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결혼이라는 소설 1
제프리 유제니디스 지음, 김희용 옮김 / 민음사 / 2017년 7월
평점 :
절판


마음에 드는 소설에 대한 리뷰를 작성할 때면 은근히 긴장되어서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 짧은 필력으로 이렇게 써보고 저렇게 써보아도 이 글을 읽게 될 사람들의 마음에 쏙 들게 어필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책의 내용 속에 내가 이 책을 읽고 느낀 기분이 마침맞게 묘사되어 있었다. 오호라, 바로 이거였다!


레너드가 회복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어려운 책을 읽는 경험과 비슷했다. 말년의 제임스의 작품이나 [안나 카레니나]의 토지 개혁에 관한 부분을 애써 읽어나가다가 별안간 다시 만족스러운 부분에 도달하고 점점 내용이 좋아지더니 결국 온통 마음을 빼앗겨 궁극적으로는 즐거움을 배가시켜 준다는 이유로 이전의 따분했던 부분에 거의 감사할 지경이 되는 경험 말이다. <2권 p286>


위의 문장에 나오는 “이전의 따분했던 부분”이 이 책에도 존재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매들린과 레너드, 미첼은 브라운 대학교의 대학원생이다. 그런 배경 덕분에 그들의 전공과 관련한 수업(기호학, 종교학, 영문학, 생물학)을 바탕으로 하는 학술적인 내용들이 적지 않게 나온다. 음… 그들의 난해한 토론과 사색은 나에게 꽤나 버거운 내용이었다. 특히 기호학 수업 내용은 저자가 브라운 대학교를 다니면서 본인의 경험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묘사가 소상하다. 이러한 연유로 1권 중반까지는 이야기에 속도가 붙지 않아서 인내심을 요한다. 이 고비를 잘 넘기고 매들린과 레너드가 교제를 하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제법 급물살을 타며, 2권까지 읽고 책을 덮는 순간이 되면 이 책에 온통 빼앗긴 마음을 추스리느라 여념이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의 영어 원제는 “The Marriage Plot”이다.(플롯이라는 단어가 한번에 쉽게 딱 와닿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에 “결혼이라는 소설”로 제목이 바꾸었으리라 짐작한다.) 소설이라는 문학 형식이 생긴 이래, 소설에서 결혼이라는 플롯의 자리매김은 변함없이 확고하다. 결혼을 하거나 안 하거나 결혼이라는 화두는 남녀관계에 맞물려 시대에 맞게 끊임없이 변주되어 왔다. 제프리 유제니디스는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여자와 두 남자의 관계를 통해 결혼이 가지는 의미를 이야기한다. 


나는 시종일관 매들린에게 감정이입을 해서 레너드와 미첼을 저울질했다. 이미 멋모르고 결혼해서 애엄마인 내가 이제 와서 저울질이 무슨 소용이겠냐만은. 그런데 결혼은 원래 멋모르는 상태에서만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매들린과 레너드도 그렇기에 결혼했다. 나 또한 그랬듯 아래와 같은 무모한 믿음을 가지고.


그녀는 결혼에 관한 앨윈의 불만이 결혼 생활과 남자들에 대한 일반적인 불만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이면 누구나 그러듯 매들린은 자신의 관계가 다른 모든 관계와 다르리라고, 전형적인 문제의 영향을 받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1권 p498>


하지만 이 소설의 결말에서 미첼은 변화했다. 그는 더이상 멋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결혼이라는 형식이 사랑을 완성하지 않으며 사랑은 완성이 없고 완성의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았으리라. 그는 매들린을 레너드와 다른 방식으로 사랑했고, 결국 다른 선택을 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레너드와 매들린의 사이가 파경으로 이르는 과정에서 나오는 레너드의 심리 묘사였다. 작가의 필력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문장들은 이 책의 백미였다. 문장들이 폐부 깊숙이 찔러 들어와서 페이지마다 잠시 호흡을 골라야했다. 가령 이런 문장들….


