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투스, 너 마저?"


(카이사르 암살)

 

이 짧은 대사만큼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말도 드물지 싶습니다. 이 말은 사회생활 경험이 일천한 동네 꼬맹이들 사이에서도 패러디로 널리 쓰일 정도이지요. 누구나 한 번만 들으면 금세 '상황 파악'이 끝나기 때문입니다. 친구들끼리 장난을 치다가도 "아무개, 너 마저?" 라고 외칠 만한 상황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맞닥뜨렸던가요.

 

고대 로마의 역사에 대해서 무지했던 저도 저 짧은 대사만큼은 부지불식간에 듣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게 언제였는지는 결코 알 수 없지만. 그 이후로 오랫동안 제가 품었던 생각은 이랬습니다. '브루투스는 '참 나쁜 사람'이었구나, 카이사르가 자신을 그토록 믿고 아껴주었는데 어떻게 그 끔찍한 '암살'에 가담하게 되었을까?' 그런 오해와 의문이 완전히 해소된 건 아마도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거듭 읽고 나서였지 싶습니다. 몽테뉴가 '저 위대한 브루투스'라고 말하며 칭송을 거듭할 때까지도 저는 브루투스의 위대성을 도무지 실감할 수 없었으니까요.


(플루타르코스의 작품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가 남긴 『영웅전』에는 '카이사르 암살 장면'이 두 번씩이나 거듭해서 나오는데, 한 번은 「카이사르 편」에서, 다른 한 번은「브루투스 편」에서였지요. 그런데 플루타르코스가 쓴 책에는 "브루투스, 너 마저?"라는 표현은 눈을 씻고 찾아 봐도 없습니다. 두 사람씩 짝지어 대비시킨 23쌍 46명의 고대 그리스 로마의 영웅들 가운데 「카이사르 편」을 거듭 뒤져 봐도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과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말고는 더 이상 인상적인 대사는 없습니다. 카이사르 암살 장면에서 플루타르코스로부터 직접 들을 수 있는 카이사르의 목소리는 기껏해야 "비겁한 놈! 카스카, 이게 무슨 짓인가?"가 전부입니다. 「브루투스 편」에서도 마찬가지이지요. 일부러 살짝 비틀어 번역한 "카스카, 이 못된 놈! 이게 무슨 짓이냐?"라는 문장을 발견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저 유명한 대사는 말 그대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이었습니다!

 

        카스카

손이여 말해 다오!  (그들이 시저를 찌른다.)

 

           시저

브루투스, 너 마저? ㅡ 그럼 시저, 죽으리라. (죽는다.)

 

           신나

자유다! 해방이다! 독재는 무너졌다!

뛰어가서 공포하라, 길거리에 외쳐라.

 

 - 『줄리어스 시저』, <3막 1장> 중에서

 

 

이 '역사적인 장면'에서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했다는 그 유명한 말에 대해 좀 더 정확한 내막을 알기 위해서는 천병희 선생님이 열 명의 영웅전만 발췌 번역한 한 권짜리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펼칠 필요가 있습니다.

 

브루투스도 카이사르의 아랫배에 일격을 가했다. 일설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저항하며 그들의 가격을 피해 이리저리 몸을 틀면서 도와달라고 소리쳤으나 브루투스가 단검을 빼어든 것을 보자 머리에 토가를 뒤집어쓰고는 …… 폼페이우스의 입상이 서 있던 대좌에 쓰러졌다고 한다. (550쪽)

 

주석)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했다는 "내 아들아, 너 마저?"(kai su, teknon?)라는 유명한 그리스 말은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전』중 「율리우스 카이사르 전」82장에 기록되어 있다. "브루투스여, 너 마저?" 라는 말은 셰익스피어의 사극 『줄리어스 시저』에 나온다.

 

 - 천병희 번역,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중에서

 

이 짧은 주석이야말로 로마 역사상 가장 유명한 국가 원수 시해 사건을 둘러싼 논란의 정답을 제시하는 셈인데, 이 주석에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포인트가 하나 더 있습니다. 카이사르가 죽으며 브루투스에게 했다는 말 "내 아들아, 너 마저?"라는 말은 결코 카이사르가 죽을 때 정신줄을 놓으며 내뱉은 '헛소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간의 사정을 플루타르코스의 설명을 통해 좀 더 알아 보지요.


(마르쿠스 브루투스)

 

카이사르도 브루투스를 무척 아꼈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부하들에게, 전투를 할 때에도 브루투스는 죽이지 말라는 특별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만일 그가 항복하면 자기에게 데려오고, 끝까지 저항하더라도 절대로 다치게 하지 말고 도망가도록 놓아두라고 했다. 카이사르가 이렇게까지 한 것은, 브루투스 어머니인 세르빌리아 때문이었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젊은 시절에 세르빌리아를 알게 되어 한때 서로 깊이 사랑했던 사이였다. 브루투스가 태어난 것도 바로 그 무렵 일이었으므로 카이사르는 어쩌면 그가 자기 아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언젠가 로마를 뒤엎으려는 카틸리나의 음모를 밝히기 위해 원로원에서 회의가 열렸을 때였다. 서로 반대 의견을 주장하던 카토와 카이사르는 열띤 논쟁을 벌였다. 그때 카이사르에게 쪽지 한 장이 전해졌고, 이를 본 카토는 분명히 적과 내통하는 자들로부터 온 편지일 것이라며 카이사르를 공격했다. 다른 의원들까지 카이사르를 몰아세웠으므로 카이사르는 하는 수 없이 그 쪽지를 카토에게 넘겨주었다. 그런데 그것은 카토의 누이인 세르빌리아가 카이사르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였다. 카토는 그 편지를 카이사르에게 도로 던져주며 이렇게 말했다.

 

"에이, 술주정꾼 같으니라고. 어서 가져가게."


카토는 다시 회의에 정신을 쏟았다. 카이사르와 세르빌리아의 사랑 이야기는 이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모두 알려졌을 만큼 유명했다.(1775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마르쿠스 브루투스 편>

 

 

이쯤에서 다시 셰익스피어의 작품으로 잠시 되돌아가 보지요. 셰익스피어가 쓴『줄리어스 시저』에서는 모두 여덞 명의 등장인물이 죽는데, 카이사르가 맨 처음으로 죽고, 브루투스는 맨 나중에 죽습니다. 이 극의 핵심 주제는 그토록 위대했던 두 사람이 왜 그렇게 죽었는지 그리고 그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드러나지요. 그 주제는 '이상주의'입니다. 로마의 기나긴 역사를 통해 볼 때 브루투스만큼 '고귀한 성품'을 지닌 인물도 드물었습니다. 

브루투스의 이상주의는 '공화정 옹호와 독재 반대'로 나타나면서 불가피하게 카이사르의 암살로 이어집니다. 브루투스가 생각하는 공화정 최고의 가치는 '자유'였습니다. 그로서는 이 자유가 한 사람에게만 허용되는 '왕정'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자유 수호'를 위해서 그는 기꺼이 자신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던 셈이었습니다.


(카이사르 암살)


셰익스피어가 그려낸 '이상주의와 현실의 충돌'은 극의 도입부에서부터 선명하게 그려지는데, 카이사르의 개선 장면에 열광하는 '로마 시민들'을 보고 한심해 하는 셰익스피어의 '대사'가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왜 축하해? 그가 뭘 정복해서 가져오지?

어떤 조공 사신들이 포로 되어 묶인 채

전차 바퀴 장식하며 로마로 따라오지?

 

로마 시민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폼페이우스가 개선할 때 카이사르와 똑같은 방식으로 열광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죽이고 돌아오는 지금도 로마 시민들의 반응은 똑같았습니다. 로마의 군중들은 "목석 같은 멍청이, 짐승만도 못한 것들"이라고 욕을 잔뜩 먹었습니다. 물론 셰익스피어가 등장시킨 극중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서였지요. 오로지 자신의 권력을 잡기 위해 서로 죽고 죽일 뿐인 국가 지도자를 보면서, 매번 똑같은 역할을 떠맡지만 '등장 인물'만 바뀔 뿐인데 거기에 매번 열광하는 로마 시민들을 셰익스피어는 그렇게 꾸짖었던 셈이었습니다.


(카이사르 동상)

 

이제부터는 '카이사르 암살'에 대한 브루투스의 태도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브루투스가 처음부터 '카이사르 암살'을 주도했을 만큼 나쁜 인물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 사정을 자세히 살펴 보면 우리는 뜻밖에도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먼 조상인 '유니우스 브루투스'까지도 이 사건에 희미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브루투스, 지금도 살아 계셨더라면!


그러나 브루투스가 카이사르 암살 음모를 꾸미게 된 까닭은 카시우스와는 좀 다르다. 그와 가까운 친구들과 시민들이 끊임없이 그를 설득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익명의 편지들이 그에게 쏟아졌던 것이다. 어떤 시민은 옛날에 왕정을 뒤엎었던 유니우스 브루투스 동상에 이런 글을 새기기도 했다.


"브루투스, 지금도 살아 계셨더라면!"

 

"브루투스, 우리는 당신이 필요해요."

 

그리고 법무관인 브루투스가 법정에 나갈 때면, 그의 자리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힌 쪽지들이 수북하게 쌓였다.

 

"브루투스, 아직도 잠자고 있는가?"

 

"당신이 진정한 브루투스인가?"

 

하지만 브루투스가 카이사르를 암살하기로 마음먹게 된 결정적 까닭은 카이사르에게 아첨하는 이들의 경솔한 행동 때문이었다. 그들은 민중의 이름을 빌려 카이사르에게 온갖 영광을 주려 했고, 한밤에 몰래 카이사르 동상 위에 왕관을 씌워놓아, 집정관을 넘어서 왕으로 내세우려 했다. 그러나 이런 행동들은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왔는데, 이것은 카이사르 전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1779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마르쿠스 브루투스 편>


 (유니우스 브루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을 주도했던 인물은 브루투스의 의동생이었던 카시우스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처음엔 브루투스와 카이사르 사이의 돈독한 관계 때문에 브루투스에게 '자신의 의중'을 솔직히 밝힐 수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브루투스를 암살 계획에 가담시킬 방법을 궁리하던 카시우스는 마침내 그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합니다. 카시우스가 브루투스를 설득하는 대사가 매우 길지만 거기에서도 역시 '또 한 명의 브루투스'가 빠지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이 시저가 무엇을 먹었기에

이렇게 커졌지? 시대여, 넌 창피당했다!

로마여, 네 고귀한 혈통은 다 사라졌다!

대홍수 이래로 어느 한 시대가

한 사람만으로 유명한 적 있었단 말인가?

지금까지 로마를 얘기할 때 그 누가

그 넓은 거리가 한 사람만 품었다 할 수 있나?

오로지 한 사람만 있게 된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게다가 여지가 충분한 로마로다.

오, 자네와 난 선친들이 하는 얘기 들었지,

일찍이 또 한 명의 브루투스는 로마에서

왕이 쉽게 자기 옥좌 지키게 하느니

영원한 마왕이 그러도록 놔뒀을 거라고.


(『줄리어스 시저 』, <1막 2장>)

 

 

셰익스피어가 『줄리어스 시저』를 쓰면서 참고한 책이 바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었습니다. 그는 플루타르코스가 쓴 원전을 조금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도 '원작'보다 훨씬 더 생생한 극작품을 탄생시켰습니다. 그것도 오로지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통해서 말이지요.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플루타르코스는 과연 어떻게 썼는지 살펴 보면 셰익스피어의 극작품이 얼마나 독자들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자극하는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셰익스피어)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조상은 유니우스 브루투스이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타르퀴니우스를 쫓아내고 왕정을 몰락시킴으로, 로마인들은 그가 칼을 빼들고 선 동상을 카피톨리움에 있는 왕들 동상 사이에 세웠다. 성격이 지나치게 강직한 그는 남들과 타협하지 않았으며 학문으로도 그런 성격을 누그러뜨리기는커녕 오히려 독재자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독재자와 공모한 자기 아들들까지 모두 사형시켰다.

 

그러나 이제부터 쓰려는 브루투스는 성격이 유순한 데다가 철학과 학문을 갈고닦아 더할 나위 없이 조화롭고 훌륭한 인격을 갖춘 인물이다. 그는 이러한 성품으로 나랏일에 헌신했으며, 그 때문에 사람들은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뒤에 좋은 일들은 모두 브루투스 공으로 돌리고, 나쁘거나 잔인한 일들은 브루투스의 친척이자 친구인 카시우스 잘못으로 돌렸다. 그만큼 카시우스는 정직함이나 동기의 순수함에서 브루투스를 따라가지 못했다. ……

 

브루투스의 어머니 세르빌리아는 철학자 카토와 남매 사이였다. 브루투스는 로마 사람들 가운데 외삼촌인 카토를 가장 존경했으며, 뒷날 카토의 딸 포르키아를 아내로 삼았다.(1772∼1773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마르쿠스 브루투스 편>


(브루투스 가계도)

 

이런저런 이유로 마침내 브루투스가 카이사르 암살 계획에 합류하게 되고, 암살에 가담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자 '비밀 유지'가 무엇보다 중요한 관건이 되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훗날 마키아벨리가 쓴 『로마사론』에서도 <음모에 대하여>라는 유명한 장에서 다양한 역사적 사례들과 함께 치밀하게 분석되어 있는데, 카이사르 암살 음모가 실행 전 단계에서부터 일찌감치 탄로날 위험성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암살 계획에 뒤늦게 합류한 브루투스가 어느날부터인가 갑자기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은 그의 아내 포르키아였습니다.

