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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자본주의 - 현대 세계의 거대한 전환과 사회적 삶의 재구성 아우또노미아총서 27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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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0여 쪽에 이르는 대작이다. 자율주의-맑시스트로 알려진 저자 조정환이 1990년대부터 최근까지 지속적으로 개진해온 이론적 사유를 발전시켜 책으로 묶었다. 그 과정에서 2008년 한국의 촛불운동, 2011년 일본 대지진 및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혁명운동이 그의 사유에 틈입하여 촉매제가 되었다. 저자는 흔히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 혹은 소비자본주의로 일컬어진 제3기 자본주의를 ‘인지자본주의’로 정의하고, 이를 토대로 자본과 노동, 시간과 공간, 계급과 지성 등의 개념을 재구성했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주권의 형태와 혁명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이론적으로 탐색하려 했다. 그리하여 이 책은 “권력, 사회, 예술의 인지적 전환에 관심을 기울인 이 연구들을 ‘정치경제학 비판’과 결합하고 그것들을 자본주의 분석과 비판의 전통 속에 자리 잡게 하면서 그것들이 놓일 새로운 지평을 열어줌과 동시에 좀 더 명확한 정치적 방향성을 부여하려는 시도”(23-24)의 산물이다. 내용이 방대하여, 이 리뷰에서 다 다루지 못한다. 흥미롭게 읽은 부분만을 소개해본다.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인지자본주의에서 공간의 재구성”에 있어 문제가 되는 것은 단연 ‘메트로폴리스’다. 벤야민, 아감벤 등의 사유를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이 책은 메트로폴리스를 “일국적일 뿐만 아니라 전지구적인 삶의 배치이자, 자본의 장치”(223)로 정의한다. 그가 규정하는 메트로폴리스는 “노동의 실질적 포섭, 비물질노동, 그리고 다중”(227)이라는 세 개념의 축으로 이루어진다는 네그리의 분석에 따른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생활양식, 집단적 소통수단’이라는 조건의 집합으로 이루어지는 메트로폴리스라는 공간은 ‘능동적 저항주체’가 형성 가능한 공간이 된다.

   2008년의 촛불운동은 이러한 다중적 네트워크 장치로서의 메트로폴리스에서 탄생한 능동적 저항주체로서의 시민이 가시화되어 혁명의 가능성을 예고한 사례로 읽힌다. 이는 인지자본주의가 희망적으로 기대하는 ‘지성’의 상을 설명하기 위한 좋은 단초가 된다. ‘지성’의 문제는 11장에서 다루어지는데, 그간 사회주의 운동이 “경제적 평등을 주장하고 실천하면서도 지성에 있어서는 평등보다 불평등을 옹호”해왔던 것이야말로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 이 장의 핵심적 주장이다. 전위, 노드의 중요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고, 사회주의 운동의 실패를 지도력 부족, 조직화의 실패 등으로 환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오히려 저자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다중’ 개념에 근거한 “모든 사람들의 지도자화”(384)이다. 전문가들의 헤게모니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은닉되는 비밀이 있어야 하고, 이를 절대적인 전제로 받아들이는 사회구성체는 보수주의와 맞닿는다. 예컨대 2008년의 촛불을 우중의 출현으로 보는 ‘전-반’ 진보주의자들의 주장이 그 예이다. (이는 저자가 오랫동안 상호비평관계를 유지했던 서동진과 결정적으로 대립되는 부분이다. 최근 󰡔인지자본주의󰡕에 대해 서동진과 조정환이 제출한 비판과 반비판은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는 결국 ‘맑스주의’의 정통성에 대한 이해와 오독 논쟁으로 치우쳐버렸다. 이런 이론투쟁은 두 논자의 인식론적 기반에 기인한 문제인 만큼 그로의 귀결은 자연스럽지만, 새삼 놀라운 것은 이 현학적인 논의가 인터넷 진보매체 <프레시안>을 통해 결코 적지 않은 분량으로 발표되었다는 점이다. 과연! cf. 서동진, 「마르크스주의, 미래학의 유혹에 빠지다?」, 󰡔프레시안󰡕, 2011. 5. 13; 조정환, 「마르크스주의 진화를 가로막는 진짜 ‘적’은?」, 󰡔프레시안󰡕, 2011. 6. 3)

   보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것이 인문학의 보수화 및 고전 붐 현상에 대한 분석으로 이어지는 대목이다. CEO를 위한 인문학, 노숙자를 위한 인문학 등 인문학의 범사회화 현상이 왜 대안이 아닌지를 밝히는 대목에 공감한다. 인문학의 위기가 찾은 출구가 기업과의 ‘제휴’라는 것은 곧, 인문학적 사유가 국가가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발전전략의 일부로 배치”(394)되고 소비되는 것과 다름없음을 저자는 분명히 한다. 이명박 정부가 고전이 지닌 해석의 다양한 가능성을 선점함으로써 “고전이 해방과 자유를 찾는 다중의 공통어로 기능하지 못하도록 저지”하고 “오히려 고전으로부터 삶에 명령질서를 부과할 가능성을,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의 정당성을 찾아내려는 작전의 일부”로 활용하고 있다는 주장도 흥미롭다. 물론 작금의 고전 붐의 원인이 모두 이러한 분석으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고전’이라는 컨텐츠의 정력적인 개발을 통해 ‘인문학적 포즈’를 구성하고 있는 국가의 의도를 설명하기에는 유효하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노드나 전위의 절대성이 자명하지 않다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모든 사람들의 지도자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다중’의 개념이 전제하는 ‘대중’에 대한 희망적인 믿음은 어떻게 실현가능한가. ‘다중’은 ‘다중’의 그야말로 ‘다층적인’ 면모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인문학의 신보수주의화가 아닌, 인문학의 미래, 인문학이 ‘다중지성’으로서 기능하는 것, 동시에 ‘다중지성’이 ‘인문화’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저자가 구성한 ‘다중’의 실체는 ‘인지자본주의에서 계급의 재구성’을 논한 9장에서 논의된다. 저자는 ‘프리터, 프리커, 비정규직, 불안정노동자’들을 ‘호모 사케르’(아감벤), ‘쓰레기’(바우만) 등 국가로부터 배제된 부정적 형상으로 제시하는 것과는 다른 길을 택한다. 그는 이들의 ‘버려짐’, ‘불안정’ 등이 아니라 이들의 ‘자유로움’, ‘유동성’과 같은 특성에 주목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개념을 재구성한다. 이 ‘불안정’과 ‘자유’라는 양극의 스펙트럼은 자본주의의의 질적 변형에 기인한 것이다. 실상 제3기 자본주의라고 일컬어지는 인지자본주의는 고용노동 뿐만 아니라 “‘고용되지 않은 거대한 노동들(여성, 아동, 노인, 청년, 죄수, 실업자, 예술가 등의 활동들)’에 의존”(314)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주체화하는 새로운 사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용’의 여부가 곧 삶의 안전을 좌우한다는 이 전제야말로 ‘정규직/비정규직’ 등 노동자 간의 위계와 분절을 촉발하여 혁명적 주체화를 저해한다. 그러므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만이 능사는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고용이 곧 삶의 안보를 결정한다는 자본주의적 인식론에 포섭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요는 ‘다중’이다. 새로운 주체로서 ‘다중’의 신체는 마련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적 지배를 지엽적인 것, 주변적인 것으로 만들”(507)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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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meral 2011-08-31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래 내용을 메일로도 보내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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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웹진 <자율평론>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정연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오해 님이 작성하신 <인지자본주의>에 대한 서평글을 오는 9월 초 발행 예정인 <자율평론> 36호 게재할 수 있을지 문의를 드립니다.