“어머니는 널 안 좋아하셔.” 그 단어들이 물리적 타격처럼 레너드를 강타했다. 단지 매들린이 말한 내용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것도 충분히 불쾌했지만 그 내용을 털어놓기로 한 매들린의 결정 때문이었다. 그런 말은 일단 언급되면 쉽게 되돌릴 수 없는 법이다. 지금부터 레너드와 필리다가 한 방에 있을 때마다 그 말이 그곳에 도사리게 될 터였다. 그것은 매들린이 장차 그런 상황이 벌어지리라고 예상하지 않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1권 p136>


레너드는 바닥에 뿌리박힌 듯 서 있었다.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지만 계속 아주 빠르게 깜박거리니 눈물방울이 흘러내리지는 않았다. 그가 리튬을 증오하는 만큼이나 그 순간 그것은 그의 친구였다. 레너드는 자신에게 돌진하려고 기다리는 거대한 슬픔의 파도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슬픈 현실이 정통으로 그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막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었다. 마치 물이 가득 들어 있는 투명한 작은 비닐봉지를 꽉 쥐어짜 젖지는 않으면서도 그 액체의 모든 속성을 느끼는 것과 같았다. 그러니 최소한 그것만큼은 고맙게 여길 만했다. 엉망이 된 인생도 온전히 그의 것은 아니었다.  <1권 p140>


이 모든 경우에서, 자신이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미처 알기도 전에 상처는 이미 나 있었다. 최악인 점은 해가 감에 따라 이런 기억들이 머릿속 비밀 상자에 보관했다가 종종 뒤적거려 꺼내 보는 소중한 소지품처럼 되어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것들을 불행이라는 문을 여는 열쇠였다. 그것들은 삶이 공평하지 않다는 증거였다. 운 좋은 아이가 아니라면 나이를 먹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운이 좋지 않았다는 것을 꺠닫기 마련이다. 그러고 나서는 그것이 온 생각을 지배해 버리기 마련이다. <1권 p144>


제프리 유제니디스는 복잡미묘하고도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모호한 마음에 언어로 정확한 형상을 부여한다. 그의 정교하고 유려하고 우아한 문장을 읽노라면 거울에 비친 마음을 또렷이 마주보는 기분이 들었다. 레너드의 마음을, 레너드의 마음에 덧대어진 내 마음을. 긴말해서 뭐하겠는가. 난 그냥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지만 이렇게 말하면 임팩트와 설득력이 떨어질테니 이 책을 한마디로 소개할 수 있는 문장도 책 속 명문장을 빌려 말해볼 수밖에.

 

삶의 소음을 뚫고 도달해 와락 멱살을 움켜잡고 가장 진실된 것들에 관해 말해 주는 책이 몇 권 있다. <1권 p518>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보다는 이 책을 다 읽고나서 더더욱 가슴 벅찼다. 문장들을 자꾸 곱씹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문장들이 자꾸 마음에 스며든다. 나는 매들린과 레너드와 미첼 때문에 얼마나 가슴 먹먹했는지. 하아— 나도 모르게 장탄식을 한다. 그리고 엄지를 치켜든다. 역시 제프리 유제니디스! 여러분도 기꺼이 이 책에 멱살 잡히시길. 우리들의 젊은 날에 가장 진실된 것들에 관해 말해주는 이야기를 만나고 발견하시길….




* 해당 출판사로부터 이 책을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이며 이 책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이고 솔직한 애정의 고백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의 정신 - 세상을 바꾼 책에 대한 소문과 진실
강창래 지음 / 알마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우스갯소리로 고전이란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라고 한다. 다양한 단체와 기관의 권장도서 목록에 수록되고 저명 인사들이 추천하지만 어렵거나 지루해서 읽어보지도 않고 훌륭한 책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책이 고전이다. 읽었다 하더라도 거기에 대해 감히 다른 의견이나 비판을 하면 비난을 받을까봐 입을 다물게 만드는 책 역시 고전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벌거벗은 임금님’을 모시는 신하나 백성처럼 읽지도 않은 고전 앞에서 박수치고 찬사를 보낼 때 ‘벌거벗은 임금님’의 실체를 큰 소리로 외치는 아이 같은 존재가 바로 이 책, [책의 정신]이다.


