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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을 온통 『폭풍의 언덕』과 함께 보냈다.

 

줄이고 또 줄여서 28분짜리 동영상으로 만드는 데도, 생각보다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대본 쓰고, 녹화(주로 녹음이지만) 하고, 알맞는 이미지 찾아 해당 장면에 넣고, 책 속 문장들을 타이핑 하는 과정까지는 나름대로 '영상 창작의 재미'가 느껴지는데, 맨 마지막 마무리 작업으로 자막을 집어 넣는 작업은 진짜 고역이다.

 

30분에 가까운 동영상을 만들다 보면, 내 입으로 쏟아낸 '말들'이 정말 이렇게나 많았나 싶어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다. 그 많은 말들을 알맞은 타이밍에 딱딱 맞게, 길이도 영상의 흐름에 적당하게 맞춰 가면서 제자리에 딱딱 집어넣는 일이 보통 고역이 아니다.

 

30분짜리 동영상을 하나 만들자면 자막을 타이밍에 맞게 짜넣는데도 최소 30분 ×5회 = 150분은 그냥 잡아 먹는 것 같다. 먼저 순차적으로 영상을 틀어 보고, 알맞는 자막 길이를 집어 넣고, 다시 그 화면의 시작부분으로 되돌아 가서 타이밍을 정확하게 맞추고, 끝나는 부분에 맞춰 자막을 자르고, 다시 그 다음 말이 튀어나오는 순간에 맞춰 다음 자막을 짜 넣고, 다시 제대로 정확하게 타이밍에 맞는지 또 확인하고, 최종적으로 다시 처음부터 쫘악 재점검하고.. 등등)

 

내 목소리를 갑자기(!) 이토록 자주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런 '과잉 친절'만 생략하더라도, 동영상 만들기는 얼마나 수월할 텐가. 그런데 요즘 가만히 보면 방송 프로그램조차 '자막'을 일일이 뿌려 주고 있다. 빤히 들리는 명확한 대사나 말인 경우에도 그렇다. 그것도 매번 자막 폰트까지 바꿔 주고, 크기와 색깔과 모양까지도 변화를 주고 있다. 그런데 초보 유튜버가 무슨 배짱으로 감히 '자막'을 생략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군다나 '발음'도 부정확한 주제에...

 

어쨌든 동영상 제작 작업은 '상상 이상으로' 품이 많이 들어가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래도 며칠 만에 뚝딱 30분짜리 동영상 하나 만들어 '업로드'하는 보람이 적지는 않다. 이렇게 올린 영상은 '이론적으로는' 전세계 20억 명에 가까운 유저들에게 완전히 공개되는 셈이니까. 그리고 내가 억지로 그 영상을 비공개로 돌리거나, 삭제하지 않는 한 그 영상은 오래도록 살아서 계속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즐겁게(?!) 할 테니까.


(제가 만든 유튜브 영상입니다. 링크 주소는 ☞ https://youtu.be/apGaXXvz-r0)

 

『폭풍의 언덕』에 대한 폭풍(!) 같은 작품 소개를 다 끝낸 뒤에 <에필로그> 삼아 차분하게 두 주인공의 가슴 아픈 사랑을 반추할 겸 『소란한 무덤(The Unguiet Grave)』이라는 애잔한 시를 하나 덧붙였는데, 이 가사에 붙은 음악인 <The Unguiet Grave>라는 음악을 이번에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이 음악은 무려 600년 전부터 전승되어 온 '유서 깊은' 노래라고 한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끝내 사별하고 난 뒤에 '무덤가'에서 나누는 대화가 가슴을 후비도록 애절하고 통절한데, 그 시에 딱 맞는 이 유명하고도 가슴 저린 노래를 '저작권'이 무서워 BGM(일명, 브금)으로 깔아드리지 못한 게 내내 아쉽기만 하다.

 

 * * *

 

내 사랑이여, 오늘 바람이 불고,

  몇 방울의 비도 내리는구려;

진정한 사랑 외에 내 가진 것이 무엇이겠소,

  차디찬 무덤 속에 그녀가 누워 있으니,

 

내 진정한 사랑을 위하여서는 무엇이든 하겠소.

  그 어떤 젊은 연인보다도;

그녀의 무덤 앞에 앉아 언제까지나 서러워하리오.

  열두 달 하루라도.

 

열두 달 하루가 끝나자

  죽은 자가 말하기 시작했다:

"오 내 무덤 앞에 흐느끼며

  그리하여 날 잠들지 못하게 하는 분은 누군가요?"

 

"내 사랑, 그대 무덤 앞에 앉은 자는 나요.

  그대 잠들지 못하게 하는 자는:

진흙처럼 차가운 그대의 입술로 한 번의 키스를 해 주길 갈망하오.

  그것이 내가 구하는 전부일 테니."

 

"그대 진흙처럼 차가운 내 입술로 한 번의 키스를 받고 싶어하는군요.

  하지만 내 숨결에는 진한 흙 냄새;

내 진흙처럼 차가운 한 번의 키스를 받는다면

  그대의 삶도 오래지 않아 끝나고 말 거예요."

 

"저 건너 아래 초록의 정원,

  사랑, 우리가 걷던 그곳에,

이전에 보았던 그 멋진 꽃도

  시들어 줄기만 남으리니."

 

"줄기가 시들어 마르듯, 내 사랑,

  그렇듯 우리의 심장도 썩어갈 거예요;

그러니 내 사랑, 이제는 단념하세요.

  신이 그대를 부를 때까지."

 

 - 「소란한 무덤」중에서.

     (『교양인의 책 읽기』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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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0-01-06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oren 님!
계속 유투브 작업하시는군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잘 보고 있습니다**

oren 2020-01-06 12:11   좋아요 2 | URL
어영부영 하는 사이에 벌써(!) 다섯 편을 만들었네요.
<월든>, <몽테뉴 수상록>, <설국>, <죄와 벌>, <폭풍의 언덕>...
폭풍처럼 시간은 휙휙 지나갔지만, 나름 보람도 있는 듯해요.^^

이제 ‘영상 편집 기술‘은 대충 익숙해지는 단계가 되었고, 알맞는 이미지를 찾는 작업도 그리 어려운 건 아니니, 영상의 분량을 어떻게든 줄여보도록 하는 게 최대 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리 컨텐츠가 좋아도 10분 내지는 15분이 넘어가면 그냥 패쓰(!) 하는 분위기라, 좀 더 많은 구독자를 모으고, 시청시간을 늘리자면 ‘보다 더 압축적으로, 보다 더 간략하게‘ 분량을 줄이는 노력을 해봐야지 싶어서요. 한가지 편법으로다가, 대본을 ‘매우 빨리 읽는 방법‘을 취하고는 있는데, 그게 은근히 지루함을 누그러뜨리는 효과를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암튼 여태껏 써왔던 리뷰들을 중심으로 동영상 제작은 계속 해 보고 싶습니다. 책 속에 담긴 수많은 ‘다양한 이미지‘들을 이리저리 연결시키고, 다양한 방식으로 책 속의 내용들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게 영상물의 가장 큰 매력인 것 같은데, 아직까지는 그런 특장점을 제대로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조금 안타까운 생각도 듭니다.(가령, <폭풍의 언덕>을 설명할 때, 그 영화의 일부분을 직접 배경화면으로 흐르게 하면서 작품을 설명하는 방식 등을 고민해 봐야지 싶습니다.^^)

다른 유튜버나 북튜버들에 비해 상당히 긴 동영상들이지만, <몽테뉴 수상록>이나 <월든>과 같은 동영상을 내리 두 번씩이나 연거푸 시청했다는 분들도 있는 걸 보면, 나름 성과는 있는 듯합니다.^^

페넬로페 님꼐서도 늘 성원해 주셔서 항상 고맙습니다.^^

빵굽는건축가 2020-01-06 2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비가 와서 음악이 더 잘 들려요 셀틱계통의 음악 인가봐요^^

oren 2020-01-06 20:52   좋아요 1 | URL
오늘처럼 을씨년스럽고 비가 흩뿌리는 날씨에는 더욱 어울리는(?) 음악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위키백과에는 이 곡에 대한 설명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더군요. 참조하시길 바랄께요.^^
* * *
˝The Unquiet Grave˝ is an English folk song in which a young man mourns his dead love too hard and prevents her from obtaining peace. It is thought to date from 1400[citation needed] and was collected in 1868 by Francis James Child, as Child Ballad number 78.[1] One of the more common tunes used for the ballad is the same as that used for the English ballad ˝Dives and Lazarus˝ and the Irish pub favorite ˝Star of the County Down˝.

CREBBP 2020-01-08 1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랬동안 블로그를 해왔지만 이거 묻혀 없어지고 사라질 글들이란 생각에 점점 소홀히 하다가도 오렌님의 작업에 자극을 받아 언젠가는 유튜브같은 다른 매체의 소스가 될 수도 있겠다는 비전을 보기도 해요. 사진 모으고 씽크 맞추고. 작업 소모 시간 엄청 소모되셨겠지만 아주 생산적인 취미 활동이고요.

제 의견은.. 길이고 뭐고 일반적인 유튜버의 시장 논리와 법칙은 무시하시고 그냥 오렌님 방식대로 밀고 나가시는 것도 차별화 전략상 장기적으로 그리고 충실한 구독자 확보 면에서는 이득이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얄팍하고 가벼운 동영상에 더 많은 구독자가 따르기도 하겠지만 진지하게 깊이있는 컨텐츠를 원하는 진중한 구독자도 있을 거거든요. 특히 고전들을 찾는 독자라면 말이에요. 그래도.. 구독자가 꾸준히 늘고 있더라구요. 응원합니다

oren 2020-01-08 12:37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서 읽은 책들에 대해 글을 남겼던 게 나중에 또다른 매체의 소스가 되리라는 생각은 저도 예전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곰곰 생각해 보니 ‘알라딘 서재‘마저 없었더라면 내가 그동안 책을 읽고 난 뒤에 그 책에 대한 글을 쓰고, 때로는 책 사진이나 여행 사진을 곁들여 페이퍼를 쓰고 했던 작업들이 과연 가능했겠느냐, 혹은 온전히 남아 있었겠느냐 싶은 생각도 들더군요. 그런 점에서는 알라딘 서재가 참으로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더라구요. 여러 알라디너 분들과 알고 지내게 된 것도 크나큰 보람이자 소득이었구요.

유튜브에 책 소개 동영상을 올리는 작업들은 아직까지는 워낙에 초창기여서, 이런저런 다양한 시도를 해 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게 가장 알맞는 컨텐츠가 어떤 것일까, 동영상의 길이는 이대로 좋은지, 절반 가까이로 줄이면서도 핵심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겠는지, 깊이만 추구하다가 외연 확장에 너무 소홀하는 것은 아닌지, 유튜브 동영상에 어울릴 만한 요소(가령 짧으면서도, 몹시 재미있고, 유익하고 등등)가 아직도 많이 부족한데, 그 부분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 등등 고민거리가 정말 한둘이 아니긴 합니다.

그래도 아직 얼마 안 되는 동영상들이나마 구독해 주시는 분들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어서 몹시 고무적이긴 합니다. 조회수가 낮은 동영상들도 시청시간 측면에서는 도리어 조회수가 많은 다른 영상들을 압도하는 걸 볼 때마다 뿌듯하기도 하고요.(<몽테뉴 수상록>과 <월든> 소개 동영상이 대표적입니다.^^)

마침 어젯밤에는 저도 드디어 유튜브로부터 ‘구독자 100명‘을 돌파했다는 축하 이메일을 받았는데, ‘구독자 100명 돌파‘ 유튜브 동영상들을 검색해 봤더니, 그 영상을 올린지 몇 달 지나지 않은 분들이(기껏 2개월 혹은 3개월 정도) 벌써 구독자가 1천명, 혹은 3천명, 5천명씩이나 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더랬습니다. 구독자 100명 모으는데 석달 걸린 사람이 100명에서 1,000명 도달하는데 2주밖에 안 걸렸다는 분들도 보이고 말이죠.(그런데 유튜브 입장에서는 구독자가 하루에 100명 혹은 1000명쯤 늘어난다고 해도 조금도 놀라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전세계적으로는 20억에 가까운 인구가 매일이다시피 접속하는 어마어마한 네트워크에 그 정도 숫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테니까요.)

