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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만 Feynman
짐 오타비아니 지음, 이상국 옮김, 릴런드 마이릭 그림 / 서해문집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래, 내가 속한 분야가 '인문/사회/.... 그리고 무엇보다 과학!' 분야인 걸 잊고 있었지. '과학'책이 왔다. 그런데 의외로 신은 역시 조금은 자비로우신 건지, '과학'책이지만, '만화'책을 주셨다. 얇고, 표지가 예쁜! 파인만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갑자기 회가 동했고, 두려움 없이 읽어내려갔다. 읽은 결과가 어땠는지는 나중에 말하겠다. 우선, 책 뒷표지에 쓰여 있는 '그래픽 노블'이란 명칭에 대해서 말하겠다. 무식하게도 이 책을 만화책이라고 생각했던 내게, 이 책이 '그래픽 노블'에 속한다는 사실은 새로웠다.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 바로 검색을 했더니 그 정의는 이랬다.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은 만화책의 한 형태로, 보통 소설만큼 길고 복잡한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단편 만화의 앤솔로지를 그래픽 노블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래픽 노블은 대체로 보통의 만화 잡지보다 튼튼하게 제본되어 있으며, 인쇄 도서와 같은 재료와 방법으로 만들고, 가판대보다는 서점이나 만화 가게 등지에서 찾을 수 있다."(위키백과)  그러니까 만화책보다는 소설로 쓸 법한 길고 복잡한 이야기를 만화로 그리면 '그래픽 노블'이 된단 말이지. 당연히, 성에 차지 않는다.  이 정의는 이 만화책을 칭하는 명칭에 왜 '노블'이 동원되는지는 말하고 있지만, 왜 '그래픽'이란 말이 들어가는지는 말해주고 있지 않다.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그래픽'에 일가견 있고 동시에 '자비롭기까지 한' 제현의 가르침을 구한다. 아무튼, 그런데 어떤가 하면, 한 인간의 일대기란 원래 뭐로 쓰든 '길고 복잡한 이야기'이기 마련이지 않은가. 바꿔 말하면, 이 책이 그래픽 노블로 쓰여진 건,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 그러니까 '그래픽 노블'의 개성은, 도대체, 어디서 찾아져야 옳단 말인가, 하는 이야기. 

 

# 컨텐츠에 대해 말해볼까. 이런 책이 아니라면, '파인만'에 대해서는 전혀 알 리가 없었던 한 중생을 무지와 미몽에서 구출했다는 것. 그것은 역시 '만화'의 위력이다. 그런데 그 이상이라면 이야기할 것이 별로 없다. 파인만이 누구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특히 역시 파인만과 같이 다재다능하고, 준천재에 가까울 것이 틀림 없는 과학자이자 저자인 '짐 오타비아니'의 '입장'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약간 호감인) 정재승 교수는 파인만을 두고 '괴팍하거나 기괴한 천재'가 아닌 '매력적인 천재'라고 극찬했는데, 그에게 이런 기준이 무슨 의미인지도 잘 알 수 없다. 파인만이 노벨상을 탔고,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했으며, 대중적인 과학책을 써냈고, 음악과 미술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금고를 여는 것과 같은 '잡기'에까지 능했던, 팔방미인이었다는 건 알겠다. 그런데 이런 사실들이 뭘 말해주는 걸까. 그는 자유롭고 창발적인 사고를 가졌고, 여자들이 매력을 느낄 만한 퍼스널리티를 가졌으며, 동시에 '순정'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유창한 미국식 유머를 적재적소에 구사하는, 멋진 인간. 아, 써놓고 보니 이렇게만 해도, 이 책은 많은 걸 말했다. 그렇지만, 어떨까. 세계적인 물리학자의 삶에서 독자들은 뭘 보길 원할까. 상기한 모든 것들이 포함될 것이다. 하지만 예를 들어,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한 그의 반성을 그리는 대목을 보자. 반성은 아주 쉽고, 빠르게 그려진다. 실존적으로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니까 반성이 쉽고 빨랐던 것은 아마도 파인만이 아니라, 오타비아니 아닐까. 히틀러가 원자폭탄을 가질 것을 대비해 미리 미국의 원자폭탄을 만드는 데 참여한 그의 고민 같은 건 좀 더 섬세하게 그려져야 될 것이 아닐까. 매력적인 물리학자는 당연히 스스로가 '집행'만을 행하는 '테크노크라트'가 아님을 자각하는 이여야하기에. 그런데 어떨까. 그는 너무 똑똑해서 그 개발사업에 빨려들어갔고, 뒤늦게 그 의미를 깨달았노라고 발랄한 필치의 만화는 말하고 있을 뿐이다.  

