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강상진.김재홍.이창우 옮김 / 길(도서출판)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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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적인 여러 좋음들에는 지나침이 있다

 

이제 어떤 즐거움, 예를 들어 고귀한 즐거움은 대단히 선택할 만한 것이지만 무절제한 사람들이 관계하는 육체적인 즐거움은 선택할 만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육체적인 즐거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 그것은 왜 육체적인 즐거움에 반대되는 고통이 나쁜가 하는 것이다. 물론 좋은 것이 나쁜 것에 반대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필수적인 [육체적] 즐거움들은 나쁘지 않은 것은 좋은 것이라는 이유에서만 좋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어느 정도까지만 좋은 것인가? 더 나은 것으로의 지나침이 불가능한 모든 품성상태와 운동에는 즐거움의 지나침도 없는 반면, 더 좋은 것으로의 지나침이 가능한 곳에서는 즐거움의 지나침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육체적인 여러 좋음들에는 지나침이 있다. 또 열등한 사람은 지나침을 추구하기에 열등한 사람인 것이며, 필수적인 것을 추구하기에 열등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은 음식과 술, 성적인 것들에서 어느 정도 기쁨을 느끼지만, 모두가 마땅히 그래야 할 방식으로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고통의 경우는 사정이 이와 반대다. 열등한 사람은 지나친 고통만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고통을 피한다. 지나친 즐거움에 반대되는 것은 고통이 아니지만, 지나친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그러하기 [고통이기] 때문이다. (273쪽)

 

 

 

육체적인 즐거움이 어째서 더 선택할 만한 것으로 보이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 


그런데 우리는 참된 것뿐만 아니라 그릇된 것의 원인도 말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확신(pistis)에 도움이 되니까. 실제로는 참이 아닌 것이 어떻게 해서 참인 것으로 보이게 되는지를 이치에 맞게 설명할 수 있다면 사람들로 하여금 참된 것을 더 잘 확신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육체적인 즐거움이 어째서 더 선택할 만한 것으로 보이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273∼24쪽)

 

 

 

즐거움이 신실하지 않은 이유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우선 육체적인 즐거움이 고통을 몰아내기 때문이다. 지나친 고통으로 말미암아 마치 치료인 양 즐거움을 추구하면서 지나침으로 나아가고, 일반적으로 육체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치료가 고통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치료'는 강렬해지며, 그런 까닭에 [즐거움이] 추구되는 것이다.

 

이미 말했던 것과 같이, 즐거움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에서 신실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즐거움이 열등한 본성들의 행위라는 이유에서이다. (열등한 본성이, 짐승들의 경우처럼 나면서 그러한 것이든, 열등한 인간의 경우에서처럼 습관에 의해 그러한 것이든 간에.) 둘째 이유는 즐거움이 결핍에 대한 치료이며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이 [그리로] 가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완성으로 가는 회복 과정에서 생겨 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우연하게만 신실할 뿐이다. (274쪽)

 

 

 

생물은 늘 고생을 하고 있으니까

 

또 육체적인 즐거움들은 강렬하기에, 다른 즐거움에서 기쁨을 느낄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 추구된다. 이 사람들은 결국 자신들 안에 스스로 일종의 갈증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다. 이러한 갈증이 해가 없는 것일 경우에는 탓할 것이 없지만, 해가 될 경우라면 나쁜 일일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그것으로 인해 기쁨을 누릴 다른 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고, 즐거움도 고통도 아닌 상태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본성으로 말미암아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보는 것이나 듣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주장하는 자연학자들 또한 증언하듯이, 생물은 늘 고생을 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는 이미 익숙해져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젊은 시절에는 [육체의] 성장이 진행되는 까닭에 젊은이들은 마치 술에 취해 흥겨운 사람의 상태처럼 되고, 그래서 젊음은 즐거운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그 본성에 있어 '성질이 불같은' 사람들은 늘 치료를 필요로 한다. 신체는 수축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긴장하고 있으며, 항상 강렬한 욕구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통은 그것에 반대되는 즐거움에 의해 쫓겨날 뿐만 아니라, 충분히 강력하기만 하다면 그 어떤 즐거움에 의해서든 쫓겨난다. 이런 까닭에 무절제한 사람과 열등한 사람이 생겨나는 것이다.(274∼275쪽)


 

