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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 - 그람시 산문선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김종법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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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한 사람을 증오한다”

그람시가 초기 사회혁명가와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가졌던 시대정신을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편집한 정치평론집인 이 책의 첫문장은 이렇게 선언하며 시작한다. ‘무관심을 증오한다’는 이 책의 짧은 글의 소제목 중 하나이지만 이 책의 전체는 물론 그람시의 사상을 관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람시는 “산다는 것은 지지자(참여자)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라는 말을 믿었으며 무관심은 무기력이고 기생적인 것이며 비겁함일 뿐 진정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일갈한다. 무관심에 대한 그람시의 비판을 더 들어 보자.


 “무관심은 종종 도시를 둘러싼 견고한 성벽보다도, 그리고 도시를 지키고자 하는 전사들의 뜨거운 충성심보다도 훨씬 방어가 잘되는 깊고 깊은 늪이 되기도 한다.(생략) 무관심은 역사 안에서 늘 강력하게 작동했다. 비록 그것이 수동적일지라도 항상 작동했다.(p28)”


역사를 통틀어 대중들의 무관심이라는 묵인이 불러온 크고 작은 참극들이 얼마나 많은가. 홀로코스트의 나치즘이 그랬고, 이 책의 배경인 이탈리아 파시즘도 그랬다. 멀리 갈 것도 없다. 현재의 우리나라 정치행태도 무관심이 낳은 산물이다. 단적인 예로 투표율을 들어보자. 우리나라 투표율은 2011년에 46%로 OECD 국가들 중 최하위였다. 2016년은 58%로 상승했지만, OECD 국가들의 평균 투표율은 70% 수준이라고 한다. 낮은 투표율은 사회나 정치체제에 대한 불만과 불신으로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공동체 문제에 대한 참여가 저조해서 생기는 현상이다. 


대체로 공동체의 문제에 무관심한 사람들은 일의 결과가 좋을 경우에는 조용히 묻어가며 혜택을 고스란히 받지만, 일의 결과가 나쁠 경우에는 결과에까지 무관심하지 않는다. 관심을 가지고 참여한 사람들에게 비난을 아낌없이 퍼붓고 나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며 스스로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암울한 정치 현실과 사회는 상당부분 무관심의 대가이다. “오늘날 우리는 타인의 무능함을 방치하고, 현실을 외면하고 주변 상황과 사회 부조리에 눈감은 잘못에 대한 죗값을 치르고 있다.(p50)”라는 그람시의 말처럼.


1920년대 초반, 전쟁 직후의 이탈리아는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준다면 어떤 체제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거기서 파시즘이 시작되었다. 여기에 IMF 이후 한국의 현실이 겹쳐진다. 먹고사는 문제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부자되세요~”가 덕담이 된 분위기 속에서 경제를 최우선 공약으로 내세운 경제대통령을 뽑았고, 그도 모자라 창조경제대통령까지 또 뽑았다. 그람시가 [감옥에서 보낸 편지]에서 이런 글을 썼던가.


“5년, 8년, 또는 10년째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볼 때,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어떻게 비뚤어지는가를 볼 때, 나는 내가 어떻게 될까를 생각하며 몸서리를 쳤소. 틀림없이 그들도 처음에는 자신들이 결코 이러한 체제에 굴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을 거요. 하지만 그 과정이 너무나 서서히 진행되기 때문에 인식조차 하지 못하면서 그들은 갑자기 완전히 변해버린 오늘의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실제로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정확히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간다오.”


10년째 경제대통령들의 창살없는 치하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비뚤어지지 않았는지, 이러한 체제에 순응하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인식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변해서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우리도 발견하게 되는 건 아닌지, 그러고도 스스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인식할 수 있는 능력까지도 뺏긴 건 아닌지. 이에 대한 확인은 내년 대선 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도 우리는 계속 무관심하며 낮은 투표율로 정치를 묵인할 것인가. “나는 살아 있고 삶에 참여하는 인간이다.( p32)”. 그람시의 말처럼 우리는 살아 있고 참여하는 인간이기를 바란다. 누군가를 뽑기 위해서도 투표를 하지만 뽑지 않기 위해서도 투표를 해야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치는 결코 남 일이 아니다. 우리의 일이다. 관심이 그 시작이다.



