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저 평범한 안전과 만족보다 더 낫지 않다는 것 340

불굴의 근면함으로 그는 자신의 모든 경쟁자보다 우월한 재능을 획득하기 위해 밤낮으로 노력한다. 이어서 그는 그러한 재능들을 공중(公衆)의 눈에 띄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며, 똑같이 열심히 여러 취직의 기회를 사람들에게 간청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그는 모든 사람들의 비위를 맞춘다. 그는 내심(內心)으로는 증오하고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봉사하고, 자신이 경멸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아부한다. 그가 전 생애를 통하여 추구하는 이상은 자신이 결코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어떤 공적이고 우아한 휴식(休息)의 관념인데, 그것을 위해 그는 어느 때에든 자신의 힘으로 쉽게 이룩할 수 있는 진정한 마음의 평정(平靜)을 희생한다. 그리고 만약 아주 늙어서 드디어 그것을 획득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것이 어떤 점에서도 그가 이것 때문에 포기했던 저 평범한 안전과 만족보다 더 낫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인생의 최후의 순간이 되어 그의 육체가 고통과 질병으로 쇠약해지고, 자신의 적들의 불의(不義), 동지들의 배신(背信)과 망은(忘恩) 때문에 그가 받아 왔다고 상상하는 수많은 침해와 실망의 기억에 의해 그의 마음이 쓰리고 괴로울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는 그러한 부와 권세가 사소한 효용(效用)만을 지닌 허접한 것에 불과하고, 육체의 안락과 정신의 평정을 확보하는 데 있어서 장난감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족집게 상자 정도의 쓸모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부와 권세는, 족집게 상자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편리함 이상으로 번거로움을 더 많이 준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것들 사이에는, 한 쪽의 편리함이 다른 쪽의 편리함보다 다소 쉽게 눈에 띈다는 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실질적인 차이는 없다. 상류사회 사람들의 대저택, 정원, 마차, 종자(從者)들은 분명히 눈에 띄는 편리함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인상적으로 보이는 대상들이다. 이것들은 그 소유자들이 우리에게 그것들의 효용이 어디에 있는지를 지적할 필요조차 없는 것들이다. 우리는 매우 쉽게 그 편리함을 이해하고 공감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그 소유자에게 제공하는 만족을 동감(同感)에 의해 함께 누리고 갈채를 보낸다. 그러나 이쑤시개, 귀이개, 손톱깎이 또는 같은 종류의 기타 소소한 물건들에 대한 관심은 그렇게 명백하지는 않다. 그들의 편의성(便宜性)은 아마 똑같이 클지도 모르지만 아주 인상적이지는 않아서, 우리는 그것들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의 만족감에 그렇게 쉽게 공감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들은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데 있어서 부와 권세의 장엄함보다 적당한 대상이 못 된다. 부와 권세가 유일하게 우월한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부와 권세는 인간의 천성인 탁월함에 대한 애호(愛好)를 한층 더 효과적으로 만족시킨다. 외딴 섬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커다란 저택과 흔히 족집게 상자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작은 편의품들을 모아둔 상자 중에서 어느 것이 그의 행복과 즐거움에 더 도움이 될 것인지는 아마도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면, 그것은 비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 우리는 항상 관련 당사자의 감정보다는 방관자의 감정을 더 많이 고려하며, 그가 처한 상황이 그 자신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를 더 고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관자가 왜 부와 권세 있는 사람들의 상황을 매우 감탄하는가를 검토한다면, 우리는 그 이유가 그들이 향유한다고 보이는 월등한 안락 또는 기쁨에 있다기보다는 그 안락 또는 쾌락을 촉진하기 위한 무수한 인공적이고 우아한 물건들 때문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방관자도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정말로 더 행복하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지만, 그들이 행복을 추구하는 수단들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수단들을, 그것을 통하여 달성하려고 의도한 목적에, 독창적이고 교묘하게 조정(調整)할 수 있다는 것, 이 점이 바로 방관자들이 부와 권세에 대해 감탄하는 주요 원천이다.

그러나 늙어서 몸이 병들고 쇠약해져서 무기력하고 매사에 권태를 느낄 때, 헛되고 공허한 권세의 탁월함이 주는 쾌감들은 사라진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그러한 쾌감들은 이전에는 그 마음을 사로잡았던 사람에게조차도 더 이상 고생스러운 노력을 계속하게 할 정도로 마음을 끌지 못한다. 마음속으로 그는 (젊은 시절의) 야심을 저주하고, 젊은 시절에 동경했던 안일과 게으름을 후회하고, 이제는 영원히 사라져버린 즐거운 순간들을 아쉬워하고, 손에 넣었을 때에는 어떤 진실한 만족도 제공하지 못하는 것들을 얻으려고 그가 어리석게도 희생해 버린 것들을 부질없이 아쉬워한다.

원한(怨恨)과 질병으로 위축되어 자신의 처지를 주의 깊게 관찰하게 되고, 자신의 행복에 진실로 모자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었을 때, 권세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비참한 측면으로 나타난다. 이때 부와 권세는, 실제로 그러하듯이, 육체에 약간의 소소한 편리함을 가져다주기 위해 고안된 거대하고 힘에 겨운 기구(機具)들로 보이게 된다. 그 기구들은 가장 섬세하고 미묘한 용수철들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언제든지 쓸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장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며, 우리의 모든 조심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언제든지 산산이 부셔져서 자신들의 불행한 소유자를 짓뭉개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부와 권세는 거대한 건조물(建造物)과 같다. 그것을 건축하려면 평생 동안의 노동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매순간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파묻어 버리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그것들이 무너지지 않고 서 있는 동안에는 거주자(居住者)들에게 몇몇 사소한 불편들을 덜어줄지도 모르지만 계절의 모진 혹독함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주지는 못한다. 그것들은 여름의 소나기는 막아 줄 수 있지만 겨울의 폭풍을 막아 주지는 못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 거주자를 항상 이전과 똑같이, 때로는 이전보다 더욱, 많은 불안과 두려움과 비애에, 그리고 질병과 위험과 사망에 노출되도록 내버려둔다.


거지의 안전
347


큰길가에서 햇볕을 쬐고 앉아 있는 거지도 국왕들이 전투를 통해 보위하려는 그러한 안전(安全)을 이미 향유하고 있다.


정치에 관한 연구논문들
349-350

만약 당신이 자기 나라의 이익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사람의 가슴에 공공도덕(公共道德)을 심어 주려고 생각한다면, 그에게 잘 다스려지고 있는 나라의 국민들은 얼마나 우월한 이점(利點)들을 누리고 있는지, 즉 그들은 더 좋은 집에서 살면서,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잘 먹고 지낸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어도 그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이다. 이런 것들은 통상 그에게 큰 인상을 결코 줄 수 없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그에게 이와 같은 이점들을 보장해 주는 원대한 사회치안 제도를 묘사해 준다면, 만약 당신이 그 제도의 각 부분들 사이의 연관과 의존관계(依存關係), 즉 각 부분들 상호간의 종속성(從屬性), 그리고 사회의 행복에 대하여 그들이 전반적으로 어떻게 공헌(貢獻)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면, 어떻게 하면 이러한 제도가 그의 나라에 도입될 수 있을 것인지, 현재 그것을 도입하는 데 방해가 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그 장애물들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인지, 어떻게 하면 정부라는 기계의 모든 바퀴들이 보다 조화롭고 원활하게, 상호간의 마찰 없이, 또한 서로 다른 것의 운동을 방해함이 없이, 돌아가게 할 수 있을 것인지를 이야기해 준다면, 당신이 그를 설득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더 커질 것이다.

어떤 사람도 이러한 종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사회의 공익(公益)대한 어느 정도의 관심을 갖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적어도 잠깐 동안만이라도 이러한 제도의 도입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제거함으로써 그렇게 아름답고 질서 있게 움직이는 기계를 운전해 보고자 하는 어떤 욕망을 느낄 것이다. 정치학의 연구, 각종 정부 제도와 그들의 장점과 단점에 관한 연구, 우리나라의 헌법(憲法), 우리나라가 처해 있는 지위와 외국과의 이해관계, 우리나라의 무역, 국방, 우리나라가 처해 있는 불리한 조건들, 우리나라가 직면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위험들에 관한 연구, 그리고 어떻게 하면 불리한 조건들을 제거하고 잠재적인 위험으로부터 방위할 것인지에 관한 연구 등보다 사람들의 마음에 공익정신을 더욱 촉진시키는 것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정치에 관한 연구논문들은, 만약 그것이 정확하고 합리적이고 실행 가능한 것이라면, 모든 사변적인 저작물(著作物)들 중에서 가장 유용하다.

(나의 생각)
『국부론』을 쓰기 위한 '마음의 토대'가 이 때부터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의 성격
351

사람들의 성격도, 기예(技藝)의 창작물이나 정부기구와 마찬가지로, 개인과 사회의 행복을 촉진하는 데 적합할 수도 있고 방해하는 데 적합할 수도 있다. 신중, 공정(公正), 적극적, 과단(果斷), 진지한 성격은 그 사람 자신과 그와 관련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번영과 만족을 약속한다. 반대로 경솔, 오만, 나태, 유약(柔弱), 방탕한 성격은 그 개인에게는 파멸을, 그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재난(災難)을 예고한다. 첫 번째의 심리상태는 적어도 가장 유쾌한 목적을 촉진하기 위해 발명되었던 가장 완전한 기계가 가질 수 있는 모든 미(美)를 가지고 있다. 두 번째의 심리상태는 가장 어색하고 졸렬한 발명품이 갖고 있는 모든 결함들을 다 가지고 있다.


견인불발(堅忍不拔) 356

우리가 장래의 더 큰 쾌락을 획득하기 위해 눈앞의 쾌락을 포기할 때, 우리가 요원한 장래의 대상에 대하여 현재 우리 눈앞에서 우리의 감관(感官)에 직접 작용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것과 똑같이 흥미를 가지고 행동할 때에는, 우리의 감정과 방관자의 감정이 정확히 서로 일치하므로, 방관자는 우리의 행위를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방관자는 경험에 의하여 이러한 자기통제를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우리의 행위를 상당한 정도의 경이(驚異)와 찬탄으로 지켜보게 된다. 장기간 꾸준히 근검절약하고, 부지런히 노력하고, 한 가지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는 사람을, 비록 그의 목적이 단지 재부(財富)의 획득을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자연히 높은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대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식으로 행동하고, 요원한 장래의 일이지만 큰 이익을 획득하기 위해서 현재의 모든 즐거움을 포기할 뿐 아니라 심신(心身)의 최대의 노고를 참아내는 사람의 견인불발(堅忍不拔)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시인을 얻게 된다. 그의 행위를 규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자기 이익과 행복에 관한 그의 관점은 우리가 그의 행위를 보고 자연스럽게 형성하는 관념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의 감정들과 우리의 감정들 사이에는 가장 완전한 일치가 존재하며, 동시에 인간 본성의 공통된 약점에 관한우리의 경험으로 볼 때, 이러한 일치는 우리가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없는 일치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행위를 시인할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는 감탄해 마지않으며, 그의 행위는 상당한 정도의 칭찬과 갈채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시인(是認) 및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의식만이 우리로 하여금 그 행위자의 그러한 행위 경향을 지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인자함은 여성의 미덕이고 관용은 남성의 미덕이다 357

관용(寬容)과 공익정신의 적정성은 공정(公正)의 적정성과 동일한 원칙 위에 세워져 있다. 관용은 인자(仁慈)함과는 다르다. 이 두 가지 성품은 언뜻 보면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항상 같은 한 사람에게 속해 있는 것은 아니다. 인자함은 여성의 미덕이고 관용은 남성의 미덕이다. 여성들은 보통 남성들보다 훨씬 더 부드럽지만, 여성이 남성만큼의 관용을 가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여성이 큰 기부(寄附) 행위를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은 로마 민법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인자함은 단지 방관자가 당사자의 감정에 대하여 갖는 예민한 동류의식(同類意識), 즉 당사자가 당하는 고통을 슬퍼하고 그가 당한 침해에 분개하며, 그의 행운을 기뻐하는 예민한 동류의식에 존재한다. 가장 인자한 행동도 자기부정(自己否定), 제기제어, 적정성 감각의 거대한 발휘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이 고상한 동감(同感)이 주동적으로 우리에게 행하도록 종용(慫慂)하는 바를 행하는 것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관용(寬容)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어떤 방면에 있어서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그들에게 양보하고, 우리 자신의 크고 중대한 이해를 친구나 윗사람의 동등하게 크고 중대한 이해를 위해서 기꺼이 희생시키지 않고서는, 우리는 결코 관대하다고 할 수 없다.

