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은 직무는 강제가 가장 적은 직무이다. 예지가 자기 힘에 맞춰서 욕망을 조절해 주는 자들에게는 그 예지가 얼마나 좋은 일을 해 주는 것일까! 그보다 더 유용한 지식은 없다. 소크라테스가 입버릇처럼 늘 하던 '자기 힘에 맞게'라는 말은 대단히 알찬 말이다. 우리 욕망을 가장 쉽고 가까운 것으로 설정하여 거기에 멈추게 해야 한다.

 - 몽테뉴

 

 * * *

4년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이벤트가 있었다. 그때 썼던 글을 다시 찾아봤다. 그때와 나는 과연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가!

 

<당신과 알라딘에 관한 16가지 기록>

https://www.aladin.co.kr/events/eventbook.aspx?pn=150701_16th_records&custno=642151

 

 

알라딘의 매력 가운데 하나는 '독서 활동에 대한 칼 같은 통계'를 자주 보여준다는 점이다. 잊을 만하면 요술램프에서 기어 나와 '결코 잊지는 말라'고 애써 우리에게 알려준다. 램프를 문지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게 상술임을 뻔히 알면서도 우리는 기꺼이 그 '순위표'를 들여다보며 즐거워하거나 혹은 실망한다. 설마 거기에 분노하는 사람들까지야 없으리라 믿고 하는 얘기다.

'책읽기'를 둘러싼 제반 활동에 대한 '종합 명세서'는 아무래도 연말이 가장 알찬(?) 듯하다. 엠블럼도 따라 붙고. 그렇다고 알라딘의 생일날에 슬며시 내미는 한여름 중간 명세서가 그리 허접한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연말이 되기도 전에 뜬금없이 펼쳐보게 된 '중간 정산 내역'이 무려 13개 항목에 이른다. 그 가운데 내게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항목 몇 가지만 '나'를 기준으로 간략히 살펴보고 싶다.


 

 

①  891권, 초등학교 교실 250개?

 

 

891권의 책으로 어떻게 초등학교 교실 250개를 채울 수 있다는 건지 솔직히 이해가 좀 안 된다. 책의 낱장을 모두 펼쳐서 교실 바닥을 빈틈없이 이어 붙여서 채운다는 가정일까.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책을 낱장으로 분해한다는 가정부터가 너무 비현실적이다. 아무튼, 4년 전에는 책의 권수와 함께 합산 페이지 숫자까지 자세히 알 수 있어서 좋았는데, 이번엔 그런 중요한 정보가 빠져서 조금 아쉽다.

 

 

대략 2003년에 알라딘에 둥지를 튼 셈 치고는 그리 많은 책을 산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사들인 책을 모조리 다 읽은 것도 아니고. 그래도 나름대로는 책을 사는 데 꽤나 신중한 편이어서 '읽지도 않을 책'을 마구잡이로 사들인 경우는 거의 없었던 듯하다.(4년 전에는 구매한 책들의 평균 쪽수가 412쪽라는 점이 유난히 눈에 띄었었다.)

 

 

② 12,325,340원, 15,393째

 

 

 

4년 전에는 이랬다. 4년 동안 400만 원 가까이 추가로 지출했는데, 전체 순위는 대폭 하락했다.

 

 


책을 사들인 금액이 '많다'는 생각은 여태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늘 적으면 적었지 많다는 쪽으로는 좀처럼 생각이 미치지 않는 것이 책에 대해 지출하는 비용이라 여긴다. 그러니 저 금액이 내게 무슨 특별한 느낌을 줄 리도 없다. 그런데 15,393번째라는 숫자에 대해서는 묘한 감정이 생겨난다. 누군가는 1번째(전국 수석?)일 테고, 또 분명 어느 누군가는 50,000번째 혹은 100,000번째일 텐데, 각자 자신의 '순위'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까 궁금하다. 나는? 글쎄? 이제는 순위에 무덤덤해진 나이가 된 걸까? 아무런 감흥이 없다.


③ 북플 마니아 

 

 

4년 전에는 이랬다. 4년 전에 비해 서양고전문학에서 조금 더 올라섰고, 서양철학에서 여러 단계 올라선 점이 눈에 들어온다. 서양고전사상, 교양 인문학, 영미소설에서 마니아 지수가 많이 향상된 점도 나에겐 이채롭다.

 

 

 

 


④ 80세까지 540권

 

 

4년 전에는 이랬다. 80세까지 1,590권의 책을 더 읽을 수 있다던 알라딘의 요술램프 속 '지니'가 인심이 매우 박해졌나 보다. 아니면 나의 독서 활동이 4년 동안에 현저하게 둔화되었거나. 어쩄든 감소폭이 매우 크다!

 


나는 대략 앞으로 (남은 여생 동안) 500권의 책도 읽기 어렵다고 생각해왔다. 굳이 자세히 따져보진 않았지만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무엇보다도 '독서 의욕'이 차츰 떨어질 테고, 언젠가는 눈도 침침해 질 게 뻔하니 말이다. 그런데도 '지금처럼' 계속 책을 읽는다면 아직도(!) 540권의 책을 더 읽을 수 있다니! 여전히 희망적이다. 아직도 너무 늦지는 않았구나, 앞으로 죽기 전까지 '이름만 들었던' 숱한 명저들을 좀 더 섭렵해 보자, 이런 생각부터 앞선다. 알라딘이 아니라면 쉽게 내밀 수 없는 '잔존 독서량 예측'이 아닐 수 없다. 결론은 매번 뻔한 데도 이렇게 불쑥 내미는 명세서가 매번 궁금하니 나 원 참...

 

"책을 잡고 글을 읽으세"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은 『고백록』의 어느 중요한 단락에서 두 가지 방식의 독서법-소리를 내는 방법과 소리를 내지 않는 방법-이 거의 동시에 이뤄지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우유부단함에 화가 난 나머지, 또 자신의 과거 죄에 분노를 느끼면서,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결단을 내려야 할 시간이 왔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며 그때까지 자신의 여름 정원에서 (큰 소리로) 함께 책을 읽고 있던 친구 알리피우스 곁을 빠져 나와 무화과 나무 밑으로 몸을 던져 흐느껴 울었다. 바로 그때 근처의 어느 집에서 어린이(소년인지 소녀인지, 그는 밝히지 않았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노래의 후렴이 "책을 잡고 글을 읽으세"였다. 그 노랫소리가 자신을 향한 것이라 믿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알리피우스가 아직도 꼼짝 않고 앉아 있는 곳으로 다시 달려가 미처 다 읽지 못했던 바울의 『사도행전』한 권을 집어들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나는 그 책을 집어 펼친 뒤 시선이 가장 먼저 닿은 첫 부분을 소리내지 않고 읽었다"고 말한다. 그가 소리내지 않고 읽은 단락은 로마서 13장으로, "육신을 위해 양식을 준비하지 말고 그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갑옷처럼' 걸쳐라"라는 훈계였다. 혼비백산한 그는 문장의 끝에 이른다. '믿음의 빛'이 그의 가슴에 충만하고 '회의의 어둠'은 말끔히 걷힌다.

 -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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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ssbaum 2019-07-02 2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순위에는 관심이 없으며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 집중해서 꽤 두꺼운 책을 읽었는데, 며칠 전 숙제 하나를 끝내서 마음이 홀가분해졌는지 활자들이 좀 더 잘 들어오는 느낌이었습니다.

