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생들도 총장님을 존경하고 싶다

 - <비전 2020>에 대한 국어국문학과 ․ 사학과 대학원 학생회의 2차 성명서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학생회는 지난 5월 31일 발표한 성명서를 통해 <비전 2020>이 ‘비민주적’ 절차에 따라 입안된 ‘불균형 발전안’임을 지적한 바 있다. <비전 2020>이 말하는 “발전”이란 기초학문 분야의 명분없는 희생을 담보로 한 것으로, 사실상 인문사회과학 말살 프로젝트와 다름없다. 그간 발표된 문과대-사회대 교수들, 시간강사들 및 대학원생․학부생들의 성명서는 <비전 2020>이 초래할 여러 문제점들을 잘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엄연한 학교 구성원인 학생들을 소외시킨 채, 교수들만을 대상으로 발신된 “총장서한”은 이러한 반발이 단지 “소통부족”으로 인한 “오해”의 결과라고만 일축하며 구체적인 답변을 회피하고 있다. 과연 학교당국은 진정한 소통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 우리는 총장서한이 보여준 비민주적 소통방식과 비인간적 경쟁주의에 경도된 인식구조가 <비전 2020>이 초래할 비극적 미래상을 예고한다고 판단하며, 다음의 질문을 제기한다.

1. 대학원생들에게도 총장님을 존경할 기회를 달라

학내 곳곳에서 졸속과 비상식으로 추진되고 있는 <비전 2020>에 대한 성토가 넘쳐난다. 이는 모두 성균관대의 더 나은 미래를 ‘함께’ ‘투명하고’ ‘진지하게’ 모색하자는 내용이다. 그러나 현재 <비전 2020>과 관련된 논의는 학교당국과 교수들 사이에서만 진행되고 있다. “존경하는 교수님”과 “존경하옵는 총장님”만이 <비전 2020>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인가? 이러한 폐쇄적인 소통구조는 성균관대 발전안이 작동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필요로 하는 인적․금전적 자원을 제공할 학부생과 대학원생, 비정규직 강사들을 소외시킨다. 교수들의 질문에만 답하면 된다는 식의 태도에서 보이는 학교당국의 권위주의적 발상을 당장 폐기하라.

2. <비전 2020>에는 ‘인문학 발전안’이 있는가

총장의 말대로 <비전 2020>이 인문학을 사실상 '방기‘ 혹은 ’폐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면, 학교 측에서 가지고 있는 ‘인문학 발전안’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학교당국의 판단처럼 인문학이 우리 학교의 “특성화”에 기여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면, 그럴수록 인문학 분야에 대한 지원과 대책은 더더욱 필요하다. 이는 인문학을 소외시킨 채 강행된 <비전 2010+>의 실패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비전 2020>은 이에 대한 반성없이 또 다시 인문학을 단지 “통합”과 “융복합”의 대상으로 삼는다. 모든 학문 분야에 일괄적으로 적용되는 ‘논문 편수’, ‘연구 용역 수주금’, ‘입학 성적 1% 이하 학생 수’ 등과 같은 지표가 ‘인문학 발전’을 보장할 수 있다고 믿는가? 진정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인문학에 대한 완전한 몰이해의 소치다. 인문학이 지니는 학문적 보편성과 특수성을 균형있게 고려한 <비전 2020>만의 ‘인문학 발전안’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답변하라.

3. “세계 수준”의 “열린 연구”를 수행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비전 2020>에는 대학원과 관련한 구체적인 비전과 계획이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원 중심의 연구 대학으로 성장하기 위해 대학원 입학률만 높이겠다는 학교당국의 안이한 발상은 가소롭다. 대학원생은 2010학년도 등록금 문제와 관련해서도 ‘학부 동결―대학원 인상’이라는 사상 초유의 비상식적 정책의 희생양이 되었다. 대학원 수업 개설 과목 부족 및 연구 공간 부재에 따른 대학원생들의 어려움은 일일이 거론하기조차 어려운 수준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전 2020>은 기초 연구 인력인 대학원생에 대한 학교당국의 문제의식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과연 대학원생을 외면한 채로, <비전 2020>이 목표로 삼고 있는 “세계 수준”의 “열린 연구”는 가능한가? 학교당국은 현재 산재한 대학원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보여야 함은 물론, 대학원생들을 진정한 학문적 성장의 파트너로서 존중하라.

