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니체전집 1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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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종교적인 어리석음!

 

"그러므로 솔직하게 말해 종교란 정상적인 인간이 만든 산물이며, 인간이 더욱 종교적일수록, 무한한 운명을 확신할수록, 더욱 더 진실해진다.······ 인간은 선할 때, 미덕이 영원한 질서와 조응되기를 바란다. 사심 없는 태도로 사물을 관조할 때, 인간은 죽음이 불쾌하며 부조리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이 가장 잘 보는 것은 바로 이 순간이라고 어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문장은 내 귀와 습관에 매우 반대되는 것이었기에, 그것을 발견했을 때 나는 그 문장 옆에 '한마디로 종교적인 어리석음!'이라는 내 최초의 분노를 적어넣었다. ㅡ 마지막 분노에 이르러 나는 거꾸로 뒤집힌 진리를 담은 이 문장이 심지어는 좋아지기까지 했다. 자기 자신에게 대척하는 자가 있다는 것은 실로 정중하고 훌륭한 일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3장> 종교적인 것, 제4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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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니체전집 1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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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의 지적 양심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의 영혼과 그 한계,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도달한 인간의 내적 체험의 범위, 이러한 체험의 높이, 깊이, 넓이, 영혼에 관한 지금까지의 전 역사와 아직 다 고갈되지 않은 가능성 : 이것은 천부적인 심리학자와 '위대한 수렵'을 하는 친구에게는 예정되어 있는 수렵장이다. 그러나 그는 얼마나 자주 절망하며 이렇게 말해야만 하는가? "나는 혼자다. 아, 단지 혼자일 뿐이다. 그런데 이처럼 거대한 숲과 원시림이 있구나!" 그래서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사냥감을 쫓기 위해 그들을 인간 영혼의 역사 안으로 몰아갈 수 있는 수백 명의 몰이꾼들과 예민하게 훈련된 사냥개를 원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헛된 일이다 : 바로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모든 것 중에서 몰이꾼과 사냥개를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는 철저하게 쓰디쓰게 되풀이해서 확인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용기, 현명함, 예민함이 필요한 새롭고 위험한 사냥터에 학자를 보내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은 '큰 사냥'이, 그러나 큰 위험도 시작되는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예민한 눈과 코를 상실하게 된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종교적 인간homines religiosi의 영혼 속에서 지와 양심의 문제가 어떤 역사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추측하고 확인하려는 사람은 아마 파스칼의 지적 양심이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그만큼 깊고 상처받고 거대해야 할 것이다 : ㅡ 그런 다음에는 위험하고 고통에 찬 체험의 혼란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정리하고 형식화할 수 있게 하는, 밝고 악의에 찬 정신성의 저 드넓게 펼쳐진 하늘이 여전히 필요할 것이다. ㅡ 그러나 누가 나에게 이러한 봉사를 하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봉사하는 자를 기다릴 만한 시간이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ㅡ 그러한 사람의 출현은 분명 너무 드물며, 그러한 사람은 어느 시대에도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결국 사람들은 몇 가지를 알기 위해서 스스로 모든 것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 이는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ㅡ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그러한 종류의 호기심은 이제 모든 악덕 가운데 가장 기분 좋은 것으로 남는다. ㅡ 용서를 빈다! 진리에 대한 사랑은 그 보답을 하늘에서와 이미 지상에서도 얻게 된다는 것을 나는 말하고 싶었다. ㅡ 

 

- 니체, 『선악의 저편』, <제3장> 종교적인 것, 제45절

 

 

 * * *

 

 

파스칼의 신앙

 

