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사이에 일찌기 경험하지 못한 심각한 갈등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이 와중에 아베 총리는 주한 일본 대사를 새로운 인물로 교체할 모양인데, 조만간 부임할 신임 대사의 프로필이 새삼 화제다. 그의 장인이 『금각사』를 쓴 미시마 유키오이기 때문이다. 외교관으로서의 신임 대사의 경력 보다는 그의 장인에 얽힌 이야기가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가면의 고백』, 『금각사』, 『우국(憂國)』 등을 쓴 미시마 유키오야말로 세계 대전에서 참패한 이후 극도로 억눌려 있던 '극우 일본'을 갑자기 깨어나게(?) 만든 상징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미시마 유키오가 한국에서 커다란 주목을 끌었던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가 쓴 『우국(憂國)』이라는 유명한 작품이 신경숙 작가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스며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문학작품 속에 담긴 문장들이 얼마나 매혹적이었으면 한국을 대표하는 여류 작가마저 '자신도 모르게' 그의 글을 고스란히 자신의 작품 속에 녹여냈겠는가.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쥐도 새도 모르는 솜씨로 말이다. 명백한 표절조차 순순히 인정하지 못했던 낯부끄러운 여류 작가의 '이중의 과실'을 여기서 새삼 자세히 다룰 필요는 없을 듯하다.

  

미시마 유키오(1925∼1970)는 일본이 점차 팽창하는 제국으로 변모하던 쇼와(재위 1926∼1989) 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10대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여 20대와 30대에 일찌감치 일본 문단의 최정상에 올랐다. 40대에 이미 두 차례나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그는 불과 45세의 한창 나이에 느닷없이(!) 할복 자살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일본 사람들뿐 아니라 전세계 사람들을 충격 속에 몰아 넣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추천으로 문단에 등단한 이래 탐미주의의 극치로 평가받는 『금각사』와 같은 걸작을 남긴 천재 작가가 하루 아침에 (아베보다도 더 아베스러운) 꼴사나운 모습으로 '일본 자위대'를 향하여 '깨어나라'고 외치며 장렬하게(!) 할복 자살로 삶을 마감했으니, 세상 사람들이 그의 느닷없는 행동을 보고 얼마나 놀랐겠는가!

 

 

미시마 유키오의 극단적인 할복 자살에 얽힌 전후 사정들을 들여다 보기 전에, 그의 문학적인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그의 갑작스런 우경화와 충격적인 자살이 그만큼 더 충격적으로 느껴질 터이기 때문이다.

 

그는 불세출의 걸작인 『금각사』를 발표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탄탄대로를 질주하는 문학 청년이었다. 그 무렵까지도 그는 31세의 노총각이었다. 금각사를 발표하고 2년이 지난 1958년에 결혼할 때 주례를 맡은 인물은 일본인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였다. 그런데 '일본인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설국』의 작가로 귀착되기까지는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세설의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1886∼1965)가 그보다 앞서 세 차례나 노벨상 후보로 올랐다가 아깝게 탈락했기 때문이었다. 다니자키는 1958년에는 펄 벅의 추천으로 노벨상 후보에 처음 올랐고, 1963년과 1964년에는 최종 후보까지 올라 수상 일보 직전까지 갔으나 결국 수상에 실패했다.(1964년에는 '노벨상 수상'을 거부한 사르트르에게 밀려났다.) 결국 1965년에 그가 사망하고 나서 1968년에 가와바타에게 노벨상이 돌아가자 "다니자키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노벨문학상은 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언급되기에 이르렀다.

 

미시마 유키오는 다니자키가 죽은 지 5년 후인 1970년에 비극적인 자살로 마감했는데, 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탓인지 가와바타 야스나리도 불과 2년 뒤인 1972년에 가스관을 입에 물고 자살하고 만다. 미시마 유키오는 다니자키가 죽은 해인 1965년과 2년 후인 1967년에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었다. 결국 이들 세 사람의 문학 천재들은 모두 노벨상 후보에 올랐으나 그 가운데 한 사람만 노벨상을 수상했고, 결혼식때 주례와 신랑으로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충격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삶을 마감했던 것이다.

 

다시 미시마의 죽음으로 돌아가 보자. 그의 갑작스럽고도 충격적인 자살은 당시에도 세간에 널리 알려졌지만, 차제에 다시 한번 들여다볼 필요도 있다. 그의 죽음이 '아베 정권'의 군국주의 부활과도 모종의 관련이 있다고 어렴풋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1966년 민병대 "방패의 모임(楯の會)'를 결성, 우익 정치 활동에 본격 참여했다. 방패회는 무장 투쟁 훈련을 했다. 이는 이후 일본의 신우익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시마는 1968년에 <문화방위론>을 간행했다. 이는 무질서할 정도로 자유롭게 전개되어 왔던 일본 문화의 정신과 '미의 총람자(總攬者)'로서 그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천황이라는 존재를 물질 문명의 더러움으로부터 구해내고, 또한 공산주의의 손으로부터 지키려면 무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  1969년 우익 운동가 에토 고사부로의 자결에 큰 영향을 받아 1970년 11월 25일 방패의 모임 대원 4명과 함께 자위대 이치가야 주둔지에 '우수 자위대원 표창'을 명목으로 들어가 자위대 동부 방면 총감과 면담하던 중에 가지고 간 일본도로 위협해 인질로 잡은 뒤 부하 8명을 부상하게 했다. 총감의 방 앞 발코니에서 몰려든 기자들을 향해 미일 안보조약 개정, 헌법 개정을 요구, 자위대의 쿠데타를 촉구하는 '이치가야 연설'을 한 뒤 약 5분 후 모리타 마사카쓰와 함께 할복 자살했다. 이 사건은 세간에 큰 충격을 안겼다. (출처 :위키백과)

 

미시마의 자살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대다수의 일본 사람들에게 '시대착오적인 행위'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내면에 끈끈히 흐르는 '침략 본성'이 어떻게 일순간에 모두 사라질 수 있겠는가.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극우 본성이 다시 한번 꿈틀거렸음은 누구라도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이윽고 그의 자살 이후에 새로운 우익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그 흐름이 오늘날 아베 총리로 대표되는 자민당 정권에까지 깊숙히 스며있다는 게 대체적인 견해다. 그러니 미시마의 자살이 어찌 한낱 '극우 사상에 심취된 어느 문학 천재의 기이한 자살'로 간단히 치부될 수 있겠으며, 그의 맏사위가 차제에 신임 주한 일본 대사로 부임하는 일이 어찌 우연으로만 받아들여질 수 있겠는가.

 

이미 49년 전에 죽은 어느 문학 천재의 기이한 자살을 둘러싸고 오늘날의 우리가 그의 죽음을 너무 과장해서 새삼 돌이켜 보고 예민하게 재해석할 필요는 없다. 또한 그의 죽음보다 14년이나 앞서서 발표된 『금각사』라는 걸작 소설 속에서 미시마 유키오의 '극우 사상의 씨앗들'을 새삼 꼬치꼬치 찾아내 억지로 연결시킬 필요는 더더욱 없을 지도 모른다. 굳이 맹자나 순자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이, 인간에게는 누구한테나 타인을 지배하려는 나쁜 욕망이 내재되어 있게 마련이고, 그것이 애국심이나 민족주의와 결합하게 되면 더욱 맹렬하게 불타 올라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까지 발전할 개연성은 어느 시대에나 능히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금각사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유명한 건축물이 되었고, 그곳을 찾는 여행객들이 한해 수백 만에 이를 정도가 되었다. 이 건축물이 지어진 해가 공교롭게도 1397년이었고, 조선이라는 나라가 건국된 해보다도 딱 1년이 앞섰다는 건 중요하지 않다. 또한 이 소설 속에 미국과 맞서 싸우던 '군국주의 일본'이 자주 등장하고, 금각사가 실제로 '방화범'에 의해 완전히 전소된 때가 6.25 전쟁이 터지고 나서 정확히 7일이 지난 때였고, 작품 속의 주인공이 한국전쟁 때문에 금각사를 불태우려는 결심을 더욱 앞당겼다는 사실마저도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 금각사(출처 : 위키백과)

 

 

6월 25일, 한국에 동란이 발발했다. 세계가 확실히 몰락하고 파멸하리라는 내 예감은 사실이 되었다. 서둘러야 한다.(342쪽)

 

 - 미시마 유키오, 『금각사』, <제9장>

 

 

소설 『금각사』와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와 극우주의 아베 정권을 강력하게 이어주는 뚜렷한 연결고리들은 그런 사소한 우연 속에 숨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웃 국가에 대한 악랄한 식민 지배뿐 아니라, 가장 추악한 범죄인 2차 대전 당시의 끔찍한 만행들까지도 뉘우치지 못하고, 도리어 멀쩡한 평화 헌법을 개정하지 못해 저토록 안달하는 아베 정권의 추악함은 어쩌면 '악의 평범성'으로부터 훨씬 더 쉽게 찾아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로 내가 욕망하지만 차지하지 못하고, 행위하지 못하고, 지배하지 못하는 대상에 대한 '해코지 본성' 또는 '파괴 본성'이 아닐까.

 

알려진 바에 따르면, 미시마 유키오는 『금각사』를 완성한 이후로 죽기 전까지의 기간 동안에 급속도로 '우경화'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미숙아로 태어난 미시마는 어려서부터 육체적인 열등감에 몹시 시달렸던 탓에 12세까지도 할머니 밑에서 양육되었으며, 또래 소년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보내거나, 혹은 조모가 지정해 준 이웃집 여자아이들과 소꿉놀이를 하며 보냈다고 한다. 그런 열등감이 얼마나 지독했겠는가. 그가 마침내 그런 열등감을 극복한 계기가 『금각사』를 연재하는 동안에 병행했던 '육체미 운동'이었다.

 

 

"이러한 열등감을 30년이나 짊어지고 온 것이 무슨 이익이 있었는가를 생각하면, 정말로 어리석게 여겨진다."

 

미시마가 육체미 운동에 열중하여 하루하루 근육이 붙어나가는 동안 『금각사』의 주인공인 미조구치 또한 '말더듬이'이자 '행위 불능자'(그는 대학교에 다니는 건강한 청년이었지만 '동정'을 떼는 데 여러 번 실패한다.)에서 차츰 벗어나 마침내 '미의 화신'인 금각사를 불태우는 대담한 행위를 열망하기에 이른다.

 

과거의 육체적인 열등감으로부터 탈피한 작가 미시마와 금각에 방화하여 행위의 세계로 뛰어든 미조구치는, "일을 하나 끝내고 담배를 한 모금 피우는 사람이 흔히 그렇게 생각하듯이, 살아야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는 마지막 문구에 공감하고 있다. 그렇기에 미시마는 『금각사』에 '개인의 소설'이라는 별칭을 부여했던 것이다.

 

'이면의 테마'에 중점을 두고 『금각사』를 평한다면, 이것은 분명히 '고백 소설'이자 '성장 소설'이다. 젊은 시절 특유의 어두운 고뇌와, 그 고뇌를 극복하며 성장하려는 주인공의 필사적인 몸부림이 이 작품의 곳곳에 숨겨져 있다.(401쪽)

 

 - 미시마 유키오, 『금각사』, <작품 해설> 불후의 명작 《금각사》의 테마는 무엇인가 

 

 

 소설 『금각사』는 명백히 '고백 소설'이자 '성장 소설'이며, 작가 스스로 밝혔듯이 '개인의 소설'이라는 사실이 새삼 우리에게 크게 부각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금각사』를 읽는 독자가 오늘날 '아베 정권'으로 대표되는 일본 극우파들의 추악한 본성을 소설 속에서 다시 찾을 수 있고, 그러한 재발견이야말로 미시마 유키오가 그토록 치열하게 그려내고자 애썼던 『금각사』 방화범의 행위와 극우파 아베 정권의 폭주를 연결시켜주는 '비밀 통로의 발견'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면 너무 지나친 억측일까.

 

미시마 유키오는 '금각사 방화범에 얽힌 실화'를 자신의 '고백 소설'로 만들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자료 조사에 매달린 기간만 무려 5년이었다. 그는 방화범의 이야기 속에 자신을 투영시키기 위해 일부러 '수기 소설' 내지 '고백 소설'의 형식을 취했으며, 바로 그 점이 독자들을 강력하게 몰입하도록 만든다.(특정한 대상에 광적으로 집착한 나머지 끝끝내 그 대상을 파괴하고야 만다는 이야기가 '수기' 형태로 쓰였다는 점에서 소설 『금각사』는 언뜻 『롤리타』를 연상시키키도 한다. 롤리타에 집착한 주인공 험버트의 수기 속에 작가 나보코프의 목소리가 절묘하게 겹쳐져 있다는 점도 서로 닮았다. 『롤리타』는 『금각사』보다 1년 앞선 1955년에 출간되었다.) 

 

소설의 주인공인 미조구치가 '말더듬이'라는 육체적 결함 때문에 겪는 극심한 열등감은 차츰 '아름다움을 향한 구애의 좌절'로 이어진다. 자신의 이상형이나 마찬가지였던 우이코를 만나러 새벽녘에 골목길에서 숨어 기다렸다가 막상 마주치고 나자 입도 뻥긋 못하고 망신만 당한 게 대표적이다. 그런 좌절들은 나중에 성인이 된 뒤로도 줄곧 이어진다. 대학 동창생인 가시와기가 거듭 여친들을 소개해 주지만 미조구치는 거듭 '행위의 문턱'에서 좌절을 겪는다.

