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인 그는 너무나 많은 재능을 지닌 것 같다. 그 재능은 그에게 묶여져 있는 무서운 기관차 같아서 그는 거기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도, 그것을 멈추게 할 수도 없다. 그는 나를 압도한다! 그토록 왕성한 창작력과 다채로운 재능을 지닌 한 예술가에 대해서, 또한 한 인간으로서 그가 가진 복합적인 성격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할 방법이 없다."

 - 랄프 왈도 에머슨

 

 * * *

 

아무리 탁월한 작가라고 하더라도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읽기 전까지는 대개 작가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막연한 거리감을 도저히 좁힐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설사 그 사람의 사진만 보더라도 곧장 그를 알아볼 수 있고, 그가 남긴 대표작 이름까지 여럿 알고 있다고 해도 사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내겐 찰스 디킨스라는 작가도 그런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그에 대해 내가 얼마나 무지했던지 심지어 나는 구두쇠 영감 스크루지가 등장하는 그 유명한 『크리스마스 캐럴』조차도 찰스 디킨스와 연결지어 생각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만큼 이 인물에 대해서는 도무지 아는 게 없었다고나 할까.

 

도대체 어떤 연유로 찰스 디킨스를 이토록 새까맣게 모르고 지내왔을까. 가만 생각해 보니 뚜렷하게 내세울 만한 이유도 별로 없다. 굳이 억지로 변명을 하자면 이렇다. 그의 작품 제목이 당최 별로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코퍼필드? 올리버 트위스트? 도무지 무슨 이야기가 거기에 담겨 있다는 거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고리오 영감』이라든가 『보바리 부인』이라면 또 모를까. 그런 책들을 먼저 읽으면 읽었지 아무런 실마리조차 잡히지 않는 낯선 제목의 소설부터 선뜻 집어들 생각은 별로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하찮은 이유 하나만으로도 찰스 디킨스는 내게서 까마득히 밀려나 있었다.

 

나도 언젠가는 찰스 디킨스를 한번쯤 만나 봐야지 하는 마음을 처음으로 품었던 건 아마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을 때였지 싶다. 조이스는 그 엄청나게 두꺼운 소설 속에서 수많은 작가들과 작품 속 인물들을 단 한 줄로 간단히 처리하는 매우 특출난 솜씨를 유감없이 드러냈지만 유독 몇몇 작가들에 대해서는 그와는 정반대로 아주 융숭한 대접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인물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작가는 단연 셰익스피어였지만 찰스 디킨스에 대한 대우도 그리 나쁘진 않았다. 왜냐하면 제임스 조이스는 그 책에서 세르반테스의『돈키호테』,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등은 물론이고 마크 트웨인이나 빅토르 위고와 같은 숱한 걸출한 작가와 작품들에 대해서조차 예외없이 '단 한 번' 스쳐 지나가듯 다룬 데 비해 찰스 디킨스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거듭 끌어들였고, 그의 작품 또한 『데이비드 코퍼필드』뿐만 아니라, 『두 도시 이야기』, 『올리버 트위스트』, 『픽위크 페이퍼즈』까지 두루 폭넓게 인유할 만큼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 보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다시 한번 찰스 디킨스를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헤럴드 블룸의 『교양인의 책읽기』를 만났을 때였다. 이 해박하고도 노련한 문학 비평가가 찰스 디킨스를 외면할 이유가 어디에 있었겠는가. 하지만 디킨스에 대한 나의 관심이 급속도로 고조된 건 그 작가에 대한 헤럴드 블룸의 도드라진 애정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런 사정까지 알고 나서도 한사코 디킨스를 계속 외면하기란 그리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오래된 작품들을 다시 읽는 일은 가장 높은 수준의 즐거움

 

윌리엄 해즐릿이 말한 것처럼 오래된 작품들을 다시 읽는 일은 가장 높은 수준의 즐거움이면서 독자 자신의 열망 깊은 곳에서 새로운 가르침을 준다. 나는 디킨스의 『픽위크 페이퍼즈』를 일 년에 두 번씩 읽곤 했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권의 책이 닳아 없어지기도 했다. 그게 도피라면 난 기꺼이 그 도피에 참여하리라. 비록 『픽위크 페이퍼즈』에 등장하는 누구도 내게 동일화의 즐거움을 주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읽기』

 

그런데 헤럴드 블룸의 감동적인 설명을 듣고 나서도 디킨스의 작품들은 여전히 내 마음에 선뜻 와닿지가 않았다. 픽위크 페이퍼즈?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거기에 담겨 있다는 거지? 책의 제목들은 여전히 아리송하기만 하고, 막연한 궁금증만 더할 뿐이었다. 디킨스와의 거리 또한 조금도 좁혀지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많은 비평가들은 『황량한 집』을 첫 손가락으로 꼽는다

 

디킨스의 애독자들은 『위대한 유산』을 그의 소설 중 제1로 치지는 않는다. 대중적 인기로 치자면 『올리버 트위스트』보다 뒤진다. 디킨스 본인은 『코퍼필드』를 더 우위에 두었지만, 나를 포함해서 많은 비평가들은 『황량한 집』을 첫 손가락으로 꼽는다.

 

그러나 『두 도시 이야기』처럼 『위대한 유산』은 대단히 대중적이라는 면에서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과 수십 편의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에 비견될 만하다. 왜냐하면 영화나 텔레비전이 아닌 모습으로 이 정보화 시대에 살아남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햄릿』과 『맥베드』를 읽듯이 우리는 『위대한 유산』을 끊임없이 읽을 것이다.

 

도대체 어느 작품부터 읽어야 좋을지조차 모르는 나같은 디킨스 문외한에게 이런 설명은 그리 유익한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저 황량한 느낌만 더할 뿐이었다. 도대체 어느 작품이 최고라는 거지?『위대한 유산』은 아닌 듯하고, 그럼 『올리버 트위스트』? 디킨스 기준으로는 『코퍼필드』? 많은 비평가들은 『황량한 집』? 계속 헷갈리기만 했다. 그러나 어쨌든 『위대한 유산』은 '여러 면에서' 읽을 만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싶었다.

 

이렇게 해서 내가 처음으로 읽은 찰스 디킨스의 작품은 『위대한 유산』이 되었고, 그 작품 하나만 읽고도 나는 찰스 디킨스에 홀딱 빠져들고 말았다. 어느새 나는 『올리버 트위스트』, 『어려운 시절』, 『데이비드 코퍼필드』까지 한꺼번에 사들이고 나서 『황량한 집』을 마저 사들이지 못한 걸 살짝 후회할 정도가 되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국내엔 『황폐한 집』은 진작에 나와 있었어도 『황량한 집』은 아예 나온 적조차 없었다. 이런 황당함이라니.

 

 

 (『위대한 유산』은 1,2권 합해서 911족,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무려 1,120쪽에 달하지만 '지루해서 읽기 힘든 소설'과는 아주 거리가 먼 작품들이니만큼 '방대한 분량' 때문에 겁을 먹을 필요는 조금도 없을 듯하다.)

 

『위대한 유산』을 읽는 짧은 시간(?) 동안에 참으로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휙휙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어릴 때 책 속으로 마구 빠져들었던 황홀한 느낌까지도 아주 오랜만에 다시 맛봤다. 디킨스의 작품이 이토록 재미있을 줄은 차마 몰랐다. 그가 쓴 문장과 표현들은 막히는 데가 전혀 없었다. 금세 셰익스피어를 떠올릴 만큼 그의 문장이 아주 생기 넘치고 자유분방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어떤 인물이나 광경이나 심리를 묘사하든 재치와 유머와 위트가 가득했다. 『위대한 유산』에 '나'로 등장하는 주인공 핍이 어린 시절에 겪은 아주 단편적인 이야기조차도 어쩌면 이토록 생생하면서도 흥미진진하게 다가오는지 연신 감탄을 거듭하며 읽어 내려갔다.

 

내가 아주 가금씩이나마 책을 읽다 말고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면서 한번쯤 상상했던 일 가운데 하나가 '언젠가 나도 작가가 되어 소설을 쓰게 된다면' 쯤으로 시작되는 몹시 유쾌한 상상이었다고 말한다면 어느 누가 얼마만큼이나 믿어줄까 싶지만, 그럴 때마다 내가 책으로 나올 가망성이 눈꼽만큼도 없는 그 소설 속에 한번쯤 꼭 담아봤으면 하는 심정으로 끄적거렸던 '번개처럼 스치는 아스라한 옛 추억들'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그렇게도 달아날까 두려워 몸을 떨면서 애써 붙잡으려 했던 '너무나 소중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바로 디킨스의『위대한 유산』이라는 작품 곳곳에 잔뜩 스며 있었다. 정말로 놀라웠다. 내가 그런 구절들을 읽을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고 몇몇 대목에서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전율할 수밖에 없었던 건 참으로 놀라운 독서 경험이었다.

 

디킨스가 펼치는 이야기는 너무나 자연스러워 마치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누군가가 우리에게 다시 들려주는 것처럼 아주 생생하게 들린다. 때로는 너무나 놀라운 스토리가 박진감 넘치는 추리소설처럼 펼쳐지기 때문에 마치 어린 시절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던 '끝내주는 만화'를 보는 느낌도 자주 들었다. 이처럼 읽는 재미가 샘솟듯 콸콸 흐르는 소설이 도대체 얼마 만이란 말인가. 이름난 서양 문학 고전들 가운데 과연 이만큼 재미있게 읽히는 소설이 있기나 할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저 딱딱하기만 한 주제들, 가령 '종교'와 '사상'과 '정치'와 '철학'까지 다루는 일부 작가들의 깊이있는 소설들, 단적인 예를 들자면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나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등에 비하면 『위대한 유산』은 얼마나 판이하게 다른가 싶은 생각도 자주 들었다. 왜 진작에 이런 재미있는 소설부터 읽지 못하고 애써 딱딱한 소설들을 읽느라 괜한 생고생을 했던가 싶은 생각 때문에 잠시나마 그런 작품들을 읽은 시간들이 원망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대략 150년쯤 전에 영국에서 쓰여진 소설이 이토록 내 마음속 깊이 숨겨져 있었던 숱한 추억들을 끊임없이 불러 일으킬 줄은 차마 몰랐다. 어린 주인공 핍이 시골에서 겪는 온갖 작은 에피소드들 틈바구니로 내가 실제로 겪었던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끊임없이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에 소설에서 눈을 떼기가 힘들 정도였다. 가난하고 어린 소년이었던 핍이 외딴 교회 묘지에서 우연히 맞닥뜨린 탈옥수를 돕는 과정에서나, 읍내에 사는 소문난 부자인 미스 헤비셤의 집을 방문하면서 겪는 온갖 사소한 장면들까지도 내게는 '또다른 나만의 옛 추억'을 끊임없이 불러내는 교묘한 실마리나 열쇠구멍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만큼 디킨스의 문장들은 어느 하나 강력하지 않은 게 없었다.

