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

(중략)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는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 박인환, <목마와 숙녀> 중에서

 * * *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읽다가 아주 흥미로운 번역을 하나 발견했다. 토케이라는 단어였다.

토케이? 토케이! 무슨 토끼도 아니고! 우선 그 대목부터 살펴 보자.

 

누군가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고, 또다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ㅡ 숙녀분들이 자리를 뜨자 신사분들끼리 재미난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지. 토케이를 주세요, 루시가 급하게 들어오며 말했다. 댈러웨이 씨가 왕실 저장고에서 가져온, 국왕 하사품인 토케이를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토케이가 부엌을 지나왔다. …… 신사분들은 아직 식당에 있었다. 토케이를 마시면서!(216∼217쪽)

 

 - 버지니아 울프, 최애리 옮김, 『댈러웨이 부인』 중에서

 

 

이 장면의 배경 시간은 1923년 6월 중순의 어느 날 저녁이다. 소설의 물리적 시공간은 '런던에서의 딱 하루' 뿐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댈러웨이 부인은 그날 아침부터 온종일 파티 준비에 경황이 없었다. 그 바쁜 와중에 첫사랑이었던 피터까지 불쑥 찾아왔으니 그날은 여러모로 정신없는 날이었다. 어쨌든 그 특별했던 유월 하루는 빅벤에서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차츰 저물기 시작했고, 파티에 초대된 사람들은 하나둘씩 댈러웨이 부인의 집으로 모여든다. 그녀가 아침부터 기다려온 시간이 이제 막 시작되는 순간이다. 세심한 고려 끝에 차려낸 음식들과 군침도는 진귀한 술들이 이제 막 등장하기 시작한다. 바로 그런 순간에 쨘~ 하고 나타난 술이 토케이였다.

 

여기서 토케이로 번역된 술은 우리가 흔히 '토카이'로 부르는 헝가리 와인이 아닐까 싶은데, 이 책 속에 제법 많이 달리던 주석이 여기서는 그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그냥 지나친다. 그래서 굳이 '토케이'를 검색해 보게 되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토케이, 토카이 둘 모두 검색된다. 그러니 더욱 헷갈린다.

 

 

Tokay 미국·영국 [toukéi]

 

1. 토케이 포도(주) (황금색의 양질의 포도(주)); 토케이 지방; (프랑스 알자스 지방의) 백포도주
2. 토케이 포도(나무)

 

 

 

토카이 와인[Tokay Wine]

 

헝가리 부다페스트 동북쪽, 보드그로그강과 티셔강이 만나는 곳에서 자라는 포도로 생산한 포도주.

 

토카이 와인은 프랑스 루이 14세 때 프랑스 왕실에 선물로 보내졌으며, 이런 인연으로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와인을 자주 즐겼던 루이 15세가 술자리에서 마담 드 퐁파두르에게 “이 포도주는 군왕의 포도주이며 포도주의 군왕이다”라고 한 일화에서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토카이 와인은 수확 시기를 놓쳐 귀부병에 걸린 포도 송이가 썩어갈 무렵의 것을 수확하여 사용한다. 그리고 수확한 포도 송이를 소쿠리에 담아 며칠 동안을 말린 후 포도당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즙을 짜낸다. 그 즙과 정상 포도에서 짜낸 즙을 섞어 토카이 와인을 만들며, 이 과정을 거친 토카이 와인에는 아수(aszu)라는 라벨을 붙인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토케이로 검색하면 어학사전 풀이만 딸랑 나오고, 토카이로 검색하면 무수한 블로그 글들과 함께 다량의 사진들도 함께 검색된다는 점이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풍광들과 함께. 왜냐햐면 헝가리에 가 본 사람들은 대개 누구나 한번쯤 토카이 와인을 마셔보기 때문이다. 더구나 부다페스트는 유럽에서도 야경이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곳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도나우 강 위를 떠다니는 유람선을 타고 야경을 즐기기도 한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와 함께 토카이 와인을 곁들이면서. 나 또한 그랬다.

 

 

 

 - 다뉴브 강 유람선 위에서 처음 맛본 토카이 와인. ☞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의 추억

 

 

이쯤되니 소설 속에서 다시 만난 토카이 와인이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그런데 이 책을 번역하신 분이 과연 토카이를 잘 모르고 그냥 토케이라고 무심하게 번역한 건 아닌지 그게 좀 아리송했다. 토카이 와인이 오래 전부터 '군왕의 포도주이자 포도주의 군왕'이라는 특별한 대접을 받은 술임과 동시에 작가 특유의 부르주아 취향을 봐서라도 저 대목에서 신사분들이 마시는 와인은 분명 '토카이 와인'이 틀림없을 듯한데 말이다.

 

 * * *

 

토케이 때문에 내 머릿속에 스멀스멀 피어오른 옛 추억들이 달달하기 그지없던 토카이 와인과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과 부다페스트의 멋진 야경 정도에서 뚝~ 그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의식의 흐름은 종종 우리가 전혀 예기치 못한 엉뚱한 방향으로도 쏜살같이 마구 내달리기 마련이다. 토케이를 만나자 말자 내 머릿속의 날개달린 의식은 갑자기 비상깜박이를 켠 구급차마냥 온데곤데를 정신없이 쏘다니기 시작했다.

 

비상깜빡이를 켠 구급차가 맨 먼저 도착한 곳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라는 성(城)이었다. 도대체 그 두껍고 난해하기로 악명높은 책이 토카이와 무슨 연관이 있다고? 하긴 그 책도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인 대표적인 책이니만큼 토카이가 등장하는 『댈러웨이 부인』과 전혀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지. 더구나 그 책에서 다루는 시공간도 '더블린에서의 6월 어느 하루'에 불과하잖아. 런던과 더블린이 그리 멀리 떨어진 도시도 아니고 말이야.

 

마치 오뒷세우스(영어로는 율리시스)가 고안한 '트로이의 목마' 없이는 도저히 그 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듯이, 오래 전부터 오지부동인 채로 버티고 선 거대한 성 같은 『율리시스』 앞에 도착한 구급차는 사실 그 성에 비해 터무니없이 우스꽝스럽고 기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평소에도 인적이 몹시 드문 그 성 앞에는 그날따라 구경꾼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구급차에서 서둘러 뛰어내린 구급요원은 딸랑 혼자였다. 그는 비상등조차 끌 생각을 하지 못하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로? 『율리시스』라는 책의 본문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로 곧장 '방대한 주석'이 달린 후미진 곳으로. 그는 도대체 거기서 무얼 찾아내려는 것일까?

 

그가 응급구호를 위해 『율리시스』에서 찾고자 하는 물건은 '멜랑쥐'였다. 멜랑쥐? 그럼 토케이는 '토끼'의 외국식 발음이었고, 멜랑쥐는 몰캉쥐의 외국식 발음이란 말인가? 아니면 몰랑쥐? 어쨌든 그 쥐는 몰캉몰캉 하거나 말랑말랑하거나 둘 중에 하나겠군. 그런데 멜랑쥐를 과연 어디서 찾아낸단 말인가. 『율리시스』라는 책의 성은 본성(本城) 보다 깊숙히 감춰진 아성()이 더욱 공략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그 요원은 아직도 모른단 말인가.

 

구급차에서 내리자 말자 그는 경비병들의 삼엄한 무장으로 둘러싸인 본성(本城)은 본체만체로 지나쳤다. 그는 곧장 4,463개나 되는 빼곡한 주석들로 가득한 창고 같은 건물에 도착했다. 다행히 그곳엔 경비병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가쁜 숨을 몰아쉰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서둘러 '멜랑쥐'를 찾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샅샅이 뒤졌으나 처음 시도에서는 멜랑쥐를 찾는데 실패했다. 마음이 너무 앞서다 보니 멜랑쥐가 아주 쉽게 눈에 띌 줄 착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구급요원은 쉽게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멜랑쥐'를 과연 어디서부터 찾는 게 좋을까.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한참이나 고민하던 구급요원은 의심이 드는 구역부터 집중수색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이번에는 결코 그 쥐를 놓칠 수 없다는 굳은 결심과 함께. 그런데 왜? 그 쥐한테 도대체 무슨 잘못이 있길래?

 

멜랑쥐는 뜻밖에도 두 번째 수색에서 쉽게 발견되었다. 그 쥐가 서식할 만한 의심스러운 구역들이 몇 군데로 확 좁혀졌기 때문이다. 멜랑쥐는 어쨌든 독 안에 든 쥐였고, 이번에는 틀림없이 붙잡혀서 구급차에 실려갈 운명이었다! 구급요원의 말에 따르면 '멜랑쥐'에 딸린 '주석'에는 오래 전부터 심각한 오류가 발견되었는데, 여태껏 아무도 그걸 고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번에 마침 『댈러웨이 부인』이 런던에서 파티를 준비하면서 내놓은 토카이 와인이 토케이로 잘못 번역된 사실이 발견되었고, 그 문제가 굳이 이번에 들춰지는 게 마땅하다면 더블린에서 헤인즈와 벅 멀리건이 주문했던 '멜랑쥐'도 이번에 함께 바로 잡혀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더블린에서 주문한 멜랑쥐라니? 그럼 토케이가 토끼가 아니었듯이, 멜랑쥐도 몰캉쥐가 아니고 무슨 마시는 음료라도 된다는 말인가? 구급요원의 말에 따르면 멜랑쥐는 어쨌든 마시는 음료의 일종이 분명하다고 했다. 뒤늦게 자세히 밝혀진 바로는, 그 음료는 특별히 비엔나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커피의 일종이라는 것이었다. 그걸 한국 사람들은 흔히 '비엔나 커피'라고 부른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뭐라고? 기껏 그토록 어렵게 찾아낸 멜랑쥐가 비엔나 커피였다고? 그렇다면 『율리시스』라는 성에 갇혀 그토록 오래 숨어있었던 '멜랑쥐'는 과연 뭐라고 번역이 되어 있었지? 글쎄, 그게 말이지... '혼합주의 일종'이라고 번역되어 있었다는 군.