 

브루투스는 이제 용맹과 문벌에서 로마 으뜸가는 인물들 운명이 모두 자기 한 사람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집 밖에서는 행동을 조심하면서 여느 때처럼 일을 처리했지만, 일단 집 안에 들어온 뒤에는 여러 문제들로 고민하며 밤을 꼬박 새기도 했다. 그러나 한방을 쓰는 아내가 이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중대한 문제로 고민하고 있거나, 아니면 매우 위험한 일을 계획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브루투스의 아내 포르키아는 카토의 딸로, 두 사람은 사촌 간이었다. 포르키아는 젊었을 때 첫 남편이 죽자, 어린 아들 비불루스를 데리고 브루투스와 재혼했다. 비불루스는 뒷날 《브루투스 회상록》을 남기기도 했다.

 

남편과 마찬가지로 철학을 사랑했으며, 용기도 뛰어나고 이해심도 넓었던 포르키아는 남편에게 비밀을 묻기 전에 먼저 자기 의지력을 시험하기로 했다. 그녀는 시녀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낸 다음 손톱을 깎는 날카로운 칼로 자신의 허벅지를 세게 찔렀다. 많은 피가 쏟아졌고, 심한 통증에 포르키아는 온몸을 덜덜 떨었다. 포르키아는 자신을 간호하는 브루투스에게 통증을 참으며 이렇게 말했다.

 

"브루투스, 나는 카토의 딸이에요. 내가 당신과 결혼한 것은 당신과 잠자리나 하려던 것이 아니라 운명을 함께하기 위해서였지요. 이제껏 우리는 잘 지내왔고 당신도 잘못한 게 없었어요. 그러나 지금 당신은 무언가로 무척 괴로워하면서도 내게는 말 한 마디 안 하고 있어요. 물론 당신이 나를 걱정하기 때문이라는 걸 잘 알아요. 그런 중대한 일이라면 비밀과 믿음이 꼭 지켜져야 하겠지만, 나는 무슨 일인지 알아야겠어요. 당신에게 나의 사랑을 증명할 기회를 주세요. 본디 여자들은 마음이 약해 비밀을 잘 지키지 못한다는 건 나도 알아요. 그러나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바른 교육을 받고 훌륭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다 보면 여자들도 달라지는 법이에요. 나는 카토의 딸이고, 브루투스의 아내예요. 그리고 나는 이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그 전에는 내가 정말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러웠지만, 이제 나 스스로 시험해 보니 어떤 고통도 참고 이겨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러고는 허벅지 상처를 남편에게 보여주며, 이것은 자신의 의지를 시험한 증거라 털어놓았다. 브루투스는 깜짝 놀라더니, 포르키아에게 부끄럽지 않은 남편이 되고, 자기 계획에 신의 축복이 있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포르키아에게 자신의 계획을 모두 알려주었다.(1782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마르쿠스 브루투스 편>


(브루투스의 아내, 포르키아) 

 

위험천만했던 카이사르 암살은 결국 성공했고, 브루투스는 로마 시민들을 상대로 '암살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명연설을 했으나 이 모든 노고가 로마 시민들을 향한 '안토니우스의 선동'으로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카이사르 암살 직후에 안토니우스가 취한 놀라운 행동과 로마 시민들을 격분시키는 명연설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줄리어스 시저』에서도 특히 돋보이는 장면이지요.


(브루투스의 죽음)

 

브루투스에게는 졸지에 '카이사르 살해자'라는 오명이 씌어졌습니다. 그는 안토니우스와 간신히 타협하여 마케도니아 속주 총독 자격으로 망명하듯 길을 떠났습니다. 로마에서는 옥타비아누스가 급부상하면서 안토니우스와 손잡고 암살 공모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복수에 착수하지요. 오늘날 북마케도니아에 위치한 '필리피 전투'에서 브루투스는 잘 싸우고도 전황을 오판하여 끝내 자결합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로마 공화정'도 이내 끝나고 말지요. 남편의 자결 소식을 들은 카토의 딸 포르키아도 남편 못지 않게 인상적인 죽음을 택했습니다.

 

브루투스의 아내 포르키아는 몇 번이나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친구들 감시 때문에 도저히 죽을 수가 없었다. 끝내 그녀는 벌겋게 달아오른 숯덩이를 입에 물고 질식해 죽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철학자 니콜라우스와 역사가 발레레우스 막시무스 기록에 나와 있다.(1814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마르쿠스 브루투스 편>

 

(포르키아)

 

셰익스피어는 이처럼 용기 있는 죽음을 택한 브루투스의 아내 포르키아를 위해서도 특별한 배려를 잊지 않았는데, 『베니스의 상인』에서 악덕 유태인 상인을 굴복시키는 기지를 발휘하는 여주인공 이름을 포셔(포르키아의 영문 이름)로 지었을 뿐 아니라, 극증 인물의 대사를 통해서까지 그녀의 미덕을 칭송하기 때문이지요.


        바사니오

  그녀는 아름답고, 그보다 더 아름답게 

  놀라운 미덕을 가졌다네. …… 

  이름은 포셔이고,ㅡ 로마 장군 카토의 딸

  브루투스의 포셔보다 평가가 못지않고 

  이 넓은 세상 또한 그녀 값을 알고 있지.

 

 - 『베니스의 상인』, <1막 1장> 중에서

 

로마 역사상 보기 드분 훌륭한 인격을 두루 갖춘 브루투스의 안타까운 죽음을 두고 셰익스피어는 '안토니우스의 입'을 빌려 다시 한번 각별하게 애도했습니다.

 

 안토니

이 사람이 그들 중 가장 귀한 로마인이었다.

그를 뺀 나머지 공모자들 모두는

위대한 시저에게 악심 품고 그 짓 했다.

오직 그만 공적이고 정직한 생각에서

모두의 공익을 위하여 한 패가 되었다.

그의 삶은 고귀했고 인성은 완벽하여

자연의 여신조차 일어서서 온 세상에

'이게 사람이었다.'라고 했을 것이다.

 

(『줄리어스 시저』, <5막 5장> 중에서)

 

 

이제부터는 '브루투스 가문'의 인물들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보였던 마키아벨리의 평가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브루투스 가문의 사람들만큼 '로마의 역사'에 깊은 영향을 준 인물도 흔치 않은데, 마키아벨리의 얘기를 들어 보면 "브루투스, 너 마저?"라는 짧은 대사에 담긴 의미가 얼마나 다양한 함의를 지니는지를 새삼 느낄 수 있습니다.


(마키아벨리)

 

속속들이 썩어버렸기 때문

 

로마의 실례만큼 이 점에 꼭 맞는 것은 달리 없을 것이다. 타르키니우스 가를 멸망시킨 뒤 로마는 곧바로 자유를 획득하여 이를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나 가이우스 칼리굴라, 그리고 네로가 죽고 카이사르의 혈통이 완전히 절멸한 뒤에 로마는 자유를 유지하기는 커녕 그에 한 발도 접근할 수 없었다. 같은 도시를 무대로 해서 같은 조건 아래 생긴 일인데도 결과가 아주 정반대로 되어 버린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즉 타르키니우스 시대에는 로마인이 아직 그다지 타락해 있지 않았던 데 비해, 카이사르 시대에는 속속들이 썩어 있었다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타르키니우스 시대에는 로마의 민중으로 하여금 국왕의 압제 정치를 물리치고자 굳게 결의시키는 대신, '로마에서는 앞으로 어떤 왕도 통치할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민중에게 맹세시키는 일만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 시대가 되자 전 오리엔트의 지지를 배경으로 가진 브루투스의 권력이나 가혹함을 가지고도 로마 민중을 분기시켜서 자유를 지키게 할 수는 없었다. 이 브루투스는 초대 브루투스를 본받아서 로마 민중에게 자유를 되돌려주려고 노력한 인물이다. 이처럼 자유를 회복하는 일에 성공하지 못한 것은 그때까지 가이우스 마리우스 일파가 민중에게 심어 놓은 타락한 풍조 때문이다. 그리고 마리우스의 평민당 수령이 된 카이사르는 교묘하게 민중의 눈을 가려 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목에 칼을 쓰고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207쪽)

 

 - 마키아벨리, 『로마사론』,

   제1권 제17장 <퇴폐한 민중은 해방된다 하더라도 자유를 유지해 나가기가 매우 어렵다>

 

<왕정을 종식시킨 브루투스의 조상>에 관한 마키아벨리의 날카로운 분석을 조금만 더 들어보지요.

 

훌륭한 일을 수행했기 때문에 그 철저한 배려와 현명함을 높이 찬양받는 인물이라 하더라도,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바보처럼 가장하고 수행한 그 행동에는 가까이 따라갈 수 없으리라 생각된다.

 

티투스 리비우스는 브루투스가 그런 짓을 한 것은 자기의 몸의 안전과 집안의 대를 지켜 나가기 위해서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브루투스가 한 행동을 생각해 보면, 그가 바보를 가장하고 있었던 것은 자신의 속셈을 눈치채이지 않으려는 수단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는 왕을 타도하고 로마를 해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아폴로 신전의 신탁에 대한 해석 방법을 보면 그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탁을 받을 때 그는 자기의 계획에 신의 가호를 얻을 수 있게 하기 위해 일부러 발부리를 차고 넘어져서 남몰래 어머니인 대지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루크레티아의 죽음에 즈음해서는, 아버지와 그의 남편과 그 밖의 친척들이 모인 가운데서 맨 먼저 그 상처에서 단도를 뽑고는, 앞으로는 어떤 왕의 지배도 로마에서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맹세를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켰다.

 

이 브루투스의 고사는, 군주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배워야 할 일이다. 즉 우선 자기 자신의 실력을 측량해야 한다. 그리하여 상대를 적으로 맞아 당당하게 싸워 나갈 만한 확신이 설 만큼 자기의 실력이 갖추어져 있다면 당연히 싸움에 돌입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위험이 적은 자랑스러운 행동이라 할 수 있겠다.(434쪽)

 

- 마키아벨리, 『로마사론』,

   제3권 제2장 <백치를 가장하는 것이 때로는 가장 현명할지도 모른다> 



  

타르키니우스 수페르부스는 아주 가증스런 방법으로 왕국을 손에 넣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그가 이전의 왕들의 유훈에만 따랐더라도 그의 입장은 그대로 용인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원로원과 평민이 힘을 합해서 그의 손으로부터 국가를 빼앗는 사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추방된 것도 그의 아들 섹스투스가 루크레티아에게 무례함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본인 자신이 국법을 유린하고 제멋대로 폭정을 폈기 때문이다.

 

(중략)

 

앞에서 말한 루크레티아에 대한, 아들 섹스투스의 능욕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뭔가 다른 사건이 벌어져서 결국은 같은 결과가 되었을 것이다. 타르키니우스 자신이 자중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그 때까지의 국왕과 변함 없는 행동을 했더라면, 아들 섹스투스가 실수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브루투스도 콜라티누스도 섹스투스에게 복수하겠다는 것을 타르키니우스에게 호소했을 뿐이지 인민에게 호소해서까지 그와 같은 행동을 일으킬 리는 없었다.(438∼439쪽)

 

 - 마키아벨리, 『로마사론』,

   제3권 제5장 <국왕이 세습한 왕국을 잃는 이유에 대하여>


마키아벨리의 책에서 언급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고대 로마의 왕정을 종식시킨 덕분에 '공화정의 창시자'라는 영광스런 칭호가 붙을 만큼 로마인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왕정의 마지막을 장식한 타르키니우스 왕의 아들 섹스투스는 전방부대를 이탈하면서까지 몰래 부하장교의 아내를 겁탈했는데, 이 유명한 '고대 로마의 성폭행 사건'을 두고도 셰익스피어는 『루크리스의 강간』이라는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무려 1885행에 달하는 기나긴 설화시로 말이지요. 


(타르퀴니우스와 루크레티아)


난폭하게 성폭행을 당한 루크레티아는 죽기로 결심하고 심부름꾼을 시켜 친정 아버지와 남편을 급히 불러모은 뒤에 강간범 섹스투스의 범행을 알리고 자신의 복수를 다짐받은 직후 자결하지요. 이 때 범행 고발 현장에 있었던 사람 가운데에는 브루투스의 조상인 유니우스 브루투스도 있었습니다. 폭정을 거듭하던 강간범의 아비를 왕위에서 끌어내릴 기회만 기다렸던 그는 자결한 루크레티아의 몸에서 손수 칼을 뽑으면서 '타르키니우스 가문 전체를 뿌리 뽑겠다'고 맹세하였고, 루크레티아의 시신을 끌고 광장으로 가서 '독재 왕정의 폐단'과 '범죄 만행'을 고발했고,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콜라티누스는 로마 최초의 집정관에 오르게 되지요. 


(루크레티아의 죽음)


그로부터 물경 5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다시 '왕관'을 욕심낸다는 소문이 파다했을 때 '브루투스'가 다시 나타나 그를 찔렀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었습니다. 『루크리스의 강간』까지 창작해낸 셰익스피어가 살해당한 카이사르보다 살해범 브루투스에게 얼마만큼 더 깊이 공감했는지는 브루투스의 다음 대사만 들어봐도 능히 짐작할 수있을 듯 합니다.

 

"왜 브루투스가 카이사르에 대항하여 그를 죽였는지 이유를 요구한다면, 이것이 저의 대답입니다. 카이사르에 대한 나의 사랑이 결코 모자라서가 아니라, 내가 로마를 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카이사르가 죽음으로써 모두가 자유인으로 살기보다 카이사르가 살아서 모두가 그의 노예로 죽는 것을 원하십니까? 카이사르는 나를 사랑했기에, 나는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립니다. 그가 행운을 타고났기에, 나는 그것을 기뻐합니다. 그가 용감했기에, 나는 그를 존경합니다. 그러나 그가 야심을 품었기에, 나는 그를 죽였습니다. 그의 사랑에 대한 눈물, 그의 행운에 대한 기쁨, 그의 용기에 대한 존경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야심에 대해서는 죽음이 있습니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줄리어스 시저』
3막 2장 중에서

 

이것으로 브루투스 가문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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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피지 쪽들에 호메로스가 다 담기다니!