 역시, 한 인간의 일대기를 서술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가 흔히 보는 '외곬수'형의 학자가 아니라는 사실만으로 그는 '매력적인' 인간이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요즘 너무 쉽게 롤모델을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미디어는 언제나 새로운 '롤모델'을 개발해서 독자에게 제공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것 같다. '롤모델'이라는 상을 폐기처분할 수 없는 한, 아니 그러한 상을 설정하는 것이 우리가 '잘' 사는 데에 있어 약간의 긍정적인 효과를 자아낸다고 믿는 한, 우리는 한 인간을 이해하는 작업에 언제나, 충분히, 공을 들여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이해'의 내용을 더 잘 말할 수 있기 위한 '양식'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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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격월간지 <오늘의 교육>에서 청탁받아 썼던 글이 

그간의 다른 특집글들과 함께 책으로 묶여 나왔습니다.

글이 쓰여졌던 그때를 생각하면 갑갑하기만 한데,

이상하게도, 다시 볼 기회가 자꾸만 생기네요.

 

함께 실린 다른 글들의 면면을 보니, 이 시대 교육현장이 생생히 보일듯 합니다.

책 정보와 목차를 아래에 옮겨놓으니 참고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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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불가능의 시대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회 (엮은이) | 교육공동체벗 | 2011-10-10



오늘날 학교 현장의 교육 불가능을 말하다. 오늘날 지옥으로 변해 가는 교육 현실을 정직하게 드러낸다. 1부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우리 교육에 미친 영향과 교육 주체들의 내면의 변화를 추적한다. 신자유주의 광풍 속에서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부모는 경쟁과 자기 계발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며 신자유주의적 주체로 거듭난다.

2부에서는 주류 경쟁 속에서 소외되고 추방당했던 학생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학교는 경쟁을 따라오지 못하거나 저항하는 이들을 밖으로 쫓아내면서 체제를 유지해 왔을 따름이다. 학교가 표면적으로라도 모든 아이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다.

3부에서는 신자유주의적 모순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공간인 대학의 교육 불가능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시장의 논리가 학교를 지배하면서 대학은 더 이상 진리를 탐구하는 곳이 아니게 되었다. 천문학적인 등록금을 대기 위해 알바를 하느라 정작 해야 할 공부를 하지 못하는 가난한 학생이 부지기수다. 치열한 생존경쟁은 학생들을 원자화하여 연대할 수 없게 한다. 대학 문제에 대한 바른 진단과 처방 없이는 교육개혁의 방향을 잡기도 어렵고, 대안적 삶과 사회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도 없다. ‘교육 불가능’을 이야기할 때 대학 교육에 대한 비판을 늦출 수 없는 이유다.

 

<목차>


책을 펴내며

1부 신자유주의는 우리 내면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나
014 오늘날 학교 현장의 ‘교육 불가능’에 대한 사유 | 이계삼
031 달리는 신자유주의 열차에 ‘우리’라는 좌석은 없다 | 정용주
050 ‘매니저 엄마’의 탄생과 신자유주의적 교육개혁 | 박소진
062 신빈곤, 혹은 외환 위기의 아이들 - 비유예, 비훈윤적 문화 | 민가영

2부 모두를 위한 학교는 없다
076 학교가 버린 아이들, 학교를 버린 아이들 | 채효정
095 문제아 홀로코스트 - 남양주 K고 무더기 퇴학 사태 |혜원
111 “선생님, 우리 반에서 공부하고 싶어요”  - 장애 학생들이 학교에서 경험하는 배제와 차별 | 류경원
122 학교에 학습 부진 학생은 없다! - 학교 부진아 정책 실태 보고서 | 정용주
141 아이들은 실패할 권리가 있다 - 흔들리는 아이들, 하지만 꽃보다 아름다운 아이들 | 이미연
160 될성부른 떡잎들만을 위한 세상  - 명품교육도시 K군에서 보낸 비교육적 나날들| 최은정

3부 대학의 교육 불가능
174 학문하지 않는 대학 | 문수현
184 대학, 악마와 거래하다 - 두산그룹의 중앙대 인수 그 이후 | 노영수
199 ‘잉여’들의 반란과 명륜동의 봄 -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생들이 보낸 ‘475시간’에 대한 기록| 오혜진
208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 가난할수록 공부할 수 없는 | 서유정
224 괜찮다, 안 괜찮아도 괜찮다 - 어느 운 좋은 예비 졸업생의 취업 성공기 | 최은정
236 카이스트의 유령들 - ‘동시대인’의 죽음, 동시대인의 ‘죽음’ | 엄기호

에필로그 : 교육 불가능의 시대, 가르친다는 것은
260 이계삼 선생님께 | 안준철
273 안준철 선생님께 | 이계삼
284 ‘교육 불가능’과 《녹색평론》적 사유에 대한 소고小考 | 윤지형