 

아하, 이제야 모든 일이 납득이 가는구먼. 버지니아 울프는 '한 잔의 술'을 마시기 위해 런던에 사는 댈러웨이 부인으로 하여금 토카이 와인을 준비하도록 했고, 그걸 우리말로 번역한 분은 토카이 와인을 토케이로 약간 이상하게 번역 했다는 이야기로군. 그 다음에 토케이는 (의식의 흐름 기법 때문에) 갑자기 멜랑쥐를 불러 냈고, 오래도록 숨어 있었던 멜랑쥐는 알고 보니 몰캉쥐가 아니고 '비엔나 커피'였다는 말이군. 이제야 모든 이야기가 술술 이해되는군.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이 보이기 시작한단 말일세. 그리고 '가슴에 남는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이야기한 구급대원의 서러운 이야기도 이해되고 말일세.(더군다나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의식의 흐름 기법'을 어설프게 흉내내고 있었고 말이야.)

 

 * * *

 

어느새 쉰 살을 넘긴 클라리사가 '런던에서 보낸 유월의 어느 하루'를 담은 『댈러웨이 부인』은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율리시스』와 여러모로 묘한 연관을 맺고 있다. 제임스 조이스가 쓴 『율리시스』도 블룸이라는 중년 남자가 '더블린에서 보낸 어느 하루'를 그리고 있는 데다가, 두 작품 모두 '의식의 흐름 기법'을 대표하는 것도 몹시 닮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내가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내내 함께 떠올린 작품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두 작품들 사이를 알게 모르게 이어주는 희미한 연결선들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토케이와 멜랑쥐가 함께 붙들려 있는 거미줄만큼 내게 뚜렷하게 드러나는 건 없었다. 참으로 기묘한 일이다. 두 책 속에 담긴 우연하고도 사소한 번역의 오류가 이토록 서로를 튼튼하게 이어줄 줄 그 누가 감히 짐작이나 했겠는가.

 

 * * *

 

『율리시스』의 어떤 대목에서 '멜랑쥐'가 등장하는지도 덧붙여 놓는다. 이걸 찾느라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따로 밝히지 않겠다. 둔필승총(鈍筆勝聰)이라고 했던가. 내가 도대체 뭘 믿고 '멜랑쥐' 옆에 '해당쪽수'를 빠트리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 잊지 말자, p.775의 교훈을. 아, 참, 비엔나에서 주문했던 '멜랑쥐 사진'도, 자허토르테와 함께.(말투가 또다시 '의식의 흐름 기법'을 닮아가는 군.)

 

──── 나는 '멜랑쥐'165  를 하겠어, 헤인즈가 여급에게 말했다.

 

──── '멜랑쥐' 둘, 벅 멀리건이 말했다. 그리고 몇 조각 버터 바른 스콘 빵과 약간의 케이크도 함께 가져다 줘요.

             그녀가 가버리자 그는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 우리는 여길 매우도 나쁜 과자(Damn Bad Cake)를 팔기 때문에 D. B. C.라 부르지. 오, 그러나 자네 데덜러스의 <햄릿> 을 놓쳤군. (204쪽)

 

주석

165) (불어) 혼합주의 일종

 

 -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4개역판), <제10장. 거리(배회하는 바위들)> 중에서

 

 

 - 비엔나에 갔을 때 직접 주문했던 '멜랑쥐'(왼쪽은 왕가의 주방장이 만든 비엔나의 명물 초콜릿 케익 `자허토르테`)

 

 

덧) 제임스 조이스에 관한 한 국내 최고의 권위자로 인정받는 김종건 교수님의 『율리시스』번역은 사실 다른 분들의 새로운 번역을 기대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대체불가인 것도 사실이다. 원문 자체가 워낙 다양한 나라의 언어로 쓰인 데다가 (의식의 흐름 기법을 제외하더라도) 내용 자체가 몹시 난해하기 때문에 전공자라고 하더라도 쉽게 번역하기는 힘든 작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율리시스』에 담긴 3만 개에 가까운 어휘들 중에는 도저히 우리말로 번역할 수 없는 단어들도 적지 않다. 그 때문에 때로 마주치는 불가항력적인 번역의 난관들은 독자들이 미리 알아서 수용해 주는 너그러움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정이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멜랑쥐'에 대한 번역은 못내 아쉽다. 토카이나 멜랑쥐나 조금만 더 신경썼더라면 얼마든지 정확한 번역이 가능했을 터이니 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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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1-28 0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행입니다 김종건님의 번역본 <율리시스>를 10년 전에 구입해 고이 묵히고 있는 1인! 안녕히 주무십시오 오렌님~ 오렌님 은 추적자 기질이 있으십니다 그리고 또 하나 “산불조심!!!”ㅋㅋㅋ

oren 2019-01-28 01:10   좋아요 2 | URL
『율리시스』를 읽을 때 그 엄청나게 상세하고 꼼꼼한 주석들에 놀라서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감동받았던 적이 있었지요. 김종건 교수님이 아니라면 과연 어떤 독자들이 그 작품을 제대로 읽을 수나 있었을까 싶기도 했고요. 그러나 <제4개역판>까지 오는 동안에도 여전히 눈에 거슬리는 오탈자가 많고, 흔치는 않지만 가끔씩 명백히 잘못된 주석들이 엿보이는 건 못내 아쉽긴 하더라구요.

『율리시스』를 볼 때마다 제 머릿속을 늘 맴도는 ‘아쉬운 번역 하나‘는 Dooooooooooog! 랍니다.

제임스 조이스가 15장에서 `God`를 일부러 뒤집어서 (제 생각으로는 분명히 하느님을 욕하는 뜻으로 표현한) Dooooooooooog!를 김종건 교수님은 `하느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님`으로 번역했는데, 저는 이게 아직도 영 못마땅하거든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에 알맞는 우리말 번역은 `개새애애애애끼이이이이이!` 가 훨씬 더 어울릴 것 같은데 말이지요.!

페크(pek0501) 2019-01-28 1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명작이라 할지라도 율리시스는 너무 묵직해서 부담스럽다고 느낍니다. 댈러웨이 부인 정도의 두께라면 모르겠지만요...ㅋ

oren 2019-01-28 13:49   좋아요 0 | URL
맞아요. 맞습니다. 『율리시스』만큼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책도 없지요. 그에 반해 『댈러웨이 부인』은 정말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작품이고요. 두 작품 모두 ‘의식의 흐름 기법‘이니, ‘내적 독백‘이니 하는 실험적 기법들로 쓰인 작품이지만, 『댈러웨이 부인』은 난해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더군요.

카알벨루치 2019-02-02 1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렌님 명절연휴에 즐겁고 행복한 시간 가득 넘치시길 바랍니다 건강이 최고입니다 ^^🎶

oren 2019-02-02 14:32   좋아요 1 | URL
일부러 먼 데까지 오셔서 친절한 명절 인사까지 남겨주시니 너무 고맙습니다.^^
카알벨루치 님께서도 설 잘 쇠시고, 더욱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그들은 말한다, 오디세우스, 놀라움에 지친 그가

사랑 때문에 곧장 다시 울었다고. 그의 이타카가

소박하고 푸르른 걸 보고서, 예술이란 마치 이타카,

단순한 놀라움이 아닌, 영원한 푸르름의 이타카 같은 것."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시학』(1958)에서

 

 * * *

 

트로이 전쟁이 끝나자 그 전쟁에 참전했던 수많은 군사들은 마침내 귀국선에 서둘러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그들의 들뜬 항해가 무탈하게 마무리되어 오매불망 자신들을 기다리던 가족의 품에 안긴 채, 화려한 꽃다발과 팡파레가 울리는 가운데 <귀국선>과 같은 감동적인 노래까지 곁들여 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산천 찾아서 / 얼마나 그렸던가  * * * 꽃을 / 얼마나 외쳤던가  * * 깃발을

갈매기야 웃어라 파도야 춤춰라 / 귀국선 뱃머리에 희망도 크다

 

트로이를 완전히 파멸시키고 귀향길에 오른 사람들 가운데는 승리의 주역이었던 오뒷세우스도 끼어 있었다. 그는 '트로이 전쟁'에서 활약한 인물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외교관이자 웅변가이자 지략가였다. 힘으로만 따진다면 물론 헥토르와 아킬레우스와 아이아스 등에 뒤졌지만 말이다.

 

전쟁에서의 그의 무훈이 얼마나 뛰어났던가는 전사한 아킬레우스의 무구(武具)를 차지하는 과정에서도 다시 한번 드러났다. 저 유명한 아킬레우스가 마침내 파리스가 쏜 화살에 '아킬레스 건'을 맞아 죽은 뒤, 그가 지녔던 불후의 무구를 과연 누구에게 줘야 마땅한가에 대한 논쟁이 붙었을 때 가장 유력한 후보자는 용맹무쌍의 아이콘이었던 아이아스였다.(네덜란드 축구팀 '아약스'의 기원이 된 인물이다.) 그가 마침내 꾀많은 오뒷세우스에게 '전쟁에서의 공훈 경쟁'에서 밀려나고, 이내 광분에 빠져 자신의 군대 막사를 마구 짓밟은 끝에 자결하고 마는 이야기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아이아스>를 낳았다. 이 불운한 장군의 내적 갈등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조직 내에서의 공훈 경쟁에서 억울하게 패한 사람이 과연 그 조직에 얼마만큼 충성해야 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바로 '아이아스의 딜레마'다. ☞소포클레스의 『아이아스』

 

 


 -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에 담긴 사진

 

 

그리스 군대가 맨처음 트로이 정벌을 위해 머나먼 항해를 하는 도중에 벌어진 특이한 사건 하나도 주목할 만하다. 무려(!) 헤라클레스로부터 활을 물려받은 그리스 최고의 특등 사수였던 필록테테스가 렘노스 섬에서 그만 독사에 물렸고, 독이 퍼진 그는 심한 악취를 풍기고 끔찍한 비명을 지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스군의 핵심 전력이었지만 도저히 함대에 태울 형편이 되지 못하자 그는 결국 무인도에 홀로 버려졌다. 무려 10년 동안이나 렘노스 섬에서 비참한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던 그가 치른 고역들은 실로 끔찍했다. 그야말로 원조 로빈슨 크루소였던 셈이다.