이 세상 모든 책은 하나하나가 다 하나의 편견이다. 인간은 모두가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들을 뿐 아니라 쓰고 싶은 것만 쓴다. (p8)


재작년에 출간되어 지금도 베스트셀러로 팔리는 책 중에 아들러의 심리학을 바탕으로 쓴 책이 있다. 지인 중에 자신의 감정을 제때 표현하지 못해서 다른 사람의 말에 반박을 하지 못했던 순간을 상처로 여기는 사람이 있는데, 베스트셀러로 팔리던 그 책을 읽고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고는 그때 그때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며 살기로 했다고 말하며 사람들과의 작은 갈등과 오해에도 여과없이 감정을 즉홍적인 말로 쏟아버려 물의를 빚곤 했다. 위에 인용한 저자의 말처럼 지인은 '하나의 편견인 책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은 것'이다. 독서란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함인데 오히려 주관성, 즉 편견을 강화했던 것이다. 순간에 머무는 베스트셀러도 이럴진데 오랜 시간동안 화자되어온 고전에서 강화된 편견은 거의 철옹성에 가깝지 않을까...


편견은 수많은 편견을 접함으로써 해소된다. (생략)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애쓸 때 내가 가진 편견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이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방법, 함께 살아가는 방법까지 배울 수 있다. (p9)


한 권의 책만 읽고 그 책을 맹신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책의 정신’은 고전이 위대하고 무조건 옳다는 편견에 다른 편견을 제시해서 고전에 대한 편견을 해소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책에 맞서는 책을 제시한 책이자 책에 대한 책, 즉 ‘메타북’이다. 이 책은 고전에 대한 철옹성 같은 믿음의 체계를 무너뜨리고 독서의 체계를 새롭게 쌓아올릴 수 있는 안목을 갖출 수 있도록 우리의 정신에 일침을 가하는 다섯 가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이 세상이 좋은 책을 통해 진보해왔다면 좋은 책이란 어떤 책이었는지에 대해 묻는다. 여기서 로버트 단턴의 [책의 혁명]이 언급된다. 로버트 단턴은 프랑스대혁명을 가능케 했던 책이 우리가 흔히 예상할 수 있는 유명한 계몽사상가들의 저작물이 아니라 포르노소설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인권의 발명]의 저자인 린 헌트 또한 포르노소설이 인권의 발명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한다.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여기서 우리의 편견은 와르르 무너진다. 포르노소설이 당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하나의 공감대로 묶어주는 획기적인 매개체였다는 것, 자연스럽게 즐기고 읽던 포르노소설이 어느 날 갑자기 그런 것을 만들어 배포하면 범죄라고 규정하면서 ‘포르노그래피’라는 부정적인 개념의 발명으로 금지법까지 만들어졌던 이유가 국가가 국민을 통제하기 위해,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포르노에 대한 편견을 해소할 수 있는 이해를 제시해준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사람들에게 읽히지 않고도 세상을 바꾸었던 책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에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와 갈릴레오의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가 있다. 이 책들은 지구 중심의 우주관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신의 선택을 받은 왕이 국가를 다스린다는 전제군주제를 크게 뒤흔들었다. 당시 우주의 조화를 의심하는 것은 정치체제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난해하기 그지 없어서 한 줌도 안 되는 전문가들만 이해할 수 있는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해설판으로 먼저 출간했던 프랑스가 오랜 경쟁 상대였던 영국을 제치고 과학사를 어떻게 바꾸었는지와 뉴턴이 연금술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만유인력의 발견도 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세 번째 이야기는 고전 중의 고전이라 불리는 플라톤의 저작물에서 시작해서 공자의 [논어]로 이어진다. 소크라테스에 관해 남겨진 저작물 중 플라톤의 저작물만 고전이 되고 크세노폰의 저작물은 알려지지 않은 이유,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에서 민주주의를 완성했던 페리클레스나 노예제를 없애려 했으며 민주주의에 초석을 놓은 솔론과 달리 독재정치를 지지했다는 사실, 마찬가지로 공자의 [논어]도 성인의 독재를 이상적인 정치로 보았으며 지배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보수적인 책이며 민주주의에 가까운 생각을 펼친 사람은 묵자였다고 말한다. 저자는 보수적인 내용을 담은 [논어]와 공자에 대한 이야기가 줄어야 진보적인 [묵자]에 대한 관심이 생겨날 가능성이 커진다고 하며 묵자를 우리 삶속에서 살려내려면 묵자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심이 세상을 조금씩 바꿀 수 있다고.