고통 없는 즐거움들은 지나침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고통 없는 즐거움들은 지나침을 갖지 않는다. 이러한 즐거움들은 본성상 즐거운 것들에 속할 뿐, 우연히 즐거운 것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치료 과정에서 느끼는 즐거운 것들은 우연히 즐거운 것들이다. 치료받는다는 것은 아직 건강하게 남아 있으면서 행위하는 부분에 속하는 일이며, 그렇기에 즐거운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본성적으로 즐거운 것들은 바로 그러한 [건강한 ] 본성의 행위를 만들어 내는 것들이다.(275쪽)

 

 

 

동일한 것이 언제나 즐겁지는 않은 까닭

 

동일한 것이 언제나 즐겁지는 않은 까닭은 우리의 본성이 단순하지 않으며,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한 우리 안에 무엇인가 다른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안의 [둘 중] 어느 하나가 행위하면 이 행위는 나머지 다른 것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 된다. 반면에 두 요소가 서로 균형을 이루었을 때는 행한 것이 고통스러운 것도, 또 즐거운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만약 누구든 단순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면, 언제나 똑같은 행위가 가장 즐거운 것이 될 것이니까.(275∼276쪽)

 

 

   

즐거움은 오히려 운동보다는 정지 속에 더 많이 존재하기 때문

 

이런 까닭에 신은 언제나 하나이며 단순한 즐거움으로 기뻐한다. 운동이라는 활동뿐만 아니라 '운동하지 않음(akinésia)'이라는 활동도 있으며, 즐거움은 오히려 운동보다는 정지 속에 더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시인은 "변화는 무엇이든 달콤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일종의 나쁨 때문에 그런 것일 뿐이다. 변하기 쉬운 사람이 나쁜 사람인 것처럼, 변화를 필요로 하는 본성 또한 나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본성은 단순하지도 않고 훌륭하지도 않으니까.(276쪽)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제7권 제14장 「육체적 즐거움과 인간 본성」 중에서

 

 

 * * *

 

사람들은 즐거운 것은 선택하지만 고통스러운 것은 피하니까

 

이것들 다음으로는 아마도 즐거움에 관해서 논의해야 할 것이다. 즐거움은 우리 인간들에게 가장 친밀하고 고유한 것이니까. 그런 까닭에 즐거움과 고통을 방향타로 삼아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것이다. 또 마땅히 기뻐해야 할 것에 대해 기뻐하고, 마땅히 혐오해야 할 것에 대해 혐오하는 것은 성격적 탁월성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즐거움과 고통은 삶 전체에 뻗어 있으며 탁월성과 행복한 삶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즐거운 것은 선택하지만 고통스러운 것은 피하니까.(349쪽)

 

 

 

이러한 주제들은 많은 논쟁거리를 가지고 있기에

 

이러한 주제들을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것은 가장 하지 말아야 할 일로 보이는데, 이러한 주제들은 많은 논쟁거리를 가지고 있기에 특히 그렇다. 어떤 사람들은 즐거움이 좋음이라고 말하는 반면, 다른 어떤 사람들은 그와 반대로 즐거움이 전적으로 나쁜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즐거움이 [전적으로] 나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아마 실제로도 그렇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일 것이며, 다른 일부는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즐거움을 나쁜 것들 중의 하나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 우리 삶을 위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다중]이 즐거움으로 기울어지며 여러 가지 즐거움들의 노예가 된다고 말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 반대 방향으로 이끌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중간에 도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349∼350쪽)

 

 

그래서 참된 말들은 앎에 있어 유용할 뿐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가장 유용한 것 같다

 

그러나 아마도 이것은 올바른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감정들이나 행위들에 관해, 말들(logos)은 실제 행동들(ergon)보다 신뢰할 만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들이 우리의 지각에 따른 것들과 일치하지 않을 때, 말들은 무시당하며, 참된 것을 훼손하다. 즐거움을 비난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즐거움을 추구하는 게 목격된 경우, 그런 즐거움에 이끌린다는 것은 모든 종류의 즐거움에 이끌리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구별은 다중들이 하는 일이 아니니까.