원시 그리스도교가 요구했고 드물지 않게 이르렀던 그 신앙, 여러 철학 학파들의 수세기에 걸친 긴 논쟁을 과거에도 당시에도 경험하고, 더욱이 로마제국이 베푼 관용의 교육을 받았던, 회의적이고 남국의 자유정신의 세계의 한가운데 나타났던 신앙 ㅡ 이 신앙은 루터나 크롬웰 같은 인물이나 그 밖에 북부의 정신적 야만인들이 그들의 신과 그리스도교에 매달려왔던 저 순진하고 거친 신민(臣民)의 신앙이 아니다오히려 그것은 이성의 지속적인 자살과 끔찍할 정도로 유사해 보이는 저 파스칼의 신앙이며, ㅡ 이 것은 단 한 번에, 일격에 죽일 수 없는 끈질기게 장수하는 벌레 같은 이성이었다. 그리스도교적 신앙은 처음부터 희생이다 : 모든 자유와 긍지, 모든 정신의 자기 확실성에 바치는 희생이다. 동시에 이는 노예가 되는 것이며 자기 조소이자 자기 훼손이다. 연약하고 복잡하며 까다로운 양심에 요구되는 이러한 신앙에는 잔인성과 종교적인 페니키아주의가 깃들여 있다 : 이 신앙의 전제가 되는 것은 정신의 복종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준다는 것, 또한 그러한 정신에 '신앙'은 극도의 부조리한 것으로 대립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그러한 정신의 전 과거와 습관은 부조리에 반항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모든 전문 용어 체계에 무감각한 현대인들은, '십자가에 매달린 신'이라는 형식의 역설이 고대의 취미에서는 전율할 정도로 최상의 것으로 느껴졌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어느 곳에서도 이 형식처럼 전도된 상태에서의 그와 같은 대담성, 그만큼 무서운 것, 문제시되는 것, 의혹이 가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 이는 고대의 모든 가치의 전도를 약속하는 것이었다. ㅡ 이러한 방식으로 로마에 대해, 그 고상하지만 경솔한 관용에 대해 로마적인 산앙의 '카톨릭주의'에 복수를 한 것은 동방이며,  깊이 있는 동방이고, 동방의 노예였다 : 노예로 하여금 주인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게 만든 원인은 언제나 신앙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 즉 신앙의 진지함에 대한 반쯤은 금욕적이고 반쯤은 냉소적인 무관심이었다. '계몽주의'는 반란을 일으킨다 : 즉 노예는 절대적인 것을 바라는 것이다. 그는 도덕에서조차 단지 포학한 것만을 이해할 뿐이다. 그는 미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고하게 심층에 이를 때까지 고통스러울 때까지 병이 들 정도로 사랑을 한다. ㅡ 감추어진 그의 많은 고통은 고통을 부정하는 듯 보이는 고상한 취미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다. 고통에 대한 회의, 근본적으로는 단지 귀족 계급의 도덕적 태도에 대한 회의는 프랑스 혁명과 더불어 최후의 거대한 노예 반란이 일어나는 데도 적지 않게 기여했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3장> 종교적인 것, 제4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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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돌리고 떠나야 할 때

 

