짜리라 정말 진입장벽이 높다는 생각부터 들더군요.^^

우유가없어 2020-09-27 1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가 읽을 일 없다고 생각해왔는데 이 글을 보니 읽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졌어요 엄지척!

oren 2020-09-28 21:21   좋아요 0 | URL
찰스 디킨스를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꼭 봐야할 필독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꼭 읽어보세요!
 

 

이대로 괜찮은가, 괜찮지 않은가, 그것이 문제로다.

 - 셰익스피어, 『햄릿』 중에서

 

 * * *

 

나쓰메 소세키의 대표작 「마음」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일본을 대표하는 '국민 작가'이지요. 그가 사망한지 벌써 100년도 더 지났지만 그의 명성이나 위상이 흔들린 적은 거의 없습니다. 그의 작품은 중고생들의 교과서를 통해 세대를 바꿔가며 끊임없이 읽혀졌고, 그의 얼굴은 1,000엔 권 지폐를 가장 오랫동안 장식했습니다. 도대체 이 작가는 무슨 이유로 이토록 일본 사람들의 존경과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있을까요?

 

그는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한 뒤 일본 문부성이 서양 문물을 직접 배워오도록 영국으로 파견한 국비 유학생의 원년 멤버였습니다. 비록 신경쇠약으로 중도에 귀국하기는 했지만 그때의 유학 경험은 작가에게 귀중한 자산이 되었지요. 나쓰메는 유학 시절에 이미 선진 문물을 모방하고 뒤따라가기 바쁜 조국의 모습에 일말의 불안감을 느낀 터였습니다. 그는 일본이 피상적인 근대화를 추구한 나머지 서양에 대한 정신적인 예속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고 비판했습니다. 일본 학계는 그의 논설과 강연을 이내 '문명 비판'이라는 층위로 격상시켰고 그는 점차 국민적 지식인으로 떠올랐지요.

 

국민 작가라는 칭호는 자연스레 정치적인 이념과 결부되기 마련이었습니다. 민족 공동체의 문화적 정체성 혹은 국가적 신념과 결부된 나쓰메의 작품들은 차츰 '소세키 신화'를 형성하기에 이르렀지요. 일본인들은 어느 공동체든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를 나쓰메의 문학 작품들 속에서 찾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열도가 러일 전쟁의 승리에 한껏 들떠 있던 바로 그 즈음 처녀작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1905년)로 뜻밖의 성공을 거둔 나쓰메는 그 직후 잇따라『도련님』과 『풀베개』 등을 써냈고, 도쿄제국대학의 영문학 교수라는 명예로운 자리마저 가볍게 내던지고 《아사히 신문》에 소속된 전업 작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는 좀 더 원대한 포부를 향한 발걸음을 내디딘 셈이었지요. 창작을 통해 자신의 삶의 목표를 구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나는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배 위에서 스스로 맹세했네. …… 단지 엄청나게 격변하는 요즈음 세상에서 (나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얼마만큼 나의 감화를 받고, 내가 얼마만큼 사회적 존재가 되어 다음 세대 청년들의 삶과 피가 되어 존속할 수 있을지 부딪쳐 보고 싶다네.

 