덧글.

어이쿵. 쓰다보니 흥분해서 개인적인 독후감을 남발했네요. 책에 대한 평을 조금 덧붙이자면 번역의 문제인지 그람시 문체의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짧은 글들의 분량에 비해 문장들이 읽기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곱씹어야할 내용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로써 16기 신간평가단의 공식 활동이 끝났습니다. 시원섭섭~^^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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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계급투쟁 -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희상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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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두 가지 난국에 빠져 있다. 첫 번째 난국은 난민 사태이다. 시리아의 내전으로 발생한 난민 사태는 작년 9월, 시리아의 세살배기 아이 쿠르디가 터키 해안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사건으로 유럽의 난민 문제가 전세계의 화두로 떠올랐다. 그 이후로 여전히 터키와 그리스의 해안에서는 계속 난민 아이들의 시신이 발견되고 있지만, 난민 문제는 지금까지도 해결책을 찾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두 번째 난국은 테러이다. 프랑스의 파리와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일어난 IS의 테러 사태로 유럽은 대혼란을 겪고 있다. 테러의 대상이 군시설이나 정부 관련 시설만이 아닌, 평범한 문화 공간과 일상의 영역으로 확대되면서 누구도 테러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할 수 없고 마음을 놓을 수도 없음을 확인했다. 난민을 수용해도 문제가 발생하고, 수용하지 않아도 문제가 발생하는 사태와 무차별 테러 앞에서 유럽은 물론이고 세계가 딜레마에 빠졌다. 이러한 전지구적 현안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줄 지식인들의 제언을 기다리던 차에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이 부제인 슬라보예 지젝의 신간을 만났다.


지젝은 책의 초입에서부터 질문과 답을 던진다. “전쟁과 굶주림을 피해 북아프리카와 시리아 해안에 운집해 바다 건너 유럽에서 피난처를 찾고자 안간힘을 쓰는 수십만명의 절박한 난민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물음에는 두 가지 답이 있다고 설명한다. 어떻게 유럽이 수천 명의 사람을 지중해에 빠져 죽게 방치하느냐며 분통을 터뜨리고 유럽이 연대감을 보여 전면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진보 좌파의 답과 유럽의 생활 방식을 수호하기 위해 난민 수용을 거부하며 그들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일갈하는 대중영합주의자들의 답이다. 지젝은 두 가지 모두 나쁜 답이며, 두 가지 중 어떤 것이 더 나쁘냐고 묻는다면 두 가지 다 더 나쁘다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어떤 답을 내어놓아야 할까?


여기에 오스카 와일드의 진단을 빌어 곤경에 처한 난민이 더는 고향 땅을 버리지 않도록 전 세계적으로 사회의 기초를 재건하는 일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라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지젝은 그 원인으로 ‘새로운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를 지적한다. 천연자원을 차지하고 거래하려는 글로벌 기업들이 군벌 지도자와 결탁하여 전쟁과 가난을 양산하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조국을 떠난 난민들이 유럽을 떠돌게 되었다는 얘기다. 그렇기 때문에 난민 문제에 대해서는 공감이나 감상적 연민, 이타주의나 인도주의적인 동정과 연대 의식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문제 의식과 현실비판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아프리카 난민에 이어 그리스와 다른 유럽 국가의 난민들이 그 뒤를 이을 것이다”고 경고한다. 그러므로 책의 제목처럼 “새로운 계급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새로운 계급은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에 의해 빈부 격차로 발생한 계급을 말하며 자본주의로부터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세계적 연대가 계급투쟁의 방법임을 강조한다. 