  학교와 학문 발전을 위한 대학원생들의 진정어린 목소리를 더 이상 외면하지 말라. 학교당국은 교직원들 및 교수들만 열람할 수 있는 내부 전산망을 통한 ‘서신왕래’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착각하지 말라. 학교당국은 전 구성원을 대상으로 하는 토론의 장을 마련하고, 학문 간의 균형 발전을 통해 가능한 우리 학교의 진정한 발전방안에 대해 성실하게 검토하라.

2010. 6. 14.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 사학과 대학원 학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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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비전’이며, 무엇을 위한 계획인가?

- <비전 2020>에 대한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학생회의 입장

 

2010년 5월 27일, 학교 당국은 졸속으로 진행된 ‘학생 설명회’를 통해 <비전 2020>이라고 이름붙인 성균관대학교 중장기 발전 계획안을 발표했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작성한 이 계획안의 핵심은 ‘대학 구성원간의 무한경쟁’을 기반으로 한 사실상의 ‘학제간 통폐합’이다. “혁신”과 “파워”, “TOP”과 “GLOBAL” 등의 과잉된 수사로 덧칠된 <비전 2020>은 결국 ‘잘 팔리는 것’만을 남기고 그렇지 않은 것은 모두 ‘없애거나 줄여버리자’라고 말한다. 이는 전형적인 ‘후진’ 콤플렉스가 반영된 발전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비전 2010>의 실패는, 충분한 비판과 반성을 허용하지 않은 채 맹목적으로 추진한 허울 좋은 계획이 얼마나 공허한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같은 <비전 2020>의 절차상․내용상의 문제점은 앞서 발표된 문과대 및 사회대 교수들의 성명서에도 명확하게 지적되어 있는 바, 우리는 이를 적극 지지한다. 우리는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관철되고 있는 학교 당국의 ‘불균형 발전 계획안’인 <비전 2020>에 강력하게 반대하며, 학교 당국에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1. <비전 2010>의 평가 및 <비전 2020> 계획 수립 근거를 학내 구성원들에게 전면 공개하라.

학교당국은 <비전 2020>의 비민주적 추진을 중단하고 지난 <비전 2010>부터 평가받아야 한다. <비전 2010>의 성과와 과오에 대한 충분한 평가와 반성이 이루어진 후에야 비로소 <비전 2020>의 계획 수립은 가능하다. <비전 2010>에서 제시된 “세계 100대 대학 진입”이라는 휘황찬란한 목표는 충분한 비판과 성찰 없이 <비전 2020>에 그대로 도용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자신보다는 남들이 인정해주는 대학”을 향한 “기러기떼의 안향형 비행”을 계속 추구하겠다는 학교당국의 방식인가? 구체적인 기준과 자료 제시 없이 ‘장밋빛 환상’만을 조장하는 계획안은 헛된 공약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2. <비전 2020> 계획 입안 과정에 있어 절차적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켜라.

지난 5월 27일 열린 <비전 2020>에 대한 ‘외부 비공개’ 설명회는 ‘졸속’과 ‘파행’으로 진행되었다. 처장과 교수가 학생을 ‘계몽’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설명회는 합리적인 소통을 외면한 채, 학교당국이 발표한 계획의 일방적인 홍보에 집중했다. 우리 학교의 발전 계획은 학교의 주체인 학생-교수-직원 간의 충분한 합의와 토론의 과정을 통해 마련되어야 한다. ‘삼성경제연구소’라는 외부업체로 하여금 우리 대학의 미래를 구상하게 한다는 것은 대학 당국의 능력 부재를 자인하는 꼴이다. 학교 운영의 주체를 소외시킨 채 만들어진 계획안은 당장 폐기되어야 한다. 학교 당국은 학교 구성원들과의 민주적인 소통을 통해 성균관대학교의 ‘비전’에 대해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라.

 

3. 인문·사회과학에 대한 몰상식한 이해와 차별을 중단하라.