 

일자무식이던 시골 소년 핍이 미스 헤비셤의 저택에서 양녀처럼 살고 있는 도도하기 짝이 없는 또래 소녀인 예쁜 에스텔러를 만난 이후에 겪게 되는 '심리적 동요'는 어린 핍을 사정없이 뒤흔든다. 그게 결국은 '촌스럽다는 느낌으로부터 벗어나고픈 강렬한 열망'임을 깨달은 핍은 글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수소문한 끝에 읍내까지 먼 길을 오가면서 알파벳을 열심히 배운다. 이른바 '신사가 되고 싶은 열망'의 아주 작은 출발이었다. 대장간에서 하루 종일 쇳덩어리를 두드리며 연장을 만드는 일에 매달리는 착한 매형은 그런 핍을 얼른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힘껏 돕겠다고 거들지만 정작 자신이 그를 도울 능력이 없어 도리어 자책할 뿐이다.(나도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랄 때 '대장간에서 시뻘겋게 달궈진 쇳덩어리를 힘차게 두드리는 대장장이를 본 적이 있었다! 한적한 시골에선 그만큼 훌륭한 구경거리도 드물었다!)

 

장래의 희망이라고 해봐야 고작 매형으로부터 대장간 일을 부지런히 배워서 하루 빨리 매형을 도와줄 생각뿐일 정도로 소박하기만 한 어린 핍은 읍내 최고의 부자인 미스 헤비셤의 집을 들락거리면서 차츰 '새로운 세상'을 엿보게 되지만, 정작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놀라운 사건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엉뚱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혈육이라고는 생활력이 강하지만 억세고 사납기만 한 누나와 착한 매형이 전부인 어린 핍에게 '막대한 기대'를 품어도 좋을 만한 후원자의 대리인이 갑자기 시골에 찾아온 것이다. 후원자의 신분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고, '유산 상속'이 언제부터 개시될 것인지는 오로지 후원자의 판단에 달린 상태였다. 장차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을 때까지 핍에게 주어진 최우선 과제는 '유산 상속을 앞둔 귀한 신분'에 충분히 어울릴 만한 '신사 교육'부터 받는 일이었다.

 

가난한 어린 핍이 하루 아침에 막대한 유산 상속자로 돌변하게 되자 어린 핍을 핀잔 주거나 구박하기 바빴던 온갖 주위 사람들이 태도를 돌변하여 너나없이 칭송하기 바쁘고, 심지어 적잖은 나이 차이가 있는 매형까지도 핍을 '나으리'로 부르는 지경에 이른다. 어린 핍에겐 자신이 살던 마을과 읍내가 어느새 초라하게만 느껴지고, 대도시 런던으로 떠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새 양복까지 맞춰 입는다. '행복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더없이 소중한 존재인 매형 조와의 이별조차 대수롭잖게 여길 정도로 핍의 마음은 변한다. 착하디 착한 매형은 그런 핍에게조차 무한한 애정으로 감싸며 '기약없는 기나긴 이별'에 눈물을 흘리면서 오로지 핍의 성공만을 간절히 빌어준다.

 

고향을 떠나 런던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한 핍은 차츰 새로운 친구들을 여럿 사귀고 사교클럽을 드나들 정도로 변모하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행복한 시절을 보냈던 '어린 시절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과는 점점 멀어지고 만다. 어느덧 핍은 조금씩 분수가 넘을 정도로 사치에 빠져들면서 이내 빚까지 늘어나는 지경에 이른다. 어느덧 성년을 넘긴 나이에 접어든 핍은 '익명의 후원자'가 결국 미스 헤비셤일 거라고 확신하지만 그런 확신에 대해서는 어떤 근거도 찾지 못한 채 막연히 추측할 뿐이다. 후원자의 대리인이자 변호사인 재거스는 미스 헤비셤의 법률 대리인을 겸하지만 정작 '후원자'에 대해서는 어떤 질문도 허용치 않는다.

 

세월이 흘러 몰라보게 아름다운 아가씨로 성장한 에스텔러는 언제나 핍의 마음 한복판을 가득 차지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핍에게 냉랭하기만 하다. 언젠가부터 에스텔러는 런던으로 옮겨와 살지만 핍과 만나더라도 그의 연인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에스텔러를 향한 간절한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결코 그녀의 본심 때문이 아니라 '결혼식 당일 아침에 파혼을 당한 충격으로 평생 독신으로 지내는' 미스 헤비셤의 원한 서린 복수심 때문이라고 여긴 핍은 틈나는 대로 미스 헤비셤의 저택을 방문하고, 혼자서는 결코 풀 수 없는 그 '단단한 매듭'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 헤매지만 매번 헛수고에 그칠 뿐이다.

 

그러던 어느날 주인공 핍에게 매그위치라는 혐오스런 인물이 찾아 오는데... 자세히 살펴 보니 그 흉악하게 생긴 인물은 어린 시절 핍이 온갖 위험을 무릎쓰고 부엌에 남아 있는 음식을 누나 몰래 잔뜩 싸들고 늪지대까지 몰래 찾아가 도와줬던 바로 그 '굶주린 탈옥수'가 아닌가. 그 이후로 전개되는 놀라운 이야기들은 정말 숨가쁜 긴장과 짜릿한 흥분과 놀라운 반전의 연속으로 전개된다. 마치 어린 시절에 팔딱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읽었던 '셜록 홈즈 시리즈'를 다시 떠올릴 정도였다. 디킨스의 이야기 솜씨가 이토록 '대중적'이면서도, 각각의 인물들에 대한 성격과 행동 묘사에서 드러나는 '인간성에 대한 놀라운 통찰들'이 두루 함께 어우러질 수 있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하루 아침에 거대한 유산 상속자로 바뀌어 런던으로 훌쩍 떠난 이후로도 핍은 언제나 '조와 함께 보냈던 마냥 순수하고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들'을 결코 잊지 못하지만 그저 짧은 순간에만 그러할 뿐이다. 정작 자신의 필요에 따라 고향에 들를 기회가 가끔씩 생기더라도 핍은 읍내에서 머물 뿐 결코 매형네 집까지 찾지는 않는다. 이젠 대장장이로 일하는 매형이 그리 자랑스럽게 여겨지지 않을 뿐더러 자신의 신분과도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핍이 줄곧 '은혜를 모르고 배은망덕하게' 런던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조 가저리의 핍을 향한 고결한 우정은 결코 변치 않는다. 결국 먼 훗날 핍이 급격하게 몰락하고 심신마저 피폐해진 끝에 중병을 앓을 때가 되어서야 핍은 다시금 조의 따스한 보살핌을 받고 구제된다. 몹시 휘어지고 부서진 채 마치 먼 여행에서 맨발로 돌아오는 처량한 나그네처럼 딱한 신세에 빠진 핍을 기꺼이 맞아 준 사람도 조밖에 없었다. 핍이 조와 눈물겹게 재회하는 장면은 안타깝기 보다는 차라리 숭고하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핍이 고향을 떠난 이후로 아주 오랫동안 옛시절을 잊고 지내왔다고 하더라도 진정으로 핍이 가슴 깊이 간직했던 '소중한 가치'는 바로 거기서 다시 복원되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 맺어진 끈끈하고 순박하면서도 한없이 따스한 우정은 마크 트웨인의 소설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 나오는 헉과 짐의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우정과도 빼닮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디킨스의 풍요로운 작품 세계를 어찌 한 권의 장편소설로 다 헤아릴 수 있을까마는, 그가 풀어내는 이야기 솜씨가 얼마만큼 놀랍고 흥미로운지, 또한 등장 인물 각각에 대한 묘사가 얼마나 생생하면서도 위트와 재기가 넘치는 것인지는 『위대한 유산』만으로도 별로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 앞에서도 미리 살펴봤지만 이 작품이 찰스 디킨스의 '제1의' 작품이 아니라는 평가도 있는 만큼 어서 빨리 디킨스의 다른 작품들로 달려갈 마음도 굴뚝같다.

 

내가 두 번째로 읽고픈 디킨스의 작품은 아무래도 『데이비드 코퍼필드』가 되지 싶은데(아차, 이 글을 올릴까 말까 주저하는 사이에 벌써 이 책을 110쪽 넘게 읽었다.), 책을 구입하고 보니 이 소설의 분량이 그리 만만치 않다. 작품해설까지 포함하면 무려 1,118쪽에 이르는데, 책의 말미에 딸린 104쪽 분량의 「찰스 디킨스의 생애와 문학」를 먼저 읽어 보니 작가에 대한 기대가 더욱 부풀어 오른다.

 

디킨스는 몹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로도 유명하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큰 빚을 지는 바람에 학교조차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가족들은 점점 더 런던 외곽으로 밀려나 지저분하고 헐벗은 아이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에서 비참한 생활을 이어갔다. 12세부터는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쥐들이 우글거리는 구두약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채무 때문에 수감되는 바람에 다섯 가족들이 다함께 감옥에서 동거하며 지낼 만큼 형편이 어려웠다. 따로 떨어져 나와 공장에서 일하던 디킨스는 일요일만 되면 6마일을 걸어 감옥에 들어가 부모님과 형제자매들과 만나 시름을 달래며 하루를 보냈다.

