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을 읽어라. 그전에 패디먼을 먼저 만나보라.
제5부(98∼133)
98. 지크문트 프로이트, 1856∼1939, 꿈의 해석, 성욕에 관한 3논문, 문명과 그 불만, 기타 작품들
정신분석은 다음 두 가지 사항을 주장한다. 하나는 정신분석이 과학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독특한 방법론이라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심리 이론이고 노이로제 환자를 치료하는 특수한 기술이다. 이론과 기술은 몇 개의 근본적인 개념을 바탕으로 한다. 정신분석 이론들은 이제 진부한 것이 되었지만 1백 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가령 인간의 정신에는 무의식이 있고, 억압의 메커니즘이 있으며, 유아 성욕은 나중의 인성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획기적 이론을 내놓았다.
사상의 증권거래소에 지난 20년 동안 그의 주가가 많이 떨어졌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99. 조지 버나드 쇼, 1856∼1950, 희곡 선집과 서문들
버나드 쇼는 재치, 열정, 끈기, 명석함을 발휘하면서 1세기 가까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사상을 설명하고 광고했다. 쇼는 94세까지 살았다. 자궁 속은 아니더라도 요람에서부터 사색을 한 사람이고 방대한 편지, 서른네 권의 전집 속에 많은 희곡, 서문, 소설, 경제논문, 팸플릿, 문학평론, 연극평론, 음악평론, 시사평론 등을 남겼다. 그가 언제나 흠모했던 초인들과 마찬가지로 쇼도 예측할 수 없는 앞날을 내다보며 살았다, 이런 사람을 어떤 공식으로 요약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말했다. "경제 지식은 해부학 지식이 미켈란젤로에게 중요한 것처럼 내게는 소중한 것이었다."
105. 마르셀 프루스트, 1871∼192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것은 서양 언어로 씌어진 일급의소설들 중 가장 긴 작품이다. 이 소설을 읽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런 만큼 보람도 크다. 만약 독자가 이 소설에 마음이 끌린다면(마음이 끌리지 않는 독자가 더 많을 것이다), 앞으로 5∼10년 사이에 틈틈이 시간을 내어 이 책을 읽어 그것을 독자의 내면세계에 흡수하면 좋을 것이다.
『율리시스』의 주인공은 더블린이라는 장소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은 시간이다. 예술에다 "시간의 형태"를 집어넣는 것,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답변하는 것이 프루스트의 목표였다.
나는 결론으로 당대의 미국 1급 평론가였던 에드먼드 윌슨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는 프루스트에게서 우리 시대의 탁월한 정신과 상상력을 만난다. 프루스트는 그 위력이나 영향력에 있어서, 니체[97], 톨스토이[88], 바그너, 입센[89] 같은 한 세기 전의 예술가들에게 버금가는 우리 시대의 예술가이다. 그는 상대성의 관점에서 소설의 세계를 재창조했다. 그는 문학 분야에서 현대 물리학의 새 이론(양자 이론)에 버금가는 새로운 글쓰기 이론을 제공했다."
110. 제임스 조이스, 1882∼1941, 율리시스
『율리시스』는 침투하기가 불가능한 소설처럼 보인다. 이 높은 산은 단숨에 걸어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만 올라갈 수는 있다. 이 산의 정상에 오르면 아주 풍요로운 광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
1. 이 작품은 『신곡』[30] 이래 가장 완벽하게 조직된 작품이다.
4. 약간의 의견 불일치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인 견해로서, 이 작품은 "퇴폐적"이거나 "부도덕"하거나 "비관적"이지 않다. 『평생 독서 계획』에 포함된 다른 작가들의 작품이 그러하듯이, 강력한 정신이 포착한 인생의 비전을 제시한다. 그 정신은 부분적이거나, 감상적이거나, 자기 변명적인 것은 일체 배격한다.
5. 그 모태가 되는 『오디세이아』[3]와는 다르게, 이 책은 읽으면 알 수 있는 책이 아니다. 베토벤의 후기 현악 4중주곡들이 오래 듣고 연구할수록 그 풍부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듯이, 오로지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만 그 비밀스러운 뜻을 드러낸다.