한 자루의 붓을 들고 낡은 세상을 뜯어고치고 자신이 꿈꾸는 멋진 세상을 그려보고픈 당찬 포부가 그대로 묻어나는 이런 출사표야말로 나쓰메의 본심이었습니다. 그는 문학을 통해 일본인들의 자의식을 일깨우고 그들로 하여금 서양 문명을 극복하도록 부단히 독려했습니다. 비록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이 총칼을 들고 서양과 직접적인 전쟁에 나선 적은 없었지만 문화 전쟁에서는 늘 그들에게 뒤처져 있다는 열패감이 그를 지배했고, 그는 문학을 통해서라도 서양에 대적할 정신적인 힘을 얼마든지 키울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1914년에 발표된 『마음』은 여러 다른 인기작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대표작으로 널리 인정받는 작품이지요. 왜냐하면 나쓰메 문학의 본령은 메이지 시대를 대표하는 일본 근대 문학의 선구자라는 상징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고, 이 작품이야말로 작가 특유의 시대적 불안과 문화적 소외감이 등장 인물들을 통해 고스란히 투영된 작품일 뿐만 아니라, 작가가 이상화하고 싶었던 인물들의 성격적 특징들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그리고 싶었던 이상적인 성격적 특질들을 『마음』을 바탕으로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꾸준히 용맹 정진하고, 추호도 비겁하거나 비굴하지 않고, 금욕적이면서도 도의적이고, 향상심을 잃지 않고 맹진하는 인간 유형. 이런 유형은 작중 인물인 '선생님'을 통해 자신의 더 나은 미래를 암중 모색하는 '나'에게서는 아직까지 쉽사리 발견되지 않습니다. '선생님'의 경우도 성격과 자질은 충분히 갖춰졌지만 여전히 실현되지는 못합니다. 거의 모든 면에서 언제나 선생님보다 앞서 있었지만 끝내 '사랑 때문에' 자결로 생을 마감한 K의 경우가 바로 작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격적 특질들을 보여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K의 안타까운 죽음이 선생님의 삶을 끊임없이 압박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로 보여집니다. 작가가 『마음』을 통해 일본의 독자들에게 부단히 일깨우고 호소하고 싶었던 것도 바로 그런 두 사람의 '참을 수 없는 안타까운 죽음'에 있었던 듯싶습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되지요.

 

나는 그분을 늘 선생님이라 불렀다. 그러니 여기서도 그냥 선생님이라고만 쓰고 본명을 밝히지는 않겠다. 이는 세상 사람들을 의식해서 삼간다기보다 나로서는 그렇게 부르는 게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을 떠올릴 때마다 바로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글을 쓸 때도 그런 마음은 같다. 어색한 이니셜 따위는 도무지 쓸 마음이 들지 않는다.(16쪽)

 

이렇게 시작되는 『마음』의 전체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합니다. 화자인 '나'는 도쿄에서 대학을 다니는 생기발랄한 학생입니다. '나'는 여름방학때 친구들과 함께 놀러간 가마쿠라의 해수욕장에서 우연히 어떤 중년 남자를 알게 되지요. 그저 막연한 호기심 때문에 그를 관찰하던 나는 며칠 후부터 그와 함께 해수욕을 즐길 정도로 가까워집니다. '나'는 나중에 도쿄에 돌아와서도 선생님 댁을 다시 찾게 되지요.

 

선생님은 이렇다할 직업도 없이 아름다운 부인과 함께 도쿄의 주택가에서 조용하고 단촐한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대체로 비사교적인 데다가 사람들에게 냉담한 편이지요. 그의 일상에서 주목할 만한 유일한 특징이 하나 있다면 매달 어김없이 정해진 날짜에 조시가야 묘지에 성묘를 간다는 점입니다. 물론 선생님은 그 묘지의 주인공을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소설속 주인공이 일부러 거기까지 찾아오는 것조차 거북해 하지요.

 

선생님은 처음부터 나를 싫어한 것이 아니었다. …… 가엾은 선생님은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사람에게, 가까이할 만한 사람이 아니니 그만두라는 경고를 보냈던 것이다. 남이 반가워하는 것에 응하지 않는 선생님은 남을 경멸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경멸한 것 같다.(24∼25쪽)

 

선생님의 마음은 도무지 오리무중입니다. '나'는 선생님의 부인으로부터 '학생이었을 때는 이런 성격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왜 지금과 같은 성격으로 바뀌었는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그가 대학생일 때 겪었던 친한 친구의 갑작스런 변사가 한 원인이 아닐까 막연하게 추측만 할 뿐이지요.

 

주인공인 '나'는 도쿄에서 학업을 마치고 잠시 고향에서 지내기 위해 낙향합니다. 더군다나 아버님은 최근에 신장병으로 쓰러진 적이 있는데 병세가 위중했습니다. 병환 중에도 아버지는 매일 배달되는 신문을 아주 꼼꼼히 읽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여름날 메이지 천황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나서는 아버지의 병세도 갑자기 악화됩니다.

