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역사] 도끼에서 싹튼 ‘생각‘의 과거, 현재,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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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1859년 5월 에번스와 프레스트위치는 아브빌의 부셰 드 페르테스와 헤어져 귀국했다. 석기의 용도, 중요성, 타당성은 더 이상 부정하거나 오해할 수 없었다. 유럽 전역의 고생물학자, 고고학자, 지질학자들이 그 구도를 지지했다. 하지만 혼란의 여지는 여전히 있었다. 퀴비에의 후계자인 에두아르 라르테는 프레스트위치처럼 인간의 역사가 오래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러나 라이엘은 오랫동안 그 생각에 반대했다(그가 찰스 다윈에게 편지를 보내 '오랑우탄으로 돌아가기'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사과한 일은 유명하다). 다윈은 프레스트위치와 에번스가 영국으로 돌아간 그 해에 『자연선택 또는 생존경쟁에서 선택된 종의 보전에 의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를 출간했다. 당시 그의 주요 목적은 인간의 역사가 오래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종이 어떻게 다른 종으로 변화할 수 있는지를 밝히려는 데 있었다. 그래서 체임버스의 견해에 의존했고 조물주의 필요성을 제거했다.(44쪽)


  

 

돌도끼

고고학자들은 돌도끼를 기준으로 진보를 바라보았다. 그에 따라 돌도끼, 청동도끼, 쇠도끼의 '세 시대 구분'이 도입되었다. 처음에 사람들은 아주 고대에 '석기시대'가 있었다는 관념을 격렬히 거부했다. 초기 인간이 지금은 멸종한 동물들과 공존했다는 사실을 누구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부셰 드 페르테스가 프랑스 북부의 자갈층에서 멸종한 동물의 뼈와 함께 석기를 발견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1860년경에는 『종의 기원』이 출판된 데 힘입어 급속히 견해가 바뀌기 시작했고, 인간의 탄생이 훨씬 오래되었다는 견해도 받아들여졌다. 찰스 라이엘도 마침내 지구의 진화적 관점을 인정하고, 이후 이를 입증하는 많은 증거를 수집해 『원시 인류의 지질학적 증거』(1863)를 펴냈다.

초기 석기가 극히 조잡하다는 것은 초기 인간의 사회적·문화적 환경이 그만큼 원시적이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존 러벅은 사회도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기원에서 진화되었으리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당시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19세기의 종교 사상가들은 여전히 현대인이 타락 이전의 아담과 이브와 비교해 퇴보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러벅은『선사시대』(1965)에서 처음으로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라는 용어를 만들고, 구석기시대는 뗀석기, 신석기시대는 간석기를 사용했다고 구분했다.(920∼921쪽)


  

인간의 손

『인간의 유래』에서 다윈은 무엇보다도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면서 정신의 능력이 엄청나게 증대했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다. 진화가 느리고 완만한 과정이라면 그런 커다란 변화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다윈의 답은 그 책의 4장에 있다. 그는 인간이 독특한 신체적 속성을 가졌다는 논리를 발전시켰다. 그것은 바로 그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인 인간의 직립자세다. 다윈은 직립자세와 직립보행으로 인간의 손이 자유로워졌고, 그 결과 도구를 사용하는 능력이 발달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 때문에 원숭이들 가운데 한 종류의 지능이 급속히 발달했으리라고 보았다.

직립의 관념은 다윈이 처음 도입했으나 처음에는 그다지 중요하다고 인식되지 않았다. 1891∼1892년 외젠 뒤부아가 '자바인', 즉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지금은 '호모'를 붙여 부른다)를 발견한 뒤에야 그 이론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피테칸트로스의 대퇴골은 직립보행을 했다는 것을 말해주며, 두개골의 크기는 원숭이와 인간의 중간이었다. 그래도 직립의 중요성이 완전히 이해된 것은 1930년대의 일이다. (921∼922쪽)


 

 * * *

 

 

호모 파베르 Homo faber

인간이 지구상에 출현한 것을 어느 시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최초의 무기, 최초의 연장이 제조된 시기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부셰 드 페르트Boucher de Pertes가 물랭-키뇽Moulin-Quignon의 채석장에서 발견한 것을 둘러싸고 일어난 기념할 만한 논쟁을 잊지 않고 있다. 문제는 그가 발견한 것이 정말로 도끼인지 아니면 우연히 부서진 부싯돌 조각인지를 아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작은 도끼였을 경우에는 우리가 지성, 특히 인간의 지성과 마주하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아무도 단 한순간이나마 의심하지 않았다.(212쪽)

인간 지성에 관해서 말하자면 사람들은 기계적 발명이 처음에 그 본질적인 행보였다는 것,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사회적 삶은 인공적 도구의 제작과 사용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진보의 길에 표적을 세우는 발명들은 그 방향도 역시 그려주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주목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기 어려운 것은 인간성의 변형은 보통 도구의 변형들보다 뒤늦게 오기 때문이다. 우리의 개인적이고 심지어 사회적인 습관들은 그것들이 적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상황들보다 상당히 오랜 기간 살아남아 있기 때문에 한 발명의 심층적 영향은 우리가 이미 그것의 새로움을 잃어버렸을 때 비로소 주목된다.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한 세기가 흘렀는데 이제서야 우리는 그것이 야기한 심층적인 동요를 느끼기 시작하고 있다. 그것이 산업에 일으킨 혁명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조차 뒤집어 놓았다. 새로운 생각들이 떠오른다. 새로운 감정들이 개화하고 있다. 수천 년 후에 과거를 되돌아보고 그 주요한 선들만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면, 전쟁과 혁명들은 사람들이 그것들을 아직 기억한다고 해도 별 것 아니게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증기기관 그리고 거기에 수반되는 각종 발명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아마도 우리가 청동이나 석기(石器)에 대해 말하듯이 말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한 시대를 정의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우리가 모든 오만에서 벗어나 인간종을 정의하기 위해 역사시대와 선사시대가 우리에게 인간과 지성의 항구적인 특성으로 제시하는 것에 엄밀히 머물기로 한다면, 우리는 [인간을] 아마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 말하지 않고 호모 파베르Homo faber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지성을 그 본래적인 행보로 나타나는 것 안에서 고찰할 경우 그것은 인공적 대상들을 제작하고, 특히 도구를 만드는 도구들을 제작하며, 그 제작을 무한히 변형시키는 능력이다.(214쪽)

 

 