자기 야심의 위대한 목표였던 어떤 직위에 대한 권리 주장을 다른 사람이 그 직위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여 포기하는 사람, 또는 다른 친구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지는 사람 - 이들의 행위는 모두 인자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또는 다른 사람의 사정을 자신의 사정보다 더 예민하게 느끼기 때문도 아니다. 이들은 모두 서로 대립되는 이해관계를 그 자신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고찰한다. 모든 방관자에게는 이 다른 사람의 성공 또는 존재가 그 자신의 성공 또는 존재보다 확실히 더 의의(意義)가 있을 수 있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그럴 수가 없다. 따라서 이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그 자신의 이익을 희생시킬 때, 그는 자시 자신을 방관자의 감정에 적응시키는 것이며, 또한 관대한 노력을 통하여, 필연적으로 제3자가 갖게 될 것으로 그가 느끼는 그런 사물에 대한 관점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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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이유 212

여하튼 우리가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해 걱정하는 유일한 이유는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하는 점에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만약 우리가 사회를 떠나서 홀로 산다면 우리는 자신의 아름다움이나 추함에 대해 전혀 무관심할 것이다.


미덕과 악덕, 행복과 불행
214-215

친근감을 주고 찬사를 받을 만한 것, 즉 사랑을 받을 만하고 보답을 받을 만한 것은 미덕의 큰 특징이다. 또 가증스럽고 처벌을 받을 만한 것은 악덕의 큰 특징이다. 그러나 이 모든 특징들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미덕은, 그 행위자 자신의 사랑이나 감사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 사람들의 사랑이나 감사의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친근감을 주고 찬사를 받는 것이다. 자신은 이처럼 사람들을 유쾌하게 하는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인식은 그것에 자연적으로 수반되는 내심의 평온과 자기만족의 원천이 되는데, 이는 마치 자신은 이와 반대의 상황에 놓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악덕으로 인한 고통의 원천이 되는 것과 같다. 사랑을 받고 있고 또 우리는 사랑을 받을 만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미움을 받고 있고 또 우리는 미움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불행인가?


경쟁심의 기초 217

경쟁심(emulation), 즉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은 본래 다른 사람들의 탁월함에 대한 우리의 칭찬에 기초를 두고 있다. 우리는 단순히 다른 사람들이 칭찬을 받는 것과 같은 이유로 칭찬받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적어도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칭찬을 받을 만한 것과 같은 이유로 우리 자신도 칭찬을 받을 만하게 되었음을 스스로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만족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는 스스로 자기 자신의 성격과 행동에 대한 공평무사한 방관자가 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의 성격과 행동을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보려고 노력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이 보듯이 보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그것들이 우리가 희망한 대로 보인다면, 우리는 행복하고 만족해한다.


근거 없는 칭찬에 기뻐하는 것 219

근거 없는 칭찬에 기뻐하는 것은 결코 있지도 않았던 모험담을 이야기하면서 동료들의 존경을 받으려고 하는 우매한 거짓말쟁이, 자기에게는 그럴 자격조차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높은 신분인 체하고 기품 있는 체하는 난봉꾼(coxcomb)들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틀림없이 자신들은 갈채를 받고 있다는 공상에서 기뻐한다. 그러나 그들의 허영은 어떤 이성적인 사람이 어떻게 속아 넘어갈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허황된 환상으로부터 발생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속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입장에 자신을 놓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가장 큰 감탄을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동료들에게 실제로 어떻게 보이고 있을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동료들이 자신들을 본다고 그들이 믿고 있는 그러한 관점에서 자신들을 보는 것이다.

그들은 피상적인 나약함과 우매함 때문에 자신의 눈을 내부로 돌리지도 못하고, 또한 만약 진실이 알려진다면 자신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얼마나 경멸스런 인간으로 보일 것인지 그들의 양심이 말해 줄 그런 경멸스런 관점에서 그들 자신을 바라보지도 못한다.


그들이 결코 들을 수 없을 자신들에 대한 박수소리 221

사람들은 종종 그들이 이미 즐길 수 없는 명성을 사후에 획득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생명을 버려 왔다. 그때 그들은 상상력에 의해 미래에 그들에게 부여될 명성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들이 결코 들을 수 없을 자신들에 대한 박수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울린다. 죽으면 결코 그들이 그 효과를 직접 느낄 수없을 사람들의 감탄에 댛나 상념이 그들의 마음속으로부터 모든 자연의 공포 중의 최대의 강력한 공포(즉, 죽음에 대한 공포)를 몰아내고 자신들을 고무시킴으로썩 거의 인간성이 도달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되는 행위들을 자신들로 하여금 행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우리가 더 이상 향유할 수 없을 때까지 부여되지 않는 시인, 다시 말하면 죽은 후에야 비로소 부여되는 시인과, 실제로 결코 부여되지는 않지만 만약 세상 사람들이 우리 행동의 진실한 사정을 정확히 이해한다면 반드시 부여될 그러한 시인 사이에는 사실 큰 차이가 없다. 전자가 종종 그러한 강렬한 효과를 낳는다면, 후자가 왜 언제나 이처럼 높이 평가되고 있는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못 된다.


시인을 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
222

인간들 중에서 가장 약하고 가장 천박한 자들만이 자신들이 전혀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칭찬에 의해 크게 기뻐할 수 있다. 약한 사람은 때때로 그러한 칭찬을 기뻐할지도 모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경우에 그것을 거부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가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으나 칭찬을 받는 경우 그러한 칭찬으로부터 전혀 기쁨을 느끼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가 칭찬받을 만한 일을 자신이 행했을 때에는, 비록 그것에 대하여 결코 칭찬이 부여되지 않을 것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을지라도, 그는 흔히 최고의 기쁨을 느낀다, 시인을 받을 만하지 못한 경우 인류의 시인을 얻는 것은 그에게 결코 중요한 목적이 될 수 없다. 정말로 시인을 받을 만한 경우 사람들의 시인을 얻는 것은 때로는 그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은 하나의 목적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시인을 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은 언제나 최고로 중요한 목적임에 틀림없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224-225

세상 사람들에게 유쾌한 감정을 줄 수 있는 행위의 모든 준칙들을 깨뜨려버린 사람은, 자신이 행한 것이 비록 영원히 모든 인간의 눈으로부터 숨겨지리라고 완전히 확신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소용없는 일이다. 그가 자신이 행한 것을 회상할 때, 그리고 공정한 방관자의 관점에서 자신의 행위를 바라볼 때, 그는 자신의 행위에 영향을 미친 어떤 동기와도 공감할 수 없음을 발견한다. 그것을 생각하면 그의 얼굴이 붉어지고 방황하게 되며, 만약 자신의 행동이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면 그가 받지 않을 수 없는 대단히 큰 치욕감을 필연적으로 느끼게 된다.

이 경우에도 그의 상상력은, 그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무지 외에는 어떤 것도 자신을 그것으로부터 구하지 못하는, 그러한 경멸과 조소를 예상한다. 그는 계속 자신이 (사람들의) 경멸과 조소의 자연스러운 대상이라는 것을 느끼고, 만약 이것들이 그에 대하여 실제로 행사된다면 그가 겪을 것을 생각하고 전율한다. 그러나 그가 범한 죄가 단순히 부인의 대상이라는 도덕적 부적정성의 하나에 불과하지 않고 혐오와 분개를 일으키는 엄청난 범죄의 하나라고 한다면, 감수성이 그에게 남아 있는 한, 그는 그것을 생각할 때 공포와 회한의 모든 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누구도 결코 그것을 알지 못한다고 확신할 수 있어도, 더구나 그것에 대하여 복수하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계속 그의 전 생애를 비참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공포와 회한의 두 가지 감정을 느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계속 자기 자신이 동류들의 증오와 분개의 자연스러운 대상이 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의 마음이 습관화된 범죄 때문에 무감각하게 되지 않았다면, 그 가공할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될 경우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게 될 태도를, 그리고 그들의 얼굴 및 그들의 눈에 나타나는 것들을, 그는 공포와 경악 없이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공포에 떠는 양심이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는 이러한 고통이 바로 악마(deamons)이자 복수의 여신(furies)들이다. 이 악마와 복수의 여신은 죄가 있는 사람들에게 그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 출몰하여 그들에게 마음의 평정과 안식을 허용하지 않고 흔히 그들을 절망과 혼란으로 이끌어 가는데, 자신의 죄에 대한 비밀이 지켜질 것이라는 어떤 확신도 그들을 그 악마와 복수의 여신으로부터 보호해줄 수 없고, 어떤 무신론의 교리도 이들로부터 그들을 구해내지 못한다. 그리고 모든 정신 상태 중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비참한 상태, 즉 명예도 불명예도 악덕도 미덕도 완전히 느낄 수 없는 정신상태가 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그들을 이 악마와 복수의 여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줄 수 없다.


가장 무가치하고 부당한 비판 234

시의 아름다움은 이러한 섬세함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젊은 신인들은 자신의 시가 그와 같은 아름다운 수준에 이미 도달했는지의 여부를 거의 확신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의 친구들 및 세상 사람들의 호의적인 판단만큼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은 없고, 그 반대의 것만큼 그를 심하게 낙담시키는 것도 없다. 전자는 그가 자신의 업적에 대하여 받고자 열망하는 호평(好評)을 확인해 주고, 후자는 그것을 흔들어 놓는다. 경험과 성공의 축적이 결국 자신의 판단에 대한 좀 더 많은 확신을 그에게 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언제든지 일반 세상 사람들의 악의적인 판단에 의해 매우 심하게 실망하기 쉽다.

라신(Racine)은 그의 첫 번째 작품인 비극 『패드라(Phaedra)』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너무 실망한 나머지 더 이상 작품을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그의 이 작품은 그의 생명의 활기가 충만할 때, 그의 능력이 절정기에 있을 때 쓴 것으로 아마 현존하는 비극들 중에서는, 어떤 언어로 된 것이건 간에, 가장 뛰어난 비극일 것이다. 이 위대한 시인은 종종 그의 자식에게, 가장 무가치하고 부당한 비판이 언제나 가장 훌륭하고 정당한 찬사가 그에게 주는 쾌락의 정도보다 훨씬 더 큰 정도의 고통을 주었다고 말했다. 볼테르(Voltaire)가 같은 종류의 가장 경미한 비난에 대해 극도로 민감했던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의 『바보열전(The Dunciad)』은 모든 영시(英詩)들 중에서 가장 우아하고 음악적일 뿐만 아니라 운율이 가장 정확한 영원한 기념비적인 시(詩)지만, 이러한 시조차 가장 저질적이고 가장 경멸할 만한 저자들의 악평을 받고 큰 상처를 받았던 것이다.


칭찬과 비난 238

칭찬과 비난은 우리의 성격이나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감정이 실제로 어떠한 것인지를 나타내고, 칭찬받을 만하다거나 비난받을 만하다거나 하는 것은 우리의 성격과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자연스런 감정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나타낸다.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은 우리 형제들의 호의적인 감정을 얻고자 갈망하는 감정이다. 칭찬받을 만한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것은 자신이 그러한 감정의 정당한 대상이 되고자 하는 갈망이다. 이 점에서 두 가지 원리는 서로 비슷하고 피차 동류(同類)이다. 피차 동류라는 것과 서로 비슷하다는 것 사이의 관계는 실제로 비난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비난받을 만하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사이에서도 성립한다.


현세와 내세 244

많은 경우 현세에서의 우리의 행복은 내새(來世)의 삶에 대한 소박한 희망과 기대에 의탁되어 있다. 이 희망과 기대는 인간 본성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것으로서, 이 희망과 기대만이 인성의 존엄에 대한 고상한 이상을 지탱해 줄 수 있으며, 이들만이 끊임없이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음울한 예감에 밝은 빛을 비춰 줄 수 있고, 이 세상의 혼란 때문에 때때로 인성이 직면할지도 모를 가장 엄중한 재난의 중압 하에서도 그 쾌활함을 유지시켜 줄 수 있다.