우리는 ‘미래지향적 비전’이라는 명목 하에 학교 당국이 자행하고 있는 인문·사회과학의 매장과 학살을 즉각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비전 2020>은 의대, 경영대, 법대 및 소수 이공계 학과를 제외한 다른 기초 학문 학과들의 중요성을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것은 이제 본격적으로 ‘상업 대학’을 추구하겠다고 대놓고 선언하는 일이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모든 가치에 우선할 만큼 고상하지도 않지만, 학교의 판단처럼 전적으로 무능하지도 않다. 대학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은 인문학을 통해 상상되며 사회과학을 통해 증명된다. 특정 학과에 대한 배타적인 육성 전략은 삼성 재단과 성균관대학교 간의 불투명한 공모 관계를 연상시킨다. 타 학과의 일방적인 희생과 소멸, 통폐합을 담보로 하는 <비전 2020>의 불균형한 발전 전략은 당장 중지되어야 한다.

 

<비전 2020>이 지금과 같은 내용과 방식으로 진행된다면, ‘대학의 기업화’와 ‘인문사회과학 말살 행태’는 훨씬 더 폭력적으로 확산될 것이다. 학교 당국의 굳건한 목표인 “세계 100대 대학” 그 어느 곳에서 이러한 비민주적 의사 진행과 인문사회과학 경시 풍토가 횡행한단 말인가. 이에 대한 대학 당국의 조속하고 성실한 답변을 요구한다.



2010. 5. 31.

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학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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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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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영이 정신분석학적 독해를 잘 견디는 텍스트라면, 조경란은 정신분석학적 해독을 기다리는 텍스트다. 한강이 적극적으로 무의식을 열어놓는 작가라면, 조경란은 철저하게 무의식을 의식하는 작가다. 프로이트가 "잠시 자네 꿈을 들려주게나, 그러면 내가 자네 마음이 어떠한지 말해 줌세." 라고 한 파프E. R. Pfaff의 말을 인용한다면, 조경란은 "그대가 무엇을 먹고 싶은지 나에게 말해다오. 그러면 내가 그대의 이름을 말해주리라."라는 바슐라르의 말에 기댄다.

조경란의 『혀』는 우리에게 익숙한 광기를 보여준다. 그녀가 '혀' 위에 세운 감각의 제국과 서구 요리의 향연은 이미 '세련된 쾌락'을 모토로 하는 웰빙 잡지에서 심심치 않게 본 것들일 뿐 아니라, 감각의 사치를 동물적 본능과 착종시키며 철학 담론화 하는 『혀』의 화법은 각종 요리 잡지 혹은 신문들의 주말특집의 그것과 상당히 닮아있다. 게다가 감각의 향연이 엽기적인 수준으로까지 치달으며,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사람의 애인의 혀로 만든 고기, 즉 인육을 먹이는 장면도 동생의 아들 셋을 죽여서 고기 요리로 만들어 동생에게 먹였다는 아트레우스의 이야기가 담긴 오레스테스 신화에서 그 출처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가 6년만의 신작에서 이처럼 반전조차 익숙한 광기의 서사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녀는 정말로 자기가 먹은 것을 확인하고 그것을 해석하며 기나긴 6년을 외롭게 보낸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작가가 확인하고 싶은 것은, 여전히 '욕망하는 자아'였다. 욕망을 억제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며, 뜨거운 욕망에의 추구를 찬양하던 작가의식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번 작품에서도 이어진다.  


"그 판단행위는 나에게 취향에 맞는 것을 선택하고 선호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속삭였다. 어떤 대상에게 강렬하게 끌렸다는 것,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은 나에게 그것을 꿀꺽 삼켜버리고 싶다는 본능을 일깨워주었다." (66면)


"내가 원하는 게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모를 때가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틀림없이 원하는 게 있다는 사실이다. 그거면 됐다." (261면)

 