 

그래서 참된 말들은 앎에 있어 유용할 뿐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가장 유용한 것 같다. 실제(ergon)와 잘 부합하는 말은 신뢰받고, 그런 까닭에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을 그 말에 따라 살도록 북돋우기 때문이다.(350쪽)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제10권 제1장 「즐거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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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강상진.김재홍.이창우 옮김 / 길(도서출판)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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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성취들 중에서 탁월성에 따르는 활동들만큼 안정성을 갖는 것은 없기 때문


그가 진정 행복한 때에 그가 행복하다는 것이-살아 있는 사람은 그 우여곡절 탓에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또 행복을 어떤 지속적인 것으로, 결코 쉽게 변할 수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반면, 운수는 동일한 사람 주변을 여러 차례 돌고 도는 것이라고 파악한다는 이유로-그에 대해 참되게 서술되지 않는다면, 이 어찌 이상하지 않단 말인가?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해 보면 분명하다. 만약 우리가 그때 그때 변하는 운을 따라가 본다고 한다면, 동일한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부르다가 다시 비참한 사람으로 부르기를 여러 차례 반복할 것이며, 그로써 행복한 사람을 일종의 '카멜레온으로, 취약한 기반을 가진 사람'으로 드러낼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의 운을 좇아 자신의 행복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 아닐까? 잘 되고 못됨은 이런 것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말했던 것과 같이 인간적 삶은 다만 이런 것들을 추가적으로 필요로 할 뿐이며, 행복에 결정적인 것은 탁월성에 따르는 활동이고, 그 반대의 활동은 불행에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어려움도 행복에 대한 우리의 논의가 옳았다는 증거를 제공한다. 인간적인 성취들 중에서 탁월성에 따르는 활동들만큼 안정성을 갖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탁월성에 따르는 활동들은 학문적 인식보다도 더 지속적인 것으로 보인다. 또 이러한 활동들 중에서 가장 명예로운 활동들이 더 지속적인데, 그것은 지극히 복된 사람들이 다른 무엇보다도 이러한 활동들 속에서, 그리고 가장 연속적으로 그들의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활동들과 관련해서 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인 것 같다. (39∼40쪽)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제1권 제10장 「행복과 운명」 중에서

 

 

 


실천적 지혜에는 망각이 없다는 사실이 그 징표


이성을 가지고 있는 영혼에는 두 부분이 있는데, 실천적 지혜는 [학문적 인식이 관련하는 부분과는] 다른 부분의 탁월성, 즉 의견을 형성하는 부분의 탁월성이다. 의견도 실천적 지혜도 모두 다르게 있을 수 있는 것들에 관련하니까. 다른 한편, 실천적 지혜가 단순히 이성을 동반한 품성상태인 것만은 아니다. 단순히 이성을 동반한 품성상태에는 망각이 있지만, 실천적 지혜에는 망각이 없다는 사실이 그 징표이다.(212쪽)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제6권 제5장 「실천적 지혜」 중에서

 

 

 


탁월성은 지속적인 것


가장 완전한 친애는 좋은 사람들, 또 탁월성에 있어서 유사한 사람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친애이다. 이들은 서로가 잘 되기를 똑같이 바라는데, 그들이 좋은 사람인 한 그렇게 바라며, 또 그들은 그 자체로서 좋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구를 위해 그 친구가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최고의 친구이다. 이들이 이러한 태도를 가지는 것은 우연한 것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을 이유로 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의 친애는 그들이 좋은 사람인 한 유지된다. 그런데 탁월성은 지속적인 것이다. 각자는 또 단적으로도 좋은 사람이고 친구에 대해서도 좋은 사람이다. 좋은 사람들은 단적으로도 좋으며 서로에 대해서도 도움을 준다.

 

마찬가지로 좋은 사람들은 즐거움을 주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단적으로도 즐거우며 서로에게도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위들은, 또 그와 같은 종류의 행위들은 좋은 사람들 각각에게 즐거운 것이며, 좋은 사람들의 행위들은 [이런 점에서] 같거나 유사하다. (283∼284쪽)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제8권 제3장 「친애의 세 종류」 중에서 

 

 

 


사랑하는 것이 가치에 따라 생겨날 때 그런 사람들이 오래 지속되는 친구

 