 

가시와기는 나를 인생으로 재촉해주는 친절 또는 악의를 내가 고맙게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은 여러 차례 말한 바와 같다. 중학교 시절에 선배의 단검 칼집에 흠을 냈던 나는, 인생의 밝은 표면에 대한 무자격을 이미 내 자신 위에 명확히 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가시와기는 뒷면에서 인생에 도달하는 어두운 샛길을 처음으로 가르쳐준 친구였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는 파멸로 돌진하는 듯 보이면서도, 의외의 술수에 능하기에 비열함을 그대로 용기로 바꿔 우리들이 악덕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시금 순수한 에너지로 환원시키는 일종의 연금술이라 해도 좋았다.(180∼181쪽)

 

 

인식이나 욕구가 행위로 이어지지 못하는 극단적인 좌절감은 마침내 '금각사'로 전이된다. 금각사야말로 어려서부터 그에게 줄곧 '완벽한 미의 화신'이자 '우이코의 물질화된 대상'이었음에도 그는 금각사를 온전히 소유하지 못한 채 줄곧 바라만 본다. 오매불망 '금각사와의 합일(合一)'을 꿈꾸던 그는 금각사 주지로부터 '후계자' 자격을 박탈당한 일을 계기로 학업마저 포기한 끝에 출분((出奔)하고, 금각사를 불태우기로 마음 먹는다.

 

문득 나는 가시와기가 처음 만났던 날 나에게 한 말이 기억났다. 우리들이 갑자기 잔학해지는 것은 화창한 봄날의 오후, 잘 깎인 잔디밭 위에서 나무 사이로 새어 나온 햇빛이 여기저기 비치는 모습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을 때 같은 그러한 순간이라고 했던 그 말이.

……

'금각을 불태워야 한다.'(276∼277쪽)

 

 

"내가 인생에서 최초로 부닥친 난관은 아름다움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라고 회상한 〈나〉는 2차 대전 중의 종말관 속에서 '금각사와 함께 불에 타 죽는 생의 결정적 순간'을 바랬지만 전쟁은 허망한 패망으로 끝나고, 전후의 절망과 고독 속에 살아가야만 한다. 주인공 미조구치의 이런 정신 편력이야말로 '먼 훗날 극우의 상징'이 된 미시마의 정신 편력에 다름 아니다. '극우'란 무엇일까. 결국 '화창한 봄날' 같은 따사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마음 상태도 포함하는 개념이 아닐까. 그렇다면, 전쟁의 참화와 함께 불타오르는 금각을 보지 못하고 절망과 고독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좌절감이야말로 오늘날 '극우 일본'의 상징이 된 아베의 어두운 내면의 일부가 아닐까.

 

그렇다면, 극우가 극단에 이르러 결국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까지 발전한 게 결국 '금각사에 대한 방화'이고, 자위대에 무단 침입하여 '자위대여, 무장하라'고 외쳤던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 자살'이고, 미우나 고우나 이웃으로 서로 공생하며 살아온 이웃나라를 다시금 힘으로 짓밟으려는 '아베의 폭주'가 아닐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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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9-08-18 2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시마 유키오란 일본 작가는 70년대에 나온 부도덕 교육강좌란 책에서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시니컬한 그의 독설에 맘에 들어 그에 대해 알아보니 지위대에 무력 봉기를 선동하다 할복 자살을 한 극우 인사란 것을 알게되고 그에 대해 관심을 끈 기억이 나네요ㅡ.ㅡ

oren 2019-08-18 23:40   좋아요 0 | URL
<부도덕 교육강좌>라는 책도 있었군요!
그런데 목차를 찾아 보니 참 꺼림칙한 내용들이 많네요...
아베스러운 치졸한 것들도 많고요...
* * *
남에게 폐를 끼치고 죽어라··28
친구를 배신하라··76
약자를 괴롭혀라··82
자만심을 가져라··89
약속을 지키지 마라··106
“죽여버려!”라고 소리쳐라··112
죄는 남에게 덮어씌워라··129
은혜는 잊어라··159
남의 불행을 기뻐하라··165
악덕을 많이 쌓아라··171
죽은 뒤에 험담하라··215
끝이 나쁘면 모든 게 나쁘다··405

미미 2020-05-05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으로 출판하셔도 될만큼 훌륭한 글입니다. 덕분에 놀라운 사실들을 알았네요. 최근에 어찌어찌해서 배우게 된 일본 작가들이 마침 저렇게 연관되어져 있다는 것도 신기하구요. 역시 더 찾아보고 공부할것이 많구나 결론 내립니다. 앞으로도 많은 글 올려주세요. 틈틈히 oren님의 다른 리뷰들도 읽어볼께요!
 

 

불면과 되새김질, 역사적 의미에도 어떤 한도가 있는데, 이 한도에 이르면 인간이든 민족이든 문화든 살아 있는 것은 모두 해를 입고 마침내 파멸한다.

 - 니체

 

 * * *

 

어느날 갑자기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핫이슈로 떠오른 한일 간의 갈등을 통해 새롭고도 뚜렷하게 목도하는 현상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역사의 과잉'이 아닐까 싶다. 과거의 역사가 현재와 미래의 삶까지도 송두리째 삼키는 게 과연 얼마만큼 가치있는 일인지를 우리는 너무 쉽게 불문에 부치고 있는 건 아닌가.

 

이번 사태의 원인 제공 책임은 아무리 곱씹어 생각해도 간악무도한 '아베 일당'에게 따지고 묻는 게 맞다. 그는 태생적으로 우리나라를 업신여기는 고약한 피를 지닌 극우 이데올로기로 찌든 인물이다. 오늘날 일본 사회에 크게 확산된 혐한 분위기마저도 아베 정권 출범 이후에 두드러졌다는 분석도 있는 걸 보면 그가 우리나라에 끼친 해악이 얼마만큼 작위적인 것인지를 새삼 돌아볼 필요도 있다. 또한 그가 자신의 태생적인 성향과 정치적인 야심 때문에 한국 때리기에 유난히 골몰하지 않았더라면 우리에게 이토록 치졸하고도 무모한 도발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터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일본의 경제 보복을 둘러싼 두 나라 사이의 갈등이 '이러다간 우발적인 무력 충돌까지도 우려된다'는 식으로까지 무분별하게 확산된 건 청와대와 집권 여당의 방심과 과잉 대응이 단단히 한 몫 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제는 반복하기도 지겨운 레토릭이 되어 버린 죽창가와 의병 운동과 국채 보상 운동 언급부터 과잉이었다. 그런 말들을 재빨리 꺼내 든 사람들이야말로 이번 사태에 대해 최일선을 떠맡은 고위급 핵심 당사자들이었다. 그 정도의 수사로도 부족했는지 곧바로 성웅 이순신의 12척의 배가 소환되었고 신흥무관학교와 헤이그 밀사 파견까지도 뉴스에 오르내렸다. 기야 한미일 군사동맹의 중요한 고리 가운데 하나인 지소미아 파기가 검토 단계를 넘어 실행 압박에까지 이르렀고, 올림픽 보이콧 문제와 도쿄 여행 금지 구역 선포가 언급되는가 싶더니, 마침내 'No Japan' 깃발이 서울 한복판을 삽시간에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도대체 이토록 무분별한 '과잉 대응'이 어디에 있는가.

 

이토록 무책임하고도 자극적인 대응이야말로 우리의 지혜 부족과 경박함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소치가 아니고 무엇인가. 죽창가가 지배계층의 학정을 견디다 못해 맨몸으로 저항하다가 끝내 맥없이 쓰러지고 만 민초들의 최후의 저항을 상징하고, 의병 운동조차 국가적인 대재앙을 미리 대비하지 못한 무능한 조정과 관군 부족 때문에 자발적으로 일어난 민초들의 항일 구국 운동이었음을 왜 모르는가. 신흥무관학교나 헤이그 밀사 파견 또한 억울하게 나라를 빼앗긴 처지에서 조국을 구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나 간절한 노력을 상징하는 아픈 역사에 다름 아니었다.

 

이토록 아픈 과거의 역사가 왜 하필 이런 시점에 빠짐없이 다시 불려나와야 하는가. 국민들의 삶이 정부의 거듭된 외교적 무능과 경제 실정 등으로 하루하루 나락에 빠져드는 데도 정부에서는 스스로 수습할 능력이나 대책이 없어 애꿎은 국민들을 '한일 경제 전쟁의 최일선'으로 가열차게 내모는 듯한 느낌을 주는 건 왜인가. 우리나라 주식시장의 시가총액이 단 이틀 만에 75조원이나 사라지고, 원화의 가치가 수년래 최저치로 급격하게 추락한 이유 가운데 하나를 '일본의 경제 침공'에 놀라 허둥대며 다급하게 죽창가와 의병과 이순신의 12척부터 호출한 무능한 지배층의 언급으로부터 도출할 수 있다면 너무 지나친 억측일까.

 

정말로 능력 있고 지혜로운 정부라면 '일본의 경제 침략'을 맞아 황급하게 '의병'부터 찾을 게 아니라 튼튼한 관군부터 내세워 수비를 단단히 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헤이그 밀사 파견을 도모할 게 아니라 일본의 불의와 우리나라의 정당성을 세계 만방에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능력 있는 공식 외교 특사들을 내세워야 마땅한 게 아닌가. 지금의 우리나라가 나라마저 빼앗겼던 100년 전의 그토록 나약하고 가련한 나라가 아니라면 말이다.

 

지소미아 파기도 그렇다. 두 나라 사이의 과거사 갈등 때문에 일본이 치졸한 경제 보복으로 나온 게 이번 사태의 본질이다. 우리가 일본의 부당한 조치에 격렬하게 항의하고 상대를 마음껏 비난할 수 있는 토대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과거사 갈등의 경제 보복 무기화에 맞대응해 우리가 경제 문제를 안보 문제로까지 확대시킨다면 국제적인 '아베 비난 여론'이 순식간에 흔들릴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가뜩이나 한미일 안보동맹이 크게 흔들리는 마당에, 한일 사이의 과거사 갈등과 경제 보복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안보 협정까지 끌여들여 우리의 유일한 군사동맹국인 미국까지 자극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일본에 보복하기 위해서라면 미국과의 관계는 이럴 때 적당히 훼손시켜도 좋단 말인가. 이런 일이야말로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서울 한복판에 내걸린 '일본 보이콧 깃발'은 지금 생각해도 화가 치민다. 일본과 우리나라 사이에 켜켜이 쌓인 과거의 앙금들 때문에 이 사단이 났는데, 정부와 여당이든 지자체든 국민이든 어느 누구라도 하루 빨리 이 갈등을 슬기롭게 치유하고 다시 편안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게 모두에게 '최선'이 아닌가. 모든 정책 목표는 마땅히 거기에 맞춰져야 올바른 일 아닌가. 도대체 중구청장은 '무엇을 위해' 그런 깃발을 서울시민들의 세금으로 만들어 우득부득 내걸어야 했는가. 집권당의 '반일 캠페인'에 더욱 큰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반일 무드가 나부끼는 깃발 덕분에 더욱 드높아지면 문제 해결이 더욱 앞당겨지는가. 하루하루 가슴을 졸이며 생업에 몰두하는 서울 시민들과 대한민국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말인가. 일본의 지자체 공무원들은 급감한 방일 관광객 때문에 항공 노선 감축에 나선 국내 항공사까지 직접 찾아와서 '노선 유지'를 간곡히 당부하는 마당에, 어떻게 중구청장의 머리 속에는 그런 상식적인 생각은 떠오르지 않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반일 무드 고취'에만 그토록 정신이 팔려 있는가. 이런 마인드라면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인들의 입국부터 미리 막아야 옳은 일 아닌가.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위해 일본과 경제 전쟁을 벌이고 있단 말인가.

 

도쿄를 여행 금지 구역으로 검토해야 된다는 주장이나 올림픽 보이콧을 심각하게 검토해야 옳다는 주장 앞에서는 할 말을 잃을 지경이다. 어떻게 꾀를 내도 죽을 꾀만 낸다는 말인가. '일본 경제 침략 특별 대책 위원회'라는 곳에서는 마치 한일 사이의 온갖 잠재된 갈등 요소를 이번 기회에 최대한으로 부각시키고 극대화하는 게 지상 최대의 목표인 것처럼 활동하는 듯하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도시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여행객만이 아님은 새삼 물어볼 필요가 없다. 정말로 도쿄의 방사능 오염이 문제가 된다면 우리가 미리 나설 필요조차도 없다. 다른 선진국들이 어련히 알아서 그런 문제점을 제기하고 조치를 취할까. 때는 이때다, 마침 잘 됐다 하고 우리나라가 떡 하니 도쿄를 여행금지구역으로 정말로(!) 설정한다고 가정해 보자. 세상 사람들이 도대체 우리를 어떻게 보겠는가. 멀쩡한 이웃나라의 수도까지도 자국 국민들의 여행을 통째로 금지시키는 나라가 등장했다고 얼마나 비웃겠는가. 설마, 이번 참에 정부에서 '도쿄 여행 금지 조치'를 내리게 된다면 눈치 빠르고 똑똑한 우리 국민들은 미리 알아서 '도쿄'뿐만 아니라 일본까지도 여행금지 국가로 찰떡같이 알아 듣고 거국적으로 일본 여행을 기피할 줄 기대했는가. 