물질을 기관으로 변형시키는 경향
 

이처럼 지성의 기본적인 모든 힘들은 물질을 행동의 도구로, 즉 말의 어원적 의미에서 볼 때, 기관organe으로 변형시키는 경향이 있다. 생명은 유기체들을 산출하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그것들에게 보충으로 무기물질 그 자체를 제공하여 이를 생명체의 산업에 의해 거대한 기관으로 전환하려 한다. 생명이 처음에 지성에 부여한 임무가 그러하다. 그 때문에 지성은 타성적 물질을 관조하는 데 매혹된 것처럼 언제나 변함없이 그렇게 처신하고 있다. 지성은, 밖으로 시선을 두고 자기 자신에 대해 외화된 생명이다. 이러한 생명은 무기적 자연의 과정을 사실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원칙적으로 그 과정을 채용하고 있다. 지성이 생명체를 향해 돌아서서 유기조직을 대면할 때의 놀라움이 바로 거기서 유래한다. 따라서 지성은 무슨 일을 하든 간에 유기적인 것을 무기적인 것으로 분해한다. 스스로를 비틀지 않고서는 진정한 연속성과 실제적 운동성, 상호 침투, 그리고 한 마디로 말해 생명 그 자체인 이 창조적 진화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2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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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간의 손
    from Value Investing 2013-07-26 18:31 
    손으로는 어찌 하지?사랑하는 애인들끼리는 화를 내고, 서로 화해하고, 간청하고, 지적하는 모든 일을 는으로 한다.손으로는 어찌 하지? 우리는 요구하며, 약속하며, 부르며, 내보이며, 위협하며, 기원하며, 간청하며, 부인하며, 거절하며, 물어보며, 감찬하며, 헤아리며, 고백하며, 후회하며, 두려워하며, 부끄러워하며, 의심하며, 가르쳐주며, 명령하며, 교사하며, 맹세하며, 증거하며, 비난하며, 처단하며, 죄를 사하며, 욕설하며, 경멸하며, 도전하며, 분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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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워지지 않을 구별의 욕망

채워지지 않을 구별의 욕망118)에 뒤틀려 의식은 실재를 상징으로 대체시키거나 또는 상징을 통해서만 실재를 본다. 이렇게 굴절되고 또 바로 그 사실 자체에 의해 재분열된 자아가 일반적으로는 사회적 삶의 요구에 그리고 특수하게는 언어의 요구에 무한히 더 잘 부응하기 때문에, 의식은 그러한 자아를 선호하고, 근본적 자아는 점점 시야로부터 잃어버린다.(164쪽)

 

118) 사물을 하나하나 구별해서 보려는 욕망



언어가 그 운동성을 고정하지 않고는

변질되지 않은 의식이라면 볼지도 모를 그러한 근본적 자아를 다시 찾기 위해서는 엄밀한 분석적 노력이 필요하며, 그에 의해 내적이며 살아 있는 심리적 사실들을, 우선 굴절되어 있으며 다음으로 동질적 공간에 응고된 그것들의 이미지로부터 떼낼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지각과 감각, 감정, 관념들은 이중적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명료하고 정확하지만 비인격적이다. 다른 하나는 혼동되고, 한없이 움직이며 표현할 수 없다. 그것은, 언어가 그 운동성을 고정하지 않고는 그것을 파악할 수 없으며, 공통의 영역으로 떨어지게 하지 않고는 그것을 자신의 진부한 형태로 포섭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수성의 두 가지 형태, 즉 지속의 두 가지 형태를 구분하기에 이른다면, 따로따로 취해진 의식의 사실들 각각은 구별되는 다수성 속에서 생각되었느냐 혼동된 다수성 속에서 생각되었느냐에 따라, 즉 그것이 일어나는 시간-질 속에서 생각되었느냐 그것이 투사된 시간-양 속에서 생각되었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띠어야 할 것임은 분명하다.(165쪽)



감각에 대한 언어의 영향

자연상태에서 생각하면 우리의 단순 감각들은 좀더 적은 항상성을 나타낼 것이다. 어렸을 때는 좋아했으나 지금은 혐오스럽게 느끼는 냄새나 향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경험된 그 감각에 동일한 이름을 부여하며, 향기와 냄새는 동일하게 남아 있고 내 취향만 바뀐 것처럼 말한다. 따라서 나는 아직도 그 감각을 응고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동이 더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될 정도의 명백성을 획득하게 되면, 그 변동을 추출하여 그것에 별도의 이름을 부여하고, 차례가 오면 그것을 취향이라는 형태로 응고시킨다. 그러나 실제로는 동일한 감각도 다수의 취향도 없다. 왜냐하면 감각과 취향은 내가 그것을 떼내서 명명하자마자 나에게 사물처럼 보이나, 인간의 영혼 속에는 진행 이외의 것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감각은 반복되면서 변하며, 그것이 나에게 조변석개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가 지금 그 감각을 그것의 원인인 대상을 통해서, 그것을 번역하는 단어를 통해서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야 한다. 감각에 대한 언어의 그런 영향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다. 언어는 우리에게 감각의 불변성을 믿게 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경험된 감각의 성격에 대해서도 우리를 속인다. 그리하여 고급스런 맛으로 소문난 요리를 먹을 때, 그것에 부여된 찬사가 가득 실린 그 요리의 이름이 나의 감각과 의식 사이에 개입한다. 조금만 노력하여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 반대임이 드러날 수 있는 데도 나는 그 맛이 마음에 든다고 믿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분명히 확정된 윤곽을 가진 단어, 즉 인류의 인상들에서 안정되고 공통적이며, 따라서 비개성적인 것을 저장해 놓은 난폭한brutal 단어는 개인적 의식의 섬세하고도 사라지기 쉬운 인상들을 말살해 버리거나 또는 적어도 덮어 버린다. 대등한 무기로 싸우기 위해서는 그런 인상들이 정확한 단어들로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단어들은 형성되기가 무섭게 그것들을 낳은 감각에 대항하는 쪽으로 총구를 되돌릴 것이며, 감각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증언하기 위해 발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감각에 그들 자신의 안정성을 강요할 것이다.(167∼168쪽)


한쪽 편을 들 때 가지는 무반성적 열정

우리가 어떤 문제들에 대해 한쪽 편을 들 때 가지는 무반성적 열정은, 우리의 지성도 자신의 본능을 가진다는 것을 족히 증명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관념들에 공통되는 충동, 즉 그들의 상호 침투에 의해서라 아니라면, 어떻게 그러한 본능을 표상할 것인가? 우리가 가장 애착을 갖는 의견은 표현하기가 가장 어려운 의견이며, 우리가 그것들을 정당화하는 이유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그 의견을 취하도록 결정케 한 이유일 경우는 드물다.127)