<자율평론>은 2002년부터 지금까지 총 35호의 웹진을 발행한 계간 정치철학 웹진이며, 누구나 인터넷을 통해 자유로이 접근할 수 있는 copyleft 웹진입니다. 그간 <자율평론>에 게재되었던 모든 원고들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waam.net/xe/autonomous_review

<자율평론>은 인문학 강좌 공간인 다중지성의 정원, 독립 출판 활동을 하는 갈무리 출판사, 세미나 공간 다중지성 연구정원의 마디 단위로, 위 공간들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지적 활동들의 성과들을 모아내고, 우리들의 생각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매체가 아니기 때문에 원고료를 드리기는 어렵지만, 게재를 허락해 주신다면 웹진이 발행되는 대로 PDF 파일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모쪼록 긍정적인 검토를 부탁드리며, 더 궁금하신 사항이 있으시다면 아래 연락처로 언제든지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자율평론> 편집위원회 김정연 드림
daziwon@waam.net / 02-325-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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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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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쉽게 읽혔는데, 서평은 쉽게 쓰지 못하겠다. 마찬가지로, 책은 빨리 읽혔지만, 뿌듯함은 없다. 국가란 무엇인가, 이런 책을 써야 했던 저자의 고민만큼 읽는 이의 번민 또한 크다. 서평을 쓰자니 정치평론을 해야 하겠고, 그걸 피해서야 좋은 서평은 아닐진대, 차마 감당할 역량과 의욕이 없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저자 유시민에 대해서만 쓴다고 해도, 그게 정치인 유시민과 무관하다고 곧이 읽을 이도 없을 것이다. 독자들의 그런 공통감각이야말로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자체보다도 유시민이 더욱 심각하게 의식했을 문제였을 테고 말이다.

  ‘국가주의적 국가관’, ‘자유주의적 국가관’, ‘계급주의적 국가관’을 각각 설명한 제1장부터 3장, 그리고 고전 철학자들의 ‘통치자론’의 내용을 개괄적으로 설명한 4장까지는 고등학교 때 배운 정치·사회 교과서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서술 방식도 대학 교양입문서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애국심’, ‘혁명과 개량’의 내용을 다룬 5, 6장의 내용은 그 자체는 새롭지 않더라도 앞서 등장한 정치 입문서의 내용과 함께 나오는 법은 드물기에 흥미롭게 읽히는 부분이다. 1-4장까지의 객관적 지식을, 5, 6장에서 제기한 애국심에 대한 사유, 혁명과 개량의 논리적 구도에 적용 ·서술하는 부분에서 저자의 문제의식을 드러내고자 시도한 대목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여기서 대한민국의 보편적인 애국심의 개념은 피히테가 주장한 ‘배타적 사랑의 감정’이며, 또한 이 단어는 국가주의자들이 독점했다고 적확하게 지적한다. 그리하여 자유주의자와 진보주의자들이 ‘애국심’을 표 나게 내세우지 않는 것은 이해 못할 바 아니지만, 그가 보기에 그것은 현명한 커뮤니케이션 전략은 아니다. 이러한 전제 하에 그가 선택한 애국심의 정의는 르낭의 개념에 바탕을 둔 것으로, “국가라는 하나의 공동체에 함께 귀속되어 훌륭한 삶을 영위하고 공동의 선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137)이다. 물론 유시민이 택한 ‘애국심’과, ‘사회변혁’, ‘진보’에 대한 정의는 단지 그가 그것을 선택했다고 해서 정치인으로서의 그의 이상과 성격을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는 모든 저자의 경우에 다 해당되지만, 특히 정치인 유시민은 바로 그런 의심과의 정면대결을 피할 수 없고, 피해서도 안 될 것이다.

  다만, 그의 책 전반에 걸쳐 이러한 서술방식이 매우 정치적으로 활용되고 있음은 지적해두어야 하겠다. 그러니까 애국심을 ‘배타적 사랑’으로 개념화하여 전체주의적 국가관으로 나아가는 것이 정향되어 있었던 피히테의 주장, 애국심을 사악하고 위험한 감정으로 간주하여 홀로 성자처럼 살아간 톨스토이, 그리고 애국심을 주민들 자신의 의지에 의해 발생하는, 함께 귀속되어 살면서 실현하고자 하는 가치 또는 목적에 대한 사랑과 충성심이라고 주장하는 르낭으로 세 가지 선택지를 제시하고, 저자 그 자신의 견해를 그중 가장 온건하면서도 적극적인, 그러니까 이론과 현실 두 측면 모두에서 가장 변증법적으로 고양된 위치에 자리매김하는 이런 서술 방식 말이다. 이런 방식으로 합리성과 진정성을 보장받는 것은 가장 손쉽게 정치적 서사를 구성하는 전략이기에 예민하게 의식되어야 한다.

  7, 8, 9장은 ‘진보’와 ‘국가의 도덕’을 의제로 설정하여, 정치인 유시민 자신이 표방하는 ‘진보자유주의’의 논리적 근거를 설명하기 위해 마련된 장이다. 그는 라인홀트 니버를 논리적 스승으로 삼아 이렇게 주장한다. “나는 자유를 원하는 것과 똑같이 간절하게 정의를 소망한다. 그래서 자유주의 국가론이라는 땅을 딛고 정의를 실현하는 국가를 바라보며 나아간다. 이것이 내가 스스로를 진보자유주의자라고 말하는 의미이다. (...) 진보자유주의자는 민주주의를 통한 사회개량의 길을 선호한다.”(242-243) 그리고 이러한 철학을 실현한 현실모델로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 소환된다. 저자가 베른슈타인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수사는 “졌지만 이긴 정치인”이다. 그 이름, 어딘지 익숙하다. 기시감을 탓할까.

  9장에서 저자는 베버의 책임윤리를 제시하며, 그것을 의식한 현실적 최선으로서 ‘연합정치’를 주장한다. 과연, 연합정치는 그의 ‘철학’의 산물(?)이었음을 새삼 확인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가 1987년부터 2007년까지 실시된 진보진영과 자유진영의 연합 사례와 그에 따른 승패 및 표차를 계산하며 주장하는 것은 일명 ‘섞임’의 정치다. “이념과 정치문화의 ‘섞임’을 통해 진보의 힘을 키우는 것이 연합정치이다. (...) 자유주의자와 진보주의자가 대중의 존경과 믿음을 받는 길이 바로 연합정치에 있다. 연합정치를 통하지 않고서는 훌륭한 국가를 만들 수 없다.”(282-283) “책을 쓰면서 정치인의 시각을 유지하려고 노력”(286)했다는 유시민의 책은 이같은 문장으로 끝난다.

  그는 책을 쓰면서 두 가지 소망을 가졌다고 한다. 서로 다른 국가관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과, 정치인의 글쓰기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 어떤가. 전자는 유시민의 책이 한 것이 아니라, 정치철학 입문서의 양식 자체가 한 것이다. 그렇다면, 후자는? ‘정치인의 글쓰기’의 이상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먼저 필요하겠다.