 

아버지가 감옥에서 풀려나고 잠시 생활이 나아지자 디킨스는 2년 정도 학교를 다녔다. 그 뒤 다시 가족들과 아는 사이였던 어느 변호사 사무실에서 말단 사무원으로 일하게 되고, 18세가 되면서 독학으로 속기를 배운 덕분에 재판소에서 자유계약 속기사로 일하고, 20세에 드디어 국회 신문기자석에 저널리스트로 데뷔하기에 이른다. 이듬해 의회의 휴회 기간에 처음으로 잡지에 자신의 이야기가 실리자 그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린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홀까지 걸어가서 안에 들어가 30분쯤 그곳에 있었다. 넘치는 기쁨과 자랑스러움으로 눈에 눈물이 글썽해져서 길거리에는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23세의 나이로 완전히 자립하여 유능한 기자로 높은 평판을 얻은 그는 잡지에 고정 연재물을 기고하게 되면서 차츰 전문적인 작가의 길로 나서기 시작하는데, 24세에 발표한 『피크윅 페이퍼즈』와 25세에 발표한 『올리버 트위스트』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디킨스는 일찌기 25세의 나이에 '불꽃처럼' 드높은 명성을 향해서 불쑥 솟아오른 끝에 그 인기를 한평생 동안 누리게 된다. 인물을 창조하는 작가의 비범한 재능을 알아본 비평가들은 이내 그를 셰익스피어나 월터 스콧 경과 같은 대작가에 비견하게 되었다.

 

디킨스는 이제는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런던 사교계에서 추앙 받았고, 특권 신사들의 클럽, 즉 개릭 클럽과 애서니엄 클럽 회원이 되어(찰스 다윈과 동시에 애서니엄 회원이 되었다), 공공장소에서 연설을 하는 일도 많아졌다. 1841년 에든버러 시민들이 디킨스에게 경의를 표하고 만찬회를 열어, 그를 에든버러 명예시민으로 추대했다 ㅡ 20대 청년에게 이것은 '더없이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디킨스는 그 일을 돌이키며, '내가 처음으로 받은 공식 표창이어서 아주 감격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는 그 무렵 문단 명사들과 만나 우정을 나누었다. …… 디킨스의 '품위 없는' 큰 웃음소리와 한껏 멋을 부린 차림새에 이맛살을 찌푸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의 날카로운 지성을 높이 평가한 사람은 더 많았다. 역사가 토마스 칼라일은 그를 처음 보고 나서 '섬세하고 몸집이 작은 사내'라고 썼다. '더없이 재주 많은 얼굴을 하고 있다. …… 조용하고, 예민해 보이는 작은 사내로, 자신의 본질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본질도 매우 잘 알고 있는 듯이 보인다.'(1042쪽)

 

 - 『데이비드 코퍼필드』, <찰스 디킨스의 생애와 문학> 중에서

 

이후로 디킨스가 어떤 작품들로 얼마나 더 많은 독자들을 더욱 매료시켰고, 당대를 주름잡던 수많은 작가들로부터 얼마나 훌륭한 평가를 더 얻게 되었는지, 혹은 그의 작품들이 지닌 '문학적 가치'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어떤 변천을 겪었는지를 더 언급하는 건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굳이 여기서 그의 문학과 삶을 평가하는 빼놓지 말아야 할 사실이 더 남아 있다면 그건 바로 그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일 것이다.

 

내가 『위대한 유산』다음으로 읽고 싶은 있는 작품은 『데이비드 코퍼필드』인데, 여러 다른 책들에서 이 소설이 언급될 때마다 나중에 꼭 한번 읽어 보리라 마음먹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작가 스스로도 '가장 사랑하는 내 아이'라고 부를 만큼 사랑했고, 서머싯 몸이 '세계 10대 소설'로 꼽았을 정도로 높은 평판을 얻었지만 '방대한 분량' 때문인지 명성만큼 그리 많이 읽히지는 않는 듯하다.

 

오랫동안 그저 작가의 이름과 작품의 제목만 알았던 책들을 감명깊게 읽고 나면 괜히 뿌듯한 느낌마저 든다. 아직도 많은 작가와 작품들이 내게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지만, 『위대한 유산』을 통해 뒤늦게나마 찰스 디킨스라는 탁월한 작가를 만난 것만 하더라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앞으로 여러 날을 그의 작품과 함께 울고 웃으며 지낼 수 있으리라는 상상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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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3-10 0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위대한 유산」의 영어 원제가 왜 「Great Expectation」인지 oren님 리뷰로 알게 되었습니다^^:)

oren 2018-03-10 13:10   좋아요 1 | URL
작품의 원제인 Great Expectation의 정확한 뜻은 ‘큰 재산을 얻거나 물려받을 가능성이나 기대‘일 테죠. 그래서 ‘위대한 유산‘이라는 번역 제목은 원래의 뜻을 정확히 옮긴 것이라고 할 수 없는데, 이걸 ‘막대한 기대‘ 또는 ‘막대한 유산‘으로 번역하더라도 원작이 지닌 제목의 뜻이나 뉘앙스와는 너무 달라져 곤란한 점이 있겠더라구요. 책을 다 읽어본 뒤라야 저렇게 번역한 역자의 고충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겠더군요.
 
돈키호테 성찰 을유세계문학전집 90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신정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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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가 주는 긴장감은 결코 감소하지 않는다

 

나는 리얼리즘에 관한 한 플로베르는 일말의 의혹도 가지지 않았던 작가이며, 그 누구보다 적합한 증인으로 인정받을 것이라고 믿는다.

 

만일 현대 소설이 자기의 희극적 장치를 밖으로 덜 드러내고 있다면 그것은 소설에 의해 공격받고 있는 이상이 자신이 맞서고 있는 현실로부터 거의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긴장은 매우 느슨하다. 즉 이상은 아주 낮은 높이에서 떨어진다. 따라서 19세기 소설은 얼마 가지 않아 읽기 힘들어질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것은 최소한도의 시적 역동성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알퐁스 도데나 모파상의 작품이 우리 손에 "굴러 들어올 때" 불과 15년 전에 느낄 수 있었던 즐거움을 맛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게 된다. 그러나 『돈키호테』가 주는 긴장감은 결코 감소하지 않는다.(188∼189쪽)

 

 

 

리얼리즘을 증오하기 때문

 

19세기의 이상은 리얼리즘이었다. "팩트, 오로지 팩트만이 중요해"라고 찰스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에 나오는 주인공은 외친다. 콩트는 '왜'가 아니라 '어떻게'를, 관념이 아니라 팩트를 주창한다. 보바리 부인은 M.오메와 같은 공기, 즉 콩트 철학의 분위기를 호흡한다. 플로베르는 소설을 쓰는 동안 『실증 철학 강좌』를 읽고 나서 이렇게 쓴다.

 

"이 작품은 매우 심오한 광대극이다. 이를 납득하려면 작품이 요약된 서문만 읽어 보면 된다. 여기에는 사회 이론에 대한 아리스토파네스적 취향을 통해 연극을 공격하는 사람을 웃게 만드는 샘물이 있기 때문이다."

 

현실은 워낙 난폭한 성정을 가지고 있어서 설령 자기 자신이 이상화될지라도 이상적인 것을 참지 못한다. 또한 19세기는 영웅적인 방식으로 모든 영웅주의에 반기를 드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실증주의를 선포하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이런 노력이 다시 한 번 현실의 가혹한 시련을 통과하도록 했다. 이와 관련해 플로베르는 굉장히 뼈대 있는 말을 흘린다."사람들은 내가 사실적인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나는 그것을 증오한다. 내가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도 리얼리즘을 증오하기 때문이다."(189∼190쪽)

 

 

 

핍진성 비판

 

19세기 초반 몇십 년 동안의 생물학 분야는 결정론에 기반을 둔 자연 과학에 의해 정복당했다. 다윈은 우리의 마지막 희망줄이었던 '생기(lo vitl)'를 물리적 필연성 내에 가두는 데 성공했다고 믿었다. 생명은 이제 물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생리학은 기계 역학으로 축소된다.

 

스스로 활동하면서 독립적인 개체처럼 보였던 인체는 마치 태피스트리 그림 속의 인물과 마찬가지로 물리적인 환경 속의 부속물로 편입된다. 이제 활동하는 것은 인체가 아니라 인체 내의 환경이다. 우리의 행위는 타율적인 반작용일 뿐이다. 자유도 없고, 고유성도 사라진다. 여기서 산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환경에 적응시킨다는 뜻이다. 적응한다는 말은 물질적 환경이 우리 내부를 꿰뚫고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를 떼어 놓는 것을 방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응은 순응이며 굴복이다. 다윈은 지구상에서 영웅들을 쫓아냈다.

 

이와 함께 '실험 소설'의 시간이 도래한다. 에밀 졸라는 호메로스나 셰익스피어가 아니라 클로드 베르나르에게서 시를 배웠다. 베르나르는 항상 사람에 대해 우리에게 얘기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이제 사람은 자기 행위의 주체가 아니라 자기가 사는 환경의 지배를 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소설은 환경을 재현하는 길을 모색한다. 환경이야말로 소설의 유일한 주인공이 된다.

 

사람들은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고 말한다. 예술은 이제 한 가지 규칙에만 복종한다. 그것은 핍진성(逼眞性, verisimilitude)이다. 그렇다면 비극에는 내부적으로 그 같은 독립적인 핍진성이 없다는 말인가? 비극에는 미적인 진리(vero)도 없고 아름다움과의 유사성(similitude)도 없는가? 실증주의에 따르면 그 대답은 "없다"이다. 아름다움이란 핍진성이 있다는 말이고, 진실한 것은 오로지 물리학에만 존재한다. 이제 소설은 생리학을 추구한다.