읽을 수 있는 데까지 읽어라. 그런 다음 책을 내려놓았다가 1년 뒤에 다시 시작하라.
『율리시스』를 읽으려고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모험이다. 또 독자들에게 큰 소득을 안겨줄 것이다.
112. 프란츠 카프카, 1883∼1924, 심판, 성, 단편선집
서양의 경우만 생각한다면, 카프카의 이름은 가장 영향력이 큰 20세기 작가 다섯 명에 들어갈 것이다. 나머지 네 명은 조이스[110], 프루스트[105], 예이츠[103], T.S. 엘리엇[116]이다. 카프카 사후 20년이 지난 시점에 시인 W.H. 오든[126]은 이렇게 썼다. "각 시대를 대표했던 단테[30], 셰익스피어[39], 괴테[62]와 같은 작가를 20세기에 고르라고 한다면 카프카가 1순위일 것이다."
그는 1924년에 요절했지만, 그의 상징적 비전은 20세기를 미리 내다본 듯하다. 독일에 들어선 총체적 테러의 국가, 현대 정부의 본질적 구조인 관료주의적 미로, 길을 잃어버리고 우왕좌왕 방황하는 현대의 영혼, 기계에 의한 인간 영혼의 침탈,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세상에 만연한 보편적 죄책감, 비인간화 등이 카프카가 예견한 것이다. 보르헤스[121]는 "카프카가 음울한 신화와 폭력적인 사회 제도를 고발한다"고 말했다.
113. D.H. 로렌스, 1885∼1930, 아들과 연인, 사랑하는 여인들
로렌스가 폐결핵으로 사망했을 때 겨우 45세였다는 사실은 좀 믿기가 어렵다. 그의 첫 장편이 출간된 1911년부터 사망한 1930년까지 매해 그의 책이 한 권씩은 출간되었다. 1930년 한 해에만 무려 여섯 권이 출간되었고 그의 유작도 열두 권이 넘는다. 이렇게 다작을 하면서도 로렌스는 널리 여행을 다녔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영향을 주었으며, 다양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고, 그의 비타협적인 사상 때문에 벌어진 불운한 논쟁들에 말려들었다. 이 홀쭉하고 연약한 턱수염 난 사나이-소설가, 시인, 극작가, 수필가, 비평가, 화가, 예언가-는 내부에 생명의 에너지가 활활 불타올랐다.
"소설의 도움으로 독자는 생중사(生中死:살아 있으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를 면할 수 있다"라고 로렌스는 말한다. 그는 독자를 변화시키고, 독자의 내부에 강렬한 느낌과 환희를 다시 일으켜 놓고 싶어 한다. 그는 인류가 이런 강력한 생의 감각을 현재 잃어버렸거나 잃는 중이라고 진단한다.
117. 올더스 헉슬리, 1894∼1963, 멋진 신세계
20세기의 유토피아 문학은 르네상스 시대와는 다르게 부정적이고 디스토피아적이다. 우리는 그 문학에서 격려의 함성이 아니라 경고의 외침을 듣게 된다. 헉슬리가 인용한 러시아 철학자 베르쟈예프가 말했듯이, 우리의 관심사는 어떻게 유토피아에 도달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유토피아를 피할 것인가이다. 헉슬리와 오웰[123]과 기타 수십 명의 현대 작가들에 의하면 우리는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애쓰다가 비인간화의 지옥으로 빠져 버렸다는 것이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6백 년 뒤의 미래를 예언하고 있다. 그 미래에는 동물들(여전히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동물들)과 그의 관리자들이 살고 있다. 관리를 받는 동물들은 그들의 예속 상태를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는다. 그들은 행복하거나 아니면 그런 상황에 적응되어 있다. 국가의 헌법은 공동체, 정체성, 안정성의 세 개 조항만 제시한다. 그 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 예술, 이론과학, 가족, 정서, 개인의 노력과 개인 간 차이 등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119. 어니스트 헤밍웨이, 1899∼1961, 단편소설 전집
그는 죽음, 열정, 패배, 인간 희망의 끈덕짐 등 궁극적인 주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헤밍웨이의 문학세계는 실제에 있어서 그리 폭넓지 않다. 그보다 명성이 떨어지는 소설가들 중에서도 우리는 인간의 본성을 더 깊이 더 넓게 탐구한 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 헤밍웨이를 위대한 작가들과 비교한다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스탕달[67] 곁에 세워 놓으면 그는 청년처럼 보인다. 헨리 제임스[96] 옆에 서면 원시인처럼 보이고, 톨스토이[88] 옆에서는 미성년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업적은 적지 않다. 마크 트웨인[92]이 쌓아놓은 기초 위에다 그는 영어 문장을 문학적으로 개조했다. 그는 어떤 한 순간의 진실, 통찰, 체험을 단 한 단어의 낭비도 없이 간결하게 드러낸다. 그가 문학에 기여한 공로는 이런 테크닉 측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도덕적인 기여도 했다. 헤밍웨이는 언어의 정직성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주었다.