  아쉬움 아닌 아쉬움을 짚자. 유시민은 대한민국에서 정치인을 해야 되는 존재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던지면서, 정작 ‘국가 밖’에 대한 삶에 대해서는 아예 사유의 가능성을 차단해버렸다. 현실정치를 수행하는 정치인과, ‘탈국민, 탈국가’의 상상은 결코 만날 수 없고, 만날 필요도 없는 것일까. 국가의 독점적·배타적 폭력을 승인하는 것을 좁은 의미의 국가주의자 혹은 마키아벨리스트라고 할 수 있다면, 국가를 상대화하지 않는 것 역시 그러한 호명과 아주 잘 어울린다. 그런 의미에서 “휼륭한 국가 없이는 시민들의 훌륭한 삶도 있을 수 없다.”(7)라는 문장을 인용하는 사람은 언제나 ‘국가주의자’의 혐의에 노출되어 있다. 이제 참다가, 참다가 묻는다. 그렇다면 저자는 ‘국민’을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는가. “국민이란 무엇인가” 말이다. 국민은 왜 국가 없이 못 살면서도, 국가에게 버려지는가. 한 인간이 시민이 되고, 국민이 되는 것은 어떤 문제인가. 저자 유시민이 답해도 되고, 정치인 유시민이 답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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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화는 정치다(장 미셸 지앙, 목수정 역, 동녘) 

"문화는 정치다". 온갖 질문들이 빗발치게 하는 제목이다. 이 책의 키워드는 '문화정치'로 설정되어 있으며, 이 책의 소개란에는 '문화'와 '정치'의 생소한 결합에 대해 말하는 것이 저술의도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문화'와 '정치'의 결합은 사실 하나도 안 생소하다. 아마 "정치는 문화다"라고 말해도 이의가 거의 없을 정도로, '문화'와 '정치'의 상호보족관계에 대해서는 익숙하다. 그렇다면, 이 책이 '문화정치'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부터 물어야겠다. '문화정치'란 말은 이미 '1910년대의 무단통치에 이어, 3.1운동의 영향으로 수행된 1920년대 일제의 통치양식'을 일컫는 말로 학술적 시민권을 얻었다. 그런가 하면, 최근에는 TV와 영화, 음악과 공연과 같은 대중미디어를 다룬 비평들 또한 '문화정치'를 화두로 삼고 있다. 과연 '문화정치'란 무엇인가. 이 책은 이 물음의 답을, 최근 정치적으로 가장 '뜨거운' 나라인 프랑스의 역사로부터 찾는다. 물론 역자는 아주 적실하게도 최근 가장 '선동적인' 여성 칼럼니스트 목수정이다. 

 

2. 다미가요 제창(정영혜, 후지이 다케시 역, 삼인) 

   이 책 제1장에는 저자의 에누리 없이 완벽한 논리가, 가장 아름다운 문장으로 번역되어 있다. "결국 피차별자가 그 차별을 고발하는 것은 단지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이기 때문이다. 차별을 방치하지 않기 위한, 스스로 내면화하지 않기 위한 의무 말이다. 결코 차별을 없앨 책임을 혼자 도맡아서가 아니다. 그런데 ‘다수자’들은 이러한 ‘소수자’의 고발을 <지원>한다는 형태로 반차별의 태도를 취하려고 한다. 그러나 차별과 싸우는 주체가 되고 차별을 없애는 데 사회적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차별하는 사람들이지 피차별자가 아니다. 그런 것을 ‘다수자’가 ‘소수자’를 <지원>한다고 하는 순간, 그 책임은 교묘하게 ‘소수자’에게 전가되고 ‘해주기’, ‘받기’라는 상하관계가 생겨나 다시 ‘다수자’가 우위에 선다. 이러면 차별 구조를 똑같이 덧칠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최근 한국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재일조선인의 문제의식이 강상중, 서경식과 같은 남성의 것이었다면, 이 책에서 2.5세 여성 재일조선인인 저자는 인종주의와 국가주의의 공모에 '젠더 정치'마저 가세한 차별의 구조를 사정 없이 파헤친다. 그리하여 "다미가요 제창", 기미(君, 군주)를 다미(民, 민, 백성)로 바꿔 국가로 정해진 기미가요 대신 다미가요를 부름으로써, 강요된 국민국가의 국민 위치를 넘어서자는 결의가 담겨 있는 제목을 달았다 한다. 너무 익숙한 결론인가? 그 아쉬움이 바로 '다문화주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사유가 이제 막 시작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과 유관한 것이 아니겠는가. 

 

3. 느낌의 공동체(신형철, 문학동네) 

  기어코 '추천'을 하고야 말게 만드는 게 신형철의 힘이라면 힘이다. 신형철이라는 눈에 띠게 똑똑한 사람이 이 미치게 찌질한 시대에마저 그렇게 열심히 읽고 쓰지 않았다면 문학 따윈 옛날에 버렸을 거다, 라고 말하게 만든다. 내가 신형철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과 실망은, 그가 고백하는 문학에 대한 애증, 그것과 약간 닮았다. (물론 나는 그처럼 열렬하게 고백하지 않을 것이고, 최대한 계산하며, 끝내 숨길 것이지만) 아직 잊지 않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그가 쓴 문장들의 울림을. 그때 '다시' '미문'이 가진 위안을 힘을 믿기 시작했다. ('미문'에 대해 주관적으로 재정의하게 해줬다는 점에서 그에게 조금 감사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지혜와 성실에 대한 찬탄을 들을 때면 '나도 조금은 그렇게 느껴', 라고 동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온갖 시와 소설집 머리말과 뒷표지에 예의 그 '미문'으로 된 주례사 멘트를 쏟아낼 때는 숱하게 실망도 해봤다. 이제부턴 미워하겠다고 '거의' 다짐도 해봤다. 내가 보기에 그는 '문학'에 대해서는 '급진적'이고, '정치'에 대해서는 '온건한' 듯 했다. 그런 이분법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그런 걸 왜 싫어했는지 가끔은 나도 스스로에게 묻고 싶다.  그런 걸 다 걷어치우고, 위악과 교만, 과장과 허영 없이 마음을 건드리는 문장들이 요즘 내게 필요하다. 그가 적은 서문의 말대로 "느낌의 공동체", 그 소박한  공동체에 가끔은 귀속되고 싶단 말이다. 

 

4. 포 피시(폴 그린버그, 박산호 역, 시공사) 

 '올해의 가장 멋진 책표지' 같은 걸로 뽑아줘야 할 것만 같은 책(당연히 한국어판 말고 원서의 것) <포 피시>의 네 주인공은 연어, 농어, 대구, 참치다. 헛, 다 맛있는 것들!!! 생선 그림을 보고 거의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응하고 있을 뻔한 순간에 이런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영국 정부에서 권장하는 것처럼 일주일에 두세 번씩 생선을 먹어서 영양을 섭취해야 한다는 기준이 전 세계인에게 적용된다면 지금보다 바다가 서너 개는 더 있어야 한다" 아, 이 책은 강제 양식과 남획을 자행하는 인간의 탐욕에 의해 파괴되는 해양현실을 조명한 책인가보다. 그래서 이 책은 서두에서 '단 한 번이라도 물고기를 식품 아닌 생명으로 여긴 적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전에 나온 또 하나의 좋은 책, <헝그리 플래닛>(윌북, 2008)도 이 물음에 대해 생각해보라며 독자에게 '얼굴을 가진 동물들'을 보여줬었다. 또랑또랑한 눈을 가진 소와 돼지, 양들이 네모 반듯하게 잘라져 부위별로 포장되는 과정은, 적어도 그걸 보는 그 순간에는 '불편한 진실'로 다가왔었다. 그런데, '물고기'는 얼굴을 가졌나? 식물에게서 '얼굴'을 찾지 않듯, 물고기의 '통각(痛覺)'도 조금 상상하기 힘들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그 문제에 답하기 위해 '물고기의 생명'에 집중하기보다, '식량자원과 환경파괴'의 문제로 다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두렵도록 검푸른 바다와 물고기의 얼굴들을 떠올릴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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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고쿠도 2011-06-08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문화는 정치다>를 갖고 있습니다. 아직 읽지 못했지만...
재일조선인이 쓴 <다미가요 제창>이 참 끌리네요.

윈터 2011-06-08 20:48   좋아요 0 | URL
앗, 교고쿠도 님 반갑습니다.
<문화는 정치다>는 순전히 '문화정치'에 대한 오랜 관심과, '목수정'에 대한 최근의 관심, 그리고 '프랑스'에 대한 일시적 관심에 의해 선택했습니다 ㅎㅎ 읽어보고 싶어요.
<다미가요 제창>은 저도 기대가 되는데요. '재일조선인'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남성의 목소리들과 동질화되었던 '여성' 재일조선인 학자의 목소리를 들어볼 수 있을 거라 여겨집니다. 이미 일본에서는 많이 읽히고,여러 독자들에게 귀감이 된 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역자의 성실성과 영민함에도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고요. ^^

교고쿠도 2011-06-08 21:17   좋아요 0 | URL
사실 일본의 천황제 자체를 회의적으로 보고 있는 저로써는(저는 재일조선인들과 비슷한 정서를 갖고 있는듯 합니다), 저 책 반드시 읽어봐야겠어요. 서경식, 강상중, 이양지, 현월, 유미리, 양석일, 원수일, 이회성 등의 재일조선인이 쓴 책들을 서재에 한가득 꽂아두고 있습니다. ^^
(오죽했으면 도일해서 재일조선인 문학을 연구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국문학을 전공했지만...)