지상에서 지금까지 종교적 신경증이 등장했던 곳에서 우리는 그것이 고독, 단식, 성적 금욕이라는 세 가지 위험한 섭생 규정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ㅡ 그러나 여기에서는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 또는 여기에 원인과 결과의 관계라는 것이 도대체 있는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 확실하게 단정할 수 없다. 끝까지 의심할 때 당연히 나오는 결론은 조야한 민족이나 온순한 민족의 경우, 가장 갑작스럽고 방탕하며 관능적인 쾌락은 또한 바로 종교적 신경증의 가장 일반적인 증상에 속하며, 이는 곧 마찬가지로 갑자기 참회의 경련이나 세계 부정과 의지 부정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 이 두 가지 증상은 아마 가면을 쓴 간질병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 어느 곳에서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해석에서 벗어날 수 없다 : 어떤 유형의 인간 주변에도 지금까지 그렇게 불합리와 미신이 가득 차 무성했던 적이 없으며, 지금까지 인간에게, 심지어는 철학자들에게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진 사람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ㅡ 여기에서 바로 어느 정도는 냉정해지고 신중함을 배우고 이를 더 잘 표현한다면, 눈을 돌리고 떠나야 할 때인 것이다. ㅡ 가장 최근에 나타난 철학, 즉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배경에도 종교적 위기와 각성이라는 이러한 의문부호가 거의 문제 그 자체로 나타난다. 의지의 부정이란 어떻게 가능한가?성자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는 실제로 쇼펜하우어가 철학자가 되게 했고 철학을 시작하게 만든 문제였던 것처럼 보인다. 그의 가장 충실한 신봉자(아마도 독일에 관한 한, 그의 마지막 신봉자이기도 하다ㅡ), 즉 리하르트 바그너R. Wagner는 자기 자신의 필생의 작품을 바로 여기에서 마지막까지 완성했고, 또 마침내는 저 무서운 영원한 인간유형으로 육화된 살아 있는 인간형인 쿤드리Kundry를 무대에 올려 상연했다는 것은 진정 쇼펜하우어의 진정한 귀결이었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3장> 종교적인 것, 제4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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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 또한 이와 같은 존재가 아닌가

 

우리는 정신의 여러 나라에서 기거한 적이 있었으며 적어도 손님으로 머문 적은 있었다. 편애와 증오, 젊음, 출신, 인간과 책을 만나는 우연성, 또는 방황의 피로조차 우리를 가두는 것 같았던, 그러한 곰팡내 나는 편안한 구석의 은신처에서 우리는 언제나 빠져나왔다. 명예, 돈, 관직 또는 관능의 도취 속에 숨어 있는 의존성이라는 유혹의 수단에 분노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심지어 궁핍이나 자주 변하며 엄습해오는 병에 대해서조차 감사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항상 우리를 어떤 규칙이나 그 '선입견'에서 해방시켜주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있는 신, 악마, 양, 벌레에게 감사하며 악덕에까지 호기심을 갖게 되고 잔인할 정도로 몰두하는 탐구자가 된다. 포착할 수 없는 것을 아무 생각 없이 모색하는 손가락을 가지고 있고 소화할 수 없는 것을 소화시키고자 하는 이와 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이미 날카로운 통찰력과 예민한 감각을 요구하는 수공업적인 작업이 되며, 넘치는 '자유의지' 덕분에 어떤 모험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 어느 누구도 쉽게 그 궁극적 의도를 간파할 수 없는 표면에 나타난 영혼과 배후에 숨겨진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그 누구의 발도 마지막까지 내달릴 수 없는 전경(前景)과 배후(背後)를 가지고 있다. 이는 빛의 외투 안에 숨어 있는 은둔자이며, 우리가 상속자이며 낭비자처럼 보여도 실은 정복자이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리하는 사람이자 수집가이며, 우리 자신의 부와 우리 자신의 가득 찬 서랍을 채우는 구두쇠이며, 배우는 것과 잊어버리는 것에 능란하며, 도식을 만드는 것에 독창적인 재능이 있고 가끔은 범주표(範疇表)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가끔은 현학자가 되기도 한다. 아니, 필요하다면 허수아비조차도 될 수 있다. ㅡ 이것이 오늘날 필요하다. 즉 우리가 천성상 굳게 맹세한 시기심 많은 고독의 친구들인 한,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심야의, 정오의 고독의 친구인 한 그러하다 : 그러한 종류의 인간이 바로 우리다. 우리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여! 그대 다가오는 존재들이여, 아마 그대들 또한 이와 같은 존재가 아닌가, 그대 다가오는 존재들이여? 그대 새로운 철학자들이여?

