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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결국 아버님과 영원히 이별하는 순간이 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또 그 고통스런 순간들은 누구나 한번은 이미 겪었거나 혹은 앞으로 꼭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제발 그 순간이 눈 앞의 현실로 다가오지 않기를 마음 속으로 얼마나 간절히 빌어왔는지 아버님은 혹 아시는지요?

금년 3월 하순쯤 분당 서울대병원에서 '더 이상의 치료는 환자에게 고통일 뿐'이라는 얘기를 듣고 난 이후에는, 아버님을 찾아 뵈러 영월로 오가는 도로 위에서도 가끔씩, 아버님께서 건강하셨을 때 저희와 함께 했던 꿈결같은 시간들이 자꾸만 떠올라 남몰래 눈물을 흘린 적도 많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점점 더 깊어만 가는 병마에 맞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계신 아버님을 위해 저희 형제들이 해드릴 수 있는 일이라고는 거의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 저희들을 얼마나 안타깝게 만들었는지 아버님은 혹 아셨는지요?

그저 아버님께서 운명하시기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러하셨던 것처럼, 병마 앞에서 조금도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늘 식사도 잘 드시기를 바랬고, 그렇게 올해 여름과 가을, 더 나아가 올해 겨울까지도 또 무사히 넘겨서, 또다시 만물이 생동하는 내년의 새 봄을 다시 맞을 수 있기만을 그저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는 것 말고는 저희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마침 5월 초순에 중간고사를 끝낸 제 아이들까지 데리고 영월로 내려가 아버님을 찾아 뵈었을 때만 하더라도, 아버님은 병상에서 몸을 일으켜 반갑게 손자와 손녀의 손도 잡아 주셨고, 이름도 불러주실만큼 괜찮은 모습이셨습니다. 식사는 물론이고 어머님께서 건네드리는 과일도 여느 건강한 사람 못지않게 얼마나 잘 드셨습니까? 그래서 유난히 휴일이 잦았던 5월 초순을 틈내어, 멀리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로 제가 여행을 떠날 때까지만 하더라도, 아버님께서 혹여라도 이달 중에 위독한 상황을 맞게 될 지 모르겠다는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아버님께서 지난 5월 15일 일요일 낮부터 갑자기 병세가 좋지 않다는 어머님의 연락을 받고, 급히 영월로 달려가 보니 아버님은 어느새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의식이 혼미한 비통한 모습이셨습니다.

병원 응급실 당직의사의 소견으로는 아버님께서 폐 기능 저하로 매우 위독한 상태이며, 이런 상태로는 '하루 이틀이 될지 혹은 일주일을 넘길 수 있을 지 예단하기 힘든 상태'라는 절망스런 얘기 뿐이었습니다. 아버님께서 그동안 치료받아 오셨던 분당 서울대병원으로 모시기에는 상태가 너무 위중하며, 그나마 가까운 원주에 있는 큰 병원으로 모시는 게 최선이라는 말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상태로 아버님을 구급차에 모시고 가슴을 졸이며 원주로 이동하여 곧바로 중환자실로 모셨으나, 이미 맥박과 체내 산소수치와 혈압 등 거의 모든 수치가 자꾸만 악화되면서 조금도 회복할 기미가 없었으며, 일요일 자정 쯤에는 중환자실 간호사로부터 '돌아가시게 되면 아버님을 어디로 모실지 미리 정하는 게 좋겠다'는 비통한 얘기를 듣고는 아버님을 떠나 보내드릴 순간이 이제 정말 바로 앞에 닥쳐 왔음을 절감하였습니다.

월요일 새벽 5시쯤에 모든 가족들에게 한 차례 더 면회가 허용되었지만 정오를 넘기기 힘들 거라는 얘기만 들었고, 아버님한테 가장 가까운 혈육인 고모님들께 급히 연락을 드리고 나서 빈소를 어디로 정할 것인지 알아보는 동안, 시간은 어느새 아침 열시를 지나고 있었고, 잠시 뒤 중환자실의 다급한 연락을 받고 모두가 달려가 보니, 아버님께서는 조용히 임종을 앞두고 계셨고 끝내 평안하고도 고요하게 숨을 거두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버님! 아버님께서는 어찌 이토록 화창한 봄날에 그토록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그렇게 서둘러 조용히 저희들 곁을 떠나가신단 말씀입니까? 의식조차 없을만큼 위독한 상태로 하룻만에 운명하셨으면서도 저희가 눈을 감겨 드릴 땐 왜 그리 아버님의 눈가에 눈물이 많으셨던가요? 누구보다 가장 마음이 아프셨을 어머님의 비통한 울음과 저희 형제들이 통곡하는 소리라도 들으셨던 건가요? 임종이 가까워 오면서 아버님의 손과 발은 이미 서늘해 졌지만, 끝내 심장의 박동을 멈춘 이후에도 아버님의 가슴은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어서 제 가슴이 더욱 찢어지고 목놓아 통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평생 동안 그토록 열심히 일하며 사셨고, 3년 전 담낭암 수술 이후로 내내 건강하시다가, 작년 늦가을에 간 조직에 나쁜 병이 재발한 이후에도 힘든 항암치료를 놀랄만큼 거뜬히 잘 참아 내시며 여태껏 잘 견뎌 오셨는데, 어찌 이렇게 빨리 저희 곁을 떠나신다는 말입니까? 혹여나 그동안 아버님의 병간호를 하느라 많이 쇠약해지신 어머님을 걱정하시고 또 저희 자식들이 조금이라도 힘에 겨워 할까봐 이렇게 빨리 가셨단 말입니까?

하룻밤 사이에 아버님을 잃은 건 어머님께는 물론이고 저희 형제들에게도 실로 감당하기 힘든 충격과 슬픔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인들 낳아 주시고 키워 주신 아버님을 잃은 슬픔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싶지만, 막상 핏줄이 끊어지는 아픔이라는 게 이토록 가슴 아프고 하늘이 무너지는 일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살아 생전에 어머님과 우리 육형제들에게 유난히 큰 산과도 같이 한없이 든든한 분이셨고, 아버님은 특히 6남매중 외동아들로 태어나셨기 때문에 할머니로부터 끔찍한 사랑을 받았다고 들었으며, 아버님의 누이동생들인 저희 고모님들에게도 남달리 소중한 오라버님이셨고, 고종사촌들에게 인기가 참 많은 남다른 '외삼촌'이셨습니다. 그래서 아버님께서 돌아가시던 날 새벽부터 맨먼저 멀리서 한걸음에 달려오신 분들도 세 분의 고모님들이셨고, 고종사촌들도 부음을 듣고는 모두가 바쁜 일들을 다 제쳐두고 달려와서 눈물을 쏟아내며 울음을 그칠 줄 몰랐습니다. 그리고 여러 고종사촌들이 아버님의 빈소가 마련된 첫 날 부터 장례를 마친 이후 초우제까지도 내내 함께 하면서 마치 아버님의 친자식들처럼 아버님을 모셨습니다.

이제야 둘러 보니, 아버님을 잃은 커다란 충격 속에서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이튿날 입관식을 거쳐 삼일 만에 아산병원 장례식장을 떠나, 노제를 지내기 위해 아버님께서 3년 동안 사셨던 영월 연당리를 거쳐, 경북 영양의 감천 고향 땅에 아버님을 모시고 난 뒤에, 한동안 그저 멍한 상태로 먼 산만 쳐다보며 아무런 생각도 없이 다시 하루하루의 일상 속으로 되돌아온 지도 어느새 벌써 2주째에 접어듭니다.

평소에 신문 등을 읽다가 가끔식 고인이 된 분들을 위하여 쓴 '추모의 글'은 몇 번 읽어 봤으나, 막상 아버님을 잃은 제가 아버님에 대한 추모의 글이라도 써보려고 하니 왜 이리 좀처럼 글이 써지지를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라도 힘을 내서 아버님을 잃은 크나큰 슬픔이 흐르는 시간 속에 혹여 조금이라도 더 약해지기 전에, 자식으로서 아버님의 삶을 다시금 되돌아보고 또 아버님에 대한 추억도 새삼 떠올려 보고 싶어 이렇게 힘겹게 글을 써내려 갑니다.

아버님께서는 입향시조(入鄕始祖)로부터 거의 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조상 대대로 집성촌(集姓村)을 이루며 살아온 시골 고향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고향에 묻혀 계신 수많은 선조님들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논과 밭을 터전으로 삼아 흙을 일구며 살아오신 이 땅의 전형적인 농부 가운데 한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지난 7,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산업화와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또 교육열이 가세함에 따라, 저희 6형제 가운데 위로 3형제가 모두 대학에 진학하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자식들 셋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느라 자취와 하숙생활을 하게 되자, 아버님께서는 고향의 논과 밭, 심지어는 아버님께서 손수 지으신 고향의 집 마저도 과감하게 처분하시고, 1984년에 고향을 떠나 자식 교육과 뒷바라지를 위해 서울로 상경을 하시는 결단을 하셨습니다.

1937년에 태어나신 아버님께서 오십이 가깝도록 오로지 농사만 지으시다가 그런 큰 결심을 하신 건, 농사만 지어서는 6형제를 제대로 뒷바라지 하기가 힘들 것이라는 교육적인 이유가 가장 컸겠지만, 낯선 서울에서도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자식들을 키워낼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저희들의 안태고향인 경북 영양의 감천이라는 곳이 워낙 오지에 가까운 산골 농촌마을이어서,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로는 자연스레 도시의 고교로 진학하게 되면서 저희 형제들은 안동과 대구 등지에서 자취생활을 하게 되었고, 또다시 대학에 진학하면서 서울로 올라와 자취와 하숙생활을 번갈아 했던 저희들로서는, 우리집이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되니 실로 여러 해 만에 어머님께서 손수 해주시는 따뜻한 밥이 너무나 좋았고, 부모님은 물론 고향에 떨어져 살았던 여러 동생들과도 한 지붕 아래 다시 모여 살게 되어 정말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아버님께서는 힘든 농사일에서 벗어나는 것도 잠시 뿐, 서울로 올라오시면서 아버님의 어깨는 한층 더 무거워졌음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시골에서의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거의 다 처분해서 서울로 올라왔지만 변변한 집 한채 마련할 형편에도 미치지 못하였기에, 전세보증금을 주고 남의 집을 세를 얻어 살아야 하는 처지를 아버님께서는 자주 안타까워 하셨었지요. 그리고 아버님께서 얻은 일자리조차 의정부에 있어서 서울의 명륜동에서 출퇴근하기도 힘이 드셨고, 특히 농사일만 해오신 아버님께서 취직한 일자리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힘겨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선천적으로 타고난 강인한 체력과 더불어 농사일을 하실 때부터 남다르게 부지런하셨던 아버님께서는, 저희 6형제가 모두 서울에서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정말 억척스럽고도 성실하게 일하셨고, 그 덕분에 상경한 지 불과 7년여 만에 (졸업후 취직한 자식들이 비록 조금이나마 도와드렸지만) 보란듯이 전세를 살던 동네에서 어엿한 단독주택까지 마련하시며 몹시도 뿌듯해 하셨습니다.