127) 우리가 어떤 의견을 취하게 된 진정한 이유는, 애착을 가진 것일수록 더욱더 우리 자아의 깊은 곳으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그만큼 더 객관화하기 어렵고, 따라서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우리의 내부로 들어가면 갈수록 사물들은 엉켜서 불가분적으로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말로 표현하는 이유들은 대부분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간혹 <정곡을 찌를> 수는 있지만, 진정한 이유와 일치할 경우가 드물다.(171쪽)


  

우리에게 가장 적게 속하는 것만이 말에 의해 충분히 표현될 수 있다고 해서 놀라서는 안 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그 의견을 이유도 없이 채택하는데, 왜냐하면 우리 눈에 그것이 가치를 가지게 된 것은 그 의견의 색조nuance가 우리의 모든 관념들의 공통적 색상coloration에 부응하기 때문이며, 처음부터 우리가 거기에서 뭔가 우리의 일부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정신 속에서는 그 의견이,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 위해 거기로부터 나오게 하자마자 다시 취하게 될 진부한 형태를 띠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정신들에게 동일한 이름을 가지더라도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런 의견들 각각은 유기체 속에서의 세포와 같은 방식으로 산다. 자아의 상태 전체에 대해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그 세포 자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세포가 유기체의 어느 정해진 지점을 점하는 반면, 진정으로 우리 것인 관념은 우리의 자아 전체를 채운다. 게다가 우리의 모든 관념들이 그처럼 의식상태들의 덩어리로 합체해 들어가기에는 거리가 있다. 많은 것이 연못 물 위에 뜬 낙엽처럼 표면을 떠다닌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이 그 관념들을 생각할 때, 그 관념들이 마치 자신의 밖에 있는 것처럼 그것들을 항상 일종의 부동성 속에서 다시 대면한다는 것이다. 그 중에는 우리가 완성된 것으로서 받아들이며 우리 속에 머물지만 결코 우리의 실체substanve 속에 동화되지 않는 관념들이나 또는 우리가 소홀히 여겨 버림받아 말라버린 관념들이 있다. 자아의 깊은 층들로부터 멀어짐에 따라, 우리의 의식상태들이 점점 더 수적 다수성의 형태를 취하고 동질적 공간 속에 펼쳐지는 경향을 갖는다면, 그것은 바로 그런 의식상태들이 점점 더 타성적인 본성과 점점 더 비인격적인 형태를 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관념들 중에 우리에게 가장 적게 속하는 것만이 말에 의해 충분히 표현될 수 있다고 해서 놀라서는 안 된다.(172∼173쪽)

- 앙리 베르크손,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中에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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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독서광의 노트> 연인 관계에서 누가 더 사랑하는 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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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와 <덜>의 구별

사람들은 보통 감각, 감정, 열정, 노력과 같은 의식의 상태들이 증가하거나 감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어느 한 감각이 같은 성질을 가진 다른 감각보다 두 배, 세 배, 네 배 더 강하다고 말할 수 있음을 확언한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이것은 정신물리학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정신물리학의 반대자들조차 다른 감각보다 더 강한 감각, 다른 노력보다 더 큰 노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리하여 순전히 내적인 상태들 사이에 양적인 차이를 수립하는 데에 아무런 장애도 느끼지 않는다. 게다가 그 점에 관해 상식이 취하는 태도는 조금의 주저도 없다. 사람들은 더 덥다거나 덜 덥다거나, 더 슬프다거나 덜 슬프다고 말하며, 그러한 <더>와 <덜>의 구별이 주관적인 사실이나 비연장적(非延長的)인 사물의 영역으로 확장될 때조차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 그러나 거기에는 매우 불분명한 점이 있으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대한 문제가 있다.(17∼18쪽)



 

원인의 성격조차 모르면서

압도적 다수의 경우에 우리는 원인의 성격조차 모르면서, 그리고 그 크기는 더더욱 모름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의 강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 심지어 우리는 결과의 강도를 가지고 원인의 수와 성격에 대해 무모한 가설을 내세우기 일쑤이고, 그리하여 처음에는 원인들이 무의미하게 보이던, 감각의 판단을 그 결과의 강도에 의해 수정하기에까지 이르게 된다. 우리는 그때 결과의 경험과 동시에 그 원인이 완전하게 지각되는 이전의 어떤 상태와 자아의 현재 상태를 비교하는 것이라고 둘러대도 소용없다. 아닌게 아니라 상당히 많은 경우 우리는 그와 같은 절차를 따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로부터 나오며 더 이상 외부의 원인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깊은 심리적 사실들 사이에 우리가 세우는 강도의 차이는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21∼22쪽)



 

막연한 욕망이 점점 깊은 열정이 되는 경우

가령 막연한 욕망이 점점 깊은 열정이 되는 경우가 있다. 당신은, 그 욕망의 강도가 약했던 것은 우선 그것이 고립되어 있었고, 당신의 내적 삶의 모든 나머지 부분에 대해 낯선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음을 간파할 것이다. 그러나 그 욕망이 조금씩 더 큰 수의 심리적 요소들에 침투하여 그것들을, 말하자면 자신의 고유한 색깔로 물들였다. 그리하여 지금은 이제 사태 전체에 대한 당신의 관점이 변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가. 사실, 당신이 깊은 열정을 깨닫게 되는 것은 일단 그것이 형성된 후에는 동일한 대상이 당신에게 더 이상 동일한 인상을 주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당신의 모든 감각과 모든 생각이 그로 인해 새롭게 생기를 찾은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마치 어린 시절을 새롭게 맞이한 것과 같다. (25∼26쪽)



 

희망

희망을 그렇게도 강력한 즐거움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미래가 동시에 여러 형태로, 그것도 모두 동일하게 미소지으며 동일하게 가능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가장 원하던 것이 실현된다 하더라도, 다른 것들을 희생해야 할 것이며, 그리하여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무한한 가능성들로 가득차 있기에, 미래에 대한 생각은 결국 미래 자체보다도 더 풍부하기 때문에 우리는 소유보다는 희망에서, 현실보다는 꿈에서 더 많은 매력을 발견한다. (27∼28쪽)

(역주) 여기서 희망을 논하는 것은 다음의 기쁨과 슬픔, 특히 기쁨을 그것으로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미래가 필연적 진행으로 닫혀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될지 모르게 열려 있다는 것이 베르크손의 철학이므로, 그런 무한한 가능성이 현재에 대해 제공하는 그낌 자체가 바로 희망이며, 그것은 무한이 인간에 주는 말하자면 <계시>이다. 빠스깔적 무한의 은총이 베르크손에게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있다.