작가에게, 그리고 주인공 '나'(지원)에게 욕망을 긍정하는 것은 자기를 긍정하는 것이다. '잘못된 대상일지라도 헛된 구애행동'을 멈추지 못하는'(191면), "충성심"(71면)과도 거리가 먼, 이토록 그로테스크(하려고 노력했던)한 이별 풍경에 대해 쉽게 내릴 수 있는 진단은,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고, 집착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식의 상식적인 도덕과 풍문에 기댄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구차할 정도로 떠난 애인에게 집착하는 '나'가 정말로 되찾고 싶었던 것은 변심한 애인의 마음이 아니라, 정신없이 사랑하고 미워했던, 잃어버렸다고 생각했고, 잃어버려야만 했던 자기 자신을 되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그녀는 한 번도 자신을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 이별은 '어린아이한테서 장난감을 빼앗'(194면)은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끝내 타자이기를 거부하고 뼛속까지 주체가 되고 싶어하는 '나'가 되기를 상상하거나, 혹은 자기라고 인식하는 동물이 '가리비'나 '엘크', 혹은 석쇠에 구워지며 날카롭고 단단한 칼에 찔리는 '즙이 말라버린 상한 굴'(180면)과 같은 것들이라는 점은 흥미롭다. '가리비'는 '점점 더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 수 있'(179면)는 동물이며, '엘크'는 '다리에 마디나 무릎이 없어서 잘 때도 눕지 못하고 충격으로 한번 넘어지면 스스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동물, 아무런 의심 없이 몸을 기대고 있던 나무가 갑자기 쓰러져버리면 힘없이 함께 쿵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248~249면) 동물이다. 엘리엇이 그 자신을 '집게발'에 비유함으로써 능동성과 생명성을 추구했던 것을 기억한다면, 조경란의 비유는 그 대척점에 있다. 그녀가 이처럼 수동적이고 유약한 동물들을 꿈꾸며, 이러한 방식으로 자기인식을 행하는 것은 중요한데, 이는 수세에 몰린 자아를 설정함으로써 '순결하고' '욕심 없이' 욕망을 추구하는 자아의 모습을 그리기 위한 방어적 포즈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햄릿을 자처하는 '나'의 고질병이 있다. 문제는 '집착'이 아니라 '가장된 욕망'이다.

따라서 감각에 충실한 것이 곧 본능이라고 믿는 그녀에게는, 사실 감각도 위장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흥미도 없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역사 이야기가 아니라 내 후각과 미각 촉각 시각 청각을 사용해서 할 수 있는 일"(65면)이라고 그녀가 말하듯, 그녀가 정말 무기로 삼고 싶은 것은 필요에 따라, 혹은 "진짜 사랑인가 아닌가? 당신은 날 사랑하는가 아닌가?"(66면)라는 거짓 질문에 따라 '호출된 감각'이다.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사랑할 것인가 멈출 것인가. 이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 문제다.'


"내가 달라진 게 사실이라면 요리에 대한 내 생각과 도마 위에 놓인 내 손가락들을 더 차갑고 냉정하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은 부엌과 달리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으니까." (192면)


'나'는 한번도 '그'에 대해서는 말한 적이 없다. 집착의 대상이자 빼앗긴 장난감에 대해서는 애당초 그녀의 관심이 있지 않았다. 그녀 자신이 "버려졌다는 느낌"(37면) 혹은 "어쩐 일인지 내가 졌다는 느낌"(219면)과 같은 패배의식만이 그녀를 지배했을 뿐이며, 그렇다면 그녀는 자기 이외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셈이다. 따라서 당연하게도 그녀의 슬픔 역시 오직 그녀 자신만의 것이다. 연못을 만든다며 흙에 물을 붓는 행위를 그만 두었을 때, 그렇게 결정하고 나자 그 자신이 달라졌다는 사실에 대해 "그건 미묘하고도 개인적인 느낌"(187면)이었다고 말했던 것처럼, 슬픔에 대해 그녀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은 오직 "그게 매우 개인적인 감정이라는 점"(84면)이다. 그녀가 진정한 슬픔을 느끼기 위해서는 몇 번이고 '그'의 감정 따위는 '죄책감'으로 치부되어야 했음은 물론이다. 그녀의 슬픔을 치료하는 방법이 오직 "일부러 구두를 뒤집어보지 않는다면 바닥에 진주가 붙어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르게 디자인"(213면)된 구두를 신음으로써 느끼는 자기만족일 뿐인 것은 당연하다. 이토록 자기완결적인 세계를 꿈꾸는 그녀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통제할 수 있는/없는 것들'이다. 세계를 그녀의 두 손으로 요리하고 통제하고 싶을 뿐인 유아기적 욕망을 그녀는, 순수하고 뜨거운 열정으로, 그리고 불가항력적인 인간의 본능으로 왜곡한다.