정말 중요한 건 ˝책과 가까이 할 수 있는 마음˝ 아닐까 싶네요. 저마다 책을 읽는 까닭은 다르겠지만 그 행위가 각자의 의미로 남았으면 그걸로 되었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

oren 2019-07-02 2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초창기에는 서재지수라든가, 즐겨찾기 등록 숫자, 심지어 일일 방문자수 등에도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던 듯한데, 이제는 알라딘에서 보여주는 각종 통계에 대해서도 갈수록 무덤덤해졌음을 확실히 느끼게 되네요. 어느덧 이런 글을 쓰는 것조차 쑥스러울 지경인데, 마침 4년 전에 써 놓은 글이 있어서, 이번에 새롭게 바뀐 그림 몇 개만 더 얹어보았답니다.^^

이제는 알라딘에 적립금도 꽤나 쌓여 있는데(145,170원) 무슨 책을 사야 좋을지 계속 망설이기만 하고 선뜻 사들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반드시 읽을 책들‘만 골라서 사야겠다는 마음만 앞서네요.^^

겨울호랑이 2019-07-03 0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알라딘의 독서 통계 데이터를 보면서 ‘과연 독서를 잘 했나?‘라는 물음을 가졌습니다. 숫자 이면에 나타나지 않는 독서의 깊이를 얼마만큼 가져갔나 생각하면 부족함이 많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한 걸음씩 깊이 있게 책을 읽으시는 oren님께 많이 배웁니다^^:)

oren 2019-07-03 01:03   좋아요 1 | URL
사람들마다 독서의 목적도 제각각이고 취향이나 성격 또한 제각각이니만큼 ‘독서 활동에 대한 각자의 알라딘 독서 통계‘ 또한 천차만별로 나타나리라 능히 짐작됩니다.

저는 이 글을 쓰면서도 미리 ‘몽테뉴의 글‘을 인용하면서 강조했듯이(소크라테스가 입버릇처럼 늘 하던 ‘자기 힘에 맞게‘라는 말은 대단히 알찬 말이다. 우리 욕망을 가장 쉽고 가까운 것으로 설정하여 거기에 멈추게 해야 한다.) 그저 제 힘에 맞게 책을 읽을 뿐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어떤 독서 방식이 옳은지 그른지, 좋은지 나쁜지를 두고 가치판단을 내리기는 꽤나 까다로운 문제로도 여겨지고요.

엄청나게 많은, 그리고 엄청나게 좋은 책들을 엄청나게 깊게 읽었고, 또 그렇게 읽은 책들을 엄청나게 풍부하고도 재치있게 글로 써 낸 몽테뉴가 ‘자기 힘에 맞게‘를 유달리 강조하는 걸 보면, 각자에게 딸린 ‘자기 힘‘이라는 것도 엄청나게 다르구나 싶은 생각도 하게 됩니다. 겨울호랑이 님께서 읽으시는 책들의 독특한 넓이와 깊이를 보노라면 저는 늘 겨울호랑이 님께서 갖고 계신 ‘자기 힘‘이 얼마나 엄청난지를 알고 놀라게 됩니다.^^

겨울호랑이 2019-07-03 08:53   좋아요 1 | URL
독서를 할 때마다 오히려 늘어나는 읽어야할 목록에 때로는 질식할 것 같지만, oren님 말씀을 듣고 보니 자신의 보폭에 맞게 꾸준히 가는 것이 중요함을 다시 느끼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oren 2019-07-03 12:35   좋아요 1 | URL
책을 읽는 동안에 더욱 더 많은 책들을 만나고 그런 책들을 탐하는 건 먹을수록 더욱 더 많은 식욕을 느끼는 에뤼식톤을 닮았다고도 보여집니다. 그래서 현자들이 말한 대로 ‘자기 힘에 맞게‘ 읽는 방법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도 보여지고요. 책의 바다에 풍덩 빠져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매다 보면 자칫 익사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 때가 있긴 있더라구요. ㅎㅎ
* * *
나는 바닷가에서 놀고 있는 어린아이와 같다.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많은 진리가 거대한 바다처럼 내 앞에 일렁이고 있다.(아이작 뉴턴)
 

 

역사책 속에서 저명한 책들의 저자를 만나는 건 흔한 일이다. 에드워드 기번이 쓴 『로마 제국 쇠망사』에도 수많은 '책들의 저자'가 등장한다. 역사가는 어쨌거나 책을 통해 얻게 된 지식을 바탕으로 역사를 서술할 수밖에 없으니 어쩌면 이건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하는 별의별 희한한 이름을 지닌 고대의 역사가들은 그 중요성이 아무리 크다 한들 결국 평범한 독자들은 한 귀로 듣고 지나칠 수밖에 없다. 그런 역사가들의 책은 척박한 국내의 여건에서는 번역본조차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기번보다 뛰어났던 고대의 역사가들은 그 이름이 등장할 때마다 귀가 솔깃해진다. 그런 역사가들의 작품은 대체로 기번의 역사서보다 앞서 읽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역사가들의 이름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로마사』를 쓴 티투스 리비우스, 『게르마니아』, 『연대기』 등을 쓴 타키투스,  『갈리아 원정기』를 쓴 카이사르, 『역사』를 쓴 헤로도토스, 『페르시아 원정기』, 『키루스의 교육』 등을 쓴 크세노폰,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쓴 플루타르코스, 『로마사 논고』를 쓴 마키아벨리 등. 이런 쟁쟁한 역사가들과 작품들을 기번의 책 속에서 마주칠 때마다 나는 그런 역사가와 작품들이 어떤 평가를 받는지 늘 궁금하다.

 

기번의 책 속에는 이처럼 저명한 역사가들만 등장하는 건 아니다. 이름난 철학자와 시인들도 꽤나 자주 등장한다.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의 저자인 호메로스는 시인들 가운데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아이네이스』의 베르길리우스, 『변신』의 오비디우스도 틈만 나면 얼굴을 내민다. 기번의 머리 속에 이들 시인들의 작품이 항상 머리속을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들 가운데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자주 등장한다. 이들 말고도 『명상록』의 저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고백록』의 저자 아우구스티누스, 『철학의 위안』의 저자 보이티우스도 등장하는데, 이들 세 사람의 철학자들은 작품의 저자로서보다는 '역사의 흐름을 좌지우지한 역사적 인물'로서 상세히 다뤄진다는 점이 또다른 특징이다.

 

우리에게 『철학의 위안』 이라는 저자로 잘 알려진 보이티우스는 『로마제국 쇠망사_제4권』의 초반부를 장식하는 주요 인물이다. 나는 이 인물이 기번의 역사서에 등장할 때만 하더라도 『철학의 위안』을 쓴 뛰어난 철학자 겸 정치가 정도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 유명한 고대의 철학 작품이 쓰여지는 과정까지 길게 서술된 설명을 들어보니 이 인물의 삶 자체가 그 당시의 역사나 다름없을 정도로 비중이 큰 인물이었음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보이티우스(480~526년)가 활동하던 때는 이미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였다.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삼은 동로마는 여전히 제국의 지위를 유지한 반면, 서로마 제국은 최초의 야만족 왕인 오도아케르의 치세를 지나 테오도리크(재위 488∼526년)가 지배하고 있던 시대였다. 그런데 테오도리크는 동고트 족의 왕이었지만 어려서부터 일찌감치 콘스탄티노플에서 볼모로 붙잡혀 있는 동안 '로마식 교육'을 받은 덕분에 로마인 특유의 관대한 포용 정신으로 넘쳐나는 인물이었다. 그는 비록 야만족의 왕으로서 이탈리아를 지배했지만 행정 관리들은 대부분 로마인들로 채웠고, 로마의 문화 유산들을 보존하고 관리하는 데도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기번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장 훌륭하고 용감했던 고대 로마인들과 함께 동상을 만들어 세울 만한 자격이 있는 고트족 출신 왕'이었다.

 

 

 Coin depicting Flavius Theodoricus (Theodoric the Great).

 

그토록 이탈리아에게 행운으로 여겨졌던 이 인물에게도 마침내 먹구름이 끼게 되었으니, 그의 말년에 찾아온 민중들의 증오와 귀족들의 유혈사태 때문이었다. 그때 가장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걸출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보이티우스였고, 그가 아무런 희망도 없는 감옥에서 자신을 달래기 위해 쓴 작품이 『철학의 위안』이었다.

 

이제부터는 보이티우스라는 인물이 어쩌다가 그토록 관대한 테오도리크에게 미움을 샀으며, 그가 어떤 품성을 지녔고, 얼마만큼의 드높은 학문적 경지를 지녔던 인물이었는지를 보다 자세히 살펴볼 차례다. 기번은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그를 '최후의 로마인'이라고 주저없이 규정한다. '최후의 그리스인'으로 불린 인물이 저 유명한 플루타르코스였음을 고려한다면 그는 얼마나 영광스러운 칭호를 이 인물에게 부여한 셈인가.