 

기쁨

열정과 마찬가지로 내적인 기쁨은 우선 마음의 한 구석을 차지했다가 점차적으로 그 자리를 넓혀 가는 고립된 심리적 사실이 아니다. 가장 낮은 단계에서 그것은 우리 의식의 상태들이 미래로 방향을 잡는 것과 상당히 비슷하다. 다음에는 마치 그러한 인력(引力)이 심리상태들의 무게를 감소시킨 것처럼, 생각과 감각들이 더 빨리 이어지며, 우리의 동작들은 더 이상 동일한 노력을 지불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극도의 기쁨에서는 우리의 지각과 기억들이 정의할 수 없는 어떤 성질을 띠게 되는데, 그것은 어떤 열기나 빛과도 비교될 수 있는 그리고 너무도 새로워서 몇몇 순간에는 우리 자신으로 되돌아봐 존재의 경이로움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 그러한 성질이다.(28쪽)



 

슬픔

슬픔은 과거로의 정향(定向,orientation)에 불과한 것에서 시작된다. 즉, 마치 각각의 감각이나 생각이 이제는 완전히 슬픔이 주는 그 보잘것 없음에 갇혀 버린 것처럼, 이를테면 미래가 우리에게 닫혀 버린 것처럼, 우리의 감각과 생각이 빈약해진다. 그리하여 무를 갈망하게 하고, 매번의 새로운 불행이 투쟁의 불필요성을 더 잘 이해하게 함으로써, 쓰디쓴 쾌락을 일으키는, 어떤 으깨지는 듯한 느낌에서 슬픔은 끝을 맺는다.(29쪽)

(역주) 열정, 희망, 기쁨, 슬픔 등의 깊은 감정에 관한 지금까지의 논의 주제는 앞으로의 다른 심리상태들에 대한 논의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떻게 질적인 변화를 양적인 변화로 생각하게 되었는가를 분석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양적 크기의 변화로 생각하는 심리상태의 각 단계들은 사실은 모두 질적으로 다른 것들이며, 따라서 동질적인 것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양적 계산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기쁨과 슬픔을 의식의 정향이 미래와 존재로 향하느냐 과거와 무로 향하느냐에 따라 설명하는 분석은 너무도 탁월하여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연민

도덕감에도 동일한 종류의 연구를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연민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우선 생각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자리에 서서 그들의 고통을 겪는 것이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연민이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들을 돕기보다는 그 비참함을 피하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고통은 당연히 우리가 혐오하는 것이나까. 그러한 연민의 원천에 혐오감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돕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려는 새로운 요소가 지체하지 않고 거기에 결합한다. ······ 진정한 연민은 고통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욕망하는 데에서 성립한다. 그 고통이 실현되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자연이 마치 어떤 큰 부정을 저지르기나 한 것처럼, 그래서 그것과의 모든 공범의 혐의를 벗어야 하기나 할 것처럼,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는 어떤 가벼운 욕망 말이다. 연민의 본질은 따라서 겸손해야 할 필요성이며, 낮아지려는 열망이다. 그런 고통스러운 열망은 게다가 매력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스스로의 자기 평가에서 우리를 높여 주고, 우리의 사유가 거기서부터 순간적으로 멀어지는 [바로] 그 감각적 이득보다 우리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연민의 증가하는 강도는 따라서 질적인 진전, 즉 혐오에서 두려움으로, 두려움에서 공감으로 그리고 공감 자체에서 겸손함으로의 이행에서 성립한다.(39∼40쪽)



 

쾌락의 세기

지성이 생각하는 여러 쾌락들 앞에서, 우리의 신체는 마치 반사작용처럼 그들 중 어느 하나로 자발적으로 향한다. 그것을 멈추는 것은 우리에게 달렸지만, 그 쾌락의 매력은 그렇게 시작된 운동과 다른 것이 아니며, 그것을 맛보는 동안의 쾌락의 세기 자체는 모든 다른 감각을 거부하고 거기에 빠져 버리는 신체의 무기력에 불과하다. 우리의 정신을 흐트러뜨릴 수 있는 것에 대하여 저항하려 할 때 그러한 무기력을 의식하게 되는데, 그러한 무기력이 없다면 쾌락은 여전히 어떤 상태이나 더 이상 크기는 아닐 것이다. 물리적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신의 세기에서도 매력(attraction, 인력)은 운동을 일으키기보다는 설명하는 데에 쓰인다.(58∼59쪽)

(역주) 어떤 매력에 이끌려 쾌락을 맛본다는 것 자체는 운동을 일으킨 것이지만, 그 쾌락은 바로 다른 운동을 하지 않게 하는 <무기력>이기 때문에, <매력에 이끌렸다>는 것은 실제로 어떤 행동을 하게 한 것이 아니라, 행동을 하지 않게 된 핑계로 쓰인다. 어떤 <매력에 사로잡힌> 상태는 거기서 헤쳐 나오려 해도 나올 수 없는, 즉 몸을 뺄 수 없는 그 <옴쭉달싹할 수 없음>, 즉 무기력의 상태이다. 물리적 세계에서의 매력은 인력인데, 그것은 물질이 나름대로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움쭉달싹 못 하게 자기에게로 끌어들이는 힘이며, 물질이 왜 그렇게 나름대로의 운동을 <일으키지> 않고 옴쭉달싹 못 하는지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사실 만유인력의 법칙 자체가 하나의 설명적 가설이다.

고통이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운동하라는 명령이며, 쾌락을 운동하지 못하게 사로잡힌 무기력이라고 설명하는 베르크손의 분석은 명쾌하면서도 눈부시다.