 

엊그제는 우리가 그토록 가슴 절절히 불러 왔던 애국가마저 도마 위에 올랐다고 한다. 애국가를 작곡한 사람이 친일인명사전에까지 오른 인물이니 전혀 근거없는 문제 제기는 아닌 셈이다. 그 문제는 과거에도 이미 충분히 다뤄졌고, 가슴 절절한 애국심을 고취시킨 애국가의 기나긴 역사에 비춰봐서도 그걸 새삼스럽게 부정할 까닭이 없다는 쪽으로 정리된 터였다. 그런데도 왜 하필 이럴 때 애국가가 또다시 문제인가. 아무리 일본과의 싸움이 중요하다고 쳐도 수천만 동포들에게 그토록 가슴 뜨거운 애국심을 불러일으킨 애국가마저 '친일'이라는 이름 앞에 간단히 내동댕이쳐져야 한다면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는 도대체 무엇이고 버려야 할 하찮은 가치란 무엇이란 말인가. 친일이 그토록 문제가 된다면 같은 우리 민족에게 탱크와 총칼로 무참히 짓밟고 수백 만의 생명까지 앗아간 북한에게는 왜 그토록 너그러운가. 일제의 강제 징용이나 위안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온갖 최악의 만행을 저지르고 전국토를 잿더미로 바꾼 걸로도 모자라 아직까지도 철책 너머로 무시무시한 핵무기를 개발하고 미사일을 연거푸 쏘아대는 북한을 무턱대고 감싸고 옹호하는 태도를 취하는 '친북파'들은 도대체 어떤 형벌로 다스려야 마땅하다는 말인가.

 

애국가를 지은 작곡가의 친일 행위 정도는 너그럽게 용서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과거에 저지른 잘못에는 거기에 마땅한 죗값을 치러야 마땅하고, 한번 친일 행위를 했으면 영원히 그에 상승하는 대접을 받아도 굳이 말릴 생각은 없다. 그렇더라도 그 사람이 가슴 절절한 애국심으로 애써 지어 만들었고 지금까지 물경 수억 명의 대한민국 사람들이 그토록 눈물겹게 불러온 애국가마저 부정하지는 말자는 얘기다. 무분별하게 과거에 매몰되고 집착하고 떠받드는 자세야말로 어리석은 짓이기 때문이다. 친일이 그토록 중차대한 흠결이라면 친일 행위에 조금이라도 가담했던 조상을 둔 후손들은 지금이라도 모든 공직에서 배제되어야 마땅하고, 피선거권까지 박탈당해야 옳은 일 아닌가. 또한 독립 유공자나 전쟁 유공자의 후손들에게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혜택이 부여되어야 마땅한 일 아닌가.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다가 목숨을 잃은 전사들의 고귀한 희생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제발 정신들을 좀 차리자. 과거의 역사는 영광스러운 것도 있을 수 있고, 부끄럽거나 치욕스러운 역사도 있을 수 있다. 영광스러운 역사는 그에 마땅한 만큼 기리면 된다. 부끄럽거나 치욕스러운 역사는 그에 마땅한 만큼 반성하고 훗날을 도모하는 바탕으로 삼으면 족하다. 그러나 끊임없이 과거사에 집착하고 매달릴 필요는 없다. 그럴수록 우리의 현재와 미래는 그만큼 침식당하고 억눌리기 때문이다. '역사의 과잉'은 어쩌면 철학의 빈곤으로부터 느닷없이 끌려나온 부끄러운 사생아일지도 모르겠다. 현재와 미래의 삶이 중요하다면 '역사의 과잉'은 그만큼 절제될 필요가 있다.

 

반일 열기가 한여름 폭염만큼이나 뜨거운 이 때 이토록 고리타분한 글을 쓰는 일이야말로 '반시대적 고찰'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거가 지닌 무게를 그에 합당한 만큼 지혜롭게 다루는 일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과제일지도 모른다. 과거가 현재와 미래를 침식하지 않도록 슬기롭게 다루는 문제에서 니체만큼 깊게 천착한 인물도 드물 것이다. 

 

 * * *

 

 

가장 작은 행복에서도, 또 가장 큰 행복에서도 행복을 행복으로 만드는 것은 언제나 하나다. 잊을 수 있다는 것, 또는 학문적으로 표현한다면, 자신이 지속되는 동안 비역사적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이다. 순간의 문턱에서 모든 과거를 잊으면서 정착할 수 없는 사람은, 또 승리의 여신처럼 현기증이나 두려움 없이 한 지점에 서 있을 수 없는 사름은 행복이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더 나쁜 것은, 그가 결코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한번 생각해 보라. 망각할 수 있는 힘이 없는 인간이 어디에서나 생성만을 봐야 할 형벌을 받았다면, 그런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밎지 못할 것이고 자기 자신도 믿지 못할 것이며, 모든 것이 움직이는 점으로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만을 볼 것이며 이 생성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진정한 제자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행위에는 망각이 내재한다. 모든 유기체의 생명에는 빛뿐만 아니라 어두움도 속하듯이. 철저하게 역사적으로 느끼려는 사람은 잠을 자지 못하도록 강요당하는 사람이나 되새김질로만, 반복되는 되새김질로만 살아가야 하는 동물과 비슷할 것이다. 다시 말해, 동물이 보여주듯이 기억 없이 살아가는 것,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망각 없이 산다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또는 좀더 단순하게 내 주제를 설명한다면, 불면과 되새김질, 역사적 의미에도 어떤 한도가 있는데, 이 한도에 이르면 인간이든 민족이든 문화든 살아 있는 것은 모두 해를 입고 마침내 파멸한다.(292∼293쪽)

 

 - 니체, 『반역사적 고찰 』 중에서

 

 

 * * *

 

 

과거의 것이 현재의 것의 무덤을 파지 않으려면, 과거의 것이 잊혀야 할 한도와 한계를 결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한 인간, 한 민족과 한 문화의 조형력이 얼마나 큰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조형력이란 스스로 고유한 방식으로 성장하고, 과거의 것과 낯선 것을 변형시켜 자기 것으로 만들며, 상처를 치유하고 상실한 것을 대체하고 부서진 형식을 스스로 복제할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이 힘을 거의 소유하고 있지 않아 단 한 번의 체험으로도, 단 하나의 고통으로도, 종종 단 하나의 연약한 불의로도, 단 하나의 조그만 성처로도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피를 흘리는 사람이 있다. 다른 한편 가장 거칠고 끔찍한 삶의 재난이나 자신의 악한 행위도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아, 그 와중이나 그 직후에도 평상시의 건강과 일종의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도 있다. 한 인간의 가장 깊은 천성의 뿌리가 강할수록, 그가 과거로부터 습득하거나 갈취하는 것은 더 많아진다. 가장 강력하고 거대한 천성이 있다고 상상한다면, 그것을 식별할 수 있는 특성은 역사적 의미가 너무 무성해서 유해한 영향을 끼질 수 있는 한계가 그 천성에는 없다는 점이다. 이 천성은 자기 것이든 가장 낯선 것이든 과거의 모든 것을 끌어당기고 집어삼켜서 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그런 천성은 정복하지 못하는 것을 망각할 줄 안다. 정복하지 못하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지평은 닫혀 완전하며, 동일한 인간의 저편에 열정, 학습과 목표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단지 지평 안에서만 건강하고 강하고 생산적일 수 있다는 것은 보편적 법칙이다. 하나의 지평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길 능력이 없거나, 낯선 지평 안에 자신의 관점을 포함시키기에는 너무 이기적이라면, 그것은 지치거나 급격한 몰락으로 시들어갈 것이다. 명랑함, 양심, 즐거운 행위, 다가올 것에 대한 신뢰 ㅡ 이 모든 것은, 개인이나 민족에게서, 한눈에 개괄할 수 있는 것과 밝은 것을 밝힐 수 없는 것과 어두운 것으로부터 구분하는 하나의 선이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또한 우리가 제때에 기억하는 것처럼 제때에 잊을 줄 아느냐, 우리가 힘찬 본능을 가지고 언제 역사적으로 느껴야 하고 언제 비역사적으로 느껴야 할지 감지해내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이것이 독자들에게 한번 고찰해보라고 권하고 싶은 명제이다. 즉 비역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은 한 개인이나 한 민족 그리고 한 문화의 건강에 똑같이 필요하다.(293∼294쪽)

 

 - 니체, 『반역사적 고찰 』 중에서 

 

 

 * * *

 

이제 여기서 각자는 우선 다음과 같은 관찰을 제시할 것이다. 한 개인이 가진 역사적 지식과 감각은 아주 제한적이고 그의 지평은 알프스 골짜기의 주민처럼 매우 협소하며, 그는 얼마든지 부당한 판단을 내릴 수 있고, 자신이 모든 경험에서 최초의 경험자라는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 ㅡ 모든 부당함과 오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우 건강하고 씩씩하게 살고 있으며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반면 그의 바로 옆에는 그보다 훨씬 더 정의롭고 학식 있는 사람이 병약하고 쇠약한 상태로 있다. 그것은 그의 지평에 보이는 선들이 불안하게 항상 이동하기 때문이며, 그는 훨씬 더 부드러운 자신의 정의와 진리의 그물망에서 빠져나와 억센 의지와 욕망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반면 우리는 동물을 본다. 동물은 완전히 비역사적이며 거의 하나의 점과 같은 지평 속에 산다. 그러나 동물은 적어도 권태와 왜곡이 없는 생활 속에서 살아간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어느 정도 비역사적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을 더 중요하고 더 원초적인 능력으로 간주해야만 할 것이다. 즉 올바르고 건강하고 위대한 것,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이 자라날 수 있는 토대가 그 안에 놓여 있는 한 그렇다. 비역사적인 것은 무언가를 감싸는 분위기와 비슷하다. 그 안에서 삶은 스스로 생성되고, 이 분위기의 파괴와 더불어 다시 사라진다. 인간이 사유하고 숙고하고 비교하고 분리하고 결합하면서 저 비역사적인 요소를 제한함으로써, 그리고 삶을 위해 과거를 사용하고 이미 일어난 것에서 다시 역사를 만드는 힘을 통해 비로소 인간은 인간이 된다. 그러나 역사의 과잉 속에서 인간은 다시 인간이기를 중지한다. 비역사적인 것의 껍질이 없다면 인간은 결코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며 감히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모두 사실이다. 인간이 먼저 비역사적인 것의 안개층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할 수 있는 행동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이제 비유는 제쳐두고 예를 들어 설명을 해보자. 여자나 위대한 사상에 대한 격렬한 열정에 사로잡혀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남자를 한번 상상해보라. 그의 세계는 그에게 얼마나 달라졌는가! 뒤를 돌아보면 그는 자신이 맹목적이라 느끼고, 옆의 낯선 사람의 말을 들어도 그는 그저 둔탁하고 무의미한 음향만을 지각할 뿐이다. 그가 지각할 수 있다 한다 해도, 마치 모든 감각으로 동시에 포착하듯이 가까이 만질 수 있는 것처럼 지각하지는 못하며, 화려한 색채를 느끼지도 못하고, 미세한 음 하나하나까지 선명하게 지각하지는 못한다. 모든 가치 평가는 변했고, 가치가 없어졌다. 그는 이제 느낄 수조차 없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것을 이제 소중히 여길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자문한다.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낯선 말과 낯선 의견을 지닌 바보였는가 하고. 그는 자신의 기억이 지치지 않고 하나의 원을 돌지만 너무 약하고 너무 피곤해 이 원 밖으로 한 걸음도 뛰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부당한 상태이며, 과거에 대해서는 편협하고 배은망덕하며, 위험에 대해 맹목적이고 경고에 귀를 막는 것이며, 밤과 망각의 죽은 바다에서 생동하는 작은 소용돌이다. 그러나 이 상태는 ㅡ 철저하게 비역사적이고 반역사적이지만 ㅡ 부당한 행위뿐만 아니라 모든 정당한 행위의 모태이기도 하다. 그 정도로 비역사적인 상태에서 먼저 갈망하고 추구하지 않고는 어떤 예술가도 자신의 그림을, 어떤 장군도 승리를, 어떤 민족도 자유를 얻을 수 없다. 행위자는, 괴테의 표현에 따르면, 양심이 없는데, 마찬가지로 그는 아는 것도 없다. 그는 하나를 행하기 위해 대부분의 것을 망각하며, 그는 자신의 배후에 있는 것에 대해 불의를 행한다. 그가 아는 유일한 권리는 이제 생겨나야 할 것의 권리다. 그렇게 모든 행위자는 자신의 행위를 사랑받아 마땅한 정도보다 훨씬 더 사랑한다. 최고의 행위는 그처럼 사랑의 충만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 행위의 가치가 다른 면에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하더라도 이 사랑에 비할 바가 못 된다.(294∼296쪽)

 

 - 니체, 『반역사적 고찰 』 중에서  

 

 * * *

 

어떤 사람이 모든 위대한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는 이런 비역사적 분위기를 수많은 사례들 속에서 건조시켜서 나중에 흡입할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은 아마 인식하는 존재로서 초역사적인 관점으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니부어가 언젠가 역사적 고찰의 가능한 결과로서 이런 사람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 적이 있다. "명철하고 면밀하게 이해한다면 역사는 적어도 한 가지 일에 쓸모가 있다. 우리 인류가 배출한 가장 위대하고 가장 고귀한 인물의 경우에도, 우연히 그들이 눈이 형식을 받아들여 이 눈을 통해 보고 또 모든 사람들에게 볼 것을 강요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된다는 것이다. 강제적인 것은 그들의 의식의 강도가 유난히 크기 때문이다. 이를 확실하게 그리고 많은 경우 잘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주어진 형태에 최고의 열정을 불어넣는 하나의 강력한 정신에 굴복하고 만다." 그런 관점을 초역사적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것을 가진 사람은 역사와 함께 살아가고 역사와 협력하려는 유혹을 더 이상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았다면 그는 모든 사건의 유일한 조건, 즉 행위자의 영혼 속에 있는 저 맹목성과 부당성을 인식했을 것이다. 그런 관점은 초역사적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입장을 취하는 사람은 모든 사건의 유일한 조건, 즉 행위자의 영혼 속에 있는 저 맹목성과 부당성을 인식함으로써 더 살고 싶은 유혹과 역사에 함께 참여하려는 유혹을 더 이상 느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역사를 지나치게 진지하게 생각하는 병으로부터도 치유되었을 것이다. 그는 어떤 인간에게나 어떤 체험에서, 그리스인에게서든 터키인에게서든, 또는 1세기나 19세기의 어느 시간에서든,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하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자신의 친지들에게 그들이 지난 10년 또는 20년을 다시 한번 살고 싶기를 원하는지 묻는 사람은 그들 중 누가 저 초역사적 관점의 모법이 되는지를 쉽게 인식할 것이다. 그들이 모두 '아니!'라고 대답할 수는 있지만, 왜 아닌지에 대한 이유를 각기 다르게 말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다음 20년은 더 좋아질 거야" 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으로 근거를 댈 것이다. 그들은 데이비드 흄이 이렇게 조롱했던 사람들이다.