지금 다시 돌이켜 보면, 아버님께서는 시골에 계실 때에도 정말 부지런히 일하셨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농번기 때에는 겨우 날이 밝기 시작하는 새벽 어스름부터 이슬을 적셔가며 논밭 일을 하셔서, 저희 형제들이 등교시간을 앞두고 다함께 아침식사를 할 때 쯤이면 아버님께서는 벌써 세 시간에 가까울 만큼의 많은 일을 마치시고 난 뒤라는 걸 어렴풋이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물론 한 여름철에는 저희 형제들이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 밤 8시가 넘어서야 들판에서 고된 농사일을 마치고, 소에게 먹일 풀을 지게에 잔뜩 지고 돌담장 너머 어두컴컴한 골목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시던 모습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부모님께서 얼마나 힘겹게 농사일을 해오셨는지는 제가 고향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의 기억이 대부분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대학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하기 위해 6개월여 고향으로 내려가 있는 동안, 매일 매일 하루도 쉬지 않고 논과 밭으로 나가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와 드리면서 새삼스럽게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20대 초반의 한창 나이인 저조차도 아침마다 일어나면 농기구를 움켜쥐었던 손마디 마디가 그렇게 아프고, 밭에 나가 하루 종일 일을 하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픈데 부모님께서는 그동안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자식들이 커가면서 농사일을 어느 정도 도울 때가 됐다 싶으면, 그때는 저희들이 고교에 진학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나가는 바람에, 결국은 오로지 아버님과 어머님 두 분의 양 손과 어깨에만 의지한 채 그 모든 힘든 일을 다 하셨고, 어느 하루도 제대로 쉬는 날조차 없이 오로지 자식들 뒷바라지를 위해 그토록 고된 농사일을 해 오셨다는 걸 생각하면 지금도 목이 메입니다.

아버님께서는 1984년에 서울로 올라오신 뒤 2008년에 담낭암이라는 무서운 병을 얻을 때까지도 직장생활을 계속 하셨습니다. 저희 6형제가 모두 결혼도 하고 가정을 꾸리고 난 뒤, 부모님께 매달 충분한 생활비를 보내 드리는 데도 불구하고, 아버님께서는 좀처럼 일하시는 걸 그만두시지 못하고 또 편안하게 쉬실 줄을 몰랐습니다.

2008년 이맘때 쯤인가 봅니다. 어버이날을 전후로 저희 형제들이 아버님께 사드렸던 음식과 술을 너무 많이 잡수시고 난 뒤에, 복부의 진통이 계속 느껴지는 걸 그저 단순히 '술병'인 줄로만 아셨다가 결국에는 '담낭암'이라는 무서운 병임을 알게 되었고, 그 때는 이미 아버님의 연세를 감안하면 수술을 통해 치료할 수 있는 가능성도 거의 없을 정도이며, 설사 수술을 하더라도 예후가 극히 좋지 않은 병이기 때문에 3개월 이상도 살기 어려울 수 있다는 병원측의 설명은 저희 형제들에게는 실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온갖 수소문을 다해 유명한 의사선생님들께 진료를 받고 또 수많은 검사를 거친 끝에 수술이 가능하다는 얘기를 듣고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눈물을 주르륵 흘렸던 3년 전의 기억도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이 되었고, 분당 서울대병원에서의 10시간이 넘는 대수술 시간 동안 초조하게 수술 결과를 기다렸던 일들도 이제는 다 지난 일이 되었지만, 아버님께서는 그 힘든 수술의 고통들을 다 이겨내시고 결국 환하게 웃으며 퇴원하셨었습니다. 한 달 이상을 입원해 계시던 그 때가 아마도 아버님께서 겪으신 숱한 위험한 삶의 고비 가운데 대략 세 번째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후 아버님께서 오래도록 건강하게 사실 수 있는 방도를 찾아 강원도 영월의 대야리라는 곳으로 곧장 거처를 옮겨 모셨고, 저희 형제들이 주말마다 강원도 영월과 정선, 그리고 평창 등지를 샅샅이 돌아다닌 끝에, 부모님께서 편안하게 사실 수 있는 동네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외관상으로도 여느 도회지의 멋진 단독주택들 못지않게 잘 조성해 놓은 아담한 전원주택단지인 데다가, 무엇보다 새로 마련한 집은 대지가 넓어 텃밭으로 가꿀 공간이 넘칠 정도로 넉넉하였습니다. 2009년 봄부터 아버님께서 일궈놓으신 텃밭엔 지금도 여전히 온갖 채소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고, 아버님과 함께 집 둘레를 따라 심었던 청매실과 홍매실 나무에는 어느새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고, 대추나무와 엄나무들도 너무 잘 자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님께서 지난 겨울에 심어 놓으신 마늘도 얼마나 보기좋게 자랐는지 모릅니다.

아버님께서는 영월에서 3년 가까이 사시는 동안, 맑은 샘물을 길러 오기 위해 매일처럼 먼 산길을 오르내리시고, 또 집 앞의 넉넉한 텃밭으로도 모자라 동네 인근 야산에 있는 묵혀 있는 밭을 찾아다니시며 산나물도 캐고 도라지도 심으며, 또 그러한 내용들을 일일이 전원일기에 빼곡히 기록해 놓으실 만큼 재미있고 즐겁게 생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틈만 나면 가까운 강가로 나가 아버님께서 그렇게 좋아하시던 물고기 잡는 일에도 빼놓지 않고 시간을 할애하였습니다.

문득 아버님이 영원히 저희 곁을 떠나가신 지금에 와서 되돌아 보니, 아버님께서 건강하실 때 한번이라도 더 아버님을 모시고 여기저기 구경도 시켜드리고 또 좋아하시는 음식을 한번이라도 더 자주 사드렸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생각 때문에 얼마나 후회가 사무치는지 모르겠습니다. 작년 가을까지만 하더라도 고모님들과 더불어 부모님을 모시고 가까운 일본에라도 함께 여행을 다녀올 계획울 세웠었는데, 어머님께서 갑자기 허리를 다쳐 입원하시는 바람에 그마저도 헛된 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추운 겨울만 지나고 나면 꼭 아버님을 모시고 고향 산천을 두루 구경시켜 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데 그마저도 이제는 모두 허사가 되고, 아버님께서는 이미 차디찬 몸이 되어 고향의 땅 속에 누워 계시니 그저 가슴이 저며오는 참담한 마음을 억누를 길이 없습니다.

돌이켜 보면 아버님의 너그럽고 인자하신 성품은 아마도 할아버지를 많이 닮으셨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1978년 겨울에 돌아가신 할아버님께서는 그 옛날 우리집을 거쳐 가는 사람들, 가령 탕건을 고치던 할아버지나 목탁을 두드리며 시주를 부탁하던 스님들, 혹은 길을 가는 사람들을 보면 어느 누구에게나 한 끼니의 식사를 대접하기를 그렇게 좋아하셨고, 또 할아버지와 함께 우리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가시는 분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을 만큼 인정이 많으셨던 분이셨습니다. 심지어는 동네 아이들이 미치광이라고 놀려대던 거지에게조차 언제나 밥 한끼를 내주는 바람에, 철없는 저희들이 곁에 다가와 앉아서 밥을 먹는 거지가 너무 무서워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던 기억들도 떠오릅니다. 아마도 그래서 아버님께서는 '언제나 늘 나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들을 살피며 살라'고 하셨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또 평소에 늘 저희 형제들에게 '순리대로 살라'는 말씀을 누차 강조하셨고, 또한 늘 저희들에게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도록 언제나 당부하셨습니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지금, 저희 형제들로서는 단지 아버님께 조금이라도 덜 부끄럽게 사는 것만 해도 이미 벅찬 일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님께서 보시기엔 아직도 저희 형제들은 여러모로 미숙하고 부족한 것도 많고 제대로 처신도 못하며 산다고 여기실 게 틀림없다는 것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이후로는 저희들이 더욱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사람으로서 마땅히 할 도리를 두루 살펴가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임을 다짐합니다.

해마다 오월은 어버이날이 있기 때문에라도 부모님을 꼭 찾아뵙게 되는 계절입니다. 그리고 꼭 1년 전만 하더라도 어버이날을 앞두고 영월로 내려와, 아버님과 어머님과 저랑 셋이서 밤늦도록 100원짜리 동전을 주고 받으며 '점백짜리' 고스톱도 실컷 치며 놀았고, 또 두 분을 모시고 단종문화제에 참가해 장릉과 청령포에 함께 다녀온 기억도 엊그제의 일처럼 생생한데, 이제는 영원히 그런 5월과 그런 어버이날을 다시는 맞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니 또다시 가슴이 미어집니다.

아버님께서 10년, 아니 5년만 더 살아계셨더라도 저희 6형제와 며느리들, 그리고 아버님께서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셨던 손자·손녀들이 아버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뭐라도 조금씩은 더 할 일이 많이 있었을 텐데, 이렇게 빨리 저희 곁을 떠나 가셨으니 저희들은 아직까지도 그저 안타까운 현실이 믿기지 않을 뿐입니다. 다만 이제라도 아버님께 다하지 못한 효도는 어머님을 더욱 잘 모시는 것으로 대신하려 합니다. 아버님께서는 저희들에게 마지막 유언 한마디 조차 남겨주시지 못했지만, 아버님의 마지막 소원은 '너희 엄마를 잘 모셔라'는 말씀이 틀림없었을 것임을 저희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님!

무릇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이란 언젠가는 모두 다시 자연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잘 알면서도, 막상 아버님께서 이처럼 빨리 머나먼 길을 떠나가실 줄은 미처 몰랐기에, 아직도 아버님이 계시지 않는 눈 앞의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무척이나 힘이 듭니다. 하룻밤 사이에 아버님이 저희들 곁을 떠나가신 5월 16일 낮에, 돌아가신 아버님을 서울의 아산병원으로 모시던 그 날은 온 세상이 신록으로 물든 화창한 봄날씨가 너무나 서럽게 느껴져서 울음을 참기 힘들었는데, 5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은 온종일 비가 내리면서 마치  제가 흘릴 눈물을 대신하는 듯합니다. 그리고 아버님께서 생전에 저희들에게 베풀어 주셨던 그 한없는 사랑이 오늘밤은 빗물이 되어 지금 이 순간에도 저희들 가슴 속에 절절히 타고 흘러 내리는 것만 같습니다.