 

감각을 크기로 취급하려는 경향

사실을 말하자면, 정신물리학은 상식에 친숙한 개념을 정확히 공식화하여 그 극단적 귀결로까지 밀고 나간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사유하기보다는 말하기 때문에118), 또한 공통의 영역에 속하는 외부 대상들이 우리가 지나가는 주관적 상태들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 상태들에 외부 원인의 표상을 가능한 한 많이 도입함으로써 그것들을 객관화하는 것이 우리에게 매우 이롭다. 우리의 인식이 증가할수록 더욱더 우리는 강도의 성격을 띤 것 뒤에서 외연적인 것을, 질 뒤에서 양을 보며, 또한 전항(前項)에 후항(後項)을 집어넣고 감각을 크기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다. 바로 우리의 내적 상태들의 외적 원인을 계산해 내는 것이 그 역할인 물리학은, 그 상태들 자체에는 가능한 한 상관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그리고 [아예] 방침을 정하고 물리학은 그 상태들을 그 원인과 혼동한다. 따라서 물리학은 그 점에서 상식의 환상을 북돋우며, 심지어 과장하기까지 한다. 과학이 그러한 질과 양 그리고 감각과 자극의 혼동과 친숙해짐으로써 한쪽을 측정하듯이 다른 쪽도 측정하려고 시도할 날이 숙명적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정신물리학의 목적이었다. ······ 두 종류의 양, 즉 오직 더와 덜만을 포함하는 강도의 성격을 띤 양과 측정에 적합한 외연적인 양을 구별한다면, 페히너와 정신물리학자들을 옳다고 인정하는 데에 매우 가까이 가 있다. 왜냐하면, 한 사물이 커지거나 작아질 수 있는 것으로 인정되자마자, 얼마만큼 작아졌고 얼마만큼 커지는지를 찾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측정이 직접적으로 가능하다고는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거기서부터 과학이 어떤 간접적인 방식으로 거기에 성공할 수 없으리라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따라서 감각은 순수한 질이거나, 그렇지 않고 크기라면 측정할 방도를 찾아야 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91∼93쪽)

118) 말을 구성하는 단어 자체가 사물을 하나하나 끊어서 거기에 대응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외부 사물과 같이 공간화하는 성격을 지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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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11-07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새로 소개 받는 느낌이에요. 작가의 이름은 들어봤지만...
책의 제목은 처음 보는 듯해요.
꼼꼼히 읽겠습니다. ^^

oren 2012-11-07 19:33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철학자로서 온갖 명예를 거의 다 누렸던(1928년에는 노벨문학상까지 받았어요) 저자의 주저 가운데 한 권이자 박사학위논문이랍니다(1889년 출판).

[우리의 의식에 직접 주어지는 것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진정한 시간으로서의 지속이며, 지속의 상하에서 자유의 문제를 풀려는 것이 이 책의 내용]이어서 저자 자신이 직접 관여한 영어 번역의 제목은 『시간과 자유의지 Time and Free Will』였고요. 20세기의 철학서 가운데 기념비적 저서로 손꼽히는 책인데 그런만큼 내용이 쉽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장엄함......
단순한 발단에서 지극히 아름답고 경탄스러운 장관들이 생겨났음을 밝힌 책

 

 


결국 동일종의 변종이라고 생각되는 것과 같은 종족의 유사성

현상은 매우 다양하지만, 물자체로서 의지는 하나다. 이것을 인식해야 비로소 자연의 모든 산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경탄할 만하고 지극히 명백한 유사성과, 동시에 주어지지는 않더라도 결국 동일종의 변종이라고 생각되는 것과 같은 종족의 유사성이 이해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위에서 말한 화성, 세계 모든 부분의 본질적인 연관, 방금 고찰한 그들 각 단계의 필연성, 이런 것들을 명백하게 깊이 인식하게 되면, 우리는 모든 유기적인 자연의 산물이 갖는 부정할 수 없는 '합목적성'의 내적 본질과 의의를 올바르고 충분하게 통찰할 수 있게 된다. (679쪽)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1818년), <제2권 의지로서의 세계에 대한 제1고찰> 中에서




 * * *

 

생명은 최초의 창조자에 의해 소수의 형태로, 또는 하나의 형태로 모든 능력과 함께 불어 넣어졌다고 보는 견해

온갖 종류의 식물이 자라고, 숲속에서는 새가 노래하고 곤충은 여기저기 날아다니며, 축축한 땅속을 벌레들이 기어다니는 번잡스러운 땅을 살펴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그러한 개개의 생물은 제각기 기묘한 구조를 가지고 있고, 서로 매우 다르며 매우 복잡한 연쇄를 통해 서로 의지하고 있지만, 그런 생물이 모두 지금 우리 주위에서 수행되고 있는 여러 가지 법칙에 따라 만들어진 것임을 깊이 생각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그러한 법칙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 말한다면, '생식'을 수반하는 '성장', 거의 생식 속에 포함된다고도 할 수 있는 '유전', 생활의 외적 조건의 직접 또는 간접적인 작용에 의한, 또 용불용에 의한 '변이성', 생존경쟁과 나아가서는 '자연선택'을 초래하고, 마침내 '형질의 분기'와 열등한 생물을 '멸종'시키는 높은 '증가율' 등이다. 그리하여 직접적으로 자연계의 싸움에서, 또 기아와 죽음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사항, 즉 고등동물의 산출이라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생명은 최초의 창조자에 의해 소수의 형태로, 또는 하나의 형태로 모든 능력과 함께 불어 넣어졌다고 보는 견해, 그리고 이 행성이 확고한 중력의 법칙에 의해 회전하는 동안 이렇게 단순한 발단에서 지극히 아름답고 지극히 경탄스러운 무한의 형태가 태어났고, 지금도 태어나고 있다는 이 견해에서는 장엄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480쪽)

 - 다윈, 『종의 기원』(1859년), <제14장 요약과 결론> 中에서

 



 * * * * *

 

단 한번 만들어진 의지표명

사실상 모든 기관은 하나의 보편적인, 즉 단 한번 만들어진 의지표명, 즉 개별자가 아니라 종(種, Spezies)의 고정된 하나의 동경, 하나의 의지작용을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모든 동물 형상은 상황에 의해 불러 일으켜진, 생명에의 의지의 한 동경이다. (90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자연에 질서와 무늬를 넣은 것은 지성이어야 한다는 자연신학적 사상은 완전히 잘못

우리는 우선 "세계는 인식의 도움을 받지 않고, 그래서 또한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만들어진다"라고 말한다. 그 다음에 우리는 세계의 '핵심'을 입증하려고 애쓴다. 자연에 질서와 무늬를 넣은 것은 지성이어야 한다는 자연신학적 사상은, 단순한 오성에 의해 그렇게 쉽게 받아들여진다 해도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지성은 우리에게 동물적 자연에서만 알려져 있으며, 그래서 전적으로 세계의 이차적이고 종속적인 원리로서, 즉 가장 늦은 근원의 산물로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성은 결코 세계 현존의 조건이었을 수 없으며 지성계(mundus intellegibilis)가 감성계(mundus sensibilis)에 선행할 수도 없다. 지성계는 감성계로부터만 재료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지성이 자연을 산출한 것이 아니라 자연이 지성을 산출했다." 그러나 물론 의지가 모든 것을 실현하고 그 각각에서 자신을 직접적으로 표명하는 것으로서, 이를 통해 그 모든 것을 자신의 현상이라고 지칭하면서 도처에서 근원적인 것으로서 나타난다. 바로 그로 인해 목적론적인 모든 사실은 그 사실들이 발견되는 존재 자체의 의지로부터 해명된다. (94쪽∼95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자연의 절약 법칙'은 어떤 여분의 기관도 허용하지 않는다.