 
<책 내용 소개>


오늘날 학교 현장의 교육 불가능을 말하다

신자유주의 광풍 속에서 경쟁과 자기 계발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는 교육 주체들,
살벌한 경쟁에서 낙오하고 학교에서 배제되고 추방당하는 학생들,
더 이상 학문은 하지 않고 취업 학원으로 변한 대학….
오늘날 한국 교육은 사실상 교육 불가능한 현실에 처해 있다.
하지만 교육 불가능을 넘어 희망의 페다고지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바로 이 어두운 현실을 직시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오늘날 학교 현장의 교육 불가능을 말하다

오늘날 학교는 사실상 ‘교육 불가능’의 공간이 되었다. 아이들은 수업을 외면하고, 교사에게 대들고, 잠을 잔다. 아이들끼리의 먹이사슬은 더욱 공고해지고, 폭력과 일탈은 더욱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간다. 우등생은 학원에서 공부하고 열등생은 친구들 만나는 재미 하나로 학교에 간다. 한 해에 7만 명이 학교에서 밀려나는데, 이렇게 밀려난 아이들의 상당수는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알바를 하며 연명하거나 성性산업에 편입된다. 학교는 좌절의 공간이고, 세상은 혼자 힘으로 헤쳐 나가야 할 정글이다.
교사들도 학생들만큼 무기력하다. 교사 집단을 관통하는 안락의 정서는 더욱 짙어지고 있다. 교사는 신자유주의적 교육개혁을 통해 ‘자기 혁신’이라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되고, 강화되는 평가 시스템 속에서 지식인으로서 정체성도 교육자로서 책무감도 내버린다. 일제고사로 대표되는 학교 간 경쟁이 강화되면서 교사들은 오로지 학생들의 성적으로 평가를 받게 되고, 결국 거대한 경쟁 시스템의 부속품이 된다. 전인교육은 고사하고 입시 교육에서도 주도권을 학원에 빼앗긴 교사들은 그저 학생들 스펙이나 정리해 주는 관리자로 전락했다.
그러므로 학부모는 학교와 교사가 방기한 몫을 떠맡아야 한다. 학부모는 아이가 일탈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야경夜警이자, 학교 안과 밖의 모든 자원을 총동원하여 스펙 쌓기에 전념할 수 있게 스케줄을 관리해 주는 매니저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아이를 명문대에 보내 놓지만 정작 아이들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어른이 된다.

아프지만 솔직한 교육 현장의 목소리들

이 책은 오늘날 지옥으로 변해 가는 교육 현실을 정직하게 드러낸다. 1부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우리 교육에 미친 영향과 교육 주체들의 내면의 변화를 추적한다. 신자유주의 광풍 속에서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부모는 경쟁과 자기 계발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며 신자유주의적 주체로 거듭난다. 2부에서는 주류 경쟁 속에서 소외되고 추방당했던 학생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학교는 경쟁을 따라오지 못하거나 저항하는 이들을 밖으로 쫓아내면서 체제를 유지해 왔을 따름이다. 학교가 표면적으로라도 모든 아이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다. 3부에서는 신자유주의적 모순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공간인 대학의 교육 불가능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시장의 논리가 학교를 지배하면서 대학은 더 이상 진리를 탐구하는 곳이 아니게 되었다. 천문학적인 등록금을 대기 위해 알바를 하느라 정작 해야 할 공부를 하지 못하는 가난한 학생이 부지기수다. 치열한 생존경쟁은 학생들을 원자화하여 연대할 수 없게 한다. 대학 문제에 대한 바른 진단과 처방 없이는 교육개혁의 방향을 잡기도 어렵고, 대안적 삶과 사회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도 없다. ‘교육 불가능’을 이야기할 때 대학 교육에 대한 비판을 늦출 수 없는 이유다.

교육 불가능을 넘어 희망의 페다고지로

이 책은 ‘교육 희망’이 아니라 ‘교육 불가능’이라는 언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이것은 좌절의 언어가 아니라 ‘래디컬한 희망’의 언어다. 희망은 현실을 정직하게 보는 데서, 현실의 교육 불가능성을 고통스럽지만 인정하는 데서, 그리고 새로운 철학과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학교가 교육 불가능의 공간이 되어 가는 상황은 이런 현실이라도 유지되어야 할 이유가 있는 이들이나 학교를 통해 무언가 물질적 이득을 챙기려는 이들에게는 확실히 재앙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진정한 교육의 의미와 한국 교육의 현실 사이의 괴리로 괴로웠던 이들에게는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교육 불가능을 넘어 희망의 페다고지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바로 이 어두운 현실을 직시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글쓴이>

혜원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soul1905@hanmail.net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서 활동하며 십대의 끝자락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권을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반짝이는 사람입니다.