윈터 2011-06-08 22:06   좋아요 0 | URL
네. 이 문제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교고쿠도 님과 앞으로 유익한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을 것 같네요. ^^
 

<오늘의 교육> 2호(2011. 5)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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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들의 반란과 명륜동의 봄

-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생들이 보낸 ‘475시간’에 대한 기록


 

지난 겨울을 생각하니 벌써 온몸에 으슬으슬 한기가 느껴진다. 한결같은 찬바람을 맞아도 그게 결코 익숙해지지 않았던 겨울이었고, 나는 그때 기상예보를 유난히도 열심히 챙겨 봤다. 약한 바람, 센 바람, 더 센 바람, 비바람……. 나는 바람의 소리와 결, 그 속도와 세기를 열심히 관찰하게 됐고, 그에 따라 사람의 마음도 강해지거나 약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바람과 마음의 관계에 대한 이 이야기를 언젠가 꼭 글로 쓰고 싶었다.

   2011년 2~3월은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생들에게 아주 특별한 시간이었다. 뭐부터 써야 할까. 아와 피아彼我, 주관과 객관이 뒤섞인 시간. 먼저 우리의 ‘투쟁 아닌 투쟁’의 경위를 말해야겠다. ‘등록금 투쟁’, 약칭 ‘등투’, 속칭 ‘개나리 투쟁’. 아, 다 아는 얘기인가.

 

전야前夜, ‘마음이 소금밭’

 

   전쟁 같은 학기를 마친 후 겨우 만난 꿀 같은 방학이건만, ‘마음은 소금밭’이다. 휴가를 가거나 귀향한 사람은 없다. 세미나와 논문, 그리고 중단 없는 일, 일, 일……. 4,749,000원이라는 금액이 적힌 등록금 고지서를 받아 든 두 손은 떨렸고, 마음은 급했다. 작년에 비해 4.2% 인상된 금액이었고, 학부 인상률 3%를 훨씬 상회하는 수치였다. (그러고 보니 작년 이맘때도 학교 당국은 학부 등록금은 동결한 반면 대학원 등록금은 5.1%나 인상해 놓고, 등록금 동결을 통해 학생들의 고통을 분담했다며 대외홍보에 열을 올렸다.)

  

   그 숫자는 매우 비현실적으로 보였지만, 우리가 당면한 상황은 꽤 구체적이었다. 누군가는 대출 절차를 알아보느라 분주했고, 누군가는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이유로 세미나에 자주 결석했으며, 누군가는 소리도 없이 휴학했다. 그들이 지금까지 대학원에서 보낸 시간과 노력이 아까웠지만, 아무도 그들을 붙잡거나 나무라지 못했다. 교내 장학금은 등록금에 비해 턱없이 적고, 그나마 있던 인문학 장학금 제도도 폐지됐다. 학부 등록금 인상률은 정부 권고안에 따라 3% 미만으로 제한되어 있다지만, 대학원 등록금에 관해서는 아무런 규제도 없다. 그런 가운데 5년간 등록금이 무려 100만원이나 올랐다. 그런데도 달라진 건 없다. 학교 건물은 늘어만 가는데, 연구 공간은 여전히 부족하고, 개설된 수업 수는 적으며, 학생 복지는커녕 도서관에는 책도 없다.

 

   대학원생들이 등록금 투쟁을? 그런 말은 들어본 적 없다. 그나마 조금 불평이라도 할라치면, 곧바로 ‘대학까지는 국민 정서상 의무교육에 가깝다지만, 대학원? 니들이 선택한 거잖아!’라는 핀잔만 돌아올 뿐, 아무도 대학원생에게 관심 갖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안 움직이는 나약하고 안이한 부류들. 아무도 안 읽는 글을 읽거나 쓰는 데 홀로 만족하고, 교수의 심부름을 하느라 온 청춘을 다 보내도 끝내 저항하지 않을 자들. 시간강사들의 열악한 현실이 가까운 미래인 줄 알면서도 그저 참는 자들. 대학원에서 공부한다는 것이 꼭 죄짓는 것만 같다.

 

   언제까지 참아야 하나. 등록금을 대기 위해 일하다가 쓰러지거나, 대출 빚을 갚다 못해 자살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보도 기사는 거짓이 아니다. 우리는 죽어 가고 있다. 그래서 어느 날 누군가가 “뭐라도 좀 해봅시다!”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놀라거나 망설이지 않았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가칭 ‘박카스 프로젝트’가 시작된 건 2월 10일 즈음이었다. 모두들 힘들겠지만, 박카스라도 마시고 힘내 보자며 서로를 격려했다. 우리는 대학원생들이 더 이상 학교 당국의 부당한 요구에 순순히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로 했다. 그간 읽었던 책에 적힌 혁명과 진보에 대한 앎을 총동원해 우리는 열띤 토론을 벌였다. 1980~1990년대에 격렬했던 투쟁 사례들이 떠올랐지만, 우리는 그 기억에 쉽게 몰입하지 못했다. 우리는 ‘싸움’ 또는 ‘투쟁’이라는 역사적 용어의 사용을 의도적으로 꺼렸고, 대신 우리의 움직임을 ‘운동’이라 부르며 ‘혁명’과 유비했다. ‘투쟁’이 정의에 대한 열정과 특유의 배타적 폭력을 동시에 상기시키는 말이었다면, ‘혁명’은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지의 것이었고, 그 내용은 우리가 채워 나갈 것이었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 정서에 걸맞은 변화의 움직임을 만들고 싶었다.

 

   우리는 비민주적이고 불합리하게 책정된 문과대 대학원 등록금액인 4,749,000원에 반대하는 의미로 2월 16일부터 3월 7일까지 ‘475시간’ 동안 릴레이 1인 시위를 하기로 했다. 장소는 학교 본부가 있는 곳이자, 이 학교에서 가장 비싸고 상징적인 건물인 600주년 기념관 앞으로 정했다. 20일간의 짧지 않은 여정이 될 터였지만, 한 명이 하면 475시간, 10명이 하면 47.5시간, 20명이 하면 24시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475시간 릴레이 1인 시위 교대 시간표’라는, 세상에 없는 표를 만들었다. 각자의 시위 시간대가 적힌 네모 칸에 빼곡히 배치된 26명 동학들의 익숙한 이름들이 왠지 다르게 보였다. 그건 시각적으로 무척 아름다웠는데, 마치 세상에서 가장 뜨겁고, 가장 불온한 ‘성좌’처럼 보였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목표는 2011년도 등록금 동결, 대학원 연구 환경 개선, 총학생회의 반성과 쇄신! “춥고, 따분하고, 불쌍해 보일 수도 있지만 ‘즐겁게’ 해보자!”