결국 컨텐츠가 경쟁력이 있고, 양질의 컨텐츠를 꾸준히 업로드할 수 있으면, 그걸 구독해 줄 독자들은 얼마든지 널려 있다고도 생각됩니다. 어찌되었건 유튜브 이용자들은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2,000만 명에 육박한다고 하고, 날이 갈수록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 가능성은 낮을 테니까요. 결국 핵심은 컨텐츠의 경쟁력이라고 생각합니다.

CREBBP 님께서도 정말 부지런하신 분이니, 유튜브 채널 만드는 걸 진지하게 한번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도 열심히 성원해 드리겠습니다.^^

프레이야 2020-01-08 19: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렌 님. 드디어 폭풍의 언덕.어느새 다섯번째네요. 대단하십니다 좋아요는 스무개 누릅니다 ^^ 지금 밖이라 귀가 후 조용히 저 슬픈 노래까지 모두다 들으러 다시 올게요. 두근두근 설렘 ^^

oren 2020-01-08 22:13   좋아요 0 | URL
좋아요를 듬뿍 주시고 가셨군요, 프레이야 님~
아무래도 저토록 슬픈 노래는 홀로 조용히 감상하시는 게 감동적이리라 저도 믿습니다.^^
또한, 영문학을 전공하셔서 에밀리 브론테의 작품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친숙하시겠지요?

카스피 2020-01-09 15: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늦었지만 서재의 달인 등극 축하드리며 새해복많이 받으셔요^^

oren 2020-01-09 17:58   좋아요 0 | URL
카스피 님께서 모처럼 방문해 주셔서 새해 인사까지 남겨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카스피 님도 해새 복 많이 받으시고, 늘 즐거운 나날 만드셔요!

페크pek0501 2020-01-12 14: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호! 다섯 편이나 만드셨군요. 여기저기 홍보해 드리겠습니다.

oren 2020-01-13 18:26   좋아요 1 | URL
작품 소개 영상은 다섯 편이고, 이것 저것 다 하면 15편이나 된답니다!
페크 님께서 ‘여기 저기‘ 홍보해 주시겠다니, 이보다 더한 희소식이 없습니다.
늘 힘을 보태주셔서 고맙습니다.

FLAKSUIT 2022-02-22 1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어느 출판사 번역이 읽기 좋은지 여쭤봅니다.어려서 읽은건 읽은게 아닌듯합니다.

oren 2022-02-22 13:05   좋아요 0 | URL
저는 민음사 번역본으로 읽었습니다. 번역이 아쉽다는 느낌은 별로 없었습니다.^^

FLAKSUIT 2022-02-22 1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oren님

oren 2022-02-22 13:18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표작인 『죄와 벌』을 만들었다. 29분짜리 동영상으로.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설마(!) 내가 이런 대작에까지 손을 뻗쳐 '동영상'까지 만들 줄은.

 

인류의 대표적인 작가들이 쓴 작품들은 사실 '읽기'도 몹시 벅차지만, 그걸 제대로 소화하고 '독후감'으로 정리하는 일은 더욱 벅차다. 그래서 이름난 고전일수록 '진짜로 읽은 사람들'은 생각보다 드문 것도 사실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또한 나에게는 오래 전부터 '위시 리스트'에만 올라와 있을 뿐, 이 책을 읽을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청년 대학생 라스꼴리니코프가 전당포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묻지마 식으로' 살해하고, 죄의식에 사로잡혀 고뇌한다는 스토리가 너무 빤해 보였던 것도 하나의 원인이었고, 그 책을 읽으면 왠지 모르게 '무척이나 우울하고 괴로울 것 같은' 선입견도 독서를 뒤로 미루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던 것 같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처음 만난 건 대학입시가 끝난 직후였더랬다. 그 때 처음으로 읽은 책이 『까라마조프 형제들』이었는데, 그 소설을 읽는 동안에 내가 느꼈던 작가 특유의 음울하고 어둡고 섬뜩한 느낌들이 오래도록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더랬다. 그래서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읽기를 계속 미루고 미루다 겨우 1년 전쯤에야 가까스로 이 책을 읽었더랬다.

 

뒤늦게 읽은 작가의 대표작은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범죄 심리 소설 특유의 긴박감이 넘치는 데다가, 인간 내면의 어두운 심연까지 무섭도록 파고 내려가는 작가 특유의 치열하고도 내밀한 묘사가 책에서 손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작품 속에는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문장들을 직접 맞닥뜨리는 듯한 철학적인 문장들도 많았는데, 뒤늦게 이 작품을 읽으면서 도스토예프스키 또한 (톨스토이 만큼은 아니지만)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았고, 니체가 도스토예프스키를 특히 좋아했다는 사실까지도 저절로 수긍할 수 있게 되어 더욱 반가웠다.

 

아무튼 『죄와 벌』에 대한 감상평을 쓰느라 만드느라 외부와는 오롯이 차단된 듯한 시간들을 한참이나 보내고 나니 어느새 해가 바뀌어 있었다.

 

유튜브 동영상들은 대체로 10분 내외의 짧은 게 특징이고, 그것이 주류이자 대세를 이룬다. 바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유튜브에 아무리 많은 시간을 빼앗기더라도, 어느 특정한 하나의 동영상에 20분이나 30분 이상씩은 시간을 허투루(?) 소비할 수 없다는 묘한 심리가 깔려 있어서 그렇단다. 그 말에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그런데 인류의 천재들이 남긴 걸작들에 대해서는 조금 달리 바라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9년 동안에 무려 일곱 번이나 고쳐 쓴 『월든』과 같은 작품을 어떻게 10분 내외의 짧은 영상으로 다 소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같은 작품들은 수많은 문학평론가와 교수들이 평생 동안 연구하고 분석하는 작품들이 아닌가. 그런데도 그런 작품들을 '글'이 아닌 '동영상'으로 소개한답시고, 10분 내외라는 통상적인 형식틀에 억지로 꿰어 맞춘다면, 그건 도리어 그런 작품을 쓴 작가와 작품들을 너무 가볍게 다루는 처사가 아닐까. 물론 10분 내외의 동영상으로도 얼마든지 탁월하고도 깊이 있게 그 작품들을 집약해서 소개하고 보여준다면 또 모르겠지만 말이다.

 

재치있는 프랑스의 철학자인 몽테뉴는 이런 말을 남겼다.

 

"한 양서를 요약해서 만든 축소판은 모두 어리석은 축소판이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도 세상은 끊임없이 '축소판'을 요구한다. 그 반대쪽으로 접근하는 데는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물론 몽테뉴의 말대로, '축소판'으로 접근할수록 그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접근과는 점점 더 멀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나는 '일반적인 경향에 반하더라도' 작품을 너무 짧게 축소하는 글이나 동영상은 피하고 싶다.

 

나는 지금까지 내 목소리를 담은 '책 소개 동영상'을 네 개쯤 올렸는데, 그 영상들은 저마다 25분에서 30분을 넘나들고 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심오한 생각들이 담긴 『월든』을 도대체 무슨 재주로 10분 내외로 뭉뚱그려 전달할 수 있다는 말인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13년 동안이나 고쳐 쓰고, 작품의 배경이 된 온천장에서 직접 한 달씩이나 머무르며 집필한 『설국』은 또 어떻고, 몽테뉴가 평생 동안 자신의 독서를 통해 얻은 귀중한 경험을 담아 놓은 『수상록』은 또 어떤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과 같은 작품 또한 10분 내외로 짧게 요약하기에는 여러모로 물리적인 한계가 있는 작품이다.

 

나는 어쨌든 내가 작품을 읽고 난 뒤에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독자들에게 전달하려고 애쓸 뿐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동영상의 물리적인 한계가 10분이나 15분을 뛰어넘어 20분이나 30분씩 걸린다고 하더라도, 그게 도대체 무슨 상관인가. 독자들이 그렇게 긴 영상을 싫어한다면 나로서도 별달리 뾰족한 수는 없다. 몽테뉴가 자신의 생각을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려고 자신의 책에 대한 짤막한 축소판을 시도한 적이 있었던가. 월든의 작가는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서 그 책의 부피를 얼마나 줄이려고 애를 썼던지, 어떤 문장들은 그 문장 하나에 책이 몇 권씩이나 담겨 있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런 책이 재미가 없다고 한다면 그 사람과 월든의 작가는 결국 서로 다른 '북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게 분명하다.

 

『월든』에 담긴 표현대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듣는 음악에 맞추어 걸어가도록 내버려두라. 그 북소리의 음률이 어떻든, 또 그 소리가 얼마나 먼 곳에서 들리든 말이다. 그가 꼭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로 성숙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그가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내가 유튜브의 일반적인 경향인 '짧고 가벼운 영상'에 억지로 작품 소개를 꿰어 맞출 것인지, 아니면 내가 '글'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도 그에 알맞는 '이미지'들을 최대한 발굴해서 작품에 또다른 활력을 불어넣을 것인지는 순전히 내 판단에 달려 있다. 나는 비록 영상 제작에 생각 이상으로 많은 품이 들어서 애를 먹고 있지만, 작품 소개 동영상을 만들 때마다 그 작품을 쓴 작가의 피땀어린 노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라도, 영상의 전체 길이에 너무 연연해 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다.

 

뭐, 좀 길면 어떤가. 영상이 짧을수록 내가 만든 동영상의 품질이 좋아지기만 한다면,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내 영상을 절반 이하로 확 줄이고 싶다. 일부러 자기 자신의 작품을 억지로 길게 늘리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제가 만든 유튜브 영상입니다. 링크 주소는 ☞ https://youtu.be/2URH19RUq3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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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01-01 18: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훌륭하네요. 그렇지 않아도 동영상 기다렸습니다.
관련 영상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습니다.
기왕이면 오렌님 직접 출현하셨으면 좋을 것 같은데...ㅎ
암튼 이달의 리뷰로 손색이 없는 것 같은데 과연 알라딘이
동영상도 포함시켜 줄런지 모르겠습니다.ㅠ
잘 보고 잘 듣고 갑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oren 2020-01-01 19:48   좋아요 2 | URL
제 동영상을 기다려 주셨다니, 너무 고마운 말씀이십니다.

사실 『죄와 벌』을 소개하는 동영상들은 작품 설명에 꼭 필요한 ‘이미지들‘이 턱없이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저도 동영상을 만들기 전부터 그걸 엄청 걱정했었는데, 작업을 하는 동안 셀 수도 없이 많은 싸이트들을 뒤적거려 보니까, 옛날에 만든 영화나 드라마의 스틸컷들을 하나둘씩 발굴(?)할 수 있었고, 뜻밖에도 책 속에 실린 기가 막힌 일러스트도 몇 개 건질 수 있었답니다.

사실 30분 가까운 동영상을 하나 만들자면, 작품 내용를 소개하는 데 적당한 이미지 컷이 최소 100개 내지는 150개 정도는 필요한데, 그걸 동영상 제작 과정에서 끊임없이 발굴해 내고, 영상의 흐름에 맞게‘ 이러저리 바꿔 보기도 하는 과정이 정말로 힘들더군요. 그런데 그런 작업들을 자주 할수록 영상의 퀄리티가 조금씩은 높아지니, 그걸 쉽사리 포기할 수도 없긴 합니다. 암튼, 30분짜리 동영상에 알맞는 사진 이미지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시간만 10시간, 혹은 20시간은 훌쩍 잡아먹더군요. 설명에 꼭 알맞는 이미지 하나 찾아내는 데도 몇 십분씩 흘러갈 때도 많고요.