최은정 교육공동체 벗, 오늘의 교육 기자 eunja17@naver.com
30분에 한 번 있는 버스를 놓치면 읍내까지 40분을 걸어가야 하는 시골에서 19년을 살고 서울에 왔습니다. 대학 4년 동안 친구들과 교육 잡지 같지 않은 교육 잡지를 만든 게 대학에 와서 연애 다음으로 잘한 일 같습니다. 재밌는 교육 잡지를 만들고 싶다던 꿈의 첫걸음을 <교육공동체 벗>에서 이제 막 시작했습니다.

채효정 학벌없는사회 운영위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강사 measophia@naver.com
공부하는 사람, 실천하는 사람, 그리고 ‘엄마’입니다. 셋을 다 하려니 셋 다 늘 제대로 못하고 삽니다. 그래도 그 셋으로 살고자 합니다. 2000년부터 <학벌없는사회> 활동을 시작하여 10년째인 2010부터는 ‘학교 밖 청소년과 함께하는 인문학교실 - 삶은 달걀?’이란 프로그램을 통해 학교 밖 청소년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정용주 서울 백석초 교사,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edcom234@hanmail.net
어른이 되어 가면서 점점 세상에 대한 질문이 사라져 버리지만 그렇다고 습관처럼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완성된 무엇을 만들어 인정받기보다 시도하고 그러다가 깨지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미연 전 중등교사 oliveyeon@hanmail.net
21년 6개월을 끝으로 결국 학교를 자퇴하고 말았습니다. 퇴직을 결심하고 지낸 지난 몇 달 동안 이별할 것을 알고 사랑하는 일이 참으로 슬프다는 걸 알게 되었으며 학교를 떠나간 수많은 제자들의 심정이 비로소 날것으로 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가지 말라는 아이들의 부름을 뒤로하고 ‘용기를 내어 그대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결국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폴 발레리)는 말을 가슴에 새기며 이제 뚜벅뚜벅 새로운 길을 찾아 걸어가려고 합니다.

이계삼 경남 밀양 밀성고 교사,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ygs0720@hanmail.net
경남 밀양에 있는 밀성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일하며,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입니다.
여러 매체에 교육과 사회에 관한 글을 쓰고 있으며, 이를 묶어서 몇 권의 책을 냈습니다.

윤지형 부산 내성고 교사 besanson@hanmail.net
‘진리를 등불 삼고 나를 등불 삼으라’는 붓다의 가르침을 생각하곤 하는 부산의 국어 교사입니다.

오혜진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ohae@hanmail.net
식민지 시대 문화론 같은 걸 공부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하루 종일 손바닥이 노래지도록 귤 까먹으며 드라마를 볼 수 있는 지상낙원을 꿈꿉니다. 등록금 투쟁을 하면서 착하고 똑똑해졌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고는 크게 고무됐습니다. 운동이 존재를 바꾼다는, 그 말을 믿습니다.

엄기호 연세대 문화학 박사과정 수료,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uhmkiho@empal.com
최근까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는 세계 민중들의 싸움을 한국에 알리는 일을 주로 해 왔습니다. 여전히 저항과 교육을 연결시키며 아이들을 자율적인 주체로 키우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연세대학교 문화학과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며 대학에서 문화인류학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인권연구소 ‘창’과 우리신학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있으며 급진적인 인권 담론을 만드는 것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펴낸 책으로 《닥쳐라 세계화》,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등이 있습니다.

안준철 전남 순천 효산고 교사 jjbird7@hanmail.net
남녀공학인 전문계고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정년이 5년도 채 남지 않은 늙다리 교사지만 정신연령은 그보다 한참 아래입니다. 저는 학생들 앞에서만 제 자신이 안심이 됩니다. 하여, 다시 태어나도 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한 희망이 있다고 믿고 싶은, 조금은 시대에 뒤떨어진 낭만파 교사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서유정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예비 졸업생 chloecre@gmail.com
너무 용감하고 씩씩해서 무서워 보일 수도 있지만 알고 보면 소녀 감성. 가끔은 생각이 너무 많아서 사는 게 힘든 스물넷. 결국은 취업 준비를 하고 있지만 여전히 대학원을 꿈꾸며 고군분투.

박소진 연세대 강사 sojin618@gmail.com
일리노이대학에서 문화인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그동안 연세대학교 등에서 문화인류학, 여성학, 질적연구방법 등을 강의해 왔습니다. 한국 어머니의 자녀 교육, 대학생의 해외 연수 등 자기계발 실천에 대해 신자유주의적 변환과 연결하여 연구를 해 왔고, 최근에는 중국인 유학생에 대한 연구를 진행 중입니다. 일상 속에서 사람들이 스스로 치유하면서 자기 삶을 변화해 나가는 여정에 대해 호기심이 많습니다.