'자연의 절약 법칙'은 어떤 여분의 기관도 허용하지 않는다. 바로 이 법칙은, 다른 한편으로 어떤 동물에게도 지금까지 자신의 생활방식이 요구하는 기관이 부족하지 않았고, 모든 기관은 가장 다양한 기관들조차 조화를 이루며 전적으로 특별히 규정된 생활방식을, 그 동물의 노획물이 있는 영역을, 추적을, 승리를, 그 노획물을 분쇄하고 소화시키는 것을 계산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두 합쳐져서, 동물이 자신의 생계를 위해 영위하려는 생활방식이 그 동물의 구조를 결정한 것이었으며 그 반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 법칙은, 그 상황이 바로, 생활방식과 그 외적 조건에 대한 인식이 구조에 선행하고 그에 맞게 모든 동물이 형체를 얻기 전에 자신의 도구를 선택하는 식으로 되었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이는 마치 사냥꾼이 사냥 전에 자신의 모든 도구, 즉 산탄총, 산탄, 화약, 사냥 포대, 사냥칼, 의류를 그가 죽이려는 사냥감에 적합하게 고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는 엽총을 갖고 있으므로 야생 암퇘지를 쏘는 것이 아니라, 야생 암퇘지를 잡으러 나섰으므로 새총이 아니라 엽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러나, 그 증명을 보충하기 위해 다음의 사실이 부가된다. 즉 많은 동물에게서 그것들이 아직 성장하는 동안에는 의지의 지향이 그 지향에 필요한 신체 부분이 있기도 전에 표현되며, 따라서 그 신체 부분의 사용이 그 현존에 선행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린 숫염소, 숫양, 송아지는 아직 뿔을 갖기도 전에 맨머리로 들이받는다. 어린 수퇘지는 자신의 행위가 의도하는 결과에 상응할 어금니가 아직 나지 않았는데도 자신을 둘러싼 측면을 들이받는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침으로 무장한 곤충들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이 점을 표명했다. "그것들이 투지를 가지므로 무기를 갖는다"(『동물의 부분에 관하여(de partibus animalium)』, 제4권, 6장). 나아가 그는 (12장에서) 대체로 "자연은 그것의 활동을 위해 기관들을 만들지만 기관들로 인해 활동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 결과는, 모든 동물의 구조는 그 의지에 따른다는 것이다. (98쪽∼100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동물의 원형들이 다른 원형에서 불러일으켜졌으며

그러나 알을 부수고 나오는 어린 닭이 왜 동일한 수의 두개골 뼈를 가져야 하는지를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해부학적 요소가 한편으로는 생명에의 의지 일반의 통일성과 동일성에, 다른 한편으로는 동물의 원형들이 다른 원형에서 불러일으켜졌으며(『여록과 보유』, 제2권, 91절), 따라서 종족 전체의 기본 유형이 보존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해부학적 요소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필연적 자연성질"로서 이해하는 그것이다. 그리고 그 요소 형태의 변화 가능성을 아리스토텔레스는 각각의 목적에 따라 "목적에 맞는 자연성질"이라고 부르며(아리스토텔레스, 『동물의 부분에 관하여』,제3권, 2장), 이로부터 뿔 달린 가축에게서 위 앞니의 재료가 뿔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이 설명은 매우 정확하다. 왜냐하면 낙타와 사향노루처럼 뿔 없는 반추동물만이 뿔 있는 것들에서는 없는 위 앞니를 갖기 때문이다.(116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유기체는 기적으로서 거기에 서 있으며 인식의 등잔 불빛에서 꾸며진 인간의 작품과 비교될 수 없다

여기 골격에서 설명된, 동물이 목적과 외적 생활 관계들에 대한  구조의 정확한 적합성뿐 아니라 동물의 내부 작용에 있는 경탄할 만한 합목적성의 조화는 다른 어떤 설명이나 전제를 통해서보다, 동물의 신체는 표상으로서 직관된, 따라서 뇌에 있는 공간, 시간, 인과성의 형식에서 직관된 자신의 의지 자체일 뿐이라는, 그래서 의지의 단순한 가시성, 객체성일 뿐이라는, 내가 이미 다른 곳에서 확인한 진리를 통해서 불분명할지라도 가장 잘 이해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가정 아래에서는 신체에 종속되었거나 신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최종 목적을 위해, 즉 그 동물의 생명을 위해 공모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체 안에서는 어떤 불필요한 것, 과도한 것, 결여된 것, 목적에 모순되는 것, 불충분한 것, 그 방식이 불완전한 것도 발견될 수 없고, 필요한 모든 것은 그 필요한 만큼 정확히 그곳에 있어야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여기서는 장인, 작품, 재료가 하나이며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유기체는 극도로 완벽한 걸작이다. 여기서는 의지가 먼저 의도를 갖고 목적을 인식하고 그다음에 수단을 목적에 맞추고 물질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의 의욕이 직접적으로 목적이고 또한 직접적으로 성취다. 그래서 먼저 억제되어야 할 이질적인 어떤 수단도 요구되지 않는다. 여기서는 의욕, 행위, 성취가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유기체는 기적으로서 거기에 서 있으며 인식의 등잔 불빛에서 꾸며진 인간의 작품과 비교될 수 없다. (117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칸트의 위대한 학설의 의미