 

 

보이티우스는 카토나 키케로가 자신의 동포라고 인정해 주었을 최후의 로마인이었다. 부유한 고아였던 그는 아니키우스 가문의 세습 재산과 지위를 물려받았는데, 이 가문은 당대의 왕이나 황제들이 야심차게 이 집안 사람임을 자칭했던 유명한 가문이었다. (…) 보이티우스의 청년 시절에는 아직껏 로마의 학문이 완전히 버려지지 않고 있었다. 한 집정관이 교정한 베르길리우스의 책이 지금까지 남아 있고, 문법학, 수사학, 법학 교수들이 관대한 고트족 덕분에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리고 연금까지 받으며 보호되고 있었다. 그러나 보이티우스의 열렬한 학문적 호기심은 라틴어를 통독하는 것만으로 충족되지 않았다. 그는 프로쿨루스와 그 제자들의 열의와 학식, 그리고 근면성으로 유지되던 아테네의 학교들에서 18년간이나 열심히 공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강인하면서도 섬세한 감각과 플라톤의 경건한 명상과 숭고한 상상력을 조화시키려 했던 살아 있거나 죽은 스승들의 정신을 흡수하고 학문적 방법들을 모방했던 것이다. 로마로 돌아와서 벗인 심마쿠스의 딸과 결혼한 이후에도 보이티우스는 상아와 대리석으로 이뤄진 궁궐 같은 집에서 같은 학문을 연구했다.(29∼30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보이티우스는 자신이 감옥에서 억울하게 죽고 나서 1,000년도 더 흐른 뒤에 나타난 걸출한 로마사의 권위자로부터 '최후의 로마인'이라는 영광스런 칭호를 자신이 부여받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 싶다. 아무튼 그의 학문적인 위상은 댕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불려도 조금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의 재능은 로마의 독자들을 위해 그리스의 기초적인 과학과 학문을 가르치려는 노력을 통해 표출되었다. 유클리드의 기하학, 피타고라스의 음악, 니코마코스의 산술, 아르키메데스의 역학,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플라톤의 신학,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그에 대한 포르피리오스의 주석 등이 이 지칠 줄 모르는 로마 원로원 의원의 펜 끝에서 번역되고 또 설명되었다. 또한 그는 여러 가지 경이로운 과학 기구들, 예를 들어 해시계나 물시계, 천체의 운동을 보여주는 구(球) 등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여겨졌다. 그러다가 보이티우스는 이러한 심오한 학문의 세계에서 사적 · 공적인 생활에 수반되는 사회적 의무들의 세계로 내려앉았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올라앉았다. 그는 자선을 베풀어 가난한 자들을 구제했고, 데모스테네스나 키케로의 연설과 비교되곤 했던 웅변에서는 일관되게 청렴결백과 인간애를 호소하였다.(30∼31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이토록 뛰어난 미덕을 지닌 인물을 어찌 안목 있는 군주가 놓칠 리 있었겠는가. 그는 이내 집정관과 명예고관이라는 칭호로 장식되었고, 그의 재능은 직책에 어울릴 만큼 훌륭하게 발휘되었다. 그가 집정관으로 있을 때 그의 두 아들까지도 아직 어렸지만 같은 해에 집정권으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이때만 하더라도 그는 얼마나 행복한 인간이었던가. 그가 생애 말년에 감옥에 갖혀 '철학의 위안'이라는 책을 쓰며 세상을 한탄할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아무튼 그가 행복의 절정에 이르렀던 때를 기번은 이렇게 묘사했다.

 

 

그들이 취임하던 기념할 만한 날에 그들은 원로원과 군중들의 환호에 둘러싸여 엄숙하고도 화려한 행렬을 이루어 자택에서 포룸까지 행진했는데, 로마의 실세 집정관이었던 그들의 아버지는 기쁨에 겨워서 왕의 은혜를 칭송하는 연설을 마친 후에 대경기장의 경기에 막대한 하사금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명예와 재산, 공적 직위와 사적 인척 관계, 학문의 수양과 미덕의 함양, 이 모든 것에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던 보이티우스는 아마도 행복이라는 변덕스러운 형용사를 말년의 한 인간에게 붙일 수 있다면 그야말로 그 단어에 꼭 들어맞는 인물이었다.(31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이토록 행복했던 인물에게도 마침내 불행이 찾아 왔으니, 테오도리크 치세의 암울했던 말년에 일어난 우연한 사건 하나가 그의 신세를 돌변하게 만들었다. 그 무렵 원로원 의원 가운데 알비누스라는 인물이 '로마의 자유'를 '희망'했다는 죄목으로 고발당해 이미 유죄선고를 받아 놓고 있었다고 한다. 정의감에 불타는 보이티우스가 이런 사태를 그냥 좌시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보이티우스는 "알비누스가 유죄라면 원로원 전체와 나 자신도 같은 죄를 저지른 것이다. 우리가 죄가 없다면 알비누스도 똑같이 법의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 고 웅변했다.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지고의 행복을 순수하고 헛되이 희망하는 것까지는 법률이 처벌하지 않는다 해도, 만약 음모를 알았더라도 압제자에게 알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보이티우스의 성급한 고백은 묵인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알비누스의 변호인(보이티우스)은 곧 자신의 의뢰인이 처한 위험과 죄상에 휘말려 들어갔다. 고트족으로부터 이탈리아를 해방시켜 달라고 동로마 황제에게 요청하는 원본 교서에서 그들의 서명이 발견되었고, 지위는 높았지만 평판은 좋지 않았던 세 명의 목격자가 이 로마 귀족의 반역 음모에 대해 증언하였다. 그는 테오도리크에게 변명할 기회도 박탈당한 채 파비아의 탑에 엄중히 감금당했고, 그곳으로부터 500마일이나 떨어져 있었던 원로원에서 자신들의 가장 저명했던 동료 의원에게 재산 몰수와 사형을 선고한 것으로 보아, 그는 무고하게 죄를 뒤집어쓴 것으로 보인다. (…) 원로원에 대한 진지하고 충실한 애정도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원로원 의원들의 떨리는 목소리에 의해 범죄로 규정되었다.(33∼34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불세출의 충신과 만고의 역적 사이는 언제나 단 한 발짝만 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하루 아침에 '반역죄인'이 되어 차가운 지하 감옥에 갇힌 채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황제의 처형 명령을 기다리게 된 처지는 얼마나 기가 막힐 일이었겠는가. 그리고 바로 그 기가 막힌 상황에서 피를 토하듯 써내려간 그의 글들은 얼마나 간절한 호소들을 담고 있을 것인가. 아무튼 이 역사적인 인물이 쓴 역사에 길이 남을 저서를 써내려간 정황을 기번은 이렇게 전한다.

 

 

보이티우스가 족쇄에 채워져 사형 집행을 기다리면서 파비아의 탑에 갇혀 있을 때 쓴 작품이 『철학의 위안』이다. 플라톤이나 키케로가 보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이 훌륭한 책은 그 시대의 야만성과 작가가 처한 상황을 보면 더욱 형언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그가 로마와 아테네에서 줄곧 도움을 받았던 천상의 인도자가 이제는 친히 그의 지하 감옥을 비추어 그의 용기를 북돋아 주고 그의 상처에 치유의 연고를 발라 주었다. 또한 그에게 지금까지 누린 영광과 현재의 고난을 비교해 보고 이렇게 불확실한 인생사로부터 새로운 희망을 도출해 보도록 가르쳤다. 이성은 인생의 은혜들이란 변덕스러울 뿐이라는 사실을 가르쳤고, 경험은 그것들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해 주었다. 그는 한 점 부끄럼 없이 그 은혜들을 누렸으므로 이제는 아무 회한 없이 그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었고, 그의 미덕까지는 빼앗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은 그의 행복도 빼앗지 못한 적들의 무기력한 악의를 조용히 경멸하게 되었다. 보이티우스는 '최고선'을 찾기 위해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 우연과 운명, 통찰력과 자유의지, 시간과 영원의 형이상학적 미로를 탐험했고, 신의 완벽한 속성과 그 도덕적 물리적 체계에 명백하게 드러나는 무질서라는 모순을 온건한 방식으로 화해시키고자 시도하였다. 이처럼 자명하고도 모호하고 또 난해한 주제는 인간 본연의 감정들을 위안해 주지는 못하는 법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철학적 노력으로 불행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한 작품 속에 다양하고 풍부한 철학과 시, 웅변을 솜씨 있게 결합시켜 놓은 이 현자는 자신이 추구하고자 했던 담대한 평정심을 이미 체득했음에 틀림없다. 마침내 힘들었던 기다림이 끝나고 사형 집행인이 테오도리크의 극악무도한 명령을 실행에 옮겼거나 아마도 한 발 더 나아가 집행했던 것 같다. 단단한 밧줄을 보이티우스의 목에 감고 눈알이 거의 빠져나올 때까지 잡아당겼는데, 죽는 순간까지 곤봉으로 때린 좀 더 가벼운 고문이 오히려 자비롭게 여겨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재능은 살아남아 로마의 가장 어두운 시대에 진리의 빛을 비추었다.(34∼35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자신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보이티우스를 묘사한 그림(출처:네이버백과)