이제 아버님의 그 강건하시던 육신이 살아 생전에 이루고 싶어하시던 그 모든 일들은 온전히 저희들의 몫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셔도 가슴으로 전해지고 느껴지던 그 따뜻한 사랑과 엄한 훈육과 당부와 염려들은 아버님이 비록 계시지 않더라도 저희들이 살아가는 동안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더욱 '순리대로 살고, 형제들간에 우애있게 지내고, 어머님을 더욱 잘 모시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갈' 것을 아버님 영전에서 다짐합니다. 

아버님께서는 이승에서 평생 동안 그토록 열심히 일하셨으니 이제 저승에서는 부디 편히 쉬소서. 그리고 이승에서 겪었던 그 많은 육신의 고통들 또한 이제는 모두 내려 놓으소서. 그리고 아버님께서 못내 간직하셨던 근심과 걱정들이 남아 있으시더라도 이제는 그마저 다 내려 놓으시고 제발 편히 쉬소서.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님!

부디 평안히 영면하소서!




2011년 5월 31일 불효자인 들째아들이 엎드려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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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1 05: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02 1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1-06-01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행 중에 계시는 줄만 알았는데, 그세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뭐라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그래도 지금은 아버님께서 고통 없이 편히 계시지 않겠습니까?
부디 기운 잃지 마시고, 힘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아버님께서 바라시는 오렌님의 모습일 겁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oren 2011-06-02 10:24   좋아요 0 | URL
stella님께서 남겨주신 위로의 말씀 덕분에 조금이나마 기운이 납니다. 감사합니다.

마녀고양이 2011-06-17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그동안 바빠서 몰랐습니다.
너무 늦은 날이 되었지만, 진심으로 위로를 올립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oren 2011-06-17 15:42   좋아요 0 | URL
벌써 한 달이 지난 일이 되었네요.
늦게까지 찾아 오셔서 위로의 글까지 남겨 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2011-06-23 1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3 1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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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효수요 31




한계소비성향과 투자승수 135




직업적 투자자는 100매의 사진 가운데서 가장 얼굴이 아름다운 6인을 선택하여······ 183




일국의 자본의 발전이 도박장의 활동의 부산물이 된다면 186∼187

투기자가 기업의 착실한 흐름 위의 포말(泡沫)에 불과하다면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업이 투기의 소용돌이 속의 포말이 된다면 사태는 심각해진다. 일국의 자본의 발전이 도박장의 활동의 부산물이 된다면, 일이 제대로 되기는 힘들다. 월가 - 그것은 장래의 수익이란 면에서 보아 가장 유리한 경로로 신 투자를 유도하는 것을 그 본래의 사회적 사명으로 하는 기관이라고 볼 수 있다 - 가 달성한 성공을 자유방임(自由放任) 자본주의의 탁월한 승리 중의 하나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실제로 월가의 최우수 두뇌들은 그것과는 다른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고 하는 내 생각이 옳다면, 이 말은 놀랄만한 말이 아니다.




그래서 교훈은 이렇다: 431∼433

『꿀벌들의 우화』의 본문은 풍자적인 시 -「웅웅거리는 벌집, 일명 정직하게 된 악한들」인데, 거기에는 저축을 하기 위해 모든 주민들이 갑자기 사치스런 생활을 포기할 생각을 하고, 정부는 군비를 축소할 생각을 하게 된 어떤 번영하는 사회의 놀랄만한 궁상(窮狀)이 묘사되고 있다:

            이제는 어떤 고위고관(高位高官)도
            쓰기 위해 빚지고 살기는 싫어
            하인들 제복은 전당포에 걸리게 되고
            마차도 헐값으로 팔아버리고
            멋진 말(馬)도 무더기로 팔아버리고
            별장도 다 팔아서 빚을 갚았다.
            소비(消費)는 사기(詐欺)처럼 멀리하고
            외국에 파견한 군대도 철수했다.
            외국인의 어떤 존경도
            전승(戰勝)의 헛된 영광도 일소(一笑)에 부치며,
            오직 국가만을 위해
            정의와 자유가 위태로울 때 싸운다.

오만하던 클로(Choloe)는 

            진수성찬(珍羞盛饌)도 줄여버리고
            튼튼한 옷을 사철 두고 입는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떠한가? - 

            자아, 영광스러웠던 벌집을 상기(想起)하고,
            정직(正直)과 상업(商業)이 어떻게 화합했는지를 보라.
            외화(外華)는 가버리고, 나날이 여위게 되어
            옛 모습 찾을 길 없다.
            무릇, 떠나가 버린 것은 다만
            해마다 큰 돈을 쓰던 자들만이 아니다.
            그들에 기생(寄生)하던 무리들마저
            날마다 [큰 돈을 쓰던 자들처럼] 떠나야 했다.
            그들이 다른 업(業)을 찾아도 소용없어,
            어디로 가나 재고(在庫)가 넘쳐흐르고,
            토지와 집값은 떨어지고,
            테베(Thebes)의 성벽과 같이
            연극을 위해 세워진 성벽을 가진
            황홀한 궁전에는 셋집 광고가 붙어 있다. ······
            건축업은 송두리째 몰락하고,
            장인(匠人)들은 일자리를 잃고 있다.
            예술(藝術)로 이름난 화공(畵工)도 없고,
            석공(石工)도 조각가도 이름이 없다.

그래서 「교훈」은 이렇다:

            도덕(道德)만 가지고는 국가를 훌륭하게 하지 못해
            황금시대(黃金時代)를 재현하는 국민은
            자유로워야 한다.
            정직(正直)에 대해서나 도토리에 대해서나.




맨더빌의 결론 434

한 나라를 행복하게 만들고 우리가 번영이라고 부르는 상태를 가져오는 중요한 방책(方策)은, 모든 사람들에게 취업의 기회를 주는 데 있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정부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배려해야 한다. 우선 첫째로, 인간의 지혜로 발명할 수 있는 한 많은 종류의 제조공업 및 수공업을 장려하는 일이고, 둘째로는 농업 및 어업을, 인류 및 지표(地表) 전체가 미칠 수 있는 모든 부문에 발달시키는 일이다. 국민의 위대성과 행복이 필연적으로 기대하는 것은 이 정책에 연유하는 것이고 사치와 절약에 관한 사소한 법규에 연유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금은(金銀) 가치의 등락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의 열락(悅樂)은 항상 지표의 과실과 사람들의 노동에 의존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양자는 서로 합하여, 브라질의 금이나 포토시(Potosi)의 은보다 더 확실하고 더 무진장의, 그리고 더 실질적인 재보(財寶)가 된다.




이미 고인이 된 어떤 경제학자의 노예
461∼462

경제학자와 정치철학자들의 사상(思想)은, 그것이 옳을 때에나 틀릴 때에나, 일반적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보다 더 강력하다. 사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이밖에 별로 없는 것이다. 자신은 어떤 지적(知的)인 영향으로부터도 완전히 해방되어 있다고 믿는 실무가(實務家)들도, 이미 고인(故人)이 된 어떤 경제학자의 노예인 것이 보통이다.

허공(虛空)에서 소리를 듣는다는 권좌(權座)에 앉아 있는 미치광이들도 그들의 미친 생각을 수년 전의 어떤 학구적인 잡문(雜文)으로부터 빼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기득권익(旣得權益)의 위력은, 사상의 점진적인 침투에 비하면, 매우 과장되어 있다고 확신한다. 물론 사상의 침투는 당장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을 두고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경제 및 정치철학 분야에 있어서는 25세 내지 30세를 지나서는 새로운 이론에 의해 영향을 받는 사람은 많지 않으며, 따라서 공무원이나 정치가, 그리고 심지어 선동가(煽動家)들까지도 일상사태에 적용하는 관념(觀念)에는 최신의 것은 별로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빠르든 늦든, 선(善)에 대해서는 악(惡)에 대해서든, 위험한 것은 사상이지 기득권익(旣得權益)은 아니다. 




 - 존 메이나드 케인즈,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中에서


 * * * * *


'워렌 버핏'과 관련된 책들_ '방한'에 맞춰 잠시 외출



'워렌 버핏'과 관련된 책들_2줄 쌓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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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3-21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워렌 버핏은 저도 알아요.^^
워렌버핏의 투자격언, 이런 제목의 책 가지고 있어요.
나는 사람에게 투자한다, 이 책도요.
이렇게 반가울 수가~

근데 말이죠, 독서를 하시는게 아니라 공부를 하시는 거 같아요.
밑줄 쫙, 별표~

oren 2011-03-21 10:01   좋아요 0 | URL
양철댁님도 워렌 버핏의 책을 가지고 계시다니 저도 무척 반갑네요.ㅎㅎ

요즘은 도무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은 손에 잡히지를 않고, '제 머리에 주먹질을 해대는 책'에 자꾸만 흥미가 생기더군요. 그러다 보니 어쩔 수없이 자꾸만 '공부'를 하는 듯한 모양새가 되는군요. ㅎㅎ

* * *

우리 머리에 주먹질을 해대는 책이 아니라면, 우리가 왜 그런 책을 읽어야 한단 말인가.
- Franz kafka

어떤 책이 좋은지 판단하는 기준은, 그 책이 얼마나 강한 펀치를 당신에게 날리는가 하는 점이다.
- Gustave Flaubert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훌륭한 독서는 불가능하다.
- A. 베네트

비로그인 2011-09-01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네의 열정이 부럽네. 버핏의 책 두 권도 겨우 읽은 나로서는...

oren 2011-09-02 11:18   좋아요 0 | URL
'노력은 항상 그 필요성에 비례한다'는 아담 스미스의 말대로, 나는 저런 책들이 자네보다 훨씬 더 절실하게 필요했을 수도... ㅎㅎ

제네시스 2020-04-17 1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무거운 책을 읽으려면 대단한 독서력입니다.
내용도 어려울 것으로 생각이 되며, 저 같은 하수는 바로 책을 덮을 것 같습니다.

경제의 책을 읽는 좋은 노하우 좀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oren 2020-04-17 14:38   좋아요 0 | URL
아이고... 경제 관련책을 읽는 데 좋은 노하우가 뭐가 있을까요? 너무 어려운 책보다는 쉬운 책부터 차근차근 읽는 게 그나마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일 듯합니다. 별로 도움이 되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제네시스 2020-04-17 14: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답변에 감사를 드립니다.

쉬운 책부터 시작 들어 갑니다.
 
자연의 상흔은 치유된다.

















중국이 갑자기 지진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상상해 보자 251

중국이란 대 제국이 그 무수한 주민과 함께 갑자기 지진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상상해 보자. 그리고 중국과는 어떠한 관계도 갖지 않았던 유럽의 어떤 인도주의자에게 이 가공할 만한 재앙의 보도가 전해졌을 때, 그가 어떤 영향을 받을 것인지를 상상해 보자.