따라서 "추구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것은 욕망이 있다는 것일 거다. 이 두 손으로 단단히 잡고 싶은 것, 욕망을 갖고 기다리는 시간은 틀림없이 신비로운 시간이 될 거야."(170면)라고 자신에게 속삭이는 그녀에게 현명한 어른 지젝은 틀림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초자아가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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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먹다 - 제13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진규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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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단상(斷想)

성정(性情)은 쉬이 버리지 못한다고, 지탄받을 걸 알면서도 다 떼고 말하고 싶어진다. 적어도 이 작품은. ‘단편 하나, 시 한 줄 써본 적 없는 아줌마’, ‘표면장력의 끝’ 운운하는 감동적인 수상소감 등...... 숱한 문청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주(고자 하)는 수사들 뒤에 숨겨져 있는 작가의 “내심(內心)”만을 문제 삼고 싶다. 수사(修辭)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모든 것은 때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심’이란, 그야말로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이어서, 무언가를 ‘통해서’ 보지 않을 수 없다. 견고하게 봉해진 판도라의 상자같은 이 작가의 책을 가만히 앞에 두고, 내용물을 궁금해 하던 차에 여기저기 기웃거려 본다. 우연히 발길이 닿은 작가의 블로그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정언명령처럼 적혀있다. 
 

다언삭궁(多言數窮),  

아버지의 가르침을 새겨 말을 먼저 하여 실수하기보다는 속으로 삼켜 문자로 만드는 버릇이 있었다.

-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 / 성석제


다언삭궁(多言數窮)의 한자사전식 풀이 : 말이 많으면 자주 곤란한 처지에 빠짐.

그러니, 그 입 다물라.....(입 다물고 꽃같이 어여쁘고 조용하게 있음 더 좋고...)

그리고, 그 입 다물고 있음에 대한 중증 노이로제....


내가 함부로 서투른 서평을 쓰려는 것을 알아챈 듯, 이 작가는 내 입을 막는다. 당황한 나는 실어증 환자처럼 버벅거린다. 그런데 기묘한 것은, 말하지 말라는 이 작가의 말이, 역설적으로 더 많은 것을, 아니 이 작가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고 믿게 할 환원론적 접근을 유도한다는 것이다. 이게 이 작가의 작품을 읽는 한 가지 방식일까.

작가는 ‘이해와 오해’의 간격을 좁히기 위해 쓴다고 했다. 꽃에도 앞뒤가 있듯, 뒤에 있는 ‘말해지지 않은 것들’의 진실성을 인식하라고. 바꿔 말하면, 완전히 ‘이해’될 수 없고 ‘오해’만이 가능하다면, 그 낙차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말’은 필요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어떤 ‘말하기’ 방식만이 가능한가.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라고 천양희는 말했다. 그리고 그것을 김진규가 ‘다시’ ‘말했다’. 말없는 이 작가로서는 주목할 만한 일이다.

 

2. 침묵은 금(金)이자 금(禁) - 과묵함과 실어증 사이

예로부터, 우리는 ‘말없이 통할 수 있는’ 그 고요하면서도 쿨한 인간관계를 열망해왔다. ‘불립문자(不立文字)’, 혹은 ‘염화미소’라 하여 부처님의 말씀은 문자로 나타낼 수 없다 하였고, 가장 친한 친구는 거문고 소리만 듣고도 상대의 심정을 알 수 있다하여 ‘지음(知音)’이라 불렀다. 자고로,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않고도 알아듣는 것이 군자이자 선비의 ‘도(道)’였던 것이다. 때문에 한때는 이런 광고 카피까지 유행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참으로 위험천만한 문구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어쩌면 말없이 간담상조할 수 있는 상대를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임을 반증하는 예일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나의 취향과 철학, 그리고 수준까지를 이해할 수 있는 “명료한 지성”을 찾기란 정말로 쉽지 않다. 그것은 상대 역시 위의 항목에 대한 내공을 적어도 ‘나 정도’는 갖추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찰적 자기인식이 결여된 ‘지음(知音)’찾기의 작업에서 ‘나’는 ‘함부로 말해질 수 없는’ 대상으로 승격된다. 문제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진정한 동반자의 ‘부재(不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하지 않음’이라는 말하기 방식에 있는 것이다.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어지간해서는 감정을 내색하지 않는 나에게 남편이 진저리를 친다는 걸 말이다. 하지만 내심을 어떻게든 다 표현하고 살았던 친정어머니의 가벼움을 닮아가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나는 내 입을 참을 수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29면)