 

그 무렵 신문은 사실 시골 사람들이 날마다 기다릴 만한 기사로 가득했다. 나는 아버지 머리맡에 앉아 꼼꼼하게 읽었다, 읽을 시간이 없을 때는 슬쩍 내 방으로 가져와 빠짐없이 훑어보았다. 나는 군복을 입은 노기 대장과 궁녀 같은 차림을 한 부인의 모습을 오랫동안 잊을 수가 없었다.(132쪽)

 

아버지의 병환 때문에 멀리 타향에 나가 있는 형과 매형이 불려오고, 하루하루 병세가 위중한 가운데 어느날 선생님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습니다. 양복 입은 사람만 봐도 개가 짖는 곳에서는 전보 한 통조차 대사건이었지요. 전보에는 잠깐 만났으면 하는데 올 수 없겠느냐고 간단히 쓰여 있었습니다. 주인공인 '나'는 아버지의 병환 때문에 부탁에 응할 수 없다는 상세한 설명을 담은 긴 편지를 보내지만 그 후로 별다른 답장을 받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병환이 마지막 일격을 앞둔 시점에 뜻밖에도 선생님으로부터 매우 두툼한 편지가 등기로 배달됩니다. 그 편지에는 뜻밖에도 자신의 자살을 암시하는 문장이 들어있었지요. 주인공은 만사를 제쳐두고 황급히 도쿄행 열차에 몸을 싣습니다. 품안에서 다시 꺼내 찬찬히 읽기 시작한 편지는 결국 '선생님의 유서'였지요. 거기엔 자신의 지나온 과거가 소상히 담겨 있었지요. 자신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으며 왜 지금에서야 죽기로 결심했는지 하나도 숨김없이 담겨 있었습니다.

 

나는 수천만 명이나 되는 일본인 중에 오직 자네에게만 내 과거를 이야기하고 싶네. 자네는 진실하니까, 자네는 진실하게 인생 자체에서 살아 있는 교훈을 얻고 싶다고 했으니까.

 

나는 어두운 인간 세상의 모습을 기탄없이 자네에게 보여주겠네. 하지만 두려워해서는 안 되네. 어두운 것을 가만히 응시하고 그 안에서 자네에게 참고가 될 만한 것을 붙잡게. 내가 어둡다고 한 것은 물론 윤리적으로 어둡다는 것이야.(151쪽)

 

 

편지 내용은 길게 이어집니다. 선생님은 스무살도 안 되어 부모를 한꺼번에 잃었습니다.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부모를 잃고 나서 한동안 숙부가 자신을 살뜰하게 보살펴 주는 줄 알았지만 나중에야 도리어 숙부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인간 부류를 통째로 불신하게 되지요.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유산을 정리한 그는 고향을 영영 떠나 홀로 도쿄에서 대학을 다닙니다. 적당한 하숙집을 물색하던 그는 청일전쟁때 전사한 남편 때문에 마땅한 수입이 없던 아주머니의 집으로 들어가지요. 그 집에는 학교에 다니던 하숙집 아주머니의 외동딸과 하녀까지, 여자 셋이서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다다미 여덟 장이 깔린 널찍한 하숙방으로 이사한 뒤로 조금도 불편한 점 없이 학교에 다니던 그는 이내 한 집안 식구처럼 그 집에서 지내게 됩니다. 주인 아주머니와 아가씨와도 곧잘 차를 함께 마시며 담소를 나눌 정도가 되면서 선생님은 차츰 하숙집 아가씨를 사랑하게 되지요. 그런데 하필 그 무렵 그의 운명을 뒤흔들어 놓을 중대한 변화가 찾아옵니다. 같은 고향 출신이자 같은 대학에 다니던 K라는 친구가 부모와 갈등 끝에 의절하다시피 하면서 오갈데 없는 처지로 내몰리자 그 친구를 하숙집으로 데려온 것이지요. 그게 바로 운명적인 사건의 발단이었습니다.

 

남몰래 아주머니의 딸을 사랑하기 시작했다가 어느새 아주머니로부터 자신의 딸을 '빨리 치워버리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말까지 들었던 그로서는 K가 자신의 연애 경쟁 상대가 되리라고는 꿈에서조차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K는 태생부터 스님의 아들이었던 데다가 보통의 승려보다 훨씬 승려다운 성격을 지녔고, 스스로도 장차 종교적인 방면이나 정신적인 지도자가 되려는 고상한 인품을 지닌 친구였으니까요.