 * * *


인생의 변화무쌍함과, 이렇게 일순간에 파멸되는 인류의 모든 노동의 창조물의 허망함에 대하여 251∼252

나의 상상으로는,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저 불행한 사람들의 액운(厄運)에 대한 그의 비애를 매우 강하게 표명할 것이고, 인생의 변화무쌍함과, 이렇게 일순간에 파멸되는 인류의 모든 노동의 창조물의 허망함에 대하여 많은 침통한 성찰을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투기업자라면, 그는 이 재난이 유럽의 상업에, 그리고 전 세계의 무역과 상업에 미칠지도 모를 효과들에 대한 많은 추측에 몰두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문제들에 대한 그의 생각 정리가 끝났을 때, 이 문제에 대한 그의 인도적 감정들이 충분히 표명된 후에는, 그는 그런 사고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을 때와 똑같이 느긋하고 편안하게 자기의 사업 또는 쾌락을 추구할 것이고, 휴식과 기분전환을 취할 것이다. 그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소소한 재난이 그에게는 오히려 더욱 실질적인 혼란을 일으킬 것이다. 만약 그가 내일 자기 새끼손가락을 잘라버려야 한다면 오늘밤 그는 잠을 자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1억이나 되는 이웃 형제들의 파멸이 있더라도, 만약 그가 직접 그것을 보지 않는다면, 그는 깊은 안도감을 가지고 코를 골며 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이 거대한 대중의 파멸은 분명히 그 자신의 하찮은 비운보다 관심을 끌지 못하는 대상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인도적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자신에 대한 이 사소한 비운을 방지하기 위하여 1억이나 되는 이웃 형제의 생명을, 만약 그가 그것을 결코 보지 않아도 된다면, 기꺼이 희생시킬 것인가? 인간의 본성은 이러한 생각에 공포를 느끼며, 그리고 세상은, 아무리 부패하고 타락했더라도, 이러한 상황을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악한 사람은 결코 만들어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의 소극적인 감정들은 거의 언제나 이처럼 야비하고 이처럼 이기적일 때, 어떻게 우리의 적극적인 천성들은 흔히 그처럼 관대하고 그처럼 고귀할 수 있는가? 우리가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 관련된 일보다도 우리 자신에 관련된 일에 의해 훨씬 많은 영향을 받는다면, 무엇이 관대한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경우에, 그리고 일반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들의 더 큰 이익을 위하여 그들 자신의 이익을 희생시키도록 촉구하는가? 자애(自愛: self-love)의 가장 강한 충동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인간애(humaity), 즉 인도주의의 온화한 힘이 아니며, 조물주가 인간의 마음에 밝혀준 자애(benevolence)의 약한 불꽃도 아니다. 이러한 경우에 작용하는 것은 보다 강렬한 힘이고 보다 강제력 있는 동기이다.


 * * *


양심, 가슴 속의 동거인(同居人), 내부 인간, 우리 행위의 재판관 및 조정자(調整者)
253

그것은 이성(理性), 천성(天性), 양심, 가슴 속의 동거인(同居人), 내부 인간, 우리 행위의 재판관 및 조정자(調整者)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 내심의 가장 몰염치한 격정을 향하여 깜짝 놀랄 정도의 큰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소리치는 것은 바로 이 사람이다. 즉, 우리는 대중 속의 한 사람에 불과하고, 어떠한 점에 있어서도 그 속의 다른 어떠한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우리가 그처럼 수치(羞恥)를 모르고 맹목적으로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우선시킨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분개와 혐오와 저주의 정당한 대상이 될 것이라고, 우리가 우리 자신들에 관련된 모든 것이 실제로는 사소한 것이라는 사실을 배우는 것은 오직 이 중립적 방관자로부터이고, 이 중립적 방관자의 눈에 의해서만 자애(自愛)가 빠지기 쉬운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을 수 있다. 관용의 적정성과 부정(不正)의 추악성, 우리 자신의 큰 이익보다 다른 사람들의 더 큰 이익을 위하여 우리 자신의 그것을 양보하는 것의 적정성과, 우리 자신의 최대의 이익을 얻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가장 사소한 이익까지 침해하는 행위의 추악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바로 이 공평무사한 중립적 방관자이다.

많은 경우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신성한 미덕을 행하도록 촉구하는 것은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도 아니고 인류에 대한 사랑도 아니다. 그러한 경우에 통상 생기는 것은 보다 강한 사랑, 보다 강력한 애정, 즉 명예스럽고 고귀한 것에 대한 사랑, 우리 자신의 성격의 숭고함, 존엄성, 탁월성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


 * * *


발작처럼 돌연히 발생한 불행(paroxysms of distress)을 당하는 경우 272∼273

발작처럼 돌연히 발생한 불행(paroxysms of distress)을 당하는 경우 가장 현명하고 단호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의 생각에는, 상당한 정도의, 심지어 고통스럽기까지 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자신의 불행에 대한 그 자신의 자연스런 감정, 그 자신의 처지에 대한 그 자신의 자연스런 시각이 그를 강하게 압박하기 때문에, 그가 엄청나게 큰 노력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주의력을 공정한 방관자의 시각에 집중할 수가 없다. 두 가지 종류의 시각, 즉 자신의 견해와 공정한 방관자의 견해가 동시에 그의 앞에 나타난다. 그의 명예감각, 그 자신의 존엄에 대한 고려는 그에게 자신의 모든 주의력을 방관자의 그것에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 그의 자연적인, 교육받지 않은, 훈련되지 않은 감정들은 계속 그의 주의력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한다.

이런 경우, 그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가슴 속의 가상의 인간과 일치시킬 수 없고, 스스로 자기 행위의 공정한 방관자가 될 수도 없다. 양자의 서로 다른 성격의 시각이 그의 마음속에 서로 분리되고 구분되어 존재하고, 각각은 그에게 서로 다른 행위를 하도록 지시한다. 그가 명예심과 자존심이 그에게 지시하는 시각에 따를 때, 사실 조물주는 그에게 아무런 보상도 없는 상태로 남겨두지는 않는다. 그는 그 자신의 완전한 자기시인(自己是認)과 동시에 정직하고 공정한 모든 방관자들의 갈채를 누리게 된다. 그렇기는 하지만, 조물주의 만고불변의 법칙에 따라서, 그는 여전히 고통을 당한다. 조물주가 수여하는 보상이 매우 크기는 하지만, 이러한 법칙이 그가 당한 고통을 완전히 보상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 그렇다고 조물주의 보상과 그의 고통의 크기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조물주의 보상이 그가 받는 고통을 완전히 보상해 준다면, 자신의 이기적인 고려에서, 그는 자기 자신과 사회에 대한 자신의 효용을 필연적으로 감소시킬 우발적 사고를 회피하려는 동기를 전혀 갖지 않을 것이다(완전히 보상받는다면 사고를 피하는 것과 피하지 않는 것 간에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조물주는 양자에 대한 부모다운 배려에서 그가 가능한 한 모든 우발적 사고들을 피하도록 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리고 발작처럼 돌연히 발생한 불행 중에서도, 자신의 사내다운 모습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판단의 침착함과 냉정함을 유지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는 최대의 가장 고된 노력을 해야만 한다.


 * * *


고통은 결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274

그러나 인성(人性)의 구조적 특성상, 고통은 결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그리고 만약 그가 그 발작처럼 돌연히 발생한 불행을 견뎌내기만 한다면, 그는 곧 크게 어렵지 않게 일상의 평정을 즐기게 된다. 나무 의족(義足)을 한 사람은 고통을 겪으면서, 틀림없이 자신의 남은 전 생애 동안 매우 큰 불편을 계속 겪어야만 할 것으로 예상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의족을 한 자신의 모습을 모든 공정한 방관자가 그것을 보는 것과 정확히 동일하게 보게 된다. 즉, 그는 이 불편함을, 그런 중에서도 혼자서 혹은 여럿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모든 통상의 기쁨을 즐길 수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그는 곧 자신을 자기 가슴 속의 가상의 인간과 일치시키고,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한 공정한 방관자로 된다. 약한 사람들은 처음에 때때로 그렇게 하듯이, 그는 울거나 탄식하거나 그것에 대해 비관하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그는 공정한 방관자의 시각에 완전히 익숙해져서 더 이상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고, 어떤 몸부림도 치지 않고, 자신의 불행을 다른 어떤 시각에서 관찰하려는 생각도 전혀 하지 않는다.


 * * *


인간생활의 불행과 혼란의 최대 원천
275∼276

인간생활의 불행과 혼란의 최대 원천은 하나의 영속적 상황과 다른 영속적 상황과의 차이를 과대평가하는 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으로 보인다. 탐욕(貪慾: avarice)은 가난과 부유함 사이의 차이를 과대평가하고, 야심(野心: ambition)은 개인적 지위와 공적 지위의 차이를 과대평가하고, 허영(虛榮: vain-glory)은 무명(無名)의 상태와 유명(有名)한 상태의 차이를 과대평가한다. 이러한 종류의 사치스런 격정의 영향하에 있는 사람은 그 자신이 처해 있는 실제 환경에서 불행하고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흔히 그가 어리석게도 감탄하는 처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사회적 안정을 교란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인생에 대해) 조금만 살펴보아도, 인간생활의 일상적인 모든 상황에서 교양 있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평온하고, 마찬가지로 기뻐하고, 마찬가지로 만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러한 통상의 여러 가지 상황들 중에서 어떤 상황은 다른 상황보다 더욱 바람직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러나 그것들 중 어떤 것도 신중(愼重: prudence) 또는 정의 (正義: justice)의 법칙들을 위반해 가면서까지 격정적인 열의를 가지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며, 또는 후에 가서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을 회상할 때 느끼게 될 수치심과, 자신의 부정한 행위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회한(悔恨)으로 마음의 장래의 평정까지 파괴해 가면서까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 * *


시간이라는 위대하고 보편적인 위안자
278∼279

다음의 관찰은 특별한 상황에 대한 것으로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것은 올바른 결론이라고 믿는다. 즉, 다소라도 구제(救濟)의 여지가 있는 불행 중에 처해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제의 여지가 전혀 없는 불행 중에 처해 있는 사람들처럼 일반적으로 그렇게 쉽게 자신들의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평정을 회복하지 못한다. 후자의 종류에 속하는 구제의 여지가 없는 불행에 처한 사람들의 경우, 총명한 사람의 감정 및 행위와 연약한 사람의 감정 및 행위 사이에 어떤 눈에 띄는 차이점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주로 발작처럼 돌연히 발생한 불행의 경우 또는 불행이 최초에 엄습한 때이다. 그러나 최후에 가서는 시간(時間)이라는 위대하고 보편적인 위안자(慰安者)가 점차 저 연약한 사람으로 하여금 총명한 사람이 최초에 자존심과 사내다운 기개의 교도(敎導)에 의해 도달하였던 그런 수준의 마음의 평정에 도달하게 된다.