그래도, 이런 작품을 가지고 내가 언제 다시 동영상을 만들까 싶은 생각에, 끈질기게 영상의 첫부분으로 다시 되돌아가, 편집을 이리저리 계속 하다보면 조금씩 내가 만든 작품에 대해 만족감을 느낄 때도 찾아오는 것 같더군요. (이런 과정에 비하면 ‘대본 쓰기‘는 얼마나 쉬운 작업인지요!)

아무튼 품은 많이 들지만, 만드는 사람의 노고는 쉽게 묻히기 마련인데, 이런 영상을 기다려 주시고, 좋게 봐주셔서 거듭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stella 님께서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syo 2020-01-01 2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글자로 알라딘을 정복하신 oren님께서 영상의 세계로 영토확장의 길을 나서신 것이로군요 ㅎㅎㅎㅎ

oren 2020-01-01 20:29   좋아요 0 | URL
무슨 말씀을 그렇게나 과장되고 과분하게 하시는지요? 저는 알라딘에서도 별로 새롭고 좋은 글을 쓰지도 못하고 있으며, 유튜브에서는 뭔가 좀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하고,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여태껏 갖춘 장비라고는 친구녀석 한테서 빌린 2만원짜리 ‘핀 마이크‘ 하나 밖에 없고요. 저는 유튜브에 동영상을 올린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 싸디싼 웹캠 하나 구비하지 못하고 있답니다. ㅠㅠ

초란공 2020-01-01 2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으아 저도 처음 영상을 보게 되었네요. 30여분이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재미있게 뵜습니다.^^

oren 2020-01-01 20:31   좋아요 0 | URL
초란공 님께서도 30분을 순식간에 쫘악~~ 봐주셨다니 너무 고맙습니다.^^
저는 아직까지도 식구들 몰래 동영상을 만드느라,
이 동영상 대본 하나 녹음하는 데도 ‘한꺼번에 쫘악‘ 해치웠답니다.
몇 군데 발음이 제대로 안 되고, 꼬인 부분이 있어도 ‘재녹음‘을 생략한 데는 그런 아픔이 있답니다.^^

초란공 2020-01-01 2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 가지 궁금한 점은 23분 정도에서 감옥 이미지에 나치수용소 이미지가 있어서 놀랐습니다. 철도가 입구로 이어지는 건물 정면 사진이에요.

oren 2020-01-01 20:38   좋아요 1 | URL
초란공 님께서 정확히 봐주셨군요. ‘시베리아 형무소‘ 이미지를 아무리 찾아도 자꾸만 아우슈비츠 관련 영상만 나오길래 그걸 (마음 속으로는 염려하면서도) 적당히 이용했는데, 눈밝은 초란공 님께서 아주 쉽게 그걸 찾아내 주셨군요. 무료 이미지를 제공하는 싸이트에서 ‘시베리아 형무소‘를 찾느라 아무래 헤매도 도무지 알맞은 이미지가 눈에 띄지 않고, 앞에서 이용한 똑같은 이미지를 계속 반복해서 쓸 수도 없어 궁여지책으로 적당히 끌어다 쓴 건데, 초란공 님의 말씀대로 ‘아우슈비츠‘는 너무 고유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어서, 그걸 단박에 알아보시는 분들께서는 너무 황당해 하고, 의아해 하실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아주 중요한 부분을 예리하게 지적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초란공 2020-01-01 2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죄와벌>로 도스토예프스키를 처음 읽어보고 싶었는데 oren님의 신탁을 받았네요^^

oren 2020-01-01 20:56   좋아요 0 | URL
강추합니다.^^ 저도 이 작품은 1년 전쯤에야 비로소 읽었는데, 이처럼 빨리 유튜브 동영상으로까지 만들 줄은 생각도 못했답니다. 어쨌든 이 작품은 생각보다 훨씬 더 강렬한 작품입니다!

프레이야 2020-01-04 2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렌 님, 좋아요를 한 번만 누를 수 있어 안타깝네요.너무 좋습니다. 월든과 수상록이 앞서 있었군요. 네번째는 어떤 책을 준비하고 계실지 궁금합니다.
정신의 감옥 속으로 자발적으로 걸어들어갈 수밖에 없겠어요. 구독합니다^^

oren 2020-01-04 22:04   좋아요 1 | URL
프레이야 님께서 귀한 댓글 남겨주셨군요. 아주 오랜만이고, 참 반갑습니다.^^

『월든』은 언제라도 다른 분들께 추천해 드릴 만한 책이라 ‘맨 처음으로‘ 소개해 올렸고요.
(물론 이 영상 만드느라 열흘 이상 엄청난 고생을 했고요.)

몽테뉴의 <수상록>도 소개하는 데는 자신(?)이 있어서 선택했는데, 책 설명에 알맞는 이미지를 찾느라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연구 주제로 삼은 철학책인 데다가, 온갖 형이상학적인 이야기가 많아서 그에 딱 맞는 이미지 찾기가 쉽지는 않더라구요.

두 권을 소개하고 나니까, 너무 진이 빠지고, 또 너무 무거운 책들만 소개하는 것 같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소개했는데, 그 책을 소개할 때 잠시 겨울나라에서 ‘힐링‘을 느끼는 듯했습니다. 따뜻한 온천장에 몸을 담근 기분까지도 느껴졌으니까요. 그만큼 영상 제작이 쉬웠다는 말씀이고요.

<죄와 벌>역시 알맞은 이미지가 없을까봐 무지 걱정하고 작업을 시작했는데, 자꾸 뒤지니까 자꾸 알맞은 이미지가 나와서 예상보다는 빨리(대략 4일쯤?) 만들었답니다.

지금 만들고 있는 건 ‘워더링 하이츠에 부는 세찬 바람을 닮은 소설‘ <폭풍의 언덕>입니다. 이 책이 세계 10대 소설인데다가, 영화로도 여러 차례 나와서 해당 이미지 찾는데는 그리 큰 힘이 들지 않았으나, 역시 이야기가 길어져서 30분 이내로 줄이느라 애를 먹고 있습니다.^^ 아마 내일쯤은 업로드가 가능하지 싶어요.^^

프레이야 2020-01-04 22:28   좋아요 1 | URL
앗 설국이 있었군요. 그리고 폭풍의 언덕이라니! 의미 있는 작업입니다. 북트래블러라는 이름도 작업과 딱 어울리네요. 이미지는 저작권 때문에 쉽지 않으시겠어요. 직접 찍어 보시는 것도 어떨지요. 죄와벌 보다가 폴리스차에 그만 빵 터져서 오렌님의 유머를 발견했어요. 무겁고 진지함 속에 깃든. ^^

oren 2020-01-04 22:57   좋아요 0 | URL
여태까지 Book travel 이라는 채널 이름을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깜놀했습니다.^^
이런 저런 이름 작명하는데 며칠 고민하다가 우연히 떠올린 이름인데 말이지요.^^
경찰차가 큼지막하니 클로즈업 된 이미지가 있어서 ‘이거 딱인 걸‘ 하고 썼는데,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초딩 2020-01-04 2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앗!!! 넘 좋네요
구독했습니다~ !

oren 2020-01-04 22:04   좋아요 1 | URL
초딩 님 반갑습니다.^^
초딩 님께서 구독해 주신 덕분에 조만간(오늘? 아니면 내일?)
구독자 100명은 거뜬히 돌파할 듯싶습니다.
늘 성원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카알벨루치 2020-01-05 0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거 반칙입니다!!! 우아 오랜님 정말~👏👏👏

oren 2020-01-05 23:07   좋아요 1 | URL
반칙에도 죄와 벌이 따르나요? ㅎㅎ

조재연 2020-01-11 0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렌님 리뷰 간간히 보는데, 유튜브도 하시는군요!! 색인을 정리한 모습이 오렌님 고유의 마스코트가 될거 같아요. 볼때마다 느끼는거지만 오렌님의 서재는 탐이나네요

oren 2020-01-11 08:4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조재연 님.
제가 유튜브를 시작하게 된 건 겨우 두 달쯤입니다. 아직도 장비라고는 친구한테서 빌린 2만원짜리 핀마이크 하나가 전부에요... 그런데도 벌써 구독자가 114명에 이르고, 누적 조회수 8,000회, 업로드 동영상 15개를 기록중입니다. 유튜브 채널을 직접 운영해 보시지 않은 분들은 ‘에게.... 겨우...‘ 하시겠지만, 저로서는 무척이나 고무적인 수치입니다. 구독자도 최근 13일 연속 늘어났고요..
사설이 길었습니다. 제 캐릭터가 색인에서 느껴진다는 말씀은 난생 처음으로 듣는 말이라 귀중한 참고가 될 듯합니다. 댓글 남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조재연 2020-01-11 15: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북튜브를 했었는데 구독자수가 5명이었습니다. 운영하기전까지는 몰랐는데 댓글 하나하나가 소중하더라구요 ㅎㅎ 지금은 접었습니다만.. 북튜브라는게 사람들에게 그리 관심소재가 아닌지라... 오렌님이 힘든길을 걸으시는건 아닐지. 잘 되기를 응원합니다!!

oren 2020-01-11 22:14   좋아요 0 | URL
조재연 님도 북튜브를 하셨군요!!
저는 아직 초창기라 유튜브 세계가 어떤 곳인지 잘은 모릅니나만, 굉장히 역동적인 곳이라는 느낌은 받습니다.. 블로그 서비스가 빠르게 확산될 때의 느낌도 드는데, 자기 고유의 컨텐츠만 있으면 누구나 빠르게 구독자를 모을 수 있다는게 가장 큰 매력 같습니다. 또한 유튜브는 크게 실수하지만 않는다면, 마이너스 성장세를 보일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점도 매력 있구요.. 컨텐츠든, 구독자든 조회수든 감소할 일은 거의 없는데, 관건은 구독자가 일정수준 이상으로 확보될 때까지 얼마만큼 인내심을 유지하며, 컨텐츠의 질과 양을 업그레이드하느냐일 듯합니다.^^

페크pek0501 2020-01-12 14: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도전에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새로운 좋은 취미가 생겼음엔 축하드립니다.
많은 분들이 유익하게 들으실 것 같네요. 저만 해도 오래전 읽은 <죄와 벌>이지만 복습이 되었어요. 몰랐던 정보도 얻고.
오렌 님의 목소리가 맑다고 느꼈어요. 얼굴은 계속 안 나오나요?ㅋ

새해에도 활발한 활동이 이어지길 기대하겠습니다. 종종 들르겠습니다.

oren 2020-01-13 18:33   좋아요 1 | URL
응원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정말 좋은 취미이고, 또 생산적인 취미라고 느끼고도 있고요.

다른 SNS 활동들, 가령 인스타나 페이스북의 경우에는 대부분 ‘자기자랑‘이 주목적인데, 유튜브 동영상들은 철저하게 ‘다른 사람들을 돕거나 즐겁게 하기 위해‘ 영상을 제작하기 때문에, 저는 그 점이 특히 마음에 듭니다.^^

저는 아직까지도 ‘장비‘라고는 친구한테서 빌린(!) 2만 원짜리 ‘핀 마이크‘ 하나밖에 없답니다. 웹캠이라도 사야 제 얼굴이라도 비춰드릴 텐데 말이지요. 그리고 ‘책 소개 동영상‘을 만들자면, 나름대로 미리 작성한 스크립트(대본)을 보고 읽어야 하기 때문에, 얼굴까지 내밀고 대본을 읽자면 ‘프롬프터‘라는 새로운 장비까지 사야 되는 문제도 생긴답니다.