 

K는 악인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끊임없이 정진하는 인물이었고, 그의 머리속엔 온통 훌륭한 사람의 이미지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과묵하면서도 사교에 서투른 그런 친구를 보다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애쓴 사람들이 바로 그의 친구였고, 하숙집 아주머니와 아가씨였습니다. 그런 노력의 결과는 전혀 엉뚱한 데서 문제를 일으키지요. 선생님의 눈에 비친 K의 행동들은 차츰 의심스러운 것들로 가득 차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는 이제 영락없이 오셀로의 처지로 내몰리지요. 질투심에 사로잡혀 결백한 아내 데스데모나를 끊임없이 의심하는 그 오셀로 말입니다. 다음 대목만 읽으면 인간의 정념 중에서 가장 지독하다는 질투심이 이제 막 독기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이 눈앞에서 선하게 보이는 듯합니다. 

 

어느 날 나는 간다에 볼일이 있어 귀가 시간이 평소보다 훨씬 늦어졌다네. 잰걸음으로 대문 앞까지 와서 격자문을 드르륵 열었지. 그와 동시에 나는 아가씨의 목소리를 들었네. 목소리는 분명히 K의 방에서 들리는 것 같았지. …… 나는 들어와 바로 격자문을 닫았네. 그러자 아가씨의 소리도 금방 그치더군. 나는 그때부터 하이칼라여서 벗는 데 시간이 걸리는 편상화를 신고 있었는데, 내가 허리를 굽히고 구두끈을 푸는 동안 K의 방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더군. 나는 이상하게 생각했지. 어쩌면 내 착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평소처럼 K의 방을 지나가려고 장지문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거기에 두 사람이 앉아 있더군. K는 여느 때처럼 이제 오나, 라고 말했지. 아가씨도 앉은 채 "오셨어요?" 하고 인사하더군.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그 간단한 인사가 내게는 좀 딱딱하게 들렸네. 내 고막엔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어조로 울렸지.(205쪽)

 

이때부터 급작스럽게 조성된 선생님과 K 사이의 팽팽한 긴장 상태는 늦여름에서 이듬해 봄에 이르기까지 숨막힐 정도로 길게 이어집니다.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되지요. 의심은 의심을 낳고 한번 불타오르기 시작한 질투심은 꺼질 줄 모릅니다. 그렇다고 아무런 증거도 없는데 무턱대고 K를 추궁할 수도, 그와 담판을 벌일 수도 없었지요. 자신의 마음을 먼저 친구에게 털어놓거나 아주머니에게 고백하고도 싶지만 끝내 결행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어느 날엔가 K로부터 청천벽력과도 같은 충격적인 고백을 듣게 됩니다. 자신이 하숙집의 아가씨를 사랑하고 있는데 어떡하면 좋겠느냐는 얘기였지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하숙집 안주인과 아가씨에게까지 직접 자신의 사랑을 고백할 정도로 상황이 진척된 게 아니라는 사실뿐이었습니다. 자신의 연인을 한순간에 빼앗길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인 선생님은 온 신경을 곤두세워서 K를 경계하기 시작하고, 심지어는 그가 아가씨를 포기하도록 잔인한 말까지도 서슴치 않지요. "정신적으로 향상심이 없는 인간은 쓰레기다."라는 K의 평소 지론까지 곁들이며서 말이지요.

 

교묘한 방법으로 K를 궁지로 몰던 선생님은 마침내 자신이 먼저 선수를 칠 계획에 착수합니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아주머니에게 딸을 달라고 요청하지요. 아주머니도 시원스럽게 두 사람의 결혼을 승낙합니다. 당사자의 의견은 확인할 필요도 없다면서. 그런데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며칠 지나지 않아 K는 자신의 방에서 자살하고 말지요. 그가 친구에게 남긴 유서에는 아가씨에 대한 언급은 한 마디도 없었습니다. 단지 "의지와 실천력이 박약해서 도저히 살아갈 희망이 없다'는 고백만 있었을 뿐이고, 친구에게는 도리어 그동안 자신에게 베풀어준 후의에 감사를 표한다는 내용까지 덧붙이고 있었지요.

 

사건은 원만하게 수습되지만, 자신의 비열한 행동 때문에 친구가 세상을 등졌다는 죄책감에 사로 잡힌 선생님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친구와 자신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밝히지 못합니다. K의 자살에 대해서라면 그 어떤 내막조차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던 하숙집 아가씨는 아무런 영문도 모른채 선생님과 결혼하지요. 결혼 이후 아내와 함께 할 때마다 언제나 그 두 사람 사이에 K의 죽음이 개입되어 있다는 느낌 때문에 선생님은 뿌리 깊은 죄의식에 시달립니다.