나무 의족(義足)을 한 사람의 경우가 이런 사정에 대한 분명한 예이다. 자식의 죽음, 친구나 친척의 죽음 등처럼 회복할 수 없는 불행을 당한 경우에는 총명한 사람이라도 일정한 기간 동안 어느 정도의 슬픔에 빠질 수 있다. 다정다감하고 연약한 여성은 그런 경우 흔히 거의 완전히 미쳐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길든 짧든 시간이 지나면 예외 없이 이런 가장 연약한 여성까지도 가장 강인한 남성과 같이 어느 정도의 평정을 회복하게 된다. 그 자신에게 즉각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모든 회복 불가능한 재난 가운데서도, 총명한 사람은 몇 달 또는 몇 년 후에는 결국 회복될 것이 틀림없는 마음의 평정을 처음부터 예상하고 그것을 미리 즐기려고 노력한다.


 * * *


당신은 역경에 처해 있는가? 284

당신은 역경에 처해 있는가? 고독의 어둠 속에서 탄식하지 말고, 당신의 친한 친구들의 관대한 동감에 맞추어 당신의 슬픔을 조정하지 말 것이며, 가능한 한 빨리 세상과 사회의 일광(日光) 속으로 돌아가라. 그리고는 낯선 사람들, 당신의 불행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그것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고, 적들과 사귀는 것조차 회피하지 말고, 당신의 적들로 하여금 당신이 당신의 재난에 의해 얼마나 영향을 적게 받았는지, 얼마나 그것을 초월해 있는지를 느끼도록 하고, 당신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는 그들의 악의(惡意)에 굴욕감을 안겨줌으로써 당신 스스로 기뻐하라.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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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3-16 0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번을 곱씹어 읽었는데, 딱 지금 제 상황이네요.
어려운 말로 쓰여졌지만, 결론은 '처연하라~' 한 단어 정도면 해결될 듯 하구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oren 2011-03-16 10:21   좋아요 0 | URL
저는 일본 대지진을 보면서 이 책에서 '읽었던 부분들'이 생각나서 다시 들춰내서 정리해 봤는데, 양철댁님의 상황에도 딱 맞다니 정말 놀랍군요.

'갑작기 맞닥뜨린 엄청난 불행'에 대한 '어느 철학자의 성찰'이 수많은 역경에 처한 사람들의 여러 상황들에 두루 들어맞으리라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고 봅니다. 애덤 스미스는 '도덕철학과 교수 경력' 12년 만에 이 책을 완성했는데, 그의 나이가 36살이었을 때였답니다.(1723년생, 1759년 출판). 그렇지만 그는 10년 동안 오로지 저술에만 몰두하여 완성한《국부론》 출간 이후에도 '평생 동안'《도덕감정론》을 고치고 다듬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묘비명을 "도덕감정론의 저자, 여기 잠들다"라고 썼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 글이 영철댁님께도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다면 저로서는 큰 보람입니다. ㅎㅎ

마녀고양이 2011-03-16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오렌님께서 추천해주신 책들을 읽는다면
한권 내내 밑줄 긋다가 끝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구절마다 왜 이리 와닿는건지요.

시간이 해결해준다 현재는 지나간다 라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방향성은 점검해봐야 한다는 생각 역시 합니다.
가끔 매번 비슷한 상황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아무래도 방향성과 선택의 문제가 아닐까 싶어서요.

oren 2011-03-16 23:37   좋아요 0 | URL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고님께서 '밑줄 긋다가 끝날지 모르겠다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딱 제가 그 꼴입니다.
요즘은 읽을수록 내용이 와닿는 오래된 고전들은 밑줄 긋느라 정신을 못차리고 있습니다. ㅎㅎ

blanca 2011-03-16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위대한 위안자라는 말, 고통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말, 다 심금을 울리네요. 마치 아담 스미스가 작금의 상황을 지켜 보고 있는 것만 같아요. 그런데 오렌님, 아담스미스와 데이비드흄의 저서의 인용이 섞여 있는 건가요? 찾아 읽어 보고 싶어져서요.

oren 2011-03-16 23:20   좋아요 0 | URL
윗 글은 아담 스미스의『도덕감정론』에서 전부 인용한 내용입니다.

다만, 두 사람이 워낙 절친하게 지낸 친구 사이여서 아담 스미스의 책 본문과 주석 등에 데이비드 흄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부분이나 흄의 책을 인용한 부분이 꽤나 많이 나와서 '두 권의 책을 나란히' 배치한 것 뿐입니다. ㅎㅎ

(아담 스미스의『도덕감정론』주석의 일부)
이러한 아담 스미스의 예는 흄을 연상시킨다. 흄은 그의『인성론』제2부 3편 3장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내 손가락에 상처를 내기보다는 차라리 세상이 전부 파멸되기를 바라는 것은 이성에 반하는 것이 아니다."
 

















맨더빌 박사의 철학 체계 590

악덕과 미덕의 구분을 완전히 없애버린 듯이 보이는 또 다른 철학체계가 있는데, 그 때문에 이 철학체계의 경향은 전체적으로 유해하다. 맨더빌(Mandeville) 박사의 철학체계가 바로 그것이다. 이 학자의 견해는 거의 모든 방면에서 틀렸기는 하지만, 우리가 어떤 특정한 태도로 인성(人性)의 일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현상들을 관찰하면, 처음에는 그의 견해를 뒷받침해 주고 있는 듯이 보인다. 비록 거칠고 촌스럽기는 하지만 생동하고 유머감각이 풍부한 멘더빌 박사의 말솜씨로 묘사되고 과장되어 있는 이 표면적 현상들은 그의 학설에 일종의 진실성과 가능성의 분위기를 제공해주고 있는데,
숙맥(菽麥)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장 속아 넘어가기 쉬운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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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의 번영을 더 좋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591

그가 관찰한 바로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다른 사람들의 행복보다는 자신의 행복에 훨씬 더 큰 관심을 가지며, 진심으로 자신의 번영보다 다른 사람들의 번영을 더 좋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런 동기에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일 때는 언제나 우리를 기만하고 있는 것이고, 그렇게 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그는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이기적인 동기에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해도 좋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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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공익정신은 단지 인류에 대한 기만이자 속임수에 불과 591∼592

인간의 다른 모든 이기적인 격정들 가운데 허영심이 가장 강렬한 것이며, 인간은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박수갈채에 의해 쉽사리 우쭐해지고 기뻐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동료들의 이익을 위해 자기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 그는 자신의 행동이 그들의 자애심(自愛心: self-love)에 대해 매우 유쾌하게 느껴지고, 따라서 그들은 반드시 자신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냄으로써 그들의 만족감을 표시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가 자신의 그런 행동으로부터 기대하는 쾌락은, 그의 생각에도, 이것을 얻기 위해 그가 포기하는 이익을 능가한다. 따라서 이 경우에 있어서도 그의 행동은 사실상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기적인 것이고, 또한 천박한 동기에서 나온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행동은 전혀 이기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믿으면서 우쭐대고 기뻐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에 이런 무사(無私)의 동기가 전제되지 않으면, 그의 행동은 그 자신의 눈에나 또는 다른 사람의 눈에나 어떤 칭찬받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사익보다 공익을 우선시하는 모든 공익정신은 단지 인류에 대한 기만(欺瞞)이자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처럼 자랑을 많이 하는 인류의 미덕이라는 것은, 그리고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서로 많이 갖추려고 노력하는 인류의 미덕이라는 것은, 사실은 단지 자존심에서 생겨난 아첨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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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덕행은 우리 격정의 감춰진 방종(放縱)에 불과 598

맨더빌 박사는 경박한 허영의 동기를 통상 유덕한 것으로 간주되는 모든 행위의 근원으로 설명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의 덕행이 기타 많은 점에서도 불완전함을 지적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주장하기를, 모든 경우에 있어서 인간의 덕행은 그것이 자칭하는 바의 완전한 자아극복(自我克服:self-denail)의 상태에 도달하지 못하며, 그리고 그것은 우리 격정의 정복이 아니라 통상 우리 격정의 감춰진 방종(放縱)에 불과하다고 한다. 쾌락에 대한 우리의 자제(自制: reserve)가 최고의 금욕적 절제 정도에 도달하지 못하는 한, 그는 그것을 순수한 사치(奢侈)와 육욕(肉慾)으로 취급한다. 그에 의하면 인성(人性)의 유지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초과하는 모든 것은 사치이며, 따라서 깨끗한 셔츠나 편리한 주택의 사용도 일종의 악이라는 것이다. 남녀가 가장 합법적으로 결합되는 경우의 성욕(性慾)의 충족까지 그러한 격정을 가장 유해(有害)한 방법으로 충족시키는 경우의 육욕(肉慾)과 똑같은 것으로 간주하면서, 그는 이처럼 아주 저렴하게 실행될 수 있는 절제나 정결(貞潔)을 비웃는다. 다른 많은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그의 설명 속에 들어있는 교묘한 궤변은 언어의 애매모호함에 의해 은폐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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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들의 우화(The Fable of the Bees)』: 개인의 악행은 공공의 이익이라는 결론 599∼600

맨더빌 박사의 저서(『꿀벌들의 우화(The Fable of the Bees)』의 큰 오류는, 모든 감정들은, 그것의 정도 및 그것이 향하는 대상 여하를 불문하고, 전부 악덕(惡德)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의 실제의 감정, 혹은 다른 사람들의 당위적 감정과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는 허영심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자신이 좋아하는 결론, 즉 개인의 악행은 공공의 이익이라는 결론을 확립한 것은 바로 이러한 궤변에 의해서이다. 장엄(壯嚴)한 것에 대한 애호, 우아한 예술품과 생활수준을 제고하는 것들에 대한 취향, 복장과 가구와 마차 등 사람을 유쾌하게 하는 일체의 것들에 대한 취향, 건축·조각·미술과 음악에 대한 취향이, 어떤 불편도 없이 이러한 격정에 빠져들 수 있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사치·육욕(肉慾)·겉치레로 간주된다면, 분명히 사치와 육욕과 겉치레는 공공의 이익이다. 왜냐하면, 이처럼 상스러운 명칭을 부여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그가 생각한 이러한 특성들이 없으면 우아한 예술은 결코 장려될 수 없을 것이고, 또한 그것은 쓸모가 없어서 틀림없이 시들어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맨더빌 시대 이전에 유행했던,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격정들을 완전히 근절시키고 없애버리는 데 미덕이 있다고 본 일부 금욕주의 학설들은 이 방종적(放縱的) 체계의 진정한 기초였다. 맨더빌 박사가 다름과 같은 명제(命題)를 증명하기는 쉬운 일이었다. 첫째, 인간은 결코 실제로 이러한 격정을 완전히 정복한 일이 없었다. 둘째, 만약 인간이 그 자신의 격정을 보편적으로 정복하게 되면, 그것은 모든 산업과 상업을 종지(終止)시키고, 또한 어떤 방식으로 인류생활의 모든 업무를 종지시킴으로써, 그것은 사회에 대하여 유해(有害)하다.