 

어느 날 밤 부바르와 페퀴셰는 페르 라셰즈 묘지에서 핍진성과 결정론에 모든 영광을 바치면서 시를 매장한다.(190∼191쪽)

 

 

 

불충분하면서도 명료한 것

 

훌리안 마리아스는 지금까지 전개된 철학적 논의가 이제부터 논의될 세르반테스의 작품을 위한 준비였다고 말한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돈키호테』를 이해하는 동시에 그것이 다루고 있는 철학적 문제를 깨우치려 한다. "풍자적인 어투의 이 변변찮은 소설"은 동시에 심층적 의미가 있는 책이다. 따라서 전형적인 심층성이 있는 예술 작품으로서 『돈키호테』는 실재의 '깨침'이고 섬광과도 같이 삶을 명료하게 해준다. 그 내용은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삶에 대해 무엇을 '암시'하는가? "우리에게 말없이 진리를 가르쳐 주려는 사람은 그냥 간단한 몸짓으로 그것을 암시한다." 예술 작품에서는 특히 이 원칙이 중요하다. 그 때문에 주석이나 해석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반면에 "민족주의적 감성을 통해 이 작품에 쏟아졌던 모든 찬사들"이나 "세르반테스의 생애에 대한 모든 현학적인 연구들"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셸링, 하이네, 투르게네프 등 외국의 문호들에 의한 "순간적이고 불충분한" 생각이 '깨달음'을 준다. 뛰어난 정신세계를 가진 인물들이 세르반테스의 소설을 읽고 촌철살인의 글을 남긴 예는 많다. 예를 들면 1837년의 『돈키호테』독일어 번역본에 실린 하이네의 서문이 있고, 셸링이 『예술 철학』(1859)에 남긴 명철한 고찰이 있다. 1802년에 셸링이 쓴 글에 의하면 지금까지 두 개의 소설만 있는데, 세르밭네스의 『돈키호테』와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가 그것이다. 돈키호테와 산초는 '신화적 인물'이 되었고 풍차의 모험 이야기는 '진정한 신화'이자 신화적 전설이 되었다. 『돈키호테』를 '풍자'로 해석한 뛰어난 비평과, 이 작품을 두 부부능로 날카롭게 구별한 작업을 보자. 이들에게 『돈키호테』는 "신성한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우리처럼 운명의 문제는 아니었다"는 점에서 그 글들은 불충분하면서도 명료한 것이다.(268∼269쪽)

 

 

 

돈키호테는 근대적 고뇌에 사로잡힌 고독한 그리스도의 슬픈 패러디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이 책에서 『돈키호테』가 아니라 돈키호테 주의를 다룬다고 말한다. 즉 이 책은 『돈키호테』의 해설이나 분석이 아닌 돈키호테주의를 보여 주려고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돈키호테를 창조한 세르반테스주의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르테가에게 돈키호테는 근대적 고뇌에 사로잡힌 고독한 그리스도의 슬픈 패러디다. 그리고 "과거의 사상적 빈곤, 현재의 천박함 그리고 미래의 신랄한 적대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스페인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을 때마다 그들 사이로 돈키호테가 강림한다"고 말한다. 훌리안 마리아스의 해설대로, 이 문장은 작가가 스페인의 환경이라는 시점에서 이 책의 주제를 정당화하는 말이다. 스페인 사람들이 공유하는 연결 고리이자 스페인이 맞을 운명의 열쇠인 돈키호테를 통해 사람들이 자신의 환경을 이해하는 동시에 새로운 스페인을 모색한다는 것이다. 오르테가는 스페인이라는 '상황'에서 세르반테스가 어떻게 사물에 접근하고, 그것을 심화시키는 새로운 방법으로서 문체를 창조했는지 연구한다. 이는 『돈키호테』가 피상적이라는 편견을 깨고 '소설로서의 심층'을 보여 줌으로써 스페인에 고질적으로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받아 온 개념을 정립하려는 노력이다. 따라서 『돈키호테 성찰』에서 『돈키호테』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며,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대상이 된다. 또한 이 작품은 세르반테스 시대의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명료하게 보기 위한 것이다.(349∼350쪽)

 

 - 「해설」, <돈키호테에게 스페인의 길을 묻다> 중에서

 

 

 

오르테가는 돈키호테에 스페인의 운명을 투사한다.

 

오르테가는 예술의 본질적인 주제는 인간이며, 궁극적인 미학적 주제라 할 수 있는 장르는 인간성의 흐름을 포착하는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특정 시대는 인간에 대한 특정 해석을 낳으며 특정 장르를 선호하게 된다. 따라서 오르테가에 의하면, 문학 장르는 그 시대의 감수성을 표현하며 그 시대의 운명이다. 이렇게 본다면 소설은 서사시라는 장르와 상반된다. 서사시의 주제는 연대기적 시간, 즉 현재와 연결되는 시간이 아니라 관념화된 '절대 시간'이다. 그러므로 서사시적 영웅 역시 시간을 초월한 폐쇄적이고 관념적인 과거에 속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이 점차 합리적인 사고를 하면서 자신의 기반이 되었던 세계관이 무너지자 서사시는 신화를 버리고 새롭게 방향 설정을 하는데, 여기서 탄생한 것이 모험을 찾아 나서는 중세의 기사도 이야기이다. 오르테가가 "서사시라는 고목 줄기에서 마지막으로 피어난 위대한 싹"이라고 표현한 기사도 이야기 작가에게 최대의 관심사는 흥미로운 모험담을 만들어 내는 것, 즉 스토리텔링이었다. 하지만 서사시나 기사도 이야기와 달리 소설은 더 이상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대신 소설은 그것이 말해지는 방식에 더 비중을 둔다. 즉 소설은 내용보다는 형식을,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를 더 중시하고, 과거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기술하는 근대의 발명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글쓰기 자체를 주제로 삼은 『돈키호테』는 최초의 근대소설이다.

 

오르테가는 계속해서 서사시, 비극, 희극, 희비극 그리고 소설 장르를 통해 영웅의 의미를 고찰한다. 근대 이후의 영웅은 서사시의 초인적인 영웅이나 비극의 고결한 영웅과는 달리, 주어진 현실에 저항하고 그것을 변혁시키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다. 오르테가의 말대로 영웅은 "관습이나 전통, 한마디로 말해 생물학적 본능이 강요하는 행동 방식을 반복하는 것을 거부"한다.그는 자신에게 부과된 환경을 이겨 내고 유일무이한 '자기 자신'이 되려는 염원을 가진 자이다. 따라서 영웅은 환경과 싸우면서 세계를 의미화한다. 그러나 현실은 영웅을 속물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으로 축소하여 희극적 인물로 전락시키려 한다. 서사시적 세계와 달리 누구든 내면에 영웅의 잔재를 품고 있는 인간의 삶은 불투명한 미래에도 불구하고 이에 맞서 싸우는 투쟁의 연속이다. 이런 의미에서 돈키호테는 새롭게 탄생한 근대의 영웅이다. 그는 피상적이고 표층적인 근대적 인식론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괴물인 풍차를 향해 돌격하고 마에세 페드로의 인형들가 싸운다. 비록 놀림의 대상이 되는 비극적 삶이지만 그는 자신을 둘러싼 물질성과 속물성에 맞서 이상을 찾고, 근대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심층의 세계를 살아간다. 그는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이지 않고 모험에 뛰어들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진정한 '나'가 된다. 오르테가는 돈키호테에 스페인의 운명을 투사한다.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자신의 세계를 만든 돈키호테처럼, 세이렌이 유혹하는 치명적인 과거의 노랫소리에 맞서, 그리고 지구상에서 영웅들을 멸종시키고 삶을 한낱 사물로 축소시켜 버린 다윈의 결정론에 맞서 스페인이 역사의 전설을 힘차게 부르길 소망하는 것이다. 근대성을 재흡수하는 이 지점에서 새로운 스페인의 설계는 시작될 것이다.(352∼354쪽)

 

 

 

니체 이후 유럽 최고의 작가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훌륭한 철학자이지만 위대한 교사는 아니라는 말이 있다. 그 글을 이해하기 힘든 엘리트 철학자라는 의미이다. 게다가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도움을 받아 내전에서 승리한 프랑코 정권 치하에 귀국하여 침묵을 지켰다는 이유로 그의 사상은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폄하되었다.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신체적으로 병환에 시달린 오르테가는 이러한 정치적 배경 때문에 더욱 불운한 말년을 보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뛰어난 철학자이자 작가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또한 프랑코 사후에 제정된 1978년의 스페인 민주 헌법이 오르테가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오르테가의 사상은 조국인 스페인에서보다 국제적으로 더 명성을 떨쳤으며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알베르 카뮈 등의 위대한 작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카뮈는 오르테가에 매료되어 『돈키호테 성찰』과 『대중의 반역』을 필독서로 꼽았고, 그를 "니체 이후 유럽 최고의 작가일 것이다"라고 극찬한다. 멕시코의 힐 비예가스(Gil Villegas)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은 오르테가와 루카치를 하이데거의 선구자로 간주하기도 한다. 또한 오르테가와 평생 인간적·학문적으로 가까웠던 쿠르티우스 역시 오르테가를 높이 평가하면서 독일 문화와 프랑스 문화를 조화시키고 보완하여 확장시킨 독창성에 그의 업적이 있다고 평가한다. 이 밖에 오르테가가 라틴아메리카의 지성계에 끼친 영향도 지대해서 옥타비오 파스, 엔리케스 우레냐(1884∼1946), 카르펜티에르(Alejo Carpentier, 1904∼1980) 등 대륙 최고의 지식인들은 오르테가의 글이 자신들에게 지적인 환경이 되어 왔다는 헌사를 바친다. 이는 오르테가가 20세기 전반기 스페인어권을 대표하는 사상가였다는 점을 재확인시킨다.(354∼3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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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긋기)

 

마치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음악을 들려주는 오페라 대본과 같은 것

 

우리가 그리스 비극에 지나친 관심을 두는 일은 피하자.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인문학조차도 그리스 비극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이해력을 우리에게 전수하지 못했다. 아마 그리스 비극만큼 순전히 역사적이면서도 중립적인 주제들이 뒤섞인 작품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우리는 비극이 당시 아테네에서 종교 의례였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비극 작품은 무대 위보다는 관객들의 마음속에서 더 생생하게 실현되었다. 당시에는 문학 외적인 면, 즉 종교적 분위기가 무대와 관객을 사로잡았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는 것은 마치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음악을 들려주는 오페라 대본과 같은 것이다. 혹은 종교적 주제의 그림이 있는 테피스트리에서 다양한 색깔의 실만 있는 뒷면만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지금 고대 그리스를 전공하는 학자들은 아테네인들의 신앙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으므로 그것을 재구성하는 일을 해낼 수가 없다. 만일 그것을 못해 낸다면 그리스 비극은 사전도 없는 외국어로 쓰인 책과 다름없을 것이다.(173∼174쪽)

 

 

 