중국이 갑자기 지진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상상해 보자 251

중국이란 대 제국이 그 무수한 주민과 함께 갑자기 지진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상상해 보자. 그리고 중국과는 어떠한 관계도 갖지 않았던 유럽의 어떤 인도주의자에게 이 가공할 만한 재앙의 보도가 전해졌을 때, 그가 어떤 영향을 받을 것인지를 상상해 보자.


인생의 변화무쌍함과, 이렇게 일순간에 파멸되는 인류의 모든 노동의 창조물의 허망함에 대하여 251∼252

나의 상상으로는,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저 불행한 사람들의 액운(厄運)에 대한 그의 비애를 매우 강하게 표명할 것이고, 인생의 변화무쌍함과, 이렇게 일순간에 파멸되는 인류의 모든 노동의 창조물의 허망함에 대하여 많은 침통한 성찰을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투기업자라면, 그는 이 재난이 유럽의 상업에, 그리고 전 세계의 무역과 상업에 미칠지도 모를 효과들에 대한 많은 추측에 몰두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문제들에 대한 그의 생각 정리가 끝났을 때, 이 문제에 대한 그의 인도적 감정들이 충분히 표명된 후에는, 그는 그런 사고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을 때와 똑같이 느긋하고 편안하게 자기의 사업 또는 쾌락을 추구할 것이고, 휴식과 기분전환을 취할 것이다. 그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소소한 재난이 그에게는 오히려 더욱 실질적인 혼란을 일으킬 것이다. 만약 그가 내일 자기 새끼손가락을 잘라버려야 한다면 오늘밤 그는 잠을 자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1억이나 되는 이웃 형제들의 파멸이 있더라도, 만약 그가 직접 그것을 보지 않는다면, 그는 깊은 안도감을 가지고 코를 골며 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이 거대한 대중의 파멸은 분명히 그 자신의 하찮은 비운보다 관심을 끌지 못하는 대상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인도적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자신에 대한 이 사소한 비운을 방지하기 위하여 1억이나 되는 이웃 형제의 생명을, 만약 그가 그것을 결코 보지 않아도 된다면, 기꺼이 희생시킬 것인가? 인간의 본성은 이러한 생각에 공포를 느끼며, 그리고 세상은, 아무리 부패하고 타락했더라도, 이러한 상황을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악한 사람은 결코 만들어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의 소극적인 감정들은 거의 언제나 이처럼 야비하고 이처럼 이기적일 때, 어떻게 우리의 적극적인 천성들은 흔히 그처럼 관대하고 그처럼 고귀할 수 있는가? 우리가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 관련된 일보다도 우리 자신에 관련된 일에 의해 훨씬 많은 영향을 받는다면, 무엇이 관대한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경우에, 그리고 일반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들의 더 큰 이익을 위하여 그들 자신의 이익을 희생시키도록 촉구하는가? 자애(自愛: self-love)의 가장 강한 충동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인간애(humaity), 즉 인도주의의 온화한 힘이 아니며, 조물주가 인간의 마음에 밝혀준 자애(benevolence)의 약한 불꽃도 아니다. 이러한 경우에 작용하는 것은 보다 강렬한 힘이고 보다 강제력 있는 동기이다.


양심, 가슴 속의 동거인(同居人), 내부 인간, 우리 행위의 재판관 및 조정자(調整者)
253

그것은 이성(理性), 천성(天性), 양심, 가슴 속의 동거인(同居人), 내부 인간, 우리 행위의 재판관 및 조정자(調整者)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 내심의 가장 몰염치한 격정을 향하여 깜짝 놀랄 정도의 큰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소리치는 것은 바로 이 사람이다. 즉, 우리는 대중 속의 한 사람에 불과하고, 어떠한 점에 있어서도 그 속의 다른 어떠한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우리가 그처럼 수치(羞恥)를 모르고 맹목적으로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우선시킨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분개와 혐오와 저주의 정당한 대상이 될 것이라고, 우리가 우리 자신들에 관련된 모든 것이 실제로는 사소한 것이라는 사실을 배우는 것은 오직 이 중립적 방관자로부터이고, 이 중립적 방관자의 눈에 의해서만 자애(自愛)가 빠지기 쉬운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을 수 있다. 관용의 적정성과 부정(不正)의 추악성, 우리 자신의 큰 이익보다 다른 사람들의 더 큰 이익을 위하여 우리 자신의 그것을 양보하는 것의 적정성과, 우리 자신의 최대의 이익을 얻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가장 사소한 이익까지 침해하는 행위의 추악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바로 이 공평무사한 중립적 방관자이다.

많은 경우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신성한 미덕을 행하도록 촉구하는 것은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도 아니고 인류에 대한 사랑도 아니다. 그러한 경우에 통상 생기는 것은 보다 강한 사랑, 보다 강력한 애정, 즉 명예스럽고 고귀한 것에 대한 사랑, 우리 자신의 성격의 숭고함, 존엄성, 탁월성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


조물주의 가장 현명한 목적 261-262

조물주는 그 가장 현명한 목적(즉, 종족의 보존과 번식이란 목적)을 위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아마도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부모에 대한 자식의 효심(孝心)보다 훨씬 더 강렬한 감정이 되게 만들었다. 종족(種族)의 보존 및 번식(繁殖)은 후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전자에 달려 있는 것이다.

통상적인 경우 자식의 생존 및 보호는 전적으로 그 부모의 배려에 의존한다. 그러나 부모의 생존 및 보호가 자식의 배려에 의존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래서 조물주는 전자에게는 이처럼 강렬한 감정을 부여해 놓았으므로 일반적으로 그것은 자극(刺戟)되어야 할 필요는 없고 반대로 절제(節制)되어야 할 필요는 있다. 그리고 도덕학자들이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노력하는 것도 자식 사랑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발휘하라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자녀에 대한 사랑, 자녀에 대한 과도한 애정, 우리가 남의 자식보다도 자신의 자식에게 훨씬 더 많이 쏟는 경향이 있는 편애(偏愛)를 어떻게 억제할 것인가 하는 것에 관해서이다. 이와는 반대로, 도덕학자들은 우리에게 자신의 부모에 대한 효경심(孝敬心)을 가지라고 훈계하고, 부모들이 연로할 때 그들이 받아 마땅한 보답을 함으로써 우리가 아기일 때, 어린아이일 때 부모들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은혜를 갚으라고 타이르고 있다.

십계명(十戒命:Decalogue)에서는 우리에게 자기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자식에 대한 사랑에 관해서는 어떤 언급도 없다. 조물주는 우리에게 이 후자의 의무 수행을 위해서는 충분한 준비를 해놓았다. 사람들은 자기 자식들을 실제보다 더 좋아하는 척 가장한다고 해서 비난받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반대로 사람들이 자신의 부모에 대한 효심을 표현할 때에는 거기에는 너무 많은 가식(假飾)이 들어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는다. 같은 이유로 사람들은 미망인(未亡人)의 가식적인 비애(悲哀)에 대해서도 그 진정성을 의심한다. 우리가 만약 미망인의 비애가 가식이 없는 진실한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면, 비록 비애의 감정이 지나치게 표현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존중해 주어야 하며, 그리고 비록 그 감정을 완전히 시인(是認)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심하게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처럼 가장(假裝)하는 것 자체가, 적어도 그것을 가장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것이 칭찬받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이고 있다는 것의 증거이다.


스토아학파의 냉담함
263

스토아학파의 냉담(stoical apathy)함은 결코 사람들을 유쾌하게 할 수 없으며, 이런 종류의 냉담함을 지지하는 모든 형이상학적 궤변(Sophism)은 잘난 체하는 인간들의 가슴 속에 바람을 불어넣어 그들의 철석같은 심장을 이 철학이 본래부터 가자고 있던 뻔뻔하고 무례한 정도를 열 배나 키워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사랑과 우정을 가장 섬세하고 아름답게 읊고 묘사한 시인과 소설가들, 즉 라신(Racine)과 볼테르(Voltaire), 그리고 리차드슨(Richardson)과 모리보(Maurivaux)와 리코보니(Riccoboni) 등은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인 제노(Zeno)와 크리시푸스(Chrysippus), 또는 에픽테투스(Epictetus) 등에 비하여 훨씬 좋은 교사들이다.


최대로 태연하게 행동하는 사람들
265

부자에서 빈자로 전락하는 일은 통상 있는 일로서 당사자로서는 가장 현실적인 재난이다. 그러므로 방관자의 마음속에서 가장 진지한 동정을 불러일으킨다. 현재의 사회상태에서 이러한 불행은 수난자 자신에게 어떤 잘못된 행위, 또한 어떤 매우 중대한 잘못된 행위가 없다면 거의 일어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그는 거의 언제나 많은 동정을 받아서 최저의 빈곤상태로 떨어지도록 방치되는 일은 거의 없다. 그의 친구들의 도움에 의해서, 흔히 그의 경솔함에 대하여 불평을 말할 이유가 충분히 있는 채권자들 자신의 관용에 의해서, 거의 언제나 초라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체면치레는 할 정도의 생활은 유지할 수 있다. 그러한 불행 속에 있는 사람들의 경우 우리는 아마 어느 정도 그들의 심약함을 용이하게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새로운 처지에 대하여 매우 확고한 모습과 태도를 견지하면서 최대로 태연하게 행동하는 사람들, 자신의 악화된 처지로부터 어떤 수치심도 느끼지 않고 사회에 있어서의 자신의 지위를 재산이 아니라 자신의 인격과 행위 위에 건립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우리로부터 최대의 시인을 받고 우리의 최대 최고의 애정에 찬 감탄을 획득할 것이다.


불행 중에 있는 사람의 훌륭한 태도에 수여하는 보상 272

조물주가 불행 중에 있는 사람의 훌륭한 태도에 수여하는 보상은 이처럼 그 태도의 훌륭함에 정확하게 비례한다. 조물주가 고통과 불행의 쓰라림에 대해 수여할 수 있는 유일한 보상은, 그의 태도의 훌륭한 정도가 같을 때에는, 그 고통과 불행의 정도에 정확하게 비례한다. 우리의 자연적 감수성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자기억제의 정도에 비례해서 그로부터 얻는 즐거움과 자부심도 그만큼 커진다. 더구나 이 극복의 즐거움과 자부심이 이처럼 크기 때문에, 그것을 충분히 향유하는 사람은 전혀 불행할 수 없다. 고통과 불행은 완전한 자기만족으로 꽉 차 있는 사람의 가슴 속에는 결코 들어갈 수 없다.


발작처럼 돌연히 발생한 불행(paroxysms of distress)을 당하는 경우 272∼273

발작처럼 돌연히 발생한 불행(paroxysms of distress)을 당하는 경우 가장 현명하고 단호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의 생각에는, 상당한 정도의, 심지어 고통스럽기까지 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자신의 불행에 대한 그 자신의 자연스런 감정, 그 자신의 처지에 대한 그 자신의 자연스런 시각이 그를 강하게 압박하기 때문에, 그가 엄청나게 큰 노력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주의력을 공정한 방관자의 시각에 집중할 수가 없다. 두 가지 종류의 시각, 즉 자신의 견해와 공정한 방관자의 견해가 동시에 그의 앞에 나타난다. 그의 명예감각, 그 자신의 존엄에 대한 고려는 그에게 자신의 모든 주의력을 방관자의 그것에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 그의 자연적인, 교육받지 않은, 훈련되지 않은 감정들은 계속 그의 주의력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한다.

이런 경우, 그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가슴 속의 가상의 인간과 일치시킬 수 없고, 스스로 자기 행위의 공정한 방관자가 될 수도 없다. 양자의 서로 다른 성격의 시각이 그의 마음속에 서로 분리되고 구분되어 존재하고, 각각은 그에게 서로 다른 행위를 하도록 지시한다. 그가 명예심과 자존심이 그에게 지시하는 시각에 따를 때, 사실 조물주는 그에게 아무런 보상도 없는 상태로 남겨두지는 않는다. 그는 그 자신의 완전한 자기시인(自己是認)과 동시에 정직하고 공정한 모든 방관자들의 갈채를 누리게 된다. 그렇기는 하지만, 조물주의 만고불변의 법칙에 따라서, 그는 여전히 고통을 당한다. 조물주가 수여하는 보상이 매우 크기는 하지만, 이러한 법칙이 그가 당한 고통을 완전히 보상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 그렇다고 조물주의 보상과 그의 고통의 크기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조물주의 보상이 그가 받는 고통을 완전히 보상해 준다면, 자신의 이기적인 고려에서, 그는 자기 자신과 사회에 대한 자신의 효용을 필연적으로 감소시킬 우발적 사고를 회피하려는 동기를 전혀 갖지 않을 것이다(완전히 보상받는다면 사고를 피하는 것과 피하지 않는 것 간에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조물주는 양자에 대한 부모다운 배려에서 그가 가능한 한 모든 우발적 사고들을 피하도록 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리고 발작처럼 돌연히 발생한 불행 중에서도, 자신의 사내다운 모습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판단의 침착함과 냉정함을 유지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는 최대의 가장 고된 노력을 해야만 한다.


