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니체전집 1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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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성에 대한 시험

 

사람들은 자신이 독립할 수 있고 명령할 수 있도록 예정되어 있는지 스스로 시험해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적당한 시기에 이루어져야 한다. 아마 그 시험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놀이 가운데 가장 위험한 놀이일지라도, 그리고 결국 다른 심판관 앞에서가 아니라, 증인인 우리 자신 앞에서 행해지는 시험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사람들은 자신의 시험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한 사람에게 연연해서는 안 된다. 설령 그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말이다. - 모든 사람은 감옥이며 또한 후미진 구석의 모퉁이다. 조국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비록 그것이 대단히 위기에 처해 있고 도움이 필요할지라도 말이다. - 물론 승리에 찬 조국에서 자신의 마음을 떼어놓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동정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비록 그것이 우리가 우연히 보아왔던 보다 높은 인간의 기이한 고통과 고립무원의 상태에 해당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한 학문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 : 그것이 겉으로는 바로 우리에게 남겨진 가장 귀중한 발굴물로 한 사람을 유혹할지라도 말이다. 자기 자신의 해방에 매달려서는 안 되며, 더욱더 많은 것을 자기 아래로 내려다보기 위해 언제나 더 창공 높이 날아오르는 새처럼 탐욕적으로 멀고 낯선 세계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 그것은 비상하는 자의 위험이다. 우리 자신의 유덕함에 사로잡혀서는 안 되며, 전체적으로 우리는 예를 들어 우리의 '손님을 후대하는 친절'처럼 어떤 개별적인 덕의 희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 : 고귀한 품성을 지닌 사람과 풍부한 영혼을 가진 사람은 소모적이고 거의 무관심하게 자기 자신을 대하며 편견 없는 덕을 악덕에 이를 때까지 밀고 나가는데, 이는 위험 중의 위험이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보존할 줄 알아야만 한다. 이것이 가장 강한 독립성에 대한 시험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2장> 자유정신, 제4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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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함과 간지(奸智)

 

한 정신의 강함은 그 정신이 곧 얼마나 '진리'를 견뎌내느냐에 따라,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어느 정도까지 정신이 진리를 희석시키고 은폐하며 감미롭게 만들고 둔화시키고 위조할 필요가 있느냐에 따라 측정된다. 그러나 진리의 어떤 부분들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악한 사람이나 불행한 사람이 훨씬 유리하며 성공할 개연성이 더 높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행복한 악인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자. ㅡ 이들은 도덕가들이 의식적으로 말하지 않는 종족이다. 아마 혹독함과 간지(奸智)는, 학자들이 높이 평가하고 당연한 것으로 평가하는, 부드럽고 섬세하고 양보하는 온순한 성품과 쉽게 받아들이는 재간보다도 강하고 독립적인 정신적 인간과 철학자가 나오는 데 더 유리한 조건이 된다. 앞에서 말한 것은 '철학자'라는 개념을 책으로 쓰는 ㅡ 게다가 자신의 철학을 책에 옮기는! ㅡ 철학자로 한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자유정신의 철학자 상(像)에 대한 마지막 특징을 스탕달Stendhal이 제시하고 있는데, 나는 독일 취향을 위해 그를 강조하는 것을 단념하지 않을 것이다 : ㅡ 그는 독일 취향에 반대되는 길을 걷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위대한 심리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훌륭한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환상 없이 냉정하고 명석해야 한다. 재산을 모은 은행가는 철학적인 발견을 하기 위해 요구되는 성격 가운데 한 부분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실상을 있는 그대로 명확히 보는 것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2장> 자유정신, 제3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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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그 반대이다! 제기랄

 

"뭐라고? 대중적으로 말해, 그것은 신은 부정되었으나, 악마는 부정되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 반대이다! 그 반대이다, 나의 친구들이여! 제기랄, 누가 그대들을 대중적으로 말하도록 강요한단 말인가!ㅡ

 

- 니체, 『선악의 저편』, <제2장> 자유정신, 제3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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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에의 의지

 