일리아스와 오뒷세우스의 그 많은 모험이

프리아모스 왕국의 적이었던 오뒷세우스 말야!

그 모든 것이 양피 한 조각에 갇혀 버리다니

겨우 자그마한 몇 장으로 접은 양피 조각에!


- 마르티알리스


* * *

호메로스

세상에서 오직 단 한 명의 작가나 시인을 꼽으라면? 셰익스피어? 단테? 괴테? 이들도 물론 탁월한 시인임에는 틀림없지만 가장 좋은 대답은 아마도 호메로스가 아닐까 싶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제아무리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감정들과 성격과 인물들을 창조해 냈다고 하더라도,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라는 작품을 통해 그토록 많은 인물들과 대규모의 전투씬들과 심오한 역사관과 사상들을 담아냈다고 하더라도, 저 까마득한 옛날 눈먼 음유시인이었던 호메로스가 남겨놓은 양대 서사시와 비교하기만 하면 우리는 그런 대비가 어딘가 잘못된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게 됩니다. 그만큼 호메로스가 인류 문명에 남겨놓은 유산이 탁월하고도 심원하기 때문일 테지요.

호메로스가 쓴 양대 서사시 가운데 본편이라고 할 만한 『일리아스』만 하더라도, 이 작품 속엔 고대의 숱한 전설적인 영웅들뿐 아니라 그 당시 그리스인들이 믿었던 온갖 신들이 총망라하다시피 등장합니다. 트로이아 전쟁은 외관상으로는 인간들이 벌인 전쟁이었으나 그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신들의 전쟁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저 유명한 헬레네 납치 사건 하나만 하더라도 신들의 사소한 불화 때문에 빚어졌던 일이 아니고 무엇이었던가요?

신들의 회의

신들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우스는 바다의 여신인 테티스를 사랑하지만 그녀가 아버지보다 더 강한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는 일찌감치 마음을 접고 그녀를 아이아코스의 아들 펠레우스와 결혼시킵니다. 이 펠레우스가 바로 『일리아스』의 주인공인 아킬레우스의 아버지였지요. 펠레우스와 여신 테티스의 결혼식엔 당대의 온갖 저명인사들이 두루 참석했지만 불화의 여신 에리스만은 초대 받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앙심을 품은 그녀는 곧바로 자신의 주특기를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결혼 잔치에 참석한 여신들 사이에 문제의 황금 사과를 툭~ 내던지는 묘수를 떠올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과에는 '가장 아름다운 이에게'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사과 한 알이 어머어마한 대사건으로 발전되리라는 건 불보듯 뻔했습니다.

던져진 황금사과

여신들은 사과를 보자말자 서로 앞다퉈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다가 결국 트로이아의 왕자였던 파리스에게 심판을 받게 되지요. 이게 바로 그 유명한 '파리스의 심판'이었습니다. 여신들은 그 황금사과를 차지하기 위해 각자 자신들에게 어울릴 만한 달콤한 반대급부로 파리스를 유혹하지요. 헤라는 '아시아에 대한 통치권'을, 아테네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아프로디테는 절세 미인을 아내로 주겠다면서 자신을 밀어달라고 호소하지요. 그러자 파리스는 그 사과를 아프로디테에게 건네주고, 파리스는 그 여신의 도움을 받아 이미 다른 남자의 부인이었던 절세미인 헬레네를 얻게 되고, 트로이아와 그리스 연합군은 바로 그 사건 때문에 결국 파멸적인 10년 전쟁에 뛰어들게 되지요.

여신들의 약속

고대의 숱한 인물들과 사건들에 대해 유별난 탐구심을 발휘했던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가 이 대사건을 모른 체 할 리는 없었습니다. 그는 특유의 입심으로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멋지게 요약했습니다.


이 수천 수만의 무장한 인간들의 가공할 장비, 그 맹위·정열·용기, 이런 것들이 얼마나 쓸데없는 원인으로 일어나서, 가벼운 인연으로 사라지는가를 고찰해 보면 기가 막힐 일이다.

파리스라는 사람 때문에 저 처참한 전쟁이

그리스와 외족(外族) 국가 사이에 야기되었다고 전한다. (호라티우스)

아시아 전체가 파리스의 오입질 때문에 전쟁으로 불타 버려 파괴된 것이다. 단 한 남자의 시기심, 울분, 쾌락, 가족 간의 질투 등, 수다스런 마나님 둘이 서로 할퀴며 대들게 할 만큼 성나게 할 것도 못 되는 원인들, 이것이 전쟁의 핵심이며 직접적인 원인이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트로이아 전쟁

인류의 역사에서 아마도 가장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전쟁이 있다면 그건 바로 트로이아 전쟁입니다. 그 누가 용맹무쌍한 아킬레우스와 꾀많은 오뒷세우스와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를 모를 것이며, 그 누가 트로이의 목마를 모를 수 있을까요. 그런데 그 유명한 고대의 전쟁도 자세히 따지고 보면 결국 '신들의 집안 싸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싸움의 원인 제공자인 헬레네는 족보로 따지자면 엄연히 제우스의 딸이었습니다. 스파르테 왕 튄다레오스와 그의 아내 레다 사이에는 2남 2녀가 태어났는데, 클뤼타임네스트라와 헬레네와 카스토르와 폴뤼데우케스가 그들이지요. 그런데 제우스가 백조의 모습을 하고 레다에게 접근한 까닭에 흔히 헬레네와 쌍동이 남자 형제들은 '제우스의 자식들'로 인정받습니다. 카스토르와 폴뤼데우케스는 훗날 로마의 수호신으로도 인정받아 로마 시내를 대표하는 건축물에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요.

로마 시청사

헬레네의 언니인 클뤼타임네스트라는 트로이아 전쟁때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아가멤논의 아내였고, 헬레네는 아가멤논의 아우 메넬라오스의 아내였습니다. 그러니 제우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의 딸이 자신의 사위를 배신하고 외간 남자와 눈이 맞아 멀리 트로이아까지 도망친 사건을 해결해야 할 입장에 빠진 셈이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사랑했던 여신인 테티스의 간절한 호소 때문에라도 자신이 그 전쟁에 적극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테티스는 고대 그리스 최고의 영웅인 아킬레우스를 낳았는데, 하나뿐인 자식이 트로이아 전쟁에 참전한 이후 혁혁한 무공을 세웠음에도 그리스군 총사령관인 아가멤논으로부터 부당한 처사를 당하자 곧바로 제우스를 찾아가 무릎을 붙잡고 간청합니다. 전쟁터에서 죽을 운명을 타고난 명 짧은 자신의 아들을 불쌍히 여겨서라도 어떡하든 아킬레우스의 명예를 드높여 달라고 말이지요. 제우스는 일이 그렇게 되도록 우선 아킬레우스가 전쟁에서 물러나 있는 동안에 트로이아 군대가 분발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해서 트로이아 전쟁 내내 수세에 몰려 있던 트로이아 군대는 전세를 뒤집었고, 그리스 군대는 해안까지 밀려나 자신들이 타고 온 함선들이 모조리 불에 탈 위기에까지 내몰리지요.

제우스에게 간청하는 테티스

이처럼 제우스와 테티스는 트로이아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데, 이들 말고도 그리스 군대를 편드는 신들은 여럿 더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우스의 아내인 헤라와 제우스의 딸인 아테네가 가장 적극적이었습니다. 두 여신들은 이미 파리스의 심판에서 아프로디테에게 보기 좋게 한 방 먹었기 때문이지요. 더군다나 아테네는 전쟁의 여신이니 고비때마다 자신의 전투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제우스와 형제 사이인 포세이돈 역시 그리스 편이었습니다. 대지를 흔드는 신인 포세이돈은 과거에 한때 트로이아의 성벽을 튼튼하게 쌓아준 일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트로이아 왕이었던 라오메돈의 부탁으로 1년 동안이나 성의껏 도와줬지만, 성벽이 완성되자 라오메돈은 약속한 보수를 주지 않고 포세이돈을 몹시 박대했습니다. 그때의 일을 회상하는 포세이돈의 하소연을 잠시 들어 볼까요.


이번에는 아폴론을 향해 대지를 흔드는 통치자가 말했다.

"어리석은 자여! 그대는 생각이 모자라구려. 그대는 여러 신들 중에

우리 둘만이 일리오스에서 고생하던 일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가!

그때 우리는 제우스의 명령에 따라 오만한 라오메돈에게 가서

정해진 보수를 받기로 하고 만 일 년 동안 그자를 위해

봉사했고 그자는 우리에게 명령을 내렸었지.

나는 트로이아인들을 위해 그들의 도시가 함락되지 않도록

도시 주위에 넓고 더없이 아름다운 성벽을 쌓아주었고

포이보스여! 그대는 숲이 우거지고 주름이 많은 이데 산의

계곡에서 걸음이 느리고 뿔이 굽은 소 떼를 먹였지.

하지만 즐거운 계절들이 보수의 기한을 다 채웠을 때

무서운 라오메돈은 우리에게서 보수를 전부 빼앗고는

협박하며 우리를 내쫓았지.

그는 우리의 손과 발을 함께 묶어

멀리 떨어진 섬에 갖다 팔겠다고 위협했지.

그리고 그는 우리 둘의 귀를 청동으로 자르겠다고 공언했지."


- 『일리아스』, 제21권 441행∼455행


라오메돈 왕은 요즘으로 치자면 악덕 임금체불업자나 다름없었습니다. 더군다가 그가 실컷 부려먹었던 사람들이 막강한 아폴론과 포세이돈이었으니 라오메돈은 돌이킬 수 없는 대형사고를 친 셈이었습니다. 라오메돈의 아버지는 일로스였고, 이 이름에서부터 '일리아스'라는 이름이 생겨났지요. 할아버지는 트로스였는데, 이 이름에서는 '트로이아'라는 이름이 생겨났습니다.


라오메돈 왕의 '약속 불이행'은 비단 이때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딸이 바다괴물에게 붙잡히자 딸을 구해주면 자기 명마들을 주겠다고 해놓고 약속을 지키지 않았는데, 이때 사기를 당한 인물은 그 유명한 헤라클레스였습니다. 열이 잔뜩 받은 헤라클레스는 '약간의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가 트로이아를 손쉽게 함락하고 라오메돈과 그의 아들들을 모조리 죽입니다. 그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이 하나 있었으니 그가 바로 트로이아 전쟁때의 왕이었던 프리아모스 대왕이었습니다.

트로이아 왕가 계보

헤라클레스는 이때 바다괴물로부터 라오메돈의 딸 헤시오네를 구한 뒤 부하 장수 텔라몬에게 주었고, 그녀는 그리스군의 명궁이자 '큰 아이아스'의 이복동생인 테우크로스를 낳았습니다. 트로이아 전쟁에는 텔라몬의 두 아들인 큰 아이아스와 테우크로스는 물론이고, 헤라클레스의 아들까지도 전쟁 영웅으로 활약하는데, 포세이돈과 아폴론은 이들 영웅들의 아버지가 팔팔하던 젊은 시절부터 이처럼 다양한 사건들로 이래저래 엮여 있었던 셈이었습니다.

그리스 연합군 vs 트로이아

다시 '신들의 전쟁' 이야기로 되돌아 오지요. 방금 『일리아스』에서 인용한 싯구에서 보듯이, 아폴론과 포세이돈은 한때 트로이아의 튼튼한 성벽을 함께 쌓아준 인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아폴론은 트로이아에게 적대적이지 않고 도리어 트로이아를 편들고 있는 걸까요? 그건 바로 아폴론의 사제였던 크뤼세스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전쟁통에 붙잡혀간 자신의 딸을 구하려고 아가멤논을 찾아갔지만 거기서 난폭하게 쫓겨났기 때문이지요. 아폴론은 자신을 위해 신전을 짓고 제물을 바친 사제의 간절한 청탁을 듣고 전쟁 내내 트로이아를 도와줍니다. 자신의 주특기인 날카로운 화살들로 그리스인들을 괴롭히고 그리스 군대에 역병이 돌게 만든 것도 아폴론이 벌인 일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전쟁이라면 아무런 계획도 절제도 없이 마구 뛰어드는 '전쟁의 신' 아레스까지 트로이아 전쟁에 뛰어듭니다. 그는 만용이 지나쳐 그리스군 장수 디오메데스의 창에 부상당하기도 하고, 오토스와 에피알테스 형제에게 13개월 동안이나 포로로 붙잡히기도 합니다. 신의 입장에서 보자면 체통이 말이 아니지요. 아레스는 또한 헤파이스토스의 아내인 아프로디테와 밀애를 즐기다 '대장간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고안한 교묘한 그물에 갇혀 신들의 웃음거리가 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레스가 애인 아프로디테와 함께 트로이아 군대를 편들고, 오쟁이 진 남편인 헤파이스토스가 그들에 맞서 그리스 군대를 편드는 건 자연스런 일이었습니다.


또한 헤파이스토스는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우스에게 크나큰 선물을 안기는데, 무구(武具)마저 잃어버린 아킬레우스를 위해 온갖 심혈을 기울여 창과 방패와 투구와 정강이받이 등 제구일습(諸具一襲)을 만들어주기 때문이지요. 그 전에 아킬레우스는 전쟁을 보이콧하던 와중에 절친인 피트로클로스에게 자신의 무구를 몽땅 빌려 줬는데, 그가 헥토르와 싸우다가 자신의 목숨뿐 아니라 아킬레우스의 무구까지도 한꺼번에 다 빼앗기고 말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듯 트로이아 전쟁은 외견상으로는 '한 남자의 오입질' 때문에 빚어진 인간들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었지만 음유시인 호메로스는 이 모든 것들이 다 신들의 뜻이었노라고 노래합니다. 한낱 필멸의 인간들이 어찌 감히 신의 뜻을 거스를 수 있겠느냐면서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넌지시 충고하는 셈이지요.