 

최초의 힘찬 흐름이 줄 수 없었던 것을

인생의 찌꺼기로부터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

 

(296∼298쪽)

 

 - 니체, 『반역사적 고찰 』 중에서   

 

 

 * * *

 

그런데 우리는 그 목표에 어떻게 도달하는가? 라고 너희는 물을 것이다. 델포이 신전의 신은 너희가 저 목표를 향한 유랑을 처음 시작할 때 너희에게 신탁을 전한다. "너 자신을 알라"라고. 그것은 어려운 신탁이다. 저 신은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했듯이 "감추지도 선포하지도 않고, 단지 가리킬 뿐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리스인들도 몇 세기 동안 우리가 처해 있는 위험에, 다시 말해 낯선 것과 과거의 것, "역사"의 홍수에 몰락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들은 남과 접촉하지 않는 것을 자랑하며 산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들의 "교양"은 오히려 오랫동안 셈족과 바빌론, 리디아, 이집트의 형식과 개념들이 뒤섞인 카오스였으며, 그들의 종교는 전 오리엔트 신들의 투쟁이었다. 이는 지금 "독일의 교양"과 종교가 모든 외국들과 전체의 전(前) 시대들이 그 안에서 투쟁을 벌이는 카오스와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문화는 저 아폴론의 신탁 덕분에 집합체는 아니었다. 그리스인은 차차 카오스를 조작하는 법을 배웠다. 즉 그들은 델포이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에게 되돌아가,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자각하고 거짓-욕구를 사멸시킴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자신을 소유했다. 그들은 전체 오리엔트의 유산을 잔뜩 짊어진 상속인이나 아류로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과의 힘든 투쟁 끝에 저 신탁을 실천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상속받은 유산을 불리고 키운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며 모든 미래의 문화 민족의 선구자며 모범이 되었다.(387∼388쪽)

 

 - 니체, 『반역사적 고찰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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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꼴이 너무나 엉망진창이다. 고작 이런 꼴을 볼려고 촛불을 들었나 싶은 자괴감이 들던 때도 잠시였다. 내우외환이 달리 있는 게 아니다 싶다. 거의 모든 경제 지표는 점점 더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다. 국가 경제의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는 주식시장이 '금융위기 수준'의 한국 경제를 단적으로 대변한다.

 

코스피 : 금융위기 발생 직전인 2007년 최고치 대비 0.92% 하락, 2018년 1월 최고치 대비 20.74% 하락

코스닥 : 금융위기 발생 직전인 2007년 최고치 대비 23.36% 하락, 2018년 1월 최고치 대비 30.84% 하락

다우 : 금융위기 발생 직전인 2007년 최고치 대비 91.52% 상승, 2009년 저점 대비 320.29% 상승

나스닥 : 금융위기 발생 직전인 2007년 최고치 대비 191.11% 상승, 2009년 저점 대비 558.24% 상승 

 

국가의 지도자는 거듭된 실책과 외교적인 무능으로 일관한 채 거의 모든 주변 강대국들과의 관계를 점점 더 악화일로로 내몰고 있다. 중국으로부터는 안보 목적의 사드 배치를 계기로 치욕스러운 '삼불 정책'까지 약속하고도 여전히 보복으로 억눌린 채 도리어 중국으로부터 '사드 문제 해결'을 공식적으로 요구받고 있는 상태다. 러시아로부터는 명백히 영공을 침범당하고도 도리어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느라 쩔쩔 매다가 국가적인 망신만 초래했다.

 

오래도록 혈맹 관계였던 미국과는 '대북 제재 해제 문제' 하나만 두고도 끊임없는 갈등을 일으키다가 차츰 더 멀어지는 형국이다.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부당한 경제 보복을 당하는 데도 '적극적인 중재'에는 명백하게 거리를 두는 모습이 단적인 사례이다. 지난주에 또다시 쏘아 올린 북한의 단거리 탄도미사일에 대해서는 아예 '미국과는 그다지 상관없는 일'이라며 태연자약하게 무시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미국과는 도대체 얼마나 소원해진 것인가.

 

한국과 일본 사이는 어떤가. 수십 년 동안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었고, 지금도 G2 다음으로 막강한 경제력을 갖춘 세계 3위의 기술 초강대국을 상대로 우리는 뾰족한 대책도 없이 소모적이고 무분별한 갈등을 확산시키고 있다. 정말로 일본이 우리에게 적대국인가? 세계적인 경제 대국과 무역을 바탕으로 급성장하는 후발 경제 강국이 서로를 이웃나라로 둔 잇점을 오랫동안 향유해 온 공생 관계가 아니었던가? 이런 이웃나라를 두고 양국의 통치자들이 벌이는 얄팍한 정치 싸움에 경제와 민생이 희생되어서 결코 좋을 리 없다. 국민들은 나날이 시름만 깊어가는데 이 싸움을 주도하는 양국의 집권 세력들은 국민들을 싸움판에 내모는 데 정신이 온통 팔려 있다. 그들의 강공 논리는 너무나 저열하고 매국적이다. 이번 싸움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친일파'로 규정하는 게 대표적이다.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북한과의 관계는 어떤가. 전세계에서 가장 악랄한 세습 통치자가 대한민국의 통치자와 국민들을 능멸하는 수준의 망발을 연일 쏟아내는 데도 통치자는 며칠째 오불관언 입을 꾹 닫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무반응'이야말로 국가의 안위와 국민들의 생명을 책임지고 있는 국가 지도자의 신성한 책무를 함부로 내팽개치고 무시하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인가. 도대체 어쩌다가 나라가 이런 우스운 꼴로 추락하고 말았는가. 경제 상황은 나날이 나빠지고 국민들의 삶은 점점 더 바닥으로 내몰리는 데도 집권자들의 '뻔한 선수 교체' 행사에서는 함박웃음과 격려와 칭찬 일색이다. 국민들의 비판과 야유에는 아예 눈을 감고 귀를 닫겠다는 심산인지, 그런 '비판과 야유'마저도 '애국심의 발로'로 받아들일 만큼 '포용 국가'의 진면모를 발휘하겠다는 건지 헷갈릴 정도다.

 

사마천의 『사기 열전』에는 '토붕'이 '와해'보다 무섭다는 말이 나온다. 흔히 토붕와해(解)로 함께 묶여서 쓰이기 때문에 둘 사이의 경중은 무시될 때가 많다. 말 그대로 '흙이 붕괴되고 기와가 깨진다'라는 뜻으로, 사물이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궤멸되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그런데 왜 사마천의 책에서는 와해보다 토붕이 더 무섭다고 했을까. 와해는 수습할 수 있지만 토붕은 수습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 * * 

 

 

이때 조나라 사람 서악徐樂과 제나라 사람 엄안嚴安도 글을 올려 각각 당면한 정사를 한 가지씩 말했다. 서악은 이렇게 말했다. 

 

신이 듣건데 천하의 근심은 토붕土崩에 있지 와해瓦解에 있지 않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토붕이라고 합니까? 진나라의 말세가 이것입니다. 진섭陳涉은 천승의 높은 지위에 있지도 않았고 땅도 한 자 없었습니다. 신분도 왕공이나 대인이나 명족의 후손이 아니고, 향리에서도 명예가 없었으며, 공자나 묵자나 증자 같은 현인도 아니고, 도주陶朱나 의돈猗頓 같은 부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난한 골목에서 일어나 갈래 진 창을 휘두르며 한쪽 팔을 걷어붙이고 큰소리로 부르자, 천하 사람들이 바람에 휩쓸리듯이 그를 따랐습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것은 백성이 괴로워해도 군주가 그들을 불쌍히 여길 줄 모르고, 아랫사람이 원망해도 위에서는 알지 못하고, 풍속이 이미 어지러워져 정치를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가 진섭의 밑천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토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천하의 근심은 토붕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와해라고 합니까? 오, 초, 제, 조나라의 반란이 바로 이것입니다. 일곱 나라가 대역을 도모하고 저마다 만승의 천자라 일컬으며, 무장한 병사가 수십만 명이고, 위세는 그들의 영내를 압도할 만하며, 재력은 사민士民들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쪽으로 한 자 한 치의 땅도 빼앗지 못하고 중원에서 사로잡히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들의 권위가 보통 남자보다 가볍고 병력이 진섭보다도 약했던 탓이 아닙니다. 당시만 해도 선제(한나라 고조)의 은택이 아직 쇠하지 않았으며, 그 땅에서 안주하여 풍속을 즐기는 백성이 많았기 때문에 제후들에게는 밖에서 도움을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것을 바로 와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천하의 근심은 와해에 있지 않다고 한 것입니다. 이로부터 보면 천하가 진실로 토붕의 형세로 기울면 지위나 벼슬도 없이 궁핍하게 지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장 악한 짓을 하여 천하를 위태롭게 할 수 있습니다. 진섭이 바로 그러한 경우입니다. 하물며 삼진의 군주와 같은 [천자의 자리를 탈취하려는] 자가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천하가 아직 잘 다스려지지 않았더라도 진실로 토붕의 형세가 없다면 강한 나라와 강한 병사가 있을지라도 발뒤꿈치를 돌릴 겨를도 없이 사로잡힐 것입니다. 오, 초, 제, 조나라가 바로 이러했습니다. 하물며 신하나 백성이 어떻게 난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이 중요한 두 가지는 국가의 안위에 관계되는 명백하고도 긴요한 일이니, 현명한 군주라면 여기에 뜻을 두고 깊이 살핍니다.

 

요즈음 관동에서는 오곡이 잘 여물지 않아서 연간 수확이 예전처럼 회복되지 못해 백성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게다가 변방에는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사리에 따라 살펴보면 백성 중에 그곳을 편안하게 여기지 못하는 자가 있을 것이며, 편안하게 여길 수 없으면 동요하기 쉽습니다. 동요하기 쉬운 것은 토붕의 형세입니다. 따라서 현명한 군주는 만물 변화의 근원을 살펴서 국가 안위의 기틀을 분명히 하고 조정에서 이것을 해결하여 우환이 드러나기 전에 없애 버립니다. 중요한 것은 천하에 토붕의 형세가 없도록 하는 것뿐입니다.

 

(434∼435쪽)

 

 - 사마천, 『사기 열전_2』, <평진후 · 주보 열전> 중에서


 

 * * *

 

 

엄안은 글을 올려 이렇게 말했다.

 

신이 듣건대 주나라가 천하를 차지하여 잘 다스린 것이 300여 년인데 성왕과 강왕 때에 가장 융성하였으며 ……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업신여기고 큰 무리가 작은 무리를 학대하며 …… 이로부터 백성의 괴로움이 시작됐습니다. 그래서 강한 나라는 침략을 일삼고 약한 나라는 지키기에 급급하여 혹은 합종을 하고 혹은 연횡을 하며 바퀴를 부딪치며 수레를 달리니, 투구와 갑옷에는 이가 들끓건만 백성은 호소할 곳이 없었습니다.

 

진나라 왕은 천하를 서서히 집어삼켜 전국戰國을 아우르고 황제라 일컬으면서 천하의 정권을 잡고, 제후의 성을 파괴하고, 그들의 무기를 녹여서 종과 종틀을 만들어 다시는 무기를 쓰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선량한 백성은 이제는 전국의 불안에서 벗어나 현명한 천자를 얻었다고 하며 저마나 다시 태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진나라가 형벌을 느슨하게 하고 부세를 줄이고 부역을 덜어 주고, 인의를 존중하고 권세와 이익을 가볍게 여기며, 독실하고 돈후한 것을 숭상하고 교활한 지혜를 나쁘게 여기고, 좋지 못한 풍속을 바꿔서 천하를 교화시켰더라면 대대로 편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풍교風敎를 실천하지 않고 옛날 습관대로 교활한 지혜와 권세와 이익을 좇는 자는 끌어다 쓰고, 독실하고 돈후하며 충성스럽고 신의 있는 자는 물리치며, 법은 엄중하고 정치는 준엄했습니다. 아첨하는 자가 많아 황제는 날마나 자신을 찬미하는 말만 듣다 보니 야심이 커지고 마음이 교만해져서 천하에 위세를 마음껏 떨쳐 보고 싶어졌습니다. … 이때 진나라의 화는 북쪽으로는 흉노 땅에 걸치고, 남쪽으로는 월나라에 뻗쳐 군대를 쓸모없는 곳에 주둔시켜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는 데 있었습니다. 십여 년간의 싸움에 장정들은 갑옷을 입고 여자들은 물자를 실어 나르느라 그 괴로움을 견딜 수 없어 삶을 마다하고 스스로 길가의 나무에 목을 매어 죽는 자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진나라 시황제가 죽자 천하에 큰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은 진陳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무신과 장이는 조나라에서 군사를 일으켰으며, 항량은 오나라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  심산유곡에서까지 호걸들이 아울러 일어났으므로 다 적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공작이나 후작의 후손도 아니고 장관의 아전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다 한 자 한 치의 조그마한 세력도 없이 거리에서 일어나 갈래 진 창을 잡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그들은 모의하지 않았지만 함께 일어났고, 약속하지 않았지만 함께 모였으며, 점거한 지역이 점점 커지고 넓어져서 패왕覇王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당시 진나라의 포악한 정치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

 

 지금 중국은 개 짖는 소리에 놀랄 일이 없을 만큼 태평스러운데, 나라 밖 먼 곳의 수비에 얽매여 국가를 황폐시키는 것은 백성을 자식처럼 여겨야 하는 자의 도리가 아닙니다. 끝없는 욕망을 실천하기 위해서 마음껏 행동하여 흉노와 원한을 맺는 것은 변경을 편안하게 하는 길이 아닙니다. 화가 맺혀 풀어지지 않고 전쟁이 그쳤는가 하면 다시 일어나, 가까이 있는 자는 걱정하고 괴로움을 겪을 것이며 멀리 있는 자는 놀랄 테니 이것은 천하를 오래도록 지탱하는 길이 아닙니다.