의지 작용의, 즉 이 진정한 형이상학적 존재의 근원적 통일성과 불가분성은 이제 부분들의 병존과 기능들의 연속으로 분산되어 나타나지만, 그럼에도 이것들은 상호 간의 수단과 목적으로서 서로 돕고 지지하기 위해, 서로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결합된 것으로서 표현된다. 이것을 그렇게 통찰하는 오성은 부분들의 질서와 기능들의 조합이 깊이 숙고된 것에 경탄한다. 오성은 (자신의 인식형식이 최초로 초래한) 다수성으로부터 되찾아진 근원적 통일성을 발견한 그 방식을 당연히 또한 이 동물 형태가 발생한 방식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는 합목적성이 오성에 의해 비로소 자연에 보내진다는 칸트의 위대한 학설의 의미다. 그에 따라 오성은 자신이 처음으로 만든 기적을 놀라 바라본다. ······ 자연신학적 논증은 오성 안에 있는 세계의 현존을 그 실재 현존에 선행하게 한다. 그리고 그 논증은, 세계가 합목적적이어야 한다면, 세계는 그것이 있기 전에 표상으로서 존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칸트의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계가 표상이라면 그것은 합목적적인 것으로서 표현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합목적적인 것은 최초로 우리의 지성에 나타난다. (121쪽∼122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모든 존재는 자신과 정확히 같은 다른 어떤 것에 생명의 불을 점화할 뿐

나의 학설로부터 당연히, 모든 존재가 자신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도출된다. 자연, 즉 결코 속일 수 없고 천재처럼 순진한 자연은 자신을 꾸밈없이 표명한다. 모든 존재는 자신과 정확히 같은 다른 어떤 것에 생명의 불을 점화할 뿐이며, 그다음에 그것의 재료는 밖에서, 형식과 운동은 자신으로부터 조달하여 우리 눈앞에서 자신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는 성장과 발전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경험적으로도 모든 존재는 그 자신의 작품으로서 우리 앞에 서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너무 간단하기 때문이다. (122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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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09-16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글 올리신 걸 이제야 알았답니다.
이거 인쇄해서 의자에 편안히 앉아 커피를 마시며 글을 깊게 음미해야겠군요.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도 그렇게 읽었답니다. 나중엔 책을 사고 말았지만요. ㅋㅋ

oren 2012-09-18 10:37   좋아요 0 | URL
pek님께서 반가운 댓글을 달아주셨는데 제 답글이 너무 늦었네요.
pek님께서도 쇼펜하우어를 무척 좋아하시죠?

제가 윗 글을 통해 많은 내용을 옮겨놓은 책『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를 pek님께서 혹시라도 아직 읽어보지 않으셨다면, 꼭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내용이 무척이나 흥미로우면서도 '자연과학과 철학'을 함께 다루는 멋진 책인 데다가, 책의 내용도 쉽고 부피도 가벼워 금방 읽을 수 있답니다.(제가 읽어본 쇼펜하우어 책 가운데 이 책을 가장 빠르게 읽었던 것 같아요. 이보다 더 얇은 책으로는『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라는 '얼핏 이해하기 어려운' 제목의 책도 있는데 그건 쇼펜하우어의 '박사학위 논문'이더군요. 내용은 물론(?) 어려워서 그의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보다 더 어렵다고도 평가받는 책인데, 그의 철학의 중요한 밑바탕을 이루는 책이어서 '건너뛰기'할 수도 없는 책이긴 합니다.)

한가지만 덧붙여 말씀드리면,『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라는 책의 소개글 가운데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아마도 다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 * *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는 당시 자연과학의 연구 성과를 빠짐없이 기술하면서 이 성과를 철학과 연결시킨 최초의 책이라 할 수 있다. 포이어바흐는 칸트의 인간학도 프리스의 인간학도 이루지 못한 사유의 인간학적 전회가 이 책에서 일어났다고 평가한다.

페크pek0501 2012-09-20 16:36   좋아요 0 | URL
좋은 정보에 감사 드립니다.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라는 책은 읽어 보지 않았습니다.
저는 <쇼펜하우어 인생론>을 가끔씩 반복해서 읽는 정도랍니다. 이 책이 그의 저작 중 세 번째로 읽는 책인데, 과거에 읽었던 두 권의 책 내용과 겹쳐지는 부분도 많답니다.
님이 말씀하신 책은 겹치지 않을 것 같으나 좀 벅차게 느껴지네요. ㅋㅋ
서점에 갈 기회가 될 때 찾아보겠습니다. 부담스러울 땐 직접 본 다음에 사는 게 최고...ㅋ
이 분야에 대해선 오렌 님이 계셔서 마음 든든합니다. ^^
 












 


 


"나"는 모든 개념들을 수반하는 단순한 의식

"나"는 모든 개념들을 수반하는 단순한 의식이다. 이 '나'로써 "사유의 초월론적 주체 외에 어떤 다른 것도 표상되고 있지 않다." "의식 자체는 표상이 아니고 ······ 표상 일반의 형식이다." 17) "나는 사유한다"는 "모든 경험에 붙어 있고 그것을 선행하는 통각의 형식"18)이다.

칸트는 "나"의 현상적 내용을 옳게도 "나는 사유한다"라는 표현으로 파악하거나 또는 "실천적 인격"이 "지성[예지]"에 연관되고 있음을 함께 고려해서 "나는 행위한다"로 파악한다. '나는 말한다'는 칸트의 의미로는 '나는 사유한다고 말한다'로 파악되어야 한다. 칸트는 '나'의 현상적 내용을 '사유하는 사물(res cogitans)'로서 파악하려고 한다. 그는 이때 이 '나'를 "논리적 주체"라고 명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나' 일반이 논리적 방법으로 획득된 순전한 개념에 불과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오히려 논리적 행동관계의, 즉 결합함의 주체이다. "나는 사유한다"는 나는 결합한다를 말한다. 모든 결합함은 "나는 결합한다"이다. 모든 한데 모음과 연관지음에는 언제나 이미 '나'가 밑바탕에 놓여 있다. 나는 곧 휘포케이메논(기체, 실체)이다. 그러므로 주체는 "의식 자체"이고 표상이 아니며 오히려 표상의 "형식"이다. 이것이 말하려는 것은 다음과 같다 : '나는 사유한다'는 표상된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써 표상된 것과 같은 것이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그런 표상함 그 자체의 형식적 구조이다. 표상의 형식은 어떤 테두리나 또는 어떤 보편적인 개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에이도스(형상)로서 모든 표상된 것과 표상함을 그것이 무엇인 그것으로 만드는 바로 그것이다. '나'는, 표상의 형식으로 이해될 때, 나는 "논리적 주체"이다라는 것과 동일한 것을 말한다.(423쪽∼424쪽)

17) 『순수이성비판』제2판, S.404 참조
18) 같은 책, S.354.