 

- 니체, 『선악의 저편』, <제2장> 자유정신, 제4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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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인

 

잘못해서 '자유정신'이라고 불리는 이 사람들은 간단히 그리고 나쁘게 말하면, 평균인Nivellirer에 속한다. 즉 그들은 민주주의적 취향과 그 '현대적 이념'을 표현하는 능변과 달필의 노예일 뿐이다 : 이들 모두는 고독을 모르는 인간, 자신의 고독을 가지지 못하는 인간, 졸렬하고 평범한 젊은이들이다. 그들이 용기와 존경할 만한 예절을 갖춘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들은 자유롭지 못하고 웃을 수밖에 없을 만큼 천박하며, 특히 지금까지의 낡은 사회 형식 속에서 대략 모든 인간적인 불행과 실패의 원인을 보는 근본 성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 여기에서 진리는 다행히 전도된다! 그들이 전력을 다해 추구하는 것은 저 무리들처럼 푸른 목장의 일반적인 행복, 즉 모든 사람에게 삶의 안전, 무사, 쾌적함과 안도가 있는 행복이다. 그들이 지칠 때까지 마음껏 부른 두 가지 노래와 교리는 '권리의 평등'과 '고통받는 모든 자에 대한 공감'이라는 것이다. ㅡ 그들은 고통 자체를, 제거해야만 하는 무엇으로 여긴다. 어디에서 또 어떻게 지금까지 '인간'이라고 하는 식물이 높이 성장해왔는가의 문제에 눈과 양심을 열어왔던 우리, 반대 입장에 있는 우리는 이러한 것이 언제나 반대 조건 아래 일어났으며, 이를 위해 인간 상황의 위험성은 어마어마하게 증대하고, 발명하고 위장하는 그의 힘(그의 '정신' ㅡ )이 오랫동안 압박과 강제를 통해 정교하고 과감하게 발전되어가고, 그의 삶의 의지는 절대적인 힘의 의지까지 상승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 ㅡ 우리는 가혹함, 폭력, 노예 근성, 뒷골목과 가슴속에 있는 위험, 은둔, 금욕주의, 유혹의 기술, 모든 종류의 악마성 그리고 인간이 가진 모든 악과 공포스러운 것, 포악스러운 것, 맹수 같은 것과 교활한 것이 그와 반대되는 것으로서 '인간'이라는 종을 향상시키는 데 잘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 ㅡ 이렇게 많은 말을 했었지만 우리는 단 한 번도 충분히 말한 적이 없다. 어쨌든 우리가 이 자리에서 말을 하든 침묵을 지키든, 현대의 모든 이데올로기와 군중들의 소망과는 다른 극(極)에 존재한다 : 아마 그들의 대척자(對蹠者)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자유정신의 소유자'인 우리가 바로 이야기하길 좋아하는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라고 해서 무엇이 이상한가? 정신이란 것이 무엇으로부터 자기를 해방시킬 수 있고, 그 다음에는 정신이 어디로 인도되는지 우리가 밝히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엇이 이상한가? 그런데 이것은 '선악의 저편'이라는 위험한 형식과 관계가 있으며, 적어도 우리는 이것과 혼동되지 않게 막아야 한다 : 우리는 '자유사상가librespenseurs, libri pensatori, Freidenker' 와는 다른 존재이며, 스스로 이러한 '현대적 이념'의 용감한 대변인으로 불리기 좋아하는 그러한 모든 존재와도 다른 존재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2장> 자유정신, 제4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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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선'이라는 것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수많은 사람과 의견을 일치시키려는 좋지 않은 취미에서 스스로 벗어나야만 한다. '선'이라는 것은 이웃 사람들의 입에 회자될 때 더 이상 선이 아니다. '공동선'이라는 것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이 말은 자기 모순이다 : 공동적이 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가치가 적은 것일 뿐이다. 지금도 그렇고 항상 그랬던 것처럼, 결국 그럴 수밖에 없다 : 위대한 일은 위대한 사람을 위해 있으며, 심연은 깊이 있는 사람을 위해 있고, 상냥함과 전율은 예민한 사람을 위해 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간결하게 말한다면, 모든 귀한 것은 귀한 사람을 위해 있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2장> 자유정신, 제4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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