 

결혼할 때 아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둘이서 K의 묘에 다녀오자는 말을 꺼내더군. 나는 까닭도 없이 그저 가슴이 철렁했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 거냐고 물었지. 아내는 둘이서 묘를 찾아가면 K가 무척 기뻐할 거라고 하더군.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는데 왜 그런 얼굴을 하느냐는 아내의 말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지.

 

아내가 바란 대로 둘이서 조시가야에 갔네. 나는 K의 새 묘석에 물을 끼얹어 깨끗하게 씻어주었지. 아내는 묘 앞에 향을 피우고 꽃을 꽂았지. 우리는 머리를 숙이고 합장을 했네. 아내는 필시 나와 결혼한 전말을 알리면 K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겠지. 나는 속으로 그저 내가 잘못했다고 되풀이할 뿐이었네.(262쪽)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 행복하게 지내는 건 그저 외관에 그칠 뿐이고, 친구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죄책감을 극복하지 못한 그는 매달 한 번씩 친구의 묘소를 찾을 때마다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는 한편 숙부로부터 당한 배신감 때문에 인간들을 경멸했던 자신이 바로 그런 경멸의 대상이 된 점을 깨닫고 부끄러워합니다. 그런 불행한 삶을 하루하루 이어오던 그는 메이지 천황의 병사 소식과 노기 장군의 순사(殉死) 보도를 접하고 마침내 자신도 죽기로 결심하지요. 그가 낙향해 있는 '나'에게 전보를 보낸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름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 메이지 천황이 서거했네. 그때 나는 메이지의 정신이 천황으로 시작되어 천황으로 끝났다는 생각이 들더군. 메이지의 영향을 가장 강하게 받은 우리가 그 후에 살아남는 건 결국 시대에 뒤처진 것이라는 느낌이 강렬하게 내 가슴을 쳤네. 나는 분명히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지. 아내는 웃으며 상대해주지 않았지만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갑자기 나에게 그럼 순사라도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놀리더군.(271쪽)

 

나쓰메의 소설에 깊이 매료된 일본 독자들은 아마도 이런 대목에서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깊은 공감과 감동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역사 의식이 다를 수밖에 없는 우리나라의 독자들은 정반대의 묘한 반감을 느낄 수밖에 없지 싶습니다. 앞서 등장했던 '나'의 아버지도 병환 중에 들려온 천황의 붕어 소식에 충격을 받고 급작스레 죽음을 의식하기 시작하는데, 바로 그 무렵에 배달된 선생님의 편지 속 내용에서 그런 모습이 거듭 반복되기 때문이지요. 기억의 밑바닥에서 가라앉은 채 썩어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순사(殉死)라는 말이 선생님과 강하게 결부된 모습은 다음 대목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납니다.

 

그러고 나서 한 달쯤 지났지. 천황의 장례식이 치러진 날 밤 나는 여느 때처럼 서재에 앉아 예포 소리를 들었네. 나에게는 그것이 메이지 시대가 영원히 사라졌음을 알리는 소리로 들렸지. 나중에 생각하니 노기 대장이 영원히 떠난 것을 알리는 소리이기도 했네. 나는 호외를 들고 무심코 아내에게 순사다, 순사다, 하고 말했지.

 

나는 신문에서 노기 대장이 죽기 전에 써서 남긴 글을 읽었네. 세이난 전쟁 때 적에게 깃발을 빼앗긴 이래 사죄하기 위해 죽자, 죽자, 하면서도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의미의 구절을 보았을 때 나는 무심코 손가락을 꼽아 노기 씨가 죽을 각오로 살아온 세월을 헤아려 보았지. 세이난 전쟁은 1877년에 일어났으니 1912년까지 35년의 거리가 있네. 노기 씨는 그 35년간 죽자, 죽자, 하면서 죽을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야. 나는 그런 사람에게 그때까지 살아온 35년이 고통스러울지, 아니면 칼로 배를 찌른 한순간이 더 고통스러울지를 생각했네.(272∼273쪽)

 

그러고 나서 며칠 후 선생님은 죽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남기는 일이 '인간을 아는 일'에 헛수고는 아닐 거라며, 모든 것을 자네 가슴에 묻어두라는 부탁을 끝으로 편지를 맺지요.