 

지금 천하는 갑옷을 단단히 입고 칼을 갈며 화살을 바로잡고 활줄을 매며 군량을 나름에 쉴 새가 없으니, 이것은 천하 사람이 모두 우려하는 바입니다. 대체로 전쟁이 오래 지속되면 변란이 일어나고 일이 복잡해지면 걱정거리가 생깁니다. …… 또 최근에 진나라가 멸망한 까닭을 살펴보면 그 법령이 지나치게 엄하고 욕심이 커 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군 태수의 권세는 육경보다 훨씬 무겁습니다. 땅이 사방 천 리쯤 되는 것은 [진승 등이] 마을을 근거로 삼은 것에 비할 바가 못 되고, 갑옷과 무기도 정교하여 갈래 진 창의 쓰임에 비할 바가 안 됩니다. 만일 만세의 큰 변란이라도 일어난다면 나라는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상서가 천자에게 올려지자 천자는 세 사람을 불러 보고 말했다.

 

"그대들은 모두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소? 어째서 이토록 늦게 만나게 되었단 말이오!"(437∼441쪽)

 

 - 사마천, 『사기 열전_2』, <평진후 · 주보 열전>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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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간축국서(諫逐國書)
    from Value Investing 2019-08-25 17:00 
    (사마천의 『사기』에 담긴 간축객서[諫逐客書]를 빗대어 '간축국서'라는 제목을 달아봤다. 온통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법무장관 후보자인 조국 전 수석을 이제는 과감하게 물리치고 보다 널리 새로운 인재를 구하라는 철없이 순진한(?) 바램으로 써 본 글이다. 간축객서[諫逐客書]는 중국 진시황 시대에 활약했던 승상 이사가 쓴 명문장이다. 왕에게 올리는 건의를 담은 서간문 형식의 상서上書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역사는
 
 
북다이제스터 2019-07-28 1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금융 현황이 나라 현황의 척도가 아니라 보입니다. ^^

oren 2019-07-28 20:42   좋아요 1 | URL
한 사람의 체온만 가지고 그 사람이 건강한지 쇠약한지를 판단하기 어렵듯이, 한 국가의 종합적인 건강 상태를 단지 주가지수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고 봅니다. 국가 재정 상태, 무역 수지, 외환보유고, 국방력, 실업률, 환율은 물론 국민들의 통합 정도까지도 두루 종합적으로 고려되어야 마땅할 테니까요.

제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도 ‘증시 상황이야말로 한 국가의 경제 상황이 좋고 나쁨을 곧바로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바로미터(‘척도‘가 아니라 ‘온도계‘) 가운데 하나‘라는 뜻입니다. 증시 지표가 한 국가의 모든 걸 종합적으로 평가하고 측정하는 ‘만물의 척도‘가 될 수는 없을 테니까요.
 

 

해방 이후 최악의 상태로 치닫고 있는 한일관계를 둘러싸고 백가쟁명 식의 온갖 계책들과 의견들이 난무하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12척의 배로 나라를 구한 성웅 이순신 장군이 뜬금없이 소환되는가 하면, 동학혁명을 배경 삼은 '죽창가'가 새삼 화제가 되고, 그걸 SNS에 올린 행위가 과연 '의도에 맞는 올바른 인용'이냐를 두고도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집권당 특별대책위원장의 취임 일성에선 조선시대를 떠올리는 '의병 운동'이 업급되고, 국가 안보실 고위관계자는 국채보상운동까지 들먹일 정도로 온갖 고색창연한 어휘들이 시도때도 없이 불려나오고 있다.

 

이런 논쟁들을 보노라면 '이 참에 뜻밖에도 역사 공부를 많이 하는구나' 싶은 엉뚱한 생각마저 든다. 그런데 정작 문제의 본질과 해결 방안을 두고서는 각자의 입장이 너무나 현격한 격차를 보인다. 바로 이 점이 문제 해결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더 필요함을 반증하는 게 아닌가 싶다. 손자병법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지피지기(知彼知己)조차 제대로 선행되지 않은 상태로, 상대방의 정확한 의도조차 몰라 서로 허둥대는 모습이야말로 '문제 해결의 입구'조차 찾지 못하는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갑작스레 기습적인 '무역 보복' 혹은 '경제 침략'을 당한 우리나라로서는 부당하고도 치졸하기 짝이 없는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가 왜 느닷없이 정치 외교적인 문제에 불쑥 끼어드느냐고 반발하는 중이고, 애매모호하게 둘러대는 일본의 '수출 규제에 대한 근거'가 도리어 근거 없음을 날카롭게 추궁하고 있다. 불시에 기습을 당한 처지인 우리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고, 일본은 앵무새처럼 비슷한 대답만 반복하고 있다.

 

일본으로서는 이번 문제의 근본 원인이 된 대법원의 강제 징용 배상 판결에 대해 일본 기업의 배상 의무는 진작에 소멸됐다는 입장이다. 1965년의 한일협정이 근거다. 한국은 일본과는 전혀 다른 입장이다. 민간인의 배상 청구권은 '한일협정'과는 별개로 여전히 남아 있다는 대법원의 배상 판결은 행정부와는 별개인 '사법부의 판단'이며, 엄연히 삼권이 분립된 한국의 행정부는 이번 배상 판결에 그 어떠한 관여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니 '한일협정'에서 규정한 문제 해결 방식인 단계별 조정 절차 요청에도 일체 응할 수 없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대응이었다. 그런데도 일본을 향해서는 여전히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하자고 촉구한다. 똑같은 사안을 두고도 이처럼 서로 정반대의 입장만 첨예하게 대립하다가 결국 사태가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일본은 이미 1965년에 완전히 정리가 끝난 배상 문제를 지금에 와서 새삼 문제삼는 것부터 문제로 삼는다. 한국은 도무지 신뢰할 수 없는 나라라는 것이다. 여기에 지난 정권에서 졸속으로 이루어진 '위안부 합의'가 '파기'로 되돌려지면서 문제가 더욱 복잡하게 꼬였다. 일본의 '한국 불신'은 날로 커졌고 아베 정권은 그걸 더욱 부추겼다. 갈수록 악화된 한일 관계는 무슨 레이다를 쏘았니 안 쏘았니, 무슨 관함식에 욱일기를 다느니 마느니 하면서 사사건건 대립하다가 결국 '반도체 핵심 소재 3가지'로 만든 무역 폭탄으로 뻥 터지고 말았다.

 

어쨌든 일본은 이참에 한국을 단단히 벼르는 듯한 분위기다. 상대방의 급소를 예리하게 찌르고도 태연자약하게 앞으로 더 찌를 데가 수백 곳이 더 남아 있다고 위협하는 듯한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생수 한 병 없이 마주한 과장급 설명회가 양국 사이의 냉랭함을 극적으로 보여준 데다가 한국와 일본 사이의 당국자들이 주고 받은 날카로운 말들에서 '타협의 여지'는 아직까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일본이 저렇게까지 쎄게 나오는 걸 보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일본의 분위기'가 훨씬 나쁜 것 같아 걱정스럽기도 하다. 어쨌든 한국과 일본은 오랜 시간 동안 '경제적 공생 관계'로 함께 성장해 온 처지이고, 경제 규모로 보나 기술력으로 보나 우리가 일본에 의존해 온 측면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비록 일본이 훨씬 더 남는 장사를 했더라도 그렇다.) 더군다나 우리는 일본보다 수출 의존도가 월등히 높은 데다가 당장은 일본을 대체할 만한 '가술, 부품, 소재 공급자'를 찾기도 어렵다는 게 큰 문제다.

 

그런데도 문재인 대통령은 이틀 전에 깜짝 놀랄 만한 언급을 내놓았다. 일본의 이번 무역 보복 조치를 두고 "결국 일본 경제에 더 큰 피해가 갈 것임을 경고해 둔다"고 했기 때문이다. 여러 전문가들의 견해나 일반적인 상식과는 정반대되는 예상을 저토록 강하게 언급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도리어 궁금할 정도였다. 수출 규제에 따른 피해가 아직까지는 구체화되지 않았으니 섣불리 예단할 필요는 없지만 '과연 그럴까' 하는 의구심은 떨치기 어렵다.

 

문재인 대톨령의 강도 높은 발언 가운데 유난히 이목을 끄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표현도 있었다. 흔히 '낭중지추'라고 일컬어지는 '주머니 속의 송곳'을 한일 관계에 빗댄 것이다.

 

과거사 문제는 한일관계에서 주머니 속의 송곳과 같습니다. 때때로 우리를 아프게 찌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양국은 과거사 문제를 별도로 관리하면서 그로 인해 경제, 문화, 외교, 안보 분야의 협력이 훼손되지 않도록 지혜를 모아왔습니다. 저 역시 여러 차례 과거사 문제는 과거사 문제대로 지혜를 모아 해결해 나가면서 양국 관계의 미래지향적 발전을 위해 함께 협력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해왔습니다.

 

 

낭중지추(囊中之錐)는 원래 춘추전국시대에 있었던 '뜻밖의 인재 발굴'에서 유래된 고사성어다. 그 고사의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훓어보더라도 '남을 찌르기 위한 뾰족한 무기'로서의 송곳을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다. 물론 문재인 대통령이나 대통령의 연설을 미리 준비한 비서관이 '낭중지추'의 뜻을 몰라 '주머니 속의 송곳'을 한일관계에 비유했을 리는 없다. 이틀 전에 언급된 '주머니 속의 송곳'은 순수한 의미 그대로 쓰인 것 같기 떄문이다. 가령, 한일관계에서는 오랫동안 구원(舊怨)이 많은 관계로 서로 편안하게 마주할 정도로 한가롭지 못하며, 주머니에 송곳 하나라도 감춘 채 만나야 안심될 만큼 불편한 관계이며, 그 송곳은 때때로 우리를(!)  찌른다고 표현한 것처럼 들리니 말이다.

 

이왕 '역사 얘기'가 나온 김에 '낭중지추'에 관한 일화를 조금 더 살펴 보자. 이 고사성어의 출전은 물론 사마천의 『사기』 가운데 <평원군 · 우경 열전>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 한가지가 더 눈에 띈다. 이 고사가 생겨난 이유 또한 작금의 한일관계처럼 '국가 사이의 갈등'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점이다.

 

이 에피소드가 있었던 시대 배경은 소위 군웅이 할거하던 '춘추전국시대'였다. 특히 전국 시대에는 7웅이라고 일컬어지던 일곱 나라가 숱하게 합종연횡을 맺었던 때였다. 초강대국 진나라에 맞서 다른 여섯 나라를 연합시킨 합종책을 창안한 인물은 귀곡 선생의 제자 소진이었다.(사마천의 『사기』 가운데 <소진 열전>에 소진과 그의 두 동생 소대와소려의 활약상이 담겨 있다.) 소진의 합종책을 깨뜨린 건 진나라의 장의였다. 그는 각 나라와 개별적으로 동맹을 맺어 합종을 깨뜨리고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한 인물이다.(사마천의 『사기』 가운데 <장의 열전>이 그의 연횡책을 소개하고 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천하의 유능한 인물을 발굴하기 위해 식객을 무려 3000명씩이나 거느린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그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전국 사공자(戰國 四公子)'였다. 제나라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 조나라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 위나라 신릉군信陵君 무기無忌, 초나라 춘신군春申君 황헐黃歇이 그들이다. 사마천은 사공자 각자의 열전을 만들어 전국시대에 각 나라에서 다양한 개성을 지닌 인재를 초빙하던 모습을 자세히 담아냈다. '낭중지추'는 사공자 가운데 조나라의 평원군에 얽힌 이야기이다.