신학 시인(神學詩人, teopoet)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 비극 시인들이 영웅들의 가면을 쓰고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말을 붙인다는 점이다. 셰익스피어는 언제 이렇게 하는가? 아이스킬로스는 시학과 신학 사이의 모호한 의도를 가지고 작품을 쓴다. 그가 다루는 방대한 주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을 고르라면 미학적, 형이상학적 그리고 윤리적인 것이 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신학 시인(神學詩人, teopoet)이라 부르고 싶다. 그를 고뇌에 빠지게 했던 문제들로는 선과 악, 자유, 정의, 우주의 질서, 만물의 원인 등이 있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은 이러한 초월적인 문제들을 점진적으로 다루기 위한 시리즈였다. 따라서 그의 영감은 차라리 종교 개혁의 추동과 비슷해 보인다. 그리고 그는 글 쓰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사도 바울이나 루터 쪽을 더 닮았다. 그는 믿음을 통해 민중 종교를 극복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민중 종교란 한 시대가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이었다면 이러한 충동이 시를 쓰는 쪽으로 이끌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에서는 종교가 사제의 영향을 덜 받는 반면에 환경의 영향을 더 받고 더 유연했기 때문에 신학적 관심이 시적, 정치적 그리고 철학적 관심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조명받을 수 있었다.(174∼175쪽)

 

 

 

영웅이 비극적 운명을 겪는 것도 스스로가 원해서이다

 

나는 고전적인 이론들이야말로 지나친 단순화의 희생물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영웅들의 행위를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일반 관객들의 마음속에 영웅주의가 불어넣은 효과를 이용해 그 이론들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척 화려하지만 실속은 없는 행위들만 일어나는 그러한 층위의 삶을 보통 사람은 알 수가 없다. 그는 생기 넘치고 충만한 상태도 알지 못한다. 그는 필요한 일만 하고 근근이 살아가면서 남들이 억지로 시킬 때만 행동에 나선다. 그는 항상 떠밀려 살고 있으며, 그의 행위는 반사 작용일 뿐이다. 그는 자기 관심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경우에 따라선 나서야 한다는 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그에게는 모험의 의지가 가득한 사람이 미친 사람처럼 보이고, 비극의 주인공은 아무도 시키지 않았던 일의 후유증을 겪으며 사서 고생하는 사람일 뿐이다.

 

결국 비극의 기원은 숙명과는 거리가 멀고, 영웅이 비극적 운명을 겪는 것도 스스로가 원해서이다. 그러므로 무위도식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비극의 인물들은 언제나 허구적이다. 모든 고통은 영웅이 관념적 역할, 즉 자신이 선택한 상상의 임무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말하면, 하나의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가 또 다른 배역을 맡아 연기하면서 나중의 배역을 더 진지하게 연기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할 수 있다. 어찌 되었든 전적인 자유 의지는 비극적 과정의 근원이 되어 사건을 진행시킨다. 이러한 '의지의 행위'는 그것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일련의 새로운 실재들, 즉 비극적 질서를 창조한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기본 욕구 외에는 더 바라는 게 없고 그 욕구란 것도 그냥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사람들에게는 이 '의지의 행위'가 당연히 허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176∼177쪽)

 

 

 

눈을 높여야 하고 고양되어야 한다

 

비극은 우리의 일상 수준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우리는 거기에 맞춰 눈을 높여야 하고 고양되어야 한다. 그것은 비현실적이다. 만일 현존하는 것 가운데 비슷한 것을 찾으려면 우리는 눈을 들어 역사의 가장 높은 봉우리들을 봐야 한다.(178쪽)

 

 

 

우리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평범성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야심에 찬 사람이기 때문

 

비극은 위대한 행위를 지향한다는 점이 우리 마음에 전제되어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허세일 뿐이다. 비극은 바로 우리 발밑에서 작품을 시작하게 하여 부지불식간에 우리를 수동적으로 작품 속에 끌고 들어가는 리얼리즘의 명료성과 핍진성을 부과하지 않는다. 마치 영웅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운명으로 택하듯, 비극을 즐기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어느 정도 그것을 원해야 한다. 그럴 때 그것은 우리에게 위축된 형태로나마 남아 있던 영웅성을 사로잡으러 온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내면적으로 조금씩 영웅의 잔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단 영웅의 행보에 올라타기만 하면, 우리는 비극을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힘과 상승 충동이 내면 깊은 곳에서 고동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 역시 초인적인 긴장을 걸머지고 영웅처럼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고, 주위의 모든 것이 거대해지면서 한층 고결한 존엄성을 띠게 되는 것을 놀라움 속에서 발견할 것이다. 무대 위의 비극은 현실 속의 영웅을 발견하고 경탄하게끔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준다. 그렇기에 사람의 심리를 조금 알았던 나폴레옹은 프랑크푸르트에 머물고 있을 때 자신의 진중 극단이 항복한 여러 국왕 앞에서 희극을 공연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탈마로 하여금 라신과 코르네유 비극의 주인공만 연기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내면에 품고 있는 영웅의 흔적 주위에는 천박한 본능을 가진 무리들이 배회하며 소동을 일으킨다. 우리는 새로운 길을 내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 본능적으로 커다란 불신을 품는다. 우리는 누가 세속적 차원을 넘어서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러나 반대로 세속을 초월하려 하는 대담한 사람에게는 단호하게 그 이유를 따지고 나선다. 우리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평범성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야심에 찬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웅의 길은 이렇게 야심을 품으면서 시작되는 것이다. 아무리 천박한 사람도 잘난 사람보다 우리를 화게 하는 일은 없다. 그러니까 영웅이 직면한 위험은 불행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 불행은 딛고 일어서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숭고함과 웃음거리는 백지 한 장 차이다"라는 경구는 영웅을 진정으로 위협하는 위험이 무엇인지를 표현하는 말이다. 영웅이 넘치는 위대함과 최고의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되는대로 생겨 먹은" 보통 사람들처럼 되기 싫다는 자신의 우월성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면 그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새로운 예술, 새로운 과학, 새로운 정치를 시험하는 개혁가는 평생을 적대적이고 부패한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이 환경은 영웅에게 사기꾼은 아니라 할지라도 허깨비 같은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환경, 즉 전통, 통념, 관습, 기성세대의 방식, 민족적 풍습, 전형 등 한마디로 말해 광범위하게 형성된 타성을 거부할 때 영웅이 된다. 이 모든 것은 오랜 세월 켜켜이 쌓여 땅속 깊은 지각을 형성하고 있다. 영웅은 생각을 통해 두껍고 부담되는 이 단층을 폭파시켜야 한다. 불현듯 그의 환상 속에 나타난 이 생각은 공기 입자보다도 가벼운 미립자이다. 타성과 자기 보존의 본능은 그것을 참을 수 없어 복수에 나선다. 이리하여 그 대항마로서 리얼리즘을 보내고 영웅을 우스꽝스럽게 포장해 버린다.

 

영웅의 면모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존재가 되려고 하는 의지에서 볼 수 있다. 따라서 비극적 인간은 그 몸의 반이 현실 바깥으로 나가 있다. 그러므로 그의 발을 잡아 그 몸 전체를 현실로 돌려보내는 것만으로 그는 희극적 인물로 전락한다. 고귀한 영웅의 이야기는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으며 어렵사리 현실 세계의 타성을 딛고 일어난다. 그것은 포부를 통해 영위되며, 미래는 그것을 증거하게 된다. 희극성(vis comica)은 영웅의 순수한 물질적 측면만 강조할 뿐이다. 현실은 픽션을 통해 전개되고 자기 존재를 우리에게 부과하면서 비극적 역할을 재흡수한다.

 

영웅은 이 역할을 자기 일부로 받아들이고 아예 자신을 그것과 섞어 버린다. 그리고 영웅은 현실에 의해 재흡수되면서 그의 야심찬 의도는 자신의 몸에 굳어지고 물질화된다. 결국 우리는 그의 역할을 우스꽝스러운 변장, 즉 천박한 존재가 쓰고 다니는 가면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179∼181쪽)

 

 

 

희극은 비극을 딛고 살아간다

 

영웅은 시대를 앞서가면서 미래에 기대를 건다. 그의 태도는 유토피아적 의미를 갖는다. 그는 지금의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하지 않고 앞으로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말한다. 그래서 여성 페미니즘 운동가는 여자들이 더 이상 페미니스트가 될 필요가 없을 그날을 희구한다. 그러나 희극 작가는 페미니스트들의 이상 대신 현재 그 이상을 실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근대 여성을 내세운다. 미래의 환경을 전제하고 만들어진 어떤 것이 현재에 얼어붙어 주춤거릴 때 그것은 가장 사소한 생존 기능조차 잃어버리게 되고, 이를 보는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사람들은 날아가던 관념의 새가 썩은 물이 내뿜는 독기를 맡고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며 웃음을 터뜨린다. 그것은 유익한 웃음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영웅 한 명에게 상처를 줄 때마다 백명의 사기꾼들을 징벌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소설이 서사시를 딛고 살아가는 것처럼, 희극은 비극을 딛고 살아간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볼 때, 희극은 고대 그리스에서 새로운 신들을 도입하고 새로운 관습을 만들어 내려는 비극 작가와 철학자들에 대한 반작용으로 태어났다. 아리스토파네스는 민중 전통의 이름으로, '우리 선조들'의 이름으로 그리고 성스러운 관습의 이름으로 소크라테스와 에우리피데스의 인물들을 무대 위에 올렸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철학에, 에우리피데스가 문학 작품에 담았던 내용을 같은 이름의 두 등장인물에게 반영한다.(181∼182쪽)

 

 

 

비극에서 희극으로 가는 사이의 거리

 

희극은 보수적인 사람들의 문학 장르이다.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 상태와 이미 되어 있다고 믿는 상태 사이의 거리가 비극에서 희극으로 가는 사이의 거리이다. 그것은 숭고미와 익살미 사이의 통로이다. 영웅 캐릭터가 의지의 단계에서 지각의 단계로 이행하면서 비극이 퇴화하고 붕괴한 결과인 희극의 등장을 야기한다. 신기루는 그냥 신기루로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돈키호테에게도 일어나는데, 모험의 의지를 천명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돈키호테가 스스로를 모험가라고 굳게 확신할 때이다. 불멸의 소설은 단순한 희극으로 전락할 지경에 처한다. 앞서 말했듯이, 소설과 순수한 희극은 단지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다.