그러나 인간들은 비록 필멸의 존재라고는 하지만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언제나 최고의 미덕이었습니다. 신과 같은 아킬레우스나 제우스의 아들로 인정(?) 받았던 헤라클레스와 같은 영웅들 또한 자신들의 운명을 미리 알고도 불굴의 인내와 노력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지난한 과업들을 이룩해 냈습니다. 참혹한 트로이아 전쟁이 끝나고도 10년을 더 방황한 끝에 고향 이타케에 당도한 오뒷세우스나 불구덩이 속에서도 아버지를 등에 업고 트로이아를 빠져나와 간난신고 끝에 로마 건국의 기틀을 마련한 아이네이아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난이 없는 영웅들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세이렌의 유혹을 견디는 오뒷세우스

그런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는 방대한 등장 인물들은 물론이고 온갖 상세한 지명과 사건들 사이의 뚜렷한 인과관계 등이 너무나 구체적으로 담겨 있어서 이 이야기가 정말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인지, 아니면 눈 먼 음유시인이었던 호메로스가 고대로부터 오랫동안 전승된 이야기에 자신의 창작 솜씨를 덧붙여 꾸며낸 이야기인지 도무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그 경계가 모호합니다.


『일리아스』의 초반부에 마치 거대한 진입장벽처럼 버티고 있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그 유명한 <함선 목록>만 살펴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이토록 구체적인 연합군의 함선 목록이 실제적인 사실의 뒷받침 없이 어떻게 꾸며질 수 있을까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을 정도로, 그 목록이나 함선의 숫자들은 너무나 구체적입니다. 어디서 누가 몇십 척씩 이끌고 왔다는 설명이 그리스 군대에서만 29차례에 걸쳐 낱낱이 소개되고, 함선들의 숫자는 3척, 7척, 9척까지도 일일이 따로 소개한 끝에 도합 1,186척에 이릅니다. 척당 80명씩만 잡아도 무려 10만에 가까운 대군이 트로이아 땅에 집결한 셈인데, 그토록 많은 군대와 말들을 먹일 식량이 10년 동안에 어떻게 조달되었다는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지요. 그러니 실제와 허구와 상상이 이처럼 한꺼번에 절묘하게 녹아 있는 고대의 문학 작품도 찾기 어려운 셈입니다.

트로이아 전쟁에 참가한 도시국가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가 그토록 훌륭하고 완벽한 고대의 영웅 서사시라고 하더라도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근원적인 한계마저 뛰어넘을 수는 없습니다. 비록 호메로스가 아무리 교묘한 솜씨로 이들 영웅들의 과거와 미래까지도 자주 엿보게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말이지요.


독자들은 『일리아스』를 아무리 거듭해서 읽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트로이아 전쟁을 둘러싼 이야기를 일부분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가령, 파리스의 심판으로부터 비롯된 전쟁이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의 불화 때문에 그리스 군대의 패전 위기로 내몰렸다가 아킬레우스의 절친인 파트로클로스의 참전으로 다시 재역전되고, 파트로클로스가 헥토르마저 죽이겠다고 덤벼들다가 전사하고, 절친을 잃고 비탄과 분노에 휩싸인 아킬레우스가 헥토르를 죽이고, 트로이아 군대의 핵심이자 가장 사랑했던 아들인 헥토르를 잃고 비탄과 절망에 빠진 프리아모스가 아들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 홀홀단신 아킬레우스를 찾아가고, 아킬레우스의 막사에서 극적으로 회동한 두 사람이 '동병상련'을 느끼며 함께 꺼이꺼이 울고 난 뒤에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주고, 잠정적인 휴전 상태에서 헥토르의 장례를 무사히 치른다는 얘기 말이지요. 『일리아스』는 딱 여기서 끝납니다.

헥토르의 시신을 옮기는 트로이아 사람들

그러니 독자들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아무리 열심히 읽더라도 궁극적으로 영웅 아킬레우스가 과연 어떻게 죽음에 이르렀고, 그때 그토록 훌륭한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어머니 테티스의 비탄과 고통이 얼마만큼 컸고, 10년 동안이나 함락하지 못한 트로이아를 무너뜨리기 위한 극비 작전인 '트로이의 목마'가 누구의 아이디어로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트로이아가 최종적으로 어떻게 함락된 끝에 비참하게 무너졌으며,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 군대가 어떤 방식으로 전리품들을 나눠 가진 끝에 귀향길에 올랐으며, 또 각자 귀향길과 자신의 궁궐에서 어떤 비참한 운명을 겪었는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이 모든 나머지 이야기들은 호메로스의 관심 영역 밖이었을까요?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일리아스』가 훨씬 더 방대한 전체 이야기의 자그마한 일부라는 사실을 한번쯤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의 수많은 영웅 서사시가 얼마만큼 많이 존재했는지, 고대의 트로이아 전쟁을 둘러싼 거대한 이야기가 얼마만큼 인류의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가는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를 '거대한 전체 속의 일부'로서 들여다볼 때 보다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이 분야를 연구한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는 '트로이아 서사시권(敍事詩卷)'이라는 큰 전체의 일부분입니다. 하나의 통일된 전체를 이루는 서사시들은 모두 8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지요. 지금부터 간략하게나마 이들을 살펴 보지요.

트로이아 서사시권

그 첫 번째는 『퀴프리아』입니다. 여기서는 이른바 '파리스의 심판'에서부터 그리스군의 트로이아 도착까지를 취급합니다. 우리가 『일리아스』를 통해 희미하게나마 그 전말을 알고 있는 '황금의 사과' 이야기 또한 『퀴프리아』에 자세히 담겨 있으리라고 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가 바로 『일리아스』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일리아스의 다음 이야기가 제일 궁금한데, 그 내용이 바로 세 번째인 『아이티오피스』에서 이어집니다. 여기에는 아킬레우스가 여인족 아마조네스의 여왕 펜테실레이아와 아이티오페스족의 왕 멤논을 죽이고 나서 자신도 아폴론 또는 파리스가 쏜 화살에 죽는 장면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에 갑자기 등장하는 멤논이라는 인물은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 제법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고대 이집트의 도시인 테베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대한 석상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을 정도인데, 오이디푸스 왕이 다스렸던 고대 그리스의 도시 테바이도 이집트의 테베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고 하지요. 그런데도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는 이 인물의 이름조차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멤논과 싸우는 아킬레우스

저는 여러 해 전에 이집트의 고대 도시 테베에 갔을 때 '멤논의 거상'을 직접 본 일이 있었지만, 그에 관한 이야기라고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을 읽을 때 잠깐씩 들어본 게 다였습니다. 그가 새벽의 여신 에오스의 아들이며, 헥토르가 죽은 뒤에야 뒤늦게 트로이아 전쟁에 참전했다가 아킬레우스에게 죽었고, 나중에는 제우스의 배려로 불사의 존재가 되었다는 정도만 알 뿐이었습니다.


그런데『일리아스』에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포함하는 거대한 전체인 '트로이아 서사시권'의 일부를 장식하는 핵심 인물이 될 수도 있고, 그런 인물의 이름을 붙인 거대한 석상이 이집트에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트로이아 서사시권'이 얼마나 방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인류 문명에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는지를 새삼 반증하는 셈입니다.

멤논의 거상

트로이아 서사시권의 네 번째인 『소(小) 일리아스』와 다섯 번째인 『일리오스의 함락』에는 아킬레우스가 죽은 뒤 그의 무구(巫具)들을 놓고 오뒷세우스와 아이아스가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는 이야기인 '무구 재판'과 '트로이아의 목마 작전'에 따라 트로이아가 함락되는 이야기를 노래합니다. '대장간의 신'인 헤파이스토스가 만들었다는 그 유명한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두고 그리스를 대표하는 두 영웅이 벌였을 엄청난 경쟁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는지는 고대 그리스 비극시인인 소포클레스의 작품 『아이아스』에서도 다루고 있고,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서도 거듭 자세히 묘사한 덕분에 후세에 널리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숱한 예술 작품들이 탄생했음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결하는 아이아스

또한 『일리오스의 함락』에 등장하는 '트로이의 목마 이야기'야말로 트로이아 전쟁을 상징하는 가장 희귀한 창조물인데, 오늘날 트로이아의 목마에 얽힌 이야기가 온전히 전해지는 문헌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형편이지요. 그토록 놀라운 발명품을 만들어낸 꾀많은 오뒷세우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오뒷세이아』에서도 그 이야기는 그저 흘러간 옛 이야기 중에서 희미하게 잠깐씩 비칠 뿐입니다. 숱한 고대 그리스의 비극 시인들도 트로이의 목마를 핵심 포인트로 삼은 작품을 남기지는 못했습니다. 이토록 대중적인 관심을 집중시킨 사물이 온전한 텍스트도 없이 3,000년이 넘도록 인류의 기억 속에 지속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사례도 찾기 어렵지 싶습니다.


어쩌면 트로이의 목마에 관한 이야기는 고대 로마 시인이었던 베르길리우스가 쓴『아이네이스』에서 살펴보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건국 신화를 담은 그 이야기 속엔 '트로이아가 얼마만큼 비참한 모습으로' 몰락했는지를 빼어나게 묘사하고 있고, 그런 이야기 속에 '트로이의 목마'가 빠질 리 없기 때문입니다.

트로이 함락

그때 라오코온이 수많은 무리가 뒤따르는 가운데

앞장서서 성채 위에서 쏜살같이 뛰어내려오며

멀리서 외쳤습니다. '오! 가련한 동포들이여,

그대들은 그토록 제정신이 아니란 말이오? 그대들은 적군이

배를 타고 떠난 줄 아시오? 일찍이 다나이족의 선물에

음모가 없었던 적이 있나 생각해보시오.

그대들은 오뒷세우스를 그런 사람으로 알고 있었소?

이 목조물 안에 아카이오이족이 숨어 있거나,

우리의 집들을 들여다보고 위에서 시내로 내려와

우리의 성벽들을 공격할 목적으로 만들어졌거나

아니면 어떤 다른 계략이 숨어 있음에 틀림없소. 말(馬)을 믿지 마시오,

테우케르 백성들이여. 그것이 무엇이든,

나는 다나이족이 선물을 가져올 때에도 두렵소.'

이렇게 말하고 그는 짐승의 옆구리에, 널빤지들을 둥그스름하게

이어붙인 복부에 힘껏 큰 창을 던졌습니다. 창은 떨면서 그곳에 꽂혔고,

충격이 가해지자, 텅 빈 뱃속이 공허하게 울리며

신음 소리를 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뒤틀리지만 않았더라면,

신들께서 내리신 운명대로 우리는 아르골리스인들의 은신처를

칼로 열어젖혔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트로이야는

아직도 서 있을 것이고, 프리아모스의 높은 성채여, 너도 남아 있겠지.


-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제2권 40∼56행



라오콘 조각상

이제껏 살펴본 '트로이아 서사시권'의 다섯 편이 전쟁을 노래하는 데 반해 나머지 세 권에서는 전쟁 이후의 이야기를 노래합니다. 여섯 번째인 『귀향』은 오뒷세우스를 제외한 다른 그리스군 장수들의 귀국을 노래하며, 일곱 번째가 바로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입니다. 여덟 번째는 『텔레고노스 이야기』인데, 고향 이타케 섬으로 돌아온 오뒷세우스가 그의 아들 텔레고노스에 의해 살해당하는 이야기를 노래합니다.


이처럼 많은 이야기가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 말고도 여섯 편에 더 담겨 있었다니 그것만으로도 숨이 벅차고 충분히 놀라운데 그리스인들은 이것 말고도 트로이아 전쟁 이야기만큼 흥미로운 '테바이 서사시권' 이야기까지 남겼습니다. 그나마 '테바이 서사시권'은 규모가 훨씬 단촐하기는 합니다.


이것은 오이디푸스 왕의 놀라운 운명을 노래한 『오이디푸스 이야기』(Oidipodeia)와 오이디푸스 왕의 추방된 아들 폴뤼네이케스를 중심으로 모두 일곱 장수들이 테바이를 공격한 이야기를 노래한 『테바이 이야기』, 그리고 이들이 테바이 공략에 실패한 뒤에 그의 아들들이 결국 테바이 공격에 성공한 이야기를 담은 『후예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테바이를 떠나는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아무리 방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작품은 결국 '트로이아 서사시권'과 '테바이 서사시권'을 아우르는 방대한 전체의 일부라는 사실은 『일리아스』를 읽는 동안에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트로이아 전쟁에 참가하는 무수히 많은 영웅호걸들 가운데에는 '테바이 서사시권'에 속하는 이야기인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의 후손들까지도 자주 엿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튀데우스의 아들 디오메데스입니다. 그는 힙폴로코스의 아들 글라우코스와의 일전을 앞두고 서로의 조상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렇다면 그대는 먼 옛날 부조(父祖) 때부터 나의 빈객(賓客)이오'라는 말을 건네면서 전차에서 뛰어내려 서로의 손을 잡고 우정을 다짐합니다. 그리고는 곧장 서로의 무구들을 교환합니다. 이때 글라우코스가 얼마나 분별력이 없었는지는 플라톤의 『향연』에서도 인용될 정도였는데, 그는 황소 백 마리의 값어치가 있는 자신의 황금 무구들을 황소 아홉 마리의 갑어치밖에 안 되는 디오메데스의 청동무구들과 맞바꾸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거대한 전체의 일부분에 불과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는 증거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작가들의 작품들입니다. 흔히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작가로 불리는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는 모두 305편에 달하는 어머어마한 작품들을 썼다고 알려져 있는데, 지금까지 온전히 전해지는 작품들은 불과 33편에 불과합니다. 그 33편 가운데 트로이아 전쟁을 둘러싼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은 그 절반인 16편인데, 그 가운데 사건이 발생한 시간으로 따져보면 『일리아스』와 겹치는 작품은 『레소스』 하나밖에 없습니다.