“가벼운 게 지천이었다. 한줄기 바람에도 부양이 가능하리만치 몸이 가벼운 아버지가 그 중심이었다. 아버지의 가벼움을 누구보다 독하게 비웃는 어머니도 별반 다를 건 없었다.” (10면)


묘연의 유일한 무기는 ‘침묵’이다. 원래는 ‘역심을 품은 신하’로 보일 정도로 ‘반항심을 가지고 있는’ 천성적인 반골기질을 지니고 있지만, 그녀는 끝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 침묵이 그들로부터 그녀 자신을 구분하고, 보존하며,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기제이기 때문이다. 묘연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마치 한 묶음처럼 ‘가벼운’ 존재들로 동일화하여 치부할 수 있는 것은, 말 많고 경박한 그들 위에 군림하고 있는 ‘침묵하는 자아’의 숭고한 무게 때문이다. 그녀에게 천박한 그들과 말을 섞는 것은 곧 죽음이다. 그들은 말로써 스스로의 ‘방정맞음’과 ‘퇴폐성’을 드러내는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들이다.

침묵하는 주체는 역설적이다. 그것은 침묵할 수밖에 없는 내밀한 사정이 숨겨져 있음을 호소하는 무언(無言)의 천명(天命)이다. 그 입이 열리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은, ‘내가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내 안에는 형언(形言)할 수조차 없는 ’진실‘이 숨겨져 있었어.’ 일 것이다. 때문에 침묵하는 주체는 폭력적이다. 오직 그 자신만이 이해하고 간직할 수 있는 ‘진짜’ 진실을 설정함으로써 스스로를 ‘비의(秘意)’적 존재로 드높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엔 이면이 있다. 못의 하나인 광두정은 대가리가 둥글고 넓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끝의 뾰족함이 덜한 것은 아니다. 연근은 단단하다. 미끄러진 칼날에 깊게 다친 큰형수의 기다란 손가락을 기억한다. 그러나 정작 속은 빈 구멍투성이다. 나는 겉으로는 아버지 율관 박경열과 어머니 홍씨의 다섯째 아들 여문이다. 하지만 내 속엔 향이밖에 없다.” (76~77면)


또한 말없는 자는 다 아는 자다. 묘연은 “희우는 내 속을 몰라도 나는 아들의 속이 다 보였다.“(67면)고 말한다. 상서로운 침묵의 고요한 ‘아우라’가 그 ‘앎’을 확신하게 한다. 그런데 그 상서롭고 숭고한 기운(氣)이자 아우라는 동시에 ‘환상’이기도 해서, 뜻하지 않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묘연과 희우가 나누는 혼담을 듣는 난이의 경우를 보자. 모자(母子)의 대화가 "오라버니와 내가 오누이가 아니란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당사자들끼리의 최면"(181면)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난이는 "연기를 뱉지 않는 싸리불처럼 그렇게 속으로, 속으로" 자신을 태웠다. 이렇게 빚어진 난이와 희우의 비극이 어땠는지는 그야말로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침묵은, 금(金)이면서 금(線)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금(禁)의 대상이기도 한 것이다.

말없이 삭히는 사람들은 멋있고 기품 있어 보인다. 이 작품의 인물군이 최상류층 영의정부터 중인인 역관까지 포진되어 있는데도 모두 한 사람처럼 ‘선비의 언어’를 구사하고 있는 듯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왜곡되고 오염된 말들 속에서 입을 다물기는 차라리 쉽다. 난세(亂世)일수록 성인들은 산에 들어가 속세의 언어를 멀리하며 살았다. 그러나 말을 끊는다고, 욕망까지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입력된 것은 반드시 출력될’ 수밖에 없듯이, 그 욕망은 다른 어떤 방식을 통해서라도 배설되기 마련이다. 어린 아이들은 말해지지 않은 자기의 욕망을 알아달라고 하루 종일 칭얼댄다.