민가영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 gendertrouble@hanmail.net
신자유주의 시대 언더클래스 10대들의 주체에 관한 연구를 했고 그 문제의식을 이어 받아서 인간들 간의 관계성을 끊어 버리고 개인화시키려는 새로운 권력의 작동 방식에 대한 대안을 ‘인간 존재에 관한 조건’에 대한 연구를 통해 구체화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문수현 서울대 영문과 석사과정,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anfuq@naver.com
2004년에 대학에 입학해 지금은 영문과 대학원생으로, 학교에 머문 지 7년째입니다. 학회와 동아리 활동에서 배운 것들이 수업에서 얻은 것들보다 유익했고, 논문을 쓸 때보다 학생자치언론 《교육저널》에 글을 쓸 때 더 많은 성장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학문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대학에 대한 깊은 애증 속에서 더 올바른 배움을 향한 갈망을 길어 내길 희망하면서.

류경원 서울 영남초 특수학급 담당 교사 jayunari@hanmail.net
특별한 교육적 지원이 필요한 학생들에게 진정한 도움을 줄 수 있는 특수교사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성장 중입니다.

노영수 중앙대 독어독문학과 학생 dogmaspiel@hotmail.com
지난 2010년, 중앙대의 기업식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다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퇴학 무효 소송에서 승소했지만 바로 학교로 돌아가지 못한 채 다시 14개월의 정학 처분을 받았고 징계 기간이 모두 지난 2011년 2학기부터 다시 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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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암살이라는 스캔들(나이토 치즈코,  고영란 역, 역사비평사)

  

 '암살' 사건을 다룬 일본 메이지시대 미디어 서사의 욕망을 다룬 책이다, 라고 간단히 정리할 수도 있겠지만, 식민지 시기를 공부하고 있는 내겐 여러 모로 꼼꼼히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그 자체로 공부가 될 뿐 아니라, '담론 연구'라는 방법론 자체에 대한 성찰의 가능성도 동시에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일본 메이지 시대 신문기사를 읽는다는 건, 식민지 조선의 관제 매체와, 당국의 영향을 지배적으로 받았던 민간매체를 주된 사료를 삼았던 한국의 연구자들에게 확실히 '외부'를 제공한다. 제국의 신문지상에 등장한 명성황후와 김옥균, 안중근의 모습은 새롭게 보인다. 그들은  제국의 욕망 지형도 안에서 요청되는 배역을 부여받고 다시-새롭게 '해석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이 책의 의의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나아가 '식민지-여성'이라는 타자를 재생산하는  제국의 남성지배 미디어 공동체에 의해 주조된 '이야기' 그 자체를 문제 삼고 있다. "텍스트에 담긴 암묵적 전제와 결론들은 결코 독자=미디어 공동체의 은밀한 욕망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야말로 미디어 내러티브의 가장 강력한 성립조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끊잆없는 스테레오타입을 통해 이야기 주체의 욕망을 재생산하는 '제도로서의 이야기' 그 자체가 의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암살 이야기' 뿐 아니라, '이야기를 암살'한다는 저자의 기획이 "암살이라는 스캔들"이란 제목에 담겨 있는 것이다.

 

2. 프레카리아트, 21세기 불안정한 청춘의 노동(아마미야 가린, 김미정 역, 미진북스) 

   

프레카리아트, 이 말은 예전에 읽은 아마미야 가린의 전작 <성난 서울>(꾸리에, 2009)에서 처음 알았다. 나는 그 책을 우익 록밴드 보컬로부터 좌익 문화운동가로 '전향'한 한 일본인 젊은 여성의 이념적 편력과 문화적 실천이 궁금해서 읽었었다. 사실 아직도 그녀가 누구인지는 잘 가늠되지 않는다. 다만 얻은 것은 있었다. 눈에 띠는 요란한 의상을 입은 채로, 닥치는대로 '현장'에 나타나고, 뭔가를 외치거나 쓰면서 끊임없이 사람들을 만나는 그녀가, 책상에 앉아 오직 '머리'로만 읽거나 상상하는 내게, '눈'과 '머리'의 한계로 보지 못한 뭔가를 알려줬다. 한국에 88만원 세대가 있는 것처럼, 일본에는 '로스트 제네레이션'이 있고, 이탈리아에는 '1000유로 세대', 그리스에는 '600유로 세대'가 있다는 것. 그러니까 이건 그야말로 '만국의 (청년)노동자'의 문제라는 것. 그리고 이러한 삶의 조건을 타개하기 위해, 그들은 끊임 없이 '글로벌적'으로 뭔가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 '스쾃(squat)'같은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도 그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프레카리아트, 프리터, 청년실업자, 88만원 세대, 잉여... 등등 비정규적인 삶의 '양식'을 가진 이들을 부르는 이 서로 겹치는 명칭들의 다양함은, 어쩌면 '실재'함에도 불구하고 '유령'처럼 존재하는 이들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청년(비정규)노동자는 엄연히 전일적인 시장지배 체제가 낳은 구조적 실재다. 이들은 정말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고, 어떤 '기획'을 가지고 있나. 이 책은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기 위해 쓰였다.