그래서 저는 당분간은 계속 현재의 방식대로 영상을 제작하기 쉬울 듯합니다. 물론 웹캠을 통해 나레이터의 모습까지도 담을 수 있다면 참 좋겠는데, 아직까지는 그런 단계로까지 나아가기가 쉽지 않을 듯해서 말이지요. 성능도 좋지 못한 마이크에다가, 발성 연습도 제대로 안 된 제 목소리를 좋게 들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동안에 자신이 알고 있는 몇몇 친숙한 철학자들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 철학자들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발걸음을 한결 가뿐하게 도와주는 특급 도우미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철학자들은 마치 어두컴컴한 지옥을 여행하는 단테에게 끊임없이 길을 잃지 않도록 앞장서서 길을 안내해준 베르길리우스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테니까.

 

총 13권이라는 어마어마한 길이로 구성된 대작 가운데 고작 4권밖에는 읽지 못한 독자가, 마치 수십 년에 걸쳐 정교하게 축조된 고딕 양식의 거대한 대성당 안을 둘러볼 때처럼, 그 건축물이 간직한 독특한 구조와 벽면에 새겨진 오래된 벽화들과 여러 조각품들에 얽힌 배경 지식과 가치에 대해서는 거의 짐작하지도 못한 채 고개만 쳐들고 두리번거리며 지나친다고 해도 결코 무리는 아니다 싶다.

 

그런데도 잠깐씩, 이토록 복잡한 건축물을 둘러보는 듯한 느낌으로 프루스트의 빽빽한 문장들을 헤쳐 나가면서도 어디선가 예전에 한번쯤 마주친 듯한 인상을 떨칠 수 없는 까닭은 앞서 언급한 몇몇 철학자들 때문인데, 내게는 몽테뉴, 쇼펜하우어, 니체, 베르그송과 같은 인물들이 바로 그런 철학자들처럼 여겨진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베르그송(1859∼1941)은 프루스트(1871∼1922)와는 동시대의 인물이면서도 가까운 친척 사이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그는 1892년에 프루스트의 사촌누이인 루이즈 뇌부르주와 결혼했으며 프루스트도 그 결혼식에 참석했다고 한다.) 우선, 베르그송은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처음으로 새로운 철학을 제시했다고 평가받는 인물인데, 마침 그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쓴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베르그송이 직접 영역했던 책의 제목은 『시간과 자유의지』)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담겨 있어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한다.

 

 

가령 내가 [앞으로] 살 도시를 처음으로 산책할 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은 나에게, 지속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인상과 끊임없이 수정될 인상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나는 매일 같은 집들을 보며, 또 그것들이 동일한 대상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것들을 끊임없이 동일한 이름으로 부르고,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나에게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당히 긴 시간이 지난 후 처음 몇 해 동안 느낀 인상을 돌이켜 보면, 그 속에서 일어난 독특하며 설명할 수 없고, 특히 표현할 길 없는 변화에 놀란다.122) 내가 계속 지각했고 나의 정신 속에서 끊임없이 그려지던 그 대상들이 결국에는 나로부터 나의 의식적 존재의 무엇인가를 빌린 것처럼 보인다. 나처럼 그것들도 살았고, 나처럼 그것들도 늙었다.(166쪽)

122) 이런 현상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가령 어렸을 때 살던 동네를 커서 가 볼 경우이다. 그 길이, 그 집이 그렇게 좁고 작았던가 하고 놀라게 된다. 이 경우는 그 차이가 너무나 크므로 쉽사리 말로 표현되지만, 그 느낌의 차이는 사실 단지 좁다든지 작다든지 하는 말로는 다 표현되지 않는 무한히 복잡한 감정의 복합체이다. 이것이 가령 20대에(키가 다 자란 다음) 살던 곳을 40대 정도에 가보는 경우라면 훨씬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나 분명히 느낌의 차이는 있다. 어쨌든 이러한 현상은 그 집, 그 동네에 관한 인상이 항상 동일한 것이 아니라 변해왔음을 말해주는 것이 분명하다.

 

 - 앙리 베르그송,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이처럼 '질적인 시간과 양적인 시간'을 구분할 필요성을 제기한 베르그송의 철학은 곧바로 프루스트의 소설 속에 그대로 녹아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닮았다. 그런데 베르그송의 상상력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마치 프루스트의 소설을 예견이나 한 듯이 곧바로 다음과 같이 말하기 때문이다.

 

 

이제 어떤 과감한 소설가가 우리의 상투적인 자아의 교묘하게 짜인 직물을 찢고 그러한 외견적 논리 아래에서 근본적인 부조리를 보여주고, 단순한 상태들의 그와 같은 병치 아래에서, 명명하는 순간 이미 존재하기를 멈추어 버렸던 수만의 다양한 인상들의 한없는 침투를 보여주면, 우리는 그에게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라고 칭찬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가 우리의 감정을 동질적 시간 속에 펼쳐 놓고, 그 요소들을 말로 표현한다는 사실 자체에 의해, 그 역시 그의 차례가 되어 우리에게 그 감정의 그림자만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단, 그는 우리로 하여금 그 그림자를 투사한 대상의 특별하면서도 비논리적인 본성을 의심케 하도록 그것을 배치했다. 표현된 요소들의 본질 자체를 이루는 그런 모순, 그런 상호 침투의 뭔가를 외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우리를 반성으로 초대했다. 그에 의해 고무되어 우리는 잠시 우리와 우리 의식 사이에 개입시킨 막을 걷어 제쳤다. 그는 우리를 우리 자신 앞에 다시 세운 것[뿐]이다.(170쪽)

 

 - 앙리 베르그송,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베르그송이 이 논문을 발표한 해는 1889년이었고,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처음으로 출간한 해는 1913년이었다. 프루스트가 자신의 소설 속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직접 거명하고,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철학들을 은연중에 자주 드러낸 점들을 감안한다면, 자신의 사촌누이와 결혼한 매형이자 당대 프랑스 지성계에서도 가장 우뚝한 인물로 인정받던 베르그송의 책들을 읽지 않았다고 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한 프루스트의 소설 자체가 굳이 '시간에 관한 소설'임을 따로 고려하지 않더라도, 프루스트는 이미 자신의 작품 속에서 '시간' 말고도 '지속'이라는 베르그송 철학의 핵심 단어를 끊임없이 자주 불러내고 있다. 프루스트가 베르그송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특히 발터 벤야민으로부터 깊이 연구되었다고도 알려져 있으며, 국내 번역본의 작품 해설에서도 그런 영향의 일단을 쉽게 엿볼 수 있다.

 

  

내적 자아, 심층자아와 내적 지속에 대한 그의 이론은, 외적 조형미의 부각에 힘쓰던 문학으로 하여금 자기 내부의 무의식 세계로 그 시선을 돌리게 하여 상징주의의 개화와 함께 내면문학의 붐을 촉진시켰고, 그의 직관주의는 방대한 반지성적 경향의 움직임을 태동하게 하였는데, 그 대표가 시인 페리(Charles Peguy)였다. 문학비평에서도 티보데(Thibaudet)를 통하여 그의 형향이 뚜렷이 드러났으나, 가장 중요한 영향은 프루스트(Proust)에 대한 영향이라고 하겠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은 바로 그의 지속을 가리키고 있고, 끊일 줄 모르고 무한히 계속되는 그의 문장은, 끊임없이 생동하는 내면세계의 지속을 포용하는 문장으로서 베르그송적인 문체를 대변하고 있다.(750쪽) 

 

 

베르그송의 철학이 프루스트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이쯤으로 그치고, 다시 프루스트의 문장 속으로 들어가 보자.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프루스트의 문장'을 읽으면서 새록새록 떠오르는 '철학자들' 혹은 '작가와 작품들'은 어떤 것들이며, 그런 작품들이 이 책을 읽는 어려움을 어떻게 타개하는지를 밝히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꽃핀 처녀들의 그늘> 속으로 들어가 보자.

 

아! 슬프게도 더없이 싱싱한 꽃 속에서도 우리는 지극히 미세한 점을 알아볼 수 있으니, 이 점은 정통한 정신에게 오늘 꽃핀 육체마저도 건조하고 열매를 맺어 씨앗이라는 예정된 불변의 형태가 되리라는 걸 벌써부터 그려 보인다. 아침 바다를 감미롭게 부풀리며, 조수가 밀려와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그토록 고요한 바다이기에 움직이지 않아, 그린 듯 보이는 잔물결과도 흡사한 코를 우리는 기쁘게 쫓아간다. 인간의 얼굴은 우리가 바라보는 동안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눈으로 지각하기에는 얼굴 변화가 너무도 느리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녀들 곁에서는 소녀들의 어머니나 아주머니만 보아도 그들 모습이 관통한 거리를 충분히 측정할 수 있으며, 내면의 인력 작용에 따라 대개는 끔찍한 형태로 바뀌는 그 모습은, 삼십 년도 안 되는 사이에 눈매가 처지고 얼굴이 지평선 너머로 저물어 더 이상 빛을 받지 못한다. 자기 종족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줄로 믿고 있던 사람들 안에 감추어진 유대인 애국주의나 그리스도교인의 유전적 특징처럼 그렇게도 깊숙이 피할 수 없는 채로, 난 알베르틴이나 로즈몽드와 앙드레의 장미 꽃송이 아래서 그녀 자신들도 인식하지 못하는, 어떤 상황을 위해 보존한 듯한 커다란 코나 튀어나온 입, 통통한 몸집이 자리 잡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런 모습은 사람들을 놀라게 할 테지만, 실은 무대 뒤에 있어 언제라도 무대에 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데, 이를테면 어떤 상황의 부름을 받아 개인 자체를 앞선 본성에서 갑자기 발생한, 예기치 않은 운명적인 드레퓌스주의나 교권주의, 또는 민족적이고 봉건적인 영웅주의 같은 것들이다. 개인은 이러한 본성을 통해, 그리고 자신이 본성이라고 여기는 것을 개인적인 동기와 구별하지도 못한 채 생각하고 살고 진화하고 확고히 하며 또는 죽어간다.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자연계 법칙에 의존하므로, 우리 정신은 어느 은화식물이나 이런저런 벼과 식물마냥 우리 스스로 선택한 줄로만 여기는 여러 특징들을 미리 소유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일차적 원인을(유대인 혈통이나 프랑스 가문 등) 인식하지 못하고 이차적 관념만을 포착하는데, 실은 이 일차 원인이 이차 원인을 필연적으로 생산해 냈으며, 그것이 때가 오면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어떤 관념은 심사숙고의 결과처럼 보이며, 또 다른 관념은 건강상 부주의의 결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마치 콩과식물이 종자로부터 그 형태를 이어받듯이, 실은 우리도 우리 가족으로부터 사는 데 필요한 관념이나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이어받는다.

 

마치 모종관 하나에서 꽃들이 저마다 다른 시기에 무르익어 가듯, 나는 발베크 해변의 노부인들에게서 언젠가는 내 친구들도 닮을 그 단단한 씨앗과 무른 덩이줄기를 보았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그때는 꽃들의 계절이었으니. ……(411­∼413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2> 중에서

 

 

이 짧은 구절을 읽는 동안에 참으로 많은 생각들이 잇따라 머릿속에 나타났다가 재빠르게 사라지는 느낌을 받고는 몹시 놀랐다. 프루스트의 문장들은 때로는 극히 느린 움직임으로 포착한 미세한 떨림들의 연속처럼 느껴지는데, 이 대목에서는 마치 오늘날의 카메라 기술이 자주 보여주듯이, 긴 시간 동안의 '시간의 흐름'을 압축적으로 매우 빠르게 재생시킨 듯한 느낌을 준다. 꽃이 피고 지는 것도 불과 1초 혹은 2초만에 빠르게 지나가고, 태양과 별들이 뜨고 지는 것도 불과 몇 분 사이에 일어난 것처럼 만들어진 영상을 우리는 이미 현실에서도 자주 목격하고 있을 정도다.