네 번째 이야기는 ‘한 인간을 결정하는 것이 본성인가 양육인가’에 대한 오래된 논쟁의 역사와 내용을 다룬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과히 그 분량만큼이나 편견에 지진이 일어나고 수많은 편견이 쓰나미처럼 밀려와 편견을 해소하는 충격을 맛볼 수 있는 장이다. 마거릿 미드의 [사모아의 청소년]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부터 시작해서, 8개원 된 남자 아기가 포경 수술을 받다가 성기를 잃는 사고 때문에 존 머니의 극단적인 양육론에 따라 여자로 길러지는 사건, 배다른 사촌형인 찰스 다윈의 저작물에서 받은 영향을 받아 ‘우생학’을 탄생시킨 프랜시스 골턴과 존 왓슨의 ‘아기 앨버트 실험’, 스키너의 조작적 조건화는 지금까지 개별적으로 읽었던 과학책의 지식이 유발하는 편견의 위험성을 소름 돋을 정도로 깨닫게 해주는 내용이었다. 


다섯 번째 이야기는 책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학살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극단적인 정권들은 자신과 신념이 다른 사상을 없애는 방법으로 책의 학살을 자행해왔다. 여기서 [20세기 이데올로기, 책을 학살하다]라는 책이 나오는데 나치가 어마어마한 규모로 책을 불태웠다는 소식을 들은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생각을 없애려면 사람도 불태워야지.” 프로이트의 말처럼 책의 학살은 홀로코스트와 따로 떨어진 사건이 아니며 책의 학살은 인종말살 사건의 전조로 먼저 일어나기도 하고, 함께 벌어지기도 한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이 책의 이야기는 끝난다. 하지만 “한 권의 책을 제대로 다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 시점은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가 아니라 독후감을 끝낼 때다.(p7)라는 저자의 말 때문에 이 책에 대한 독후감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고전에 대한 편견을 수많은 편견으로 해소해주고 있지만 이 책 역시 하나의 편견이기도 하다. 세상은 그렇게 수많은 책들이 이루는 편견이 모여서 진실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 헤세의 [데미안] 속 유명한 구절이 떠오른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Abraxas).” 책의 정신은 바로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기 위해 투쟁하는 압락사스의 정신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6-05-01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책에 대한 감상이 정리되지 않으면, 안 읽는 걸로 칩니다. 그러면 몇 달 지나고 나서야 다시 읽습니다. 그러다가 읽다가 마는 경우가 있는데, 다시 처음부터 읽어요. 이렇게 무한 루트에 빠지게 됩니다. ㅎㅎㅎ

원더북 2016-05-01 16:50   좋아요 1 | URL
모든 책에 감상을 다 정리하진 못하지만 메모라도 정리하지 않은 책은 저도 안 읽은 걸로 치게 되더라구요. 몇 달 지나면 정말 거짓말처럼 홀랑 잊어버려서 다시 처음부터 읽어야 해요 ㅎㅎ;; 근데 정말 좋은 책은 감상을 정리해도 거기서 끝나지 않고 무한 루트로 읽게 만드는 것 같아요^^
 
공부할 권리 - 품위 있는 삶을 위한 인문학 선언
정여울 지음 / 민음사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좋아하는 저자가 짧은 간격으로 책을 내면 괜스레 의심과 기우가 생긴다. 저자의 진정성과 열정이 상업성과 타협을 해서 변절된 것은 아닌지, 내용의 깊이가 떨어지고 구태의연한 글을 써내서 식상해진 건 아닌지…? 정여울은 내가 손에 꼽을만큼 좋아하는 국내 저자 중 한 명이기 때문에 이 책의 출간 소식을 접했을 때 반갑기도 했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이에 대한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여울에 대한 나의 애정은 이 책을 읽고도 유효하다는 것과 나는 또 이 저자의 책을 기다리겠구나 하는 마음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는 영재원에 들어가기 위해, 중학교 때는 특목고와 자사고에 들어가기 위해, 고등학교 때는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대학교 때는 취업을 위해, 취업을 하면 승진을 위해, 재취업을 위한 재교육까지…. 대한민국의 공부는 끝이 없다. 이 땅에서 공부는 철저하게 생존을 위한 ‘의무’의 형태로 존재하며 이 의무를 행하지 않으면 낙오자가 되기 십상이다. 평생에 걸쳐 공부를 하지만 공부를 할수록 열정은 고갈되고 정신은 피폐해지며 삶은 더 팍팍해진다. 이쯤되면 공부의 의무 따위는 떨쳐버리고 공부의 노예를 벗어나 자유인이 되라고 조언을 해주는 책이 나올 법한데 저자 정여울은 공부만이 잘 사는 길이라고 공부를 하라고 독려하고 있다. 다만 공부는 의무가 아닌 ‘권리’임을 내세우면서.