 

 

에드워드 기번이 보이티우스가 남긴 이 하나의 작품에 얼마나 깊은 감명을 받았는지는 다음에 이어지는 또다른 묘사만 보더라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철학자의 저술들은 영국 역사상 가장 명예로운 국왕의 손으로 번역되었고, 오토라는 이름을 쓴 세 번째 황제는 아리우스파 박해자들의 손에 의해 순교자가 되고 여러 가지 기적의 명성을 얻은 이 가톨릭 성인의 유골을 보다 영예로운 묘지로 이장해 주었다. 보이티우스는 최후의 순간까지 두 아들과 부인, 그리고 장인이기도 했던 고매한 심마쿠스가 무사하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그러나 비탄에 잠긴 심마쿠스의 행동은 신중하지 못했고 무모하기까지 했다. 그는 대담하게도 친구의 죽음에 복수하고 말겟다고 탄식했다. 결국 심마쿠스는 사슬에 묶여 로마에서 라벤나의 궁정까지 끌려왔으며, 테오도리크의 의심은 이 죄 없는 늙은 원로원 의원의 피로 겨우 진정되었다.(35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방금 인용한 에드워드 기번의 설명만 들어서는 이 책이 어떤 인물에 의해서 번역되었는지 조금 아리송하다. 한국의 독자들은 영국의 역사를 영국인만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알라딘 상품 소개'를 인용할 필요가 있다. 거기엔 에드워드 기번보다 훨씬 더 친절한 설명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철학의 위안』은 9세기에 영국의 알프레드 대왕이 번역한 이래 『캔터베리 이야기』를 쓴 제프리 초서,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등이 계속 번역하였다. 10세기에 고대 독일어로 번역되었으며, 중세 때 프랑스어로 수없이 번역되고 필사되었다. 프랑스어 번역 중 장 드 묑의 번역이 가장 유명한데, 그는 이 번역본을 필립 4세에게 헌정하였다. 이 역본은 특히 아름다운 채식사본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지성의 번역본은 장 드 묑의 역본에 있는 유명 삽화 8장을 국내에서 유일하게 본문에 삽입하였다.

『철학의 위안』은 카롤링거 왕조 이후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철학 입문서로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문학에서, 단테는 『신곡』에서 여러 번 이 책을 인용하였으며, 또한 영문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제프리 초서는 『캔터베리 이야기』와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라는 책에서 『철학의 위안』을 인용하고 모방하였다.

 

 - 알라딘 상품 소개

 

 

이 인물과 작품을 둘러싼 이야기 가운데 아직도 덧붙일 게 남아 있다면 그건 바로 회한 많은 테오도리크의 죽음에 관한 일화다. 그가 죽은 때는 서기 526년 8월이었다.

 

 

인간이라면 양심의 판결과 국왕의 회오를 증언해 줄 보고를 듣고 싶을 터인데, 혼란스러운 공상과 병약해진 육체에 시달리다 보면 무시무시한 망령이 나타나기도 하는 것은 철학에서도 다루어지는 현상이다. 미덕과 영광의 삶을 살았던 테오도리크는 이제 치욕과 죄의식과 함께 무덤을 향하고 있었다. 과거와 대비되는 현재로 인해 그의 마음은 초라해졌고 당연한 일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공포로 두려움에 떨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테오도리크는 어느 날 저녁 식탁에 머리가 큰 생선이 나오자, 갑자기 심마쿠스의 노한 얼굴이 보인다고, 두 눈은 분노와 복수심으로 불타오르고 입에는 길고 날카로운 이빨이 나 있어 자신을 잡아먹으려 한다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왕은 즉각 방으로 돌아가서 두꺼운 이불을 덮고도 학질에 걸린 듯 덜덜 떨다가 시의(侍醫)인 엘피디우스에게 보이티우스와 심마쿠스를 죽인 일을 후회한다고 더듬더듬 고백했다고 한다. 그의 병세는 악화되었고 사흘간이나 설사를 계속하다가 재위 33년만에, 이탈리아를 침략한 날부터 계산한다면 37년만에 라벤나의 궁정에서 숨을 거두었다.(35∼36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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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5-18 1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이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을 읽긴 했습니다만, 정작 인물에 대해서는 단편적으로 알았습니다. oren님 덕분에 자세히 배워 갑니다. 감사 합니다.^^:)

oren 2019-05-18 11:15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 님께서는 이 유명한 책을 진작에 읽으셨군요. 저는 다른 책을 읽다가 이 책이 등장할 때면 그저 ‘어떤 책인가‘ 하고 살펴보기만 했더랬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 책을 꼭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부러 이런 글을 쓰기도 했으니, 저도 머잖아 이 오래된 책을 꼭 읽을 날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oren 2019-05-18 12:25   좋아요 1 | URL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는 이 책이 어떤 식으로 언급되어 있었나 궁금해서 다시 한번 찾아봤습니다. 다른 대목에서 이 책을 언급한 부분은 잘 찾지 못하겠고(몇 번씩이나 언급되었던 듯한데 말이지요.), 책의 맨 마지막 부분인 ‘초서의 고별사‘에서 언급된 부분만 덧붙여 봅니다.

* * *

(… ) 성서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적혀진 것은 모두 우리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제 목표도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겸허하게 여러분들에게 부탁합니다. 그리스도가 저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도록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특히 인간의 허영을 다룬 저의 번역물과 글을 쓴 것에 대해 뉘우치고자 합니다. 그 중에는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더』, 『명예의 전당』, 『착한 여인들의 전설』, 『공작 부인의 책』, 『새들의 토론』을 비롯하여 『캔터베리 이야기』에 수록된 죄를 짓는 이야기들과 『사자의 책』과 미처 생각하지 못한 수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또한 음탕한 노래들과 시들도 있습니다. 무한하게 자비로우신 그리스도여, 이런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반면에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이나 성인들의 전설에 관한 책, 도덕과 신앙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번역서들에 대해서 저는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복되신 성모님과 천국에 계신 모든 성인들에게 감사를 드리며, 제가 죽는 날까지 제 죄를 뉘우치고 제 영혼을 구할 수 있는 길을 연구하도록 은총을 베출어 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

겨울호랑이 2019-05-18 15:45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초서가 보에티우스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철학의 위안」에서 스토아 철학의 자취를 많이 느꼈습니다. 중세 철학자 기준에서는 이교 사상이라 볼 수 있는 면이 있음에도 초서는 보에티우스 사상을 긍정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마치 단테의 「신곡」 에서 거의 유일하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살라딘이 떠오릅니다.^^:)
 

 

로마인들은 공중 목욕탕을 과연 어떻게 이용했을까? 에드워드 기번의 설명을 들어 보자.