 

『돈키호테』를 처음 읽은 독자들에게는 이런 형태의 소설이 새로운 문학 형식으로 비쳤을 것이다. 아베야네다판 서문에서 작가는 두 번에 걸쳐 이와 관련된 언급을 한다. 서문 첫머리에서 "『돈키호테』는 작품 전체가 희극이나 마찬가지다"라고 말하는 아베야네다는 계속해서 이렇게 덧붙인다. "세르반테스는 『갈라테아』와 산문 희극들만으로 만족하는 것이 좋으리라. 그가 쓴 소설이라곤 이것들이 거의 유일하니까 말이다." 세르반테스 시대의 모든 극작품을 지칭하는 장르의 이름이 희극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사실 이 문장들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182∼183쪽)

 

 

 

 

플라톤이 여기서 소설의 씨앗을 뿌렸다는 것

 

소설의 상위 레벨은 비극이다. 음악의 여신 뮤즈는 희극으로 전락하는 비극성을 따라 비극으로부터 하강한다. 이러한 비극적 행로는 불가피한 것이다. 비극은 소설의 일부를 형성해야 한다. 설사 그 경계를 이루는 것이 섬세한 테두리선에 지나지 않더라도 말이다. 따라서 나는 페르단도 데 로하스가 『셀레스티나』를 쓰면서 불렀던 희비극이라는 이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은 희비극이다. 이 장르의 발전은 『셀레스티나』에 와서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고, 마침내 『돈키호테』에 이르러서야 숙성되어 만개한다.

 

물론 비극적 요소는 크게 확장되면서 심지어 희극적 부분과 대등한 정도의 공간과 가치를 소설 내에서 차지하기에 이를 것이다. 그것이 차지하는 정도와 변동의 폭은 정해진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이 가능하다.

 

비극과 희극의 종합으로서 소설은 언젠가 플라톤이 특별한 해석 없이 암시했던 신기한 희망이 실현된 결과이다. 그것은 이른 새벽의 향연에서였다. 디오니소스의 액체에 잔뜩 취한 손님들이 무질서하게 잠들어 있다. 아리스토데모스가 "아침 닭이 울 때" 몽롱한 상태로 잠에서 깨어 보니 소크라테스, 아가톤 그리고 아리스토파네스는 뜬눈으로 밤을 새운 것 같다. 그는 이들이 어려운 주제의 대화에 빠져 있는 소리를 들었다고 믿는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젊은 비극 작가인 아가톤과 희극 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에 꼿꼿이 맞서 비극과 희극의 시인은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이 대목에 대해서는 만족스러운 해석이 없었다. 그러나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독창적인 영혼을 가진 플라톤이 여기서 소설의 씨앗을 뿌렸다는 것이다. 희미한 여명 속에 소크라테스가 향연에서 취했던 태도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영웅이자 광인이었던 돈키호테와 마주칠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185∼186쪽)

 

 

 

『일리아스』와 『돈키호테』

 

스페인 사상에서 애국으로 통했던 것이 결과적으로 해 놓은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정작 스페인이 이룬 위대한 업적들에 대해서는 충분한 연구가 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서 명백해진다. 별로 칭찬받을 만한 것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열광적인 찬사가 쏟아지고, 정작 모든 에너지를 바쳐 찬사를 보내야 할 곳에는 그러한 반응이 전혀 없는 것이다.

 

모든 서사시가 안으로는 마치 과일의 씨처럼 『일리아스』를 품고 있는 것처럼, 모든 소설 역시 안으로는 종이의 줄무늬 세공처럼 『돈키호테』를 품고 있다는 것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는 책이 아직까지 없다.(187쪽)

 

 

 

치마 입은 돈키호테

 

플로베르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책 읽는 법조차 몰랐지만 이미 가슴으로 알고 있던 『돈키호테』에서 나의 모든 근원을 발견했다." 보바리 부인은 영혼에 최소한의 비극성을 지니고 있는 치마 입은 돈키호테이다. 보바리 부인은 낭만주의 소설의 독자이면서 반세기 이상 유럽을 떠돌았던 부르주아적 이상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가련한 이상이여! 부질없는 부르주아적 민주주의여, 실증주의적 낭만주의여!

 

플로베르는 소설 예술이 비판적 의도와 희극적 동력을 가진 장르임을 완벽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보바리 부인』을 집필할 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비판을 지향한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은 나의 능력을 더욱 붇돋아 준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무엇보다도 비판적이고 더 나아가 해부학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 다른 대목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아! 근대 사회에 부족한 것은 그리스도도, 워싱턴도, 소크라테스도, 볼테르도 아니라 바로 아리스토파네스이다."(187∼1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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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성찰 을유세계문학전집 90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신정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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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긋기)

 

이것이 인생이야? 이것밖에 안 되는 거야?

 

모험담은 억압적이고 견고한 현실을 유리처럼 깨 버린다. 그것은 예기치 않은 것이고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며 새로운 것이다. 각각의 모험은 세계가 새롭게 태어나는 것으로서 유일무이한 과정이다. 그러니 어찌 흥미롭지 않겠는가?

 

우리는 삶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도 않아 우리가 갇혀 있는 감옥의 경계를 인식하게 된다. 우리의 가능성들이 운신할 수 있는 경계의 폭을 깨닫는 데에는 아무리 늦어도 30년이면 된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이 실재를 평가하는데, 그것은 마치 우리 발에 매여 있는 줄의 길이가 몇 미터인지 재 보는 것과 같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인생이야? 이것밖에 안 되는 거야? 항상 똑같이 반복되는 쳇바퀴인 거야?" 바로 여기에 모든 사람에 대한 위험한 시간이 도사린다.

 

이 대목에서 가바르니의 재미있는 그림이 생각난다. 그것은 조그만 구멍을 통해 세계를 보여 주는 만화경 옆에 서 있는 교활한 늙은이를 그린 것이다. 그 늙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에겐 이미지를 보여 줘야 해. 실재는 그들을 불안하게 만들거든." 가바르니는 미학적 리얼리즘을 옹호하는 파리의 작가와 예술가들 사이에서 살았다. 그는 모험담에 쉽게 넘어가는 대중을 보고 분노를 금치 못했다. 이렇게 실제로 약한 인종들이 상상력이라는 강력한 약을 우리가 존재의 무거운 짐을 벗어 놓고 도망치도록 해 주는 악덕으로 변질시키고 말았던 것이다.(145∼146쪽)

 

 

 

실재가 시에 침투하여 모험을 더 높은 미학적 잠재력으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사실

 

지금까지 우리는 주변적이고 현실적인 것을 초월하거나 포기한 덕분에 시적인 것을 논할 수 있었다. 따라서 '현 실재'란 말은 곧 '시적이지 않은' 것을 의미했다. 여기까지가 바로 시적인 것을 미학적으로 최대한 확장한 경계였다.

 

여관과 산초와 마부와 불한당 마에세 페드로가 어떻게 시적일 수 있겠는가? 의심할 여지 없이 그들은 시적이지 않다. 인형극 무대와 대조적으로, 그들은 시적인 것에 대한 공식적인 도발을 의미한다. 세르벤테스는 모든 모험을 부인하는 산초의 모습을 부각시킴으로써 막상 산초가 모험을 통과해야 할 때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것이 바로 산초의 역할이다. 이렇게 우리는 시의 분야를 실재하는 것 위로 어떻게 확장시킬 수 있을지 보지 못한다. 상상적인 것이 그 자체로 시적인 것이라면 실재는 그 자체로 시적인 것과 대립한다.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 봐라(Hic Rhodos, hic salta)". 실재야말로 미학이 자신의 시각을 예리하게 다듬어야 하는 장소이다. 순진하고 현학적인 연구자들이 상정하는 것과는 반대로, 정당화하고 설명해야 할 필요성이 더 많아진 것이 바로 실재적 경향이다. 그것은 바로 미학의 초석이 된다.

 

실제로 돈키호테의 위대한 행위가 우리를 인도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고 말하면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돈키호테를 과연 어디에 위치시킬 것인가? 저쪽에 혹은 이쪽에? 둘 중 어느 한 곳만 지정한다면 잘못된 일이 될 것이다. 돈키호테는 두 세계가 만나 경사각을 이루는 교차점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만일 돈키호테가 온전히 실재에 속한다고 말하면 우리가 반대할 일은 없다. 우리는 다만 돈키호테와 함께 그의 길들이지 않은 의지가 실재의 일부가 되었다는 점을 언급할 것이다. 그리고 이 의지는 하나의 목표를 관념처럼 지향하는데 그것은 바로 모험이다. 실재의 돈키호테는 진정으로 모험을 희구한다. 스스로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법사들이 나의 행운을 빼앗아 갈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용기와 정신만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너무나도 쉽게 관객의 자리에서 무대 속으로 뛰어든다. 플라톤의 말대로 인간의 본성이 대개 그렇듯, 그는 두 세계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조금 전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실재가 시에 침투하여 모험을 더 높은 미학적 잠재력으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이 사실이 인정된다면, 우리는 실재가 상상의 대륙을 품기 위해 문을 열고 그것을 떠받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달빛 아래의 여관은 찌는 듯이 무더운 라만차 평원을 가로지르고 있는 한 척의 배가 되고 그 안에는 샤를마뉴 대제와 용맹한 그의 열두 기사들, 산수에냐의 마르실리오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멜리센드라가 항해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기사도 이야기에 나오는 내용은 돈키호테의 환상 속에서 실재가 되고 이를 통해 그는 의심할 나위 없는 존재감을 즐기고 있다. 그러므로 리얼리즘 소설이 황당무계한 기사도 소설에 반대하여 태어났다고 하지만 사실 내적으로는 봉인된 모험을 품고 있는 것이다.(151∼153쪽)

 

 

 

신기루의 물을 만들어 내는 근원은 대지의 절망적인 건조함

 

한여름 라만차 지방에는 불덩이 같은 태양이 작열하고 뜨겁게 달아오른 대지는 종종 신기루 현상을 일으킨다. 우리가 보는 물은 진짜 물이 아니지만, 그 근원을 생각해 보면 뭔가 진짜 같은 것도 있다. 그 척박한 근원, 즉 신기루의 물을 만들어 내는 근원은 대지의 절망적인 건조함이다.