고통은 결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274

그러나 인성(人性)의 구조적 특성상, 고통은 결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그리고 만약 그가 그 발작처럼 돌연히 발생한 불행을 견뎌내기만 한다면, 그는 곧 크게 어렵지 않게 일상의 평정을 즐기게 된다. 나무 의족(義足)을 한 사람은 고통을 겪으면서, 틀림없이 자신의 남은 전 생애 동안 매우 큰 불편을 계속 겪어야만 할 것으로 예상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의족을 한 자신의 모습을 모든 공정한 방관자가 그것을 보는 것과 정확히 동일하게 보게 된다. 즉, 그는 이 불편함을, 그런 중에서도 혼자서 혹은 여럿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모든 통상의 기쁨을 즐길 수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그는 곧 자신을 자기 가슴 속의 가상의 인간과 일치시키고,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한 공정한 방관자로 된다. 약한 사람들은 처음에 때때로 그렇게 하듯이, 그는 울거나 탄식하거나 그것에 대해 비관하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그는 공정한 방관자의 시각에 완전히 익숙해져서 더 이상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고, 어떤 몸부림도 치지 않고, 자신의 불행을 다른 어떤 시각에서 관찰하려는 생각도 전혀 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은 조만간 필연적으로 자신이 장기간 처해 있는 환경에 자기 자신을 적응시켜 간다 274-275

모든 사람들은 조만간 필연적으로 자신이 장기간 처해 있는 환경에 자기 자신을 적응시켜 가는데, 이러한 사실이 아마도 우리를 스토아학파의 적어도 다음과 같은 주장은 극히 정확한 것에 가깝다고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즉, 한 가지 장기간 처해 있는 상황과 또 다른 상황과의 사이에는 진정한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 또는 만약 거기에 어떤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 가운데 일부가 무슨 열렬하고 절실한 갈망의 대상이 아니라 단순한 선택(選擇)과 편애(偏愛)의 대상이 되고 일부는 단순히 거절(拒絶)의 대상이 된다는 것. 즉 단지 한 쪽에 치워져 있거나 회피의 대상이기는 해도 열렬하고 절실한 혐오의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행복은 마음의 평정과 향유(享有) 가운데 있다. 평정 없이는 향유할 수 없고, 완전한 평정이 있는 곳에는 향유할 수 없는 것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어떤 변화도 기대할 수 없는 모든 영속적인 상황에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길든 짧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고 통상적인 평정의 상태로 돌아온다. 순경(順境)의 경우에도 일정한 시간이 경과하면 마음은 이와 같은 평정상태로 돌아오고, 역경(逆境)의 경우에도 일정한 시간이 경과하면 마음은 이와 같은 평정상태로 돌아온다. 유행을 좋아하고 성격이 경박한 로잔(Lauzun) 백작조차도 바스티유(Bastile) 감옥 안의 그 고독 가운데서 일정한 시간이 지나자 마음의 평정을 회복하여 거미 사육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사고가 더욱 풍부한 사람의 경우에는 아마도 더욱 빠르게 그 평정의 상태를 회복할 것이고, 그 자신의 사고 속에서 훨씬 나은 즐거움을 발견할 것이다.


인간생활의 불행과 혼란의 최대 원천 275-276

인간생활의 불행과 혼란의 최대 원천은 하나의 영속적 상황과 다른 영속적 상황과의 차이를 과대평가하는 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으로 보인다. 탐욕(貪慾: avarice)은 가난과 부유함 사이의 차이를 과대평가하고, 야심(野心: ambition)은 개인적 지위와 공적 지위의 차이를 과대평가하고, 허영(虛榮: vain-glory)은 무명(無名)의 상태와 유명(有名)한 상태의 차이를 과대평가한다. 이러한 종류의 사치스런 격정의 영향하에 있는 사람은 그 자신이 처해 있는 실제 환경에서 불행하고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흔히 그가 어리석게도 감탄하는 처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사회적 안정을 교란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인생에 대해) 조금만 살펴보아도, 인간생활의 일상적인 모든 상황에서 교양 있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평온하고, 마찬가지로 기뻐하고, 마찬가지로 만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러한 통상의 여러 가지 상황들 중에서 어떤 상황은 다른 상황보다 더욱 바람직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러나 그것들 중 어떤 것도 신중(愼重: prudence) 또는 정의 (正義: justice)의 법칙들을 위반해 가면서까지 격정적인 열의를 가지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며, 또는 후에 가서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을 회상할 때 느끼게 될 수치심과, 자신의 부정한 행위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회한(悔恨)으로 마음의 장래의 평정까지 파괴해 가면서까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신중(愼重)이 자신의 처지를 바꾸려는 시도를 지도(指導)하지 않고, 정의가 자신의 처지를 바꾸려는 시도를 허용하지 않는데도 그것을 바꾸려고 시도하는 사람은, 모든 위험한 게임들 가운데서 가장 불평등한 게임을 하는 것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모든 것을 거는 사람으로서, 그가 장차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에피루스(Epirus) 국왕의 총애하는 신하가 국왕에게 말한 것은 인생의 일상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국왕은 그 신하에게 자신이 예정하고 있는 모든 정복 계획들을 차례대로 설명해 주었는데 그 최후의 정복계획에 이르렀을 때 그 신하가 말했다. "그런 다음에 폐하께서는 무엇을 하실 작정이십니까?" 그러자 국왕이 대답했다. "그런 다음 나는 나의 친구들과 더불어 즐겁게 지낼 거야. 술을 마시면서 친구들과 사귀도록 노력할 거야 ······ ." 그 신하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엇이 폐하께서 지금 그렇게 하시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기대하는 쾌락들
277

한가한 망상(妄想) 속에서나 생각해볼 수 있는 가장 찬란하고 가장 의기양양한 상황에서 우리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기대하는 쾌락들은, 사실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처해 있는 초라한 지위에서 우리가 언제든지 손안에 넣을 수 있고 언제든지 우리 마음대로 즐길 수 있는 그러한 쾌락들과 거의 언제나 같은 것이다. 허영(虛榮)과 우월(優越)이라는 경박한 쾌락을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지위가 제공할 수 있는 모든 쾌락을 우리는 개인의 자유만이 존재하는 가장 초라한 지위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완전한 마음의 평정(平靜), 즉 모든 실재적이고 만족감을 주는 향유(享有)의 천성이자 기초가 되고 있는 마음의 평정과, 허영 및 우월이란 쾌락은 서로 조화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우리가 지향하는 휘황찬란한 위치에서는 우리가 이처럼 절실하게 벗어나고자 하는 초라한 지위에서 용이하게 즐길 수 있는 실재적이고 만족감을 주는 쾌락들을 마찬가지로 쉽게 향유할 수 있을는지도 언제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어느 한 사람의 묘비에 새겨진 글

역사의 기록들을 검토해 보고, 당신 자신이 경험한 범위 내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회상해 보고, 당신이 책에서 읽었거나 이야기를 들었거나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로서 자신의 개인생활에서건 사회생활에서건 극히 불행했던 모든 사람들의 행위가 어떠했었는지를 주의를 기울여 고찰해 보라. 그러면 당신은 그들 중 절대다수 사람들의 불행은 그들이 자신의 한창 좋은 때가 언제인지, 조용히 앉아서 만족하고 쉬어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것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즉, 만족하고 멈추어야 할 때를 몰랐던 데 있는 것이다). 온갖 약을 복용함으로써 건강한 자신의 신체를 더욱 건강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던 어느 한 사람의 묘비(墓碑)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나의 몸은 건강했다. 나는 더욱 건강해지기를 원했다. 그리고 지금은 여기에 있다"라고. (277쪽∼278쪽)


시간이라는 위대하고 보편적인 위안자 278∼279

다음의 관찰은 특별한 상황에 대한 것으로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것은 올바른 결론이라고 믿는다. 즉, 다소라도 구제(救濟)의 여지가 있는 불행 중에 처해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제의 여지가 전혀 없는 불행 중에 처해 있는 사람들처럼 일반적으로 그렇게 쉽게 자신들의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평정을 회복하지 못한다. 후자의 종류에 속하는 구제의 여지가 없는 불행에 처한 사람들의 경우, 총명한 사람의 감정 및 행위와 연약한 사람의 감정 및 행위 사이에 어떤 눈에 띄는 차이점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주로 발작처럼 돌연히 발생한 불행의 경우 또는 불행이 최초에 엄습한 때이다. 그러나 최후에 가서는 시간(時間)이라는 위대하고 보편적인 위안자(慰安者)가 점차 저 연약한 사람으로 하여금 총명한 사람이 최초에 자존심과 사내다운 기개의 교도(敎導)에 의해 도달하였던 그런 수준의 마음의 평정에 도달하게 된다.

나무 의족(義足)을 한 사람의 경우가 이런 사정에 대한 분명한 예이다. 자식의 죽음, 친구나 친척의 죽음 등처럼 회복할 수 없는 불행을 당한 경우에는 총명한 사람이라도 일정한 기간 동안 어느 정도의 슬픔에 빠질 수 있다. 다정다감하고 연약한 여성은 그런 경우 흔히 거의 완전히 미쳐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길든 짧든 시간이 지나면 예외 없이 이런 가장 연약한 여성까지도 가장 강인한 남성과 같이 어느 정도의 평정을 회복하게 된다. 그 자신에게 즉각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모든 회복 불가능한 재난 가운데서도, 총명한 사람은 몇 달 또는 몇 년 후에는 결국 회복될 것이 틀림없는 마음의 평정을 처음부터 예상하고 그것을 미리 즐기려고 노력한다.


아무도 스스로 그 아래 들어가서 배우고 싶어하지 않는 교사들
282

그는 본래 가장 완전한 자기억제력을 획득하기에 적합한 품성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러나 그것을 실제로 획득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연습과 실천을 할 기회가 없었는데, 이것 없이는 어떠한 습관도 상당한 정도로 형성될 수 없다. 곤란, 위험, 상해, 불행 등은 우리가 그 밑에서 이러한 미덕의 실천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교사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아무도 스스로 그 아래 들어가서 배우고 싶어하지 않는 교사들인 것이다.


고독할 때 우리는
284

고독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을 매우 강렬하게 느끼기 쉽다. 즉, 우리는 우리가 했을지도 모를 선행(善行)과 우리가 받았을지도 모를 상해(傷害)를 과대평가하기 쉽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운에 의해 지나치게 의기양양해 하고, 우리 자신의 불운에 의해 지나치게 실의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친구와의 대화는 우리의 기분을 좋게 하고,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는 우리의 기분을 더욱 좋게 한다. 우리 가슴 속의 인간, 즉 우리의 감정과 행위의 추상적인 상상 속의 방관자는 가끔 현실의 방관자의 출현에 의해 잠에서 깨어나 그 의무를 상기햐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자기억제란 학습과목을 가장 완전하게 배울 수 있는 것은 언제나 방관자, 즉 우리가 최소의 동감과 관용밖에는 기대할 수 없는 바로 그 공정한 방관자로부터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역경에 처해 있는가? 284

당신은 역경에 처해 있는가? 고독의 어둠 속에서 탄식하지 말고, 당신의 친한 친구들의 관대한 동감에 맞추어 당신의 슬픔을 조정하지 말 것이며, 가능한 한 빨리 세상과 사회의 일광(日光) 속으로 돌아가라. 그리고는 낯선 사람들, 당신의 불행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그것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고, 적들과 사귀는 것조차 회피하지 말고, 당신의 적들로 하여금 당신이 당신의 재난에 의해 얼마나 영향을 적게 받았는지, 얼마나 그것을 초월해 있는지를 느끼도록 하고, 당신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는 그들의 악의(惡意)에 굴욕감을 안겨줌으로써 당신 스스로 기뻐하라.