고대 그리스 비극작품 개요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오레스테스 이야기'란 뜻으로, 『아가멤논』,『제주를 바치는 여신들』,『자비로운 여신들』로 구성된 현존하는 유일한 비극 3부작)만 하더라도 『일리아스』에서 다루는 사건들과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작품인가요? 트로이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온 아가멤논은 아내 클뤼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情夫) 아이기스토스의 손에 무참하게 살해되고 마는데, 아가멤논이 살해될 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오레스테스는 훗날 청년이 되어 누이동생 엘렉트라와 함께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어머니인 클뤼타임네스트라를 죽입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벗어나면 이토록 비극적이면서도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또다시 새롭게 펼쳐지는 셈이지요.

아가멤논을 살해하는 클뤼타임네스트라

소포클레스의 비극 작품 가운데『필록테테스』도 『일리아스』에서 다루는 시기를 조금 벗어납니다. 그의 이름은 <함선 목록>에도 당당히 올라 있을 정도로 트로이아 전쟁에서는 꽤나 비중 있는 인물이었지만 『일리아스』에서는 딱 한 번만 언급될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호메로스가 이 희귀한 인물에 얽힌 가슴 아픈 사연들까지 몰랐던 건 결코 아니었습니다. 『일리아스』에서 잠깐이나마 그의 운명을 넌지시 암시하기 때문이지요. 서유럽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이 인물에 대한 회화와 조각작품들이 도처에 널려 있을 정도인데, 『일리아스』에서만큼은 그저 잠깐 스쳐가는 인물일 뿐입니다.


그가 서양예술의 온갖 분야에서 오랫동안 비중있는 인물로 기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가 로빈슨 크루소의 진정한 원조(元祖)여서? 아니면 그 유명한 헤라클레스의 신궁(神弓)을 물려받은 인물이어서? 아니면 그가 전쟁의 원흉인 파리스를 쏘아 죽여서? 아무튼 그는 『일리아스』를 벗어나면 꽤나 유명한 인물로 돌변하는 인물임엔 틀림없습니다.


메토네와 타우마키에에 사는 자들과,

멜리보이아와 울퉁불퉁한 올리존을 차지한 자들,

이들의 함선 일곱 척은 궁술에 능한 필록테테스가 지휘했다.

배마다 선원들이 쉰 명씩 타고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궁술에 능한 용감한 전사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지휘자는

심한 고통으로 괴로워하며 신성한 렘노스섬에 누워 있었다.

파멸을 꾀하는 물뱀에게 심하게 물려 괴로워하던 그를

아카이오이족의 아들들이 그곳에 남겨두고 왔기 때문이다.

그는 그곳에 괴로워하며 누워 있지만, 아르고스인들은 머지않아

함선들 옆에서 바로 그 필록테테스 왕을 생각해야 할 운명이었다.


- 『일리아스』, 제2권, 716∼725행


렘노스 섬에 버려진 필록테테스

고대 그리스 3대 비극작가 가운데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작품들은 트로이아가 함락된 이후에 '트로이아 여인들'이 겪는 끔찍한 참상들을 낱낱이 묘사하는 작품들이 많아서 『일리아스』 이후의 사정들을 파악하는데 더없이 요긴합니다. 한때 가장 많은 부와 명예를 누렸던 트로이아의 왕비 헤카베가 전쟁통 속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딸과 막내 아들을 어떻게 비통하게 잃었으며, 헥토르의 아내였다가 패전 후에는 아킬레우스의 아들인 네옵톨레모스의 첩으로 전락한 안드로마케가 어떤 기구한 운명을 겪었는지는 『일리아스』에서 예고편으로 슬쩍 엿보여준 내용들과는 비교조차 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투구를 번쩍이는 위대한 헥토르가 그녀에게 대답했다.

"난들 어찌 그런 모든 일들이 염려가 안 되겠소, 여보!

(…)

나는 물론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소.

언젠가는 신성한 일리오스와 훌륭한 물푸레나무 창의

프리아모스와 그의 백성들이 멸망할 날이 오리라는 것을.

그러나 트로이아인들이 나중에 당하게 될 고통도,

아니 헤카베 자신과 프리아모스 왕과 그리고 적군에 의해

먼지 속에 쓰러지게 될 수많은 용감한 형제들의 고통도,

청동 갑옷을 입은 아카이오이족 가운데 누군가 눈믈을 흘리는

당신을 끌고 가며 당신에게서 자유의 날을 빼앗을 때

당신이 당하게 될 고통만큼 내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소.

(…)

그때는 당신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누군가 말하겠지요.

'저 여자가 헥토르의 아내야. 사람들이 일리오스를 둘러싸고 싸울 때

그는 말을 길들이는 트로이아인들 중에서 으뜸가는 전사였었지.'

누군가 이렇게 말할 것이고, 그러면 당신은 굴종의 날에서

당신을 구해줄 그러한 남편이 없음을 새삼스레 슬퍼하게 될 것이오.

당신이 끌려가며 울부짖는 소리를 듣기 전에

쌓아 올린 흙더미가 죽은 나를 덮어주었으면!"


- 『일리아스』, 제6권 440∼465행


헥토르와 안드로마케

이토록 많은 이야기가 『일리아스』의 밖에서 또다시 차고 넘치도록 쏟아져 나왔다고 하더라도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가 지니는 불후의 위상이 낮아지는 이유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바로 이 점을 날카롭게 파고들었습니다. '트로이아 서사시권' 가운데 유독 호메로스의 두 작품만이 온전히 전해진 데에는 그만큼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는 '플롯의 통일'이라는 점에서 너무나 완벽하기 때문에 그 사이를 헤집고 들어갈 틈이 엿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 점에 대해서는 호메로스를 따를 시인이 없다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직접 들어보지요.


그런데 호메로스는 다른 점에 있어서도 뛰어나지만, 이 점에 있어서도 숙련에 의했든 천분에 의했든 바로 이해했던 것 같다. 그는 『오뒷세이아』를 쓸 때 주인공에게 일어난 사건을 모두 취급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오뒷세우스가 파르낫소스 산에서 부상당한 일이라든지, 출전 소집을 받았을 때 광증을 가장한 사건은 취급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 두 사건 사이에 필연적 또는 개연적 인과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대신 그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은 통일성 있는 행동을 주제로 하여 『오뒷세이아』를 구성했던 것이다. 『일리아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다른 모방 예술에 있어서도 하나의 모방은 한가지 사물의 모방이듯, 시에 있어서도 스토리는 행동의 모방이므로 하나의 전체적 행동의 모방이어야 하며 사건의 여러 부분은 그 중 한 부분을 다른 데로 옮겨놓거나 빼버리게 되면 전체가 뒤죽박죽이 되게끔 구성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있으나마나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은 전체의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제8장 中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을 통해 '호메로스의 탁월한 점'을 거듭 강조하는데, 다음의 인용문을 살펴보면 그가 왜 10년 동안 벌어진 '트로이아 전쟁' 가운데 단 며칠 동안의 사건만을 다뤘으면서도, 『일리아스』가 영원불멸의 작품이라는 극찬을 받는지 그 연유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아울러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 덕분에 '트로이아 전쟁'과 '고대 그리스 비극'과의 관계도 조금 더 자세히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호메로스는 앞서도 이미 말한 바 있지만, 이 점에서도 다른 시인들보다 탁월한 것 같다. 그는 트로이아 전쟁이 시초와 종말을 가진 전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부 다 취급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필시 그 스토리가 너무 방대하여 통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든지, 혹은 그 길이를 제한한다 하더라도 그 속의 사건이 다양해서 너무 복잡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전체에서 한 부분만 취하고, 그 외 많은 사건은 삽화로 이용하고 있다. 예컨데 「함선 목록」이나 다른 사건은 이야기의 단조로움을 덜기 위하여 이용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시인들은 한 사람 또는 한 시기를 취급한다지만, 그들이 취급하는 행위는 하나라 하더라도 그 속에 여러 부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예컨대 『퀴프리아』와 『소(小) 일리아스』의 작가들의 경우가 그렇다. 그 결과 『일리아스』나 『오뒷세이아』로부터는 각각 한 편, 또는 많아야 두 편의 비극이 만들어질 수 있는 데 비하여 『퀴프리아』로부터는 다수의 비극이, 그리고 『소(小) 일리아스』로부터는 8편 이상의 비극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즉 『무구 재판』, 『필록테테스』, 『네옵톨레모스』, 『에우뤼필로스』, 『걸인 오뒷세우스』, 『라케다이몬의 여인들』, 『일리오스의 함락』, 『출범(出帆)』, 『시논』및 『트로이아의 여인들』이 그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제23장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만 하더라도 '너무나 방대해서' 좀처럼 완독하기가 쉽지 않은데 여기에 더해 '트로이아 서사시권'의 나머지 6편까지도 지금까지 온전히 전해졌더라면 과연 어땠을까요. 아마도 그 작품들을 모두 읽는 일은 누구에게나 벅찬 독서과제였을 게 틀림없습니다. 물론 몽테뉴와 같은 인물들은 우리와는 정반대로 두 팔을 들고 환호작약했겠지만 말이지요. 이러한 사정은 고대 그리스 비극의 경우까지를 포함하면 더욱 심해집니다. 소위 '그리스 3대 비극작가'의 작품만 하더라도 무려 305편에 이르는데 그 작품들이 온전히 다 전해졌더라면 어땠을까요. 그나마 현재까지 온전히 전해 내려오는 작품이 고작 33편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도리어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요.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고대 그리스 비극작품들

『일리아스』에서 비롯된 이야기가 '트로이아 서사시권'을 거쳐 고대 그리스 비극작품들로 확장되다 보니 이 영상이 다루는 이야기가 너무 방대해진 느낌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이제 다시 이야기의 처음으로 되돌아 가지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벗어난 고대의 작품들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일리아스』라는 단 하나의 작품이 품고 있는 방대함과 탁월함은 그 어떤 다른 문학작품들과도 비교하기 어렵다는 사실 말입니다. 모두 24권으로 된 『일리아스』 하나만 하더라도 '트로이아 서사시권'의 다른 4개의 전쟁 서시사를 모두 합친 것(22권)보다 길며, 24권으로 된 『오뒷세이아』 또한 다른 영웅들의 귀국을 노래한 것(5권)보다 훨씬 더 방대하니 말입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함선 목록>처럼 단지 물질적인 요소들만 방대하게 수록한 작품이 결코 아닙니다. 인간이 지닌 온갖 다양한 감정들이 등장인물들의 숫자만큼이나 다채롭게 담겨 있습니다. 그토록 등장 인물들도 많고, 각각의 인물들마다 사연도 많고, 전투에서 적과 맞닥뜨려 싸우다가 다치고 죽는 모습들도 그야말로 각양각색인데, 호메로스는 10년 동안이나 길게 이어졌던 그 유명한 전쟁 이야기를 과연 어떤 식으로 들려줬을까요.

호메로스

호메로스는 『일리아스』 안에서 진행된 9년 동안의 일들을 단지 50일 동안의 사건을 통해 놀랍도록 생생하게 묘사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역병이 만연하던 9일, 올륌포스의 신들이 아이티오페스족의 잔치에 가 있던 12일,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의 시신을 모욕하던 12일, 헥토르의 화장을 위해 장작을 준비하던 9일을 빼고 나면 실제로 '실시간 생중계 화면'처럼 구체적으로 묘사된 날들은 불과 며칠밖에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일리아스』를 읽고 나면 마치 온갖 무기들이 격렬하게 맞부딪쳐 굉음을 내고, 전차와 말들이 순식간에 주인을 잃고 이리저리 나뒹굴고, 두개골이 박살난 시신들이 처참하게 벌판을 가득 채운 피비린내 나는 전장터에서 겨우 빠져나온 듯한 느낌을 갖게 되지요. 호메로스의 묘사가 그만큼 탁월하고 박진감이 넘치기 때문이지요.