영영 탈출할 기회조차 없을 것 같았던 그에게도 기적적인 변화가 찾아왔다. 그를 버리고 트로이 원정을 떠났던 그리스군이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 그를 꼭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신탁에 따르면 '필록테테스와 그가 헤라클레스로부터 물려받은 활의 도움'이 없으면 트로이아는 결코 함락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 원한에 사무친 필록테테스를 교묘히 설득해서 전쟁터로 데려온 인물도 오뒷세우스였다. 아흔 살이 다 된 소포클레스가 비극 경연대회에서 다시 한번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필록테테스』라는 작품 덕분이었다. ☞소포클레스의 『필록테테스』

 

 


 - 기욤 기용 르티에르, <렘노스 섬의 필록테테스>, 18세기∼19세기, 루브르 박물관

 

 

트로이 전쟁의 백미였던 '트로이의 목마' 작전을 구사한 것도 오뒷세우스였다. 그가 트로이 전쟁에서 쌓아올린 온갖 활약상을 두루 접하고 보면 그에게 불가능할 것이 과연 무엇이 있겠는가 싶을 정도다. 그러나, 그토록 꾀많고 지혜로웠던 오뒤세우스도 귀향길에서는 결국 길을 잃고 방황한다. 아테네 여신이 크게 분노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전쟁이 진행되는 내내 그리스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열심히 도왔지만, 트로이가 함락되고 나서 몇몇 그리스인들이 저지른 오만방자한 행동들을 보고는 분노를 느꼈다. 여신의 노여움은 잠잠하던 파도에게 전해졌고, 그리스 함대들은 이내 폭풍에 휘말려 산산조각나고 만다. 아테네 여신으로부터 열렬한 지지와 도움을 받았던 오뒷세우스조차 그 화를 피할 수 없었으니, 그가 고향인 이타케로 곧바로 돌아가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이렇게 해서 기나긴 10년 동안의 목숨을 건 귀향 이야기가 눈 먼 음유시인이었던 호메로스의 입으로 전해졌으니 그게 바로 '오뒷세우스의 귀향'을 노래한 『오뒷세이아』이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누구나 다 아는 빤한 이야기를 너무나 길게 풀어놓았다는 생각부터 앞선다. 그러나 오뒷세우스의 나머지 얘기를 조금이나마 더 흥미롭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밑자락은 깔아주는 게 마땅하다. 오뒷세우스는 그만큼 출중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귀향길에 오른 오뒷세우스가 온갖 고초를 다 겪는 동안에 끊임없이 마음 속으로 되뇌었던 질문 몇 가지는 누구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과연 고향 이타케는 목숨을 걸고 되돌아갈 필요가 있는 곳인가." 등등. 천하를 쥐락펴락했던 그 꾀많던 오뒷세우스도 홀로 방랑하는 틈틈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했을까. 물론이다! 그 사람만큼 자신의 존재와 삶의 의미를 심각하게 고민했던 인물도 일찌기 없었다. 오랫동안 방랑하던 그가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비로소 누군가에게 밝힐 기회를 얻었을 때는 '고된 방랑'도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가 도착한 섬에는 아름다운 나우시카 공주가 살고 있었고, 그는 이내 궁정으로 초대된다. 파이아케스족 사람들이 그의 '정체'를 궁금해 하자 그는 드디어 입을 열기 시작한다.

 

좋아요. 무엇을 먼저 이야기하고 무엇을 나중에 이야기할까요? 

하늘의 신들께서 내게 너무 많은 고난을 주셨으니 말이오.

먼저 내 이름을 말씀드리겠소이다. 그대들도 내 이름을 알도록

그리고 내가 무자비한 날에서 벗어나 비록 멀리 떨어진

집에서 살더라도 여전히 그대들의 손님으로 남아 있도록 말이오.

나는 라에르테스의 아들 오뒷세우스올시다! 나는 온갖 지략으로

사람들에게 존경 받았고 내 명성은 이미 하늘에 닿았소.


 -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제9권 제14∼20행

 

그는 실로 오랜만에 '자신의 이름'을 다시(!) 밝힐 수 있었다.(이게 포인트다!) 그가 어떤 인물이었던가. 불과 몇해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도대체 몇이나 있었던가. 삼척동자도 그의 존재를 모르는게 이상할 정도였는데, 오랜 방랑 끝에 이 평화로운 외딴 섬에 당도하고 보니 그의 영광스런 과거는 온데간데가 없었고 그의 이름조차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외눈박이 거인과 싸울 때처럼 자신의 이름을 속일 필요가 전혀 없었다. 마침내 위험은 끝나가고 이토록 마음씨 착하고 평화로운 땅에 사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가 자신의 신분을 감출 필요가 어디에 있었겠는가. 그의 이야기는 길게 이어진다.

   

나로서는 자기 나라보다 달콤한 것은 달리 아무것도 볼 수 없소이다.

아닌게아니라 여신들 중에서도 고귀한 칼륍소는 나를 남편으로

삼으려고 자신의 속이 빈 동굴들 안에 나를 붙들어두려 했지요.

마찬가지로 아이아이에 섬의 교활한 키르케도 나를

남편으로 삼기를 열망하며 자신의 궁전에 나를 붙들어두려 했지요.

하지만 그들도 내 가슴속 마음을 설득할 수는 없었소.

이렇듯 누군가가 부모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낯선 나라의 풍요한 집에서 산다 해도

고향 땅과 부모보다 달콤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법이라오.

자, 나는 그대에게 내가 트로이아를 떠났을 때 제우스께서

내게 지우셨던 고난에 찬 귀향에 관해서도 말씀드리겠소이다.

 

 -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제9권 제28∼36행

 

 

오뒷세우스는 맨 먼저 '로토스의 열매'를 먹고 사는 족속들을 만난 이야기부터 들려준다. 전우들은 그 달콤한 열매를 먹고 나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잊어버린다. 그들은 한순간에 자신들의 귀향의 목적까지도 잊어 버리는 근본적인 위험에 처한 것이다. 오뒷세우스는 이들을 억지로 함선들에 태우고 묶어서 항해를 계속한다. 그 다음에 마주친 곳은 외눈박이 괴물들이 사는 '퀴클롭스들의 나라'였다.

 

그곳으로부터 우리는 비통한 마음으로 항해를 계속하여

오만불손한 무법자들인 퀴클롭스들의 나라에 닿았소.

그들은 불사신들을 믿고 아무것도 제 손으로

심거나 갈지 않았소. 밀이며 보리며 거대한 포도송이들로

포도주를 가져다주는 포도나무하며 이 모든 것이

씨를 뿌리거나 경작하지 않지만 그들을 위해 풍성하게 돋아나고,

그러면 제우스의 비가 그것들을 자라나게 해주지요.

그들은 의논하는 회의장도 없고 법규도 없으며

높은 산들의 꼭대기에 있는 속이 빈 동굴들 안에 살면서

각자 자기 자식들과 아내들에게 법규를 정해주고

자기들끼리는 서로 상관하지 않아요.


 -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제9권 제105∼115행

 

퀴클롭스의 나라들이 얼마나 개판(!)이었는지는 아리스토텔레스도 자신의 책에서 별도로 언급할 정도였다.

 

그러나 입법자들은 오직 스파르타 사람들의 폴리스에서만, 혹은 소수의 폴리스에서만 시민들의 교육과 종사해야 할 일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 왔던 것 같다. 다른 대부분의 폴리스들에서는 이런 일들에 관해 소홀히 취급하였으며,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간다. 아이들과 아내에게 퀴클롭스들처럼 법을 부여하면서.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10권 <제9장 윤리학, 입법, 정치체제> 중에서

 

오뒷세우스 일행들은 그 섬에 당도해서 퀴클롭스가 사는 동굴로 들어간다. 거기엔 광주리마다 치즈가 가득하고 우리마다 새끼 양과 새끼 염소로 가득했다. 오뒷세우스는 젖과 치즈와 어린 짐승들을 훔쳐 달아나자는 부하들의 말을 듣지 않고 출타 중인 주인장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결국 그들은 외눈박이 거인 폴뤼페모스의 포로가 되고, 동굴의 입구는 거대한 돌로 막히고, 끼니때마다 부하가 둘씩이나 잡아먹힌다. 그런 와중에도 오뒷세우스는 꾀를 내어 자신이 가져온 '포도주'로 괴물을 유혹한다. 포도주에 맛들인 폴뤼페모스는 점점 더 술이 땡기기 시작한다.

 

'너는 내게 자진하여 그것을 한 잔 더 주고 네 이름을 말하라,

지금 당장. 그러면 나는 너를 기쁘게 해줄 선물을 주겠다.

물론 퀴클롭스들에게도 풍요한 대지는 거대한 포도송이의

포도주를 가져다주고 제우스의 비가 그것을 자라게 해주지만

네가 준 이것이야말로 가히 암브로시아요, 넥타르로다.'

그자가 이렇게 말하자 나는 반짝이는 포도주를 다시 건넸소.

나는 세 번이나 그자에게 포도주를 주고, 그자는 어리석게도 세 번이나

그것을 받아 마셨소. 마침내 포도주가 퀴클롭스의 마음을 에워쌌을 때

나는 그자에게 달콤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을 걸었소.

'퀴클롭스, 그대는 내 유명한 이름을 물었던가요? 그대에게

내 이름을 말할 테니 그대는 약속대로 내게 접대 선물을 주시오.

내 이름은 '아무도아니'요. 사람들은 나를 '아무도아니'라고

부르지요.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리고 다른 전우들도 모두.'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자는 즉시 비정하게 내게 대답했소.

'나는 전우들 중에서 맨 나중에 '아무도아니'를 먹고

다른 자들을 먼저 먹겠다. 이것이 내가 너에게 줄 접대 선물이다.'


 -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제9권 제355∼370행

 

 

방금 우리가 들은 '폴뤼페모스와 오뒷세우스의 동굴 속의 대화'야말로 이 글의 핵심이다. 이 짧은 대화 속에 실로 많은 시사점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선, 괴물은 오뒷세우스에게 '네 이름'을 말하라고 요구하는데, 오뒷세우스는 '아무도 아니'라고 대답한다. '아무도 아니'라니. 도대체 무슨 이름이 그럴 수 있는가. 무슨 인디언식 이름도 아니고 말이다. '아무도 아니'는 그리스어로는 우티스(Outis)이고 영어로는 Nobody이다. 결국 '아무도 아니'는 말 그대로 '어디에도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오뒷세우스로서는 그 괴물에게 자신의 진짜 이름을 알려줄 필요도 없었을 뿐더러, '아무도 아니'라는 이름만이 정말로 자신의 처지에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판단했을 법하다. 그런데 오뒷세우스가 임기응변식으로 얼렁뚱땅 내놓은 이 기막힌 이름이야말로 결국 '신의 한수'였음이 나중에 판명된다. 호메로스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어서 빨리 그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 보자.