친애는 사랑하는 데에서 더 [잘] 성립하며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이 칭찬받기에, 사랑하는 것은 친구들에게 속하는 탁월성 같다. 그래서 사랑하는 것이 가치에 따라 생겨날 때 그런 사람들이 오래 지속되는 친구이며, 이들의 친애 역시 오래 지속되는 것이다. 서로 동등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이러한 방식으로 대단한 친구가 될 것이다.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동등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애[친구 사이]란 동등성과 유사성이며, 무엇보다도 탁월성에 따른 유사성이다. 그들은 그 자신에 있어서든 서로에 대해서든 흔들리지 않는 사람으로서, 저열한 것들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그것들의 하인이 되지도 않으며, 오히려 세간에서 말하듯 그것들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잘못하지 않을 뿐 아니라 친구들에게 그러라고 하지도 않는 것이 바로 좋은 사람들의 특징이니까. 못된 사람들은 그 항구적인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에게조차 동질적인 사람으로 지속되지 못하니까. 그들은 상대편의 못됨을 기뻐하면서 짧은 시간 동안만 친구가 된다. (295∼296쪽)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제8권 제8장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 중에서

 

 

 


품성에 근거한 친애는 자체적인 것에서 성립하기 때문에 지속적이다


'사랑을 구하는 사람'은 즐거움 때문에 상대방을 사랑하고 '사랑을 받기만 하는 사람'은 유익 때문에 상대방을 사랑하는데, 이런 일[불평]들은 자신들이 사랑하게 된 이유가 된 것들을 갖지 못할 때 생겨난다. 이런 것들을 근거로 성립하는 친애는, 그들을 사랑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것이 얻어지지 않으면 해체된다. 그들이 서로 사랑한 것은 상대편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가진 것이었는데, 그 소유물은 지속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런 종류의 친애들 역시 지속적이지 않다. 반면 이야기한 바와 같이 품성에 근거한 친애는 자체적인 것에서 성립하기 때문에 지속적이다. (315∼316쪽)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제9권 제1장 「친애에 있어서 교환의 원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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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으로 읽는 변신이야기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오비디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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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스토의 임신을 발견한 다이아나](부분), 17세기경, 폴 브륄, 루브르 박물관

 

 


보라, 딕튄나가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을 거느리고 사냥해서

잡은 짐승들을 뽐내며 높은 마이날로스 산을 올라오고 있었다.

여신은 소녀를 보자 가까이 오라고 불렀다. 이에 그녀는 뒷걸음쳤으니,

처음에는 여신이 윱피테르가 아닐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나 그녀는 여신의 뒤에 다른 요정들이 함께 오는 것을 보고는

속임수가 아님을 알아차리고 이들에게 다가갔다. 아아, 죄를 짓고도

그것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걷기만 할 뿐, 여느 때처럼 여신의 곁으로

다가서지도 못했고 무리 전체의 선두에 서지도 못했다.

그녀의 침묵과 홍조는 그녀가 정조를 잃었음을 보여주었다.

디아나가 처녀가 아니었더라면 수천 가지 징표로 그녀의 죄과를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요정들은 알아챘다고 한다.

 

 -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제2권 441∼452

 

  

[사냥에서 돌아온 다이아나](부분), 프랑수아 부셰, 1745년, 코냑 제이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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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으로 읽는 변신이야기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오비디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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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에톤의 추락], 1596년, 조셉 하인즈, 라이프치히 조형예술 박물관 소장

 

파에톤아, 너는 큰 것을, 네 그 힘과 그토록 어린 나이에

맞지 않은 선물을 요구하는구나. 너는 죽을 운명을 타고났는데,

네가 바라는 것은 죽을 운명을 타고난 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구나.

아니, 하늘의 신들에게 허용될 수 있는 것 이상을 너는 멋모르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 각자에게 자신의 권능이 마음에 든다

하더라도, 나말고는 어느 누구도 이 불타는 굴대 위에 자리잡고

서지 못한다. 무시무시한 손으로 사나운 벼락을 던져대는,

광대한 올륌푸스의 통치자도 이 마차는 몰 수 없을 것이다.

 

 -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제2권 54∼61

 

 

[아폴론에게 태양의 지휘권을 간청하는 파에톤], 19세기경, 벤자민 웨스트, 루브르 박물관


 


그러니 내 아들아, 조심해야 한단다. 내가 너에게 치명적인 선물을

주는 일이 없도록 아직 늦지 않았을 때 소원을 바꾸도록 해라.

내 아들임을 확신할 수 있도록 내게 확실한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라면, 나는 너를 위해 염려함으로써 확실한 증거를 보이겠다.

내가 아버지답게 염려한다는 사실이 네 아비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자, 내 얼굴을 보아라. 네가 내 가슴속을 들여다보고

거기서 아비의 염려를 알아챌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러고 나서 풍요로운 세상이 갖고 있는 것을 다 둘러보고,

하늘과 대지와 바다의 그토록 많은 재물 중에 무엇이든 요구해라.