이 책은 저자가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존엄을 지켜 주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문학과 철학과 역사, 심리학과 신화학에 관한 공부를 통해서 얻어낸 오랜 고민의 결과물이다. 책을 읽으면 저자가 걸어온 공부의 길에 새겨진 발자취가 오롯하게 드러난다. 그 길에는 그리스 고전과 비극과 신화도 있고, 심리학의 대가인 카를 구스타프 융과 아들러도 있으며, 성경이 인용되고, 마르크스와 장 뤽 낭시와 지그문드 바우만이 있고, 고전 문학 작품과 다양한 저자들의 책이, 그리고 영화들이 나온다. 방대한 인문학적 지식이 깔려 있는 책이지만 인문학적 지식이 부족한 독자라도 저자의 글은 조곤조곤 따뜻하게 공부의 길을 안내하기 때문에 읽기에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인문학적 지식이 풍부한 독자라면 저자가 가진 지식의 연결과 뜻밖의 조합들이 빚어낸 사유의 결과물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책 속에서 다루는 내용 중 심리학자 로버트 A.존슨의 [내면의 황금]이라는 책이 소개되는 부분이 있다. 이 책은 대부 혹은 대모라는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증언하는데, 저자는 대모나 대부를 실제 세상에서 만나거나 찾지 못한다면 너대니얼 호손의 소설 [큰바위 얼굴]에서처럼 사물을 통해서 찾을 수도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내면의 황금을 ‘큰바위 얼굴’이라는 이상적인 사물에서 찾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저 거대한 바위산일 뿐이지만 거기에 아름다운 의미를 부여했지요. 즉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영혼의 정수인 내면의 황금을 맡김으로써 큰바위 얼굴은 한 시대의 뜨거운 상징이자 인류 보편의 ‘내면의 황금’이 된 것이지요.

(p155)

저자의 책속에는 인류 보편의 ‘내면의 황금’이 된 여러 책들이 소개된다. ‘큰바위 얼굴’에서 사물을 통해 멘토를 찾은 것처럼 진정한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실제 세상에서 만나지 못한 진정한 공부의 멘토를 이 책에서 찾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책 또한 그런 멘토의 역할을 해주는 책으로 권하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말한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상처를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일이었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은 내 스스로 마취약도 없이 내 상처를 꿰매는 멋진 치유의 시간이었습니다. 아무리 괴로운 일이 있어도 ‘삶은 아직 더 살아야만 풀어지는 아름다운 신비’임을 깨닫게 한 것이 나에게는 공부였습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공부가 필요한 이유를 이보다 더 가슴에 와닿게 표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공부할 권리는 살아갈 권리이고 행복할 권리이다.




* 해당 출판사로부터 이 책을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스타로 맛보는 후룩후룩 이탈리아 역사 이케가미 슌이치 유럽사 시리즈
이케가미 슌이치 지음, 김경원 옮김, 김중석 그림 / 돌베개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첫눈에 반하는 책이라는 것도 있다. 어떤 내용인지 저자가 누구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모양새가 예쁜 책이 그러하다. [파스타로 맛보는 후룩후룩 이탈리아 역사]와 [과자로 맛보는 와삭바삭 프랑스 역사]가 내게는 그런 책이었다. 내용에 묘하게 잘 어울리는 깜찍한 일러스트들과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국기 색깔의 표지가 일단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책부터 갖고 싶게 만들었다. [파스타로 맛보는 후룩후룩 이탈리아 역사]는 감사하게도 서평을 쓰기 위해 책을 제공받았고, [과자로 맛보는 와삭바삭 프랑스 역사]는 내가 구입을 해서 두 권을 갖추었다. 두 권으로 끝나긴 아까운 시리즈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파스타에 대해서 메뉴판을 고를 때 말고는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파스타와 스파게티와 마카로니의 차이가 뭔지도 몰랐다. 간단히 구분하자면 파스타가 총칭인데, 파스타는 이 책에서 정의내린 바로는 ‘곡물 가루에 물을 섞어 반죽해 모양을 만든 다음 삶거나 쪄서 먹는, 탄력과 점착성이 있는 요리 재료’이다. 그 중에서 길고 가는 면의 형태로 생긴 종류가 스파게티, 작고 모양이 있는 종류가 마카로니(이 책에선 마케로니라고 부름)쯤 된다. (나만 헛갈렸나.. ㅎㅎ;;;)