난민과 테러의 원인은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 나온 기아의 원인이기도 하다. 이는 세월호 참사의 원인과도 멀지 않고 우리나라의 높은 자살율과 묻지마범죄율의 증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페터 슬로터다이크가 “돈이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고 했다지만 나는 “지구가 돈을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말이 지금의 글로벌 자본주의의 성격을 설명하기에 딱 맞다고 생각한다. 지구가 자본주의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과열되고 응집된 자본의 에너지가 더 큰 재앙을 불러 올 것은 자명하다. 자본주의의 한계와 모순이 적나라하게 폐해로 드러났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권력층과 기득권은 부인하고 싶겠지만!) 지젝을 비롯해서 많은 저자들이 마르크스의 책을 다시 재조명하고, 지그문트 바우만이 사회주의를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반문화’로 제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얇은 책이지만 내용은 결코 얇지 않으며 책의 의미는 두터우나 어렵지 않고 명료하다. 역시 지젝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책이다. 주변에 일독을 권하고 독서모임에서 토론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책값이 두께에 비례해서 조금만 더 저렴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사서 읽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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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도덕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사회평론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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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할까 말까? 한다면 누구랑 하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결혼에 대해 가지는 미혼남녀의 질문은 대체로 이런 내용이다. “결혼은 왜 하는 걸까? 무엇 때문에 하는 걸까?”라는 질문은 빠져 있기 십상인데 결혼을 하든 안 하든 결혼이라는 제도의 존재 이유를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겨온 탓일 것이다. 나부터 결혼이라는 제도의 발생에 대해 의문이나 호기심을 가져본 적이 없음을 시인해야겠다. 이 책은 결혼 제도의 발생부터 오늘날까지의 변천을 살펴본 후, 위의 두 가지 질문이 가지는 중요성과 거기에 답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결혼을 논하기 위해서 반드시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주제는 ‘사랑’과 ‘성’이다. 이 책은 특히 ‘성’을 비중있게 다룬다. 가장 먼저 모계 가족과 부계 가족, 그리고 각 가족의 형태가 원시적인 성윤리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살펴보고, 금욕주의를 바탕으로 한 초기 개신교와 카톨릭교의 왜곡된 성윤리를 바탕으로 한 결혼 제도에 대해 비판한다. 그리고 중세에 이르러 종교와 금욕주의의 억압으로 생겨난 ‘낭만적 사랑’이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쳐서 사랑과 결혼에 대한 왜곡된 기대와 환상에 빠지게 만든다며 낭만적인 결혼관의 위험성을 이야기한다.


러셀은 성매매와 성행위, 성교육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다룬다. 성을 주제로 글을 쓰는 사람은 항상 질책을 당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절대로 성을 이야깃거리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들에게 그 주제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는 비난을 퍼붓는다.(p254)라고 언급한 대로 1929년에 출간한 이 책은 러셀의 노벨문학상 수상(1950년)에 결정적 역할을 했지만 당시 금기시되던 도발적인 성 담론을 다루고 있다는 이유로1940년 뉴욕시립대 임용이 취소되는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자녀를 얻기 위한 기본적인 의학적 사실을 품위 있는 문체로 설명하며 소책자를 집필한 메리 웨어 데넷 부인이 음란 문서를 보낸 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하니(p88), 불과 몇 십년 전까지만 해도 성에 대한 가치관이 사회적으로나 제도적으로도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놀랄 정도였다.


지금은 사정이 나아졌다고 해도 자녀의 성교육 문제를 놓고 보면 아직도 상당히 보수적이고 폐쇄적이긴 마찬가지인 듯하다. 성에 관련된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질문 앞에서, 사춘기 자녀의 호기심 앞에서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성교육에 대한 갈피를 잡지 못하여 당황하거나 둘러대거나 덮어두고 꾸지람을 하는가. 러셀은 특히 자녀의 성교육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자녀들이 성에 대한 자신의 본능과 무의식적 충동으로 인해 죄의식이나 수치심을 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성은 금기하고 감추어야할 대상이 아니라 바르게 인식하고 다루어야 할 대상임을 충분히 알게 해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세계가 악의와 증오로 가득 차 있는 상황에서 과학이 발달하면 더더욱 무서운 재앙이 빚어질 것이다. 따라서 악의와 증오를 감소시키는 것이야말로 인류의 진보를 위한 필수조건이다. 악의와 증오는 대부분 그릇된 성윤리와 부적절한 성교육에서 야기된 것이다. 미래의 문명을 위해서는 새롭고 충실한 성윤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성윤리를 개혁하는 것은 우리 시대에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다.(p236)