“찾지 못하게 꽁꽁 숨지만, 시간이 흐르면 어서 찾아주기를 원하는, 그래서 찾아주지 않으면 오히려 실망스러운, 하여 괜스레 심통이 나버리는 내 심리가 황당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나는 숨기 시작할 때부터 언젠가는 나를 찾아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그에 마땅한 자리를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깊이 숨어들기도, 그렇다고 대충 숨기도 뭣해 안절부절못하다가 불명예스럽게 걸리느니 차라리 술래가 되는 게 속 편했다.” (222면)


결국 ‘말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진실성을 보장받고자 했던 『달을 먹다』의 인물들의 말하기 방식은 유감스럽게도 ‘운명적으로’ 실패한다. 속화된 언어에 묻히기가 두려워 입을 닫은 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라는 형식에 내재된 근원적인 소통의 열망까지 이기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침묵(沈黙)은 ‘가라앉는 어둠’이라서 늪처럼 깊고 멀어질 뿐, 이해와 오해의 간격을 좁히기에는 오히려 역부족이다. 다언삭궁의 세계에서 그들은 단지 과묵한 것이 아니라, 말하고 싶고, 말해지고 싶지만 제대로 말할 줄 모르는 실어증 환자들이다. 

 

3. 상대적이고도 절대적인 ‘개별적 진실’의 세계

과묵한 자신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실’의 소유자로서 인식하는 경우는 이 작품이 처음은 아니다. 그들은 이 ‘함께 나눌 수 없는’, ‘상대적인’ 진실을 ‘개별적 진실’이라고 불렀다. 일견 형용모순처럼 보이는 이 어법을 개발한 것은 분명 김훈의 빛나는 성과이다. 그런데 김훈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살핌으로써 김진규의 작품론을 대신할 수도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이면서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김훈 비판에 쓰여진 “개별적 진실을 탐구하는 것과 개별적 진실을 맹목화하는 것은 엄연히 구별되어야 할 성질의 문제다.”(고명철, 「개별화의 마성(魔性)은 공허하다」, 『칼날 위에 서다』, 실천문학사, 2005, 82면.), 혹은 “‘의문문’을 만들 수 없다는 것. 이것이 김훈이 삶에 덧씌우는 운명의 굴레다.”(조효원, 「아름답고 끔찍한 예언-김훈론」, 『세계일보』2008년 1월 1일.)라는 문장들은 김진규의 『달을 먹다』작품론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

침묵은 겉으로 표현될 수 없는 ‘내면’에서 오고, 그 ‘내면’은 ‘개별적 진실’을 담지하고 있는 숭고한 것이다. 작가는 독자에게 진짜 ‘진실’과의 숨바꼭질을 제안하지만, 실제로 이 작가가 하고 있는 것은, ‘말없이 초연하고 쿨한’ 자신의 모습에서 풍겨 나오는 고귀한 아우라에 대한 끝 모를 도취이다. 이 작가는 진실은 ‘개별적’이라는 것만을 강조할 뿐, 그 개별적 진실을 담지하고 있는 주체들의 차별성에 대해서는 끝내 침묵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진실은 상대적, 개별적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독자로 하여금 오직 ‘나’ 만이 ’진실의 담지자‘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보편적인 진실로 받아들이게 하려는 정신구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개별적 진실의 맹목화는 곧, 내면의 맹목화이다. 그 ‘개별적 진실’을 담지하고 있는 내면의 주체는 오로지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다. 타인의 내면에 대해서는 오해를 하거나 거짓말을 하기 쉽다. 이 작품에서 개별성이 ‘자기중심성’으로 환원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하여 개별적 진실은 ‘일회적 진실’에 불과하게 되는데, 이것도 ‘진실’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김진규, 그녀가 만든 고풍스런 세상은 말없고 멋진 외경(畏敬)의 인물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이런 세상은 천박하고 가벼운 자들로 꽉 찬 세상만큼이나 위험하고 비극적이다. 이해와 오해의 간격은 여전하고, 소통 가능성 역시 요원하다. 그래서 이 작가는 할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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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쇼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퀴즈쇼’가 청춘의 은유가 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맥락에서다. 퀴즈의 두 가지 메카니즘, ‘질문’과 ‘편력’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오리아나 팔라치가 말했듯, 질문자는 권력자다. 백과사전에서 ‘질문’의 의미를 검색하면, 으레, ‘질문의 화살을 던지다’ 라는 공세(攻勢)적인 용례가 열람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질문이 권력이 되는 것은, 인터뷰에서 그러하듯 퀴즈쇼에서도 마찬가지다. 질문하는 사람은 몰라서 물어보는 것이 아니며, 그러기에 주눅 들지 않는다. 김영하의 『퀴즈쇼』에서 당장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비좁은 고시원에 앉아 유일한 창인 빌게이츠의 창을 통해 퀴즈를 출제하는 이민수의 옹색함은 오로지 그가 출제하는 퀴즈를 통해서만 은폐될 수 있다. 퀴즈는 그에게, 낮은 곳에 처해 있어도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방안을 스윽 둘러보며 퀴즈거리를 찾는 출제자의 모습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조물주의 모습을 닮아 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퀴즈쇼가 한낱 ‘쇼’로 취급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퀴즈쇼의 질문들은 궁극적으로 ‘쇼’를 위해 던져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민수가 참가했던 휘황찬란한 퀴즈쇼의 쇼비지니스적 세팅이 그러했듯, 퀴즈는 ‘보이기’ 위한 것이고 ‘드러냄’을 위한 것이다. 퀴즈의 탄생부터가 그러하다. 문제를 출제하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서적을 통독하는(절대 정독이 아닌) 출제자들의 독서편력을 보자. 퀴즈의 미덕은 무엇보다도 ‘잡학다식’이다. 특정 분야에서 탁월하게 전문적일 필요는 없다. ‘인생의 루저‘라는 선고를 받은 이민수가,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은, 지식에 대한 편력과 강박으로부터 비롯된다. 비블리오매니아적 취향을 그대로 드러내는 지원 아버지의 서재는, 한편으로 그러한 서재를 구상하고 상상하는 이민수의 머릿속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허영과 편력의 욕망은 ’계급‘보다 더 중요하며, 더 본질적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서적과, 잡지 코스모스 등을 탐독한 후, 블로그에 후기를 몇 줄 끄적이는 이십대들은 똑똑하기 이전에 멋져 보인다. 연구자의 인생을 살고 싶진 않지만, 베스티즈와 매일경제를 아우르는 ‘교양인’이 되고 싶어하는 건 미드를 즐겨보는 대한민국 이천년대 청년들이 학습한 ‘로망’이다. 독서 편력과 지적 허영은 ‘헛된 것’이지만, 그들에게는 그들 스스로 상상하는 그들 자신의 모습이 되기 위한 지난하면서도 필수적인 도정이다.