 

꽃핀 풍경들은 그 자체로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그 꽃들이 다 스러지고 난 다음의 그늘진 풍경들은 얼마나 또 서늘하고 쓸쓸한가! 시인들은 또 얼마나 자주 꽃들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뚝뚝 흘렸던가! 또한 꽃들이 '사랑'과 자연스레 연결될 때 '꽃이 피고 지는 일'은 얼마나 상징적인가!

 

이 대목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작품은 『폭풍의 언덕』이었다. 세찬 바람이 휘몰아치던 그 황량한 워더링 하이츠와 그 언덕에서도 어김없이 피어났던 히스 꽃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토록 세찬 바람을 맞으면서도 싱그럽게 피어났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미친 듯한 사랑은 또 얼마나 광기어린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던가.

 

두 번째로 떠오른 작품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극한까지 밀어부친 소설 『율리시스』였다. 제임스 조이스 또한 '꽃'을 '애정'과 결코 따로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율리시스』를 읽은 독자들은 그 난해한 책 속에서도 '후우드 언덕'만큼은 결코 잊을 수 없으리라 믿는다. 꽃이 흐드러지게 핀 호우드 언덕에서 주인공인 블룸과 몰리가 '사랑의 절정'에 다다른 장면은 얼마나 농밀하면서도 해독하기 쉬웠던가!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 간신히 다시 찾은 그 부분을 여기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몸을 달아오르게 하는 포도주가 그의 입천장에서 맴돌다가 꿀꺽 넘어갔다. 버건디 포도를 기계에 넣고 짜는 것이다. 그건 태양열이지. 마치 비밀의 촉감이 내게 기억을 되살려 주는 듯. 그의 감각에 감촉되어 촉촉하게 기억났다. 호우드 언덕의 야생 고사리 아래 숨겨진 채 우리들 아래 잠자는 만(灣) : 하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하늘, 라이온 곶(串) 옆의 자색의 만(灣). 드럼레크 곁에는 녹색. 서턴 쪽으론 황록색. 바다 밑의 들판, 희미한 갈색의 선(線)들, 매몰된 도시. 그녀는 나의 코트를 베개 삼아 머리를 괴고 있었지. 헤더 숲속의 가위 벌레가 그녀의 목덜미 밑에 있던 나의 손을 간질이고, 이러다가 저를 뒹굴게 하겠어요. 오 얼마나 근사하랴! 연고(軟膏)로 차고 부드러워진 그녀의 손이 나를 어루만지며, 애무했다: 내게 쏟은 그녀의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릴 줄 몰랐지. 황홀한 채 나는 그녀 위에 덮쳐 누워 있었지. 풍만하게 벌린 풍만한 입술, 그녀의 입에 키스했다. 냠. 따뜻하게 씹혀진 시드케이크(씨 과자)를 그녀는 나의 입에다 살며시 넣어 주었지. 메스꺼운 과육을 그녀의 입은 따뜻한 신 침과 얼버무렸다. 환희: 나는 그걸 먹었지: 환희. 싱싱한 생기. 뾰족하니 내게 내민 그녀의 입술. 부드럽고 따뜻하고 끈적끈적한 고무 젤리 같은 입술. 그녀의 눈은 꽃이었어, 저를 안아 줘요, 욕망에 찬 눈. 자갈이 굴렀다. 그녀는 잠자코 누워 있었지. 산양 한 마리. 아무도 없고. 만병초 꽃 우거진 호우드 언덕에 한 마리 암 산양이 발 디딤을 든든히 하면서 걷고 있었다. 까치밥나무 열매(똥)를 떨어뜨리며. 고사리 숲 아래 가려져 따뜻하게 안긴 채 그녀는 소리 내어 웃었다. 나는 그녀 위에 마구 덮쳐 누워, 그녀에게 키스했다: 눈, 그녀의 입술, 혈관이 뛰는 그녀의 뻗친 목, 얇은 망사의 블라우스 속에 부푼 여인의 앞가슴, 그녀의 위로 솟은 도톰한 젖꼭지에. 뜨거운 혀를 나는 그녀에게 내밀었지. 그녀는 내게 키스했지. 나는 키스 받았지. 몸을 온통 맡기며 그녀는 나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흔들었지. 키스를 받고, 그녀는 내게 키스했지.*(144쪽)

 

* 몰리에게 한 구애가 절정을 이루는, 호우드 언덕에서의 블룸의 숨가쁜 기억(제18장, 몰리의 최후의 독백 참조). 무성한 만병초꽃과 고사리 숲에는 어느 관광객이 꽂아 놓은 '블룸을 방해하지 말라(No disturbing Bloom)'라는 푯말이 있음.

 

 -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 <제8장 더블린 시 한복판(레스트리고니언즈)> 중에서

 

 

만병초가 흐드러지게 피어났던 호우드 언덕의 추억은 '역자의 주석'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듯이, 『율리시스』에서도 가장 유명한 제18장에서 다시 한번 반복된다. 이번에는 블룸이 아닌 몰리의 회상을 통해서. 그 부분을 최대한으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몰리의 독백은 Yes에서 시작해서 Yes로 끝나는 '세상에서 가장 긴' 문장이다. <생각의 나무> 판본으로는 1,217쪽에서 1,283쪽까지 아주 길게 펼쳐져 있다. 독백에는 쉼표와 마침표가 단 하나도 없다.)

 

그이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 나는 가능한 한 그이를 흥분시키기 위해 앞가슴이 터진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어 지나치게 벌어지지 않을 정도로 말이야 유방이 막 통통하게 살찌기 시작하고 있었지 전 피곤해요 하고 나는 말했지 우리들은 전나무 동굴 위에 누워 있었지 황량한 곳이었어 세상에서 제일 높은 바위임에 틀림없을 거야 회랑이랑 포곽(砲郭) 및 저 무시무시한 바위들 그리고 고드름인지 뭔지는 모르나 늘어져서 사다리를 이루고 있는 성 미가엘 동굴 진흙이 온통 내 구두를 더럽히고 원숭이가 죽으면 저 길을 통해 바다 밑으로 해서 아프리카까지 가는 것임에 틀림없어요 저 멀리 배들은 마치 나뭇조각 같았어 그것은 몰타를 향해 지나가는 보트였지 그렇지 바다와 하늘 누구든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나 할 수 있었어요 그곳에 누워 영원토록 말이야 그이는 옷 위로 유방을 애무했어 남자들이란 그런 짓을 좋아하지요 거기가 동그랗기 때문이야 나는 그이에게 기대고 있었어 하얀 밀짚모자를 쓰고 너무 새것이 되어서 조금 햇볕을 쬘 양으로 말이야 내 얼굴은 왼쪽에서 보는 것이 제일 예쁘지 나는 블라우스를 그와 헤어지는 날을 위해서 터놓았어 살이 다 들여다뵈는 셔츠를 그이는 입고 있었지 나는 그의 가슴이 분홍빛임을 볼 수 있었어요 그이는 한동안 자기 것을 내 것에다 터치시키려고 했지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도록 두지는 않았어 정말 후련해졌어 처음에 그는 몹시 당황했지 두려운 것은 폐병인지도 모르는데다가 혹시 임신될지도 모르잖아 저 늙은 하녀 아이네스가 내게 가르쳐줬지 한 방울이라도 들어가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나는 나중에 바나나를 가지고 시험해 보았지 그러나 그것이 부러지지 않을까 그리하여 어딘가 몸속에 토막이 남아 있지나 않을까 걱정했어 왜냐하면 한떄 의사들이 여자의 몸에서 무엇을 꺼낸 적이 있었으니까 고놈의 것이 수년 동안 석탄염에 덮인 채 그곳에 숨어 있다나 남자들이란 자기들이 나온 곳으로 도로 들어가고 싶어서 죽고 못 살지 그들은 결코 속 깊이까지 도달할 수 없는 것 같아 그리고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서 일을 다 치러 버리거든 다음번까지 그렇지 왜냐하면 거기는 참 근사한 너무나 부드러운 기분이 들지 그동안 내내 정말로 보드라운 감촉 어떻게 하여 우리들은 끝나 버렸는지도 몰라 그래 오 그렇고 말고 나는 그이 것을 내 손수건에다 빼게 했지 나는 흥분하지 않은 척 하려 하고 있었지만 내 두 다리를 벌렸지 그가 내 패티코트 속을 터치하지 못하도록 했어 나는 옆이 벌어지는 스커트를 입고 있었어 그이에게서 억지로 생명을 짜냈던 거야 처음엔 그이를 간질이고 있었지 나는 호텔에 있던 그놈의 개를 흥분시키는 것을 좋아했어 르르스스트 그르르릉 그이는 눈을 감고 그리고 새 한 마리가 우리들의 아래쪽을 날고 있었지 그이는 부끄러워했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저 아침의 기분처럼 그이가 좋았어 내가 그런 식으로 그이를 덮쳤을 때 그이는 약간 얼굴을 붉혔지 내가 그이의 단추를 풀고 그것을 꺼내 살갗을 벗겼을 때 그 끝이 일종의 눈(眼) 모양을 하고 있었어 남자들은 안쪽으로 아랫배 밑까지 단추 투성이야 내 사랑 몰리 하고 그는 나를 불렀지 그이의 이름은 무엇이더라 잭 조 아니야 해리 멀비였어. 그래 그이는 해군 중위였다고 생각해 금발인 편이었지 명랑한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어 그렇게 나는 저 뭐라고 하는 것을 더듬었지 어떠한 것이든 뭐뭐라고 했어 그이는 코밑수염을 기르고 있었지 되돌아온다고 했어 맙소사 나에게는 바로 어제 일같이 생각돼 그런데 만일 그이와 결혼했더라면 그이는 나에게 그걸 해주었을 거야 그이와 약속했지 그래 진심으로 나는 그이에게 거리낌 없이 시켜 드리겠다고 약속했어 지금 같아서는 붙들어 매지 않고 말이야 아마 그이는 죽었는지 전사했든지 그렇잖으면 해군 대령이나 제독이 되었을 거야 벌써 20년이 가까웠어 만일 내가 전나무 계곡이라고 말하면 그이는 이내 알 거야 만일 그이가 뒤쪽으로 와서 살며시 눈을 가리고 누군지 알아 맞춰 봐요 해도 나는 알아맞출 거야 그이는 아직도 젊어요 40쯤 되었으니까 아마 블랙 워터의 어떤 처녀와 결혼했을 거야 그리고 아주 변해 버렸을 테지 남자들은 언제나 그렇게 하지 그들은 여자들이 지닌 성미의 절반도 갖지 못해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 내가 그녀의 사랑하는 남편과 무슨 짓을 했는지 그이가 그녀에 관한 것을 꿈에도 생각지 않고 있는 동안에 게다가 환히 밝은 대낮에 온 세상이 다 보는 데서 크로니클 신문에다 그에 관한 기사를 사람들이 실어도 좋다고 말할 테지 후에 나는 약간 거칠어졌지 당시 나는 배너디 형제 상점의 비스킷 넣은 흰 종이 봉지에다 바람을 불어넣어 터뜨렸지 어쩌면 그렇게 꽝하고 터질까 온갖 노란 도요새와 비둘기들이 울고 있었어 우리들이 언덕 복판을 넘어 똑같은 길을 되돌아올 때 낡은 산지기의 집과 유태인 묘지 곁을 지나면서 묘비에 새겨진 헤브라의 문자를 읽는 체했지 나는 그이의 피스톨을 쏴보고 싶었지만 그이는 갖고 있지 않노라고 말했어 그이는 무엇으로 내 기분을 맞출 수 있을지 알지 못했어 언제나 뾰족한 삼각모를 쓰고 있었는데 똑바로 고쳐 줘도 이내 삐뚤게 쓰고 말았지 H M S 칼립소 호(號) 나는 모자를 흔들었어 저 늙은 주교는 꽤 기다란 설교를 재단에서 했었어 여인의 보다 높은 임무에 관해서 최근 자전거를 타거나 뾰족한 삼각모를 쓰고 다니는 소녀들 그리고 새로운 여성 블루머즈에 관해서 말씀이야 하느님 저이에게 지각(知覺)을 그리고 저에게 더 많은 돈을 주옵소서 사람들은 그이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부른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 블룸이라니 그게 내 이름이 될 줄이야 나는 결코 생각지 못했어 당시에 그와 같은 이름으로 주문(注文)을 써 보내기도 했어 그런데 내가 그이와 결혼 뒤로 조시는 이따금 말하곤 했지 M 블룸 너는 꽃처럼 아름답게(bloomimg) 보여 라고 ……(626∼627쪽)

 

 -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 <제18장 침실(페넬로페)>

 

 

우리의 성격이 미리 정해진 경로를 따라 핋연적으로 - 프루스트가 말한 대로 '언제라도 무대에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던 상태로' - 때가 되면 저절로 나타난다는 생각은 오늘날의 진화심리학자들이나 뇌신경과학자들의 주장과 놀랍도록 닮아 있어서 특히 놀랍다. 『빈 서판』과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쓴 스티븐 핑커야말로 이런 프루스트의 주장들을 가장 강력하게 뒷받침해온 주역이다. 물론 이런 생각은 앙리 베르그송이 1907년에 발표한 『칭조적 진화』에서도 뚜렷이 드러나 있다.