 

싸움 혹은 축제의 시간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생 일동’의 이름으로 총장 및 각 부서 처장에게 우리의 운동 취지와 요구 내용을 담은 길고도 열렬한 편지를 발송했다. 어떤 말이든 좋다. 일단 답하시라. 그러나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일동’이란 정확히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라는 참으로 촌스러운 물음이었다. ‘주동자’, ‘배후’ 운운하는 걸 보니 근 십 년간, 이 학교의 일천한 운동 역사를 알겠다. 학교 당국이 이런 구닥다리 매뉴얼을 갱신할 수 있는 기회를 그동안 우리는 거의 주지 않았던 것이다.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2월 16일. 드디어 ‘등록금 인상 반대 475시간 릴레이 1인 시위’의 시작을 알리는 성명서가 교내 게시판에 나붙었다. 첫 타자가 별 어색함도 없이 거대한 건물 앞 벌판에 홀로 서 있고, 학우들이 “파이팅!”을 외치며 주먹을 불끈 쥐고 지나간다. 좋은 시작이다. 그런 격려가 ‘우리의 힘’이라는 걸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등록금은 학생대표들이 위원으로 참여한 ‘등록금심의위원회’(이하 ‘등심위’)와 협의로 결정한 것이니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등심위 자료 공개는 대학원 총학생회의 소임이므로 학교는 그에 대한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 등심위 자료의 산출 근거를 학생들이 알아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것, 신임 총장이 부임한 이 시기에 국문과 대학원생들의 움직임은 ‘분위기’를 해친다는 것, 등록금 동결이나 재협상은 절대 불가능하며, 대신 국문과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들어주겠다는 것이 학교 측의 주장이었다. 학교 측은 학생 대표가 제 목소리를 낼 수 없도록 구조화된 등심위 제도를 십분 활용했으며, 학생들의 소통 요청에 대해 고압적이고 불성실한 태도로 일관하거나, 국문과에 특혜를 주겠다는 식으로 우리를 교묘하게 회유하려 했다.

 

   그날 이후,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위하고 밤에 집으로 돌아와 온라인 선전을 하는 날들이 계속됐다. 나는 매일 시위 내용과 그에 대한 소회를 학과 게시판 및 각종 포털 사이트와 블로그, 트위터 등에 기록했다. ‘공감’과 ‘추천’, ‘좋아요’와 ‘리트윗’에 기댄 밤들이 외롭지 않았다.

 

   둘째 날. 영하 2도의 날씨에 시위 현장에 오롯이 서 있자니 어제에 이어 학교 측이 또 부른다. 어제와 똑같은 얘기를 하며 앉아서 커피 좀 마시란다. 하지만 이미 배부른 걸요. 밖에 서 있을 때, 학생들이 주고 간 캔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서요. 3일째 되는 날에는 대대적인 학회가 있었다. 여러 학교에서 오신 선생님들이 행사장으로 들어가며 우리를 본다. 웃으며 눈인사를 나눈다. 평소라면 우리도 학회장에 들어가 선생님들의 논문 발표를 열심히 들었겠지.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나. 아아, 만물이 흔들리는 금요일이다.

 

   시위가 계속되자, 현장에 놓아둔 서명철에 우리의 운동을 지지하는 이름들이 빈틈없이 적힌다. 낯모르는 학우들이 따뜻한 음료와 핫팩을 슬그머니 쥐어 주고, 홀로 선 내게 이런 저런 말을 건넨다. 그 감동을 전할 길이 없어, ‘1인 시위’ 말고 ‘프리 허그’를 할까 잠시 생각해 본다. 동아시아학과, 철학과, 사학과, 교육대학원 원우들이 앞 다투어 연대를 선언하며 지지성명서를 발표했다. “공부하고 싶다. 먹고는 살아야겠다. 이 어디쯤에 대학원생들의 현실이 있습니다.” ‘날 것’의 분노가 담긴 이 격문과 투서들이 교내 게시판을 사정없이 메웠다.

 

   6일째 되는 날에는 복잡다단한 절차를 거쳐 등심위 회의록을 ‘겨우’ 열람했다. 학교는 학부 3.1%, 대학원 4.1% / 학부 3.0%, 대학원 4.2%의 두 안을 등심위에 참여한 학부 총학생회장과 대학원 총학생회장에게 제시하며 선택을 요구했다. 이 안에 따르면 학부생과 대학원생은 마치 일종의 ‘부채 공동체’ 같다. 학교 측은 대학원 총학생회장에게 ‘선배로서 후배에게 양보할 것’을 제안하고, ‘의좋은 형제’는 그에 따르기로 한다. 뜨거운 모교애와 형제애가 흘러넘치는, 참으로 감동적인 텍스트다. 대학원 총학생회장은 학부 등록금을 3% 이상 올릴 경우, 우리 학교가 정부의 보조금을 받지 못하게 되며, 등심위를 통해 이 사안을 결정하지 못하면 등록금에 대한 의결권을 가진 총장이 더 높은 인상률로 등록금을 책정해버리기 때문에 불가피한 결정이었다고 해명했다.

 

   22일, 졸업식을 앞두고 학교 측은 또 한 번 우리를 부른다. “졸업식 날만이라도 시위를 중단해 달라. 너희가 외롭게 시위하는 모습이 학교의 대외 이미지를 해친다.” ‘브랜드 이미지’, ‘미래지향적 융복합 학문 지향’ 같은 학교의 과잉수사는 언제 들어도 허무개그 같아서 우리에게 아주 작은 충격도 주지 못하지만, 대신 역설적으로 큰 영감을 준다. 그렇다. 외로움은 우리의 무기다. 우리의 외로움이 부를 상식적인 동정과 행동이 학교는 많이 두렵다.

 

   27일에는 비가 많이 왔다. 텅 빈 교정에서 주룩주룩 쏟아지는 빗소리만을 벗 삼아 서 있자니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비장해진다. 과연 이 짓이 정말 ‘변혁의 무브먼트’인지 아니면 그냥 ‘개고생’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 오들오들 떨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이 잘 안 나와서, 일단은 그냥 뜨거운 김이 훅훅 나는 엄마손 칼국수 같은 걸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내 앞 주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릴레이가 끝나면 꼭 물어봐야지.

 

   3월 2일. 믿을 수 없지만 개강이다. ‘학생은 사실 개강을 위해 있는 건데, 난 왜 자꾸 학교가 답답하게 느껴질까. 나쁜 학생! 나쁜 학생!’ 하며 현장에 서 있자니, 신입생들이 와르르 와서 서명철에 꼬물거리는 글씨로 잘 못 알아보겠는 메시지를 써 놓고 간다. 무른 손가락을 가졌어도 실은 제법 단단한 이들이겠지. 한편, 우리의 면담 요청을 한사코 외면하던 신임 총장의 발언이 학교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려 우리의 전투력을 진작시킨다. ‘등록금 없으면 학자금 대출 받으라’(“비전을 통해 글로벌 리딩 대학으로 도약해야” <성대신문> 2011년 3월 2일)는 말씀. 대출 권하는 대학 총장이라니! ‘글로벌 리더’라서 그런지 과연 범인凡人들의 상식을 초월한다.

 

   드디어 3월 7일. ‘등록금 인상 반대 475시간 릴레이 1인 시위 종료 선언식’이 있는 날이다. 어젯밤에 게시해 둔 3차 성명서의 제목은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 아침부터 집에서 각종 자료를 준비하고 여기 저기 연락하느라 출발이 늦었다. 급히 택시를 잡아타니, 즐겨 듣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이 끝도 없이 나온다. 아, 내리고 싶지 않다!

 

   우리의 운동을 지지해 준 모든 연대 단위들과 함께할 종료 선언식을 알리는 초대장에 나는 이렇게 썼다. “475시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만큼 상식적인 시간 감각을 교란시키는 참으로 신비롭고 이상한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또한 추위와 긴장, 침묵과 소란, 분노와 외로움 등 그 시간을 구성하는 그 모든 성분들이 우리 몸에 각인된, 가장 물리적이고 구체적인 시간이기도 합니다. (……) 비바람 몰아치고, 가끔은 엷은 햇볕에 서 있는 등이 따뜻하곤 했던 475시간 동안 우리가 나눈 이야기와 눈맞춤, 그리고 희망을 기념하려 합니다.”