 

비슷한 현상을 우리는 두 가지 방향에서 경험할 수 있다. 하나는 단순하고 직설적인 것이다. 즉 태양이 만들어 내는 물은 진짜 물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반어법적이고 비스듬한 시선이다. 우리는 그것을 신기루라고 생각한다. 즉 우리는 생생한 물의 모습을 통해, 그런 척 위장하고 있는 대지의 건조함을 본다. 모험 소설, 모험담, 서사시 등은 상상적이고 의미심장한 사물을 단순하고 직설적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이다. 반면에 리얼리즘 소설은 두 번째 방법에 해당한다. 따라서 그것은 첫 번째 방법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리얼리즘 소설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기 위해 신기루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돈키호테』가 기사도 이야기에 반대해서 쓰인 것만은 아니다. 그 안에도 기사도 이야기가 들어 있으니 말이다. 문학 장르로서 소설은 본질적으로 그런 현태의 영양 흡수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설명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즉 현재적인 실재가 어떻게 시적 실체로 변화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직접적인 감각을 통해서만 본다면, 그것은 결코 스스로 시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신화적 영역의 권리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신화의 파괴로서, 신화에 대한 비판으로서 반어법적으로 취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실재는 무기력하고 무의미하며 정적이고 말이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동력을 가지면서 관념적 수정체 같은 세계를 상대로 도발을 감행하는 능동적인 힘으로 변모한다. 이 수정체의 환상이 일단 깨지면 그것은 무지개 빛깔의 가루가 되었다가 점점 색깔이 바래면서 마침내 거무스름한 흙더미가 된다. 우리는 모든 소설에서 이러한 장면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정확히 말하자면, 실재는 시적이지 않고 예술 작품에 들어오지도 못한다. 단지 관념적인 것을 다시 흠수하는 몸짓이나 운동일 뿐이다.(155∼157쪽)

 

 

 

풍차

 

몬티엘 평원은 이제 우리에게 열기로 가득하고 무한히 펼쳐진 공간으로서, 세상의 모든 사물이 마치 하나의 견본처럼 늘어서 있다. 돈키호테, 산초와 함께 이 평원을 따라 걷다 보면 우리는 사물들에 두 개의 면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나는 사물들의 '의미', 즉 그것들을 해석할 때 드러나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사물들의 '물질성', 즉 모든 해석에 앞서서 그리고 그것을 초월해서 사물들을 구성하고 있는 구체적인 실체이다.

 

마치 창공의 혈관 하나가 칼에 찔린 듯 핏빛으로 물든 석양의 지평선 위에 크립타나의 제분소 풍차가 우뚝 서서 일몰을 더욱 장엄하게 만든다. 이 풍차들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의미'로서, 그것들은 거인들이다.돈키호테가 정신 나간 사람이라는 점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사실이 밝혀진다 해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비정상적인 것은 모든 인류에게 지금까지 정상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거인들이 실제로는 거인이 아니라고 치자. 그렇다면 다른 것들은 어떤가? 다시 말해 일반적인 거인들은 어떤지를 묻는 것이다. 사람은 거인이라는 존재를 어디에서 끄집어낸 것일까? 그것은 과거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지금의 현실에서도 없는데 말이다. 그것이 언제 존재했든 간에 인간이 처음으로 거인들을 생각했던 계기는 세르반테스의 작품에 나오는 장면과 본질적으로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것이 거인이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관념적인 면에서 보았을 때 그것은 거인이 되곤 했던 것이다. 풍차를 돌리는 날개에는 브리아레오스의 팔들을 연상시키는 것이 있다. 우리가 만약 그러한 연상 작용의 충동에 빠져 풍차의 날개가 그리는 회전 운동에 빨려 들어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덧 거인을 만날 것이다.

 

정신의 다른 모든 표현과 마찬가지로 정의와 진리 역시 물질적으로 발생하는 신기루이다. 사물의 관념적 측면인 문화는 우리의 마음을 전이시킬 수 있는 별도의 자족적 세계로 자리 잡으려 한다. 이것은 하나의 환상이다. 그리고 단지 환상으로 간주되고, 대지 위의 신기루로 간주될 때만 문화는 자기 자리를 찾게 된다.(158∼159쪽)

 

 

 

문화는 기억과 언약이고,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이며 꿈꾸는 미래이다.

 

간단히 말해, 문화 그리고 고귀하고 명료하며 고상한 모든 것이 충분치 않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시적 리얼리즘의 의미이다. 세르반테스는 이 모든 것이 문화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픽션이다. 마치 여관이 인형극 무대를 둘러싸고 있듯이 야만적이고 거칠고 소리 없고 무의미한 사물의 실재가 문화를 둘러싸고 있다. 실재가 그런 식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것은 실재하는 것이고 거기에 있다. 즉 그것은 놀라울 정도로 자기 충족적이다. 그것의 힘과 유일한 의미는 단순한 현존에 뿌리박고 있다. 문화는 기억과 언약이고,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이며 꿈꾸는 미래이다.

 

그러나 실재는 단순하고도 냉정하게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현존이고 퇴적물이며 무기력이다. 그것은 질료이다.(162∼163쪽)

 

 

 

영웅

 

우리는 지금까지 희극성의 진정한 면모를 제법 일관되게 바라보는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소설은 우리에게 신기루를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고 쓰고 있을 때, 희극(comedia)이라는 단어는 마치 주인의 부름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펜 끝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우리는 다 타버리고 그루터기만 남은 공터에 서린 신기루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희극 사이에 뭔지는 모르지만 보이지 않는 유사성이 있음을 느낀다.

 

이야기는 이제 우리를 이 주제로 이끌어 간다. 우리는 여관방과 마에세 페드로의 인형극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놓고 온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돈키호테의 의지이다. 사람들은 우리의 주인공으로부터 행운을 빼앗아 갈 수는 있겠지만, 그의 노력과 용기를 빼앗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의 모험은 뒤죽박죽 끓어오르는 두뇌에서 나온 수증기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모험을 향한 주인공의 의지는 실재하는 것이고 진실한 것이다. 모험은 물질적 질서가 흐트러진 것으로, 다소 비현실적이다. 모험을 향한 의지에서, 그 노력과 용기에서 우리는 기이한 두 개의 본성을 만나게 된다. 그 두 요소는 상반된 세계에 속해 있다. 즉 의지는 실재하지만, 의지의 대상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서사시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호메로스의 인간들은 자신이 꿈꾸는 욕망과 같은 세계에 속해 있다. 반면에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인간은 현실을 개조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역시 그러한 현실의 일부분이 아닌가? 그는 현실 덕에 살고 있고, 그 결과물이 아닌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고 모험으로 투사만 된 것이 어떻게 척박한 현실을 지배하고 변화시킬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과의 타협을 단호히 거부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기 주변이 조금 색다르게 돌아가기를 열망한다. 즉 그들은 관습이나 전통, 한마디로 말해 생물학적 본능이 강요하는 행동 방식을 반복하기를 거부한다. 우리는 이들을 영웅이라 부른다. 영웅이 된다는 것은 다수 가운데 유일한 사람,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물려받은 유산을 거부하고, 상황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틀에 박힌 행위를 거부한다면, 우리 행위의 원인을 우리 안에서, 오로지 우리 안에서만 찾게 된다. 영웅의 의지는 조상의 것도 아니고 사회의 것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것이다. 이렇게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염원을 가리켜 영웅성이라 한다.

 

나는 실질적이거나 적극적인 영웅의 이러한 고유성보다 더 심오한 것은 없다고 믿는다. 그의 삶은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것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이다. 그가 하는 하나하나의 행동은 먼저 관습을 극복하고 새로운 방식의 행위를 발명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삶은 영원한 고통이며, 관습에 굴복하고 질료의 포로가 되어 있는 자신의 일부를 끊임없이 잘라 내는 것이다.(167∼169쪽)

 

 

한 시대의 진정한 문학은 그 시대의 인간 감성이 남겨 놓은 총체적인 고백이다

 

나는 이 짧은 글을 시작할 때 제시했던 것을 계속 주장할 필요는 없었다고 믿고 있다. 그것은 시와 예술이 궁극적으로 인간, 오로지 인간적인 것만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시의 주제가 과거냐 현재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풍경은 항상 인간의 배경으로만 그려진다. 그렇게 보면, 모든 예술 형식은 결국 인간에 의해 인간의 해석이 바뀌는 데에서 자신의 기원을 찾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당신이 느끼는 인간관에 대해 말해 준다면 나는 당신이 어떤 예술을 추구하는지 말해 줄 수 있다.

 

모든 문학 장르가, 약간의 예외는 있지만, 이렇게 인간을 해석하는 방법들 가운데 하나를 열어 주는 물길이라고 할 때 특정 시대가 특정 장르를 선호하는 현상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 시대의 진정한 문학은 그 시대의 인간 감성이 남겨 놓은 총체적인 고백이다.

 

그렇다면 영웅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영웅이 때에 따라 직선적으로 혹은 기울어져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직선적으로 보일 때 우리의 시선은 영웅을 비극적이라 할 수 있는 미학적 대상으로 변모시켰다. 반면 기울어져 보일 때 영웅은 희극적이라 불리는 미학적 대상으로 변모한다.

 

유머와 희극에 푹 빠져서 도저히 비극적 감수성을 갖기 힘든 시대가 있었다. 특히 부르주아의 시대이자 민주주의 그리고 실증주의 시대였던 19세기는 너무 심하게 희극에 기울어 있었다.