본문에 나오는 다양한 파스타들 사진. 특히 1번 만두 파스타가 제일 신기했다.  


요즘은 흔하게 파스타 전문점을 찾아볼 수 있지만 내가 처음 파스타 전문점을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를 다니던1992~3년이었다. 이 시기에 ‘소렌토’라는 스파게티 전문점이 생겼었고, 인스턴트 혹은 엉성한 분식 스타일의 미트소스 스파게티만 알고 있었던 내가 다양한 스파게티의 종류를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그때만 해도 스파게티는 특별한 사람을 만날 때 가끔 먹는 음식이었다. 나는 아직도 파스타가 가끔 먹고 싶지 자주 먹고 싶은 입맛은 아닌데, 세대가 달라질수록 파스타를 먹는 빈도수가 늘고 있음을 느낀다. 아이들을 데리고 외식을 할 때면 아이들의 요구로 파스타 전문점을 빈번히 가게 된다. 갈 때마다 파스타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매번 시키는 파스타만 주문했다. 이 책을 보고서 이제 파스타에 대해 좀 알 때도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관심있게 읽었다. 


저자가 일본인이고 번역서라서 책의 글머리에 ‘일본 최초의 파스타’나 ‘일본의 국수 문화와 파스타’와 같은 일본의 파스타 사정을 설명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한국의 파스타 사정도 내용을 추가했으면 더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글머리를 읽고 나면 본격적으로 파스타를 통해 배우는 맛있는 미시사가 시작된다. 밀의 역사부터 시작해서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해 발명한 건조 파스타의 이야기, 파스타 길드, 처음에는 독성으로 알려진 식물들과 비슷하다고 오해받아 받아들여지지 않은 토마토, 이탈리아 문학에 나오는 파스타 이야기 등. 읽는 재미가 아주 솔솔했다. 특히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 나온 파스타 이야기가 아주 흥미로웠다. 


이탈리아의 전형적인 이상향은 조반니 보카치오가 쓴 [데카메론]의 8일째 세 번째 이야기에 등장하는데, 그곳은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에 걸친 바스크 지방에 있다고 합니다. 근처 일대에는 윤이 나는 최상급 포도주가 강이 되어 흐르고, 포도나무에는 소시지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으며, 산 하나가 강판에 간 파르미자노 레자노 치즈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산 정상에 있는 사람들은 마케로니와 라비올리를 만들어 거세한 수탉 수프에 넣어 삶아 내기만 하면 됩니다. 이렇게 만든 파스타를 산 아래쪽으로 흘려 보내면 산기슭에 있는 사람 누구나 배불리 먹을 수 있습니다. (p129)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 있는 [데카메론]에서 내용을 직접 찾아봤다.


중세 시대의 민중 사이에서는 파스타가 단연 최고의 ‘꿈의 음식’이었던 것이다. 민중들은 가끔 파스타를 일품요리로 즐길 수 있었던 반면, 귀족들은 코스 메뉴 중 하나로 파스타를 곁들여 즐겼다고 한다. 중세를 지나 파스타와 이탈리아 역사 사이의 끈끈한 끈기를 느낄 수 있는 내용은 현대까지 이어진다. 