 

낭중지추에 얽힌 이야기의 요지는 간단하다. 조나라의 수도가 진나라의 침입으로 포위를 당하자 조정에서는 평원군을 초나라로 파견하여 '합종'을 맺기를 도모한다. 그때 평원군은 '특사단 20'명을 발굴하는데, 19명까지는 일사천리로 선발했는데 나머지 한 명을 뽑지 못했다. 그때 자신을 뽑아 달라고 덜컥 나선 사람이 모수였다.('모수자천'이라는 고사성어는 여기서 나왔다.) 평원군은 3년 동안이나 식객으로 있었으면서도 '모수'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으니, 재능이 없는 게 아니냐고 의심한다. 그때 모수가 기가 막힌 대답을 내놓는다. 나는 오늘에야 당신의 주머니 속에 넣어 달라고 부탁드리지만, 좀더 일찍 주머니 속에 있었더라면 그 끝만 드러나 보이는 게 아니라, 송곳 자루까지 밖으로 나왔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모수를 발탁한 건 대성공이었다. 그는 초나라 왕을 멋지게 설득하여 조나라와 합종을 맺는데 성공한다. 그가 초나라 왕을 설득한 핵심 요지는 이랬다. "이것이 어찌 병사가 많았기 때문이겠습니까?" 모수는 초나라 왕에게 '세 치 혀가 군사 백만 명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몸소 웅변했던 것이다. 한일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무역 전쟁에서도 '모수' 같은 인물이 나타나면 얼마나 좋을까. 무역보복에 대응하기 위한 당정청 회의에서 너나 할것없이 '국민들만 믿고 간다'는 식으로 애꿎은 국민들을 '일본제품 불매 운동'에 동참하도록 유도하는 등 괜한 '숫자 싸움'을 벌일 게 아니라, 능수능란한 화술과 기지로 상대를 설득해서 '그들의 기술과 소재와 부품'을 우리가 필요한 동안 만큼은 자유롭게 수입해서 쓸 수 있는 묘책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니 말이다.

 

초나라 왕으로부터 만족스러운 협상을 이끌어낸 모수가 평원군의 빈객으로 오랫동안 밥을 축냈던 특사단 19명에게 던진 꾸짖음은 다음과 같았다. 혹여나 이참에 사마천의 『사기』를 다시 꺼내 읽다가 이 구절을 읽고 '송곳에 찔린 것처럼' 속이 뜨끔한 빈객도 있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그대들은 범속하고 무능하며 남의 힘으로 일을 이루는 자들에 불과합니다."

 

 * * *

 

 

진秦나라가 조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을 포위하자, 조趙나라는 평원군平原君을 보내 초楚나라에 도움을 청하고 합종合從하도록 하였다. 평원군은 빈객과 문하 중에서 용기와 힘이 있고 문학적 소양과 무예를 두루 갖춘 사람 스무 명과 함께 가기로 가기로 하였다. 평원군이 말했다.

 

"평화롭게 담판을 지어 맹약을 맺을 수 있다면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평화롭게 담판을 지어 맹약을 맺을 수 없다면 초나라 궁전 밑에서 [희생의] 피를 마시며 합종을 맺고 돌아오겠습니다. 같이 갈 선비들은 다른 데서 구하지 않고 제 빈객과 문하에서 뽑아도 충분합니다."

 

평원군은 열아홉 명을 뽑고 나머지 한 명은 뽑을 만한 사람이 없어서 스무 명을 채우지 못했다. 문하에 모수毛遂라는 이가 있었는데, 앞으로 나서서 스스로 자신을 추천하며 평원군에게 말했다.

 

"당신은 초나라와 합종 맹약을 맺기 위하여 빈객 및 문하 스무 명과 함께 가기로 약속하고, 사람을 밖에서 찾지 않기로 했다고 들었습니다. 한 사람이 모자라니 저를 그 일행에 끼워 주십시오."

 

평원군이 말했다.

 

"선생은 내 빈객으로 있은 지 몇 해나 되었소?"

 

모수가 말했다.

 

"삼 년 됐습니다."

 

평원군이 말했다.

 

"대체로 현명한 선비가 세상에 있는 것은 비유하자면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 같아서 그 끝이 금세 드러나 보이는 법이오. 지금 선생은 내 빈객으로 삼 년이나 있었지만 내 주위 사람들은 선생을 칭찬한 적이 한 번도 없으며, 나도 선생에 대해 들은 적이 없소. 이것은 선생에게 이렇다 할 재능이 없다는 뜻이오. 선생은 같이 갈 수 없으니 남아 있으시오."

 

모수가 말했다.

 

"저는 오늘에야 당신의 주머니 속에 넣어 달라고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만일 저를 좀더 일찍 주머니 속에 있게 하였더라면 그 끝만 드러나 보이는 게 아니라 송곳 자루까지 밖으로 나왔을 것입니다."

 

평원군은 결국 모수와 함께 가기로 했다. 열아홉 명은 모수를 업신여겨 서로 눈짓하며 비웃었으나 입 밖으로 그러한 마음을 말하지는 않았다.

 

모수는 초나라에 가는 동안 열아홉 명과 논쟁을 벌였는데 그들이 모두 탄복했다.

 

평원군이 초나라와 합종하기 위하여 그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을 이야기하는데, 해가 뜰 무렵부터 시작하여 중천에 이르도록 결정을 짓지 못했다. 열아홉 명은 모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이 당堂 위로 올라가시오."

 

모수는 칼자루를 잡은 채 계단을 뛰어올라 평원군에게 이렇게 말했다.

 

"합종의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은 두 마디면 결정되는데, 해 뜰 무렵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여 한낮이 되도록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초나라 왕이 평원군에게 물었다.

 

"저 손님은 누구입니까?"

 

평원군이 대답했다.

 

"저 사람은 제 사인입니다."

 

초나라 왕은 큰 소리로 모수를 꾸짖으며 말했다.

 

"썩 내려가시오. 나는 그대 주인과 이야기하는 중인데 이게 무슨 짓이오?"

 

모수는 칼을 어루만지며 앞으로 다가가서 말했다.

 

"왕께서 저를 꾸짖는 것은 초나라 병사가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왕께서는 열 걸음 안에서 초나라 병사가 많은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왕의 목숨은 제 손에 달려 있습니다. 제 주인이 앞에 있는데 저를 꾸짖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또 은나라 탕왕은 땅 70리를 가지고 천하의 왕이 되었고, 주나라 문왕은 땅 백 리를 가지고 제후를 신하로 삼았다고 들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병사가 많았기 때문이겠습니까? 정녕 세력에 의지하여 그 위엄을 떨쳤기 때문입니다. 지금 초나라 땅은 사방 5000리이고 창을 가진 병사가 백만이나 됩니다. 이것은 천하의 우두머리로서 왕이 될 수 있는 바탕입니다. 천하에 초나라의 강대함에 맞설 만한 나라는 없습니다. 그런데 진나라 장군 백기처럼 형편없는 자가 병사 수만 명을 이끌고 군대를 일으켜 초나라와 한 번 싸워 鄢과 영郢을 빼앗고, 두 번 싸워서 이릉夷陵(초나라 선왕의 능묘)을 불사르고, 세 번 싸워서 왕의 조상을 욕보였습니다.이것은 초나라에게 백 대가 지나도 잊을 수 없는 원통한 일이며, 조나라도 초나라를 위하여 부끄럽게 여기는 일입니다.  그런데 왕께서는 이것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계십니다. 합종은 초나라를 위한 일이지 조나라를 위한 일이 아닙니다. 제 주인이 앞에 있는데 저를 꾸짖는 것은 무엇때문입니까?"

 

초나라 왕이 말했다.

 

"옳은 말이오. 참으로 선생의 말씀이 맞소. 삼가 나라를 받들어 합종하겠소."

 

모수가 물었다.

 

"합종이 결정된 것입니까?"

 

초왕이 대답했다.

 

"결정됐소."

 

모수는 구리 쟁반을 받쳐 들고 무릎을 꿇은 채 초나라 왕에게 올리면서 말했다.

 

"왕께서 먼저 피를 마셔 합종을 약속하셔야 합니다. 다음 차례는 제 주인이고, 그 다음 차례는 접니다."

 

이렇게 하여 어전 위에서 합종 약속을 맺었다. 그러자 모수는 왼손으로는 구리 쟁반의 피를 들고 오른손으로는 열아홉 명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은 당 아래에서 서로 이 피를 마시시오. 그대들은 범속하고 무능하며 남의 힘으로 일을 이루는 자들에 불과합니다."

 

평원군은 합종을 결정짓고 조나라로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다시는 감히 선비를 고르지 않겠다. 내가 지금까지 선비를 고른 수는 많다면 천 명이 되겠고 적어도 백여 명은 될 것이다. 나는 스스로 천하의 선비를 잃은 적이 없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번 모 선생의 경우에는 실수하였다. 모 선생은 한 번 초나라에 가서 조나라를 구정九鼎이나 대려大呂보다도 무겁게 만들었다. 모선생의 세 치 혀는 군사 백만 명보다도 강했다. 나는 감히 다시는 인물을 평가하지 않겠다."

 

그러고는 마침내 모수를 상객上客으로 삼았다.(405∼409쪽)

 

 - 사마천, 『사기열전』, <평원군 · 우경 열전>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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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7-18 12: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일 문제에서 역사 문제는 여러 면에서 ‘낭중지추‘가 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 문제가 양국 관계에 중요한 문제임에도 계속 피하기만 하다가 이번에 본격화되니, 그 끝이 드러나 버렸습니다... 과거에 대한 반성 없는 일본이 얄밉기도 하고, 이러한 경제 제재가 나중에는 한국경제에 득이 될 수 있다고 하지만, ‘장기에는 모두가 죽는다‘는 케인즈의 말처럼 단기에 좋은 해결책이 있으면 바라봅니다... 물론, 장기 전략도 동시에 고려해야겠지만요...

oren 2019-07-18 12:03   좋아요 1 | URL
한일관계의 역사적 배경 지식과 미래에 대한 혜안을 지닌 사람들이 이 어려운 문제를 슬기롭게 풀었으면 하는 바램이 듭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도 제대로 안 된 상태로 어설프게 감정적으로 접근하거나, 냉정하고도 신중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시도조차도 적을 이롭게 한다는 식으로 내모는 것도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특히나 멀쩡한 국민들을 극구 싸움판으로 끌여들여 전의를 다지고 확전을 도모하려는 듯한 정치인들의 언행들은 그 의도야 이해 못할 바 아니지만 문제 해결에 무슨 도움이 될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미국과 중국 사이의 무역 분쟁만 하더라도 여러모로 한국 경제에 벅찬 과제인데, 여기에다 난데없이 일본으로부터 무역 보복을 당하니 도대체 무슨 까닭인가 싶어 잠시 어리둥절하다. 한반도는 오랫동안 외세에 시달렸지만 유구한 세월 동안 남의 나라를 먼저 침범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중국에는 조공을 바치고 인질을 붙잡힐 정도로 굽신거렸지만 나라를 통째로 빼앗긴 적은 거의 없었다. 일본으로부터는 무려 36차례나 침략을 받았지만 풍전등화의 위기에서도 끝끝내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다. 20세기 초 한일합방의 굴욕적인 조약을 맺기 전까지는.

 

기약없는 독립 운동이 급작스레 성공으로 귀결된 건 미국 덕분이었다. 미 연합군의 원폭을 두 방이나 얻어맞고 나서 일본 천황이 무조건적인 항복을 외쳤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고 나서도 일제의 식민 지배는 많은 후유증을 남겼다. 과거사는 본질적으로 깨끗이 치유될 수 없다손 치더라도, 친일파 청산이나 강제 징용공 및 위안부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되지 못한 건 두고두고 후세에 부담을 남겼다.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위안부 문제는 불가역적 합의를 이루었다가도 곧장 다시 파기되는 우여곡절을 겪었고, 대법원의 강제 징용 배상 판결은 우리나라의 국가 기간 산업이나 마찬가지인 반도체 분야의 핵심 소재 수출을 중단하겠다는 치졸한 무역 보복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의 부당하기 짝이 없는 수출 규제 조치를 보노라니 온갖 복잡미묘한 감정들이 휩쓸고 지나간다. 정작 일제 식민지배의 피해자인 우리가 응당 받아냈어야 마땅한 '합당한 사죄와 보상'조차 받지 못하고 도리어 가해자인 일본한테 억울하게 보복을 당하는 데 따른 분노부터 앞선다. 여기에 더해 위정자들에 대한 분노도 억누르기 어렵다. 도대체 그들은 일을 어떤 식으로 처리했기에 1965년에 맺은 한일협정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숙제가 아직까지도 여파를 미치는 것이며, 일본의 정치인들은 왜 한사코 위안부와 강제 징용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거부하는 것이며, 작년 10월에 내려진 대법원 판결 이후의 후속 협의는 왜 8개월이 지나도록 아무런 진척이 없다가 느닷없는 '무역 보복'까지 이어진 것인가.

 

일본이 이번에 우리나라를 대상으로 무역 보복 조치를 감행한 건 해방 이후 처음이라서 더욱 놀랍다.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 오랫동안 잠재해 있던 역사적 갈등들(위안부와 징용공 등 과거사 문제, 교과서 문제, 독도 영유권 문제 등)이 정치·외교적으로는 숱한 파열음을 냈지만 경제 보복으로까지 비화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데 이번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특히나 아베 총리는 가문의 내력으로나 언행으로나 극우적 성향이 특히 강한 인물인 데다가, 이번 조치를 위해 오랫동안 매우 치밀하게 준비한 듯한 정황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어서 더욱 당혹스럽다.