포괄적인 성윤리는 성을 단순히 본능적인 욕구로, 또한 위험이 탄생할 수 있는 원천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그런 관점도 중요하긴 하지만, 성이 인간의 삶에 있어서 매우 유익한 요소들과 결부되어 있음을 잊지 않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내가 보기에 으뜸가는 요소는 낭만적인 사랑과 행복한 결혼, 그리고 예술, 이렇게 세 가지이다.(p260)


사랑과 결혼은 원시인들의 본능이 아니다. 잘하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다. 이 책은 인간의 가장 내밀한 감정인 사랑이 단순히 개인 간의 감정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며 두 남녀가 만난 결혼이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근간을 지탱하는 필수적인 요소임을 이해하게 해준다. 동시에 “인생이 제공하는 가장 강렬한 기쁨의 원천”인 사랑의 본질에 대해서 깊이 있게 고민해볼 여지를 남겨준다. 이 책을 더 일찍 만났더라면, 나의 부모님도 이 책을 읽으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대신 앞으로 아이들이 커가는 동안 사춘기를 겪고, 누군가를 사귀고, 결혼을 앞두고 있을 때 다시금 이 책을 읽으며 함께 이야기 나누어 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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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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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무어라 규정해야 할까. ‘에세이’라는 하나의 장르에 예속시킬 수 있을까. 나는 이 책을 ‘소설’로 읽는 기분도 맛보았다. 저자는 자신의 개인사를, 내면의 고백을, 치부를, 상처를, 고통을 소설의 형식을 빌어 이야기 할 수도 있었다. 묘사와 문체, 문장력과 구성 모두 소설의 그것에 비해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왜 에세이를 택했을까. 그것은 ‘용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허구라는 소설의 형식 뒤에 숨지 않고 자신을 오롯이 드러낼 수 있는 용기…. 아니다. 어쩌면 상상력이 소설가보다 부족해서 에세이를 택했을 수도 있다. 딱 에세이를 쓸만큼의 상상력은 발휘할 수 있었으나 소설을 쓸만큼의 상상력에는 못 미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소설과 에세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상력으로, 소설가보다 용감하기에 소설이 아닌 에세이를 쓸 수 있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내용과 소설같은 문학성을 지닌 책이다. 


내가 리베카 솔닛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고병권의 [철학자와 하녀]를 읽은 후였다. [철학자와 하녀]를 펼치자마자 리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고병권은 [이 폐허를 응시하라]를 읽으며 철학의 거처랄까 사명 같은 것을 떠올렸다고 했다. 그것은 지옥에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짓는 일을 말하는 것이며, 깨달음은 천국에서 일어나지 않고, 그리하여 천국에는 철학이 없으며 철학은 지옥을 생존조건으로 삼아 거기서도 좋은 삶을 꾸리려는 자의 것이라고 말한다. 고병권의 글을 읽은 이후로 리베카 솔닛은 내가 주목하는 한 명의 저자가 되었고,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라는 나의 가장 큰 관심사인 키워드로 절묘하게 이루어진 이 책을 만났다. 