저자는 말한다. “파스타는 이제 더 이상 이탈리아인만의 것이 아니라 세계의 음식입니다. 이제부터 세계사의 어떤 전개와 발맞추며 진화해 갈까요? 설레는 가슴으로 파스타의 변신을 지켜보고 싶군요.” 그러고보니 한국식으로 변신한 파스타도 요즘 레시피로 꽤 눈에 띈다. 냉이 된장 파스타, 뚝배기고추장 파스타, 김치삼겹 파스타 등…. 후룩후룩. 오늘 저녁은 파스타를 만들어서 아이들에게 파스타 이야기를 들려줘볼까? 파스타와 세계사를 함께 좋아하게 만들어주는 깜찍한 책이 아닐 수 없다.



봉골레 냉이 된장 파스타 레시피 :

 http://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35070&memberNo=2657101&vType=VERTICAL

 

<이 글은 서평 이벤트를 통해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제3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리하게 베인 자국이 만드는 검은 어둠과 원색적인 노랑 바탕의 책의 표지에서부터 경계심이 들었다. 노랑과 검정으로 대비되는 배치는 컬러의 기능 중 ‘주의와 경고’라는 표지(標識)를 가지고 있다. 이 책은 무엇을 경고하고 있고, 나는 무엇에 주의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책을 펼쳐들어 읽었다.


바늘,이 생각났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바늘을 잃어버린 상황이 기억난다. 다른 이들도 한번쯤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지 않을까. 단추를 달거나 솔기가 틑어진 부분을 꼬매겠다고 바쁜 중에 짬을 내서 정신없이 바느질을 하다가 한순간 바늘의 행방을 놓친 경험. 사라진 바늘 때문에 등골이 서늘해지고 오스스한 기분. 이 느낌은 바늘을 찾을 때까지 서서히 증폭된다. 이제 바늘은 바늘이 아니다. 항상 같은 자리에 두고 사용하기 전에는 존재감이 없던 바늘이 내 통제를 벗어나 다른 곳으로 사라지면, 언제 어디서 나타나 나를 깊숙히 찌를지도 모른다는 환상과 공포와 위협의 대상이 된다. 환상과 공포와 위협의 대상이 오히려 칼이라면 대놓고 두려움을 나타내고 경계를 하고 도망가서 벗어나기라도 하면 된다. 그러나 작은 바늘은 히스테리에 가까운 조심성과 불안을 지닌 채 일상 속에서 위험이 도사리는 공존이 가능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바늘이 내 마음을 떠돌았다. 칼에 의한 난도질이라기보다는 작은 바늘이 쑤욱 찔러들어오는 느낌. 일상에서 난도질이 내게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비현실적인 악몽의 느낌이라면 바늘에 찔리는 것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깨어있는 느낌이다. 칼이 아닌, 작은 바늘에게 느끼는 두려움이 소설 속 환상을 환상에 그치게 하지 않고 현실의 메타포로 읽어내게 만들었다. 소설 속 이야기들은 직접적인 나의 일과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읽어내진 않았지만, 허구이면서 남의 일과 남의 경험으로 읽어내더라도 이미 충분히 공감 가능한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불편함의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바라지만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에 반발하는 마음, 내게는 해당 사항이 없길 바라지만 거리두기가 불가능해서 나를 포함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차가운 인식, 그리고 기시감 때문이다. 


이 책은 조각난 현실에 환상을 덧대어 여덟 개의 단편으로 꿰맨 책이다.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처럼 신화적, 동화적 모티프들이 현실의 곳곳에 신랄하고 잔혹하게 덩굴손을 뻗어있다. ‘식우’에 녹아내린 건 피부 뿐만 아니라 위선과 치부이며, 그로 인해 드러나는 건 뼈와 속살 뿐만 아니라 추악한 인간의 본심이다. 어느 날, 반지하방의 거실 겸 부엌에 웅크리고 있는 정체모를 흑색 장모의 아름드리 생물인 ‘이물’은 자기자신의 공포가 타자화되고 형상화된 모습으로 보인다. 이처럼 환상을 덧대어 꿰맸다고 현실이 가려지고 덮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더욱 극명히 드러나게 꿰맨 작가의 솜씨가 놀랍다. 꿰매던 바늘은 책 속에 남겨졌다. 책을 읽는 동안 바늘은 ‘이물’처럼 지극히 조용한 침입자가 되어 마음 한켠에 들어와 섬뜩함과 위협의 감정을 안겨 준다. 바늘을 찾아서 찔리지 않게 간수하는 건 이제 독자의 몫이다.       