123. 조지 오웰, 1903∼1950, 동물농장, 1984, 버마 시절
오웰은 『동물농장』으로 일약 유명해졌다. 『걸리버 여행기』[52] 처럼, 이 소설은 아주 오래된 문학 형태인 동물 우화를 현대적으로 세련되게 각색한 것이다. 캉디드[53]가 라이프니츠 낙관론에 대한 고전적 풍자라면, 『동물농장』은 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고전적 풍자이다. 비록 소련이 해체되기는 했지만 이 소설의 풍자 정신은 그대로 살아 있다. 그 생생한 움직임, 간결성, 직접성, 현장성, 재치 등은 볼테르의 뛰어난 특징을 연상시킨다.
『나는 왜 쓰는가?』라는 글에서 오웰은 자신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혔다. "『동물농장』은 내가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쓴 최초의 책이다. 나는 이 책에서 정치적 목적과 예술적 목적을 하나로 융합하려 했다."
『1984』는 그의 걸작일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책들 중 하나이다. 이 소설을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비교해 보면 1932년부터 1949년까지 17년 동안에 세상이 얼마나 더 암담해졌는지 알 수 있다. 이 두 작품은 디스토피아의 암울한 세계를 그리고 있는데 오웰의 소설이 더 암울하다.
127. 알베르 카뮈, 1913∼1960, 페스트, 이방인
『시지프의 신화』와 『반항인』등으로 카뮈의 정치철학을 어느 정도 파악하는 것도 유익하겠지만 그보다는 중편인 『이방인』과 본격 장편인 『페스트』를 통하여 카뮈의 멋진 정신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무의미한 살인 행위를 다룬 『이방인』은 우리 시대의 징후라 할 수 있는, 뿌리 없는 비순응적 감수성을 다룬 작품이다. 주인공의 폭력 행위와 그에 대한 사회의 징벌권의 대비는, 주인공과 사회의 가치 사이에 심한 괴리가 있음을 보여 준다. 사회는 자신의 가치를 당연시하지만 주인공은 그것에 대하여 강력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어떻게 악과 선이 구분될 수 있으며 또 악과 선을 알아볼 수 있는가?
그렇지만 소설을 읽어나가는 동안, 우리는 페스트의 효과가, 무심한 우주에 떨어진 고립된 인간들이 삶의 허무함을 초월하려는 노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카뮈는 이 소설의 서문에서 대니얼 디포[51]의 말을 인용했다. "어떤 형태의 구속을 다른 형태의 구속으로 재현하는 것은, 있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실제로 있는 것을 재현하는 것처럼 그럴듯한 일이다." 카뮈는 소설 속에서 우화나 알레고리를 시도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실적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우리는 뭔가 다른 것을 느낀다.