 

3. 조선인극장 단성사 1907~1939(이순진, 한국영상자료원) 

 

 언젠가부터 식민지기 조선 영화를 찾아보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됐다. 식민지 조선에서 모던과 첨단의 상징으로 간주됐던 '영화'를, 21세기인 지금 본다는 것은 기묘한 체험이다. 과연 우리는 같은 텍스트를 보는 것일까. 식민지 조선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영화의 내용, 영화에 나타난 당대의 풍속,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의 모습 등을 상상하는 것 모두를 포함한다. 그들도 영화관을 나오면서 조금은 어색함을 느꼈을까? 그렇다면 그건 '영화'라는 미디어 자체의 낯섦 때문일까? 그들도 방금 본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을까? 이 모든 '상상'이 단지 '공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걸, '단성사'는 말한다. 그런 상상을 더 해보라고 자꾸만 부추긴다. 과연 단성사라는 '장소'는, 거기 있는 것 그 자체만으로 이미 '환상의 영사기'다. 식민지 조선에서 '극장'은 그 자체로 꿈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치열한 문화정치의 현장이었다. 그곳은 제국과 자본의 굴레 속에서 힘겹게 구축된 '이등국민'의 '영화 산업'이 펼쳐진 '현장'이다. 거기에 활동사진과 무성영화 시절을 거쳐 자체적인 조선영화를 제작하게 되기까지의 지난했던 조선영화의 꿈이 모두 아로새겨져 있다. 저자가 '단성사'라는 "흘러간 이름"을 다시 소환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영화가 스크린 위에서만 펼쳐지는 빛의 작용이 아니라 그 뒤에서 벌어지는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현상이기도 하다"는 것. 온갖 부침을 겪으며 아직, 거기 있는 단성사를 읽자.  

 

4. 깔깔깔 희망의 버스 -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깔깔깔 기획단, 후마니타스) /  25일 -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울산공장 점거투쟁 기록(박점규, 레디앙)

 추천페이퍼에 '이런 책'들을 소개하는 건, 반드시 어떤 '신념' 때문만은 아니다. 공부하기 위해서다. 한국 노동자의 삶과 노동계급의 역사에 대한 기록 및 이론들을 다룬 몇 가지의 책들을 알고 읽게 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건 좀 기이한 체험이었다. 나는 왜 이전에 이런 책들을 알지 못했을까. 생각해보니, 한국 노동계급의 투쟁사를 나는 한번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초중고는 물론 대학교에서도, 그리고 미디어에서도 그런 책을 소개해 준 적이 거의 없었다. 지금까지 투쟁과 혁명을 '글로 배워야 했던' 나의 아비투스에 대해 약간의 난처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니 실은 오히려 '글로도 배울래야 배울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어떤 책들은 미디어에 과잉 노출되는데, 어떤 책들은 있는지조차 모른다. 온갖 것들이 다 상식과 교양의 대상이 되는 이 시대에, 유독 노동자에 관한 '앎'만은 철저히 은폐된다. '김진숙'과의 연대는커녕, '김진숙'이라는 존재를 알고 이해하는 데에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결코 간과해서는 안되는 노동자의 삶이 있고, 그것이 나와 무관하지 않으며, 나도 할 수 있고 해야 되는 일이 있다는 걸, 항상 너무 늦게 안다. 한진중공업 사태를 보도하(지 않)는 한국 미디어들을 보라. 늘 그랬지만, 한국 지배동맹의 가장 강력한 전략은 노동자들의 삶을 결코 가시화하지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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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딸 2011-08-09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깔깔깔 희망버스>에 한표 던집니다. 85호 크레인은 김진숙 위원의 문제만도, 혹은 한진 노동자의 문제만도 아닌 우리 모두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윈터 2011-08-09 16:45   좋아요 0 | URL
비의딸님 반갑습니다. 그렇죠. 며칠 전에도 <창비주간논평>에 실린 난감한 글과, 그에 대한 프레시안에 실린 반론문을 봤는데.... 이렇게 팩트와 논점을 가지고 대립하는 일이 왜 벌어진 걸까 생각해보면, 아무도 한진사태를 들여다보려고 안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언론에서 쓰면 쓰는 대로, 안 쓰면 안 쓰는 대로, (안) 읽고 넘기고 마는.....
 
[불안의 시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불안의 시대 - 생존을 위한 통찰과 해법
기디언 래치먼 지음, 안세민 옮김 / 아카이브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0. 이런 책은 도대체 어떻게 읽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민주적 평화, 경제적 자유, 신기술, 구원...... 등등의 거대한 낱말들이 어지럽게 부유하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누구에게 필요한가. 누가 말하고 누가 듣는가. 이 피부에 전혀 와닿지 않는 큰 말들을 지혜롭게 엮어 그것이 '지금-여기' 우리의 이야기임을 설득하는 것이 이런 거시 담론의 성패를 결정하는 것이 아닌가. 그게 과연, 시대의 아이콘으로 간주되는 여러 지도자들의 일화를 잠깐 언급해놓는다고 될 일인가. 이 책의 대표적인 미덕이라고 이야기되는 '생생하고 구체적인 묘사'는 뭘 위해 동원된 건가. 