 

두뇌의 운동기작은, 거의 모든 기억을 무의식 속에 억압하기 위해서, 그리고 의식 속에서 현재 상황을 조명하고 행동이 준비되는 것을 도와 결국에는 유용한 일을 낳을 수 있는 것만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잉여의 기억들은 기껏해야 살짝 열린 문틈으로 몰래 통과할 뿐이다. 그것들은 무의식의 전달자로서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우리 뒤에서 이끌고 가는 것을 알도록 해준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들에 대한 명백한 생각을 갖지 않을 때라도 우리는 모호하게 과거가 우리에게 현존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의 성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출생 이후부터 살아온 역사를 응축한 것이고, 심지어 출생 이전의 역사를 응축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출생 이전의 성향들도 더불어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 과거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욕망하고 의지하고 행위하는 것은 우리의 원초적 영혼의 만곡(彎曲)을 포함하는 과거 전체와 더불어서이다. 따라서 우리의 과거는, 비록 그것의 아주 작은 부분만이 표상으로 된다 하더라도, 전체가 그 추진력에 의해 그리고 경향의 형태로 남김없이 우리에게 나타난다.(24∼26쪽)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중에서

 

이 밖에도 프루스트의 문장을 읽는 동안에 다른 여러 책들이 아주 잠깐씩 떠오르다가 이내 다른 책들과 자리바꿈을 하는 걸 느꼈지만, 내게 떠오른 나머지 몇 권의 책들과 그 작품 속에 담겼던 문장들까지 일일이 찾아 인용하기에는 너무 부담이 크다. 오랫만에 찾아본 '몰리의 독백'을 너무 길게 인용하느라 어느새 조금 지쳤는지도 모르겠다.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담긴 7편의 작품 가운데서도 가장 시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작품으로 평가받는다.(프루스트는 이 작품으로 공쿠르 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 편이 끝나고 이어지는 <제3편>인 <게르망트 쪽>으로 넘어가기 전에 다시 한번 '꽃핀 소녀들의 그늘'을 좀 더 뚜렷하게 부각시키는 동시에,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과 앙리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에 담긴 생각들을 거의 동시에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듯한 느낌을 주는 아래 문장을 인용하는 것으로 두서없는 글을 끝맺고 싶다.

 

가져온 음식을 다 먹고 나면 우리는 '탑이여, 경계하라', '누가 먼저 웃나' 같은 놀이를 했는데, 지금까지는 따분하고 유치하게만 보이던 그 놀이를 이제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소녀들의 얼굴을 아직 붉게 물들이고 , 또 내게선 이미 벗어난 그 젊음의 여명이 그녀들 앞에 놓인 모든 걸 환하게 비추면서, 어느 프리미티프 화가가 물 흐르는 듯한 화폭처럼 그녀들 삶에서 가장 하찮고 세세한 부분까지 금빛 배경 속에서 뚜렷이 드러냈다. 소녀들의 얼굴은 대부분 어렴풋한 붉은 빛 여명에 섞여 확실한 특징들이 아직 솟아나지 않은 상태였다. 몇 해가 지나서야 분명해질 그 구별되지 않는 윤곽 아래로 매혹적인 빛깔만이 보일 뿐이었다. 지금의 윤곽에는 결정적인 요소가 하나도 없었으며, 그저 자연이, 가족 가운데 고인이 된 분에게 추모 인사를 드리는 정도의 일시적인 유사성만이 존재했다. 그러나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고  우리 몸이 어떤 놀라움도 약속하지 않는 부동성 속에 고정되는 순간은 너무도 빨리 오는 법이어서 그때 가면 한여름에도 벌써 죽은 잎이 보이는 나무들처럼 아직은 젊은 얼굴 둘레에 머리칼이 빠지고 희끗해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모든 희망을 상실한다. 이 찬란한 아침은 그토록 짧기에 우리는 소중한 밀가루 반죽마냥 아직 만들어지는 중인 살갗을 가진 어린 소녀들만을 특히 사랑한다. 소녀들은 매 순간 그녀들을 지배하는 일시적인 인상들로 응고된 유연한 물질의 물결에 지나지 않는다. 소녀들 저마다가 차례차례로 솔직하고 완벽하며 그러나 덧없는 표현으로 주조되어 쾌활함과 진지한 젊음, 응석과 놀람을 담고 있는 작은 조각상인 듯하다. 그러나 가소성(可塑性) 덕분에 우리는 한 소녀가 보여 주는 상냥한 배려에 다양한 모습과 매력을 느낀다. 물론 이런 상냥함은 성숙한 여인들에게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그 여인들은 우리 마음에 들지 않으며, 또는 우리가 마음에 든다는 것을 내색하지 않아 뭔가 따분하게도 획일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상냥함 자체도 일정한 나이에 이르면 더 이상 얼굴에 유연한 변화를 가져다주지 못하여, 생존경쟁이 영원히 투사의 얼굴 또는 종교적 황홀에 사로잡힌 얼굴로 만들고 굳어지게 한다. 어떤 얼굴은 ㅡ 남편이 아내를 복종하게 하는 그 지속적인 지배력 탓에 ㅡ 여성의 얼굴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병사의 얼굴로 보이며, 어떤 얼굴은 어머니가 자식들 때문에 날마다 견디어 온 희생이 새겨져 사도(使徒)의 얼굴로 보인다. 또 어떤 얼굴은 수년간의 항해와 폭풍우가 늙은 뱃사공을 연상시켜 단지 복장에서만 여성이란 성별이 드러난다. 물론 우리에 대한 한 여인의 관심은 우리가 그 여인을 사랑할 때면 그녀 곁에서 보내는 시간들에 새로운 매력의 씨앗을 뿌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는 우리에게 연달아 다른 여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쾌활하든 쾌활하지 않든 여인의 겉모습은 항상 똑같다. 그러나 청소년기는 완전한 응고가 진행되기 전이라, 소녀들 곁에 있을 때면 그 불안정한 대립 속에 끊임없이 변화하고 유희하는 형태가 주는 광경에 상쾌함을 느끼게 되고, 이 대립은 우리가 바다 앞에서 관조하듯, 자연의 기본 원소들이 끊임없이 재창조되는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434∼436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2> 중에서

 

(나의 생각)

 

프루스트가 여느 과학자 못지 않은 날카로운 관찰력을 지녔다는 점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유년기의 최대 매력'에 대해서는 앙리 베르그송이 지적한 다음의 구절들을 함께 살펴볼 만하다.

 

그러나 분열의 진정한 심층적 원인은 생명이 자신 안에 보유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생명은 경향이며 경향의 본질은 다발의 형태로 발달하는 것인데, 생명은 단지 커진다는 사실로 인해 자신의 약동을 공유한 채로 갈라지는 방향들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관찰할 때 성격이라는 특수한 경향의 전개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역사를 잠시 돌아보기만 해도 어린 시절의 인격이 비록 불가분적이지만 다양한 인물들을 그 안에 결합하고 있었음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그것들은 발생 상태에 있음으로 해서 전체가 혼합되어 있을 수 있었다. 이러한 약속으로 충만한 불확실성이야말로 유년기의 최대 매력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상호침투하는 인격들은 성장하면서 양립 불가능하게 되고 우리 각자는 하나의 삶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선택을 해야 한다. 사실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하고 있으며 또한 끊임없이 많은 것을 버리고 있다. 우리가 시간 속에서 거쳐가는 길은 우리 자신이 처음에 그러했던 상태, 또 될 수 있었음에 틀림없는 상태들 전체의 잔해들로 덮여 있다. 그러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삶을 가지고 있는 자연은 결코 그러한 희생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 자연은 성장하면서 분기된 다양한 경향들을 보존하고 있다. 그것은 따로따로 진화하는 종들의 분기하는 계열들을 그 경향들과 함께 창조한다.(161∼162쪽)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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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방문해야 할 곳은 일리에 콩브레가 아닐 것이다. 프루스트에게 바치는 진정한 경의는 그의 눈으로 우리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지, 우리의 눈으로 그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아닐 테니까.

 - 알랭 드 보통,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중에서

 

 * * *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다 보면 자칫 '길'을 잃기 쉽다. 우리의 의식이 끊임없이 불쑥불쑥 끼어드는 '딴 생각' 때문에 옆길로 새듯이, 꼭 그처럼 프루스트의 소설에서도 이런 불규칙한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듯한 묘사가 끊임없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떤 인물이나 풍경 혹은 장소에 대한 묘사를 할 때도 그렇고, 불현듯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을 둘러싼 이야기를 전개할 때도 방식은 마찬가지다.

 

화자의 눈 앞에 놓인 '어떤 장면'을 이야기하다가도 그것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이야기가 불쑥 작가의 의식에 떠오르면 그에 대한 생각을 죄다 쏟아붓고 난 다음에 또다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는 식이다. 그러니 프루스트가 그려내는 '의식의 미로'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정확하게 따라가지 않으면 독자들은 순식간에 길을 잃고 만다. 우리의 의식이 눈 앞의 현실을 좇다가도 순식간에 머나먼 과거의 어떤 특정한 시공간으로 재빠르게 이동하듯이, 프루스트의 의식도 우리와 똑같다. 다만 그의 머릿속에 담긴 기억들이 우리와 현저히 다를 뿐이다.