탐욕의 대상과 야심의 대상 324

탐욕의 대상과 야심의 대상은 단지 그 대상이 위대한 것인지 아닌지에 있어 차이가 날 뿐이다. 구두쇠는 반 푼의 동전을 획득하기 위해 큰 야심을 가진 사람이 한 왕국을 정복하려고 할 때만큼이나 맹렬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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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피로스와 키네아스
    from Value Investing 2013-07-16 13:40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는 세 차례의 포에니 전쟁이 벌어졌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을 매듭지은 자마 전투 이후,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과 그에게 승리를 거둔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가 우연히 로도스 섬에서 만났다. "우리 시대에 가장 뛰어난 장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니발은 즉석에서 대답했다.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요. 페르시아의 대군을 소규모 군대로 무찔렀을 뿐 아니라,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경계를 훨씬 넘어선 지방까지 정복한 업적은 실로 위
 
 
 


(밑줄긋기)

조물주의 세심한 배려 144

사회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부당하고 정당한 이유 없는 악의(惡意)는 적절한 처벌을 통해 억제되고, 따라서 그와 같은 처벌을 하는 행위는 도덕적으로 옳고 칭찬할 만한 행위로 간주될 필요가 있다. 비록 인간에게는 자연적으로 사회의 안녕과 존속을 희망하는 욕망이 부여되어 있지만, 대자연의 창조주는 어떤 특정한 처벌행위가 이 목적을 달성하는 데 적절한 수단이 되는가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인간의 이성(理性)에 부여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것을 달성하는 데 가장
적절한 바로 그 처벌행위를 즉각적으로 그리고 본능적으로 시인할 수 있는 능력만을 인간에게 부여하였다. 조물주의 세심한 배려는 이런 점에 있어서도 많은 다른 경우처럼 추호도 어그러짐이 없다.

만약 이런 표현이 허용된다면, 그 고유한 중요성 때문에 조물주가 사랑하는 목적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모든 목적들에 대해서,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는 인간에게 끊임없이 그가 의도하는 목적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을 부여하는 한편, 마찬가지로 인류에게 그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유일무이의 수단을 그 자체를 위해서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도 부여하였다.

그러므로 자기보존(自己保存)과 종족번식(種族繁殖)이야말로 조물주가 모든 동물들을 창조할 때 불어넣은 가장 큰 목적이라고 할 것이다. 인간은 이와 같은 목적을 추구하려는 욕망과 그 반대되는 것에 대한 반감, 생명에 대한 사랑과 죽음에 대한 공포, 종족의 계속성과 영속성에 대한 욕망과 종족의 완전한 소멸에 대한 반감을 부여받았다.


분개(憤慨)의 감정
149

분개(憤慨)는 방어를 위해서, 그리고 오직 방어만을 위해서, 천성이 우리에게 부여해준 감정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정의를 지키는 보호장치이자 죄없는 사람을 지키는 안전장치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가해지려는 해악을 물리치고 이미 가해진 것에 대해서는 보복을 하도록 촉구한다. 그리하여 가해자로 하여금 자신의 부정한 행위를 반성하도록 하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같은 처벌을 받을까봐 두려움을 갖도록 함으로써 유사한 죄를 범하지 못하도록 한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해치는 행위 156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가한 해악에 대한 우리의 정당한 분노 이외에는,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해칠 수 잇는 정당한 동기가 있을 수 없고, 만인의 공감을 받으면서 우리가 남에게 해악을 끼칠 수 있도록 하는 유인(誘因)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 자신의 행복에 방해된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의 행복을 해치는 행위나, 어떤 것이 우리에게 마찬가지로 유용하거나 또는 그 이상으로 유용하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실제로 유용한 것을 빼앗는 행위나, 또는 이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타인을 희생시켜 가면서 다른 사람의 행복보다 자신의 행복을 중시하는 천성적인 선호(選好)에 몰두하는 행위는 공정한 방관자로서는 결코 공감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행복 vs 전 세계의 행복
157

속담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그 자신에게는 전 세계일지 몰라도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전 세계의 지극히 하찮은 부분에 불과하다고 한다. 비록 그 자신의 행복은 그를 제외한 전 세계의 행복보다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그의 행복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 이외의 다른 어떤 사람의 행복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비록 모든 개인이 각자의 마음속에서는 자기 자신을 모든 인류보다 더 선호하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가 다른 사람들을 정면으로 똑바로 쳐다보면서 자신은 이 원칙에 따라서 행동할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해서는 안 된다.


공정한 경쟁을 위반하는 것
158

부와 영예와 높은 지위를 향한 경주에서 사람들은 다른 경쟁자들을 이기기 위해 자신의 온힘을 다하여 달리고,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노력을 다 기울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자기 경쟁자들 중 어느 누구를 밀어제치거나 넘어뜨린다면, 방관자들의 관용은 거기서 완전히 끝난다. 그것은 공정한 경쟁을 위반하는 것으로, 방관자들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다. 방관자들에게는 그의 방해를 받은 사람도 모든 면에서 그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즉, 방관자들은 이 방해자가 자신을 남보다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애(自愛)에 공감하지 않으며, 그가 다른 사람을 해치게 된 동기에 공감할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피해자가 느끼는 자연스러운 분개의 감정에 기꺼이 동감하고, 가해자는 그들의 증오와 분개의 대상이 된다.


회한
160

이것이 바로 회한(悔恨: remorse)이라고 적절하게 불릴 수 있는, 인간이 느끼는 감정들 중에서 가장 두려운 감정의 본질이다. 이것은 과거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옳지 않았다고 하는 감각에 기인하는 수치심, 그 행위의 결과에 대한 비애, 그 행위로 인하여 고통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 그리고 자신에게 대하여 모든 이성적인 존재들이 갖는 분개가 정당하다는 인식에서 생겨나는 처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심으로 구성된다.


불의의 만연
163, 167

사회는 항상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침해를 입히려고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존립할 수 없다. 서로에 대한 가해 행위가 시작되는 순간, 서로에 대한 분개와 증오가 나타나는 순간, 사회의 모든 유대관계는 산산 조각나고,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그들 간의 불화 감정이 야기한 폭력과 대립에 의해, 사방으로 흩어지고 국외로 달아나게 된다.

만약 강도와 살인자들 사이에서도 어떤 사회가 존재하려면, 주지하는 바와 같이, 적어도 그들 간에 서로 강탈하거나 살해하는 것을 자제해야만 한다. 따라서 자혜(慈惠)는 사회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정의(正義: justice)보다 덜 중요하다. 비록 최선의 상태는 아닐지라도, 사회는 자혜 없이도 존속할 수 있다. 그러나 불의의 만연은 사회를 철저히 파괴시켜 버린다.
······
불의는 필연적으로 사회를 파괴한다. 따라서 불의가 나타날 때마다 인간은 놀라고, 그대로 놓아두면 그에게 소중한 모든 것을 급속하게 파괴시켜 버릴 불의한 사건의 진행을, 중지시키려 달려든다. 만약 그가 온당하고 공정한 방법으로 그것을 중지시킬 수 없다면, 그는 힘과 폭력에 의지해서라도 그것을 타도해야 한다. 여하튼 그는 불의가 지속되는 것을 중지시켜야 한다. 따라서 인간은 종종 정의의 법을 위반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심지어 극형에 처해 가면서까지 정의의 법을 시행하는 것을 시인(是認)한다고 한다. 공공의 평화를 방해하는 자는 이렇게 해서 세상에서 제거되고, 다른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보고 겁이 나서 감히 그의 행위를 모방하지 못하게 된다.


정의는 모든 건물을 지탱하는 주요 기둥 163-164

정의(正義)는 모든 건물을 지탱하는 주요 기둥이다. 만약 그것이 제거되면 위대하고 거대한 인간사회라는 구조물은 틀림없이 한순간에 산산이 부셔지고 말 것이다. 그런데 이 구조물을 건립하고 지탱하는 일에 대하여 신은 특별하고도 소중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정의의 준수를 강제하기 위하여, 즉 약자를 보호하고 난폭한 사람을 억제하고, 죄를 지은 자를 응징하기 위하여, 조물주는 인간의 가슴 속에 악행에는 악한 응보가 따른다는 인식과, 정의를 위반할 때 가해지는 응분의 처벌에 대한 공포를 인간 사회의 위대한 파수꾼으로서 심어 주었다.


우리에게 큰 기쁨 또는 빈번한 즐거움의 원인이 되는 생명이 없는 대상들에 대하여
178

우리는 우리에게 큰 기쁨 또는 빈번한 즐거움의 원인이 되는 생명이 없는 대상들에 대하여도 일종의 감사의 감정을 품는다. 한 선원이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난파선에서 도망쳐 나올 때 타고 왔던 나무판자로 불을 피운다면, 그의 행동은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일 것이다. 우리는 차라리 그가 그것을 주의와 애정을 가지고 어느 정도 귀중한 기념물로 보관하기를 기대한다. 사람은 자신이 오랫동안 사용해온 담뱃갑, 주머니칼, 지팡이를 좋아하게 되고, 그것들에 대해 진정한 사랑과 애정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만일 그가 그것을 깨뜨리거나 분실한 경우, 그는 실제 손해의 가치와는 전혀 균형이 맞지 않게 속상해 한다. 우리는 우리가 오랫동안 살아온 집, 우리가 오랫동안 즐겨 찾고 감상하던 그늘과 신록을 제공해준 나무 등을 은혜를 베푼 자에게 표시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보이는 일종의 존경의 마음으로 바라본다. 그러한 집이 허물어지거나 또는 그런 나무가 베어지는 것은, 비록 이루가 그것 때문에 어떤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니어도, 우리를 대단히 우울하게 만든다.

고대의 드라이어드(Dryads)와 레어스(Lares)는 나무와 집의 수호신들인데, 최초에 이런 미신을 만들어낸 사람은 그런 사물들에 대해 자신이 가졌던 감정의 암시를 받아서, 만약 그런 사물들에게 생명이 없다면 그 스스로의감정이 비합리적인 것이 되므로, 그곳에는 생명이 있다고 보았던 것 같다.


보은의 목적
180

우리가 우리의 은인에 대하여 가장 매력을 느끼는 것은 그의 감정과 우리의 감정이 일치하며, 그리고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그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의 가치를 중시하고 우리 자신을 존중해 준다는 점이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평가하는 것과 똑같이 우리를 평가해 주고,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는 것과 똑같은 주의력으로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구별해 주는 사람을 발견하면, 우리는 매우 기뻐진다. 우리의 은인의 마음속에 이와 같은 호의적이고 유쾌한 감정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그에게 갚으려는, 즉 보은이 노리는 주요 목적 중의 하나이다.


분개의 감정이 달성하고자 하는 주요 목적 181∼182

분개의 감정이 달성하고자 하는 주요 목적은 우리의 적으로 하여금 고통을 느끼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 하여금 자신이 자신의 과거의 행동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고, 또한 그로 하여금 과거의 행동을 후회하도록 만들고, 그로 하여금 그가 해악을 가한 그 사람이 그와 같은 식으로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만드는 데 있다. 우리를 해치거나 모욕을 준 사람에 대하여 우리로 하여금 분개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우리를 무시하는 태도, 우리보다 자기기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불합리한 태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언제라도 그의 편의에 따라 또는 기분에 따라 희생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그의 터무니없는 자애(自愛: self-love) 등이다. 그의 행동에 나타난 두드러진 도덕적 부적정성, 그의 행동에 담겨 있는 큰 오만과 불의는 종종 우리에게 우리가 당한 해악 그 자체보다도 더욱 큰 충격을 주고, 우리를 격분하게 만든다. 다른 사람들이 응당 받아야 할 몫에 대한 보다 올바른 감각을 그에게 심어주는 것, 그가 우리에게 지고 있는 빚이나 그가 우리에게 행한 잘못을 그가 깨닫도록 해 주는 것 등이 우리가 보복하려는 주요 목적이다. 만약 이 목적이 달성되지 못한다면 보복은 항상 불완전하다.