 

   색색깔의 피켓을 들고 도열한 우리 모습은 흔히들 우려했던 것과 달리 전혀 무질서하지 않았고 질서와 조화 그 자체로 보였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내줬는데, 그래도 그게 끝이라면 아마 울었을 게다. 하지만 우리의 움직임은 교내외에 널리 퍼졌고, ‘등록금 인상을 반대하는 학부생 모임’이 결성되어 우리의 시위를 잇겠다고 하니, 마냥 아쉽지만은 않았다. 내가 600주년 기념관 앞에 언제나 ‘홀로’ 서는 데도, 쉽게 내 자리를 알아보고 늘 같은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건, 그들이 항상 내 옆에 투명하게 함께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

 

끝나도 끝나지 않는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라고 외쳤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것만은 아니다. 열정은 더디게 자라고 냉정은 빠르게 온다. 이른 봄의 꽃샘추위도 늦겨울의 칼바람만큼 매서워서, 많은 이들이 지치고 상처받았다. 낯선 이들과의 연대에서 오는 긴장감, 점점 제도의 심층으로 육박해 가는 운동 방식, 학업과 생업, 그리고 운동의 병행으로 인한 부담은 누구에게나 버겁다. 누군가에게는 휴식이 필요하고,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필요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국문과는 이제 더 이상 혼자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의 운동을 지지해 준 여러 단위들과 함께 ‘성균관대 대학원 등록금 인상 반대 연대회의’를 출범했다. 이 기구는 등록금 최종 납부 기간인 3월 8일부터 11일까지 본부 앞에서 집회를 개최하는 등 2차 행동을 전개했고, 3월 22일에는 대학원 등록금 문제를 사회적으로 환기하기 위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안을 접수했다. 이제 남은 일은 비민주적인 기존 질서와 깊이 밀착되어 개인주의가 극도로 만연한 대학원 사회를 바꾸는 일이다. 식물화된 총학생회에 우리의 권익을 전가하는 것이 아닌, 대학원생 누구나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진정한 학생 자치 기구를 만드는 일이 절실하다. 그리하여 학교와 사회가 조장하는 구조악에 맞서 학생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움직임을 지속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더 이상 각종 미디어가 보도하는 고학생 드라마는 안 봤으면 좋겠다. 대학의 윤리와 정치에 대해 치열하게 사유하고 행동하지 않는 한, 대학원생은 여전히 ‘잉여’의 존재이며 그것이야말로 책에 대한 배반이다. 이것은 역설이 아니라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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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 05+06월호 차례

 

 





 

여는 글 선의의 경쟁은 없다  | 박복선

 

이계삼 선생님께 - 창간호 특집 ‘오늘날 학교 현장의 교육 불가능’에 대한 사유‘를 읽고 | 안준철

안준철 선생님께 | 이계삼

바라보다 | 최승훈 기자

‘동시대인’의 죽음, 동시대인의 ‘죽음’ - 당대 정치공동체 구성의 위기로서의 대학의 위기 | 엄기호

 

특집   대학의 교육 불가능

2011년 한국 교육, 야만의 지형도를 그리다 2

 

● 학문하지 않는 대학 | 문수현

● 대학, 악마와 거래하다 | 노영수

● ‘잉여’들의 반란과 명륜동의 봄 | 오혜진

●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 가난할수록 공부할 수 없는 | 서유정

● 괜찮다, 안 괜찮아도 괜찮다 | 최은정 기자

● 기업화된 대학 : 잔인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야만 | 정용주

 

인터뷰  정광필 전 이우학교 교장

이우학교, 8년의 실험을 이야기하다| 박복선, 이진주, 최승훈 기자

진보 교육감 취임 1년, 교육은 진보 중인가- 진보 교육감 시대와 교육운동 | 한만중

 

기획 - ‘가르치는’ 인권을 넘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 인권 교육 |민진(한낱)

인권적인 학교를 향한 한 교사의 고군분투기 | 이재익

  어느 새내기 교사의 죽음 | 김요한

학교부터 비정규직 없애야죠? | 조영선

“우린 괜찮다. 괜찮다” | 조용진

필요하면 네 곁에 있어 줄게 | 김윤희

일만 킬로미터를 돌아서, 다시 여기로 | 김정현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따라 움직인다 | 장덕균

 

리뷰

교육의 역할을 고민하다 -《왜 잘사는 집 아이들이 공부를 더 잘하나?》| 석영

천국으로 가는 모든 길이 천국이다 -《환대하는 삶》| 전성원

교과서 ‘너머’를 위한 교과서 다시 읽기 - 《교과서를 믿지 마라!》| 박진환

‘다른 세상을 위한 수사학’ 사용 지침서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박보름

슬픈 ‘개쉐이들’의 섬세한 내면, 그러나 까칠한 소통에 관하여 - 영화 〈파수꾼〉| 안정선

 



교실수업 이야기

교과서를 통해 보는 수업 풍경 | 이혁규

 

온고지신

불량정신의 찬란함 - 전쟁 중 ‘비행’에 관하여 | 후지타 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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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4 2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윈터 2011-06-05 17:19   좋아요 0 | URL
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쓰신다는 책 기대됩니다. 꼭 써주세요! 요즘 불붙고 있는 등록금시위가 더 커져서 큰 횃불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뭘 더 할 수 있나 고민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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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감옥에서 -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 돌베개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재일조선인들이 이렇게 어렵게, 곤란하게 사는지 몰랐다’ ‘관심이 모자랐다, 반성한다’ 이런 성실한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제가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런 게 아니거든요. 우리가 얼마나 억울한 상태에 있는지, 얼마나 일본인들한테 멸시받으며 살았는지 그런 게 아니에요.”

_ 박권일 ‧ 서경식,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는 건 나의 숙명」, 󰡔󰡕 240호, 2006. 6, 49면.

 

2006년 6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서경식은 자신이 쓰고 있는 재일조선인 문제나, 국가주의 ‧ 민족주의 비판과 같은 내용들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하다며 위와 같이 말했다. 이 말은 우리가 ‘서경식’이라는 텍스트를 읽을 때 쉽게 만나게 되는 의외(意外)의 지점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2011년 봄에 출간된 서경식의 새 책 󰡔언어의 감옥에서󰡕다시 한 번 내 이야기를 꼼꼼히 들어보라고, 그리하여 이 “성실한 오독”에 내재된 (무)의식과 피하지 말고 맞서보라고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이 책에서 새삼 알게 되는 놀라운 점은 식민 지배에 대한 증언과 청산, 해방과 동시에 ‘과거형’이 되었어야 할 식민지배라는 역사적 사실이, 실은 해방 이후에도 얼마든지 지속되었었다는 사실이다. 이 책에서 꼼꼼히 적고 있는 것과 같이, 1890년 10월 30일에 발포되어 조선인을 ‘충량한 신민’으로 정의했던 식민지배의 명제인 ‘교육에 관한 칙어’가 공식적으로 폐기된 것은 해방이 되고 나서도 3년이나 지나서인 1948년 6월 19일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증언한 사람이 나타난 것은 그보다 훨씬 오랜 후인 1991년의 일이다. 이는 우리가 흔히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마자 그 이전과는 판이한 세계가 펼쳐지거나, 그렇지는 않더라도 엄청난 변화와 갱신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쏟아졌으리라는 우리의 상식적인 믿음과는 배치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는 그간 ‘해방’을 낭만적으로 사유함으로써 식민주의에서 어서 벗어나고자 하는 피식민자의 욕망을 충족시켜 왔던 일례로 읽힐 수도 있다.

 

  이 ‘유예’된 청산과 증언의 시간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해방 이후 ‘즉각적으로’ 행해졌어야 할, 식민주의를 직시하고 그것에 균열을 내려는 작업들이 일어났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의 일이라는 것이라는 점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법적인 식민지배는 끝났지만, 해방 이후에도 ‘식민주의’는 엄연히 지속되었다고, 여기 그 시간을 온몸으로 살아온 ‘산 증인’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재일조선인의 삶이며, 이 책은 무엇보다 ‘재일조선인’의 육체에 각인된 명백한 ‘식민주의’에 대한 고발이다.

