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벌떼가 벌집을 만들기 위해서 군집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군집성이 있어서 벌집을 만드는 것처럼, 우리 인간들은 본래 벌보다 더 군집성이 있는 데다가 행동하고 사유하는 데 총명이 더해져 머리를 쓰게 된다. 그러므로 만약 인간의 이익을 보호하는 데, 즉 인간사회를 유지하는 데 집중되어 있는 저 덕인 정의가 사물의 인식과 무관하다면 그 인식도 고립된 것이요 공허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저신의 위대함, 즉 용기가 인간의 결속과 공동체 사회에서 동떨어진 것이라면 ㄱ것은 일종의 야수적, 비인간적인 만용이 될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결속과 공동체를 유지하는 일이 사변적 지식의 추구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에게 본래 필욯나 것들은 다른 사람들이 도움이 없다면 구할 수도 없고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산출해 낼 수도 없기 때문에, 일상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마련하기 위해서 인간 사회와 공동의 유대관계가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그리고 만약 생활 필수품과 생활비에 관련되는 모든 것들이 이야기 책 속에 나오듯이 신의 마술지팡이에 의해 제공된다면, 가장 능력있는 사람은 각자 자기 맡은 바 모든 일에서 벗어나 오로지 진리 탐구에만 전념할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 또한 전혀 사실과 다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각자 고독에서 벗어나려고 같이 연구할 동료를 구해, 때로는 가르치면서 배우고자 하며, 때로는 들으면서 말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사회를 결속, 유지시키는 모든 의무는 저 진리 탐구와 학문에 관련되는 의무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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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의무들을 비교 선택함에 있어서의 우선 순위는 인간사히를 유지하는 데 관련되어 있는 의무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적인 귀결이니, 왜냐하면 신중한 행동은 지식과 예지를 수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이 현명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가치가 있다.
이상으로 이 문제는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본다. 의무의 본질이 분명하게 밝혀진 이상, 의무에 관한 문제를 취급할 때에 어떤 의무가 어떤 의무에 우선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게 되었다. 더구나 공동체 자체 내에서조차도 의무의 등급이 있어서 그들 가운데 어떤 의무가 다른 의무들보다 더 중한지 이해할 수 있으니, 그 첫째가 불멸의 신들에 대한 의무이고, 둘째가 조국에 대한 것이요, 세번째가 부모에 대한 거싱고, 그 다음부터는 점차 밑으로 내려가면서 나머지 의무들이 정해져 있는 것이다. (112∼114쪽)
(나의 생각) 제1권의 '결론'에 해당하는 이 대목이 지금에 와서는 '우스운 꼴'이 되고 만 듯한 느낌을 부정하기 어렵다. 세상이 너무 변한 것인가, 아니면 시대가 너무 변한 것인가, 아니면 가치관이 너무 변한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도덕적으로 너무 타락한 것인가?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키케로가 '도덕적 선'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먼 미래에는' 결국 변할 수도 있는 '우선 순위'에 너무 무리하게 손을 댄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건 순전히 나만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