 

폴뤼페모스의 동굴 안에 갇힌 오뒷세우스

야콥 요르단스 (wikimedia commons, 1593∼1678), 17세기 전반경, 푸슈킨 미술관

 

 

여기서 잠깐 오뒷세우스 일행들이 그 바위에 갇힌 동굴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장면으로 살짝 되돌아 가자. 그 장면만큼 우리의 마음을 흥분시키는 것도 드물기 때문이다. 오뒷세우스로부터 포도주를 연거푸 얻어 마신 외눈박이 퀴클롭스는 이내 잠들고, 그 순간을 위해 미리 올리브나무 말뚝을 준비한 오뒷세우스 일당은 끝이 벌겋게 단 말뚝을 움켜잡고 그자의 눈을 찌른다. 피투성이가 된 말뚝을 자신의 눈에서 뽑아 던진 괴물은 이내 주위의 동굴에 사는 퀴클롭스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퀴클롭스 살려! 퀴클롭스 살려!"

 

오뒷세우스가 폴뤼페모스의 눈을 찌르는 장면을 보여주는 술잔(기원전 550년경)
(에우리피데스 지음 / 천병희 옮김,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1』에서 인용)

 

 

그러자 그 소리를 듣고 사방에서 모여든 퀴클롭스들이

동굴 주위에 둘러서서 무엇이 그자를 괴롭혔히는지 물었소.

'폴뤼페모스! 무엇이 그대를 그토록 괴롭혔기에 그대는 신성한 밤에

이렇게 고함을 지르며 우리를 잠 못 들게 한단 말이오? 설마 어떤

인간이 그대의 뜻을 거슬러 작은 가축들을 몰고 가는 건 아니겠지요?

설마 누가 꾀나 힘으로 그대를 죽이려는 건 아니겠지요?'

힘센 폴뤼페모스가 동굴 안에서 그들을 향해 말했소.

'오오, 친구들이여! 힘이 아니라 꾀로써 나를 죽이려는 자는 '아무도아니'요'

그들은 물 흐르듯 거침없이 이런 말로 대답했소.

'그대에게 폭행을 가하는 것이 아무도 아니고 그대가 혼자 있다면,

그대는 아마도 위대한 제우스가 보낸 그 병(病)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오. 그러니 그대는 아버지 포세이돈 왕께 기도하시오."

이렇게 말하고 그들이 떠나가자 내 마음은 웃었소.

내 이름과 나무랄 데 없는 계략이 그들을 속였기 때문이지요.

 

 -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제9권 제401∼414행 

 

이렇게 해서 다른 퀴클롭스들을 교묘하게 뿌리친 오뒷세우스 일행은(그들은 여전히 동굴 속에 갇혀 있다!) 다음날 아침 폴뤼페모스가 동굴 안에 가둬 놓은 숫양들을 풀밭으로 내모는 틈을 이용하여 '양들의 배에 거꾸로 들러붙어' 그 동굴을 빠져나온다. 동굴의 입구를 단단히 지키고 있던 눈먼 폴뤼페모스가 오로지 숫양들만 좁은 틈으로 동굴 밖으로 내보냈기 때문이다. 혹시나 인질들이 양들과 함께 도망치는 게 아닐까 싶어 숫양들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살아남은 전우들과 함께 서둘러 다시 배에 올라탄 일행들은 그 섬에서 멀어질 때 다시 한번 퀴클롭스를 조롱한다. '퀴클롭스! …… 그대는 제 집에서 손님들을 잡아먹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소. 그래서 제우스와 다른 신들께서 그대에게 벌을 내리신 것이오.' 화가 더욱 돋구친 그자는 큰 산의 봉우리 하나를 뜯어내 오뒷세우스 일행들에게 던져 보지만 배에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폴뤼페모스를 조롱하는 오뒷세우스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 1829년경, 런던 내셔널 갤러리

 

전우들을 격려하면서 더욱 빨리 노를 젓도록 재촉하는 와중에도 오뒷세우스는 한 번 더 퀴클롭스를 조롱한다. 저 멀리 도망치는 오뒷세우스를 '눈으로는 보지도 못한 채' 발을 동동 구르던 폴뤼페모스는 마침내 신에게 기도한다. 그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이었다.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자는 별 많은 하늘을 향해

두손을 들고 포세이돈 왕께 기도했소.

'내 말을 들으소서, 대지를 떠받치시는 검푸른 머리의 포세이돈이시여!

내가 진실로 그대의 아들이고 그대가 내 아버지이심을 자랑스럽게

여기신다면 이타케에 있는 집에서 사는 라에르테스의 아들

도시의 파괴자 오뒷세우스가 집에 돌아가지 못하게 해주소서.

그러나 그자가 가족들을 만나고

잘 지은 집과 제 고향 땅에 닿을 운명이라면

전우들을 다 잃고 나중에 아주 비참하게 남의 배를 타고

돌아가게 해주시고 집에 가서도 고통 받게 해주소서!'


 -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제9권 제526∼535행

 

이렇게 해서 외눈박이 거인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온 오뒷세우스는 다음 여정을 계속 이어나가게 된다. 물론 그의 앞에는 아직도 수많은 난관들이 도사리고 있다. 폴뤼페모스 때문에 창졸간에 포세이돈과 철천지 원수가 되었으니 그의 앞길이 어찌 험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폴뤼페모스를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아무도 아니'었던 오뒷세우스는 차츰 자신의 고향에 가까워 지면서 원래의 이름을 되찾게 된다. 그는 외눈박이 거인이 포세이돈에게 부탁했던 대로 고향 이타케에 돌아와서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조차 떳떳이 밝히지 못한다. 자신의 궁궐에는 아내 페넬로페를 차지하려는 구혼자들로 득실거렸고, 그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위장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오뒷세우스는 다시금 '아무도 아니'라는 존재로 잠시 되돌아간 셈이었다.

 

고향 이타케에 도착한 이후로도 지난하게 이어지는 자신의 이름과 정체성을 되찾는 과정은 총 24권에 이르는 『오뒷세이아』의 절반인 12권을 차지할 정도로 방대하다. 돼지를 키우던 에우마이오스가 맨 먼저 옛 주인이 돌아왔음을 알아 채고, 아들 텔레마코스도 마침내 자신의 아버지를 알아보지만 아내 페넬로페가 최종적으로 자신의 남편을 알아보는 대단원에 이르기까지는 여전히 수많은 난관들이 남아 있었다. 어찌보면 『오뒷세이아』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불세출의 영웅의 기나긴 '자아 회복 과정'이자 '자신의 존재 증명 과정'으로도 읽을 수 있는 셈이다. 그러니 한때 자신의 이름이 '아무도 아니'라고까지 말했던 오뒷세우스는 얼마나 의미심장한 가짜 이름을 내세운 것이며, 그 자신의 이름을 온전히 되찾았을 때의 그의 감격은 얼마나 벅찼겠는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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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9-01-25 19: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글은 처음부터 철저히 카알벨루치 님의 글 <제 탓이 아니잖아요!>에 대한 ‘먼댓글‘ 형식으로 기획된(?) 글이다. 그래서 ‘알라딘 상품넣기‘에도 황정은의 『아무도 아닌』이 추가된 것이다. 나는 황정은 작가가 쓴 최신작인 『아무도 아닌』뿐 아니라 그 작가의 다른 어떤 작품도 읽은 적이 없다. 그런데 카알벨루치 님의 글을 통해 그 작품에 실린 8편의 단편들을 읽으면서 짚이는 게 있었다. ‘아하, 이 작가는 틀림없이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어 이 작품을 썼구나‘ 싶었다.

그러나 인터넷으로 아무리 검색해 봐도 ‘아무도 아닌‘ 혹은 ‘아무도 아니‘와 ‘오뒷세이아‘의 연결 고리는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내 방식대로‘ 이런 글을 쓰게 되었다. 물론 내가 쓴 글에 담긴 생각은 ‘100% 순수 창작물‘은 아니다.(특히, 강대진 님의 『그리스 로마 서사시』라는 책에도 ‘아무도 아니‘라는 가짜 이름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설이 담겨 있다.)

이 글을 올린 직후에 알라딘에서 ‘아무도 아닌‘으로 검색해 본 책들은 딱 세 권이었다.

황정은의 『아무도 아닌』
파울 첼란의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
루이지 피란델로의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

내가 쓴 글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이 작품들을 왜 내가 굳이 일부러 거명하는 까닭은 단 하나다. 이 세 작품을 쓴 작가들도 틀림없이 『오뒷세이아』 속에 나오는 ‘아무도 아니‘라는 이름의 유래를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확신이 들어서다. 아니면 말고!

어쩌면 내가 ‘아무도 아닌‘ 걸 가지고 너무 심각하게 연관지어서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뭐 어쩌랴.

아니면 말고!

카알벨루치 2019-01-25 17:46   좋아요 2 | URL
ㅎㅎㅎ제 글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하셨다니 역시 산불이십니다 ㅎㅎ이 방대한 페이퍼, 오렌님의 모든 글은 페이퍼로 보기엔 너무 아까운데 출판의 계획은 없으신지요? ㅋㅋ추천합니다 책내실 것을~이미 작가이신 것은 아닌지...

한번 읽고 넘어가기 아까운 <아무도 아니>페이퍼~좋아요 백만개 보냅니다! 제가 이전에 쓴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란 페이퍼에서도 ‘아무것도 아닌’이란 의미가 나와 제가 쓴 황정은의 <아무도 아닌>페이퍼와 조금 연결되는 느낌도 있고...십자군전쟁의 <킹덤 어브 헤븐>의 마지막 장면도 계속 생각나고...오딧세이아의 이름없는 ‘아무도 아니’란 의미도 새삼 새롭게 다가오고...이래저래 흥분되는 페이퍼입니다 굿뜨👍👍👍

oren 2019-01-25 19:30   좋아요 0 | URL
카알벨루치 님께서 예전에 쓰셨던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라는 글을 다시 읽어봤습니다. 그게 최승호 시인의 시집 제목이라는 것도 새삼 알게 되었고요. 그리고, 지금 다시 찬찬히 생각해 보니,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카알벨루치 님꼐서 소개해 주신 황정은 작가의 다음 말 때문이었던 것 같네요.

<아무도 아닌>, 을 사람들은 자꾸 <아무것도 아닌>, 으로 읽는다.