그는 이 두 가지 명제 중에서 첫 번째 것을 통해서, 진정한 미덕이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소위 미덕이라는 것은 사람들에 대한 사기(詐欺)이자 기만(欺瞞)일 뿐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두 번째 것을 통해서는, 개인적인 악행이 없으면 어떤 사회도 번영할 수 없으므로, 개인적인 악행은 공중의 이익(利益)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바로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맨더빌 박사의 체계이다. 비록 이 체계 때문에 이것이 없었을 경우에 비해 더 많은 악행이 야기되었던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은 적어도 다른 원인에서 생겨난 악행들로 하여금 더욱 뻔뻔스럽게 행동하도록 가르쳐 주었으며, 그리고 이전에는 결코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의 후안무치(厚顔無恥)함으로 그 부패한 동기(動機)를 공개적으로 선언(宣言)하도록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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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도 없는 독자에게까지도 황당하고 가소롭게 보일 것 602∼603

자연철학을 연구하는 저자가(이하는 맨더빌 박사를 지칭한 말이다. 맨더빌은 본래 의사로서 자연과학자이다-역자) 우주의 위대한 현상들의 원인을 규명한다고 자처하거나,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설명한다고 자처하는 경우, 그런 것들에 관해서는 그는 자기 좋을 대로 이야기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의 이야기가 그럴 듯한 범위 내에 있는 한, 그는 우리가 자기 말을 믿어주지 않을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의 갈망(渴望)과 감정이 생겨나는 근원이나 우리의 시인(是認)과 부인의 감정이 생겨나는 근원에 대해 우리에게 설명하겠다고 제안하는 것은 마치 그가 우리가 살고 있는 교구의 여러가지 사정들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집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도 설명해주겠다고 자처하는 것과 같다.

비록 이런 경우에조차, 게으른 주인이 자신을 속이는 집사(執事)를 믿는 것처럼, 우리 역시 속아 넘어가기 쉽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진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그의 설명을 그대로 다 믿고 넘어갈 수가 없다. 적어도 그 중의 일부 내용들은 정당해야 할 것이고, 매우 과장된 내용들마저 약간의 근거는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평소에 늘 그래 왔듯이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은 채 슬쩍 한번 살펴보는 정도의 관찰에 의해서도 그의 사기행각(詐欺行脚)은 들통 나고 말 것이다. 천연적인 감정의 원인으로서 그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천성(天性)이나 또는 그것과는 어떤 유사성도 전혀 없는 원리(原理)를 제시하고 있는 저자는, 가장 분별력도 없고 가장 경험도 없는 독자에게까지도 황당하고 가소롭게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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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의 우화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애덤 스미스를 경제학으로 이끈 사람!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알려진 애덤 스미스가 쓴 중요한 저서《도덕감정론》이 버나드 맨더빌의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쓰였다는 사실을 아는가? 《도덕감정론》은“사람이 아무리 이기적이라 생각되더라도”라는 말로 시작되어, 이기심에 따른 사람들의 행위가 정당한지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또한 애덤 스미스는 방탕과 사치 같은 인간의 악덕을 옹호한 맨더빌의 사상이 사회에 퍼지는 것을 경계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애덤 스미스가《국부론》에서 자유경쟁의 중요성을 주장한 것은 당시 대기업이 독점하고 있는 무역 등 산업의 병폐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정부가 자유경쟁을 보장함으로써 대기업뿐 아니라 소규모 기업과 상인들도 경제활동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사회를 더욱 안정적으로 만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악덕을 옹호하는 주장으로 인해 사람들에게서 인간 악마(Man-Devil)라 불렸던 맨더빌(Mandeville)은 1670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났다. 레이던 대학에서 철학박사와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영국으로 건너가 정착, 이후 173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영국에서 살았다. 맨더빌이 악명을 떨치게 된 것은 그가 1723년《꿀벌의 우화》라는 책을 발표하면서부터다. 이 책에는 <투덜대는 벌집: 또는, 정직해진 악당들>이라는 풍자시와 함께 맨더빌이 직접 단 주석과 <사회의 본질을 찾아서>, <자선과 자선학교>, <미덕은 어디에서 왔는가> 등의 글을 함께 수록해놓았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미들섹스 지역의 대배심으로부터 “종교와 미덕을 깍아내린다”는 혐의로 고발되었으며 프랑스에서는 책을 불사르기도 했다. 도대체 이 책의 무엇이 당시 사람들을 분노로 들끓게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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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그냥 버티고 있는 중일뿐이다.


















되풀이되는 엄중한 도발의 결과 때문이라는 것
65∼66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때 비로소 분개심을 표출하는 우리의 행위가 방관자에게 완전히 유쾌하게 느껴지고 그리고 방관자로 하여금 우리의 분개에 완전히 동감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분개를 격발시킨 원인이, 만약 우리가 그것에 대해 어느 정도라도 분개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이 비열한 인간으로 되어버리고 그리고 두고두고 모욕을 받게 될 그런 것이어야 한다. 사소한 침해에 대해서는 무시해 버리는 편이 오히려 낫다. 사소한 시빗거리가 있을 때마다 흥분하는 심술궂고 남의 말꼬리 잡고 시비하기 좋아하는 성격만큼 비열한 것도 없다. 우리가 분개하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 불쾌한 격정으로 화가 나서가 아니라, 분개하는 것이 적절하고 또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분개하기를 기대하고 또 요구하고 있다는 자각 때문이어야 한다.

인류가 느낄 수 있는 격정들 중에서 이 분개의 격정만큼 우리로 하여금 그것의 정당성에 대하여 재삼 의문을 가져보게 하고, 우리가 그것을 표출하기 전에 조심스럽게 우리의 본래의 적정성 감각에 비추어 보게 하고, 또한 냉정하고 공정한 방관자가 우리가 표출하는 분개를 보고 어떤 감정을 가지게 될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도록 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관대함이나 우리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존엄을 유지하고자 하는 관심만이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는 이 격정의 표현들을 고상한 것이 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동기이다. 이 동기가 우리의 전체 품격과 태도를 특징짓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태도는 반드시 소박·소탈하고, 감추는 것이 없고, 솔직해야만 한다. 과단성이 있되 독단적이 아니어야 하고, 고결하되 오만하지 않아야 하며, 무례하고 상스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상해를 가한 자에 대해서조차 너그럽고 솔직하면서도 모든 적절한 배려를 다해 주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분노의 격정 때문에 인간의 선한 본성이 훼손되지 않았음을, 그리고 만약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복수를 하게 된다면 그것은 마지못해서, 필요에 의해서, 그리고 되풀이되는 엄중한 도발의 결과 때문이라는 것이 우리가 그것을 표현하려고 일부러 노력하지 않고서도 우리의 전체 행동에서 저절로 드러나야 한다.

분노가 이런 방식으로 억제되고 진정된다면 그것은 심지어 관대하고 고상하기까지 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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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심의 기원 91∼92

이 세상 사람들이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 야단법석을 떠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탐욕과 야심, 부와 권력 및 최고를 추구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천성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인가? 가장 비천한 노동자의 임금으로도 그것을 만족시킬 수 있다. ······

인류 사회의 각계각층의 사람들 모두에게서 나타나는 경쟁심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인가? 그리고 소위 자신의 지위의 개선이라고 하는 인생의 거대한 목적을 추구하는 것은 어떤 이익이 있어서인가? 남들로부터 관찰되고 주의와 주목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그들로부터 동감과 호의와 시인(是認)을 받는다는 것이 바로 그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이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안락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허영이다. 그러나 허영이란 항상 자신이 주위로부터 주목을 받고 시인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신념에 기초한다. 부유한 사람이 그의 부유함을 자랑하는 것은 그 부유함이 자연히 세간의 이목을 끈다는 것, 그리고 부유함이 그에게 제공한 모든 유쾌한 감정에 인간들이 쉽게 공감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면 그는 가슴이 벅차오르고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긜고 그는 부유함이 가져다주는 다른 어떤 이익보다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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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개(憤慨)의 감정 149

분개(憤慨)는 방어를 위해서, 그리고 오직 방어만을 위해서, 천성이 우리에게 부여해준 감정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정의를 지키는 보호장치이자 죄없는 사람을 지키는 안전장치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가해지려는 해악을 물리치고 이미 가해진 것에 대해서는 보복을 하도록 촉구한다. 그리하여 가해자로 하여금 자신의 부정한 행위를 반성하도록 하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같은 처벌을 받을까봐 두려움을 갖도록 함으로써 유사한 죄를 범하지 못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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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개의 감정이 달성하고자 하는 주요 목적 181∼182

분개의 감정이 달성하고자 하는 주요 목적은 우리의 적으로 하여금 고통을 느끼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 하여금 자신이 자신의 과거의 행동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고, 또한 그로 하여금 과거의 행동을 후회하도록 만들고, 그로 하여금 그가 해악을 가한 그 사람이 그와 같은 식으로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만드는 데 있다. 우리를 해치거나 모욕을 준 사람에 대하여 우리로 하여금 분개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우리를 무시하는 태도, 우리보다 자기기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불합리한 태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언제라도 그의 편의에 따라 또는 기분에 따라 희생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그의 터무니없는 자애(自愛: self-love) 등이다. 그의 행동에 나타난 두드러진 도덕적 부적정성, 그의 행동에 담겨 있는 큰 오만과 불의는 종종 우리에게 우리가 당한 해악 그 자체보다도 더욱 큰 충격을 주고, 우리를 격분하게 만든다. 다른 사람들이 응당 받아야 할 몫에 대한 보다 올바른 감각을 그에게 심어주는 것, 그가 우리에게 지고 있는 빚이나 그가 우리에게 행한 잘못을 그가 깨닫도록 해 주는 것 등이 우리가 보복하려는 주요 목적이다. 만약 이 목적이 달성되지 못한다면 보복은 항상 불완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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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생활의 불행과 혼란의 최대 원천 275∼276