 

그의 머리 속에는 수많은 화가의 그림들과 음악가의 작품들과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들이 빼곡히 차지하고 있다. 그는 그림들을 아주 좋아했고, 음악과 독서 또한 그의 삶의 중요한 일부분이었다. 그는 프랑스 사교계를 자주 드나든 덕분에 수많은 귀족 계급과 브루주아 계급의 유명 인사들을 알고 있었다.(소설 속에서 귀족 계급을 상징하는 인물이 게르망트 공작과 공작 부인이었고, 브루주아를 대표하는 인물이 스완과 스완 부인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화자는 결국 작가의 자화상이다. 그래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자서전적 소설로도 읽힌다. 작품 속 주인공인 화자는 숱한 그림들과 음악과 문학 작품들과 사람들을 만나면서 결국 작가로서의 자신의 미래를 끊임없이 모색한다. 그가 작품 속에 끝없이 펼쳐 놓은 문장들은 화자의 의식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작가가 자신의 문학적 역량을 드러내는 작가 노트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작가가 진정한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치고 덧보태고 가다듬은 문장들이 결국 그 자체로 소설이 되었다고나 할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동안에 독자들이 체험하는 고통은 주로 두 가지에 연유하는 듯하다. 하나는 프루스트가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생각이 때때로 너무나 고차방정식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그가 전달하려는 생각의 구조와 그 구조물 속에 담긴 내용물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움켜쥐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이런 측면은 절대로 프루스트가 고의적으로 의도한 게 아니다. 실상은 독자들이 작가의 의식 속으로 정확하게 침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프루스트가 일부러 안개처럼 희뿌연 공간 속으로 독자들을 데리고 갈 때도 없지는 않지만 그럴 땐 도리어 독자들이 아주 쉽게 작가의 의식을 따라잡을 때가 많다.

 

독자들이 훨씬 더 자주 고통을 느끼는 때는 끝없는 미세회로 같은 '프루스트의 길'을 따라가다가 재빨리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오지 못하고 방황할 때이다. 이런 경험은 꼭 프루스트의 책을 읽을 때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작가들의 책을 읽을 때에도 그런 경험은 있기 마련이다. 가령,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나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과 같은 작품을 읽을 때 우리는 '자주' 길을 잃고 방황한다.(굳이 이런 책들의 예시 목록으로 난해하기 짝이 없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까지 언급할 필요까지는 없으리라 여겨진다.)

 

작가의 의식 속에 그려놓은 지도는 너무나 선명해서 수십 배 혹은 수백 배를 확대해 보더라도 계단처럼 울퉁불퉁한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끈하지만, 그 작품을 읽는 독자들의 의식은 작가의 의식 속에 그려진 지도가 매번 흐릿하거나 애매모호하게 그려진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은 작가가 그려놓은 고화질의 선명한 지도만을 믿고 무턱대로 따라가다가, 불현듯 작가와 차츰 동떨어져 나홀로 걷기 시작한 지점을 발견하며, 작가와의 뜻하지 않은 결별이 과연 어디서부터였는지를 되찾기 시작하고, 어렵사리 그 지점을 다시 찾는 순간 비로소 안도하며,  멈춰세웠던 작가를 다시 앞장세우며 가던 길을 계속 걷게 된다.

 

<총7편/13권>으로 구성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는 <1부 스완 부인의 주변>과 <2부 고장의 이름 ㅡ 고장>으로 이뤄져 있는데, 1부에서는 첫사랑 질베르트와의 사랑을 다루고, 2부에서는 두 번째 사랑인 알베르틴과의 사랑을 다룬다. 질베르트와의 첫사랑이 그 사랑을 경험하는 화자와 질베르트의 나이에 딱 어울릴 정도로 철없고 순수하면서도 막연하고 가슴 아픈 느낌을 주는 데 비해, 알베르틴과의 두 번째 사랑은 첫사랑에서의 실패를 겪은 탓인지 화자가 탐색하고 찾고자 애쓰는 대상(소녀)에 대한 극도로 세심한 관찰과 신중한 접근이 뚜렷한 특징을 이룬다. 화자는 마치 박물학자나 곤충학자와 같은 모습을 띤다.

 

화자가 알베르틴을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은 550쪽에 달하는 <2부 고장의 이름 ㅡ 고장>(제4권)에서도 250쪽에 가서야 겨우 등장한다. 나는 <제4권>을 읽는 동안 알베르틴이 과연 언제쯤이나 등장할까 궁금해서 가끔씩 조바심을 낼 정도였는데, 무려 250쪽에 와서야 비로소 그녀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쨌든 그녀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생루는 동시에르에 돌아가야 했다. …… 나는 어떤 특별한 사랑도 하지 않은 채 텅 빈 상태로 사방에서 ㅡ 마치 사랑에 빠진 연인이 자신이 반한 대상을 찾아 나서듯이 ㅡ '아름다움'을 욕망하고 찾고 만나는 그런 젊음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 (250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중에서

 

이렇게 밑자락을 깔고 나서도 프루스트는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가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게 프루스트의 생각이 한참이나 옆길로 새다가 겨우 다시 제자리에 돌아오면 비로소 좀 더 구체적인 묘사가 이어진다.

 

나는 그저 혼자서 그랜드 호텔 앞을 서성이며 할머니를 보러 갈 시간만을 기다렸는데, 그때 방파제 거의 끝 쪽에서 특이한 얼룩 하나가 움직이는 듯, 그 모습이나 행동이 발베크에서 늘 보아 오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대여섯 소녀들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마치 어딘지 모를 곳에서 날아든 한 무리 갈매기 떼가 해변에서 서로 보조를 맞추며 ㅡ 뒤처진 새들이 날개를 파닥거리며 다른 새들을 쫓아가면서 ㅡ 산책하는 것 같았는데, 그 산책 목적도 새의 정령인 소녀들에게는 분명했겠지만, 그녀들이 쳐다보지도 않는 듯 보이는 해수욕객들에게는 모호하게만 느껴졌다.

 

이 낯선 소녀들 가운데 한 소녀는 손으로 자전거를 앞으로 밀고, 또 다른 두 명은 골프 '클럽'을 들고 있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옷차림은 발베크의 다른 소녀들과 뚜렷이 구별되었는데, 물론 발베크 소녀들 가운데서도 스포츠에 빠진 이들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때문에 특별한 옷차림을 하지는 않았다.(251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중에서

 

이 소녀들이 비로소 화자의 눈앞에 좀 더 뚜렷하게 다가오기 까지는 얼마나 더 걸릴까. 여기서 얼마란 시간을 말하는 게 아니라 작품 속 프루스트의 문장의 길이를 말하는 것이다.

 

이내 소녀들이 나와 멀지 않은 곳까지 다가왔다. 소녀들은 제각기 완전히 다른 유형이었지만, 하나같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아주 조금 전부터야 바라보았을 뿐인 데다,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으므로, 그때까지 나는 소녀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개별화하지 못했다.(253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중에서 

 

여기서 프루스트는 다시 무리지어 움직이는 소녀들의 모습을 무려 다섯 쪽이나 더 할애하여 충분히 길게 설명한 다음 비로소 화자인 내가 '그 소녀'와 '눈길'을 마주치는 장면을 묘사한다.

 

자전거를 밀던 그 뺨이 통통한 갈색 피부 소녀 옆을 지나다가 나는 한순간 그녀의 웃음기 머금은 곁눈질과 마주쳤는데, 그것은 이 작은 부족의 삶을 가둔 비인간적인 세계,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관념 따위는 들어갈 자리가 없는 접근 불가능한 미지의 세계에서 온 시선이었다.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에 정신이 팔린 채로 이마까지 낮게 폴로 모자를 눌러쓴 그 소녀는, 자기 눈에서 발산된 검은 광선이 나와 마주쳤던 스 순간에 과연 나를 보기나 했을까? 만일 보았다면, 난 그녀에게 어떤 사람으로 비쳤을까? 그녀는 어떤 우주의 내부로부터 나를 구별했을까? 내게는 이를 말하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었는데, 마치 망원경 덕분에 이웃하는 별자리의 몇몇 특징적인 요소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그 별자리에 인간이 살며 그 인간들이 우리를 보고, 이런 전망이 그들 마음속에 어떤 관념을 일으킨다고 결론짓는 일만큼이나 어려웠다.

 

만일 우리가 이런저런 소녀의 눈빛이 동그랗게 반짝이는 운모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구태여 그녀 삶에 대해 알려 하거나 그 삶을 우리와 연관 지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반짝이는 원반형 물체에서 발산되는 빛이, 단지 원반의 물질적 구성에만 달린 게 아니라, 우리는 모르지만 빛을 발하는 그 존재는 아는 사람들이나 장소들에 관해 ㅡ 내게는 페르시아 낙원의 요정들보다 더 매혹적인 그 작은 요정이 페달을 밟으며 들과 숲을 지나 나를 끌고 갔을 지도 모르는 경마장 잔디밭이나 오솔길 모래밭과 같은 ㅡ 간직하고 있는 관념의 검은 그림자들이며, 또한 그녀가 곧 돌아가려는 집의 그림자이며, 그녀가 구상하거나 누군가가 그녀를 위해 이미 구상해 놓은 계획들의 그림자이며, 특히 그녀의 욕망이나 호감과 혐오감 그리고 막연하지만 부단한 의지임을 느낀다. 자전거 타는 소녀의 두 눈에 담긴 것을 소유하지 않고는 그녀 역시 소유할 수 없음을 나는 깨달았다. 따라서 그녀 삶 전체가 내게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실현될 수 없다고 느껴졌기에 고통스러운 욕망이었으며, 그러나 이제껏 내 삶이었던 것이 돌연 내 삶이기를 그치고 내가 채워주기를 열망하는, 내 앞에 펼쳐진 작은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껴졌기에 황홀한 욕망이었다. 또 소녀들의 삶으로 이루어진 욕망은 자아의 연장이자 자아의 증식을 가능하게 하는 바로 그 행복이란 걸 내게 주었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 사이에 어떤 공통된 습관도 ㅡ 어떤 공통된 관념도 ㅡ 없다는 점이 내가 그녀들과 사귀고 그녀들 마음에 들게 하는 걸 더욱 어렵게 만들지도 몰랐다. 그러나 어쩌면 또한 이런 차이에 대한 인식과 내가 알고 있거나 소유하는 요소들 중 단 하나도 소녀들의 성격이나 행동을 구성하는 데 들어 있지 않다는 인식 덕분에 내 마음속에는 포만감에 이어 삶에 대한 심한 갈증이 일었는데, ㅡ 마치 메마른 땅이 애타게 물을 기다리듯 ㅡ 이제껏 내 영혼은 이 목마름을 채워 줄 한 방울의 물도 받아 본 적이 없었던 만큼 더욱더 탐욕스럽게 천천히 음미하면서 완전히 그 물을 빨아들이게 될 것이었다.(259∼260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중에서

 

이렇게 짧은 눈길을 서로 마주친 알베르틴과 화자는 여기서 또 '얼마나' 더 지나고 나서야 서로 통성명을 하고 인사를 나누게 될까.(여기서 '얼마나'라고 표현한 건 매번 문장의 길이를 가리킨다는 점을 주목하라.) 조금 뒤에서 결국 확인하게 되겠지만, 화자와 알베르틴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여기서부터 무려 120쪽이나(!) 떨어져 있다. 그 사이에 다른 특별한 얘기가 많이 끼어들어서 그렇다고? 절대로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화자는 끊임없이 '그 소녀들'의 무리를 생각하고, 또 가끔은 아슬아슬하게 비켜가기도 한다. 다음 장면처럼.