문제는 결국 우리가 의지를 정말로 작용하는 것으로 인정하는가, 우리가 의지의 인과성을 믿는가이다 : 우리가 그것을 인정한다면, 또 근본적으로 그것에 대한 믿음이란 단지 인과성 자체에 대한 우리의 믿음일 뿐이라면 ㅡ , 우리는 의지의 인과성을 유일한 인과성으로 가정하는 시도를 해야만 한다. '의지'는 물론 '의지'에 대해서만 작용할 수 있다. ㅡ '물질에는 작용할 수 없다(예를 들자면 '신경'에는 작용할 수 없다ㅡ) : 과감하게 '작용'이 인정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의지가 의지에 대해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ㅡ그리고 모든 기계적인 사건은 그 안에서 어떤 힘이 작용하는 한, 바로 의지의 힘, 의지의 작용이 아닌가 라는 가설을 세워야만 한다. ㅡ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의 총체적인 충동의 생을 한 의지의 근본 형태가ㅡ즉 나의 명제에 따르면, 힘에의 의지가 ㅡ 형성되고 분화된 것으로 설명하게 된다면, 또 우리가 유기적 기능을 모두 이러한 힘에의 의지로 환원할 수 있고, 그 힘에의 의지 안에서 생식과 영양 섭취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도 ㅡ 이것은 하나의 문제이다 ㅡ 찾아낸다면, 작용하는 모든 힘을 명백하게 힘에의 의지로 규정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내부에서 보여진 세계, 그 '예지적 성격'을 향해 규정되고 명명된 세계 ㅡ 이는 바로 '힘에의 의지'이며,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 ㅡ

 

- 니체, 『선악의 저편』, <제2장> 자유정신, 제3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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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 이 세계가 왜 허구여서는 안 되는가?

 

오늘날 철학자는 불신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의심의 심연에서 가장 악의적인 곁눈질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 ㅡ 이와 같은 음울한 찌푸린 얼굴과 어조로 농담하는 나를 용서하기 바란다 : 왜냐하면 바로 나 자신이야말로 오랫동안 기만하거나 기만당하는 것을 달리 생각하고, 달리 평가하는 법을 배워왔으며, 최소한 기만당하는 것에 반항하게 되는 철학자의 맹목적인 분노에 대해 옆구리를 쥐어박을 준비가 되어 있다. 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가? 진리가 가상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은 단지 도덕적인 선입견일 뿐이다. 이것은 심지어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가장 잘못 증명된 가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음의 것은 많이 허용되어야 한다 : 관점적 평가와 가상성에 바탕을 두지 않는 한, 삶이란 것은 전혀 존립할 수가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많은 철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인 감격과 우매함으로 '가상의 세계'를 완전히 없애버리려고 한다면, 이제 그대들이 이것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해보면, ㅡ 그러면 최소한 이때 그대들이 말하는 '진리'라는 것 역시 더 이상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실로 무엇이 도대체 우리가 '참'과 '거짓'이라는 본질적인 대립이 있다고 가정하도록 강요하는가? 가상성의 단계가 있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으로, 그리고 마치 가상의 좀더 밝고 어두운 음영과 전체적인 색조처럼 ㅡ 화가의 언어로 말하자면 다양한 색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 이 세계가 왜 허구여서는 안 되는가? 이때 "그러나 허구에는 창작자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라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왜 있어야만 하는가 하고 묻는 사람에게는 명백하게 대답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러한 '있다'는 것이 아마 허구에 속하는 것은 아닐까? 술어나 목적어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주어에 대해서도 결국 어느 정도는 역설적이어도 되지 않는가? 철학자는 문법에 대한 믿음을 넘어서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여자 가정교사들에게 모두 경의를 표하자 : 그러나 철학이 여자 가정교사의 믿음과 결별해야 할 시기가 되지 않았는가? ㅡ

 

- 니체, 『선악의 저편』, <제2장> 자유정신, 제34

 

(나의 생각) 읽으면 읽을수록 매력적인 대목이다. 『선악의 저편』뿐만 아니라『도덕의 계보』까지 다 읽고 난 뒤에 다시 찾아와 읽으면 그 '느낌'이 더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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