책의 표지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야겠다. 며칠 전 신문에 ‘“난 이렇게 잘 살고 있다”…’인증’하는 사회’’라는 기사가 올라왔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SNS에 행복한 자신을 사진으로 보여주는 인증 문화가 일상이 되었다는 기사다. 많은 사람들이 맛집을 찾아가고, 새로 산 상품을 리뷰하고, 여행지를 갔다온 사진을 올린다. 인증샷을 올리는 이유는 자기가 이렇게 잘 나가고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은근 과시하기 위한 허영이 기저에 깔려있다. 모두 죄다 행복한 모습만 올리니 자신만 불행한 것 같은 상대적인 박탈감에 우울증을 느끼는 사회가 되었다. 행복한 척 하기 위해 불행은 쉬쉬할 수 밖에 없다. 책의 표지색인 노랑은 겉으로 드러내어 보여주는 행복처럼 화사하고 밝다. 노랑을 가르는 검정은 불행을 쉬쉬하는 듯 가늘고 얇지만 노랑 바탕에서 유난히 도드라진다. 검정의 어둠은 함몰되어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보인다. 보여지는 행복 가운데 불거져 나온 불행은 존재감이 너무나 두드러진다. 불행은 언제나 상대적이다. 이제 책의 표지는 불행의 표지(標識)로 보인다. ‘관통’에서 미온은 검고 긴 구멍 안으로 사라졌다. 검은 구멍 안은 어떤 곳일까. ‘여기 말고 저기, 그래 어쩌면 거기’에서 하이가 사라진 곳과 같지 않을까.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하이는 필시 지금 다른 세상에 잠시 다녀오는 중이고 그것은 자기의 머릿속에서 흔들리다 주름이 진 의미 불명의 세상이 구체화된 어떤 곳일 테며 거기가 어떤 곳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이 오감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아닌, 세상 안이면서 동시에 세상 밖이리라고.(p42)

혹은, 노랑이 최소한의 온기로 이루어진 세계이고 베어진 검은 구멍은 고무마개가 뽑힌 영혼의 배수구와 같은 지도 모르겠다. 

유성과 점성과 최소한의 온기로 이루어진 세계가 감은 두 눈 안에 착시의 잔상처럼 펼쳐졌다가 곧 흔들리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형태는 기묘했으나 따뜻했고 세상이라는 산포도 안에 찍힌 그 어떤 점보다도 합리적이며 생성과 소멸의 시기를 잘 아는 세계였는데, 그것이 다 녹고 나자 가슴 어딘가를 막고 있던 고무마개가 뽑혀 나가면서 온몸이 영혼의 배수구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심장이 소용돌이쳤다. 하이가 가끔, 무엇보다 마지막으로 다다른 곳의 풍경은 어떠했는지 나는 궁금했다.(p45)


우리가 살아가는 곳은 세상 안인가, 세상 밖인가. 아니면 세상 안이면서 동시에 세상 밖인가, 세상 안도 세상 밖도 아닌가. 삶은 불가해하다. 진실은 모호하다. 삶의 불가해와 진실의 모호함 사이에서 환상이 배태된다. 구병모의 소설은 바로 이 지점에서 태어났고, 환상을 차용하지만 현실에게 빚지지 않는다. 그녀는 철저하게 값을 지불했고, 읽는 이에게도 대가를 요구한다. 읽는 이는 마음을 내어줄 수 밖에 없다. 그것이 고통이더라도.


마지막으로 책을 읽은 다른 이들에게 묻고 싶어진다. 책을 다 읽은 후에 당신은 바늘은 찾았는지. 책을 읽는 동안 나처럼 몹시도 불편했고 이곳저곳 찔려서 상처투성이가 되었는지. 그랬다면 함께 바늘을 부러뜨려 버리자고 말하고 싶다. 다시는 마음속에서 돌아다니지 않게. 나만은 아니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나만이 아니라 누구도 아니기를 바라는 선의가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 바늘로 검은 구멍을 꿰매어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구멍이 더 커지지 않게, 많은 사람들이 구멍으로 계속해서 사라지지 않게. 꿰매는 솜씨는 서툴지만 그렇게라도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03-27 2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