호메로스를 다루게 되면 그를 흠모했던 숱한 인물들도 자연스럽게 떠오르는데, 그런 인물들 모두가 호메로스에게 우호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플라톤만 하더라도 『국가』에서 호메로스의 문장들을 얼마나 심하게 타박했던가요. 수많은 문장들을 일일이 적시하면서까지 말이지요. 그의 비판 요지는 간단했습니다. 시인은 진실재인 '이데아'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대상을 화가처럼 '모방'하기만 하는 모방자에 불과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플라톤은 스스로 '시의 매력'에 한없이 이끌리면서도 결국 '이데아'를 추구하는 자신의 철학과 모순되기 때문에 '시인'을 비판해야만 했습니다. 플라톤의 '시인에 대한 비판적 입장'은 나중에 결국 쇼펜하우어에 의해 '플라톤의 결함'으로 비판받게 되고, 니체는 거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 플라톤을 '유럽이 낳은 예술의 가장 강력한 적'으로까지 몰아부칩니다,

<호메로스의 대관식>(부분)에 잠가한 인물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록 스승과 제자 사이였지만 '시'에 대한 입장만큼은 서로 확연히 달랐다는 점은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자가 무작정 스승의 입장만을 옹호했더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결코 쓰여지지 못했을 테니 말이지요. 호메로스를 흠모했던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 가운데 으뜸으로 꼽고 싶은 사람은 아무래도 몽테뉴가 아닐까 싶습니다. 입심좋기로 소문난 그가 호메로스를 두고, '자기 권위로 많은 신들을 세상에 내놓고 사람들을 믿게 한 그가, 자신이 신의 지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자주 이상하게 여겨왔다.'고까지 말한 것도 지나친 너스레가 아니라 진실로 아름다운 칭찬으로밖에는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장 탁월한 인물들에 대하여

누구든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특출한 인물을 골라 보라고 하면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게 탁월한 인물 셋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호메로스이다. ······


사실 나는 자기 권위로 많은 신들을 세상에 내놓고 사람들을 믿게 한 그가, 자신이 신의 지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자주 이상하게 여겨 왔다. 앞을 보지 못하며 궁핍한 몸으로 학문이 아직 규칙과 확실한 관찰로 사물들을 기록해 놓기도 전에, 그는 이런 일을 모두 알고 있어서, 다음에 정치를 세우고 전쟁을 지휘하고, 어느 학파에 속하건 종교나 철학에 관한 것을 쓰고, 기술을 다루는 일에 간섭하는 자들을 누구나 다 그를 모든 사물들에 관한 지식의 지극히 완벽한 스승과 같이 보며, 그의 작품을 모든 종류의 능력을 기르는 기초 터전 같이 이용했다.

그가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탁월한 것을 생산해 냈다는 것은 자연의 질서에 반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사물들은 출생할 때에 대개 불완전하며 성장하면서 불어 가고 강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옛 사람들이 그를 두고, 자기 앞에 아무도 모방할 자가 없었기 때문에 자기 뒤에 그를 모방할 자가 없었다고 말한 이 아름다운 증언에 따라, 우리는 그를 시인들 중에서 처음이며 마지막 시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의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생기와 행동을 가진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유일한 실질적인 언어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다리우스 왕의 전리품 가운데에 호화롭게 장식된 한 상자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호메로스를 넣어 두는 데에 사용하라고 명령하며, 이 시인은 자기 군사 업무에 가장 훌륭하고 충실한 고문이라고 말하였다.

플루타르코스의 판단에 의하면, 그는 독자에게 언제나 전혀 다르게 나타나며, 항상 새로운 우아미로 개화하며, 결코 사람들을 물리게 하거나 염증 나게 하는 일이 없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작가라는 특별한 찬사를 받는다. 장난하기 좋아하는 알키비아데스는 학자로 자처하는 어떤 자에게 호메로스 한 권을 달라고 요구했더니, 가진 것이 없다고 하자, 따귀를 한 대 갈겨 주었다. 그것은 마치 우리 신부님들 중에 성무 일과서(聖務日課書)를 갖지 않은 자를 보는 식이다.

그뿐더러 어떤 영광을 그의 영광에 비겨 볼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이름과 작품보다 더 사람들의 입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트로이의 헬레네와 그녀로 인한 전쟁만큼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고 인정받은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네 아이들은 3천 년이 넘는 옛날에 그가 꾸며 댄 이름을 아직도 쓰고 있다.

누가 헥토르와 아킬레우스를 모르는가? 어느 사사의 가문들뿐 아니라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가 꾸민 이야기 속에 자기들의 근원을 찾고 있다. 이 작품은 국왕들과 국가들과 황제들이 그렇게 오랜 세기를 두고 그 속에 자기의 역할을 연기해 오고, 이 큰 우주 전체가 그것의 무대로 쓰이는 한 고상한 연극이 아닌가?(825∼828쪽)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호메로스에 대한 수많은 상찬 가운데 몽테뉴가 했던 말보다 더한 상찬을 과연 어디서 찾아낼 수 있을까요? 이 위대한 문학작품은 현대인들이 단번에 완독하기에는 분명 쉽지 않은 작품이지만, 끝까지 다 읽고 나면 마치 거대한 우주정거장을 다녀온 듯한 느낌마저 들 만큼 가슴이 웅장해집니다. 인간계뿐 아니라 신계까지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호메로스의 세계가 그만큼 드넓고도 심원하기 때문이지요. 이것으로 호메로스에 대한 소개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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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성이 탁월한 미모와 재능을 타고난 덕분에 당대의 저명한 여러 인물들과 폭넓은 교제를 갖는다는 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또한 그녀가 뛰어난 미술가들의 영혼을 뒤흔든 끝에 세기적인 명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단지 몇몇 유명한 그림에 등장하는 정도에 그치는 게 아니라, 당대를 주름잡았던 세계적인 음악가와 건축가와 문학가와도 두루 함께 살아 보기도 했다면? 그것도 세 번에 걸친 정식 결혼을 통해서라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싶지만, 오스트리아의 빈에서는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았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알마 말러였습니다. 그녀가 미술 작품의 실제 모델이라고 알려진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와 오스카 코코슈카의 그림 <바람의 신부>였습니다. 우선, <바람의 신부>라는 유명한 그림부터 간단히 살펴 보지요. 그녀의 '바람 같은 삶'이야말로 '바람'과는 결코 떼어놓을 수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바람의 신부> 혹은 <폭풍우>, 1914년

 

폭풍처럼 강렬한 사랑이 격정적으로 표현된 이 작품은 오스카 코코슈카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힙니다. 그는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운동의 대표적인 화가였으며, 특유의 개인적이고 독창적인 화풍을 선보였습니다. <바람의 신부> 또는 <폭풍우>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이 작품에서 코코슈카는 가슴에서 뿜어져나오는 뜨거운 감정을 거친 붓 터치를 통해 그대로 담아냈습니다.


이 작품이 유독 격정적으로 느껴지는 까닭은 그림 속의 남녀 모델이 바로 화가 자신과 그가 격정적으로 사랑했던 연인 알마 쉰들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알마 쉰들러는 당대의 유명한 화가 에밀 야곱 쉰들러의 딸로 태어났으며, 타고난 미모와 지성으로 숱한 남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녀는 스물세 살의 꽃다운 나이에 당대 최고의 작곡가이자 40대의 노총각이었던 구스타프 말러와 결혼하였고, 말러가 사망한 이후에는 바우하우스를 창설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재혼했으며, 그와 헤어진 이후에는 작가 프란츠 베르펠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역시 한 때 이 여인과 연인관계였습니다.


 

알마 말러(Alma Mahler: 1879-1964)

 

그렇습니다. 알마 말러는 화가의 딸이자 작곡가의 아내였으며, 자신의 직업 또한 '작곡가'였습니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반에 걸쳐 음악 도시 빈을 대표하는 지휘자이자 작곡가로 명성을 떨친 천재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가 그의 첫 남편이었습니다.


그녀의 이름 뒤에 말러라는 성이 따라붙지 않았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녀의 이름은 알마 쉰들러였습니다. 그녀는 1879년 당대의 저명한 화가였던 에밀 야콥 쉰들러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말러와 결혼하기 전부터 이미 공연 감독 막스 부어카르트, 작곡가 알렉산더 쳄린스키, 그리고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염문설을 뿌리고 다녔습니다. 그 가운데 클림트는 알마 쉰들러의 첫 키스를 차지한 남자로 알려졌으며, 그 덕분에 그녀는 (뜻밖이면서도 영광스럽게) 클림트의 대표작인 <키스>에 여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예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The Kiss (Lovers), 1907–1908.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Vienna

알마 쉰들러는 구스타프 클림트를 비롯한 여러 남성들의 구애를 뿌리치고 1902년 3월 9일 구스타프 말러와 결혼합니다. 무려 19살의 나이차를 극복한 결혼이었습니다. 결혼 후 그녀는 작곡가의 꿈을 접고 두 딸의 어머니로 살아가지만, 첫 딸이 죽자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고,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깊은 관계에 빠집니다. 말러도 이 사실을 알고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애씁니다. '천인 교양곡'으로도 불리는 교향곡 8번은 바로 그 무렵에 그녀를 위해 쓰여진 곡이었습니다.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

 

1911년에 구스타프 말러가 불과 51세에 죽자, 알마 말러는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두 번째로 결혼하지만 첫 남편과 사별한지 한참이나 뜸을 들인 후였습니다. 그로피우스와 재혼하기 전까지 연인 관계로 지낸 또다른 남자가 천재화가 오스카 코코슈카였습니다. 이 화가는 알마 말러가 건축가와 재혼한 이후에도 아주 오랫동안 그녀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보였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오스카 코코슈카(1886∼1980)

알마와 헤어지자 코코슈카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자진해서 입대했고, 이내 전쟁터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고 되돌아 옵니다. 사랑의 아픔을 잊기 위해 군대에 갔다가 몸까지 다친 셈이었습니다. 그는 옛 사랑을 잊지 못해 '알마를 닮은 인형'을 제작해서 함께 생활할 정도로 알마 말러에게 집착을 보였습니다. 심지어 오페라 공연을 갈 때에도 그 인형의 자리를 예약할 정도였다니 그의 집착이 어느 정도였는지 능히 짐작할 만합니다. 

그는 그녀에게 아주 많은 편지를 썼는데, 70번째 생일날에도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나의 알마! 

당신은 아직도 나의 길들지 않은 야생동물이오. 당신의 생일을 준비하는 친구들에게 '덧없는 달력의 시간에 나를 묶어놓지 말라'고 하오. 대신 시인을 찾아요.

그래서 우리가 함께 무엇을 했으며 서로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후세에 우리들의 살아있는 사랑을 전할 수 있도록 그에게 이야기를 전해 줘요. 우리가 서로에게 불어넣은 그 뜨거운 열정과 비교되는 사랑은 없었으니까.

당신의 오스카.

ps : 코코슈카의 가슴은 당신을 용서하기에.


그토록 끈질겼던 코코슈카의 구애를 뿌리친 끝에 시작된 두 번째 결혼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그로피우스의 잦은 해외 출장과 새로 태어난 아들의 '친부 논란'등이 문제였습니다. 그때 친부 논란을 일으킨 남자가 바로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프란츠 베르펠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공공연히 알마의 애인으로 소문나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두 번째 결혼 생활을 청산한 알마는 무려 10년 동안 베르펠과 동거하다가, 1929년에 이르러 그와 정식으로 세 번째 결혼식을 올린 뒤에는 그가 죽을 때까지 내내 함께 합니다. 유태인이었던 부부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다녔고, 알마는 남편과 함께 유럽 각지를 전전하다가 결국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여생을 보냅니다.

 

프란츠 베르펠(1890∼1945년)

 

 

여담이지만, 몇 년 전에 저는 그림을 통해서나마 알마 말러와 잠깐 마주친 적이 있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가 소장되어 있는 벨베데레 궁전에 갔을 때였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때 이후로 저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의식하지도 못한 채) 그녀와 입을 맞추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빈을 떠날 때 마침 클림트의 <키스>가 그려진 날렵한 커피잔이 눈에 띄었고, 오랫동안 그때 집어 든 그 커피잔으로 커피를 마시기 때문이지요.

 

 

벨베데레 궁전(출처 : 위키 백과)

클림트의 대표작인 <키스>, <유디트> 말고도 에곤 실레의 걸작 <죽음과 소녀>, <포옹>등이 소장되어 있다.

비록 <바람의 신부>는 없지만 오스카 코코슈카의 다른 작품들도 볼 수 있다.

 

 

그런데, <키스> 속의 그 여자가 '말러의 부인'이었다는 얘기는 어디선가 얼핏 들었던 것 같지만, 그녀가 코코슈카의 그림 <바람의 신부>의 주인공과 동일 인물일 줄은 몰랐습니다. 더군다나 어떤 책에서 우연히 발견한, 제게는 몹시 낯선 이름의 소설가에 불과했던 프란츠 베르펠이라는 사람이 그녀의 세 번째 남편인 줄은 더더욱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좋은 책은 좋은 사람과 비슷한 점이 많다. 사람을 처음 만나면 잘 알 수 없듯이 책도 한 번 읽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읽는 과정에서 그 책을 잘 알게 되고 그리하여 아주 가까운 친구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가 없으면 더 이상 삶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마저 갖게 된다. 이것을 보여주는 좋은 에피소드가 있다. 독일의 소설가 프란츠 베르펠은 토마스 만의 『부덴부로크 가의 사람들』이라는 장편소설을 너무 좋아하여 평생 30번 가량 읽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으로 그 소설을 읽은 것은 죽기 한 달 전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30번이라는 횟수가 아니라 죽기 한 달 전의 경황없는 상황에서도 토마스 만의 소설을 읽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베르펠에게 있어서 죽음은 곧 만의 소설을 읽지 못하는 것이었으리라.


 - 클리프턴 페디먼, 『평생독서계획』, <역자 후기> 중에서



최근에 저는 알마 말러에 관한 또다른 놀라운 사실 하나를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자주 찾는 이웃님의 유튜브 동영상 덕분이었는데요. 그 영상은 1943년에 만들어진 고색창연한 흑백영화 <베르나데트의 노래>라는 작품을 소개하는 영상이었는데, 그 영화의 원작을 쓴 작가가 놀랍게도 프란츠 베르펠이었던 것입니다. 그 유태인 소설가는 1938년 자신의 아내 알바 말러와 함께 나치의 박해를 피해 국경을 넘어 피신하던 중 프랑스의 어느 산간마을에 숨어들어 2년 동안이나 은신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 마을 루르드에서 전해지는 놀라운 이야기를 듣고 자신을 숨겨준  마을사람들에게 보답하는 심정으로 <성 베르나데트 수비루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로 썼으며, 그 원작을 바탕으로 영화 <베르나테트의 노래>가 탄생했던 것입니다. 1943년에 만들어진 그 영화는 제16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촬영상, 미술상, 음악상을 수상했으며, 제1회 골든 글로부 시상식에서도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고 합니다. 