 

1.' 전환의 시대-낙관의 시대-불안의 시대'. 이처럼 역사를 세 시기로 구분하는 것. 단박에 도식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게다. 그럼에도 이 서양인 저자에게 이처럼 '시간을 분류하려는 의지'는 중요했다. 그것이 '신자유주의'의 안정화를 주도하고 있는 그들의 자기이해에 필수적으로 요청되기 때문이다. 즉, 이 책에서 말하는 '낙관'과 '불안'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의의 비인간화가 초래한 인류 공통의 과거의 현재 그리고 미래를 설명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바로 그러한 체제를 주도하는 미국을 위시한 서구 지배블럭이 당면한 상태를 지시하는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이런 결말로 치닫는다. "강하고, 성공적이며, 자신감 넘치는 미국의 모습이 안정과 번영을 약속하는 세계를 위한 최선의 희망이다."(374)  경제적 자유화가 정치적 자유화를 견인한다는 이론으로 무장하고 '세계화'라는 가치를 무리 없이 맹신할 수 있었던 그 '낙관의 시대'의 지표들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금 그들이 당면한 '불안의 시대'를 극복하는 대안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글로벌한 문제들을 글로벌하게 해결하는 것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미국의 새 지도자 오바마보다도 훨씬 더 걱정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미국이 '강하고, 언제나 옳은' '초강대국'이라는 유아적 미몽을 확고한 자기정체성으로 확립하는 데에 확신을 주려고 이 책을 쓴 것일까.  

 

2. 번역자는 자, 그럼 이 책이 서구의 입장에서 비전을 제시한 책이란 것을 감안하며 이제 우리만의 비전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라는, 다소 안이하고 무책임한 문장을 역자의 말 마지막에 남겨 놓았다. 도대체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무엇을 읽어내야 하는가. 서구 지배블럭이 당면한 불안의 내용과, 그를 극복하여 더욱 강해지기 위해 이러한 이론적 준비를 하고 있음을 엿보고 그것에 대비하는 것? 최대한 생산적으로 읽어내도 아마 그 정도 이상으로 의미 부여하기 어려울 것 같다.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자. 서구 신자유주의 동맹의 정치경제사적 담론이 '불안의 시대'라는 시대정신(과 그를 가리키는 언어)을 선점하고, 그러한 '수사'가 한국의 독자들을 쉽게 유혹하는 이 현상에는 어쩌면 한국 사회과학 담론의 편중된 성향('식민화'라고 썼다가 지운다;;)이 조금은 포함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이 책을 추천한 눈 인문/사회/과학 신간서평단의 몇몇 분들이 책임을 통감하고 후회와 자탄의 코멘트를 적어놓은 것을 봤는데, 눈 밝은 그들은 왜 그리 쉽게 이 책에 낚였는가....^^ 분명 '불안의 시대'라는 제목이 초래한 착각과 오해에 기인한 것일텐데, 이 책이 대표하고 있는 것처럼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사회과학 담론은 바로 그러한 수사가 초래하는 착각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 그들은 담론 시장에서의 그들의 독점률을 높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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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1-08-02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눈밝은 그들은 왜 그리 쉽게 낚였을까요ㅠㅠㅠ 그러게나 말입죠.. 저도 사실 추천을 한 책이라 괜스레 고개가 숙여지네요, 큭. 지금 생각해도 참 당황스러운 책...

윈터 2011-08-03 23:43   좋아요 0 | URL
ㅎㅎ그런데 생각해보면, 사실 그런 경험을 하는 게 신간평가단 본연의 임무인 것도 같습니다. 미리 읽어보고 일반 독자들의 기대지평을 고려하여 책을 소개하는 것. 그렇게 볼 때, 이번 책이야말로 신간평가단의 존재이유를 여실히 증명한 사례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겠죠. ^^ 이 더운 날, 그런 의미부여라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책을 읽는단 말입니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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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가끔 속물일 때가 있다 - 두 남자의 고백>(악셀 하케 & 조반니 디 로렌초, 배명자 역, 푸른지식) 