인간생활의 불행과 혼란의 최대 원천은 하나의 영속적 상황과 다른 영속적 상황과의 차이를 과대평가하는 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으로 보인다. 탐욕(貪慾: avarice)은 가난과 부유함 사이의 차이를 과대평가하고, 야심(野心: ambition)은 개인적 지위와 공적 지위의 차이를 과대평가하고, 허영(虛榮: vain-glory)은 무명(無名)의 상태와 유명(有名)한 상태의 차이를 과대평가한다. 이러한 종류의 사치스런 격정의 영향하에 있는 사람은 그 자신이 처해 있는 실제 환경에서 불행하고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흔히 그가 어리석게도 감탄하는 처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사회적 안정을 교란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인생에 대해) 조금만 살펴보아도, 인간생활의 일상적인 모든 상황에서 교양 있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평온하고, 마찬가지로 기뻐하고, 마찬가지로 만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러한 통상의 여러 가지 상황들 중에서 어떤 상황은 다른 상황보다 더욱 바람직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러나 그것들 중 어떤 것도 신중(愼重: prudence) 또는 정의 (正義: justice)의 법칙들을 위반해 가면서까지 격정적인 열의를 가지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며, 또는 후에 가서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을 회상할 때 느끼게 될 수치심과, 자신의 부정한 행위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회한(悔恨)으로 마음의 장래의 평정까지 파괴해 가면서까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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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신의 존엄과 지위를 지킬 필요가 있다.
463

질투(嫉妬)란, 다른 사람들이 자신보다 우월한 것을, 그들이 정말로 그처럼 우월할 자격이 있는 경우에도, 그들의 우월함에 대하여 악의적으로 혐오감을 가지고 바라보는 격정이다. 그러나 중대한 문제에서, 어떤 우월함을 누릴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이 자신을 능가하거나 자기보다 앞서 가도록 순순히 용인하는 사람은, 비열한 소인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러한 나약함은 통상 태만에 기원하고, 때로는 선량한 성품에, 싸우기 싫어하고 소란 떨고 사정하기 싫어하는 성품에 기원하며, 그리고 때로는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일종의 아량(雅量)에 기원하기도 하는데, 이런 아량은, 그 당시에 무시하는 이익들을 언제나 계속 무시할 수 있으며, 따라서 쉽게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나약함에는 통상 많은 후회와 회한이 뒤따른다. 그리고 처음에 보여주었던 어느 정도의 아량은 흔히 끝에 가서는 극도로 악의적인 투기(妬忌)로 변하게 되고, 그리고 자신이 아량을 베풀어 주었던 자의 우월함에 대한 증오로 변하게 된다. 일단 그의 아량 덕에 우월한 지위를 누리게 된 사람은, 그의 아량에 의해 양보를 받아냈던 바로 그 환경에 의해, 정말로 그 우월한 지위를 누릴 자격을 갖추게 되기도 한다.

이 세상에서 편안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필요가 있는 것처럼 우리 자신의 존엄과 지위를 지킬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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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서로 다른 기준 469

우리 자신의 장점을 평가하고 우리의 성품과 행위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는, 우리가 자연히 이것들과 비교하게 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기준이 있다. 그 하나는 우리가 각자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는 엄밀한 적정성(適正性) 및 완미성(完美性)의 관념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 사람들이 통상 도달할 수 있는 이 관념에의 접근 정도(程度)이다. 이 접근 정도는 또한 대부분의 우리 친구와 동료, 경쟁자들이 과거에 실제로 도달했을 수도 있는 그런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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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한 적정성(適正性) 및 완미성(完美性)의 관념 470

총명하고 도덕적으로 고상한 사람은 그의 주요 관심을 첫 번째 기준, 즉 엄밀한 적정성(適正性) 및 완미성(完美性)의 관념에 둔다.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는 이러한 종류의 관념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 관념은 장기간 자기 자신의 행위와 성품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성품과 행위에 대하여 관찰하는 가운데 점진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관념이 형성되는 것은 우리 가슴 속에 있는 위대한 반신반인(半神半人: demigod), 즉 우리 행위의 위대한 재판관이자 조정자의 완만하고 점진(漸進) 부단히 진전(進展)되는 작업이다. 이러한 관찰을 할 때 각 개인들이 투입하는 조심성과 관심, 각 개인들의 감수성의 섬세하고 예민한 정도에 따라서 다소 간에 차이는 있지만, 각 개인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이 관념을 정확히 묘사하고, 그 관념을 정확히 채색하며, 그 관념의 윤곽을 정확하게 그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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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준낮은 예술가들 472

모든 문학예술의 영역, 즉 미술, 시, 음악, 웅변, 철학 등에서 이 위대한 예술가들은 항상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에 대해서도 정말로 불완전함을 느끼며, 그것들이 자신이 생각한 이상적인 완미함에 비해서 얼마나 모자라는지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더 민감하게 느낀다. 그는 자신의 모든 능력을 다해 그 완전성을 모방은 하지만, 그러나 그는 그것과 동등하게 되려는 기대는 포기한다. 자기 자신의 성취에 대해 완전히 만족하는 것은 수준 낮은 예술가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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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 다른 사람들이 도달하는 보통 정도의 탁월성(卓越性)에 쏟는 사람들 473

자신의 장점을 평가하고 자신의 성품과 행위를 판단할 때 자신의 관심의 거의 대부분을 두 번째 기준, 즉 통상 다른 사람들이 도달하는 보통 정도의 탁월성(卓越性)에 쏟는 사람들 가운데는, 실제로 그리고 정당하게 자신들이 이 정도의 탁월성보다 훨씬 더 뛰어난 것을 느끼며, 또한 모든 이성적인 그리고 공정한 방관자들에 의해서도 그렇다고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주로 언제나 이상적인 완미성의 기준이 아니라 일반적인 완미성의 기준이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약점이나 불완전함에 대해서는 거의 느끼지 못한다. 또 겸허하지도 않고, 잘난 체하고, 거만하고, 뻔뻔스럽고, 자신들에 대해서는 커다란 찬사를 보내면서 다른 사람들은 매우 경멸한다.

그들의 성품은 일반적으로 매우 비뚤어져 있고, 그들의 공적(功積)은 진실하고 겸허한 미덕을 지닌 사람들에 비해 훨씬 못하지만, 그러나 그들의 과도한 자화자찬(自畵自讚)에 근거한 과도한 자만심(自慢心)이 수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심지어 흔히 일반 군중들보다 지적 수준이 훨씬 높은 사람들까지 기만하기도 한다.

가장 무지한 돌팔이의사, 사이비교주 등 사기꾼들이 보통의 시민생활에서나 종교적인 신앙에서나 자주 그리고 때로는 놀라울 정도로 성공하는 것을 보면, 군중들은 얼마나 과장되고 근거 없는 허풍(虛風)에 쉽게 속아 넘어가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러한 허풍이 대단히 고도의 진실하고 구체적인 공적에 의해 뒷받침되고, 그러한 허풍이 자신들에게 부여하는 모든 화려한 광채를 띠고 나타나고, 거기에다 그것이 지위가 높고 큰 권세를 가진 사람의 지지를 받고, 그 허세(虛勢)가 종종 성공적으로 발휘되어 대중으로부터 커다란 환호를 받게 될 때에는, 심지어 냉정한 판단력을 지닌 사람조차 흔히 그것을 찬탄하는 일반 군중들의 대열에 함께 휩쓸리게 된다. 이 어리석은 군중들의 요란한 갈채(喝采) 소리 자체가 종종 그의 판단력을 헷갈리게 함으로써 그가 그러한 인물(사기꾼)들을 어느 정도 멀리 떨어져서 바라볼 때에는 그는 언제나 그들을 진지하게 숭배하게 되는데, 심지어 그들이 자기 스스로를 숭배하면서 보여주는 찬탄보다 더욱 강한 찬탄을 보내게 된다. 이러한 경우, 만약 시기심(猜忌心)만 없다면, 우리는 모두 이러한 인물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찬탄하고, 그 때문에 우리의 상상 속에서는 자연스럽게, 많은 측면에서 매우 감탄을 받을 가치가 있는 그들의 성품을 모든 면에서 완전무결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물들의 과도한 자화자찬은 그들에 대해 상당히 잘 알고 있는 총명한 사람들에 의해 잘 이해되고, 그리고 아마도 어느 정도의 비웃음으로 간파되기도 한다. 이 총명한 사람들은, 그 인물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군중들이 흔히 존경심과 심지어 거의 숭배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그들의 거만한 생동을 속으로 조소한다. 그러나 모든 시대에 있어서 가장 떠들썩한 명성과 가장 널리 명예를 얻었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러하였고, 아주 먼 후손에게까지 전해진 그들의 명성과 명예 역시 이런 종류의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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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총명한 사람 480

진정으로 자신에게 속한 공적(功積)이 아닌 것을 자신에게 속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또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자신에게 속한 것으로 생각해 주기를 바라지도 않는 사람은 창피를 당할까봐 두려워하지도 않고, 자신의 실체가 발각(發覺)될까봐 두려워하지도 않고, 다만 자기 자신의 성품의 진실성과 견고성에 대하여 만족하고 느긋해할 뿐이다. 그를 칭찬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도 않고, 그렇게 요란하게 갈채를 보내는 것도 아니지만,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그를 가장 잘 아는 총명한 사람은 그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낸다.

진정으로 총명한 사람에게는 총명한 한 사람의 사려 깊고 신중한 시인(是認)이 수천 명의 무지한 열광자들의 요란한 갈채보다 더욱 충심(衷心)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만족감을 준다. 파르메니데스가 아테네의 군중집회에서 한 편의 철학논문을 읽을 때, 플라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서 떠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는 그것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플라톤 혼자만 들어줘도 자기는 충분히 만족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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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사람 481

그러나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는 매우 총명한 사람들은 그에 대해서 가장 적게 감탄한다. 그가 성공에 도취되어 있을 때 총명한 사람들의 그에 대한 냉정하고 공정한 평가는 그의 자기 자신에 대한 터무니없는 과대평가에 비해 너무나 낮기 때문에, 그는 그들의 냉정하고 공정한 평가를 단지 악의(惡意)와 질투심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가장 좋은 친구들을 의심하고, 그들과 교류하는 것에 불쾌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는 그들이 자기 앞에 나타나지 못하도록 내쫓고, 또는 흔히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그들에게 보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잔인(殘忍)하고 불의(不義)하게도 은혜를 원수로 갚기도 한다. 오히려 그는 아첨꾼과 배신자들을 신뢰하게 되는데, 이들은 그의 허영(虛榮)과 허세(虛勢)를 숭배하는 척 가장한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어떤 면에서는 결함이 있을지라도 전체적으로 보면 친근감도 있고 존경할 만하기도 하던 사람이 마지막에 가서는 경멸스럽고 혐오스러운 인물로 변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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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것을 오만 혹은 허영이라 부른다 483