 

이 작품은 독자에 따라 읽는 방법이 다양할 수 있지만, 대체로 '선생님'과 'K'라는 두 젊은이의 내면에 자리잡은 이기심과 윤리 의식 사이의 맹렬한 투쟁, 그리고 친구의 죽음으로 빚어진 뿌리깊은 죄의식이 압권인 소설입니다. 혈기왕성한 젊은이들 사이에 흔히 발생할 수 있는 삼각관계에서 자신의 사랑을 관철시키기 위해 온갖 책략들을 동원하는 일은 자연스런 현상이지요. 또한 경쟁자가 있든 없든, 그 과정이 조용하거나 떠들썩하거나 관계없이, 구애 과정은 언제나 자연계를 지배하는 가장 강렬한 본능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런 싸움에서 돌연 패배한 친구의 급작스런 자살이 행복을 구가해야 마땅할 나머지 두 사람마저 끝내 비극으로 몰아간다는 이야기는 너무 암울하지요.

 

그런데, 소설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하는 부분에 등장하는 천황의 죽음과 노기 대장의 순사 이야기는 너무 낡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봉건적 군신 관계를 상징하는 '순사' 풍습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아버지와 '선생님'의 자살 동기에 동시에 드리워져 있지요. K의 죽음만 순수할 뿐 나머지 두 사람의 죽음엔 마치 충군애국의 이념이나 명예를 위한 자기희생의 색깔이 너무 짙게 채색된 느낌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천황과 선생님과 아버지의 죽음을 동일선상에 놓고 본다는 생각이야말로 군사부 일체라는 케케묵은 충효사상의 재현일 테니까요.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마음』은 정진, 자활, 맹진, 금욕, 도의, 향상심 등으로 대표되는 K의 덕목들을 적잖이 강조합니다. 그는 그토록 권장할 만한 훌륭한 성품들을 두루 지녔으면서도 끝내 실연의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하지만 최후의 순간까지도 의연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탓할 뿐이었지요. 선생님 또한 자신의 삶에 그 어떤 오점 하나라도 남길 수 없다는 결연한 자세로 자신의 비겁함과 죄과를 참회하는 구도자적 모습을 보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점들을 주목해서 살펴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나쓰메는 메이지 천황의 죽음 이후에 쓴 『마음』을 통해서 비로소 오래 전부터 자신이 그토록 열망했던 마음 속의 다짐 일부를 마침내 실현한 게 아닐까 하고 말이지요. '다음 세대 청년들의 삶과 피가 되어 존속할 수 있을지 부딪쳐 보겠노라'던 그 다짐 말입니다.

 

이것으로 마음에 대한 작품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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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08-09 17: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마음이 이렇게 번역본이 많은 줄 몰랐어요.
이게 영화로도 만들어졌군요.
또 이걸 어떻게 편집하셨습니까?
영화와 함께 오렌님 얘기 들으니 좋으네요.^^

근데 오렌님은 알라딘 TV에 올리지 않으시나봐요.
알라딘 TV에서 못 보겠던데...
제가 못 찾는 걸까요?

oren 2020-08-09 18:22   좋아요 2 | URL
<마음>의 번역본은 이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저는 판매량 상위 12개 판본만 링크해 둔 것이고요.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은 일본 교과서에도 실려 있고,
지금까지 팔린 책의 부수가 1,700만 부라고 들었어요.
아마도 나쓰메의 모든 작품들이 지금껏 팔린 부수는 수억 부에 이를 듯해요.
나쓰메 또한 워낙에 다작 작가이니까 말이죠.

알라딘 TV에 영상을 올리시는 분들은 아마도 자기 고유의 채널이 없어서
알라딘 TV라는 채널에 얹혀 사는, 쉽게 말하자면 ‘임차인‘ 비슷한 셈이지요.
저야 제 채널이 버젓이 있는데,
굳이 남의 집이나 마찬가지인 알라딘 TV에 제 영상을 올릴 까닭이 없지요.
유튜브에서는 자기 자신의 채널을 만드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고,
채널 성격에 따라 한 사람이 여러 브랜드 채널을 개설할 수도 있답니다.

2020-08-14 1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16 2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