 

아우구스투스 자신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경탄할 만한 수로들은 황제가 관대하게 로마 시 곳곳에 건설한 공중 목욕탕에 물을 공급해 주었다. 원로원 의원들과 시민들이 차별 없이 사용하도록 정해진 시간에 문을 여는 안토니누스 카라칼라 욕장은 대리석으로 만든 1600개 좌석을 갖추었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은 3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었다. 높은 욕실 벽은 화필로 그린 듯 우아한 디자인과 다양한 색채의 정교한 모자이크로 덮였다. 이집트산 화강암이 누미디아의 귀한 초록색 대리석을 보기 좋게 장식했다. 뜨거운 물줄기가 빛나는 은으로 만든 수많은 수도꼭지를 통해 넓은 웅덩이로 계속해서 쏟아졌다. 로마 시민 중 가장 비천한 자라도 동전 몇 닢만 있으면 아시아의 왕들도 질투할 호사를 온종일 누릴 수 있었다. 이렇게 화려한 건물들로부터 신발도 못 신고 망토 하나 못 걸친 지저분한 누더기 투성이의 평민들이 쏟아져 나와 온종일 광장이나 거리를 배회하며 주워들은 소식으로 논쟁을 벌이고, 처자식들의 비참할 만큼의 적은 생활비를 허황된 도박에 탕진해 버렸다. 그러고는 음침한 여관이나 매음굴에서 상스럽고 천박한 육욕에 탐닉하면서 밤을 지샜다.(181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제31장> 중에서 

 

 

역사가의 설명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들이 아직도 로마에 그대로 남아 있다. 『유네스코 세계고대문명』에 담긴 '카라칼라 욕장'을 보면 그 엄청난 규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그 사진에 딸린 설명 또한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화려한 황제의 목욕탕을 구성하는 다양한 방들에서 사람들의 흔적은 사라졌다. 카라칼라 황제가 세운 이 목욕지구에는 온탕, 냉탕, 상점, 도서관, 마사지실, 피부 미용실은 물론 정원도 있었다.(55쪽)

 

 - 『유네스코 세계고대문명』 중에서

 

 

카라칼라 욕장 (1899년 추측해서 그려낸 복원 그림) (출처 : 위키백과)

 

카라칼라 욕장은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공중 목욕탕 유적을 말한다. 카라칼라 황제의 명령으로 212년부터 216년까지 지어졌다. 이 공중 목욕탕은 6세기까지 남아서 그대로 사용되다가, 고트 전쟁 중에 동고트족 군대가 공격하여 파괴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 카라칼라 욕장의 디자인과 양식은 뉴욕 시의 펜실베이니아 역의 디자인에 영감을 주기도 했다. 1960년 하계 올림픽 체조 종목의 공식 경기장으로 사용되었고, 2009년에는 카라칼라 욕장의 발굴 유적지가 2009년 라퀼라 지진으로 피해를 입기도 했다.(출처 : 위키백과)

 

 

로마인들이 목욕탕 만큼 자주 들렀던 곳은 '원형 경기장'이었다. 그들이 거기서 벌어지는 경기들을 얼마만큼 광적으로 좋아했는지는 기번의 설명만큼 생생한 것도 드물지 싶다. 앞에서 인용했던 기번의 문장에 바로 이어지는 문장은 이렇다.

 

그러나 이 나태한 대중의 오락 중에서도 가장 활기차고 화려한 것은 자주 열리는 공공 경기들과 구경거리였다. 신앙심 깊은 그리스도교 군주들은 비인간적인 검투사들의 싸움을 폐지했지만, 원형경기장은 여전히 로마 시민들의 집이며 신전이고 공화국의 본거지였다. 성급한 군중들은 동이 트자마자 자리를 잡으려고 달려갔다. 근처의 주랑 현관에서 잠도 못 자고 마음 졸이며 밤을 보내는 자들도 많았다. 구경꾼들의 숫자는 떄로는 40만 명에 이르기도 했다. 그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초조하게 자리를 지키면서 말과 기수들로부터 눈을 떼지 못한 채, 자기가 선택한 깃발의 승패에 따라 희망과 두려움 사이를 오고 갔다. 이쯤 되니 로마의 행복이 한낱 경기 결과에 달려 있는 듯 보일 지경이었다. 그들은 경기에 고함을 지르고 갈채를 보낼 때 못지않은 열정으로 야수 사냥과 다양한 형식의 무대 공연을 즐겼다. 여기에 비하면 오늘날 대도시에서 벌어지는 공연들은 순수하고 우아한 취향과 미덕의 교육장이라 해도 좋을 정도이다.(181∼182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제31장> 중에서 

 

 

 로마의 콜로세움(출처:위키백과)

 

 

Colosseum 2013(출처:위키백과)

 

 

The Christian Martyrs' Last Prayer, by Jean-Léon Gérôme (1883) (출처:위키백과)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에 대해서는 끔찍하게도 자세히 묘사했지만, 자신이 죽고 난 뒤에 어떤 세상이 펼쳐질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듯하다. 자신이 사망한 뒤 불과 1세기만에 영국인들이 로마의 콜로세움 못지 않은 대규모 축구장을 짓고 나서 매주마다 광적으로 축구 경기를 즐기기 시작했으며, 거기서 다시 1세기가 더 흐르고 나서는 전세계의 수많은 축구팬들이 '단 하나의 경기 결과'에 얼마나 미쳐 날뛰듯이 광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조차도 언급한 게 없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내일 새벽 경기에서는 또 어떤 극적인 드라마가 쓰여질까. 오늘 새벽처럼 전세게를(특히 한국을?) 뒤집어 놓을 드라마틱한 경기가 또다시 재연될까. 벌써부터 몹시 궁금하다. 이토록 큰 경기를 코 앞에서 놓칠 순 없는 노릇이지만, 이토록 야심한 새벽 시간에 열린다는 게 늘 문제다. 까마득한 옛날 박지성이 챔피언스 리그 4강전에서 아스널을 맞아 멋진 선제골을 넣을 때, (정말 뜻밖에도!) 편안한 저녁 시간에 외국인들과 함께 그 경기를 봤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다. 2009년 5월 어느날, 토론토에 있을 때였지 싶다. 그땐 또 얼마나 가슴이 뿌듯했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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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5-09 07: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많은 스포츠 경기가 새벽에 있는데, 그럴 때는 밤늦게 시청하기가 쉽지 않네요. 특별한 경우에만 하이라이트를 보고 넘기고 있는 저로서는 밤늦도록 자신이 좋아하는 경기를 시청하고도 다음날 무리없이 일상으로 돌아오시는 분들이 부럽기만 합니다.

oren 2019-05-09 11:33   좋아요 1 | URL
EPL 경기는 그나마 주말 밤에 게임이 열려서 밤늦도록 중계 방송을 보더라도 생활에 별 지장(?)이 없는데, 챔피언스 리그는 꼭 주중에, 그것도 새벽 4시대에 열리니까 생중계 보는데 진짜로 애로가 많더라구요. 챔피언스 리그 주요 경기를 생중계로 근 10년 가까이 보다가, 요즘은 녹화된 하이라이트만 보는 형편인데, 오늘 새벽 게임은 모처럼 본방 사수했네요. 더군다나 오늘 경기는 두고두고 기억될 역사적인 경기여서 생중계로 본 보람도 컸네요. 하루 전에 있었던 ‘안필드의 기적‘보다 훨씬 더 극적인 ‘암스테르담의 기적‘을 봤으니까요. ㅎㅎ

겨울호랑이 2019-05-09 11:33   좋아요 1 | URL
어재 경기가 그렇게 재밌었다는데 oren님께서는 실시간으로 보셔서 정말 기분좋게 하루를 보내시겠습니다^^:)

oren 2019-05-09 11:38   좋아요 1 | URL
후반 인저리타임에 역전골 넣었을 땐 정말 소리 지르고 싶어 미치겠더라구요. 야심한 새벽이라 도저히 고함을 지를 순 없었고, 어디에선가 도저히 못 참고 뿜어내는 극적인 환호성을 조용히 음미하기만 했답니다.^^

cyrus 2019-05-09 16: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포츠 중계를 보는 날 중 가장 기분이 좋았던 날은 어제였어요. 제가 바라던 결과가 나왔거든요. 류현진 선발 경기, 삼성 라이온즈 투수 윤성환 선발 경기, 대구 FC 아시아챔스리그 조별 경기, 그리고 오늘 새벽에 본 토트넘 경기까지 제가 응원한 팀들 모두 이겼어요... ㅎㅎㅎ

oren 2019-05-09 16:32   좋아요 0 | URL
어제 하루 그렇게나 많은 경기에서 모조리 승리를 챙겼군요. ㅎㅎ
류현진 완봉승도 대단했지요. 저도 실시간 중계를 틈틈이 챙겨봤습니다만.. ㅎㅎ