‘아무도 아닌‘은 Nobody인데, ‘아무것도 아닌‘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정도로 들려서 그 어감이 너무 다르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고, 결국 그 뉘앙스 차이 때문에 오뒷세우스까지 찾아 나서게 된 것이지요.
* * *
참고로 이 ‘아무것도 아닌 자Nobody‘ 트릭은 짐 자무시 감독이 <데드맨>이란 영화에서 사용한 적이 있다. 악당들에게 잡힌 주인공 윌리엄 블레이크가 누구와 함께 왔냐는 질문에 ‘노바디Nobody와 함께‘ 라고 답하는데, 악당들은 동행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지만, 사실 이 ‘노바디‘는 그와 동행하던 인디언의 이름이었다. 잠시 후 방심한 악당들은 이 노바디의 화살에 쓰러지게 된다. 하지만 이 트릭 역시 그냥 속임수는 아니다. 그가 동행하는 ‘노바디‘는 사실상 그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죽은 사람deadman이고,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니 말이다. 주인공이 쏘는 총에 유명한 총잡이들이 모두 쓰러지는 반면, 그들의 총알은 노상 빗나가는 것도 그가 이미 죽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 강대진, 『그리스 로마 서사시』,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 중에서

hnine 2019-01-25 19: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미 위에 써주셨듯이 오디세이라는 작품의 핵심은 오디세우스가 긴 여정을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고, 오디세우스가 자기를 Nobody라고 칭한 것은 oren님 말씀대로 ‘신의 한수‘라고 할 수 있는게, 자기의 신분과 정체를 드러내면 절대 위험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은 상황이라고 판단되었다면 ‘somebody‘가 싶은 명예와 신분욕을 포기하고 nobody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의 기지를 상징한다고 봅니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 중에
I‘m nobody! Who are you?
Are you nobody, too?
라고 시작하는 시가 있어요.
책은 아니지만 nobody가 주제어로 등장하기에 덧붙여 봅니다.

(황정은의 <아무도 아닌>은 읽었습니다만 읽으면서 저는 오디세우스를 전혀 떠올리지 못했네요.)

oren 2019-01-25 19:32   좋아요 0 | URL
에밀리 디킨슨의 시에서 저런 대목이 있군요. 그녀의 시는 언뜻언뜻 접하기만 해도 몹시 심오해서, 언젠가는 꼭 한번 읽어봐야겠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hnine 님 덕분에 이렇게 또 자극을 받는군요.^^

겨울호랑이 2019-01-25 20: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oren님 글을 읽으면서 예전에 읽었던 <오뒷세이아>가 다시 떠오릅니다.^^˝) 동시에, 그때는 생각하지 않았던 몇 가지 생각이 나서 적어봅니다. <오뒷세이아>라는 작품은 주인공 오뒷세우스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작품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과업‘의 기록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돌이켜 보면, 오뒷세우스는 죽기 싫어하는 아킬레우스를 전쟁에 끌어들여 죽게 만들었으며, 위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동료 아이아스를 자살하게 만들었고, 그의 계략으로 트로이의 수많은 시민을 죽음으로 끌어들였으니, 트로이를 지지한 신들의 노여움을 사는 것은 당연하게 보입니다. 그렇기에, 헤라가 내린 광기로 자신의 아이들을 죽이고 12과업을 수행해야 했던 헤라클레스처럼 <오윗세이아>는 오뒷세우스의 속죄기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폴뤼페모스와의 일화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어 저주를 받게 되는데, 여기서는 필멸의 인간이 가진 ‘휘브리스‘가 보여진다고 여겨니다. 이렇게 본다면, 그 뒤에 일어난 행복한 결말은 그리스 비극에서 보여지는 ‘신-인간‘의 화해구도와도 유사점이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되네요. 근거는 없습니다만, oren님 덕분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oren 2019-01-25 21:16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 님께서 말씀해 주신 내용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네요. 오뒷세우스의 수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트로이 사람들 입장에서는 ‘미워 죽겠는‘ 웬수 같은 인물일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겨울호랑이 님께서 지적해 주신 여러 죄과들 말고도 오뒷세우스가 벌인 ‘교활한 음모와 지략‘ 때문에 목숨을 잃은 인물들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겠지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그를 ‘라에르테스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교활한 시쉬포스의 아들‘이라고 자주 놀려대기도 했고요.(시쉬포스는 아우톨뤼코스의 딸 안티클레이아가 라에르테스에게 시집가기 전에 그녀를 범한다. 그래서 그가 오뒷세우스의 실부(實父)라는 주장도 있다. - 천병희 주석)

그런데, 『일리아스』나 『오뒷세이아』나 오늘날 우리가 지니는 도덕감정과 유사한 ‘선과 악에 대한 가치 판단‘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싶어요. 인간들 사이에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이라는 게 결국은 신들의 보살핌이나 노여움의 결과이거나, 운명으로 정해져 있다고 보니까요. 심지어 외눈박이 거인 폴뤼페모스조차도 오뒷세우스에게 죽을 꺼라는 예언을 예전부터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기도 하고요.

그분은 이 모든 일들이 나중에 이루어져서
내가 오뒷세우스의 손에 시력을 잃게 될 것이라고 말했지.
그래서 나는 늘 큰 용맹으로 무장한, 키카 크고
준수한 사내가 이리로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그런데 지금 한 왜소하고 쓸모없고 허약한 자가 나를 포도주로
제압한 다음 눈멀게 했구나. 자! 이리로 오라, 오뒷세우스여!

‘휘브리스‘는 그리스 비극의 핵심주제이기도 한데, 제 생각으로는 오뒷세우스의 고난에서는 그런 요소가 덜하거나 거의 개입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가 아무리 심한 고초를 겪었다고 하더라도요. 비록 폴뤼페모스를 눈멀게 한 죄과로 포세이돈으로부터 노여움을 샀지만, 어쨌든 그는 파멸하지 않고 끝끝내 살아 돌아와 영광스런 과거를 되찾았으니까요.

겨울호랑이 2019-01-25 21:38   좋아요 1 | URL
oren님 말씀처럼 그리스 문명의 황금기에 씌여진 그리스 비극의 요소들이 그보다 한참 앞선 시기에 생생하게 묘사되기에는 무리가 있을 듯 합니다. 다만, 폴리페모스 눈을 찌르고 조용히 가면 그만인데, 굳이 자신의 명성을 떨치고자 교만한 마음에 자신의 이름을 알려준 오뒷세우스의 모습에서 인간의 교만이 느껴져 이를 연관지어 봤습니다. 그냥 스쳐가는 생각이기에 정확한 의견은 될 수 없겠지만, oren님 덕분에 여러 생각을 해봤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

oren 2019-01-25 21:50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 님 말씀처럼, 호메로스가 살던 시대와 그리스 비극이 쓰여진 시대 사이에는 엄청난 세월의 간극 만큼이나 ‘가치관의 변화‘도 컸고, 문학의 형식이나 주제까지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고 생각됩니다. 오뒷세우스라는 인물도 그에 따라 당연히 ‘아주 훌륭한 영웅‘에서 ‘교활한 악당‘으로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었겠고요.
* * *
『오뒷세이아』에서 그는 현명하고 지혜롭고 참을성 많고 언변에 능한 탁월한 인물로 그려져 있고 그에 관한 비판적인 이야기는 의도적으로 빠져 있다. 그러나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헤카베』, 『오레스테스』, 『트로이아의 여인들』과 소포클레스의 비극 『필록테테스』 등에서 그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정하고 약삭빠른 인물로 그려져 있다.(천병희 번역, 『일리아스』, 718쪽)

timeroad 2019-02-07 2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히 총평]
어 명함이 없네! (오뒷세우스가)
나름 이유는 절실하지만 그것이 ‘노바디‘
-가끔 뵈요.
늘 고맙습니다.

oren 2019-02-07 22:39   좋아요 0 | URL
timeroad 님의 반갑습니다.
함축이 많은 댓글이라 뭐라 알맞은 대댓글을 달아야 할지 모르겠군요.
암튼 고맙습니다.^^
 

 

아아, 가련하게도
이제 오십 고개를 넘은 자를
두려워 마오.

 - 호라티우스

 

 * * *

 

 

 

그래, 그래도 할 수 없지. 늙는다는 것의 보상은, 하고 피터 월시는 모자를 손에 들고 리전트 파크를 나오며 생각했다. 그건 단지 이런 거야. 정열은 이전이나 다름없이 강하지만, 그래도 ─ 마침내! ─ 삶에 최고의 맛을 더해 주는 힘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지. 지난날의 경험을 손안에 넣고 천천히 돌려가며 빛에 비추어 보는 힘을.(106∼107쪽)

 

 

 * * *

 

 

고백하기 싫은 일이지만(그는 모자를 다시 썼다), 이렇게 쉰세 살쯤 되고 보니, 더 이상 사람들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인생 그 자체, 그 모든 순간, 지금 바로 이 순간, 햇볕 속에서 리전트 파크에 있는 순간만으로 충분했다. 아니, 과분할 지경이었다. 전 생애도 그 맛을 온전히 끌어내기에는, 이제 그럴 힘을 얻고 보면, 마지막 한 방울의 즐거움, 마지막 한마디의 의미까지 다 끌어내기에는 너무 짧았다. 의미도 즐거움도 이전에 비하면 훨씬 더 순수하고 개인적인 데가 적었다. 다시는 클라리사 때문에 괴로워했던 만큼 괴로워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107쪽)

 

 

 * * *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이 있을 수나 있는 일일까? 그 옛날의 비참함과 고통과 특별한 열정을 잊지 못하면서도? 하기야 전혀 다른 일이기는 했다 ─ 훨씬 더 즐거운 일이지 ─ 물론 이번에는 여자 편에서도 그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아마도 바로 그 때문에 배가 출항했을 때 그처럼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었다. 그는 단지 혼자 있고 싶었고, 선실에서 그녀의 사소한 배려들 ─ 엽궐련이며 노트, 여행용 담요 같은 것들 ─ 을 발견하고는 짜증이 났었다. 누구라도 본심으로는 다 그렇게 말할 것이었다. 오십이 넘고 보면 더는 사람들을 원치 않게 된다. 여자에게 예쁘다는 말을 하기도 귀찮아진다. 오십대의 남자 대부분이 본심으로는 다 그렇게 말하리라고 피터 월시는 생각했다.(107쪽)

 

 

 * * *

 

 