우선 목차에 주목하자. 부드러운 호를 그리며 배열한 목차는 13개의 챕터<1.살구/ 2.거울/ 3.얼음/ 4.비행/ 5.숨/ 6.감다/ 7.매듭/ 8.풀다/ 9.숨/ 10.비행/ 11.얼음/ 12.거울/ 13.살구>로 구성되어 있고, 정확하게 가운데 7번째의 챕터를 중심으로 대칭을 이룬다. 7번째 챕터의 제목은 ‘매듭’이다. 그 앞에 ‘감다’가 있고 그 뒤에 ‘풀다’가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대칭이나 ‘매듭’이 내용의 전환점임을 알 수 있다. 목차는 조형적으로 아름다우면서 의미까지 긴밀하게 본문과 연결되어 있다. (감탄)


저자는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라는 마음을 뒤흔드는 질문으로 독자에게 말을 걸어온다. 그녀의 이야기는 100파운드의 살구 더미가 도착한 후, 침실의 바닥을 차지하면서 떠올리게 되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한다. 알츠하이머를 앓는 어머니 때문에 빚어졌던 갈등은 동화의 본질에 대한 사색으로 이어지다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불러오기도 하며 중국의 3대 현자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당나라의 화가 우다오쯔와 C.S.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체 게바라와 나병 환자, 프로이켄의 책 [북극 모험]에 실린 아타구타룩의 일화, 우물에 빠진 맥클루어라는 아이의 실화 등 풍성한 이야기를 불러온다. 여기에 저자가 겪은 유방암의 치유 과정이 덧입혀지면서 이야기는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진다. 


마치 한 걸음 한 걸음이 바느질의 한 땀 한 땀인 것처럼, 마치 내가 바늘이 되어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내가 지나가는 길을 따라 세상이 꿰매지고 있는 것 같은 상상. 다른 이들이 만들어 내는 길과 교차하기도 하면서, 비록 흔적을 찾기는 어렵지만 중요한 방식으로 그 모든 길이 누비이불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로 엮인다. 꾸불꾸불한 선이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하나로 합쳐 나가는 것이, 마치 그 걸음이 바느질이고, 바느질은 곧 이야기를 하는 과정이며, 그 이야기가 바로 당신의 삶인 것 같다.(p193)


저자가 풀어놓는 이야기들은 제각각 퀼트의 조각보처럼 다른 무늬와 색을 가지고 있지만, 솜씨 있게 꿰매어 놓아 하나의 의미 있는 그림을 가진 누비이불이 되어 읽는 이의 마음을 감싸준다. 언젠가 내가 살아왔던 이야기를 풀어 놓아야 한다면 나도 리베카 솔닛의 이 책처럼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에 치우쳐서 더 슬퍼하고 더 미워하고 더 분노하는 대신, 나와 나의 이야기 사이에 풍성한 사유를 끌어들여서 감정의 거리두기를 가능하게 하며 내 삶의 본질을 발견하게 해주는 글쓰기. 


셰에라자드가 풀어 놓은 이야기는 기대로 가득한 고치처럼 술탄을 감싸고, 결국 그 안에서 그는 조금은 덜 잔혹한 사람이 되어 나온다.( p14)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 책이 말하는 방식으로 ‘감정이입’을 이해한다는 것은 셰에라자드가 해주는 이야기처럼 우리 안의 술탄이 조금은 덜 난폭해지고 더 치유되어 나오게 하는 일이다. 멀고도 가까운 당신께 이 책을, 나는 마음을 다하여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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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후감]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덕후감 - 대중문화의 정치적 무의식 읽기
김성윤 지음 / 북인더갭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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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에 문강현준의 [감각의 제국]을 읽은 적이 있다. 이전에는 문화비평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저자의 인상 깊은 비평 때문에 이 책을 읽은 후로 문화비평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다. 문화비평서로 두번 째로 읽은 [덕후감]은 문화비평 중에서도 좀 더 세분화해서 ‘대중문화’ 비평에 초점을 맞춘다. 흥미롭게도 [감각의 제국]과 [덕후감] 둘다 2012년부터 ‘한겨레’에 기고했던 칼럼을 모은 책이다. [덕후감]은 거기에 다른 글들을 모아 테마를 6개로 압축해서 내용의 분량을 늘리고 더 깊이 있게 분석하고 다룬다. ‘덕후’가 ‘오타쿠’를 우리 식으로 달리 부르는 용어라는 것은 익히 알았기에 딱 봐도 덕후와 독후감을 합성한, 혹은 덕후의 감을 연상하게 하는 [덕후감]이라는 책의 제목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 충분했다. 