 

더욱 문제인 건 당장으로서는 우리에게 뾰족한 해결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삼성그룹의 총수가 일본으로 허겁지겁 달려간 것만 보더라도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반증한다. 우리나라는 아이러니칼하게도 1965년에 일본과 맺은 한일협정을 통해 얻어낸 막대한 보상금을 밑천 삼아 본격적으로 경제 개발을 시작했다. 7,80년대의 압축 고도 성장은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며 전세계인들에게 찬탄의 대상이 되었고, 일순 IMF 경제 위기를 겪었음에도 이내 극복하고 일어나 여러 산업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출 정도로 경제는 급성장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경쟁력 있는 여러 산업들조차 핵심적인 기술이나 부품·소재에 대해서는 선진 기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게 오랫동안 문제였다. 산업혁명 이후 선진 기술을 갖춘 열강들이 풍부한 자본과 인재는 물론이고 온갖 역량을 총동원해 발전시킨 첨단 기술들을 한국의 기업들이 차근차근 확보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도 세계 3위의 막강한 경제력을 유지하고 있는 일본은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많은 면에서 너무 앞선 나라다. 특히나 기초 소재, 정밀화학, 정밀기계, 전자공학 등등에서는 우리나라와는 비교하기 힘든 막강한 기술력을 보유한 나라다. 그들은 이미 78년 전인 1941년에 세계 최강국이었던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던 초강대국 가운데 하나다. 전쟁을 치루면서 그들은 목숨을 걸고 맹렬하게 자신들의 기술을 발전시켰다. 원폭 투하로 온통 잿더미에 휩싸인 패전국으로 굴러떨어졌다가도 불과 몇십 년 만에 또다시 우뚝 일어나 미국의 턱밑까지 추격할 정도로 놀라운 경제 발전을 이뤄낸 저력이 그런 기술력에 있음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종교, 문화 등 일본이라는 나라에 존재하는 정신성의 모든 측면이 전쟁에 동원되었다. 그 동원의 정도는 지금의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패전은 이 체제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일본인의 마음 속에 들어 있던 모든 것이 무가치해졌고 모든 것이 밖으로 떨려 나가는 체험이었다."

 

그런 공황 상태에서 서구와 관련된 모든 것, 특히 전승국 미국과 관련된 모든 것은 좋고 바람직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중국이 소련을 모방하려고 애썼듯이 일본은 기를 쓰고 미국을 모방하였다.(137쪽)

 

 - 새뮤얼 헌팅턴, 『문명의 충돌』 중에서

 

또한 일본은 전국토가 섬으로 이뤄진 독특한 국가이다. 『문명의 충돌』을 쓴 새뮤얼 헌팅턴은 '고립 문명'으로서의 일본 문명에 대해 깊이있게 분석했다. 일본이야말로 전세계에서 국가=문명인 유일한 나라다. 그들은 7세기에 중국 문화를 수입했지만 경제적, 군사적 압력을 받지 않으면서 주체적으로 변형시켜 고도의 문명으로 발전시켰다. 심지어 그들은 징기스칸이 전세계를 휩쓸 때도 카미카제(神風) 덕분에 무사할 정도로 외세 무풍 지대였다.(이 당시의 '일본의 행운'에 대해서는 에드워드 기번이 쓴 『로마제국 쇠망사』에도 자세히 언급될 정도였다.) 아무튼 그들은 우리나라와 무역 분쟁을 겪기 이전에도 많은 나라와 무역 갈등을 빚었는데, 특히 미국과의 무역 전쟁은 일본으로 하여금 '국제 정치학'과 '국제 무역 협상'에서 많은 경험을 축적하는 계기가 되었다.

 

경제 문제를 둘러싼 미국과 일본의 분쟁, 특히 일본의 무역 흑자와 미국의 상품과 투자에 대한 일본의 규제 문제를 해결하고자 양국 외교관들은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미일 무역 협상은 냉전 시대의 미소 군축 협상과 여러모로 흡사한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1995년 현재 미일 무역 협상에서 나온 가시적 결과는 오히려 미소 군축 협상의 수준에도 못 미치고 있다. 갈등이 두 나라 경제의 근본 차이점, 특히 주요 선진 공업국 중에서도 일본 경제가 갖는 독특한 성격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일본의 공산품 수입액은 GNP의 3.1퍼센트로, 다른 주요 선진 공업국들의 평균치인 7.4퍼센트를 크게 밑돈다. 일본의 해외 직접 투자액은 GDP의 겨우 0.7퍼센트로 미국의 28.6퍼센트, 유럽의 38.5퍼센트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302쪽)

 

 - 새뮤얼 헌팅턴, 『문명의 충돌』 중에서

 

새뮤얼 헌팅턴의 분석만 보더라도 일본이 얼마나 '고립적인 성향이 강한 나라'인지를 금세 깨달을 수 있다. 우리나라처럼 대륙에서 툭 튀어나온 반도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해양과 대륙을 잇는 반도 특유의 임기응변에 능한 기질(나쁘게 표현하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기질')이 그들에겐 없다. 일본인들은 고립된 섬에서 오래도록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특히 '신뢰'를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겼고,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배척하고 조직 내에서 아예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들만큼 신뢰의 가치를 목숨처럼 중시하는 나라는 찾기 어렵다.

 

아무튼 일본은 우리나라와는 여러모로 대비되는 나라다. 비록 아주 가까운 동양의 이웃 나라이고, 일본인들이 겉으로는 한국인들을 몹시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하는 것 같지만 일본은 우리나라와는 여러 면에서 아직까지는 상대가 안 될 정도로 강한 나라다. 흔히 언급되는 기초 과학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들을 제쳐두더라도, 국토 면적, 인구, 기술력, 국민 총생산 등만 비교해 보더라도 일본은 우리가 우습게 여기기에는 너무 강한 상대임이 틀림없다.

 

일본으로부터 아무런 예고도 없이 뜻밖의 강펀치를 얻어 맞은 최근 며칠 동안 한국은 마치 벌집을 쑤셔놓은 듯 온갖 다양한 반응들이 쏟아져 나왔다. 속으로는 부글부글 분노의 감정이 들끓지만 냉철하게 대응책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부터 이참에 강력하고도 단호하게 맞대응해야 한다는 여론까지 각양각색의 반응들이 너무 다양해서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일본제품 불매운동에 대해서조차 찬반이 엇갈리는 형국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도록 방치한 게 현 정권의 외교적 무능 때문이라는 지적도 비등했고, 이런 반응을 두고 가해자인 아베 정권을 비난해야지 왜 현 정부를 탓하느냐며 그런 사람들을 향해 토착 왜구로 싸잡아 비난하는 반응까지도 난무하는 실정이다.

 

이런 다양한 반응들을 보면서 나는 엉뚱하게도 '회음후 한신'을 잠깐 떠올렸다. 우리나라가 이번에 치졸하기 짝이 없는 아베 정권으로부터 부당하기 짝이 없는 '무역 보복 조치'를 당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달리 뾰족한 수가 없으니 '한신처럼' 우선은 일본에 수그리는 자세를 취해서라도 문제를 확대시키지 말고 수습하는 게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다. 그 대신 우리가 이번 일을 계기로 삼아 와신상담, 절치부심 노력해서 나중에 언젠가는 기필코 지금의 모욕을 깨끗이 갚을 날을 도모하자는 것이다. 그러니 속이 뒤틀리고 자존심이 몹시 상하더라도 지금은 난국부터 수습하고 실리부터 취하자는 것이다. 당장은 '정치적으로 타결하는 방법' 말고는 달리 마땅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반도체만 하더라도 우리가 압도적인 시장점유율과 최강의 기술력을 갖추고 있는데 왜 마냥 수세적으로 접근해야 하느냐고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시간이 더 지나봐야 자세히 판명되겠지만) 무턱대로 힘으로 맞대응했다가는 그 여파가 생각지도 못한 다른 분야로 크게 번질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새뮤얼 헌팅턴의 지적 대로, 일본은 공산품 수입 비중이 고작 3.1%에 불과할 정도로 '외세 의존도'가 극히 낮은 독특한 산업 구조를 가진 기술 강국이다. 그래서 사실 일본에 맞대응할 만한 급소를 찾기조차 어렵다. 극히 짧은 기간에 압축적으로 성장하기 바빴던 우리나라가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이웃 일본의 선진 기술과 부품과 소재에 크게 의존해 왔던 건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하고도 불가피했다. 그러니 이번 사태로 극명하게 드러난 국내 산업의 취약점은 그것대로 면밀히 보완하되, 지금 당장은 다소 수세적으로 비춰지는 걸 감수하고서라도 '명분'보다 '실리'를 취하자는 얘기다.

 

여기서 부터 다시 한신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한신은 원래 초나라 사람이었다. 처음엔 '칼 한 자루에 의지하여' 항우 밑으로 들어갔으나 좀처럼 인정받지 못하자 초나라에서 도망쳐 한나라로 귀순했다. 한신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연오連敖(곡식 창고를 관리하는 직책)라는 보잘 것 없는 벼슬이 주어졌다. 어느 날 법을 어겨 참수형을 받게 되었는데, 같이 처형되는 열세 명의 목이 잘리고 한신의 차례가 되었을 때 그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다가 우연히 하후영과 눈이 마주쳤다. 그때 한신이 그에게 한 말은 이랬다.

 

"주상께서는 천하를 차지하려고 하시지 않습니까? 어찌 장사를 죽이려고 하십니까?"

 

이 말이 기특하다고 생각한 하후영은 그를 풀어주고 목을 베지 않았으며, 한고조 유방에게도 그를 천거하게 된다.

 

그에 얽힌 가장 흥미로운 얘기는 이런 일이 있기 훨씬 전에 있었던 다음의 일화 때문이다. 그는 평민일 때에는 가난한 데다 방종하였으므로 남의 집에서 밥을 얻어 먹으며 지냈고,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던 아낙네가 건네주는 밥을 얻어먹기 위해 수십 일 동안 빨래터를 서성거린 일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회음의 백성 중에서 한신을 업신여기는 한 젊은이가 한신에게 말했다.

 

"네가 비록 키는 커서 칼을 잘도 차고 다니지만 마음속으로는 겁쟁이일 것이다."

 

그러고는 사람들 앞에서 한신을 모욕하며 말했다.

 

"네놈이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나를 찌르고, 죽음을 두려워하면 내 가랑이 사이로 기어 나가라."

 

이때 한신은 그를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구부려 가랑이 밑으로 기어 나갔다. 이 일로 해서 시장 사람들이 한결같이 한신을 겁쟁이라고 비웃었다.(776쪽)

 

 - 사마천, 『사기열전』, <회음후 열전> 중에서

 

한신은 치속도위治粟都尉(식량과 말먹이를 관리하는 군관)라는 벼슬을 얻었지만 중책에 기용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한나라의 군대가 이동하는 도중에 여러 장군들이 도망치는 틈을 타서 자신도 달아났다. 그 소식을 듣고 소하라는 사람이 그를 뒤쫓았다. 한나라 왕에게는 소하도 달아난 것으로 보고되었다. 며칠 뒤에 소하가 돌아오자 한나라 왕은 노여움과 기쁨이 뒤섞여 소하를 꾸짖었다.

 

"그대는 어째서 도망쳤소?"

 

소하가 대답했다.

 

"신은 도망친 게 아니라 도망친 자를 뒤쫓아 갔던 것입니다."

 

왕이 물었다.

 

"그대가 뒤쫓은 자가 누군가?"

 

소하가 대답했다.

 

"한신입니다."

 

한나라 왕은 다시 꾸짖었다.

 

"장수들 가운데 도망친 자가 수십 명이나 되는데도 그대는 쫓아간 적이 없소. 한신을 뒤쫓았다는 것은 거짓말이오."

 

소하가 말했다.

 

"다른 장수들은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한신에 견줄 만한 인물은 없습니다. 왕께서 계속 한중의 왕으로 만족하신다면 한신을 문제삼을 필요는 없습니다만, 반드시 천하를 놓고 다투려 하신다면 한신이 아니고는 함께 일을 꾀할 사람이 없습니다."

 

한나라 왕이 말했다.

 

"나도 동쪽으로 나아가 천하를 다투고자 하오. 어찌 답답하게 이런 곳에 오래 있겠소?"(777∼778쪽)

 

 - 사마천, 『사기열전』, <회음후 열전> 중에서

 

이렇게 해서 한신은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임명식을 마치자 한나라 왕은 한신은 어떠한 계책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한신은 왕에게 되물었다.

 

"왕께서는 용감하고 사납고 어질고 굳센 점에서 항왕과 비교할 때 누가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한나라 왕이 깔끔하게 인정했다. "내가 항왕만 못하오." 그 대답을 듣고 한신은 기뻐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이 일찍이 그를 섬긴 적이 있으므로 항왕의 사람됨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항왕이 화를 내며 큰 소리를 지르면 1000명이 모두 엎드리지만 어진 장수를 믿고 일을 맡기지 못하니 그저 보통 남자의 용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항왕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공손하고 자애로우며 말씨가 부드럽습니다. 누가 병에 걸리면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나누어 줍니다. 그러나 부리는 사람이 공을 세워 벼슬을 주어야 할 경우가 되면 인장이 닳아 깨질 때까지 만지작거리며 선뜻 내주지 못합니다. 이것은 이른바 아녀자의 인仁일 뿐입니다. …… (7801∼781쪽)

 

 - 사마천, 『사기열전』, <회음후 열전> 중에서

 

이렇게 해서 한신은 한나라 왕에게 신임을 얻게 되었고, 총사령관에 오른 한신은 유방의 군사를 지휘하여 이웃의 여러 나라를 격파하고, <해하의 결전>에서 2만의 군사로 배수진을 친 끝에 20만의 대군을 물리치는 혁혁한 전과를 올린다. 한신은 그 여세를 몰아 제나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한나라 4년, 한신은 드디어 제나라를 모두 평정하고 한나라 왕에게 사자를 보내 이렇게 말하도록 했다.

 

"제나라는 거짓과 속임수가 많고 변절을 잘하며 자주 번복하는 나라인 데다가 남쪽으로는 초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습니다. 가왕假王(임시로 왕 노릇을 하는 것)을 세워서 진정시키지 않으면 정세가 안정되기 어렵습니다. 신을 가왕으로 삼아 주시면 모든 일이 순조로울 것입니다."(795쪽)

 

그 무렵 초나라가 갑자기 습격하여 한나라 왕을 형양에서 에워쌌는데, 마침 한신의 사자가 오자 한나라 왕은 그 편지를 펴 보고 매우 화를 내며 꾸짖었다.