세월의 저편으로부터 ─ 포장도로가 풀밭이었던, 늪지였던 때로부터, 매머드와 엄니의 시대를 거쳐, 고요한 일출의 시대를 거쳐 ─ 이 풍상에 찌든 여인은 ─ 왜냐하면 치마를 입었으니까 ─ 오른손을 내밀고 왼손은 옆구리에 움켜쥔 채 서서 사랑의 노래를 하고 있었다. 백만 년을 이어 온 사랑, 하고 그녀는 노래했다. 승리하고야 마는 사랑! 백만 년 전에, 지금은 가고 없는 연인과 오월의 들판을 거닐었다네, 하고 그녀는 읊조렸다. 여름날처럼 길고 긴 세월이 지나 ─ 붉은 과꽃만이 타오르던 여름날, 하고 그녀는 추억했다 ─ 그는 가버리고, 죽음의 거대한 낫이 저 크고 높은 산들을 휩쓸어, 마침내 백발이 성성한 이 늙은 머리를 땅에 누일 때면, 그 머리가 차디찬 잿더미로 변할 때면, 신들이여 부디 그녀 곁에 자줏빛 히스 다발을 놓아 주시기를. 석양의 마지막 햇살이 어루만지는, 그 높다란 무덤 위에. 그때가 되면 이 세상의 행렬도 끝이 나리니.(109∼110쪽)

 

 -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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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a 2019-01-22 1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육십이 넘고 보면. . . 어떤 기분이 들까요?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기도 귀찮아지지 않을까요?

oren 2019-01-22 11:27   좋아요 0 | URL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몸이 늙는 것도 서러운데, 마음까지 따라 늙으니 더 서러울 것 같아요.^^

겨울호랑이 2019-01-22 1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자는 나이 사십을 ‘불혹(不惑)‘ 나이 오십을 ‘지천명(知天命)‘이라고 했는데, 저는 나이 오십에도 ‘불혹‘할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다르게 생각하면, 이렇게 자신을 반성하며 지내면, 그나마 늙음을 깨닫지 못하는 장점이 있기는 할 것 같네요..^^:)

oren 2019-01-22 12:27   좋아요 1 | URL
불혹이니, 지천명이니, 하는 말들은 어쩌면 성인군자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라는 걸 나이 들면서 점점 더 실감하게 되는 측면도 있는 것 같아요.^^

2019-01-22 1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22 1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19-01-22 17: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천명을 오십이라고 했는데 백세시대 요즘 50은 청춘이라고 할수 있지요.다만 사회적으로 50은 반명퇴 상태에 해당되는 분들이 대다수라 남은 기간 경제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될지(재취업 자영업등등) 모든이들의 고민이라고 할수 있습니다ㅜ.ㅜ

oren 2019-01-22 18:52   좋아요 0 | URL
맞는 말씀이네요. 불혹이니 지천명이니 이순이니 하는 ‘나이라는 숫자 앞에 붙이는 고상한 수식어들‘조차 결국 민생고 앞에서는 한순간에 무너질 테니까요. 이런 댓글을 쓰다 보니 문득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언급했다는 ‘고정된 수입‘의 무게를 새삼 절감하게 됩니다.^^
* * *
그 당시의 쓰라림을 기억하건대, 고정된 수입이 사람의 기질을 엄청나게 변화시킨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요. 이 세상의 어떤 무력도 나에게서 500파운드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음식과 집, 의복은 이제 영원히 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력과 노동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증오심과 쓰라림도 끝나게 됩니다. 나는 누구도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없으니까요. 또 누구에게도 아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나에게 줄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하여 나는 스스로 인류의 다른 절반에 대해 아주 미세하나마 새로운 태도를 취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알라딘 연간 통계 리포트

 

 

시간 단위는 단순한 약속일 뿐이야. 시간에는 눈금이 없지. 세기가 바뀔 때 총을 쏜다거나 종을 울린다든지 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뿐이야.

 - 토마스 만, 『마의 산』중에서

 

 * * *

 

올해 연말은 기분이 영 꿀꿀하다. 그렇다고 올해 빼고는 매년 연말마다 기분이 뿌듯했던 것도 아니다. 올핸 경제도 연말로 올수록 점점 더 내려앉는 듯한 느낌인 데다가, 기분 좋은 뉴스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구경조차 하기 어렵다.

 

오늘은 괜히(?) 알라딘에 들어 왔다가 '서재 결산' 때문에 꿀꿀한 기분이 살짝 더해졌다. 최근 몇 년 동안 해마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번쩍 나타나던 '서재의 달인 앰블럼'조차 나를 외면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못 태연자약하게 '내 이럴 줄 알았지' 라고 말할 기분도 아니다. 예년에 비해 서재활동이 영 부실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일말의 기대를 아예 저버리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 내가 쓴 글이 확실히 적기는 했다. 통계상으로는 총 111개의 글을 올렸다고 하지만, 밑줄긋기로 올린 글이 무려 7할이나 되고, 내가 손수 지은 글은 고작 35개에 불과했다. 그러고도 무슨 앰블럼이 붙길 바랬나 싶다.

 

2018년 oren님이 작성해주신 글은 총 111개이며, 작성해주신 글자수는 2,153,982자 입니다. 이는 <엄마를 부탁해> 같은 단행본으로 만든다면 18.7권을 출간할 수 있는 분량입니다.
oren님은 전체 알라디너 중 399번째로 글을 많이 작성해주신 알라디너십니다.

 

 * * *

 

2017년 oren님이 작성해주신 글은 총 151개이며, 작성해주신 글자수는 2,851,134자 입니다. 이는 <엄마를 부탁해> 같은 단행본으로 만든다면 24.75권을 출간할 수 있는 분량입니다.
oren님은 전체 알라디너 중 233번째로 글을 많이 작성해주신 알라디너십니다.   

 

 

그런데, <알라딘 서재 / 북플 결산 2018> 코너에 갔더니, 뜻밖에도 < 방문자가 많은 서재>에 내 서재가 네 번째 순위에 올라 있었다. 이게 무슨 변고인가 싶었다. 1년에 고작 35개의 글을 올린 게으른 서재가 어찌 감히 1년에 수백 편씩 혹은 수천 편씩 글을 올리는 다른 분들의 서재를 제치고 감히 그 자리에 올라설 수 있다는 말인가.

 

너무나 의아하여 방문자 통계를 찾아 봤더니,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1년간 총 방문자는 327,857명이며, 방문자가 가장 많았던 날은 8월 7일(화)119,614명이 방문하셨습니다.

 

 

알라딘에 자리를 튼 지 10년도 넘었지만, 여태까지 쌓인 누적 방문자수가 668,885회에 불과한데, 지난 여름 몹시도 뜨겁던 어느 하루에만 무려 119,614명이 내 서재를 방문했던 것이다! 어쨌든 알라딘 통계는 결코 허위와 조작을 하지는 않을 텐데, 그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연유로 내 서재를 방문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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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나? 어쩌면? 했던 얌체스런 앰블럼에 대한 헛된 기대는 이제 깔끔하게 사라졌지만, 그래도 스스로를 위로할 만한 구석이 아예 없지는 않다. 경제적 효익이라는 측면에서는 뜻밖에도 쏠쏠한 성과를 거뒀기 때문이다. 밑줄긋기 형식으로 올린 글을 제외하면, 꼴랑 35편의 글만 올리고도 무려(!) 15편의 당선작을 냈으니 말이다. 암튼, 이제는, 마지막 꼬랑지밖에 붙들 게 없는 개같은(어쨌든 戊戌년은 개年이니) 18년은 이쯤에서 깔끔하게 떠나 보내고, 다가올 19년이나 씩씩하게 맞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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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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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o 2018-12-20 0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oren님이 엠블렘을 달지 못하셨다는 사실이 엠블렘의 가치를 의심스럽게 만드네요..... 다른 것도 아니고 서재의 ‘달인‘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고서는 누구보다 ‘달인‘에 부합하는 oren님을 선정하지 않다니......

    oren 2018-12-20 01:17   좋아요 0 | URL
    아이고... 그 무슨 당치도 않은 말씀을요...
    서재를 매일같이 뜨겁게 달구신 ‘달인‘ 분들이 얼마나 많으신데요...
    저는 서재를 늘 서늘하게 식힌, 말하자면 그 누구보다 ‘안 달인‘ 축에 드는 사람일 뿐입니다요.^^

    syo 2018-12-20 01:33   좋아요 1 | URL
    말도 안 되는 ‘과공‘이십니다. 알라딘의 그 누구도 동의하지 않을 거구요ㅎㅎㅎ

    그리고 어차피 이런 허울에 동요하지도 않으시겠지요ㅎㅎㅎㅎㅎ

    바람도 자는 겨울밤입니다. oren님 오늘도 이달도 한 해도 잘 마무리하시길^-^

    oren 2018-12-20 11:54   좋아요 0 | URL
    알라딘 나름의 선정 기분이 있고, 저는 그 기준에 미달된 거 뿐이니,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아무쪼록 syo 님께서도 올 한 해 잘 마무리 하시길요.^^

    카스피 2018-12-20 0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아쉽게도 엠블렘을 달지 못하셨지만 15개의 당선사실이 당당히 서재의 달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것이라고 샤료됩니다^^

    oren 2018-12-20 12:01   좋아요 0 | URL
    제 스스로 돌아 보더라도, 올핸 알라딘 서재 활동에 소홀했다는 걸 많이 느꼈답니다.
    올린 글을 살펴 봤더니, 금년 5월과 7월에는 아예 단 하나의 글도 올리지 않았더군요.
    어떤 달은 딸랑 글 하나만 올렸었고요.
    그런데도 저렇게 자주 당선작으로 뽑아주시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지요.^^

    2018-12-20 05: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20 1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호랑이 2018-12-20 06: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18년 oren님의 글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가야할 길을 확인했습니다. 항상 감사드리며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oren 2018-12-20 12:04   좋아요 1 | URL
    제가 드릴 말씀을 겨울호랑이 님게서 다 해 주셨네요.^^
    늘 성원해 주셔서 감사드리고, 내년에도 더욱 좋은 한 해 만드시길 바랍니다.^^