조심성 없는 행동 197

우리는, 한 사람의 조심성 없는 행동에 의해 다른 사람이 고통을 당해서는 안 되며, 비난받을 만한 부주의로 인해 발생한 손해는 부주의한 행위를 한 사람에 의해 배상되어야 한다는 것보다 더 공정한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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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죽음에 대한 두려움 12

죽은 사람이 처해 있는 환경은 어둡고 한없이 음울하다고 우리는 늘 자연스럽게 환상하는데, 그러한 생각은 그들의 신상에 일어난 변화와 그 변화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결부시키고, 그들이 놓여 있는 처지에 우리 자신을 놓음으로써 생겨난다. 그것은 또한, 만약 이러한 표현이 허용된다면, 우리의 살아있는 영혼을 그들의 죽어있는 시신에 불어넣고 나서는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느끼게 될지를 생각하는 것에서 생긴다. 우리 자신의 사망에 관한 예상이 그렇게 두렵고, 사실 죽은 후의 상황은 우리들에게 아무런 고통도 줄 수 없을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죽은 후의 상황에 대한 생각이 살아있는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상상을 통한 환상(幻想) 때문이다. 인성의 가장 중요한 원리들 중 하나가 이로부터 기인하는데, 그것은 곧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행복에 대해서는 맹독과 같지만 인류의 부정행위를 크게 억제시키는 작용을 한다. 다시 말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한편으로는 개인을 괴롭히고 억누르는 역할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를 보위하고 보호해주는 역할을 한다.



유쾌한 감정 vs 불쾌한 감정 16

우리가 친구들에게 더욱 전달하고 싶어 하는 감정은 우리 자신의 유쾌한 감정보다도 불쾌한 격정이라는 것이며, 우리가 친구들의 동감으로부터 더 큰 만족을 얻는 것은 우리의 유쾌한 감정에 대한 친구들의 동감이 아니라 우리의 불쾌한 감정에 대한 친구들의 동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불쾌한 감정에 대하여 친구들의 동감을 얻지 못했을 때 더욱 큰 충격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가장 잔인한 모욕
16

불행한 사람들에 대하여 줄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모욕은 그들의 재난을 경시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친구의 기쁨에 무관심한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단지 무레한 행동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친구가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이야기할 때 진지한 태도로 경청하지 않는 것은 정말로 엄청나게 비인간적인 행동이다.


우리는 결코 참을 수 없다
17

사랑은 일종의 유쾌한 격정이고, 분개는 일종의 불쾌한 격정이다. 따라서 우리의 친구들이 우리의 우정을 받아들여 주기를 바라는 우리의 마음은 그들이 우리의 분개에 동감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의 절반 정도도 안 된다. 우리가 그들로부터 받을 수도 있는 호의에 대하여 그들이 무관심한 듯한 태도를 보이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너그럽게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에게 가해질지도 모르는 침해 행위에 대하여 그들이 무관심한 듯한 태도를 보인다면, 우리는 결코 참을 수 없다. 그들이 우리의 분개에 동감하지 않는 데 대해 우리가 느끼는 분노의 정도는 그들이 우리의 감사하는 마음에 공감하지 않는 데 대해 느끼는 분노의 정도보다 배가 넘는다.


다른 사람의 유사한 관능을 판단할 때의 척도
24

한 사람의 각종 감각기관의 기능, 즉 관능(官能:faculty)은 그가 다른 사람의 유사한 관능을 판단할 때의 척도가 된다. 나는 나의 시각으로써 당신의 시각을 판단하고, 나의 청각으로써 당신의 청각을 판단하며, 나의 이성으로써 당신의 이성을 판단하고, 나의 분개로써 당신의 분개를 판단하며, 나의 애정으로써 당신의 애정을 판단한다. 그것들을 판단할 이외의 다른 어떤 방법도 나에게는 없으며, 또 가질 수도 없다.
 

경이와 경악, 감탄과 갈채
26

그러나 우리 동료의 감정이 우리 자신의 감정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감정을 지도하고 지시할 때에는, 그리고 감정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동료는 우리가 모르고 지나쳤던 많은 것들에도 주의를 기울였으며 그리고 서로 다른 정황에 근거하여 서로 다른 대상들에 대해서도 자신의 감정을 조정했을 때에는, 우리는 그의 감정을 시인할 뿐만 아니라 그의 감정이 특이하고 예상치 못했을 정도로 예리하고 종합적인 데 경이(驚異)와 경악(驚愕)을 느끼게 된다. 이런 경우 그는 고도의 감탄과 갈채를 받을 자격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이와 경악에 의해 강화된 시인(是認)은 감탄(感歎)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한 감정을 구성하는데, 갈채(喝采)는 이것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나를 화나게 만드는 분개를 조금도 함께 나누어 가지지 않는다면
29

사고(思考)나 추측(推測)의 문제에 관한 판단이나 취향의 문제에 관한 감정에서 당신과 내가 완전히 상반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쉽게 무시할 수 있다. 그리고 비록 내가 어느 정도 불만이 있더라도, 나는 여전히 당신과의 대화에서, 심지어는 나와 당신의 견해가 상반되는 바로 그 주제에 관한 당신과의 대화에서도, 어떤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내가 당한 재난에 대하여 어떠한 동류의식도 가지지 않거나 또는 나를 괴롭히고 있는 슬픔을 조금도 함께 나누어 가지지 않는다면, 또는 당신이 내가 당한 침해에 대해 전혀 의분을 느끼지 않는다면, 나를 화나게 만드는 분개를 조금도 함께 나누어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것들을 주제로 더 이상 대화를 계속할 수 없다. 우리는 피차 서로를 용납할 수 없게 된다.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친구가 될 수 없고, 당신 역시 더 이상 나의 친구가 될 수 없다. 당신읜 나의 분노와 격정에 당황하게 될 것이고, 나는 당신의 얼음처럼 차가운 무감각과 감정의 결핍에 분노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천성을 완미(完美)하게 만드는 길
36-37

이처럼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많이 느끼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적게 느끼는 것,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을 위하는 사심은 억제하고 남을 위하는 자애심(慈愛心)은 방임하는 것이 곧 인간의 천성을 완미(完美)하게 만드는 길이다. 그리고 이렇게 할 때 비로소 감정(sentiments)과 격정(passions)의 조화를 이루어냄으로써 인류의 모든 행위를 고상하고 적절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기독교의 위대한 율법인 것처럼, 다만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처럼, 또는 같은 뜻이지만, 우리 이웃이 우리를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은 자연계의 위대한 계율이다.


미덕이란 탁월함이며, 상스럽거나 평범한 것을 훨씬 뛰어넘는 비상하게 위대한 어떤 것
37

보통 수준의 지력(知力)에서는 어떤 재능도 있을 수 없듯이, 보통 수준의 도덕에서는 어떤 미덕도 있을 수 없다. 미덕이란 탁월함이며, 상스럽거나 평범한 것을 훨씬 뛰어넘는 비상하게 위대하고 아름다운 어떤 것이다. 상냥하고 친근함의 미덕은 정교하고 기대밖의 섬세함과 따뜻함으로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의 감수성으로 이루어진다.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미덕은 인간의 본성에서 가장 제어하기 어려운 격정에 대해서까지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의 자기제어 능력으로 이루어진다.


특수한 혐오감의 진정한 원인
45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들의 육체적 욕망이 강렬하게 표현되는 것을 볼 때 속으로 느끼게 되는 특수한 혐오감의 진정한 원인은 우리가 그것을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욕망을 느꼈던 사람에게도 그 욕망이 채워지자마자 그것을 불러일으켰던 대상은 더 이상 유쾌한 것이 될 수 없고, 심지어 그 대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흔히 불쾌해질 수 있다. 그는 그 대상에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기 정신까지 흘렸던 매력을 이모저모 찾아보지만, 헛일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방금 전의 자기 자신의 격정에 대해서도 거의 공감할 수 없게 된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우리는 식기(食器)를 치우라고 명한다. 그리고 우리는 전에는 가장 강렬하고 격정적이었던 욕망의 대상들을, 만약 이들이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육체에서 기원하는 격정의 대상들이라면, 이와 똑같은 태도로 취급할 것이다.


되풀이되는 엄중한 도발의 결과 때문이라는 것 65∼66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때 비로소 분개심을 표출하는 우리의 행위가 방관자에게 완전히 유쾌하게 느껴지고 그리고 방관자로 하여금 우리의 분개에 완전히 동감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분개를 격발시킨 원인이, 만약 우리가 그것에 대해 어느 정도라도 분개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이 비열한 인간으로 되어버리고 그리고 두고두고 모욕을 받게 될 그런 것이어야 한다. 사소한 침해에 대해서는 무시해 버리는 편이 오히려 낫다. 사소한 시빗거리가 있을 때마다 흥분하는 심술궂고 남의 말꼬리 잡고 시비하기 좋아하는 성격만큼 비열한 것도 없다. 우리가 분개하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 불쾌한 격정으로 화가 나서가 아니라, 분개하는 것이 적절하고 또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분개하기를 기대하고 또 요구하고 있다는 자각 때문이어야 한다.

인류가 느낄 수 있는 격정들 중에서 이 분개의 격정만큼 우리로 하여금 그것의 정당성에 대하여 재삼 의문을 가져보게 하고, 우리가 그것을 표출하기 전에 조심스럽게 우리의 본래의 적정성 감각에 비추어 보게 하고, 또한 냉정하고 공정한 방관자가 우리가 표출하는 분개를 보고 어떤 감정을 가지게 될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도록 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관대함이나 우리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존엄을 유지하고자 하는 관심만이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는 이 격정의 표현들을 고상한 것이 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동기이다. 이 동기가 우리의 전체 품격과 태도를 특징짓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태도는 반드시 소박·소탈하고, 감추는 것이 없고, 솔직해야만 한다. 과단성이 있되 독단적이 아니어야 하고, 고결하되 오만(傲慢)하지 않아야 하며, 무례하고 상스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상해를 가한 자에 대해서조차 너그럽고 솔직하면서도 모든 적절한 배려를 다해 주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분노의 격정 때문에 인간의 선한 본성이 훼손되지 않았음을, 그리고 만약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복수를 하게 된다면 그것은 마지못해서, 필요에 의해서, 그리고 되풀이되는 엄중한 도발의 결과 때문이라는 것이 우리가 그것을 표현하려고 일부러 노력하지 않고서도 우리의 전체 행동에서 저절로 드러나야 한다.

분노가 이런 방식으로 억제되고 진정된다면 그것은 심지어 관대하고 고상하기까지 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벼락부자_비애와 환희 사이의 차이점
71-73

비애와 환희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곧 우리는 통상 작은 환희와 큰 비애에 대해서 쉽게 동감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운명의 급격한 변화로 그의 생활 여건이 그의 이전 생활수준보다 훨씬 높게 상승한 사람은 그의 가장 친한 친구들의 축하가 전부 완전히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벼락부자는, 비록 최대의 공로를 통해서 그렇게 되었다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며, 그리고 질투의 감정은 통상 우리들이 그의 환희에 충심으로 동감하는 것을 방해한다. 만약 그가 약간의 판단력만 가지고 있다면 그는 이 사실을 깨달을 것이고, 그리고 자신의 행운에 의기양양해 하는 모습을 보이는 대신 가능한 한 최대로 자신의 기쁨을 억누르고 새로운 환경으로 인해 자연스레 들떠 있는 기분을 가라앉히기ㅣ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는 일부러 자신이 이전의 처지에 있을 때 자신에게 어울렸던 것과 같은 검소한 옷을 입고 행동도 겸손하게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옛 친구들에 대한 배려를 배가하고, 소박하고 부지런하고 공손하게 처신하려고 그 전 어느 때보다 더욱 노력할 것이다.

그의 현재 처지에서 우리가 가장 시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의 이러한 태도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의 행복에 대하여 동감하는 것보다 그가 자신의 행복에 대핸 우리의 질투와 반감에 대하여 더욱 동감할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이런 모든 방면에서 성공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비록 그가 매사에 겸손하게 행동하더라도 우리는 그의 겸손한 행동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되며, 그 결과 그는 이런 종류의 제약에 점차 지쳐가게 된다. 따라서 얼마 못 가서 그는 통상 그의 옛 친구들 모두로부터 떠나간다. 다만 그들 중에서 가장 비열한 일부 친구들은 약간의 예외가 되는데, 그들은 아마도 창피를 무릅쓰고 그에게 의지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 또한 항상 새로운 친구들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옛 친구들이 그의 지위가 자신들보다 월등하게 변한 것에 자존심이 상하게 되는 것처럼, 그가 새로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그가 자신들과 대등한 입장이 되어 맞먹으려는 것을 보고 자존심이 상하게 된다. 이럴 때 그에게 요구되는 것은, 옛 친구들과 새 친구들 양쪽에서 지위상의 변화로 느끼게 되는 굴욕감을 보상해주기 위해 가장 완강하고 끈질기게 겸손한 자세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보통 너무 빨리 지쳐버리고, 그가 새로 사귀려는 친구들의 시무룩하고 의심 많은 자존심과 옛 친구들의 건방진 경멸에 화가 나서, 전자는 무시하는 태도로, 후자는 노여운 마음으로 대한다. 그리고 결국은 오만에 빠져서 결국 모든 사람들의 존중을 상실하게 된다. 내가 믿고 있는 것처럼, 만약에 인간의 행복의 주요 부분이 사랑을 받고 있다는 의식으로부터 온다면, 운명의 위와 같은 급격한 변화는 행복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한 걸음 한 걸음씩 위로 올라가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그가 자기의 높은 지위에 오르기 전에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승진해 가는 매 단계들을 예견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실제로 높은 지위에 올랐을 때에도 지나치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고, 그에게 추월당한 사람들로서도 정당하게 어떤 시샘을 품을 수 없으며, 그의 뒤에 처져 있는 사람들도 어떤 질투심을 느낄 수 없다.