카알벨루치 2019-05-10 08: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렌님의 이런 면 좋아합니다 오우 본방사수하셔서 희열을 느끼셨겠습니다 모우라가 미친날! 가끔 큰 경기는 한 두사람이 미쳐주는 팀이 이기죠 ㅎㅎ

oren 2019-05-10 13:05   좋아요 1 | URL
전반전이 진행될 때만 해도 토트넘이 너무 못한다 싶었고, 상대적으로 아약스가 매우 짜임새 있게 토털 축구를 훌륭하게 펼친다 했는데, 후반전에 요렌테 투입하고 나서 게임이 완전 달라지더군요. 그 틈바구니에서 모우라는 ‘상상 그 이상‘의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줬고요. 간만에 대박 경기를 생중계르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요.^^
 

테오도시우스는 콘스탄티누스 사후 거의 20년 가까이 중단되었던 신성ㅎ나 노역을 정력적으로 재개하여 결국 완성했다. (…) 신앙심 깊은 황제는 이교에 대한 최초의 실험이 성공한 데 고무되어 금지령을 거듭 선포함으로써 이교도에 대한 탄압을 강화해 나갔다. 처음에는 동로마의 속주를 대상으로 공포되었던 법률이 막시무스가 패배한 이후 서로마 제국 전체에까지 적용되었다. 테오도시우스가 거둔 승리 하나하나가 그리스도교와 가톨릭 신앙의 승리에 기여했다. 그는 희생 제의를 수치스러울 뿐 아니라 범죄 행위라고 선언하여 금지함으로써 이교 신앙의 급소를 공격했으며, 희생 제물의 창자를 살펴보는 일은 더욱 엄격하게 비난했다. 이후 부속 칙령들은 이교 신앙의 핵심인 제물을 바치는 행위 전체를 동일한 범죄 행위로 규정하였다. 신전들은 희생 제의를 바칠 목적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국민들이 위험한 유혹에 넘어가 황제가 입안한 법을 어기지 않도록 해 주는 것이 자비로운 군주의 의무였다. (…) 그들은 신전을 폐쇄하고, 우상 숭배에 쓰이는 도구들을 압수하거나 파괴하고, 신관들의 특권을 폐지하고, 신전에 헌납된 재산을 황제나 교회, 군대가 쓰도록 몰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쯤에서 신전의 파괴를 중지했더라면 더 이상 우상을 섬기는 데 쓰이지 않고 버려진 신전 건물들을 광신이 몰고온 파괴적인 분노로부터 보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신전들은 그리스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기념물이었고, 황제도 자기 도시의 아름다움을 손상시키거나 그 가치를 떨어뜨릴 생각은 없었다. 그 장려한 건축물들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기념하는 영구불멸의 전리품으로 남겨 두어도 좋았을 것이다. 예술이 쇠퇴한 시대에 이 건물들은 창고, 공장, 공공 집회 장소 등으로 유용하게 쓰이거나 신전 벽을 성스러운 의식으로 충분히 정화한 뒤 참된 신을 섬기는 장소로 바꾸어 우상을 숭배한 과거를 속죄하게 할 수도 있엌ㅆ다. 그러나 신전들이 존재하는 한 이교도들은 제2의 율리아누스가 나타나 신들의 제단을 다시 일으켜 세우리라는 어리석고ㅗ 비밀스러운 소망을 버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효과도 없는 탄원을 황제에게 진지하게 바치는 모습은 가차 없이 미신을 뿌리째 뽑아 없애고 말겠다는 그리스도교도 개혁자들의 열정을 더욱 붇돋웠다. 황제가 내놓은 법은 좀 더 온건한 편이었으나, 법 집행 과정에서 보여 준 냉담하고 무성의한 태도는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이 앞장서거나 뒤에서 부추긴 광신과 약탈 행위를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갈리에엇 투르의 주교였던 성 마르티누스는 충성스러운 수도사 무리를 이끌고 그의 광대한 교구에 있는 우상들과 신전들, 봉헌수(봉헌수)들을 모조리 파괴했다. 마르티누스가 이 고된 작업에 기적의 힘을 빌렸는지 인간의 무기를 썼는지는 독자의 신중한 판단에 맡긴다. 시리아에서는 테오도레투스에 의해 '거룩하고 훌륭한 마르켈루스'라고 불렸던 주교 마르켈루스가 사도로서의 열정에 넘쳐 아파메아 교구에 있는 장려한 신전들을 초토화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유피테르 신전은 워낙 뛰어난 기술로 단단하게 건축되어 있어서 그의 공격에 끄떡도 하지 않았다. 건물은 높은 언덕 위에 세워져 있었다. 사면에 걸쳐 둘레 16피트에 달하는 열다섯 개의 큰 기둥이 높이 솟은 지붕을 떠받치고 있었고, 이 기둥을 이루는 큰 돌들은 납과 쇠로 단단히 고종되어 있었다. 온갖 강하고 날카로운 도구도 여기에는 소용이 없었다. 결국 기둥의 토대를 부수기로 하고 나무로 된 지주를 불태우자, 기둥은 이내 무너져 내렸다. (…) 승리감에 도취한 마르켈루스는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자 자신이 직접 나섰다. 교회의 깃발 아래 수많은 병사들과 검투사들이 진군하여 아파메아 교구의 마을과 지방 신전들을 잇달아 공격했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마르켈루스는 이교도의 저항에 직면하거나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경우에 싸우거나 도망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화살이 닿지 않을 곳까지 멀리 피해 있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신중함이 오히려 그의 죽음을 초래했다. 갑자기 격분한 한 떼의 농부들이 그를 덮쳐 살해한 것이다. 속주의 종교 회의는 지체 없이 마르켈루스가 신의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선언했다. 분노한 수도사들이 이 대의를 지지하기 위해 사막에서 노도처럼 몰려와 자신들의 신앙심과 열성을 과시했다. 이교도들이 그들에게 원한을 품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탐욕스럽고 무절제하다는 비난을 받아 마땅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약탈로 탐욕을 채우고 자기들의 너덜거리는 의복, 고래고래 부르는 찬송가 소리, 창백하게 꾸민 얼굴 따위를 찬미하는 어리석은 자들의 주머니에서 우려낸 돈으로 실컷 먹고 마셔댔다. 몇몇 신전들만이 민정 관리나 성직자들의 공포심 ㅓㄱ에, 혹은 그들이 매수된 탓에, 아니면 그들의 취향이나 신중함 덕에 보호되었다. 카르타고에서 반경 2마일에 걸쳐 성역을 형성하고 있던 거룩한 베누스 신전은 현명하게도 그리스도교 교회로 바뀌었다. 장엄한 로마의 판테온도 비슷한 조치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 내의 대부분 지역에서 광신도 무리들은 권한도 규율도 없이 평화로운 주민들을 침략했다. 이때 파괴된 건축물들의 폐허는 아직까지도 남아 야만인들이 열성적으로 자행한 파괴 행위를 보여 주고 있다.