 로쟈가 적확하게 지적한 대로, 이 책의 제목은 독자를 교란시킨다. "나는 가끔 성자일 때가 있다"가 더 겸손한 제목인데, 우리는 종종 그 반대로 착각한다. 그렇다고 할 때, 이 책이 강력하게 표방하는 '솔직담백한' 이야기를 이 두 아저씨의 대화로부터 기대하기란 힘든 일이 아닐까.(아저씨 두 분의 이야기를 참견 없이 장시간 듣는 건 원래 좀 험난한 일이지만...^^) 독일의 두 저명한 지식인 남성이 터놓고 이야기하는 자기 안의 모순, 지식과의 괴리 등에 대한 고백은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학생운동 이력에 대한 비판적 성찰, 사회적 책임, 정의와 같은 가치에 둔감해지며, 오직 쓰레기 분리수거를 통해서만 자기보존과 옹호의 길을 구하게 된 이들. 그런데 이들의 속물근성에 대한 고백이 오히려 여느 속물들에게 안정적인 자기위안의 내러티브를 마련해주는 것은 아닐지. 자폭할 줄 아는 속물이야말로 '고급속물'이기에. 자, 들어나 봅시다. 속물지배의 대한민국에서 '속물'에 대한 (자기)성찰은 일단 매우 드무니까.  

  

2. <자기만의 방 - 고시원으로 보는 청년 세대와 주거의 사회학>(정민우, 이매진)

 "석사 학위 논문이라는 종(種)의 지위에 관한 의문 또는 의구심"에 답하거나,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란다. '고시원', 과연 석사학위논문다운 주제다 (양자는 고학력,고성취를 위해 마련된 시공간이면서 동시에 과도기, 결여 ... 등의 용어와 잘 어울린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자기만의 집"이 아니라는 것에 주의할 것. 이 책은 부제가 잘 말하고 있는 것처럼, '고시원'을 통해 본 청년 세대의 현재와 미래에 관한 책이다. 마침, 저작의도를 아주 잘 말해주는 구절이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지적 자유를 얻으려면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했다. 달리 말하면 독립의 조건이다. (...) 이 시대의 ‘자기만의 방’이라 할 만한 고시원은 독립의 조건을 준비하는 자리인 동시에 그 조건의 불가능성을 폭로하는 자리다." 이 '집 아닌 집'에 사는 이들이 형성하는 '정서적 (비)공동체'의 사연을 담은 몇몇 이야기가 떠오른다. 김애란의 <노크하지 않는 집>, 일드 <라스트 프렌즈> 등등. 부동산 투기가 들끓는 한국에서 청년들의 '집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슬프게도 흥미롭다.

 

3. <분노하라>(스테판 에셀, 임희근 역, 돌베개) 

'분노하라'. 미쳐라, 목숨 걸어라, 뭐해라... 등등 예전에 나온 그 어느 명령어보다도 따르고 싶어진다. 아니, 사실 그런 명령어투를 쓰지 않아도 절로 분노하게 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한진중공업, 홍대, 강정 해군기지... 그 얼마나 많은가, 분노할 일들. 불과 30여 페이지 밖에 안 되는 이 작은 정치 팜플렛이 가져온 나라 안팎의 '사회적 분노'의 결과들을 볼 때, 우리는 놀란다. 그리고 곧 알게 된다. 그 분노 신드롬이 실은 이 책 한 권이 야기한 결과가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냉소와 무관심으로 가장한 채 억압해왔던 '변혁'에 대한 열망들의 집합임을. 이 책에서 저자는 레지스탕스 정신의 핵심을 이루었던 '불의에 대한 불복종'을 호소한다. 93세 노장의 '분노론'은 이런 것이다. '분노'는 '격분'과 다르다는 것. 진정한 분노는 '비폭력', 즉 '자기 자신을 정복한 후, 타인의 폭력 성향을 정복하는 일'이라는 것. 그리하여 오직 '희망의 폭력'만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의 실현태는 '투표'와 '참여'라는 것. 어떤가, 마음에 드시는지. 21세기 한국의 '다중'이 내린 결론과 견주어보고 싶어 진다.

 

  

4. <소금꽃나무>(김진숙, 후마니타스) 

 183일째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85호 크레인에 올라간 지 말이다. 비도 엄청 오는데 그 검은 구름 아래서 끝내 버틴다. 폭력과 배신과 거짓말의 드라마, 직무유기를 밥먹듯 하는 한국 언론을 정면으로 내려다보며, 오직 심장처럼 깜박이는 트위터만을 등대 삼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07년에 출간됐던 <소금꽃나무>의 한정판이  올해 6월에 다시 나온 건, 바로 그녀를 지지하고, 그녀와 연대하기 위해서다. 같은 책을 두 권 갖게 된 것, 처절한 불행이다. ... ... 그러나, 같은 책이지만 같지 않다! 희망버스는 연이어 내려간다. 그녀는 "강제로 끌려내려가지 않는다." 김진숙의 인생,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 어떻게 봐도 '소금꽃'투성이인 그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 다른 어떤 저명 인사의 추천사도 필요 없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온 마음으로 이 책을 추천할 거다. 영웅도, 작가도 아닌 그녀는 내가 아는 그 어느 작가보다 글을 잘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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