모든 소소한 사건들에 대하여
73

 

인간은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이유에서 생기는 비교적 작은 기쁜 일들에는 더욱 쉽게 동감한다. 크게 번영하고 있는 중에도 겸손할 수 있다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일상생활의 모든 소소한 일들에 대해, 지난밤을 함께 보낸 친구들에 대해, 우리가 함께 즐겼던 여흥(餘興)에 대해, 우리가 보고 들은 것에 대해, 현재 대화의 대상이 되고 있는 모든 소소한 사건들에 대해, 인간의 삶의 빈틈을 채워주는 소소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아무리 큰 만족을 표현하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성격적으로 쾌활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이러한 성격은 일상적인 소소한 사건들이 제공하는 모든 작은 즐거움으로부터 특별한 흥미를 느낄 줄 아는 것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이러한 성격에 쉽게 동감하며, 그리고 이러한 성격은 우리로 하여금 동일한 기쁨을 느끼게 하며,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행복한 성격을 타고난 사람들이 보는 것과 동일한 모든 사소한 일들의 유쾌한 측면을 보게 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청춘(靑春), 즉 모든 것에 즐거움을 느끼던 시절이 그처럼 쉽게 우리의 마음에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사소한 것을 보고도 즐거워하는 이러한 성향은 심지어 꽃까지 피어나게 하고, 젊고 아름다운 눈들을 반짝거리도록 만든다. 이러한 성향은 같은 동성(同性)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나이든 사람까지, 평상시 이상으로 기쁨을 느끼도록 만든다. 그들은 잠시 동안 자신의 노쇠함을 잊어버리고 그들에겐 오래 전에 이미 낯 설어버린 유쾌한 생각과 정서에 자신들을 내맡긴다. 이처럼 많은 행복감을 느낌으로써 유쾌한 생각과 정서가 그들의 마음속에 다시 떠오르게 되면, 그들은 마치 오랫동안 서로 그리워하면서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다시 만나서는 그 동안의 오랜 이별 때문에 더욱 진심으로 껴안을 수 있는 친구처럼, 이러한 생각과 정서는 그들의 가슴속에 자리를 잡게 된다.

 

 


타인의 비애에 대한 우리의 동감
82

비록 건강하고 빚도 없고 또한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없는 상태에 더 추가되어야 할 것은 별로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부터 빼앗을 수 있는 것은 많다. 이런 상태와 인간의 최고의 순경(順境) 사이의 간격은 대단치 않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러나 이런 상태와 비참함의 최저 밑바닥 상태 사이의 거리는 무한하고 엄청나다. 이 때문에 순경이 사람의 마음을 자연적인 상태 이상으로 고양시키는 정도보다도 역경이 사람의 마음을 자연적인 상태 이하로 저상(沮喪)시키는 정도가 훨씬 더 크다. 따라서 방관자는 환희에 완전히 공감하는 것보다 비애에 완전히 동감하고 완벽하게 보조를 맞추는 편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그리고 당사자의 마음 상태는 환희의 경우보다는 비애의 경우에 방관자 자신의 자연스럽고 통상적으로 느끼는 마음의 상태로부터 훨씬 멀어져 있음을 틀림없이 알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비애에 대한 우리의 동감은 환희에 대한 우리들의 동감보다 흔히 훨씬 자극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감은 항상 당사자가 자연스럽게 느끼는 것의 격렬함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다.


재부는 과시하고 빈궁은 숨기려는 경향
91

사람들은 우리의 비애(悲哀)보다는 환희에 대해 더 많이 동감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재부(財富)는 과시하고 빈궁(貧窮)은 숨기려는 경향이 있다. 많은 사람들의 눈에 우리가 겪는 빈곤과 고통이 폭로되는 것만큼 치욕적인 것은 없으며, 그리고 우리의 처지가 모든 인간들의 눈에 다 드러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누구도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의 반만큼도 생각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는 것보다 더 굴욕적인 일은 없다. 우리가 재부를 추구하고 빈궁을 피하려고 애쓰는 것은 인간의 감정에 대한 이러한 고려 때문이다. 


경쟁심의 기원 91∼92

이 세상 사람들이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 야단법석을 떠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탐욕과 야심, 부와 권력 및 최고를 추구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

인류 사회의 각계각층의 사람들 모두에게서 나타나는 경쟁심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인가? 그리고 소위 자신의 지위의 개선이라고 하는 인생의 거대한 목적을 추구하는 것은 어떤 이익이 있어서인가? 남들로부터 관찰되고 주의와 주목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그들로부터 동감과 호의와 시인(是認)을 받는다는 것이 바로 그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이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안락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허영이다. 그러나 허영이란 항상 자신이 주위로부터 주목을 받고 시인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신념에 기초한다. 부유한 사람이 그의 부유함을 자랑하는 것은 그 부유함이 자연히 세간의 이목을 끈다는 것, 그리고 부유함이 그에게 제공한 모든 유쾌한 감정에 인간들이 쉽게 공감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면 그는 가슴이 벅차오르고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그는 부유함이 가져다주는 다른 어떤 이익보다도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나의 생각)
데일 카네기가 말한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는 갈망'이 떠오른다.


가난한 사람들이 굴욕을 느끼는 이유
92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난하다는 것에 치욕을 느낀다. 그는 가난 때문에 사람들의 시야 밖에 놓여 있다고 느끼고, 그리고 비록 자신이 주목을 받더라도 사람들이 그가 당하고 있는 비참함과 고통에 대한 동류의식(同類意識)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굴욕을 느낀다. 비록 무시당하는 것과 부인당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무명의 처지에 있기 때문에 명예와 칭찬의 밝은 빛이 가려져서 이웃으로부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인간 본성 중에서 가장 유쾌한 희망을 좌절시키고 가장 치열한 욕망을 버리는 것이 된다. 가난한 사람들은 들어오건 나가건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못한다. 그리고 군중의 한가운데 있을 때에도 오두막집에 갇혀 있을 때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지위가 높고 신분이 고귀한 사람이 잃어버리는 것
 93-94

지위가 높고 신분이 고귀한 사람은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모든 사람들은 그를 보고자 갈망하고, 그가 처한 상황으로 인해 그가 자연히 느끼게 되는 환희와 기쁨을 느껴보기를, 최소한 동감이라도 해보기를, 갈망한다. 그의 모든 행위는 대중들의 주목의 대상이 된다. 그의 말 한 마디, 몸짓 한 가지조차 다른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무시되는 일은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그에게 집중된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줄지도 모르는 감동과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격정과 기대감을 가지고 그를 고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만일 그의 행동이 아주 부적절하지만 않다면, 그는 언제나 사람들의 관심을 끌 기회, 자신의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관찰과 동류의식의 대상이 될 기회를 가지고 있다. 이로 인해 그가 어느 정도의 제약을 받게 됨으로써 자유를 상실하게 되는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점이 그를 선마으이 대상으로 만들고,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겪어야 할 고생, 근심과 굴욕을 보상해 준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것을 획득하기 위해서 그는 반드시 모든 여유, 모든 안일과, 모든 근심걱정 없는 안전함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성과 철학의 원리 vs 조물주의 뜻
96

국왕은 백성들의 공복(公僕)이고 공공의 이익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복종하고, 저항도 받고, 바뀌고, 처벌될 수 있다는 것은 이성과 철학의 원리이다. 그러나 그것은 조물주의 뜻(doctrine of Nature)은 아니다. 조물주는 우리에게 그들을 위해 그에게 복종하도록, 그의 높은 지위 앞에 벌벌 떨면서 머리를 조아리도록, 그의 한 번의 미소를 자신의 어떤 수고도 보상해 주기를 충분한 보답으로 간주하도록, 그리고 그의 불쾌감을, 설령 다른 어떤 불행이 뒤따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모든 낙담 중에서 가장 괴로운 것으로 간주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대단한 기백(氣魄
) 97

모든 면에서 국왕을 한 사람의 보통 인간으로 간주한다거나 또는 보통의 경우 그와 더불어 논리를 따져가면서 논쟁을 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기백(氣魄)이 필요하다. 국왕과 개인적으로 아주 친밀하고 막역한 사이가 아닌 한, 국왕 앞에서 감히 그렇게 할 기백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가장 강렬한 동기(動機)들, 가장 격렬한 격정(激情)들, 즉 공포, 증오, 분개도 국왕에 대한 그들의 자연스런 존경의 경향을 상쇄시키기에는 부족하다. 국왕의 행위가 정당하건 또는 부당하건 간에, 그의 행위가 인민들의 마음속의 이러한 격정들을 최고도로 격발(激發)시켰을 때에만 비로소 대다수 인민들은 폭력을 써가면서 그에게 반대하거나 또는 그가 처벌되거나 폐위되는 것을 보고 싶어할 것이다.


만약 그가 자신을 두드러지게 나태내려고 한다면
100-101

가장 완미한 겸손(謙遜)과 소박(素朴), 동석자에 대한 적절한 존경과 이와 어울릴 정도의 무관심의 결합은 평범한 인간의 행동에 있어서 가장 주요한 특징이어야 한다. 만약 그가 자신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려고 한다면, 그는 보다 중요한 미덕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큰 인물들의 추종자에 상응하는 만큼의 추종자들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가 그들에 대해 지불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자신의 육체노동과 지적 활동뿐이다. 따라서 그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함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자신의 전문분야에서의 탁월한 지식과 이것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의 최대의 근면성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육체적 노동을 참고 견디며, 위험에 결연하게 대처하고, 고통에 대해 굳건해야 한다. 그의 이러한 재능이 그의 업무의 어려움과 중요함에 의해, 또한 그러한 일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뛰어난 판단력과 엄격하고 단호한 노력을 통해,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야 한다. 성실함과 신중함, 관대함과 솔직함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의 행동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 이와 동시에 그는 적정하게 행동하기 위해서 최대의 재능과 미덕을 필요로 하는 일에, 그러나 그 일을 영광스럽게 수행할 수 있는 사람에게 최대의 찬탄이 주어지는 그런 일에, 스스로 자진해서 종사해야 한다.


고귀한 지위로부터의 몰락을 몹시 견디기 어렵게 만드는 것
102-103


고귀한 지위로부터의 몰락을 몹시 견디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사람들의 감정에 대한 이처럼 손쉬운 절대적 지배권을 상실해 버렸다는 것이다. 전쟁에서 패한 마케도니아 국왕 일가가 정복자 파울루스 아에밀리우스(Paulus Aemilius)에 이끌려 개선행렬에서 걸어갈 때, 역사가들의 말에 따르면, 그들의 불행해진 모습을 본 로마 민중의 관심은 양분되어 일부는 그 정복자에게서 멀어졌다고 한다. 나이가 어려서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왕실 자제들의 모습이 구경꾼들에게는 충격적이었고, 승리를 축하하는 환호의 함성 한가운데서도 그들은 극히 예민한 비애와 동정심을 가지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국왕은 행렬의 두 번째 줄에서 걸어가고 있었는데, 너무나 큰 재난으로 그는 경황실조(驚惶失措)하여 모든 감정을 상실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친지들과 대신들은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지나가면서 몰락한 자신들의 국왕에게 자주 시선을 던지고는 그의 모습에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그들의 모든 행동은 자기 자신들의 불행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국왕의 더 큰 불행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기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고결한 로마인들은 이와 반대로 그를 경멸과 분개의 시선으로 바라 보았으며, 그와 같은 불행을 감내하면서 구차한 삶을 이어가겠다고 마음먹을 정도로 비루한 인간은 어떤 동정도 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재난은 결국 어떤 것인가? 대다수의 역사가들에 따르면, 그는 여생을 강력하고 인정 많은 사람들의 보호 아래서, 그 자체가 시기의 대상이 될 만한 상태에서, 즉 풍요하고 안락하고 여유롭고 안전한 상태에서 보내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가 아무리 어리석은 짓을 하더라도, 그가 거기서 다시 더 추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자신의 모든 행동에 주목하고 감탄하는 바보같은 군중들, 아첨배들, 추종자들에 둘러싸일 수는 없었다. 그는 더 이상 대중들의 주목을 받지도 않았고, 더 이상 그들의 존경과 감사와 사랑 그리고 감탄의 대상이 될 수도 없었다. 모든 국민의 격정은 이미 그의 뜻대로 형성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이 그 국왕으로부터 모든 감정을 빼앗은, 견디기 어려운 재난이었고, 이 재난이야말로 국왕의 친구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비운을 잊어버리게 하였으며, 그리고 로마인들의 고결함은 이런 처지까지 참고 살아갈 정도로 비루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느냐라고 생각하게 했던 것이다.