 

  그러나 저자에게 ‘재일조선인’은 언제나 놓을 수 없는 키워드이지만, 그는 이 존재가 딜레마적이라는 것을 안다. 한국에도 익히 잘 알려진 이양지라는 작가의 (무)의식을 통해 그가 밝히려 하는 것은, 우선 재일조선인 스스로 ‘재일조선인’이 아포리아의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감당해야 하는 고통과 그 윤리이다. 그것은 ‘재일조선인’ 자신이 스스로 소수자로서의 삶을 연민하고, 타자에게 동정을 호소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자신의 존재를 통째로 부정하고, “완전한 일본인”이나 “완전한 한국인”이 되는 것만도 능사는 아니다. 저자는 이 아포리아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만이 “재일조선인의 숙명”이라는 점을 아프게 묘사하고 있다. 그가 이양지를 “여동생”으로 묘사함으로써 ‘가부장적 비유’라는 비난을 받게 될 것마저 감수하면서도 이와 같은 발언을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양지는 그녀의 작품 󰡔유희󰡕에서 모국 ‘조선’의 소음에 동화되지 못하고 계속 거리감을 느끼면서도 끝내 조선에 붙들리듯이 매여 있는 재일조선인 상을 그렸다. 그러나 서경식이 보기에 이때 이양지는 “한국 사회의 시끄러운 소음과 목소리라는 표상”을 통해 ‘가난한 서민은 시끄럽다’는 일종의 계급적 스테레오 타입을 무비판적으로 되풀이함으로써 민족적으로는 연대하지만, 계급적으로는 연대하지 않는 재일조선인의 상을 그린 것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이양지가 재일조선인 상에 투영된 자기상을 나르시시즘적으로 극복하는 것을 경계한다.

 

  1부의 끝과 2부의 첫머리로 이어지는 프리모 레비와 장 아메리, 파울 첼란에 대한 글들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텍스트를 다룬 글이지만, ‘지금-여기’의 식민주의에 대해 가장 치열한 사유를 보여준 이 책의 ‘절정’이다. 그리고 동시에 ‘디아스포라의 언어’라는 관점으로 이들이 겪은 고통을 이해하려는 가장 새롭고도 성실한 시도이다. ‘모어 공동체’가 파괴되지 않았기에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돌아갈 곳이 있었던 프리모 레비, ‘모어 공동체’를 적에게 빼앗기고, ‘적’의 언어와 문화만이 남겨진 장 아메리, ‘모어 공동체’ 자체가 이미 다언어 ‧ 다문화가 혼재하는 곳이었던 첼란에게 겹쳐지는 ‘디아스포라’의 삶과 그 운명에 대해 논한 이 글들은 ‘일본적(日本籍)’과 ‘한국적(韓國籍)’, 그리고 사실상 난민과 같은 ‘조선적(朝鮮籍)’이라는 허구적 선택지에 의해 ‘절멸’되는 재일조선인의 삶과 적절하게 유비된다.

 

  ‘월경(越境)의 상상력’이 학계의 대안이자 유행이 되면서, ‘호모 사케르’라든지, ‘난민’이라든지 하는 말이 흔하게 되었지만, 한편으로 이 말들은 저자의 서술대로 마치 집시나 유목민(nomad) 혹은 코스모폴리탄 지향의 미래적 존재들로 낭만화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호모 사케르가 특정한 존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공모하여 초래하는 인류 공동의 존재 상태를 칭하는 데 반해, ‘난민’이 실재하는 존재라는 점은 잘 고려되지 않는 것 같다. “현대 세계는 ‘국민’만을 정회원으로 하는 회원제 클럽 같은 곳”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난민’은 명백히 제국과 자본이 초래하는 폭력과 소외의 산물이며, 바로 그것을 존재 그 자체로 증언하는 ‘희생양’이자 ‘산 증인’이 바로 ‘재일조선인’으로 대표되는 디아스포라의 삶이다.

 

  그래서 서경식은 ‘국민을 그만두거나, ‘국민’으로서 국가를 바꾸는 권리이자 의무를 행사하는 것’이 가능한 답안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국민’을 그만두는 것은 ‘국민’이 되는 것보다 더 어렵다. 그리고 ‘탈국민주의’를 상상하는 것과, ‘국민’으로서 타자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것은 윤리의 문제다. 와다 하루키, 우에노 지즈코, 하나자키 고헤이, 박유하 등에 대한 비판은 이를 세심하게 의식하며 행해진, ‘일본’이라는 국가에 귀속된 존재로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국가’와 동일시하는 내셔널리즘을 비판해온 ‘시민 리버럴’ 세력의 논리에 대한 비판이다. 이들은 일본 극우파가 아니라 소위 ‘양심적 지식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인데, 이들에 대해 저자가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이유는 자명하다. 이들의 논리가 ‘식민주의’에 대한 제국 일본의 책임 문제를 논할 때면, “내셔널리즘 비판과 전후 책임 회피의 뒤집어진 결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국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박유하 현상은 특히 문제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박유하는 한일 간의 ‘화해’를 가로막는 것은, 일본의 불충분한 사죄 때문이라기보다는 한국의 내셔널리즘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서경식이 보기에 이는 일본 출판계에서 상품성을 획득함은 물론, 국가주의와 공모하는 일본 시민 리버럴리스트들에게 자기긍정을 확인시키는 역할을 자임하는 것으로, 피식민자에게 내면화된 명백한 식민주의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박유하가 화해의 주체로 상정하는 ‘우리’로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재일조선인이 완전히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박유하의 이러한 주장을 가장 합리적이고 성숙한 것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일본 지식인들의 인식체계 이면에는, ‘국가주의’와 ‘국민주의’를 똑같이 ‘내셔널리즘’이라고 칭함으로써 양자의 공모 지점을 흐려버리는 반지성적 욕망이 개입되어 있음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그리고는 ‘‘국가’로부터 자유로운 ‘리버럴리즘’이 있을 수 있는가’라는 일본 시민 리버럴리스트들이 의도적으로 방기하고 있는 질문을 드러냄으로써 그들이 주장하는 논리의 기만성을 에누리 없이 드러낸다.

 

  이 책이 나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신문󰡕 4월 18일자(「서경식 교수의 ‘일본 리버럴’ 비판, 이의 있다」)에 박유하의 반론이 실렸다. 서경식의 책에 대한 리뷰의 형식에 매여 있는 이 지면에서 박유하의 반론을 언급하는 일이 적당치 않을 수 있지만, ‘충실한 서평’으로서 ‘연루된’ 텍스트를 읽는 정도로 박유하의 글을 언급해두고자 한다. 이 글에서 박유하는 서경식이 지적한 ‘화해의 논리’에 대한 재반박은 하지 않은 채, 그녀의 책이 ‘한국측에 일본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차원에서 쓰여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테면, 그녀는 일본측이 법적 책임은 지지 않았지만, 대신 ‘도의적 책임’을 지기 위해 ‘아시아여성 국민기금’이라는 만들어 위안부 피해자의 절반 정도가 보상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한국측이 모르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 기금의 의도에 개재된 ‘정치성’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으며, 서경식의 주장은 그 의도를 식민주의적이라며 비판하는 측에서 제기된 것이라는 점이 그녀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서경식이 앞서 제기한 것과 같이, 이 기금의 정치적 의도, 그리고 법적/도의적 책임이라는 구도를 사유하는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야말로 박유하가 답해야 할 문제일 텐데 이 글에서는 그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또한 그녀는 곧 ‘일본 우파’를 비판하는 책을 쓸 예정이라며 ‘균형적 시각’을 강조했는데, 이 역시 서경식이 지적한 ‘일본 우파를 비판함으로써 실은 그를 배척하면서도 그와 공모하는 일본 시민 리버럴 세력의 요구에 부응한다’라는 지적에 대한 답변은 아니다. 게다가 서경식은 그녀의 한국어판 책과는 달리 일본어판에는 “일본의 지식인이 자신에 대해 물어오던 만큼의 자기비판과 책임의식은 지금껏 한국은 가진 적이 없었다.”라는 문장이 첨가된 것을 들어, 그녀의 책이 일본의 자기긍정 욕망에 영합할 의도가 있었음을 지적한 바 있는데, 박유하의 반박문에는 이 문제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다.