    카알벨루치 2018-12-20 0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Oren님이 서재의 달인이 아니시라는 사실이 조금 놀랐습니다 너무나 깊고 견고한 글들을 써주시는데, 단순히 빈도 탓이라니 씁쓸합니다만, 그 Oren님의 내공이 어디가겠습니까? 알라딘에서 Oren님을 만난 것도 저에겐 행운입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로 많은 도전 주시길 바랍니다 ^^

    oren 2018-12-20 12:20   좋아요 1 | URL
    알라딘에는 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내공이 깊으신 분들도 많은데, 서재의 달인 선정 기준 때문에 그런 분들이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는 듯해서 살짝 아쉬울 때도 있더라구요. 알라딘 서재 활동 기준이 요 몇 년 사이에 북플 활동 위주로 너무 급작스럽게 바뀐 탓에, 북플 기능을 잘 쓰지 않는 분들이 알게 모르게 자꾸만 뒷전으로 밀려나는 듯한 느낌도 들고요. 알라딘의 정책이 그러하니, 그저 그려려니 합니다.^^

    카알벨루치 2018-12-24 2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렌님 알라딘에서 소통하게되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늘건강하시고 즐거운 성탄절 되십시오!

    oren 2018-12-25 14:05   좋아요 1 | URL
    제가 카알벨루치 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요.
    아무쪼록 카알벨루치 님께서도 즐거운 성탄절과 연말 보내시길요.^^
     

     

     

    테디(2003.10.1∼2017.9.30)

     

    테디를 보낸지도 어언 1년 하고도 두 달이 지났다. 오늘 문득 그 녀석이 사무치게 그리워 또다시 사진을 들춰봤다. 십수 년 동안 내가 찍은 사진들 가운데 오로지 테디의 모습만을 찾아 모든 사진 폴더를 다 뒤지기는 이번이 두 번째였다. 맨 처음 뒤진 때는 테디가 죽은 바로 그날, 따사로운 가을 오후였다. 그날 저녁 예약 시각에 맞춰 화장하기로 했고, 그 때 모니터에 띄울 '영정 사진'이 필요하다고 했다.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어미곁을 떠나 우리집으로 입양된 테디는 꼬박 14년을 우리와 함께 살다 떠났다. 죽을 때까지 크게 앓은 적도 없을 만큼 내내 건강했지만, 죽기 일주일 전쯤에 심장이 마비되어 졸도한 적은 있었다. 거실에서 쓰러진 그날 저녁에 곧바로 돌연사 하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던지.

     

    거실에서 쓰러져 버둥거리다가 의식조차 희미해진 테디를 부여 안은 채 아내는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동네 동물병원을 알아보느라 핸드폰을 든 손이 너무 와들거려서 검색할 단어조차 두드릴 형편이 안 됐다. 이미 똥오줌까지 싸면서 정신이 가물거리는 녀석을 데리고 뛰다시피 동물병원으로 가는 동안에 갑자기 녀석이 다시 정신을 차렸고, 품에서 내려 놓으니 어그적거리면서 제 발로 멀쩡히 걷는 게 아닌가.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맙던지.

     

    온갖 검사를 다 하고 약까지 타 왔지만 걱정이 태산이었다. 심장이 안 좋다고 했다. 죽기 전까지 일주일 동안은 호흡할 때 힘겨운 모습을 자주 보였다. 14년 동안 오로지 '테디와 함께' 살았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던 아내는 테디가 죽기 하루 전날 친구들과의 약속 때 통음을 했다. 집에서 10분 거리도 안 되는 곳에서 초저녁부터 술을 마셨는데도, 9시도 안 된 시각에 전화를 걸어 보니 이미 집까지 걸어올 수 없을 정도로 만취 상태로 곤죽이 되어 있었다.

     

    집에서 나홀로 테디를 돌보다가 아내를 데리러 집을 나섰다. 아내의 전화기를 바꿔들고 통화한 아내 친구의 말인 즉슨, 저녁 내내 아내는 "테디 없이 어떻게 살라고..." 라는 말만 수없이 되뇌이면서 연신 눈물 범벅으로 술을 마셨다는 것이다. 아내를 만나 집까지 데려 오는 동안에도 아내는 몇 번이고 공원의 턱끝마다 주저 않아 '테디 없인 못 살아'를 반복하며 슬퍼했다. 몇 번씩이나 토하는 바람에 등을 두드려주기도 바쁠 정도였다. 테디는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아내가 이렇게나 괴로워 하다니, 앞으로 어쩌면 좋을까' 싶은 생각 뿐이었다. 막막했다.

     

    아내를 부축해서 간신히 집으로 들어왔지만, 환자가 하나에서 둘로 늘어나 있을 뿐이었다. 그날 저녁 내내 호흡에 힘들어 하던 테디와 과음 탓에 술병이 날 정도로 몹시 괴로워 하는 아내는 둘 다 힘에 겨워 서로를 돌 볼 힘조차 없었다. 아내는 입밖으로 '테디야, 테디야'를 연신 내뱉지만, 그뿐이었다. 거실 바닥에 퍼져 엎드려 숙취로 끙끙 앓았다. 그토록 아내를 따르던 테디 또한 '엄마의 이상한 모습'을 안타깝게 쳐다볼 뿐, 아내에게 다가설 기운도 없이 색색거리기만 했다. 그런 두 환자를 바라보는 나는 그저 '테디야, 많이 아파? 제발 아프지 마' 라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새벽 두 시가 넘도록 지켜보다가 나도 잠에 들었다. 당장에 큰 일은 없으리라 믿었다. 다음날 아침까지 곤하게 늦잠을 잤다. 열시쯤이나 됐을까, 아내가 차분한 목소리로 나를 깨웠다. "여보, 테디가 또 이상한 거 같아." 일어나 보니 테디는 첫 번째 심장 마비때 보이던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그때보다 '훨씬 차분하게 가라앉고 있다는 느낌'만 다를 뿐이었다. 아무래도 그게 끝일 듯했다.

     

    딸까지 깨웠다. 테디와의 마지막 이별이 목전이었다. 녀석은 엄마 품에 안겨서 잠이 들듯이 차분하면서도 고요하게 호흡을 가라앉혔다. 그 시간이 무려 15분에서 20분쯤 지속되는 듯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녀석의 눈은 한 번도 엄마의 눈을 떠나지 않았다. 그토록 발랄하던 녀석이 이토록 고요하게 우리와 작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엄마, 아빠, 언니의 눈물 젖은 눈으로 건네는 수많은 작별 인사를 한번이라도 더 듣고 떠나겠다는 듯이, 녀석은 아주 오래도록 미세한 호흡을 멈출 줄 모르고 이어 나갔다. 그리곤 멎었다.

     

     

     

    2007_08_01, 다섯 살 때, 사람의 나이로는 스무 살쯤 될 터이지만, 테디의 겉모습은 어린 개구장이일 뿐이다.

     

     

    2011_02_08, 둘째가 중학교를 졸업하던 날, 천연덕스레 중간에 끼어들어 '앨범 구경' 중이다.

     

     

    2011_02_08, 거실 바닥이 매끄러운 게 테디에겐 늘 불편했다. 그래서 늘 미안했다.

     

     

    2011_03_29, 따사로운 봄 햇살을 즐기는 테디

     

     

    2011_04_25, 이 녀석은 엄마가 외출하고 없을 땐 어김없이 내 방문을 긁는다. "아저씨, 뭐해?"

     

     

    2013_11_23, 아침 햇살이 따사로운 늦가을 어느 날, 어김없이 양지바른 데를 골라 햇살을 즐기고 있다.

     

     

    2013_11_23, (비록 테디는 안 보이지만) 녀석이 주로 머무는 거실, 테디가 없는 지금과 그때는 얼마나 다른가.

     

     

    테디가 떠난 빈 자리는 생각보다 너무나 컸다. 테디가 죽은 날, 오후 늦게 학교 기숙사에서 집으로 돌아온 아들 녀석은 체온이 다 빠져나간 테디를 말없이 쓰다듬고 나더니, 자기 방에 홀로 틀어박혀 눈이 벌개지도록 울었다. 테디가 엄마 다음으로 좋아했던 게 오빠였고, 아들 녀석도 테디를 몹시 사랑했다. 테디가 일통을 저지른 게 발각되어 엄마나 아빠한테 꾸중을 듣고 혼이 나면, 녀석은 어김없이 오빠 품으로 기어들어가 다음날 아침끼지 나올 줄을 모를 정도였다.

     

    테디가 죽고 난 뒤 아내의 슬픔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처음엔 아파트 주변의 공원을 나서는 것조차 겁낼 정도였다. 14년 동안 사귀었던 애완견 부모들을 마주칠 때마다 눈물부터 왈칵 쏟아냈다. 그런 현상이 몇 달씩이나 지속되었다. 전화 통화를 할 때에도 '테디 얘기'만 나오면 눈물부터 쏟았다. 몇 달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테디의 무덤'을 찾았고, 그때마다 눈물을 바가지로 쏟았다. 1년이 다 되도록 테디를 잃은 슬픔은 누그러질 기색조차 안 보일 정도였다. 적어도 '3년은 간다더라'는 말을 위안 삼아 내뱉았다.

     

    그동안 여러 차례 또다른 강아지를 키워 볼까 고심했지만, 테디를 잃은 트라우마 때문에 도저히 다시 시작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나중에 마음의 상처가 아물고 나면 그 때 다시 생각해 볼까, 지금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옆에서 보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지 싶었다. 나도 아내와 함께 테디를 묻은 '호숫가 양지 바른 무덤'을 자주 찾지만, 아내에 비하면 나의 감정은 목석이나 다름없다. 아내는 거길 찾을 때마다 온갖 종류의 꽃잎을 따다 주거나, 꽃이 시든 계절이 되면 나뭇가지에 매달린 이쁜 열매라도 기어코 따다가 얹어 준다. 빈손으로 가는 법이 없다. 지난 겨울엔 눈이 잔뜩 쌓인 날에 테디한테 찾아갔다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눈을 감고도 찾아낼 만한 위치인데도, 눈을 파헤쳤더니 표식으로 얹어 놓은 돌맹이가 나타나지 않아 한참이나 헤맸다는 것이다.

     

    이런 아내의 모습을 너무나 자주 지켜 보고 나니,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이 과연 얼마만큼 클 것인가를 희미하게나마 알 것도 같았다. 그러나 실상은 그저 말 뿐이다. 그런 경험을 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겐 그런 아픔이 결코 설명이 안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경험해 보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는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법이니까 말이다.