 

서사시와 소설 사이에 존재했던 상호 관계는 우리 시대에 비극과 희극의 관계로 반복되고 있다.(171∼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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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성찰 을유세계문학전집 90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신정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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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아! 만일 세르반테스의 문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아낸다면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헤맨 지 350년 후에 국가의 전통을 좇으라고 우리에게 권고하는 것은 잔인하기 그지없는 빈정거림이 아닌가? 전통이라! 스페인에서 전통이라는 것의 실상을 알아보면 그것은 스페인의 잠재적 가능성을 서서히 없애 버리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전통을 따를 수 없다. 내게 스페인은 극히 드문 경우에만 실현되었던 드높은 소망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절대로 전통을 따를 수 없다. 아니, 욓려 그 반대이다. 우리는 전통을 거슬러 가야 하고, 전통을 초월해서 가야 한다. 우리가 시급히 해야 할 일은 전통의 잔해 사이에서 우리 인종 최고의 본질과, 스페인적인 가치 기준과 혼돈에 맞서 떨고 있는 스페인을 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스페인이라 부르는 것은 사실 스페인이 아니라 그것의 실패작이다. 고통스러울지라도 무기력한 전통의 스페인, 그동안 늘 그래 왔던 스페인의 모습을 불살라 버린다면 남은 재를 체로 걸러 내어 보석처럼 영롱한 광채가 빛나는 스페인, 잘될 수 있었던 스페인을 발견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과거의 미신에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스페인이 과거에 고정되어 있다고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해 온 꼬임에 넘어가면 안 된다. 지중해를 항해하던 뱃사람들은 세이렌이 유혹하는 치명적인 노랫소리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단 하나의 방법만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것은 그에 맞서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스페인의 가능성을 확신하는 사람들 역시 거꾸로 스페인 역사의 전설을 힘차게 불러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빈약해진 우리 인종의 심장이 순수하고 강렬하게 뛰기 시작하는 곳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본질적인 경험 가운데 하나가, 아니 가장 본질적인 경험이 바로 세르반테스이다. 바로 여기에 스페인적인 충만함이 있다.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우리가 언제든 휘두를 수 있는 단어가 여기 있다. 아! 만일 세르반테스의 문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아낸다면, 사물에 접근하는 세르반테스의 방식을 알 수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성취해 낼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정신적인 봉우리들에는 시적 문체가 철학, 도덕, 과학 그리고 정치를 함께 아우르는 단단한 연대감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어느 날 누군가 와서 세르반테스 문체의 면모를 밝혀 주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 지침에 따라 다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고 새로운 삶에 눈을 뜰 수 있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우리에게 용기와 재능이 있다면 정말 순수하게 우리는 새로운 스페인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109∼110쪽) 

 

 

 

마치 우주의 심장인 것처럼

 

황혼 녘의 하늘색이 모든 풍경을 도배하고 있었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는 그들의 연약한 목구멍에 걸려 잠들어 버렸다. 나는 물줄기가 흘러가는 개천에서 벗어나 절대 적막의 세계에 접어들었다. 그때 나의 가슴은 마치 배우가 극적인 마지막 대사를 읊기 위해 무대에 오르는 것처럼 사물의 깊숙한 바닥에서 빠져나왔다. 쿵 …… 쿵 …… 리드미컬한 망치질이 시작되었고 그 덕분에 대지의 감정이 내 기운 속으로 스며들었다. 높은 하늘의 별 하나가 규칙적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우주의 심장인 것처럼, 내 별의 쌍둥이 형제인 것처럼, 그리고 경이로움 자체인 세계에 대한 놀라움과 부드러움으로 가득 찬 나의 별인 것처럼.(111쪽)

 

 

문학 장르

 

형식과 내용은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서 시적 내용은 추상적 규칙의 제한을 의식하지 않고 매우 자유롭게 흘러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식과 내용은 구별되어야 한다. 그것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플로베르는 마치 불에서 열기가 나오듯 형식은 내용에서 나온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비유는 정확하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면, 형식은 신체 기관이고 내용은 그것을 창조하는 기능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문학 장르는 시적 기능으로서, 미학적 생성을 끌어당기고 있는 방향이다.

 

내용 혹은 주제와 그 형식 혹은 표현 장치의 구분을 거부하는 최근의 경향은 그것의 현학적인 구분 못지않게 쓸모없는 일이다. 사실 그것은 하나의 도로와 그 도로의 방향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와 같은 것이다. 방향을 정한다고 해서 우리가 생각했던 목표지점에 도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날아가는 돌은 공중의 궤도를 그리는 곡선을 이미 내부적으로 예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곡선은 최초의 추진력을 설명하는 동시에 그것을 전개시키고 완성시킨다.(117쪽)

 

 

 

내용과 형식은 불가분의 관계

 

결국 비극이란 어떤 근본적인 시적 주제의 확장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비극성의 확장이다. 그렇다면 형식에 있는 것이든 내용에 있는 것이든 똑같은 것이다. 다만 내용상으로 하나의 성향이나 단순한 의도였던 것이 형식을 통해 분명하게 전개될 뿐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의 사물이 각기 다른 순간에 있다고 해서 다른 것이 아니듯 내용과 형식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따라서 나는 고대 시학에서 말하는 바와 반대로, 문학 장르라는 것이 다른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근본적인 주제이며 진정한 미학적 범주로서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서사시는 시적 형식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라 확장되고 발현되는 과정에서 완성에 이르는 본질적인 시적 내용의 이름이다. 서정시 역시 극이나 소설의 형태로 번역될 수 있는 관습적인 언어가 아니라, 말하고자 하는 분명한 내용인 동시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방식인 것이다.(118쪽)

 

 

 

시대 자체가 해석이다

 

어떻든 간에 예술의 본질적 주제는 언제나 인간이다. 그리고 상호 배타적이고 필연적인 동시에 궁극적인 미학적 주제로 인식되는 장르는 인간성의 중요한 흐름을 포착하는 폭넓은 시각이 된다. 각 시대는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해석을 낳는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시대가 해석을 낳는 것이 아니라 시대 자체가 해석이다. 따라서 각 시대는 특정한 장르를 선호하게 된다.(118∼119쪽)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에서 재미를 느낀다는 것

 

두 계열의 장르가 가진 예술적 의도는 매우 큰 대조를 보여 준다. 전자의 경우 등장인물과 그들의 행보 자체가 미적인 즐거움의 원천이다. 즉 작가는 자신의 개입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그런데 후자에서는 반대로, 작가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세속적 인물들이 망막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보여 주는 그 방식 자체가 우리에게 유일한 흥미를 끈다. 세르반테스가 분명 이러한 대조점을 인식하지 못했을 리 없는데, 이는 「개들이 본 세상」에 나오는 다음 대사에서도 알 수 있다.

 

너에게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내 인생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들으면 넌 아마도 내 말이 옳다는 걸 알게 될 거야. 다시 말해, 어떤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서 재미있는가 하면, 다른 이야기들은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에서 재미를 느낀다는 거야.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장황한 서론이나 말의 향연이 없어도 만족감을 주는 이야기들이 있고, 반면에 미사여구나 얼굴 표정, 몸짓 발짓 그리고 목소리를 바꿔 가며 말해야 하는 이야기들이 있다는 거지. 아무리 내용이 사소하고 지루하고 따분하더라도 이렇게 얘기하면 재미가 있어지고 즐거움을 주는 거야.

 

그렇다면 소설이란 무엇인가?(124쪽)

 

 

 

서사시

 

만일 시인이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에게 고대 그리스인의 고통을 말해 달라고 한다면 그녀가 의존하는 것은 주관적 기억이 아니라 우주 안에 맥박이 뛰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우주적 회상의 힘이다. 므네모시네는 개인의 회상이 아니라 근원적 힘의 회상이다.

 

전설과 우리 사이에 놓인 심원한 거리는 서사시적 대상들을 결코 썩지 않게 만든다. 그들이 우리에게 너무 가까이 와서 자기들에게 현재의 생생한 젊음을 부여하지 못하도록 막는 이유는 자기들 몸을 노화의 작용으로부터 막아 주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호메로스의 노래가 보여 주는 영원한 신선함과 불멸의 순수한 향기는 청춘이 지속된다기보다는 노화가 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노화가 정지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늙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물이 늙는 것은 매 시간이 흘러 우리로부터 점차 멀어지고 이것이 무한히 진행되기 때문이다. 늙음은 시간이 갈수록 더 세를 떨친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우리에게나 플라톤에게나 항상 같은 거리를 지키고 있다.(126∼127쪽)

 

 

 

『일리아스』와 『보바리 부인』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스페인 사람이 『일리아스』를 이해하려면 카스티야의 두 마을에 사는 젊은이들이 시골의 예쁜 처녀를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싸움을 떠올리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는데 나는 그 말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다. 그러나 『보바리 부인』을 읽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 바람난 시골 여자를 상상해 보라고 우리에게 주문한다면 납득이 될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맞는 말이다. 소설가는 우리가 추상적으로 이미 알고 있던 것을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제시하는 데 성공할 때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책을 덮으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 시골의 바람난 여자는 정말 이렇지. 시골 마를에선 정말 그렇더라고." 이렇게 결론을 내리면서 우리는 소설가를 만족시켜 왔다.(136쪽)

 

 

 

예술은 기술이고, 리얼하게 만드는 장치이다.

 

서사시의 주제가 있는 그대로 과거로서의 과거라면, 소설의 주제는 있는 그대로 현재로서의 현재이다. 만일 서사시의 인물이 창조된 존재이고 그 본성은 유일무이한 동시에 대체 불가능한 것으로서 그 자체가 시적인 가치를 지닌다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유형적 존재로서 시와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미적이고 창조적인 요소나 분위기를 가진 신화에서 불러온 존재가 아니라, 작가와 독자가 실제로 살고 있는 거리나 물리적 세계 그리고 생생한 환경에서 취한 존재들이다. 우리는 여기서 세 번째로 명료한 점을 알게 된다. 문학예술은 시의 전부가 아니며, 단지 제2의 시적 행위라는 사실이다. 예술은 기술이고, 리얼하게 만드는 장치이다. 이 장치는 때로 리얼리즘적인 것이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고 모든 경우에 억지로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 시대의 특징인 리얼리즘 선호가 규범화될 수는 없다. 우리는 외관에 환상을 가지지만 다른 시대에는 또 다른 선호도가 있는 법이다. 인간이라는 종이 항상 우리와 같은 것을 원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헛된 환상이다. 이제 우리 마음을 넓게 열고 비록 우리와는 다르더라도 인간의 모든 것을 포착해 보자. 단조로운 획일성보다는 길들이기 힘든 다양성을 이 세상에서 더 선호해 보도록 하자.(137∼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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