 

이 광범위하고 다양한 유린 행위 중에서도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세라피스 신전의 파괴는 특히 눈길을 끈다. 세라피스는 미신이 번창했던 이집트의 토착신이나 괴물들 중 하나는 아니었던 것 같다. 프톨레마이오스 가의 첫 번째 왕은 어느 날 꿈속에서 폰투스 해안에서 오랫동안 시노페 주민들의 숭배를 받아 온 신비스러운 이방의 신을 맞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 신의 셩격과 권세는 애매했으므로, 그가 태양을 상징하는가 아니면 어두운 지하 세계를 다스리는 군주인가의 여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조상들의 종교르 ㄹ고수해 온 이집트인들은 이 이방의 신을 자기들 도시의 성벽 안에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아첨꾼인 신관들은 프톨레마이오스 가의 왕들이 준 뇌물에 넘어가 폰투스에서 온 신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토착신으로서의 영예로운 계보를 꿈 주었다. 그리하여 이 찬탈자는 운 좋게 이시스이 남편으로서 이집트의 거룩한 군주인 오시리스의 왕좌와 침대를 차지했다. 알렉산드리아는 특별히 그의 보호를 청하여 세라피스의 도시라는 이름으로 영광을 누렸다. 이 신의 신전은 위풍당당한 유피테르 신전과 겨루기 위해 도시의 다른 부분보다 백 단 정도 높게 인공으로 쌓아 올린 산의 널따란 정상에 세워졌다. 내부의 벽이 없는 부분은 아치로 단단히 지탱했고 지하에는 납골당과 다른 지하 공간으로 분리해 놓았다. 사각형의 주랑이 신전 건물을 둘러쌌으며, 웅장하고 화려한 홀과 정교한 동상들이 예술의 극치를 과시했다. 잿더미에서 새롭게 재던된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는 고대 학문의 보배들이 보관되었다. 테오도시우스의 칙령으로 엄격히 금지된 이교의 희생 제의가 세라피스의 도시와 신전에서만은 여전히 용인되었다. 이렇게 유일한 예외가 인정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교인들이 미신적인 공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두려움 때문에 나일 강의 범람과 이집트의 풍작, 그로 인한 콘스탄티노플의 생존을 보장해 준다는 고대 의식을 감히 폐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는 테오필루스였다. 그는 평화와 미덕과는 거리가 먼 인물로, 피와 금으로 번갈아 가며 손을 더럽힌 대담하고 부패한 악한이었다. 그는 세라피스가 누리는 영예에 분개했다. 테오필루스가 바쿠스의 신전에 가한 모욕을 기억하는 이교도들은 그가 훨씬 더 중대하고 위험한 일을 꾸미는 것이 틀림없다고 믿었다. 소란스러운 이집트 수도에서는 극히 사소한 도발조차도 내전의 도화선이 되기에 충분했다. 세라피스의 신도들은 힘으로 보나 수로 보나 그리스도교인들의 적수가 못 되었지만, 신들의 제단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철학자 올림피우스의 선동에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 광신적인 이교도들은 세라피스 신전을 요새화하고 대담한 반격과 단호한 방어로 포위군을 격퇴했으며, 그리스도교인 포로들에게 비인간적인 가혹 행위를 가하면서 절망감을 달랬다. 신중한 속주 총독의 노력 덕에 테오도시우스의 답변으로 세라피스의 운명이 결정 날 때까지 두 세력이 휴전하자는 타협이 이루어졌다. 양측이 비무장 상태로 대광장에 모인 자리에서 황제의 칙서가 공개 낭독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우상들에 대한 파괴 명령이 선포되자, 그리스도교인들은 기쁨의 환호를 올렸다. 반면 불운한 이교도들은 분노가 경악으로 바귀면서 적들의 분노를 피해 황급히 자리를 물러나 도망치거나 은둔했다. 이제 세라피스 신전을 파괴하러 나선 테오필루스를 막는 것은 신전 자재의 무게와 견교함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 장애를 도저히 극복할 수 없었으므로, 그는 토대는 그대로 남겨 두고 건물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잔해를 치운 자리에는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을 기리는 교회가 세워졌다. 알렉산드리아의 귀중한 도서관도 약탈당하거나 파괴되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뒤 텅 빈 서가의 모습은 종교적 편견에 완전히 물들지 않은 구경꾼들로부터 비탄과 분노를 자아냈다. 영영 회복할 수 업시 소멸되어 버린 고대 천재들의 저작은 후세의 즐거움과 교육을 위해서라도 우상 숭배의 파괴 대상에서 제외시켰어야 했다. 값진 전리품들만으로도 대주교의 신앙열과 탐욕을 충분히 채울 수 있었을 것이다. 테오필루스는 금은으로 만든 동상과 항아리들은 셋ㅁ하게 녹였고, 값이 덜 나가는 금속 제품들은 망가뜨려 거리에 내동낻이쳤다. 그는 우상을 모시는 신관들의 기만과 악덕, 즉 자석을 이용한 교묘한 속임수, 속이 빈 조각상 속에 사람을 넣는 비밀스러운 수법들, 신앙심 깊은 남편들과 의심할 줄 모르는 여자들의 신뢰를 악용해서 저지른 비행 등을 폭로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이와 같은 비난들은 교활하고 불순한 이교의 정신과 어긋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전혀 터무니없지는 않을 것이가. 그러나 이미 쓰러진 적을 모욕하고 비방하는 비열한 소행도 그보다 낫다고 는 할 수 없다. 또한 실제로 기만 행위를 입증하는 것보다느 ㄴ가공의 이야기를 꾸며 내는 편이 훨씬 쉽다느 ㅈ점을 생각하면 그러한 비난들을 선뜻 빋기도 어렵다. 세라피스의 거대한 조각상은 자기의 신전과 조요과 함꼐 폐허 속에 묻혔다.(74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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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갈레리우스의 맹렬한 공격이 페르시아군 진영에 혼란과 경악을 불러일으켰다. 약간의 저항 끝에 끔찍한 대량학살이 벌어졌고 대혼란 속 부상당한 왕은(나르세스는 군대를 직접 지휘하고 있었다.) 메디아 사막을 향해 달아났다. 정복자는 나르세스와 태수들의 호화로운 천막에서 막대한 전리품을 얻었다. 용감한 로마군이 그들의 우아한 사치품들을 보고 얼마나 촌스러운 무지를 드러냈는지를 보여 주는 한 가지 일화가 있다. 어떤 병사가 진주가 가득 든 반짝거리는 가죽 주머니 하나를 차지했다. 그는 주머니는 조심스럽게 간직했지만, 내용물은 던져 버렸다. 아무 쓸 데도 없는 물건은 값도 전혀 안 나가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나르세스가 입은 손실은 훨씬 더 애처로웠다. 군대를 따라왔던 여러 아내와 누이들, 자녀들이 이 패배로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갈레리우스는 비록 성품은 알렉산데르 대왕과 거의 닮은 점이 없었지만, 이번 승리 후에는 다리우스 왕의 가족에게 보여 주었던 저 마케도니아 왕의 관대한 행동을 본받았다. 나르세스의 아내와 아이들을 폭행과 약탈을 당하지 않도록 안전한 장소로 옮겨 놓은 다음, 각자의 나이, 성별, 왕족으로서의 신분에 따라, 관대한 적이라면 당연히 취해야 할 정중하고 친절한 태도로 대우했다.

 

동방 세계가 걱정스럽게 이 대전투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시리아에 강력한 감시 부대를 집결시켜 놓고 먼 후방에서 로마군 위력의 근원을 과시하면서 앞으로의 비상 사태에 대비해 자신이 직접 나서는 것은 삼가고 있었다. 승전보를 듣자 곧 그는 자신이 직접 조언을 하여 갈레리우스의 오만을 억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국경 지대를 향해 짐짓 생색을 내면서 진격해 갔다. (…)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페르시아 대왕의 사신을 접견한 것도 이 도시에서였다. 나르세스는 최근의 패배로 위력, 아니 적어도 그 기세가 꺾여 있었으며, 로마군의 진격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즉시 강화 조약을 맺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총애와 신임을 받는 신하 아파르반을 파견하면서 강화 조약을 교섭하거나 아니면 차라리 정복자가 강요하는 어떠한 조건이라도 수락하도록 일임했다. 아파르반은 회담을 시작하면서, 가족에 대한 관대한 처우에 감사한다는 왕의 뜻을 전하고 그 고귀한 포로들을 석방해 줄 것을 간청했다. 그는 나르세스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갈레리우스의 무용을 찬양하면서, 자기 종족의 모든 군주들보다 뛰어난 페르시아 왕에게 승리한 갈레리우스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것은 수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페르시아의 대의명분은 여전히 정당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이번 분쟁을 두 황제의 결정에 일임한다는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하면서, 번영의 절정에 있는 두 황제가 운명의 변화무쌍함을 염두에 두리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아파르반은 발언을 마무리하면서, 동방의 우회를 예로 들어 로마와 페르시아 두 나라는 세계의 두 눈과 같아서 어느 한 쪽이 뽑히면 세계는 불구가 될 것이라고 했다. "과연 페르시아인다운 일이로다." 갈레리우스는 분노로 온몸을 떨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운명의 변화무쌍함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짐에게 태연하게 중용의 미덕을 강론하다니 과연 페르시아인다운 일이로다. 저 불운한 발레리아누스 황제께 그들이 어떤 온건함을 베풀었는지 상기하도록 하라. 그들은 그분을 속여서 패배시키고 오만무례하게 대했도다. 그들은 그분이 생을 마칠 때까지 수치스러운 포로 신세로 억류했다가, 돌아가신 후에도 그 시신을 영원히 모욕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갈레리우스는 여기서 말투를 부드럽게 하면서, 굴복하여 엎드린 적을 다시 짓밟는 것은 결코 로마인의 관습이 아니며, 이번 경우에도 페르시아의 가치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위엄을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넌지시 말해 주었다. 그는 아파르반을 물러가도록 하면서도 나르세스가 곧 황제들의 자비로 항구적인 평화와 처자식의 송환을 실현시킬 수 있는 조건을 통보받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안겨 주었다.(455∼457쪽)