 



'나'는 "나는 사유한다"일 뿐만 아니라 또한 "나는 어떤 것을 사유한다"이다.

칸트의 분석에서 긍정적인 것은 두 가지이다 : 첫째, 그는 '나'를 존재적으로 실체로 환원시키는 것이 불가능함을 보았으며, 둘째, '나'를 "나는 사유한다"로서 확고하게 견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나'를 주체로 파악하며 그로써 존재론적으로 부적합한 의미로 파악하고 있다. 왜냐하면 주체의 존재론적 개념은 자기로서의 '나'의 자기성을 성격규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이미 눈앞에 있는 것의 동일함과 지속성을 성격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존재론적으로 주체로 규정함은 '나'를 일종의 언제나 이미 눈앞에 있는 것으로 단초지음을 말하는 것이다. '나'의 존재는 '사유하는 사물'의 실재성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칸트가 진정한 현상적 단초를 "나는 사유한다"에서 존재론적으로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주체"로, 다시 말해서 실체적인 것으로 되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나는 사유한다"일 뿐만 아니라 또한 "나는 어떤 것을 사유한다"이다. 그러나 칸트 자신은 언제나 거듭, '나'는 나의 표상과 연관된 채 남아 있고 표상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지 않는가?(425쪽∼426쪽)

 

 

 

칸트는 "나는 어떤 것을 사유한다"의 존재론적 "전제"가 '자기'의 근본규정성임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 표상들이 그에게는 '나'에 의해서 "수반되는" "경험적인 것", 즉 '내'가 거기에 "붙들려" 있는 현상들이다. 그러나 칸트는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붙들림"과 "수반함"의 존재양식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그것은 근본에서 '내'가 나의 표상들과 함께 지속적으로 함께 눈앞에 있음으로 이해되고 있다. 칸트는 분명히 '나'를 사유에서부터 끄집어내는 일은 피했다. 그렇지만 "나는 사유한다" 자체를 그 완전한 본질구성에 있어 "나는 어떤 것을 사유한다"로서 단초짓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나는 어떤 것을 사유한다"의 존재론적 "전제"가 '자기'의 근본규정성임을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어떤 것을 사유한다"라는 단초도 존재론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여기에서 "어떤 것"이 규정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일종의 세계내부적인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 경우 거기에는 말없이 세계가 전제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만일 실제 '내'가 "나는 어떤 것을 사유한다"와 같은 어떤 것이 될 수 있어야 한다면, 바로 이 현상이 '나'의 존재구성틀을 함께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나라고 - 말함'은 각기 그때마다 "나는 하나의 세계 안에 있다"로서의 '나'인 그런 존재자를 의미한다. 칸트는 세계라는 현상을 보지 못했고, "표상"을 "나는 사유한다"의 선험적 내용과 떼어놓을 정도로 충분히 결론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그로써 '나'가 다시 존재론적으로 전혀 규정되지 않은 방식으로 표상들을 수반하는 고립된 주체로 도로 갇혀버리고 만다.
(426쪽)

 

 

 

나는, 개념으로서 현존재[=있음]에 도달한 순수 개념 자체이다

정신의 실현과 더불어 정신이 부정의 부정으로서 규정된 시간 안으로 떨어져들어가는 것이 정신에 합당하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정신 자체가 어떻게 이해되어 있어야 하는가? 정신의 본질은 개념이다. 헤겔은 개념을 사유된 것의 형식으로서의 종이라는 직관된 일반자로 이해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스스로를 사유하는 사유 자체의 형식으로 이해한다. 즉 자신을 ― 비-자아의 파악으로서 ― 개념파악하는 것이다. -자아의 파악이 일종의 구별을 나타내고 있는 한, 이러한 구별의 파악으로서의 순수 개념에는 구별을 구별함이 놓여 있다. 그러므로 헤겔은 정신의 본질을 형식적-서술적으로 부정의 부정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절대적 부정성"은 데카르트의 '나는 내가 사물을 사유한다는 것을 사유한다(cogito me cogitare rem)' ― 그는 의식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 를 논리적으로 형식화한 해석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므로 개념은 자기를 개념파악하고 있는 이 자기의 개념파악되어 있음이다. 자기는 그러한 그것으로서 그가 있을 수 있는 바와 같이 본래적으로, 다시 말해서 자유롭게 있는 것이다, "나는, 개념으로서 현존재[=있음]에 도달한 순수 개념 자체이다."31)  "그러나 나는 첫째로 자기를 자기에게로 연관시키는 순수한 통일성인데, 직접적으로 그것[통일성]이 아니라, 내가 그 모든 규정성과 내용에서 추상되어 자기 자신과의 제한 없는 동일함의 자유 속으로 돌아감으로써 그런 것[통일성]인 것이다." 이렇듯이 자아는 "보편성"이지만 마찬가지로 직접적 ― "개별성"이다.
(562쪽∼563쪽)

31) Hegel, Wissenschaft der Logik(『대논리학』), 제2권(Lasson 편집, 1923), 제2부, S.220 참조.

 


 

정신의 전개의 목표는 "자신의 고유한 개념에 도달하는 것"

정신은 그의 "진보"의 매 발걸음에서 "자기 자신을 그의 목적을 진실로 막는 적대적인 장애로서 극복해야 한다."34)  정신의 전개의 목표는 "자신의 고유한 개념에 도달하는 것"35)이다. 전개 자체는 "자기 자신과의 끝이 없는 고달픈 투쟁"36)이다.

자신을 자신의 개념으로 데려오는 정신의 전개의 동요가 부정의 부정이기 때문에, 자기를 실현하면서 부정의 직접적인 부정으로서의 "시간 안으로" 떨어져들어오는 것이 정신에게 적합한 것으로 남아 있는다. 왜냐하면 "시간은, 거기에 있는, 텅 빈 직관으로서 의식에 표상된 개념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신은 필연적으로 시간 안에 나타나며, 그가 그의 순수 개념을 파악하지 못하는 동안은, 다시 말해서 시간을 말살해버리지 않는 동안은, 시간 안에 나타난다. 시간은 자기에 의해서 파악되지 않은 외적으로 직관된 순수 자기, 즉 단지 직관되기만 한 개념이다." 37)
(563쪽)

34) Hegel,『역사 속의 이성. 세계사 철학 입문』,G.Lasson 편집, 1917, S.132 참조.
35) 같은 곳.
36) 같은 곳.
37) Hegel,『정신 현상학』, 글로크너 판 전집 제Ⅱ권, S.60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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