     

    살아서 오래도록 함께 했던 존재를 영원히 상실하는 아픔과 슬픔은 나이가 들수록 무뎌질 법도 하다. 몽테뉴가 『수상록』의 마지막에 특별히 배치했던 <경험에 대하여>에서 말했던 것처럼, 삶은 갑자기 죽음으로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차츰 옮겨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얼마만큼 살고 나면 생명체는 그만큼 살아 있는 부분이 줄어 들고, 죽어 가는 부분이 그만큼 커진다는 얘기다. 그러니 살 만큼 살다가 따사로운 가을날 아침에 아내와 함께 '산책'까지 마무리하고, 북어포를 섞어 넣은 특식까지 실컷 배불리 먹고 난 뒤, 고통없이 깔끔하게 가족들과 기나긴 이별의 시간을 차분히 함께 한 끝에 고요히 죽음으로 옮겨 간 테디는 정말로 행복한 녀석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 삶의 에너지를 실컷 분출해 보기도 전에 갑작스레 맞는 죽음은 얼마나 사람들을 미치도록 만드는가. 우리에게 초월주의 철학자이자 유니테리언 목사로만 알려진 랄프 왈도 에머슨 같은 젊잖은(?) 사람도 '상실의 고통' 때문에 광기어린 행동을 보인 적이 있었다. 너무나 젊고 아름다운 아내와 신혼의 단꿈에 젖어 행복을 만끽하기도 전에 아내가 급작스레 병사하고 나자, 사무치는 그리움을 견디다 못해 '아내의 무덤'을 파헤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폭풍의 언덕』에서 사랑하는 애인을 향한 광풍 같은 열정과 집착을 보여준 히스클리프도 마찬가지였다. 여주인공 캐서린이 신분 때문에 자신을 버리고 딴 남자와 결혼하지만, 두 사람의 열정적인 사랑은 조금도 식지 않는다. 캐서린이야말로 히스클리프에겐 살아가는 이유의 전부였다. 이루지 못한 사랑은 캐서린이 병들어 죽자 더욱 거세진다. 히스클리프는 복수에 불타고, 캐서린을 향한 광적인 집착 때문에 결국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고 관두껑까지 열어젖힌다. 한창 불타올라야 할 생의 에너지가 급작스럽게 중단되면서 초래되는 생명의 반발력이 그만큼 강렬했던 셈이다.

     

    창졸간에 사랑하는 젊은 아들을 잃은 부모의 심정은 또한 얼마나 가슴 시린가. 한껏 피어보지도 못한 채 한 순간에 폭삭 스러져 땅 속에 묻히고 만 아들의 무덤을 찾는 부모의 가눌 수 없는 슬픔을 그 누가 감히 짐작이라도 해볼 수 있을까. 그런 일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다만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슬픔을 가슴 서늘할 정도로 아름답게 표현한 문학 작품을 통해서나마, 가까스로. 투르게네프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문장들도 그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다.

     

    러시아의 한 벽촌에 조그만 마을 공동묘지가 있다. 러시아의 거의 모든 공동묘지가 다 그렇듯이, 이 공동묘지도 서글픈 모습을 하고 있다. 공동묘지를 에워싼 도랑은 오래전부터 잡초로 뒤덮였다. 잿빛 나무십자가들은 옆으로 기울어진 채 예전에 한번 페인트칠을 했던 십자가 지붕 밑에서 썩어가고 있다. 돌비석들은 마치 누군가가 밑에서 떠밀어 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조금씩 제자리에서 벗어나 있다. …… 그러나 그 무덤들 가운데 사람의 손길도 닿지 않고 동물의 발에도 짓밟히지 않은 무덤이 하나 있다. 그저 새들만이 그 위에 앉아서 노래를 부를 뿐이다. 철책이 무덤을 둘러싸고 있고, 어린 전나무 두 그루가 양쪽 끝에 심겨 있다. 이 무덤에 예브게니 바자로프가 묻혀 있다. 그리 멀지 않은 마을에서 이미 노쇠한 부부가 자주 이 무덤을 찾아오곤 한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면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걸어온다. 울타리에 가까이 다가가서는 무릎을 꿇고 쓰러져 오랫동안 서럽게 울면서 말 못하는 비석을 빤히 바라본다. 그 비석 아래 그들의 아들이 누워 있다. 그들은 몇 마디 말을 주고받으면서 비석에 앉은 먼지를 털고 전나무 가지를 다듬어주다가 다시 기도를 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거기에 있으면, 아들에게 더 가까이 있고, 아들과 관련된 추억에 더 가까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정말로 그들의 기도, 그들의 눈물이 헛된 것일까? 정말로 사랑, 그 성스럽고 헌신적인 사랑이 무력한 것일까? 오, 아니다! …… 그것들은 영원한 화해와 무궁한 생명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 (315∼316쪽)

     

     - 투르게네프, 『아버지와 아들』 

     

     

    이런 모든 경우를 두루 헤아려 보면, 테디는 살아 있는 동안에 온갖 누릴 거 실컷 누리고 떠난 행복한 녀석이 틀림없다. 더군다나 늙어 죽을 때까지도 병치레는 좀처럼 겪지 않았고. 그러니 이제는 테디를 잃은 슬픔보다 그 녀석과 함께 했던 아름다운 순간들을 차분히 추억할 때도 되었다. 나보다 수십 배나 더 많은 시간을 테디와 함께 보냈던 사람은 언제나 '테디 엄마'로 불렸던 아내다. 그녀의 슬픔은 나보다 수십 배, 혹은 수백 배나 큰 게 틀림없다. 그렇지만 테디 엄마도 오랫동안 테디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낸 만큼, 이제는 테디를 아름답게 추억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아내는 아직까지도 내가 이토록 담담하게 테디에 대한 추억담을 길게 쓰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할런지도 모르겠다. 테디에겐 테디 엄마가 세상의 거의 전부였고, 그런 테디와 다시는 영영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그 녀석을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겪는 아픔이고 슬픔이며, 그 아픈 상처가 다 아물기에는 아직도 시간이 충분히 흐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쓰기 시작한 글이 어느새 너무 길어졌다. 이쯤에서 가만히 테디를 다시 떠나 보내야겠다. 그 녀석과 헤어지는 마당에, 쓸데없는 줄 알면서도 괜한 부탁 하나 해보고 싶다.

     

    "테디야, 제발 꿈속에서라도 자주 나타나 주렴. 네가 너무 보고 싶구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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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물선 2018-12-11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 2018-12-11 05: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외국 생활을 하던 몇년을 제외하고는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반려견과 떨어져 생활해본 적이 없답니다.
    이별도 몇번 경험했고요.
    글을 어찌나 구체적으로 섬세하게 잘 쓰셨는지 마치 제가 키우던 테디를 보낸 것 같은 심정이 되어 읽었습니다.
    사진 속의 테디, 너무나 사랑스럽고 착해보여요.

    oren 2018-12-11 12:21   좋아요 1 | URL
    저희는 반려견을 딱 한 번 키워보고도 사별의 슬픔이 너무 커서 다시 키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데, hnine 님께서는 그런 과정을 몇 번씩이나 겪으셨다니, 그런 멘탈이 너무 부럽습니다.^^

    사실, 테디를 보내고 나서 몇 차례나 ‘다시 키워 볼 생각‘을 안 햇던 건 아닌데, 아직까지는 엄두가 나지 않더군요. 한때는 아들 녀석이 ‘주인 잃은 강아지‘를 길거리에서 발견해서 꼭두새벽에 집으로 데려온 적도 있었고요. 엄마가 너무 크게 상심하는 걸 보고 꾀를 낸 셈인데, 우여곡절 끝에 결국 주인을 찾아주기도 했답니다. 그리고, 테디는 겉모습은 몹시 착해 보이지만, 주인 말고는 그 누구도 함부로 만져볼 수도 없을 만큼 성격이 까칠한 녀석이었어요. 오로지 주인에게만 사랑받고 싶어 했던 녀석이었지요.^^

    겨울호랑이 2018-12-11 0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oren님께서 지금도 테디를 이처럼 잊지 못하고 계신 것을 보니, 테디가 얼마나 사랑받고 지냈는지 알겠습니다. oren님 마음이 잘 전해졌으리라 생각합니다...

    oren 2018-12-11 12:35   좋아요 1 | URL
    저희 가족들도 테디를 사랑했지만, 테디가 가족들한테 보여준 사랑과 놀라운 충성심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죠. 아내와 둘이서 함께 산책을 나갔다가 어느 한 사람이 잠깐씩 다른 일이라도 볼라치면, 테디는 결사적으로 그 자리에서 버티면서 도통 움직이질 않아서, 그때문에 자주 곤란을 겪을 지경이었죠.^^

    qualia 2018-12-11 1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좀 엉뚱한 생각입니다만, 가희(개)들도 인간처럼 말을 할 수 있는 때가 오리라 봅니다. 그때가 빨리 왔으면 좋겠네요. 터무니없는 공상이나 SF가 아닙니다. 현재 개의 진화 단계는 인간처럼 음을 또박또박 끊어서 발음할 수 있는 성대 구조가 아니죠. 해서 개가 주인인 인간한테 아무리 말을 하고 싶어도 왈왈, 멍멍, 우우우~ 하는 소리밖에 내지 못하게 돼 있죠. 한데 인간의 도움을 받는다면 개도 말할 수 있는 단계까지 진화할 수 있다고 봅니다. 유전자 조작이나 다른 뭐 인간의 이기적 욕망이 반영된 끔찍한 시나리오말고요. 개뿐만 아니라 다른 애완동물들, 반려동물들도 인간의 말을 이해하고 할 수 있는 때가 아주 먼 원미래지만 오리라 확신합니다. 주인님, 제가 주인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시나요? 왈왈, 멍멍, 우우우~ 제가 주인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주인님은 절대 모르실 겁니다. 왈왈, 멍멍, 우우우~

    oren 2018-12-11 12:46   좋아요 1 | URL
    개들이 생각보다 영리해서 자주 들려주는 몇 가지 말들은 꽤나 정확하게 이해하더라고요. 가령, ˝테디, 산책?˝ 하면 금세 ‘아이, 좋아라~‘ 하고 깡총깡총 뛰어다니고, ˝아저씨도 같이?˝ 라고 한 마디 덧붙이면, 제가 따라 나설 때까지 졸라대면서 몹시 완강하게 버티는데, 이 정도는 아주 약과지요. 청각과 후각은 그토록 발달된 녀석이 가장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인 ‘인간의 언어‘를 조금도 구사할 줄 모른다는 건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니긴 한데, 그래도 말 한 마디 못하는 동물이 보여주는 ‘주인에 대한 무한대의 충성심‘만큼은 사람도 보고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