 

 

 

 * * *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부하 장군들의 빈틈없는 경계로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의 안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고 자부했지만, 유프라테스 강의 방어를 위해서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몸소 행군에 나서야겠다고 결심했다. (…) 그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에데사 성벽 부근에서 페르시아의 왕과 충돌했는데, 결국 샤푸르 왕에게 패하여 포로로 사로잡혔다. 이 엄청난 사건의 세부적인 내용은 모호하고 불완전한 기록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희미한 단서를 참조해 볼 때, 이 로마 황제가 연달아 수많은 경솔한 행동과 과실을 저질렀고 그로 인해 재난을 자초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페르시아 군을 정면 돌파하려던 로마군의 격렬한 시도는 완패로 끝나고 말았으며, 월등한 병력으로 로마군 진영을 포위한 샤푸르 왕은 기아와 질병이 갈수록 맹위를 떨쳐 자신의 승리를 확실히 굳혀줄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고만 있었다. 머지않아 로마군 내부에서는 변덕스러운 불평분자들이 이 모든 재난의 원인이 발레리아누스 황제에게 있다고 비난을 하게 되었고, 불온한 소요 사태를 일으켜 즉각적인 항복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로마군은 치욕스럽게도 퇴각을 허가받기 위해 막대한 양의 금을 내겠다는 제안까지 했다. 그러나 자신이 우세하다고 확신한 페르시아 왕은 이 제안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사신들을 억류한 다음 전투 대형을 갖춰 로마군의 방벽 바로 아래까지 진격하여 로마 황제와의 직접 협상을 주장했다. 발레리아누스는 자신의 생명과 위엄을 적의 신의에 내밭겨야만 하는 처지로 전락하였다. 회담은 예상했던 대로 끝을 맺었다. 황제는 포로가 되었고 겁에 질린 그의 군대는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다.(322∼323쪽)

 

 

 * * *

 

 

흔히 증오나 아첨을 표현하는 통로에 지나지 않는 역사의 목소리는 대체로 샤푸르가 정복자의 권리를 오만하게 남용했다고 비난한다. 황제의 자주색 의복을 입은 채 사슬에 묶인 발레리아누스가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몰락한 귀인의 모습으로 군중 앞에 내세워진 데다 페르시아 왕은 말에 올라탈 때면 이 로마 황제의 목을 발판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동맹국들이 그에게 운명이 변화무쌍함을 명심하고 로마가 국력을 되찾을지 모르니 고귀한 신분의 포로들을 모욕의 대상이 아닌 평화를 위한 볼모로 삼으로고 거듭 충고했지만, 샤푸르는 여전히 완고한 태도를 유지했다. 발레리아누스가 수치심과 비통함의 무게를 견디다 못해 사망하자, 샤푸르는 시체의 피부 속에 짚을 채워 넣어 인간의 형상과 흡사하게 만든 후 이것을 페르시아의 가장 유명한 신전에 오랫동안 보존하도록 했다. 이것은 허영심에 찬 로마인들이 세우곤 했던 놋쇠와 대리석으로 만든 가공의 전승 기념물보다 훨씬 더 실감나는 승리의 기념물이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교훈적이며 감상적이지만 그 진실성에 의문이 제기된 적은 매우 드물었다.(326쪽)

 

 

 * 갈레리우스(재위 305∼311년)

 

29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로부터 로마제국의 동부를 다스리는 카이사르에 임명되었으며, 도나우강변에 웅거하던 야만족을 격퇴하여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였다. 298년 페르시아와 우세한 전투를 함으로써 유리한 강화()를 맺을 수 있었다.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게 헌책()하여 그리스도교의 대박해를 시행하도록 하였으며,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위에서 물러난 뒤 서부의 통치자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즈와 함께 정식 황제가 되어 동부를 통치하였다. 309년 병을 얻은 후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를 완화하게 되었다.

 

 

* 나르세스

 

나르세스는 즉위 후, 로마에 빼앗긴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의 탈환에 착수했다. 당시의 로마 제국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그의 양자 갈레리우스의 치세였다. 이윽고 8년에 걸친 전쟁이 시작되었다. 페르시아군은 296년에 아르메니아에서 독립한 티리다테스를 왕위로부터 추방했다. 297년에는 로마에서 티리다테스를 돕기위해 갈레리우스가 출진했다. 하지만 갈레리우스는 3번의 교전 뒤 패배하여 로마로 퇴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2만 5천의 군사를 다시 일으켜 아르메니아로 향했다.

 

결국 갈레리우스는 아르메니아인의 도움으로 나르세스의 군대에 피해를 입히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수복했다. 나르세스는 초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결국 수도 크테시폰을 빼았기고 후궁과 아내 및 자손들을 인질로 잡혔다. 동시에 티리다테스는 다시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복위했다. 이윽고 로마는 니시비스를 가르지르는 선을 중심으로 아르메니아와 크테시폰을 교환하는 것을 제안했다. 나르세스는 승낙했으며 이후 40여년동안 평화가 지속되었다.

 

 

* 발레리우스(재위 253∼260년)

 

황제가 된 발레리아누스는 아들 갈리에누스에게 서부 지역을 맡기고, 자신은 페르시아의 침략 위협이 있는 동부 지역을 담당하였다. 페르시아의 왕 샤푸르 1세가 시리아를 침략하여 안티오키아(지금의 터키 안타키아)까지 넘보자 발레리아누스는 이를 물리치려 출정하였다. 그러나 에데사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고, 260년 처형되었다. 재위 기간 동안 발레리아누스는 데키우스 황제에 이어 그리스도교 박해정책을 펴서 교회의 재산을 압수하고 집회를 금지하였다. 또 그리스도교를 처벌하는 내용의 칙령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발레리아누스의 재위 기간에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와 로마의 주교 식스투스 2세, 타라고나의 투루투어스 등이 처형되었다.

 

 

* 샤푸르 1세(재위 241∼272년)

 

사산왕조의 창건자 아르다쉬르 1세의 아들이다. 전왕()의 만년부터 계속된 로마와의 싸움에서 로마의 세력을 메소포타미아에서 몰아내고 아르메니아를 정복하였으며 시리아에도 침입하였다. 260년 에데사 부근의 전투에서 로마의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사로잡고 이 승리를 나크시 에 로스탐(이란 남부의 유적지)의 암벽에 조각하였다. 또 군데샤푸르의 대도시를 수사 부근에 건설하는 한편, 로마군의 포로들을 사역하여 슈스타르 부근의 카륜강()을 막고 유명한 농경용의 관개공사를 완성하였다. 그는 한때 마니교를 비호하기도 했으나 뒤에는 조로아스터를 신봉하였다.(출처 : 네이버 백과)

 

 

<페르시아 왕에게 굴욕당하는 발레리아누스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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