알바 말러와 프란츠 베르펠이 한때 나치의 박해를 피해 무려 2년 동안이나 꼭꼭 숨어 지냈던 그 산골 마을은 <베르나데트의 노래>라는 소설과 영화의 배경으로도 유명하지만, 지금은 매년 3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찾는 성모 발현지로도 널리 알려진 관광명소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바람의 신부 알바 말러에 얽힌 놀라운 이야기 소개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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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08 1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좋은 글을 제가 왜 못 봤을까요 ㅠㅠ 페이퍼 당선 축하드립니다 ~

oren 2022-03-09 12:09   좋아요 1 | URL
아이고.. mini 님 댓글이 아니었더라면 이 글이 이달의 당선작으로 뽑힌 줄도 모를 뻔했네요.^^
댓글 남겨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https://www.youtube.com/user/ojcojj/community


영상 업로드를 하고 나면 며칠은 쫌 쉬는 편이랍니다. 
물론 '다음 영상을 뭘로 할까'를 구상하면서요... 

사실, 업로드와 업로드 사이의 짧은 틈새시간이 저로서는 제일 행복한 시간입니다.
고된 영상 편집작업에서 벗어나, 아무런 부담 없이 맘껏 릴렉스할 수 있으니까 말이죠.

다음 작품의 후보작들을 '그냥' 쭈욱 아무 생각없이 써 보면 다음과 같네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전쟁과 평화>, 톨스토이 
<국가>, 플라톤 
<백년 동안의 고독>, 가브리엘 마르케스 
<적과 흑>, 스탕달 
<모비딕>, 허먼 멜빌 
<역사>, 헤로도토스 
<신곡>, 단테 
<셰익스피어 비극 중 아무거나>, 셰익스피어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방인>, 알베르 카뮈
<걸리버 여행기>, 조너선 스위프트
<로빈슨 크루소>, 다니엘 디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농담>, 밀란 쿤데라
<마의 산>, 토마스 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선악의 저편>, 니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럴 
<예브게니 오네긴>, 푸슈킨 
<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롤리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윌리엄 포크너 
<성>, 프란츠 카프카 
<인형의 집>, 헨릭 입센 
<문명의 충돌>, 새뮤얼 헌팅턴 
<일리아스>, 호메로스 
<데이비드 코퍼필드>, 찰스 디킨스 
<황무지>, T.S.엘리어트... 

사실 이들 작품들은 '언젠가는' 영상으로 만들 생각을 지닌 작품들이긴 하지만,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은 '다시' 읽어봐야 겨우 영상 제작이 가능할 것 같은, 
난이도가 제법 느껴지는 작품들이기도 합니다... 
(몇몇 작품들은 읽은지 너무 오래 지나서 갖고 있는 책조차 없고요...) 

물론 대본 녹음까지 다 마쳤지만, 
영상 제작을 시도하다가 중지한 작품들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요. 

이들 작품들을 쭈욱 나열하고 나니, 
이 작품들을 앞으로 1년 이내에 동영상으로 만들 수만 있어도 참 좋겠다 싶은 생각도 듭니다.^^ 

이 가운데 과연 어떤 걸 만드는 게 가장 좋을까요? 
'4월은 잔인한 달'이니, <황무지>를 한번 다녀와 볼까 싶기도 하고요.... 

p.s
제 영상을 정말 열심히 봐주시는 어떤 구독자분께 달았던 댓글인데, 
오늘도 이런 고민을 계속 하면서, 
이 목록에 언급된 책들을 그냥 한번 불러내서 사진으로 담아봤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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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1-03-18 01: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말 대단하세요. 프로페셔널 한 느낌이 들어요!! 취미에서 프로의 세계로? ^^
4월은 잔인한 달이니, 좀 재밌는 책의 영상을 준비해 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잔인한 달이라서 더 삭막한 책 보다는요. ^^;

oren 2021-03-18 19:38   좋아요 1 | URL
다음에는 또 어떤 책을 소개하는 영상을 만들까,
이런 고민을 한 달이면 두세 번씩 하곤 하는데,
매번 선택지 앞에서 고민이 많더라구요.^^
이번에는 어떤 책을 읽을까,
하는 고민이야말로 참으로 사치스러운 고민이었다는 생각도 들곤 하고요.
해마다 4월만 되면 엘리엇의 잔인한 시구절이 떠오르니,
그 작품을 언젠가는 한번 다뤄보긴 해야 할 듯해요.
어쨌든 라로 님 말씀대로라면,
4월엔 잔인한 데다가 삭막하기까지 한 책은 피해야 좋겠군요!

scott 2021-03-18 0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거슨 진정한 책탑!의 경지!!4월 황무지 부터 시작하신다면 본격적으로 벽돌책 하나씩 돌파하는 유툽 콘텐츠가 될것 같네요 홧팅!!

oren 2021-03-18 19:48   좋아요 1 | URL
텍스트에서 나열한 순서대로 책탑을 쌓았는데,
맨 나중에 언급된 <황무지>는 너무 얇은 책이어서,
책탑의 머리 장식으로는 완전 대실패네요.^^
그나마 빵빵한 부피를 자랑하는 작품들을 먼저 꺼내든 덕분에,
책탑의 밑받침이 든든해지는 효과는 확실히 본 듯해요.^^

p.s
작품 목록에는 있고 책탑에는 없는 책들은 주로 1980년대에 읽은 작품들인데,
그 작품들의 실물이 없다는 게 조금 아쉬워요.^^
 

놀라워라!

잘생긴 인물들이 여기에 참 많기도 하구나!

인간은 참 아름다워! 오 멋진 신세계여,

이러한 종족이 살다니.

 - 셰익스피어, 『템페스트』, <5막 1장> 중에서

 

 * * *

 

안녕하세요? 오늘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소개할까 합니다.

 

이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작가에 대해 조금 살펴보고 넘어가지요. 올더스 헉슬리는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두루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탁월한 지성의 소유자였습니다. 그가 지닌 독특한 지성의 면모를 생각하면 『멋진 신세계』와 같은 작품이 결코 우연히 탄생한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문학과 철학은 물론 과학과 심리학을 비롯한 온갖 학문 분야에 두루 박학다식한 인물이었고, 이런 지식을 바탕으로 언제나 '삶의 의미'를 근원적으로 사색하고 규명하려고 평생 동안 애쓴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지성적 면모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집안의 가계도를 잠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영국의 저명한 과학자 집안과 문학가 집안의 피를 고루 물려받았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찰스 다윈 이후 가장 유명한 생물학자였던 토머스 헨리 헉슬리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교육자였고, 어머니는 『교양과 무질서』라는 유명한 작품을 쓴 매슈 아놀드의 조카딸이었고, 그녀 스스로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여류시인이었습니다. 올더스의 형인 줄리안 헉슬리는 저명한 생물학자이면서 초대 유네스코 사무총장을 지냈고, 이복동생인 앤드류 헉슬리는 노벨 의학상을 수상한 유명한 생리학자였습니다.  

 

작가의 할아버지인 토머스 헉슬리에 대해서는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찰스 다윈이 쓴 『종의 기원』의 서문에도 등장할 정도로 탁월한 생물학자였습니다. 그는 단테의 작품을 원어로 읽기 위해 이태리어를 배울 정도로 학구열이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표된 이후 종교계의 극단적인 반발과 반론을 최선두에서 가장 논리적이고도 효율적으로 반격한 중심 인물이었습니다. 인간의 조상이 동물로 이어진다는 주장을 담은 그의 대표작 『자연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는 훗날 헉슬리 가문을 관통하는 중요 연구 관심사가 되었으며, 올더스 헉슬리의 세계관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왕립학회 회장을 지낸 그는 존 러스킨, 틴덜, 매슈 아놀드, 토머스 칼라일 등과도 두루 교류했습니다. 찰스 다윈, 토머스 헉슬리, 틴덜은 버지니아 울프가 쓴 소설 『댈러웨이 부인』에도 함께 등장하는데, 버지니아 울프의 아버지가 토머스 헉슬리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올더스 헉슬리의 아버지 레오나드 헉슬리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재학중에 부인 줄리아 아놀드와 만났습니다. 그녀는 옥스퍼드 영문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훗날 시집을 출간하여 삼촌인 매슈 아놀드로부터 찬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레오나드는 시골에서 학교 교감으로 지냈지만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공방에는 늘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이들 부부의 3남 1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난 올더스 헉슬리는 14세에 어머니를 잃고 큰 충격에 빠집니다. 시력마저 나빠져 또다른 충격을 받은 그는 각막염 수술을 받았고, 나중에 옥스퍼드 의대에 진학했다가 결국 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꿉니다. 연극·예술 비평가로 사회 생활을 시작한 그는 작품 활동 내내 언제나 사물의 궁극적인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 집요한 노력을 기울인 끝에 온갖 난해한 주제에 대한 엄청난 백과사전적 지식을 습득하게 됩니다.

 

과학 문명의 발달이 초래할 암울한 미래상을 그린 작품은 『멋진 신세계』 말고도 『원숭이와 본질』 같은 작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심으로 동경해 마지않는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사회를 그린 작품도 아예 없지는 않았습니다. 『섬』이라는 작품이 대표적이지요. 그 작품을 두고 그가 스스로 논평한 글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위대한 역사, 폴리네시아 인류학, 산스크리트어와 중국어로 된 서적, 그리고 불교 경전, 약리학, 신경생리학, 심리학, 교육에 관한 논문들, 더불어 소설, 시, 비평, 기행문, 정치 논평, 철학자에서부터 배우, 정신병원의 환자로부터 롤스로이스를 타고 다니는 재벌들에 이르기까지 온갖 사람들과의 대화, 이 모든 것이 나의 유토피아적 방앗간의 깔때기 속으로 곡물이 되어 들어가 이 작품이 되었다.“

이 작품 하나에 대한 그의 관심 분야가 이 정도로 폭이 넓었으니 그의 작품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관심 분야가 얼마나 다양했을지는 넉넉히 짐작하고도 남을 정도이지요.

 

온갖 분야에 두루 해박한 지식을 지녔던 천재 작가 올더스 헉슬리가 그려낸 『멋진 신세계』는 과연 어떤 세계였고, 그런 세계가 미래에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은 또 얼마나 될까요?

 

포드 기원 632년으로 설정된 '멋진 신세계'의 시대 배경은 대략 2540년쯤입니다.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세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첨단 생명공학의 발달입니다. 인간들은 더이상 어머니의 뱃속에서 자라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시험관에서 수정되고 조건에 맞게 배양되어 조건반사 양육을 받으며 자라납니다. 소설의 맨 처음에 등장하는 회색 빌딩의 중앙 현관 위에는 '런던 중앙 인공부화 · 조건반사 양육소'라는 간판이 붙어 있습니다. 방패 모양의 현판에는 '공유 · 균등 · 안정'이라는 세계 국가의 표어가 달려 있지요. 이 두 가지가 '신세계'를 상징합니다.

 

인간들이 인공부화 과정을 거쳐 탄생한다는 사실로부터 인간의 삶은 근본적으로 변화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필요없는 세상이 된 것이지요. 번거로운 자녀양육 의무가 뒤따르는 결혼제도도 사라집니다. '만인은 만인을 위한 공유'가 세계 국가의 이념입니다. 격정을 유발하기 마련인 '연인 관계'라는 것도 없습니다. 자유 연애가 보편적인 사랑의 형태이고, 섹스 파트너를 오래 독점하는 연인 관계는 사회적 지탄을 받거나 금기로 여겨집니다. 첨단 의학의 발달 덕분에 인간의 신체는 육십이 되도록 젊음을 유지하지만 그 이후에는 '시체 처리소'로 직행합니다. 죽음은 더 이상 회피하거나 슬퍼할 일이 아니라는 점은 양육 과정에서 세심하고 철저하게 주입식으로 교육됩니다. 더군다나 부모, 자녀, 친인척이 따로 없는데 그토록 죽음을 슬퍼하고 연연할 이유 자체도 이미 사라지고 없습니다. 미래 세계는 강력한 중앙 통제 체제를 갖추고 있으며, 무엇보다 공유와 균등과 안정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세계입니다.

 

미래 세계의 또다른 특징은 철저한 계급 사회라는 점에 있습니다. 전세계 인구는 20억 명으로 제한되며, 피라미드 식으로 이뤄진 각각의 계급에 필요한 인원은 철저한 사전 계획에 따라 생산되고, 조건반사 양육소에서 '각각의 계급에 가장 알맞은 정도로' 양육 받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물론 오랜 시행착오 끝에 검증되고 정착된 시스템이지요.

 

겨우 34층밖에 되지 않는 나지막한 회색 빌딩에서 시작된 미래 세계는 '런던 중앙 인공부화 · 조건반사 양육소' 소장의 안내를 받는 견습생들 덕분에 독자들까지도 '첨단 생산 시설'을 두루 살펴볼 수 있지만, 센터 내부는 온갖 실험실용 플라스크와 니켈과 스산하게 빛나는 도자기류뿐이지요.

 

모든 것이 살벌함을 겨루고 있었다. 거기서 근무하는 자들은 흰 작업복을 입었고 손에는 시체같이 창백한 고무장갑을 끼고 있었다. 조명은 차갑게 죽어 있었다. 유령 바로 그것이었다.(7쪽)

 

도무지 등장 인물들 사이의 대화 조차도 없을 듯한 숨막히는 세계에서도 사건들은 일어나고 갈등이 생겨납니다. 알파 계급에 속해 있으면서 최면 교육 전문가로 근무하는 버나드 마르크스와 감정공학 대학의 감성교육 엔지니어인 헬름홀츠 왓슨은 신세계의 통치 체계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하고 약간의 반감과 혐오를 품은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일종의 과잉상태에 있으며 스스로의 개성을 인식하고 있으므로 몰개성적인 통치 체계에 종종 비판적인 견해를 표출합니다. 그들은 서로가 공감대를 가진 부분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차츰 그런 감정들을 공유하기 시작합니다.