그러므로 퀴즈쇼는 ‘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것이 생존의 장(場)이 되는 순간, 청춘들은 그것을 견디고 싶지 않다. 회사의 ‘전사(戰士)’로서 ‘게임’에 임하는 이민수가 겪는 불안과 고통은 이제 더 이상 ‘유희’가 아닌 삶의 무게이자 고통으로 다가온다. 말하자면, 청춘, 그것은 답할 시간도 충분히 주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무차별적인 질문공세가 이어지는 오랜 물음의 시기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퀴즈쇼에서와 달리, 인생은 반문(反問)의 여지를 허용한다. 스포트라이트와 부저만이 무기로 주어지는 퀴즈쇼에서와 달리, ‘쇼’가 아닌 ‘실전’에서 청춘들은 ‘반문’이라는 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 반문한다는 건 하나의 전략이다. 물음에 답할 시간도 벌 수 있고, 잘 이용하면, 질문을 뒤집어 오히려 전세를 수세에서 공세로 역전시킬 수도 있다.

볼품없어 보이지만, 반문은 그들이 행할 수 있는 유일한 ‘사보타주’니까.

첨언(添言)

그런데, 김영하가 도대체 왜 이십대를 ‘위해’ 그들에게 ‘바치는’ 이 소설을 썼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한 권의 책이 하나의 질문이라면, 퀴즈방에서 출제자는 누군가를 ‘위해’ 문제를 내지 않는다. 그동안 갈고 닦은 자신의 지적 편력의 정도를 확인해 보고, 약간의 쾌감이 주어진다면 그 뿐이다. 퀴즈쇼를 가능케 하는 본질적인 욕망은 자기만족이 아니던가.

다시 말하면 김영하는, ‘자신’의 이십대를 위해 썼고, 나아가 이십대를 반추하고 내려다 볼 수 있는 자신의 ‘지금’을 위해 썼다. 게다가 원래 20대는 김영하식의 ‘첨단의 감각’으로만 살지 않는다!!

끝까지 솔직해지기를 거부하는 이 작가의 ‘쿨한’ 필치와 유머는, 어떤 면에서 여전히 ‘위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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