나는 너를 위해 그 어떤 것도 거절하지 않겠다. 하지만 제발 이것만은

거두어다오. 그것은 사실은 명예가 아니라 벌이다. 파에톤아,

너는 선물 대신 벌을 요구하고 있다. 이 어리석은 것아, 왜 이렇게

두 팔로 내 목을 끌어안고 응석을 부리는 게냐? 의심하지 마라.

네가 무엇을 원하든 너는 그것을 받게 될 것이다. 나는 스튁스 강에

걸고 맹세했으니까. 하지만 너는 더 현명하게 원하도록 해라!"

 

 -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제2권 88∼102

 

 

[아폴론과 파에톤, 태양의 마차를 몰고 있는 파에톤], 18세기경, 니콜라 베르탱, 루브르 박물관

 

 

의기양양한 파에톤이 그것을 보며 그 솜씨에 감탄하고 있는 동안,

보라, 밝아오는 동녘에서 망을 보고 있던 아우로라가

장미가 가득한 방들의 자줏빛 문들을 활짝 열었다.

별들이 달아나기 시작했고, 루키페르가 그들 대열의 후미를 이루며

하늘에 있는 자신의 망루(望樓)를 맨 마지막으로 떠났다.

 

 -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제2권 88∼102

 

 


[The Fall of Phaeton], 1605년, Peter Paul Rub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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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비디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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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상 데우칼리온과 퓌르라

"누이여, 아내여, 지상에 남은 유일한 여인이여,

처음에는 가족의 인연과 혈연이 그대를 내게 묶더니,

다음에는 혼인이 묶었고, 이제는 위험이 묶는구려.

우리 두 사람이 지는 해와 뜨는 해가 비치는 모든 나라의

유일한 주민들이오. 나머지는 바다가 차지했소.

아직도 나는 우리가 살아남을 것이라는 확실한 자신이 없으며,

아직도 나는 구름만 보아도 마음에 겁이 난다오. 가련한 여인이여,

만일 나 없이 그대만 홀로 살아남는 것이 운명의 뜻이었더라면,

지금 그대의 심정이 어떠했겠소? 그대 혼자서 어떻게 두려움을

견딜 수 있을 것이며, 누가 그대의 괴로움을 위로해 주겠소?

(내 말 믿으시오.) 만약 바다가 그대마저 차지했더라면,

아내여, 나는 그대를 따라갔을 것이며, 그러면 바다는

나마저 삼켰을 것이오. 아아, 내가 나의 아버지의 재주로

민족들을 다시 만들어낼 수 있고, 흙을 이겨 거기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이제 인류는 우리 두 사람에게 달려 있소. (이것이 하늘에 계신

신들의 뜻이오.) 우리는 인간들의 모형으로 남게 될 것이오."

 

 -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제1권 351∼366행

 

  

여러 가지 형태의 다른 동물들은, 대지가 저절로 낳았다.

그것은 오랫동안 남아 있던 습기가 태양의 열기에 데워지고,

진흙과 습기 찬 늪지들이 열기에 부풀어오르고,

마치 어머니의 자궁 속처럼 사물들의 비옥한 씨앗들이

생명을 주는 흙 속에서 부양되고 성장하여

차츰 어떤 형태를 취하고 난 뒤의 일이었다.

그처럼, 일곱 하구의 닐루스 강이 범람했던 들판을 떠나

자신의 물줄기들을 옛 하상으로 되돌려주고

새로 쌓인 진흙이 햇볕에 데워지고 나면,

농부들은 흙덩이들을 뒤엎다가 많은 동물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중에는 갓 생성되기 시작하여 아직

탄생의 단계에 있는 것들도 있고, 아직 완성되지 않아

지체가 모자란 것들도 있는가 하면, 같은 몸인데 일부는

살아 있고 일부는 흙 그대로인 경우도 가끔 있다.

왜냐하면 습기와 온기가 적당히 결합하면 생명이 잉태되고,

이 두 가지에서 만물이 비롯되기 때문이다.

불과 물은 상극이지만, 눅눅한 온기는 만물을 낳고,

이 부조화의 조화는 생명의 탄생에 적합한 것이다.

 

 -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제1권 416∼433행

 

 

 

<데우칼리온과 퓌르라> 지오반니 마리아 보탈라,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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