되돌아올 수 있었던 사람이 거의 없는 그곳 104-105

"사랑에는 보통 야심(ambition)이 뒤따르지만, 그러나 야심에 사랑이 뒤따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라고 나의 로슈포코 경(Lord Rochfaucault)은 말했다. 야심과 같은 격정에 일단 마음이 완전히 사로잡혀 버리면 경쟁자도 후계자도 용납을 하지 않는다. 대중의 감탄을 한 몸에 받는 데 익숙해 있거나 혹은 그런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다른 모든 쾌락은 혐오스럽거나 시들해진다. 실각한 모든 정치가들이 스스로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야심을 극복하고, 이제는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명예심을 멸시할 것을 배우지만, 그러나 실제로 이에 성공한 사람은 얼마나 극소수에 불과하였던가? 그들 대부분은 맥 빠지고, 무미건조한, 나태한 상태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들의 존재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처지에 놓여 있음을 생각하고 분노하고, 개인적인 생활의 거의 모든 것에 흥미를 가질 수도 없고, 자신들의 과거의 좋았던 시절을 이야기할 때 외에는 어떤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고,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어떤 허망한 계획을 꾸미고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어떤 만족감도 느끼지 못한다.
 
당신은 당신의 자유를 궁정의 화려한 노예생활과 바꾸지 않고 오로지 자유롭게, 두려움 없이, 독립적으로 살아가려는 진지한 결의에 차 있는가? 이 유덕(有德)한 결의를 견지해 나갈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있는 것 같다. 아니, 오로지 이 방법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곧 되돌아올 수 있었던 사람이 거의 없는 그곳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야심의 영역 속에는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미 당신보다 앞서 전 인류의 반의 관심을 차지해 버린 이 세상의 지배자들과 자신을 비교해서도 절대 안 된다.


인간생활의 노동의 반이 추구하는 목표 105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보편적인 동감과 주목을 가장 잘 맡을 수 있는 지위에 있는 것이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라고 상상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자리 또는 지위(地位: place)는, 고관 부인들의 사이를 갈라놓는 위대한 목표로서, 인간생활의 노동의 반은 이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서이며, 그리고 이것은 탐욕과 야심이 이 세상에 끌어들인 모든 소란과 소동, 모든 강탈과 부정의 원인이 되고 있다.


거대한 위험 vs 크지도 작지도 않은 위험
108

"거대한 위험에는 그 자신의 매력이 있다. 우리가 실패하는 경우에도 얻게 될 어떤 영예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지도 작지도 않은 위험에는 두려움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에 실패했을 때에는 항상 명예의 상실이 따르기 때문이다"라고 레츠 추기경(Cardinal de Retz)은 말했다.


모든 시대의 도덕철학자들이 품어 온 불만
109

부자와 권세가에 대해서는 감탄하고 또 거의 숭배하기까지 하는 성향(性向), 그리고 가난하고 비천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경멸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무시하는 성향은 계급차별과 사회질서의 확립 및 유지에 필수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모든 도덕감정을 타락시키는 가장 크고 가장 보편적인 원인이다. 지혜와 미덕에만 바쳐져야 할 존경과 감탄으로 부와 권세를 대하는 것, 그리고 부도덕한 행위와 우둔함만이 그 대상이 되어야 할 멸시(蔑視)가 극히 부당하게도 흔히 빈궁과 연약함에 가해지고 있다는 사실에 모든 시대의 도덕철학자들은 불만을 품어 왔다.

한 쪽으로 통하는 길과 다른 쪽으로 통하는 길 115

부러움의 대상인 이런 상태에 도달하기 위하여 재부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흔히 도덕적인 인간이 되는 길을 포기한다. 왜냐하면, 불행하게도 한 쪽으로 통하는 길과 다른 쪽으로 통하는 길은 때로는 전혀 반대의 방향으로 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심으로 가득 찬 인간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기만한다. 즉, 자신이 목표하는 높은 지위에 도달하기만 하면 사람들의 존경과 감탄을 획득할 대단히 많은 수단들을 갖게 될 것이고, 또한 자신은 대단히 뛰어난 도덕적 적정성과 품위를 가지고 행동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그의 장래의 행위들이 발산하는 광채가 그가 그 지위로 올라가기까지의 모든 단계에서 저지르게 될 부정한 행위의 자취를 완전히 숨기거나 지워줄 것이라고.


지위를 얻는 과정에 사용된 수단의 비열함에 의해서 더렵혀지는 것 116

야심에 찬 사람이 진실로 추구하는 것은 안락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비록 매우 잘못 이해되고 있지만, 항상 이런 저런 종류의 영예인 것이다. 그러나 그가 얻은 높은 지위와 영예는, 자신의 눈으로 보건 타인의 눈으로 보건 간에, 그가 그 지위를 얻는 과정에 사용된 수단의 비열함에 의해서 더렵혀지는 것으로 보인다. 마음대로 지출하는 낭비에 의해서, 타락한 인간들의 파멸적 성격이 통상 그렇듯이 각종 방탕한 쾌락에의 극도의 몰입에 의해서, 그리고 바쁜 공적 업무에 의해서, 또는 보다 자랑스럽고 보다 소란스러운 전쟁에 의해서, 그는 자신의 기억과 타인들이 기억으로부터 자신이 과거에 행하였던 추행(醜行)들의 기억을 지워 버리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그 기억들은 끝까지 그를 쫓아다닌다. 그는 건망증과 망각이라는 어둡고 우울한 힘에 호소해 보지만 실패한다. 그는 스스로 행하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으며, 그의 기억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가 행했던 바를 기억하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그에게 일깨워 준다.


수치심과 양심의 가책이란 보복의 화염
116

가장 그럴 듯한 상류사회의 모든 화려한 허식 속에서도, 돈에 매수된 고위 인사들과 저명한 학자들의 비열한 아첨 속에서도, 일반 민중들의 어리석지만 천진난만한 환호 속에서도, 그리고 모든 정복과 전쟁에서의 승리로 교만해진 가운데서도, 내심에서 은밀하게 솟아나는 수치심과 양심의 가책이란 보복의 화염은 그를 휩싸서 놓아주지 않는다. 그리고 영예가 사방팔방으로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때에도 그 자신은 자신의 상상 속에서 어둡고 추악한 불명예가 그를 바짝 뒤쫓고 있으며 언제라도 그를 덮치려고 하는 것처럼 느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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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13-01-29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이렇게 귀한 수고를 나누어 주시니.. 대단하십니다 ^^

oren 2013-01-29 14:02   좋아요 0 | URL
저야 그저 책을 읽은 독자의 한 명일 뿐이고 이 책 내용에 감명받아 '요약분'만 필사해 봤을 뿐인걸요. 좀 묵혀둔 건데 이번에 우연찮게 공개하게 되는군요. 어쨌든 몇 번씩 다시 읽어봐도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이 책을 평생 동안 '다듬고 또 다듬은' 글쓴이 애덤 스미스야말로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찰스 다윈조차도 이 책 속에 숨어있는 '진화 심리학'을 꿰뚫어 보고 그 내용들을 『종의 기원』과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등에 담아낼 정도였으니까요. ㅎㅎ
 


(밑줄긋기)

우리의 고유한 삶의 가장 내부에 있다고 느껴지는 지점을 찾아보자.

그러면 우리 안에서 외부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지성성의 침투가 가장 적은 부분에 집중해 보자.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 우리의 고유한 삶의 가장 내부에 있다고 느껴지는 지점을 찾아보자. 그 때 우리가 다시 잠기게 되는 곳은 순수 지속 안이다. 거기서는 과거가 언제나 전진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현재로 끊임없이 살찌워진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우리 의지의 용수철이 그 극한까지 당겨지는 것을 느낀다. 우리의 인격을 자신에 대해 격렬히 수축시킴으로써 우리는 빠져나가는 과거를 모아 담고, 그것을 밀집되고 불가분인 채로, 그것이 들어옴으로써 창조될 현재 속으로 밀어 넣어야만 한다. 우리가 이 지점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균형을 잡는 순간들은 매우 드물다. 그 순간들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행위와 일체를 이룬다. 그리고 그 때조차도 우리는 결코 완전히 우리 자신일 수가 없다. 우리의 지속의 감정, 즉 우리 자아가 자아 자신과 일치하는가의 여부는 정도차를 받아 들인다. 그러나 그 감정이 깊고 그 일치가 완벽할수록 그것들에 의해 우리가 다시 위치하는 삶은 지성성을 넘어서면서 그것을 흡수한다. 왜냐하면 지성의 본질적 기능은 같은 것을 같은 것과 연결하는 것이고, 지성의 틀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은 반복되는 사실들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성은 밖에서 취한 외관들 그리고 가능한 기지(旣知
)
의 것과 유사한 관점들로 새로운 상태를 재구성함으로써 실재적 지속의 실재적 순간들에 단번에 힘을 행사하는 듯하다. 이런 의미에서 [의식] 상태는 지성성을 말하자면 <가능적으로> 포함한다.13) 그러나 그 상태는 불가분적이고 새롭기 때문에 지성성을 뛰어넘으며, 그것과는 공통분모로 측정할 수 없는incommensurable 것이다.(301∼303쪽)

13) (역주) 여기서 <가능적으로>라는 표현을 강조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빌려온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고관한 시론』에도 의식 상태를 이루는 질적 다양성이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에서 <가능적으로> 수를 포함한다고 지적한다.

이제 우리는 긴장을 풀고 가능한 한 과거의 가장 커다란 부분을 현재 속으로 밀어 넣는 노력을 중단해 보자. 긴장이 풀어져 완전히 이완되면 더 이상 기억도 없고 의지도 없을지 모른다. 그 말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절대적인 수동성으로 떨어지는 일도 결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완의] 극한에서 우리는 끝없이 새로 시작하는 현재로 이루어진 존재를 엿보게 된다-거기에는 무한히 죽고 다시 태어나는 순간성 이외에 실재적 지속은 더 이상 없다. 그것이 물질의 존재인가? 아마 완전히 그렇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물질은 분석해 보면 요소적 진동들로 용해되며, 이것들은 아무리 짧은 것이라 해도 아주 약하고 사라져 가는 지속에 속하는 것이지 무(無)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적 존재가 첫 번째 방향으로 향하듯이 물리적 존재는 이 두 번째 방향으로 향한다고 추정할 수 있다.(304쪽)

우리가 순수 지속 속에서 진행되는 과정을 의식하게 될수록 우리는 더욱더 우리 존재의 다양한 부분들이 서로의 안으로 들어가고 우리의 전 인격이, 끝없이 미래를 잠식하면서 그 속에 삽입되는 한 점에, 또는 차라리 한 뾰족한 날 위에 집중되어 있음을 느낀다. 자유로운 생명과 행동은 바로 거기에 존재한다. 반대로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두어 보자. 행동하는 대신에 꿈꾸어 보자. 우리의 자아는 단번에 흩어진다. 그 때까지 자신이 우리에게 전달해 준 불가분적인 충동 속에서 응축되어 있는 과거는 수천의 기억들로 분해되고 이 기억들은 서로에 대해 외적인 것으로 된다.그것들은 응고됨에 따라 그만큼 상호침투하기를 거부한다. 우리의 인격은 그렇게 해서 공간의 방향으로 다시 내려온다. 게다가 그것은 감각 속에서 끊임없이 공간과 나란히 진행한다.(3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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