인류의 보통 수준보다 위대하고 탁월한 재능을 지닌 이러한 걸출한 인물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훌륭한 성품을 과대평가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철저히 공감할 뿐 아니라 동감(同感)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들을 용감하고, 관대하며, 고상한 사람들이라고 부르곤 한다. 이러한 말들 속에는 상당한 정도의 칭찬과 찬사의 뜻이 들어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 두드러지게 뛰어난 면을 발견할 수 없는 사람들의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에는 공감할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의 과도한 자아평가(自我評價)에 혐오감과 반감을 느끼게 된다. 그것을 양해하거나 참아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그것을 오만(傲慢) 혹은 허영(虛榮)이라 부른다. 이 두 가지 단어 중에서, 후자는 언제나, 전자는 대부분, 그 속에 어느 정도의 비난의 뜻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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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傲慢)한 사람 483

오만(傲慢)한 사람은 표리부동(表裏不同)하지 않고, 마음속 깊숙이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러한 확신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알아맞히기는 흔히 어려울 수도 있다. 그는 당신이, 그가 당신의 입장에 있을 때 자기 자신을 바라볼 그런 눈으로, 자기를 보아주기를 바란다. 그가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그가 생각하는 공정(公正)함이다. 만일 그가 자기 자신을 존경하는 것만큼 당신이 자기를 존경해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는 모욕(侮辱)을 당한 것 이상으로, 마치 그가 정말로 어떤 침해를 당한 것처럼 화를 내고 분개한다. 그러나 그런 때조차도 그는 자신이 당신에게 그런 요구를 하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당신에게 존경을 간청하려고 하지 않으며, 그런 행동을 경멸하는 척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는, 자기 자신의 우월함을 당신으로 하여금 느끼도록 하기보다는 당신 자신의 비천함을 스스로 느끼도록 함으로써, 자기 스스로 상정(想定)한 지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마치 자기 자신에 대한 당신의 존경심을 자극하기보다는 오히려 당신 자신에 대해 당신이 굴욕감을 느끼도록 자극하기를 더욱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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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심이 많은 사람 484

그러나 허영심이 많은 사람은 표리부동(表裏不同)하여, 자기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는 자신의 우월성에 대해 확신을 하지 못하면서도, 자신에게 그런 우월성이 있다고 당신이 인정해 주기를 바란다. 그는 당신이, 그가 당신의 입장에 있고,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당신이 알고 있을 때, 그가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의 그런 색채보다 더욱 찬란한 색채로 자기를 보아 주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그것과는 다른 색채로 그를 보거나 또는 그가 지닌 본래의 색채로 그를 보아주게 되면, 그는 모욕을 당한 것 이상으로 침해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 자신은 당신이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그러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서,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가장 거짓되고 가장 불필요한 수법들까지 동원하여, 때로는 그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나 또는 심지어 그가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조금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까지 거짓으로 자랑함으로써, 자신에게 어느 정도 있는 양호한 성품과 재능들을 자랑한다. 그는 당신의 존경을 경멸하기는커녕 당신의 존경을 얻으려고 전전긍긍한다. 그는 당신의 자아평가를 폄하(貶下)하여 상처를 주기는커녕 도리어 그것을 기꺼이 존중해 주면서, 그 대신에 당신도 자신의 그것을 존중해 주기를 바란다. 그는 아첨을 받기 위해 아첨을 한다. 그는, 공손하고 정중하게 행동함으로써, 그리고 때로는 당신에게 실제로 중요한 도움을 줌으로써(비록 흔히 그것을 쓸데없이 자랑하고 다니기는 하지만) 당신의 환심을 사려고 연구하거나 당신을 매수해서 당신이 자신에 대해 좋게 생각하도록 하려고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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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보다 위대한 사람을 발견했기 때문에 487

오만(傲慢: proud)한 사람은 자기와 지위가 동등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언제나 마음이 편치 못하며, 자기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더욱 그렇다. 이런 자리에서는 그는 고상한 자기과시를 할 수 없으며, 그들의 얼굴표정과 대화가 그를 압도하기 때문에, 그는 감히 고상한 체 할 수가 없다. 그가 의지하는 것은 자기보다 비천한 사람들과의 교제인데, 자신은 그들을 존경하지도 않고, 그들과 교제하고 싶어한 것도 아니므로, 그들은 결코 그를 유쾌하게 하지 못한다. 그와 교제하는 자들은 그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 그에게 아첨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에게 의지하려는 사람들뿐이다. 그는 자기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을 찾아가는 일이 거의 없는데, 만일 찾아간다고 하더라고 그것은 그들과의 교제에서 누리게 될 진정한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도 그들과 교제할 자격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것은 클라렌돈 경(Lord Clarendon)이 애런델 백작(Earl Arundel)에 관해서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에 의하면, 애런델 백작이 때때로 궁정에 갔던 이유는 그곳에 가야만 비로소 자기보다 위대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 후 그곳에 거의 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곳에서 자기보다 위대한 사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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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심이 많은 사람 487

허영심이 많은 사람의 경우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그는 오만한 사람이 자기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과의 교제를 회피하려고 하는 것만큼이나 자기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과 교제할 기회를 찾는다. 그는,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내뿜는 빛은 그들의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몸에도 빛을 반사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는 궁정의 모임과 대신들의 접견에도 자주 참석하여, 마치 자신이 부(富)와 출세(出世)의 후보자라도 된 듯이 으스댄다. 그러나 그가 행복을 어떻게 누려야 하는지 그 방법을 안다면, 그가 실제로 훨씬 더 값진 행복을 가지고 있을 때, 그런 일로 으스대서는 안 된다.

그는 상류층 사람들의 연회에 참석하도록 요청받는 것을 대단히 좋아하며, 영광스럽게도 그곳에서 상류층 사람들과 친하게 사귄다는 것을 남들에게 자랑하기를 더욱 좋아한다. 그는 가능한 한 사교계 인사들, 여론을 좌우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재치 있는 사람들, 학식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인기 있는 사람들과 교제하려고 한다. 그러나 일단 매우 불확실한 대중들의 호의(好意: favour)라는 조류(潮流)가 어떤 면에서건 그와 절친한 친구에게 불리하게 흐를 때에는 언제든지 그는 그 친구와의 교제를 회피한다.

그가 호감을 사고 싶어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수단들이 아낌없이 동원되는데, 불필요한 과시(誇示), 근거 없는 허세, 끊임없는 부화뇌동(附和雷同), 그리고 아첨(대부분 즐겁고 명랑한 아첨이고, 식객이나 어릿광대의 조잡하고 지겨운 아첨인 경우는 거의 없지만) 등 모든 수단들이 총동원된다.

이와는 반대로, 오만하거나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결코 아첨을 하지 않으며, 어느 누구에게도 예의바르게 대하는 일이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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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허영심의 결합 492∼493

오만과 허영심이 각각 그 자신의 특성에 따라서 행동할 때, 이들의 두드러진 특징을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그러나 오만한 사람은 흔히 허영에 차 있으며, 허영에 찬 사람은 흔히 오만하다. 자신이 정당하게 받을 자격이 있는 것보다도 자기 자신을 더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훨씬 더 높게 평가해 주기를 바라며, 마찬가지로, 자기가 자신을 생각하는 것보다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더 높게 평가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자신이 정당하게 받을 자격이 있는 것보다도 자신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결점은 흔히 동일한 성품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양자의 특징들도 필연적으로 서로 혼동되고 있다. 우리는 이따금 허영심의 천박하고 주제넘은 과시(誇示)가 오만의 가장 악독하고 유치하고 가소로운 무례함과 함께 결합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어떤 특정한 성품을 어떤 것에 귀속시켜야 할지, 즉 그것을 오만으로 간주해야 할지 아니면 허영심으로 간주해야 할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하여 흔히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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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의 과오 592∼593

나는 다만, 영예롭고 숭고한 것을 행하려는 갈망(渴望)과, 스스로를 존중과 시인(是認)의 적절한 대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갈망을 허영심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적정성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보이고자 노력할 것이다. 심지어 충분한 근거와 이유가 있는 명예와 평판에 대한 애호, 진정으로 존중받을 만한 수단을 통해 존중받고자 하는 애호까지 허영심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서는 안 된다. 전자는 미덕(美德), 즉 인성(人性)에서 가장 숭고하고 가장 위대한 격정에 대한 애호이고, 후자는 진정한 영광에 대한 애호로서, 이것은 앞의 것보다는 분명히 열등하지만 그러나 그 고상한 정도에 있어서는 앞의 것 바로 다음가는 격정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게는 허영(虛榮)의 과오(過誤)가 있다. 전혀 칭찬받을 가치가 없거나 또는 그가 기대하는 정도로 칭찬받을 가치가 있지도 않은 특성에 대해 칭찬받기를 갈망하는 사람들, 즉 자신이 착용하는 옷이나 장신구의 시시한 장식 또는 동등하게 천박한 표현인 자신의 일상적인 행동거지에 근거하여 칭찬받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이런 부류에 속한다. 확실히 칭찬받을 자격은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자신에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님을 그 자신이 완전히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칭찬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도 허영의 과오가 있다. 자신이 어떤 일에 전혀 중요한 인물이 아니면서 마치 자신이 그 일에 매우 중요한 인물인 것처럼 으스대는 골빈 멋쟁이(coxcomd), 자신이 결코 한 적이 없는 모험을 한 척하면서 그것에 대한 공로를 차지하려는 미련한 거짓말쟁이(liar), 자신에게 아무런 권리도 없는 책의 저자인 양 자처하는 우매한 표절자(剽竊者: plagiary), 이들 모두도 허영심이란 격정을 가진 사람들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분명히 표현되지 않는 존중과 시인(是認)의 감정에는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 그런 감정 자체보다는 자신에게 행해지는 시끄러운 칭찬의 표현과 환호를 더 좋아하는 사람, 자신에 대한 칭찬이 귓가에서 앵앵거리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 직함(職銜)을 좋아하고, 인사받기 좋아하고, 방문 받기 좋아하고, 시중 받기 좋아하고, 존경받고 주목받기 좋아하는 사람, 이들 역시 허영의 과오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경박한 감정들은 앞에서 말한 두 가지 경우(즉, 진정한 미덕에 대한 애호와 진정한 영광에 대한 애호)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앞의 두 가지가 인류의 가장 고상하고 가장 위대한 격정들이라면, 이것은 인류의 가장 천박하고 가장 가져서는 안 될 격정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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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3-13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허영심을 점검해봐야겠습니다.
좋은 문구 감사드립니다.

오렌님, 봄이예요.
즐거운 한주되셔요. ^^

oren 2011-03-14 00:01   좋아요 0 | URL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허영심을 점검해 봐야겠습니다.)
마고님도 즐거운 한 주 되세요~

2011-03-13 15: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14 0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13 18: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14 0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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