129. 알렉산드르 이사예비치 솔제니친, 1918∼2008, 제1원, 암병동
『암병동』 또한 감동적인 소설이다. 솔제니친 자신이 1950년대 중반에 암 치료를 받은 바 있었다. 그는 이 아름다운 작품을 통하여, 토마스 만이 『마의 산』[107]으로 독일 문학에 기여한 것처럼, 러시아 문학에 기여했다. 『암병동』은 그의 장편소설들이 다 그렇듯이 병동을 다룬 것이 아니라 감옥을 묘사한 것이다. 그는 러시아 전역을 감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종양이 생기면 죽는다. 강제수용소와 강제 유배가 암처럼 생겨나는 나라가 어떻게 부지할 수 있겠는가?" 외부적으로 병원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으나, 『암병동』은 카뮈의 『페스트』[127]처럼, 인간의 존엄성을 찬양한 작품이다.
130. 토머스 쿤, 1922∼1996, 과학 혁명의 구조
쿤은 과학이 가치중립적이지도 않고 또 과학적 탐구가 벌어지는 문화적 맥락으로부터 면제되지도 않는다고 주장했다. 최근에 들어와 일부 과격한 과학 비평가들은 쿤의 저서를 인용하면서 이런 주장을 펴기에 이르렀다. 과학은 객관적 의미의 진실을 발견할 수가 없으며, 모든 과학적 결과는 문화적 전제조건의 표현일 뿐이다. 쿤은 이렇게 말한 적이 없고, 또 자신의 이론을 이런 식으로 왜곡 인용하는 사람들을 거부했다. 그는 물리학자답게 과학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어떤 특정 패러다임 아래에서 어던 진리는 발견될 수가 없다. 그리하여 과학의 신빙성에 대한 질문은 우리 시대의 문화 전쟁에서 핵심적 주제가 되어 왔다.
『과학혁명의 구조』는 진지한 저서이다. 하지만 진지한 주제에 대하여 관심이 많은 일반 독자들이 읽지 못할 내용은 없다. 문명이 세상을 인식해 온 방식과, 미래에 대한 인간의 지식을 경정짓는 각종 요소들에 대하여 깊은 통찰을 보여 주는 획기적인 저서이다.
132.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1928∼ , 백 년 동안의 고독
저자는 우리에게 말한다. 부엔디아 가문의 한 역사가는 "사건들을 전통적인 연대기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1백 년간의 세월을 교묘하게 압축하여 그 동안에 벌어졌던 사건들이 한 순간에 공존하도록 배열했다." 소설 속에서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는 이렇게 묘사된다.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명석하게 깨달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시간 또한 뒤로 넘어질 수가 있고 그리하여 우연들이 발생한다. 그 결과 시간은 깨어져서 그 영원한 파편 한 조각을 방 안에다 남긴다."
그 넘치는 힘, 유머(비록 음울하지만), 의도적인 과장, 언어의 왜곡, 인간 체험의 신화화 등에 있어서『백 년 동안의 고독』은 『평생 독서 계획』에 추천된 책들 중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35]에 가장 가깝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은 가장 위대한 남미 소설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한 가문의 고통, 광기, 망상, 근친상간적 사랑, 엄청난 열정을 다루고 있지만, 동시에 남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비극적인 삶과 꿈을 환기시킨다.
133. 치누아 아체베, 1930∼ ,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그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새로 지어진 교회의 마법이었다. 그 교회는 괴상한 새로운 교리를 내세워서 그의 부족 사람들을 유혹했다. 게다가 식민 종주국 영국의 지역 행정관의 권세는 대단했다. 그는 마을 밖에서 경찰들을 동원해 왔고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증오했다. 이 새로운 상황에서 몰락하게 되는 오콩고의 비극은 이런 것이다. 그가 잘 알고 있는 전통 사회라면 그는 올바른 발언을 하고 올바른 행동을 하며 아주 효과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권력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와 영국 식민주의자들이 등장하면서 사태는 일변했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했고 그가 권위를 내세울수록 그의 추락은 더욱 확실해졌다.
아체베는 이 소설을 통하여 소포클레스나 셰익스피어의 드라마에 버금가는 인물을 창조했다. 그는 아프리카의 오이디푸스 혹은 리어왕이다. 운명에 의해서 몰락하는 것이 아니라, 부적절한 목표의 고집스러운 추구와 외부 환경에 대한 무지에 의해 몰락하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아주 매력직인 소설이고 또 모던 클래식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