 

"나는 여기서 곤경에 빠져 하루빨리 와서 도와주기를 바라는데 자기는 스스로 왕이 될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장량과 진평은 일부러 한나라 왕의 발을 밟고는 사과하는 척하며 왕의 귓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한나라는 지금 불리한 입장에 노혀 있습니다. 한신이 왕 노릇을 하는 걸 어찌 못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한신을 세워서 왕으로 삼고 잘 대우하여 제나라를 지키게 하는 편이 낫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변이 일어날 것입니다."(795∼796쪽)

 

 - 사마천, 『사기열전』, <회음후 열전> 중에서 

 

이렇게 해서 제나라의 왕이 된 한신은 어느덧 초나라 항우는 물론 한나라 유방에게도 경계대상 1호가 될 만큼 우뚝한 존재로 변신해 있었다. 이런 형세를 보고 항우는 한신을 설득하는 작전에 나섰다. 한나라를 너무 믿지 말고 자신과 손을 잡자고 한신을 꾀었다. 초나라 왕인 자신이 죽으면 당신(한신)도 결코 안전할 수 없다는 게 설득의 논리였다. 이른바 들짐승이 다 없어지면 사냥개는 삶아 먹힌다는 그 유명한 '토사구팽의 논리'가 여기서 등장한다. 그러나 한신은 자신을 알아주고 발탁해준 한나라 유방을 배신할 수 없다면서 항우의 제안을 거절했다.

 

제나라 사람 괴통이 '천하 대권의 향방'이 한신에게 있음을 알고 기발한 계책으로 한신을 움직이려고 하였다. 괴통이 내놓은 계책의 일부를 들어 보자.

 

"제 생각으로는 이러한 형세로 보아 천하의 성현이 아니고는 천하의 환란을 도저히 그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나라 왕과 항왕의 운명은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당신께서 한나라를 위하면 한나라가 이기고 초나라 편을 들면 초나라가 이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속마음을 터놓고 간과 쓸개를 드러낸 채 어리석은 계책을 말씀드리려 하는데 당신께서 받아들이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진실로 제 계책을 써 주신다면 한나라와 초나라 양쪽을 모두 이롭게 하고, 두 분을 존속시켜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솥의 발처럼 서 있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형세로 보아 어느 누구도 감히 먼저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무릇 당신만큼 현명한 분이 수많은 무장 병사를 거느리고 강대한 제나라에 의지하여 연나라와 조나라를 복종시키고, 주인 없는 땅으로 나아가 그 후방을 누르며, 백성이 바라는 대로 서쪽으로 가서 두 나라(한나라와 초나라)의 싸움을 끝내게 하여 백성의 생명을 구해 준다면 천하는 바람처럼 달려오고 메아리처럼 호응할 텐데 누가 감히 당신의 명령을 듣지 않겠습니까? ……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벌을 받고, 때가 이르렀는데도 과감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입는다고 들었습니다. 당신께서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800∼801쪽)

 

 - 사마천, 『사기열전』, <회음후 열전> 중에서 

 

그러나 한신은 괴통의 계책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의 이익을 바라고 한나라와의 의리를 저버릴 순 없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괴통의 답변에도 그 유명한 '토사구팽' 이론이 다시 등장한다.

 

"당신께서는 스스로 한나라 왕과 친한 사이라고 생각하여 영원히 변하지 않는 업적을 세우려고 하십니다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잘못된 것입니다. …… 옛날 대부 종種과 범려范蠡는 멸망해 가는 월나라를 존속시키고 월나라 왕 구천을 제후들의 우두머리로 만들어 공을 세우고 이름을 떨쳤지만 자신은 죽었습니다. 들짐승이 다 없어지면 사냥개는 삶아 먹히게 마련입니다. …… (801∼802쪽)

 

 - 사마천, 『사기열전』, <회음후 열전> 중에서  

 

괴통의 책략의 요점은 '지금 당신께서는 군주를 떨게 할 만한 위세를 지녔고 상을 받을 수 없을 만큼 큰 공로를 가지고 계시니 초나라로 돌아가더라도 초나라 사람(항왕)이 믿지 않을 테고, 한나라로 돌아가도 한나라 사람(유방)이 떨며 두려워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깊이 생각해 보겠노라는 한신의 대답을 듣고 물러난 괴통은 며칠 뒤에 다시 한신을 찾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체로 나무를 하고 말을 먹이는 이는 만승의 천자가 될 만한 권위도 잃어버리고, 조그마한 봉록을 지키는 데 급급한 이는 경상 자리를 지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지식은 일을 결단하는 힘이며, 의심은 일하는 데 방해만 됩니다. 터럭 같은 작은 계획을 자세히 따지고 있으면 천하의 큰 술수를 잊어버리고, 지혜로 그것을 알면서도 과감하게 행동하지 않는 것은 모든 일의 화근이 됩니다. 그래서 '맹호라도 꾸물거리고 있으면 벌이나 전갈만한 해도 끼치지 못하고, 준마라도 주춤거리면 노둔한 말의 느릿한 걸음만 못하며, 진秦나라 용사 맹분孟賁도 여우처럼 의심만 하고 있으면 보통 사람들이 일을 결행하는 것만 못하고, 순 임금이나 우 임금의 치혜가 있더라도 우물거리고 말하지 않으면 병어리나 귀머거리가 손짓 발짓을 하는 것만 못하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능히 실행하는 것을 귀중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대체로 공이란 이루기 힘들고 실패하기는 쉬우며, 때란 얻기 어렵고 잃기는 쉽습니다. 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원컨대 당신께서는 이것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803∼804쪽) 

 

 - 사마천, 『사기열전』, <회음후 열전> 중에서  

 

그러나 한신은 망설이기만 거듭할 뿐 차마 한나라를 배반하지 못했다. 자신이 공이 많으니 한나라가 끝내 제나라를 빼앗지는 않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괴통은 한신이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자 얼마 안 가서 거짓으로 미친 척하고 무당이 되고 만다. 항우가 패하고 천하를 휘어잡은 고조 유방은 이윽고 제나라 왕의 군사를 습격해서 빼았았다. 한나라 5년 1월에 제나라 왕이었던 한신을 옮겨서 초나라 왕으로 삼고 하비에 도읍을 정하게 했다. 한신은 고향인 초나라의 왕이 되어 금의환향했지만 병권조차 빼앗긴 허울 좋은 왕일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겪었던 일을 다시금 되돌아 보았다.

 

한신은 초나라에 이르자 일찍이 밥을 먹여 주었던 무명 빨래를 하던 아낙을 불러 1000금을 내렸다. 또 하향의 남창 정장에게 백 전錢을 내리면서 말했다.

 

"그대는 소인이다. 남에게 은덕을 베풀다가 중도에서 그만뒀기 때문이다."

 

또 자기를 욕보인 젋은이들 가운데 자기에게 가랑이 밑으로 기어 나가게 하여 모욕을 주었던 자를 불러 초나라의 중위中尉로 삼고, 여러 장군과 재상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장사일지니, 나에게 모욕을 주었을 때에 내 어찌 이 사람을 죽일 수 없었겠는가? 그를 죽인다 한더라도 이름이 드러날 것이 없기 때문에 참고 오늘의 공을 이룬 것이다."(804∼805쪽)

 

 - 사마천, 『사기열전』, <회음후 열전> 중에서 

 

이런 일들로 인해 한신은 초나라에서 덕망이 높고 고매한 인품을 가진 왕으로 칭송되었다. 그러나 한나라의 권력이 확립되자 한신의 입지는 갈수록 견제를 받았다. 유방이 황제로서 제후국을 순회하며 초나라를 방문하자 한신은 자신에게 위협이 될 것을 직감하고, 유방을 안심시키고자 자신에게 의탁해온 종리매의 목을 유방에게 바쳤다. 종리매는 항우 휘하에 활약했던 유명한 장수였는데 유방을 끊임없이 괴롭혔기 때문에 유방과 원한이 컸던 인물이었다. 그는 항우가 죽자 친구 한신에게 몸을 의탁해온 처지였다. 종리매를 배신한 일로 한신은 민심을 잃었고 유방은 진영으로 찾아온 한신을 모반죄로 체포하여 장안()으로 압송했다. 그때 한신이 말했다.

 

"정말 사람들의 말에 '날랜 토끼가 죽으면 훌륭한 사냥개를 삶아 죽이고, 높이 나는 새가 모두 없어지면 좋은 활은 치워 버린다. 적을 깨뜨리고 나면 지모 있는 신하는 죽게 된다.'라고 하더니,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으니 내가 삶겨 죽는 것은 당연하구나!"(806쪽)

 

 - 사마천, 『사기열전』, <회음후 열전> 중에서  

 

 

힌신은 낙양에 이른 후 한신의 죄를 용서하고 회음후로 삼았다. 한신은 한나라 왕이 자기의 재능을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것을 알았으므로 칭병을 핑계로 이리저리 몸을 피했다. 그러다가 진희陳豨가 거록군鋸鹿郡 태수로 임명되어 회음후 한신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왔을 때 제안 받은 '모반의 꾐'에 넘어가고 말았다. 모반은 유방의 부인 여후后와 승상 소하에 의해 진압되었다. 한신은 죽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괴통의 계책을 쓰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아녀자에게 속은 것이 어찌 운명이 아니랴!"

 

여후는 한신의 삼족을 멸하였다.

 

고조는 진희를 토벌하고 돌아와 한신이 죽은 것을 알고 한편으로는 기뻐하고 한편으로는 가엽게 여기면서 물었다.

 

"한신이 죽을 때 무슨 말을 했는가?"

 

여후가 말했다.

 

"한신은 괴통의 계책을 쓰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 했습니다."

 

…… 괴통이 잡혀오자 고조가 물었다.

 

"네가 회음후에게 모반하도록 가르쳤는가?"

 

"그렇습니다. 신이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 못난이가 신의 계책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자멸해 버렸습니다. 만약 그가 신의 계책을 썼다면 폐하께서 어떻게 그를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고조가 화를 내며 말했다.

 

"이놈을 삶아 죽여라."

 

괴통이 말했다.

 

"삶겨 죽는 것은 억울합니다."

 

고조가 말했다.

 

"네가 한신에게 모반을 가르쳤기 때문에 죽는 것인데 무엇이 억울하다는 말이냐?"

 

괴통이 말했다.

 

"진나라의 기강이 느슨해지자 산동 땅이 크게 어지러워지고, 진나라와 성이 다른 사람들이 아울러 일어나 영웅호걸들이 까마귀 떼처럼 모여들었습니다. 진나라가 그 사슴(황제의 권한)을 잃자, 천하는 다 같이 이것(사슴)을 좇았습니다. 이리하여 키가 크고 발이 빠른 자(고조)가 먼저 이것을 얻었습니다. 도척이 기르는 개가 요 임금을 보고 짖은 것은 요 임금이 어질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개는 본래 자기 주인이 아닌 사람을 보면 짖게 마련입니다. 당시 신은 한신만 알았을 뿐 폐하를 알지 못했습니다. 또 천하에는 칼날을 날카롭게 갈아서 폐하가 하신 일과 똑같이 하려는 사람이 매우 많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들은 능력이 모자랐을 뿐입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그들을 모두 삶아 죽이겠습니까?"

 

고제가 말했다.

 

"풀어 주어라."

 

그리고 괴통의 죄를 용서했다.(810∼811쪽)

 

 - 사마천, 『사기열전』, <회음후 열전>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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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7-13 18: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젊었을 때 한신을 생각한다면, 이 어려움을 인내심을 가지고 견디고 초왕이 되는 모습이 인상에 남겠지만, 천하가 통일한 후의 한신에 초점을 맞춘다면, 결단하지 못해 죽음을 당한 회음후의 모습이 인상에 남을 듯 합니다. oren님의 글은 oren님과 같은 생각을 하시는 분들은 물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 모두에게 의미를 가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런 것이 고전이 주는 맛이 아닐까 싶습니다.

oren 2019-07-14 00:02   좋아요 1 | URL
일본의 무역 보복 조치에 대한 후속 뉴스들을 보면 볼수록 우리나라가 부당한 보복 조치를 당하는 데 대한 근본적인 원인과 해결 방법에 대한 고민은 차츰 뒷전으로 밀리고, 일본의 치졸한 행위에 대한 ‘대응 방식‘을 두고 서로 내가 맞네, 니가 틀리네, 하면서 자중지란만 일으키는 것 같아 몹시 안타깝습니다. 지금 한가롭게 적전 분열을 일으킬 만큼 상황이 녹록치도 않고, 격렬한 분노로 대응한다고 해서 문제 해결에 크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지요. 미국이 냉정하게 ‘당사국끼리 해결하라‘는 입장을 취하는 것만 보더라도, 양국이 정치외교적으로 풀어야할 사안임이 분명한데, 왜 자꾸 정치권에서 편가르기를 조장하고, 애꿎은 국민들만 싸움판으로 끌어들이려고 애쓰는지 참으로 답답하기만 합니다.
* * *
자로가 정치하는 방법을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백성이 해야 할 도리를 앞장서서 하고, 백성의 일을 위해 몸소 애쓰는 것이다.˝
자로가 그 밖에 더 해야 될 것을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하고 게으르지 않으면 된다.˝
자로가 물었다.
˝군자도 용맹을 좋아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군자는 의義를 가장 소중히 여긴다. 군자가 용맹함만을 좋아하고 의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세상을 어지럽히게 되고, 소인이 용맹함만을 좋아하고 의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도적이 된다.˝

- 사마천, 『사기열전』, <중니 제자 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