 

버나드는 성격마저 우울하고 소심한 데다 사교성이 부족한 탓에 또래의 여자들과 제대로 사귈 기회도 갖지 못합니다. 사교적이면서 발랄한 처녀인 레니나는 수줍음이 많은 버나드에게 거꾸로 대쉬하지만 그녀를 쉽게 수용하지 못하고 겉으로만 맴돕니다. 이들 커플은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해 휴가 기간 동안 뉴멕시코의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함께 놀러갈 계획을 세웁니다. 야만인들은 고도로 문명화된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는 철저히 분리된 지역에 사는 원주민들이며, 오랜 옛날의 생활 습관들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격리된 채 살고 있습니다. 안내자들을 따라 조심조심 야만인들의 풍습을 둘러본 두 사람은 자신들의 방식과는 너무나 다른 생활 습관을 지닌 '야만인들의 풍속'에 기겁을 하지요. 그곳은 몹시 불결할 뿐만 아니라 보기에도 흉측한 늙은이들도 많았고, 아이들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 기우제를 올리는 기이한 원시 풍속 등 어느 하나 낯설지 않은 게 없었습니다. 비록 레니나에게는 극도로 혐오스러운 모습일지 몰라도 예민한 감성을 지녔던 버나드는 도리어 그런 삶의 모습에 깊은 흥미를 품습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오래 전에는 문명세계에 속해 있다가 언젠가 우연한 사고 때문에 거기서 정착해 살고 있는 린다라는 늙은 여성을 만납니다. 그녀는 25년 전에 인공 부화 센터 소장이던 남자 친구와 함께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놀러 왔다가 그만 길을 잃는 바람에 끝내 실종 처리된 여성이었습니다. 베타 계급에 속했던 그녀는 거기서 존이라는 아들을 낳아 키웠지만 원주민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온갖 간난고초를 겪으며 어렵게 생활해 왔던 터였습니다. 

 

그녀는 그곳 생활이 힘겨울 때마다 아들에게 문명 세계에서 지냈던 행복한 지난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곳으로 되돌아갈 날을 꿈꾸며 아들에게 글과 노래까지 가르쳐 줍니다. 그때 존이 심취해서 읽은 책이 셰익스피어 전집이었습니다. 존은 비록 책 속의 모든 내용을 전부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온갖 다채롭고 풍성한 감성들이 넘쳐나는 인간미 넘치는 세계를 동경하게 됩니다. 버나드와 레니나는 린다와 존을 설득시켜 그들을 마침내 문명 세계로 이끌고 나오지요. 무료한 대중들의 폭발적인 관심과 연구 대상이 될 것임을 확신하면서 말입니다.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어머니와 함께 핍박받고 따돌림을 당하며 살아오던 존에게는 '런던으로 가겠느냐'는 버나드의 제안이 더없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명세계로의 이주 제안에 대해 존이 감격에 벅차 내뱉은 대답이 바로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서 미란다가 외쳤던 말이었습니다. 멋진 신세계!

 

"오오, 이 얼마나 경이로운가!" 존이 말했다. 그의 눈에서는 광채가 났고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얼마나 많은 훌륭한 피조물이 여기에 있는가! 인간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피조물인가!" 그의 홍조는 갑자기 더욱 깊어졌다. 그는 레니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진한 초록색 인조견 옷을 입고 피부는 젊음과 영양크림으로 윤기 있고, 포동포동하고 자애롭게 미소짓는 천사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음성이 더듬거리고 있었다. 

 

"오오, 멋진 신세계여!" (177쪽)

 

버나드와 레니나 덕분에 '야만인 보호 구역'에서 문명 세계로 끌어올려진 존과 린다는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 도리어 더욱 난처한 상황에 처하고 맙니다. 린다는 늙고 뚱뚱한 데다가 모습마저 추하게 일그러져 문명세계에서는 한낱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전락합니다. '야만인 씨'로 불리는 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편, 체제 부적응자로 분류된 버나드는 언제라도 험지 아이슬란드로 전출당할 위기를 의식하고 있었고, 그런 좌천 발령을 모면하기 위해서라도 존을 활용한 실적 쌓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런 영문도 모르고 이리저리 불려다니는 존은 문명 세계로 올 때부터 미모에 이끌렸던 레니나에게 차츰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도 모르게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사를 자주 중얼거리면서 말이지요.

 

촉감 영화관에서 존과 함께 데이트를 즐긴 이후로 레니나는 존이 자신을 연모하고 있다는 걸 확실하게 알아챕니다. 자유 연애에 익숙한 레니나는 오래 고민할 겨를도 없이 적당한 기회를 틈타 야만인의 방으로 먼저 찾아갑니다. 그러나 정작 충분한 마음의 준비가 덜 된 상태였던 존은 제발로 찾아온 그녀를 극도로 혐오하고 도리어 밀쳐냅니다. 연애 단계에서 반드시 거쳐야만 마땅할 듯한 섬세한 밀당 단계가 생략된 걸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지요. 이런 희극적인 모습이야말로 가치관이 전도된 문명 세계와 야만인 사이에 펼쳐지는 '아이러니의 극치'입니다.

 

"기절할 때까지 키스해줘요. 오! 내 사랑, 안아주세요. 아늑하게 ……."

 

야만인은 그녀의 팔목을 잡더니 어깨를 잡았던 그녀의 손을 풀고 팔을 뻗어 그녀를 거칠게 밀었다.

 

"오! 아파요! 당신은 나를…… 오!" 그녀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공포로 인하여 고통도 잊은 상태였다. 눈을 떴을 때 그의 얼굴이 보였다 ㅡ 아니, 이것은 그의 얼굴이 아니었다. 전혀 낯선 인간의 창백하게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형언할 수 없는 미친 듯한 분노로 경련하는 얼굴이었다.(245∼246쪽)

 

존은 문명 세계의 사람들이 불편한 감정을 잊고 행복감에 빠져들도록 도와주는 '소마'를 배급하기 위해 모여든 인조 인간들을 향해 분노를 가득 담아 외칩니다. 소마는 행복을 주는 약이 아니라 독약이라고 말이지요. 그렇게 소동을 부린 끝에 존은 버나드와 헬름홀츠와 함께 서유럽 통치자인 무스타파 몬드에게 불려갑니다. 총통의 서재로 안내된 야만인 존은 도리어 총통을 향해 '인간다운 삶'을 역설하고, 몬드는 한편으로는 야만인의 주장을 인정하면서도 감정의 기복조차 느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안정된 문명세계가 더 행복하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행복을 위해서는 예술, 과학, 종교까지도 불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신의 존재까지도. 그들 사이의 격론은 야만인 존이 마침내 다음과 같이 외칠 때까지 계속됩니다.

 

"하지만 저는 불편한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아." 총통이 말했다.

 

"우리는 여건을 안락하게 만들기를 좋아하네."

 

"하지만 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자네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고 있군 그래."

 

"그렇게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야만인은 반항적으로 말했다.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305쪽)

 

 

야만인은 마침내 그곳을 견디지 못하고 멀리 외딴 데로 도망칩니다. 그러나 그곳도 끝내 안전한 곳은 되지 못했습니다. 언론의 집요한 추격을 피하지 못한 그는 열광적인 취재 열기에 시달리다 끝내 자살하고 말지요. 그가 은신처로 피난하기로 결심하면서 버나드에게 했던 말은 이랬습니다.

 

"나는 문명을 먹었어."

"문명이 나에게 독을 먹였어. 그래서 나는 오염되고 말았어."

 

『멋진 신세계』는 1949년에 쓰인 조지 오웰의 『1984』보다는 조금 덜 우울합니다. 오웰의 작품에 담긴 1984년의 세계는 실제 세계보다 훨씬 더 암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고도의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이 스크린을 통해 철저하게 감시받고 통제되며, 체제에 순응하지 못하는 반체제 인사들은 사상 경찰들을 통해 색출되고, 혹독한 고문을 거쳐 개조되거나 끝내 흔적도 없이 제거됩니다. 거기엔 어떠한 자유나 방임도 허용되지 않지요. 그에 반해 올더스 헉슬리가 그린 미래 세계는 비록 전체주의 지배 체제인 점에선 닮아 있으나,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끝에 도래하는 '인간 본연의 삶이 파괴된 황량한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점이 다르지요.

 

기술 문명이 발달할수록 더욱 강조되기 마련인 공유와 안정 같은 가치들이 도리어 궁극적으로는 인간다운 삶 자체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기울고 만다는 헉슬리의 경고는 미래로 나아갈수록 점점 더 강한 설득력을 얻을 주제임에 틀림없습니다. 또한 헉슬리가 내다본 까마득한 미래 세계는 우리의 생각보다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습니다. 시험관 아기는 어느새 보편적인 자녀 획득 방식으로 자리잡은지 오래입니다. 유전공학을 비롯한 첨단 과학의 발전은 질병과 노화에 대한 극복 능력을 갈수록 증대시키고 있으며, 인간 생활의 편리함과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첨단 생명공학이라도 기꺼이 감수할 정도로 과학 기술에 대한 의존도는 커져가고 있습니다.

 

올더스 헉슬리가 쓴 『멋진 신세계』가 출판된지 90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세상은 온갖 혁신적인 기술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멋진 신세계에서 주인공들이 즐겼던 '촉감 영화관'은 현실 세계에서도 이미 등장하고 있습니다.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기술이 등장하면서 디지털 아바타가 가상의 공간에서 유명 아이돌 그룹과 함께 공연을 즐기며 춤을 추는 등 메타버스 공간이 실제의 삶과 뒤섞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율주행과 인공지능에 기반을 두고 움직이는 고도로 발달된 미래 기계 문명은 사소한 사고 하나로도 끔찍한 대혼란을 일으킬 위험도 품고 있습니다. '만인은 만인을 위해 공유한다'는 공유 이념 또한 마냥 좋을 리만은 없습니다.

 

『멋진 신세계』는 탄탄한 서사가 뒷받침된 멋진 소설이라기보다는 예언적 우화에 가까운 소설입니다. 또한 작품의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작품 속엔 작가 특유의 유쾌한 아이러니가 곳곳에 가득합니다. '멋진 신세계'를 꿈꾸며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벗어나 고도 문명 사회로 뛰어든 존이 도리어 그 세계를 지배하는 총통에게 대들듯이 싸우며 '과학과 철학과 종교의 가치를 역설'하는 장면이야말로 아이러니의 극치입니다. 홀로 독학하다시피 셰익스피어를 탐독한 존은 인간 삶의 본질을 절묘하게 꿰뚫는 듯한 명대사들을 아무 때라도 주저없이 쏟아냅니다. 그때마다 문명인들은 야만인 청년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어리둥절해 합니다. 존은 비록 문명세계로부터 격리된 곳에서 야만인 취급을 받을 정도로 고통을 겪으며 자랐지만 셰익스피어로 상징되는 문학의 힘을 통해 인간 삶의 본질을 터득합니다. 인간의 행복이란 결코 그저 얻어지는 알약과 같은 것이 아니며, 행복과 고뇌는 서로 동전의 앞뒤처럼 표리관계에 있다는 사실 등등을 말이지요.

 

끝내 문명 세계의 공기를 견디지 못한 야만인이 목을 매고 자살하는 <멋진 신세계>의 결말이 너무 비참하게 여겨졌던 탓일까요. 올더스 헉슬리는 이 작품을 출간한지 14년이 흐른 뒤 이 소설의 재판본 서문에 작가의 입장을 새롭게 추가했습니다. 『멋진 신세계』를 처음 쓸 때만 하더라도 야만인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 밖에 없었다고 말이지요. 문명국에서 미치거나 야만국으로 컴백하거나. 그러나 다시 그 작품을 쓴다면 제3사회의 존재를 설정하겠노라고 말이지요. 문명국으로부터의 망명자나 도망자들이 건설하는 새로운 세계를 그려내겠다는 말이었지요. 그런 작업으로도 부족했던 것일까요. 작가는 1958년에 기어이 새로운 작품을 하나 더 썼습니다. 그 작품의 이름은 『다시 찾아본 멋진 신세계』였습니다. 인간의 주요 관심사들에 대하여 그처럼 빠짐없이 의견을 표명한 인물도 찾기 어렵습니다. 미래의 고도 문명 사회가 어떠한 모습일지 궁금한 독자들은 한번쯤 올더스 헉슬리가 창조한 '멋진 신세계'를 다녀올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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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3-15 17: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좋은 글입니다. 소마만 기억하는 저로서는 ㅠㅠ 헉슬리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좀 더 깊이있게 느껴져요. 표지를 보니 제가 갖고 있는 건 문예출판사거네요. ㅎㅎ

oren 2021-03-15 20:34   좋아요 2 | URL
아.. 저도 문예출판사 판으로 읽었습니다! 이번에 영상을 만들면서 올더스 헉슬리의 어머니, 할아버지(토마스 헉슬리), 외할아버지의 형님(매슈 아놀드), 친형, 이복동생까지... 실로 많은 사람들의 실물 사진을 찾아봤네요..

책으로 읽을 땐 그저 막연히 상상만 했던 <책 속 내용들>을 실제적인 영상으로 재탄생시키는 재미가 때론 쏠쏠하긴 합니다. 물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영상 자료들을 긁어모으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