 

해가 지고 있었다. 돌아가야 했다. 엘스티르를 별장 쪽으로 끌고 갔을 때, 난 갑자기 파우스트 앞에 나타난 메피스토펠레스처럼 길 끝에서 ㅡ 나처럼 연약하거나 고통스러운 감수성과 지성이 과도한 자에게는 없는, 나의 기질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거의 야만적이고 잔인한 생명력이 단지 비현실적이고 악마적인 표현으로 객관화되었다는 듯이 ㅡ 다른 어떤 것과도 혼동할 수 없는 정수(精髓)의 몇 방울 얼룩이, 자포동물 소녀들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별들이 몇 개 나타났다. 그녀들은 나를 보지 못한 기색이었지만, 아마도 나에 대해 냉소적인 판단을 할 게 틀림없었다. 그녀들과 우리 사이의 만남이 불가피하다고 느끼면서, 또 엘스티르가 나를 부르리라고 예상하면서, 난 마치 파도를 받아 넘기려는 해수욕객처럼 등을 돌렸다. 나는 갑자기 길을 멈추고는, 나의 저명한 동반자가 계속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고 뒤에 쳐져서는, 그 순간 우리가 지나가던 골동품 가게 진열창에 갑자기 흥미를 느끼기라도 한 듯 몸을 기울였다. 소녀들에게 내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척해 보이는 게 불쾌하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엘스티르가 날 소개하기 위해 부를 때, 놀란 것이 아니라 짐짓 놀라는 척해 보이고 싶은 욕망에서 일종의 묻는 듯한 눈길로, ㅡ 이 경우 우리는 각자 서툰 배우이며 또는 상대방이 훌륭한 관상학자이기에 ㅡ 또 손가락으로는 내 가슴을 가리키며 "당신이 부른 사람이 바로 난가요?" 라고 물으면서, 알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소개되느라 옛 도자기 감상을 방해받았다는 듯 짜증이 묻어나는 걸 냉정하게 감추고는, 복종과 온순함으로 머리를 굽히고 재빨리 달려가리라는 걸 나는 이미 막연하게 알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진열창을 주시하면서 엘스티르가 소리 높여 부르는 내 이름이 마치 우리가 기다리는, 별로 위험하지 않은 공처럼 날 때릴 순간을 기다렸다. 소녀들을 소개받는다는 확실성이 그 결과로서 소녀들에 대한 무관심을 가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런 감정을 느끼게 했다. 그녀들을 알게 되는 기쁨을 피할 수 없게 된 지금 그 기쁨은 압축되고 축소되어, 생루와 이야기하거나 할머니와 저녁 식사를 하거나, 근교에서 즐기는 소풍의 기쁨보다 더 하찮게 생각되었고, 틀림없이 역사 기념물 같은 것엔 관심도 없을 그녀들과의 친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소풍도 소홀히 해서 후회를 하게 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내가 맛보게 될 기쁨을 작아지게 한 것은 실현이 임박하다는 점뿐만 아니라, 그 비일관성이었다. 정수역학(靜水力學)의 법칙과도 같은 정확한 법칙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우리가 형성하는 이미지를 쌓아 올리다가 사건이 임박해지면 그 순서를 전복시킨다고 한다. 엘스티르가 나를 부르려고 했다. 소녀들을 알게 되는 장면을 해변이나 내 방에서 몇 번 상상해 본 적은 있지만 이런 방식은 전혀 아니었다. 지금 일어나려고 하는 것은 내가 전혀 대비하지 못한 다른 사건이었다. 나는 내 욕망도 목적도 알아보지 못했다. 엘스티르와 외출한 게 거의 후회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전에 내가 느낄 거라고 믿었던 기쁨이 줄어든 것은 이제는 그 무엇도 내게서 그 기쁨을 빼앗지 못하리라는 확실성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기쁨이 이런 확실성의 압박에서 벗어나 탄력적인 힘 덕분에 본래 높이를 되찾은 것은, 내가 고개를 돌리려고 결심한 순간,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소녀들과 함께 멈춰 서 있는 엘스티르가 작별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엘스티르 옆에 가장 가까이 있던 소녀의 얼굴은 통통하고 눈빛이 반짝거려, 조금이라도 하늘이 보이게 틈을 남겨 둔 케이크같았다. 그녀의 눈은 고정되어 있어도 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주어 마치 강풍이 부는 날, 대기가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무척 빠르게 창공을 지나가는 모습을 인지할 때와도 같았다. 한순간 그녀의 눈길이 내 눈길과 마주쳤는데, 흡사 폭풍우가 치는 날, 조금은 느리게 흘러가는 구름에 다가가 구름을 만지고 앞지르는 하늘의 나그네들인 듯했다. 하지만 나그네들은 서로를 알지 못한 채 멀리 날아가는 법. 이처럼 우리 눈길도 한순간 마주쳤지만, 작자 자기 앞에 있는 천상의 대륙이 미래에 대해 어떤 약속과 위협을 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의 눈길이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서 정확히 내 눈길에 들어온 순간, 구름이 가볍게 그녀의 눈길을 가렸다. 이처럼 맑은 밤, 바람이 실어 온 달은 구름 밑을 지나 잠시 그 빛을 가리다가 빠르게 다시 나타났다. 하지만 엘스티르는 나를 부르지도 않은 채, 이미 소녀들 옆을 떠났다. 소녀들은 지름길로 들어섰고, 그는 내게로 왔다. 모든 게 어긋났다.(354∼356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중에서 

 

(나의 생각)

 

참으로 아름다운 문장들이다. '하늘이 보이게 틈을 남겨 둔 케이크 같았다'는 표현이나 '구름을 만지고 앞지르는 하늘의 나그네들'은 얼마나 시적인가! '공처럼 날 때릴 순간을 기다렸다'는 표현은 얼마나 멋지고 재치있는가! '그녀의 눈길이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서 정확히 내 눈길에 들어온 순간, 구름이 가볍게 그녀의 눈길을 가렸다.'라는 표현은 마치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싯구절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든다.

 

소녀들을 소개받을 절호의 기회를 바로 코 앞에서 놓쳐버린 화자는 여기서부터 5쪽 뒤에서 이렇게 불평한다. "그 소녀들을 소개받았더라면 정말 좋았을 텐데요." 그런 화자의 말에 엘스티르는 다음과 같이 대꾸한다. "그럼, 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었나?" 결국 '결정적 순간'을 앞에 두고 짐짓 딴청을 부린 화자나, 그런 화자의 꿍꿍이를 훤히 꿰고 있었던 엘스티르나 헛탕을 치는 데 서로 일조한 건 매한가지였던 셈이다.

 

아무튼, 유명한 화가이자 '그 소녀들'을 잘 아는 엘스티르는 화자의 간청을 받고 '작은 낮 모임'을 주선해 준다. 엘스티르의 집에서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 만났을까? 여기서도 독자들은 '한없이 느리게만 흘러가는 어떤 정경들'을 참을성 있게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프루스트는 어쨌든 최대한으로 먼 길을 돌아가게 만드는 데 특별한 재주를 지닌 인물임을 우리가 한시라도 잊으면 안 된다.

 

엘스티르가 조금 멀리 앉아 있는 알베르틴에게 날 소개하려고 오라고 했을 때, 나는 커피 에클레르를 먹고 난 후였고, 방금 소개받은 노신사가 단춧구멍에 꽂은 장미꽃을 칭찬해주었으므로 그분에게 꽃을 드려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또 노신사의 이야기가 흥미로워 노르망디의 몇몇 장날에 대해 더 자세히 얘기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다음에 소개받은 사람이 내게 기쁨을 주지 않았다거나, 내 눈에 중요하게 보이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물론 이 기쁨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호텔에 돌아와 혼자가 되었을 때, 다시 나 자신으로 돌아왔을 때에야 비로소 실감했다. 이런 점에서 기쁨은 사진과 흡사하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찍은 사진은 음화(陰畵)에 지나지 않아,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출입이 '금지되었던' 그 내면의 암실을 나중에 우리가 집에 돌아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을 때라야 현상할 수 있다.

 

이처럼 기쁨의 인식이 내게서 몇 시간 지체되었다면, 이 소개의 중요성은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소개받는 순간, 우리는 몇 주 전부터 탐색해 온 미래의 기쁨에 대해 유효한 '통행증'을 갑자기 얻었다고 느끼지만 실은 부질없는 일이다. 이런 통행증의 취득은 우리의 고통스러운 탐색에 종지부를 찍게 하는 동시에 ㅡ 우리를기쁨으로 채워줄 수 있는 ㅡ 우리 상상력으로 변형된 존재, 결코 알 수 없다는 불안한 두려움으로 확대된 그런 존재의 실존에도 종지부를 찍는다. 소개하는 사람 입에서 우리 이름이 울리는 순간, 특히 엘스티르가 지금 하듯이 칭찬으로 그 이름을 에워쌀 때는 ㅡ 마치 요정 이야기에서 요정이 누군가에게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라고 명령할 떄와 흡사한 이런 성사 의식의 순간에는 ㅡ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기를 열망하던 존재는 사라져 버린다. 우선 어떻게 그녀가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ㅡ 미지의 여인이 우리 이름을 듣고 우리라는 인간을 보면서 나타내야 하는 관심으로 ㅡ 우리가 찾고 있는 의식적인 시선이나 알 수 없는 상념이 어제만 해도 무한한 곳에 위치했던 눈길 속에서(방황하는 다양한 우리 시선이 초점을 잘못 맞추어 영원히 만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며 절망하는 눈길에서) 기적적으로 단지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바뀌어 마치 환하게 웃는 거울에서처럼 그 눈길 속에 그려졌는데? …… (379∼381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중에서

 

화자의 두 번째 사랑인 알베르틴은 <제2편 꽃핀 처녀들의 그늘에서>에서도 무려 250쪽이나 지나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지만, 이처럼 한없이 더디게만 다가설 수 있다. 어쨌든 그녀의 존재는 <제5편 갇힌 여인>과 <제6편 사라진 알베르틴>에서 끊임없이 환기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러나 이런 알베르틴에 대한 사랑은 콩브레의 산사나무 아래서 질베르트에게 첫눈에 반했던 사랑과는 달리 산호초와도 같은 미분화된 그룹에서 개별화로 넘어가는 긴 결정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스탕달에 따르면 평범한 한 존재가 상상적인 것의 조명을 받으며 예외적인 특별한 존재로 변모하기 위해서는 어떤 우연이, 즉 사랑하는 대상의 부재나 결핍이 필요하다. 이처럼 알베르틴에 대한 화자의 사랑도 두 번의 실패를 통해 공고해진다.(542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작품 해설> 중에서 

 

알베르틴에 대한 화자의 사랑이 어떤 실패와 고통을 겪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수많은 문장들의 밀림을 헤쳐나가야 될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1,000쪽 내지는 2,000쪽 정도쯤? 그러니 그런 얘기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차츰 살펴보기로 하고, 역자의 친절한 작품 해설을 통해 훨씬 더 빠른 지름길로 빠져나가 보자.

 

프루스트에게는 이런 연인의 거부가 "그 사람을 소유하려는 고통스럽고도 미친 욕망"으로 대체되면서 사랑의 조건이 성립되고, 그리하여 사랑의 대상은 더 이상 쾌락의 대상이 아닌 탐색과 고통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욕망과 동일시하거나, 대상도 목적도 없는 탐색과 동일시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을 대신하며, 사랑의 효과라고 할 수 있는 질투에 의해 현존한다.

 

이처럼 프루스트적인 사랑이 '대상 없는 탐색' 또는 주제의 내면에서 야기되는 거대한 '질투'의 울림으로 정의된다면, 그것은 레비나스의 말처럼 프루스트의 사랑이 결코 합일을 이룰 수 없는 타자의 이타성을 체험하는 질투와 고통의 담론임을 말해 준다. 타자의 세계는 나 없이 생겨난 것이며 그러나 이 배제됨이 내 사랑을 존속시킨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로부터 계속 빠져나갈 때에만, 그리하여 그의 부재나 결핍이 계속해서 나에게 상처를 주는 한에서만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으며, 따라서 완전한 소유는 사랑의 소멸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사랑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인간은 사랑과 고통을 통해서만 무지에서 성숙으로, 오인에서 진실로 나아갈 수 있으며 『갇힌 여인』과 『사라진 알베르틴』의 그 긴 고통의 시간을 거친 후에야 화자는 드디어 글쓰기를 통한 삶의 가능성이라는 인식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술을 통해서만 존재의 해체와 소멸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불충실과 망각을 보충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쾌락의 직접적인 추구가 아닌 상상의 매개에 의해 타자와의 합일이라는 그 불가능한 꿈에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543∼544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작품 해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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