 

  서경식의 논리는 자명하다. “그는 국가주의의 폭력을 혐오하면서도, 디아스포라에게 그런 국가의 보호가 또 얼마나 절실한지도 뼈저리게 알고 있다.” (󰡔󰡕 240호, 53면) 요컨대 그는 내셔널리즘 비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셔널리즘 비판의 관념론적 기만성을 비판하고 있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국가’나 ‘국민’에 대한 귀속의식을 부정했다고 해서 ‘국민’을 그만둘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에노 치즈코의 논의에서 보듯, 역사성을 고려하지 않은 내셔널리즘 비판은 언제든지 역사를 사상시키려는 ‘극우적’ 주장과 만날 수 있다. 이 지점에 대해 충분히 민감하게 사유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논리는 국가와 국민으로부터의 혜택은 누리면서, 국가주의와 국민주의를 비판하는 것으로 현 체제의 안정을 오히려 공고화하는 담론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기만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다카하시 데쓰야는 말한다. “나는 일본 내셔널리즘을 비판하면서 그러나 동시에 일본인으로서의 책임을 지는 것을 긍정하고 싶다. (...) 내가 여기에서 ‘일본이라는 정치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공적 ‧ 정치적 존재, 따라서 우리들 자신의 정치적 행위를 통해 바꿀 수 있는 존재라는 측면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물론 의문은 남는다. 저자는 한나 아렌트의 ‘죄’와 ‘책임’ 개념을 들어, ‘죄’는 전쟁 당사자들에게 해당하는 것이라 해도, 당대의 무사유(thoughtlessness)한 일상적 개인들, 그리고 후속 세대인 ‘일본인’들 역시 ‘책임’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 개념틀은 유보적 혹은 제한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이 든다. 이같은 ‘죄-개인 / 책임-집단’이라는 도식에서 ‘죄’는 ‘법적 개념’으로서만 상정된다. 그러나 ‘개인/집단, 도의적 책임/법적 책임...’ 이러한 이분법적 틀로 한일 간의 청산과 반성의 방식을 고정화시켜 설명해도 되는 것일까. 이 틀은 ‘전범’과, 그와 구분되는 말단 식민관료, 일상인, 당대의 식민지배에 가시적이고 실질적인 ‘저항’을 했던 개인, 또는 후속 세대 간의 관계를 규정할 수 있는 한 가지 틀은 되지만, 어쩌면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관념적일 수도 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전범은 ‘죗값’을 치르고, 나머지는 ‘책임’을 지라고 할 때, 두 가지 문제가 생긴다. ‘죗값’을 치른다는 것은 구체적인 것이지만, ‘책임’을 지라는 것은 추상적인 언설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다시 책임의 소재와 내용 등이 사상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물론 저자는 여기서 ‘책임’이란, “정부로 하여금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하도록 요구해야 할 정치적 책임”이라고 말하고 있긴 하다. 그러나 이 “정치적 책임”을 지는 주체는 또다시 개인과 집단의 분할을 요구할 것이다. 그는 범국민적 청원운동 같은 것을 상정한 것일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면 다른 어떤 방식이 가능한가.) 서경식은 이 책에서 법적 책임을 우위, 도덕적 책임을 하위로 고정시키는 위계를 주장한 적이 없다. 오히려 “범죄의 책임을 묻고 보상을 하기 위해서는 ‘법’의 상위 개념으로서 ‘도의’를 문제 삼아야 한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 같은 ‘도의’에 근거해 새로운 법을 세움으로써 ‘도의적 책임론’은 새로운 ‘법적 책임’으로 이어진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때 ‘책임’이 언제나 ‘죄’와 ‘구별’되는 한정적, 분리적 수사로 기능하게 된다는 지적 또한 피하기 어렵다.

 

  또 한 가지는 이러한 도식이 ‘전범’들을 제외한 그 ‘나머지’들을 동질화하게 된다는 점이다. 당대 일상적 개인으로서 전쟁에 참여한 사람과, 전쟁에 맞서 실질적인 저항을 한 사람들, 또는 당시에 아예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들이 ‘국민’으로서 져야 할 어떤 것 등을 모두 포괄하기에 ‘책임’이란 빈약한 개념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즉 ‘책임’이란, 식민지배와 무관하지 않음, 즉 ‘연루됨’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정당한 개념이지만, ‘죄’처럼 ‘수행성’을 갖지는 못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죄’와 같은 오직 ‘법적’인 행위만이 가시적이고 실질적인 것이라는 뉘앙스를 주는 이 이분법적 개념틀보다 더 적절한 개념을 계발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서경식의 미덕이자 윤리는 ‘타협하지 않는 것’에 있다. 그는 사과의 윤리에 대해 사고하지 않는 어떤 자유주의적, 포스트모던적 견해와도 타협하지 않는다. 최근 한일 간의 관계를 “서로”나 “공생”과 같은 연성화된 수사들로 갈음하려는 ‘가짜 화해’를 그는 경계한다. 과연 그러한 ‘상호책임’의 수사들을 말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그는 어떤 욕망과 사유의 메커니즘을 통해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를 사유함으로써 그것이 진정한 화해가 아닌 기만과 폭력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 그래서 이런 ‘화해’란, ‘부족’하거나 ‘불완전한’ 화해라서 나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것이야말로 ‘식민주의’의 진화태로서 행해지는 ‘폭력’이라는 점을 그는 강조한다.

 

  4부에 실린 최현덕과의 대담은 ‘디아스포라의 눈으로 통일’을 보기 위해 행해진 것으로, 서경식의 ‘꿈’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이 대담에서 ‘단순한 민족통합이 아니라, 언어적, 혈통적으로 다원주의를 채용하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해방된 열린 나라’에 대한 구상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 서문에서 그는 “지나치게 자유로웠”다고 술회하며, 대담자 역시 ‘유토피아’ 같은 이야기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그의 꿈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가 꿈꾸는 그 ‘섞임’과 ‘열림’의 사회란, 실은 그 ‘섞임’ 속에서 강고한 위계질서를 내포하는 미국식 다원주의를 모델로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같은 ‘용광로의 정치학’을 경계하는 한, “동아시아의 아지트”를 꿈꿀 수 있는 자격이 ‘조선’에게는 있다는 그의 말은 정당하다.

 

 

  프리모 레비와 서경식의 닮은 점은, 둘 다 역사적 질곡의 산 증인, 즉 ‘디아스포라’의 존재로서 떠맡은 ‘증언’이라는 임무 그 자체에만 있지 않다. 프리모 레비가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행위가 과거 나치의 폭력을 재생산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는 점을 말해야 했던 것처럼(그리고 절망해야 했던 것처럼), 서경식 역시 지금의 한국이 베트남, 그리고 이주 노동자들에게 과거 제국 일본이 행했던 식민주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또한 절망하면서 말하고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그 둘은 같다. 그들이 ‘모국을 향해’ 증언하다가 절망했음에 유의하자.

 

  그의 책을 소개할 때 “재일조선인의 초상”이라든지 “디아스포라의 눈으로 본”이라는 부제가 지니는 ‘상품성’이 시효를 다하는 날을 상상해본다. 가장 위험한 것은 이같은 서경식의 관점을 ‘디아스포라의 관점’으로 분리해서 사고하고 소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디아스포라의 아이덴티티를 지녔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가 내놓는 국가주의와 국민주의, 그리고 식민주의에 대한 해석과 비판은 비단 ‘재일조선인’이라는 한 ‘소수자’의 입장을 설명하는 데에만 유효한 방식이 아니라, 바로 우리 모두가 도전하고 있는 그 폭력적인 전장의 최전선에서 제출되는 의견으로 읽혀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를 프리모 레비처럼 죽게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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