TV와 인터넷이라는 매체의 발달과 늘어나는 1인 가구수와 문화의 상업화와 세분화 등의 요인이 점점 더 많은 덕후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나도 한 가지면에서는 덕후라고 할 수 있지만 TV도 안 보고 대중가요도 듣지 않고 명품도 짝퉁도 어떤 유행도 관심이 없다. 그러니까 명품 가방 브랜드 구분할 줄도 모르고, EXO나 방탄소년단은 이름만 들어봤지 노래를 듣거나 얼굴도 모르고, 무한도전이나 개그콘서트, 비정삼회담도 본 적 없다는 말이다;;; 이런 내용을 책을 통해서 알고 책을 통해서만 관심을 가지는 나는 오직 책덕후라고나 할까…^^; 대중문화를 즐기거나 동참하지 않는 탓에 이 책이 다루는 내용에서 내가 공감을 할 수 있는 부분은 사실상 많지 않았다. 소시적에 연예인 잠깐 좋아했던 기억 조금, 사춘기 때 순정만화 보던 기억 조금,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글쓰기 위해 일본 애니메이션을 집중적으로 보던 기억 조금, 게임 회사에서 글쓰기 위해 게임 좀 해보던 기억들을 끌어모아 최대 경험치를 축적해서 이 책을 읽을 때 배경지식으로 이용했다. 그런데 막상 책을 읽을 때 중요한 건 덕후의 자질이나 밀접한 경험이 아니었다. 오히려 ‘거리두기’였다. 테리 이글턴의 문학 비평에도 그런 내용이 나온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비평할 때는 ‘감정이입’보다는 차라리 ‘동정’이라는 ‘거리두기’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려면 공감보다는 다른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이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덕후감]도 대중문화에 대한 거리두기가 분명한 책이다.


이 책에 다루는 내용에는 여러가지 대중문화적인 전문 용어(?)들이 많이 나온다. 멤놀, 일코, 때팬, 걸크러쉬 같은 용어는 이 책에서 처음 알았는데 1장의 ‘팬덤의 사회학’에 대거 몰려 있다. 6개의 장이 모두 대중문화의 이면과 속깊은 면면을 다루어줘서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주고 있지만 나는 특히 1장이 인상 깊었다. 팬픽이 불러온 긍정적 동성애 효과와 팬아트가 불러온 성적 시선의 구도와 권력 관계의 전복 현상, ‘멤버놀이’의 동일시 메커니즘, 여덕 혹은 걸크러쉬라 불리는 여자 아이돌을 향한 여성팬의 열광의 의미와 삼촌 팬이라는 복잡다단한 현상의 함의는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정치적 무의식이 대중문화 속에 얼마나 다층적으로 내재해 있는지를 가장 잘 보여준다고 여겨졌다.


이 책을 읽다보니 그간 내가 대중문화에 무심했던 이유가 대중문화에 숨겨진 사회적, 정치적 이슈를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는 문강형준과 김성윤이라는 멋진 문화비평가들을 만났다. 두 저자의 책을 읽음으로써 대중문화를 즐기더라도 함몰되지 않고 적절한 거리두기가 가능해짐은 물론 균형 잡힌 시각까지 갖출 수 있게 된 것 같다. 이런 멋진 문화비평가들이 더 많이 출현해주면 좋겠다. 점점 더 문화비평에 대한 관심이 커진다. 최근의 대중문화에 대한 덕후감도 서둘러 나와주길 기다려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한 사회에 모순이 있고 그 모순을 쉽사리 해결할 수 없을 때, 우리는 대중문화라는 거울을 통해 그 모순을 상상적, 상징적으로라도 해결하려고 하는데 이때 동원되는 게 정치적 무의식이라는 이야기다. 가요를 듣거나 영화를 보면서 위안을 받는다는 이야기도 사실은 거기서 현실을 파악할 프레임을 얻었거나 현실의 문제가 해결되는 쾌락을 맛봤다는 뜻일 것이다.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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